세계를 바꾼 아이디어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안정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표지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의 표지는 특이하게도 ISBN 바코드로 되어 있다. 북적북적이나 북플 앱으로 바코드를 검색하면 실제로 인식된다. 아마 책 도중에 제시되는 아이디어 중 하나인 '몇 개일까? - 수(數)가 실재라는 아이디어'(pp. 120-121.)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해당 페이지 도판도 실제 ISBN 코드이기도 하고.


이 책은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러 아이디어들이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추적하고, 각각의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힌다. 


어떤 아이디어는 손에 잡히는 결과를 만들어 냄으로써 직접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또 어떤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유형의 아이디어를 모두 다룬다. 각 아이디어에 대하여 필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영향을 남겼는지도 말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각 아이디어의 기원, 전후 배경, 성격, 그리고 결과를 하나의 텍스트 안에 담았다. - P6


이 책이 다루는 아이디어는 Idea 그 자체다. Idea는 한국어로 생각, 방안, 견해, 신념, 사고방식 등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다. 저자가 사용하는 Idea는 Idea가 의미하는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광의의 Idea로 보인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이 책이 말하는 Idea는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 인간이 특정 사물이나 행위를 바라보는 방식, 특정 행동을 수행하게 만드는 의도나 가치관, 세계관, 특정 행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화되는 믿음, 신념, 관념 등등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제일 먼저 '식인 행위'를 제시하여 선사 시대의 인류가 어떤 '의도'로 식인행위를 저질렀는지 추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난  종교, 사상, 과학적 아이디어를 다룬 후 마지막 페이지 '지구촌'에서는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사상'의 필요성을 제시하며 끝난다. 'Idea'라는 단어를 'Idea' 그대로 받아들이는 영어 사용자 입장에서 이 같은 시도는 흥미로울 것으로 보인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총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이 다루는 시간적 범위는 기원전 30000년전부터 기원후 2000년까지다. 


각각의 장은

1. 사냥꾼의 정신(기원전 30000~10000년 전)

2. 진흙탕에서 나와(기원전 10000년전~기원전 1000년)

3. 부처님 가라사대(기원전 1000년~기원 원년)

4. 생각하는 종교(기원 원년~기원후 1400년)

5. 미래로의 회귀(1400년~1800년)

6. 진보의 환상(1800년~1900년)

7. 불확실성의 시대(1900-2000년)으로 나뉜다.


각각의 장은 해당 시대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여타 역사책과 비교했을 때 시대 구분이 독특한데, 이 책은 고고학이나 인류학에서 다루는 선사시대에서 시작해 역사학에서 다루는 역사시대로 나아간다. 역사 시대 시대를 나누는 연도도 서양 역사서에서 주로 제시되는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 같은 시대 구분과 차이가 있다. 선사시대를 아우르려는 점에서 빅뱅 이래 우주의 역사까지 포함하고자 하는 '빅히스토리' 보다는 범위가 작지만 역사시대만 다루는 보통의 역사책들보는 그 범위가 넓다. 이 책이 다른 역사책들과 어떻게 다른지 저자 본인의 말을 들아본다면,


오늘날에 존재하는 중요한 아이디어 대부분은 그 기원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는 그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통상적인 관습을 버렸다. 많은 아이디어들은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인간의 마음속에 최초로 떠올랐다. 그런 아이디어들은 오로지 고고학적 연구와 드물게 나마 살아남은 예술 작품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재구성할 수 있다. 아이디어의 역사를 다룬 대부분의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다. 기껏해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중의 오해를 낳는다. 우선 그것은 서구 전통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하고, 다음으로 역사에서 가장 긴 시대를 배제한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들은 그리스 현자들의 아이디어에 도달하기 전에 책 전체 내용의 4분의 1이상을 지나온 것을 발견할 것이다. - P7


각각의 장에는 각 시대에 등장한 아이디어들이 제시된다. 2페이지에 걸쳐 하나의 아이디어를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아울러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의 아이디어를 한 눈에 보여주는 도판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본서에서 해당 아이디어와 관련이 있는 아이디어가 몇 페이지에 있는지 제시하여 아이디어끼리의 연계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영어 원서만 제시되긴 하지만) 해당 아이디어와 관련해 어떤 책을 읽어보면 좋을지 저자가 추천하는 참고 도서가 2~3권 가량 제시된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저자의 방대한 학식과 기존의 틀을 깨는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고고학, 인류학, 역사, 종교, 철학, 과학, 예술 등 경계를 넘나들면서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다양한 '아이디어'들의 기원과 변화를 추적한다. 이때 저자의 말처럼, 현재의 우리가 평소 당연하다 생각하는 많은 아이디어들은 사실 선사시대나 역사시대 초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5장에 배치되어야할 것 같지만 3장에 배치되어 있다.


덧붙이자면 저자가 되도록 '서구중심주의'를 탈피하고자 비유럽권의 아이디어들도 책에 담으려는 노력도 눈에 띈다. 가령 5장 미래로의 회귀에서는 중국의 '천명'이라는 아이디어를 다루고, 6장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이 서구화를 어떻게 수용했는가에 관해 지면을 할애하기도 한다. 몇몇 장은 글씨체를 바꾼다거나 책의 구성을 달리하는 식으로 해당 아이디어의 필요성을 체험하게 만드는 구성도 돋보인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다. 첫째로 가끔 오탈자가 있고, 타언어권 인물명을 영어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프리드리히 2세를 프레데릭 2세로 표기한다던가) 그리고 수록된 도판이 본문의 텍스트와 겹치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페이지도 있다. 다행히 읽는데 크게 지장은 없는 단점들이다.  


두 번째 단점은 저자도 인정하는 단점으로, 이 책의 아이디어들은 저자가 주관적으로 선택한 아이디어들이다. 읽는 독자에 따라서는 '왜 저자는 이 아이디어를 이 장에 수록하지 않았을까?' 혹은 '왜 저자는 이 아이디어를 이 장에 수록했을까?' 같은 의문을 자연히 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자본주의처럼 논쟁적인 개념이라면 더더욱.


나는 이 책이 나름대로 독특하고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책에도 한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이 아이디어들이 개인적으로 선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오로지 필자의 책임이다. - P7


간단히 마무리하자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행위와 생각들이 사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이디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마음속에서 먼저 일어난 역사, 즉 아이디어에 의하여 추진된 역사를 다룬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기록이 왜 변화로 가득한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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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는 책 목록을 보니 리뷰 써야할 책이 많다고 새삼 느꼈다. 언제 다 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리뷰 쓴 책과 지금 리뷰 쓰는 책만 짧게 돌이켜보기로 했다. 그래봐야 몇 권 안되지만.



먼저 리뷰를 쓴 책들.


3월부터 7월 중순까지 책을 읽기만 하고 리뷰는 손 놓았다. 재활 차원(?)에서 7월 말부터 8월 동안 리뷰들을 몇 편 썼다.



역자들이 수록한 분야별 참고도서 목록이 유용했다고 느낀 책이다. 아쉽게도 요즘은 구하기 힘든 책들이 많아서 도서관의 힘을 빌려야 하지만. 요즘은 이런 책이 안 나오는 건지, 내가 못 찾는 건지 잘 모르겠다. 후자였으면 좋겠다. 



간만에 각잡고 리뷰를 쓴 책이었다. 읽을 때도 재밌게 읽었다 보니 리뷰 쓰기도 쉬웠던 것 같다. 리뷰의 퀄리티와는 별개로.















과학책은 아무래도 낯설어서 그런가. 쓰다가 영어 얘기를 넣었더니 책과 너무 상관없는 내용을 쓰는 것 같아 쳐내버렸다. 결과적으로 책 내용 요약에 그치고 말았던 것 같다. 



리뷰를 쓸 때 정말 단숨에 써내려 간 책이었다. 저자들이 책을 쉽게 써서 그런가. 



다음은 리뷰를 쓰고 있는 책.



20여년 전 책이긴 하지만 저자의 접근 방식이나 관점이 지금봐도 독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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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음속에서 먼저 일어난 역사, 즉 아이디어에 의하여 추진된 역사를 다룬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기록이 왜 변화로 가득한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 P6

새로운 아이디어는 불안을 조장하며, 심지어 위험하기조차 하다. 이것들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좌절감을 야기하거나,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상상력은 분명 인류만의 재산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특출하게 풍부한 것은 맞는 것 같다. 필자는 대부분의 역사적 변화는 아이디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아이디어는 물질적인 위기, 경제적 필요, 환경상의 제약, 다른 모든 것들만큼이나 강력한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 P6

이 책은 일종의 카탈로그이다. 소위 지식인들이 경멸하는 장르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이 책에는 튼튼한 줄거리가 있다. 주제는 세계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아이디어들‘ 이다. 그리고 다양한 지역에서 태동한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포함시킴으로써 ‘서구중심주의‘ 를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 P7

오늘날에 존재하는 중요한 아이디어 대부분은 그 기원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는 그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통상적인 관습을 버렸다. 많은 아이디어들은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 인간의 마음속에 최초로 떠올랐다. 그런 아이디어들은 오로지 고고학적 연구와 드물게 나마 살아남은 예술 작품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재구성할 수 있다. 아이디어의 역사를 다룬 대부분의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다. 기껏해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이중의 오해를 낳는다. 우선 그것은 서구 전통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하고, 다음으로 역사에서 가장 긴 시대를 배제한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들은 그리스 현자들의 아이디어에 도달하기 전에 책 전체 내용의 4분의 1이상을 지나온 것을 발견할 것이다. - P7

나는 이 책이 나름대로 독특하고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책에도 한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이 아이디어들이 개인적으로 선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오로지 필자의 책임이다. 필자는 마음속에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책을 썼다. 우선 필자가 이해하는 아이디어들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사회적 운동이나 발명, 발견, 정신세계 밖에서 일어난 일은 포함시키지 않고 인류, 우주, 초월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아이디어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아예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하나의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면 포함시켜야 할 아이디어들의 목록은 끝이 없다. 예를 들면,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위대한 기술적 혁신과 발명을 포함시키고 싶은 유혹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발명이다. 그리고 발명에는 또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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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하루 수케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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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가 마음에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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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크 캐스터.사이먼 정 지음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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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여러 종류의 책이 있다. 그중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담고 있는 내용의 가치가 높아지는 책이 있는 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의 가치가 퇴색하고 마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아쉽게도 후자에 가깝다. 저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단지 이 책이 2012년에 나왔기 때문에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은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심의한 31가지 역사적 재판을 다룬다. 각각의 판결은 크게 다음의 테마들로 구분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 종교, 사상, 양심 /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 대통령 대 연방대법원 / 비즈니스 / 긴급판결. 이중 단 하나의 판결만 다루는 긴급판결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테마들은 대체로 5~8가지 판결을 다룬다.


각각의 개별 판결은 판결이 시작된 배경을 다루는 '프롤로그', 대법원의 판결을 요약정리한 '판결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 판결 이후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에필로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판결이 만장일치로 나왔을 경우, 반대의견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이나 고레마츠 대 정부 판결에서는 반대의견이 판결문보다 더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독자는 첫째로 해당 판결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고, 둘째로 판결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셋째로 해당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을 확인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판결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가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는 법률 문제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맞추어 읽기 쉽게 풀어 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가령, 나 자신의 사례를 들자면, 작년에 번복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그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해당 판결이 나오게 된 배경이나 전개 과정, 판결 이후의 영향 등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 책을 통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 제인 로라는 이름을 내세워 실제 소송을 걸었던 인물은 누구였으며, 판결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개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각각의 판결을 전부 다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31가지의 다양한 판결들을 보면 시대상의 변화를 잘 체감할 수 있다. 예컨대 1856년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과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시 교육위원회의 판결을 비교해보자. 책에서 두 사건은 연이어 배치되어 있고, 두 사건 사이에는 98년의 격차가 있다.


먼저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을 보자. 판결부터 정신이 아득해진다. 여러 내용 언급할 필요 없이 핵심은 간단하다. "흑인 노예는 인간이 아니다" 실제로 이 판결은 대법원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회자되며, '스콧 대 샌포드 판결 이래 최악의 ...' 같은 수식어구로 자주 활용된다. 


이어서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시 교육위원회 판결이다. 이 판결은 인종 격리정책에 관한 판결이다.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 이후 98년이 지난 후 미국 연방대법원은 "격리는 곧 차별이다" 라는 판결을 내렸다. 거의 1세기 걸려 이룬 진보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판결 중 코레마츠 대 정부의 판결도 충분히 놀랍다고 할만하다. 정부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본계 미국인(그것도 미국 시민)의 권리 제한을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도 연방대법원 역사상 수치스러운 판결로 남았다. 


여기서 다시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로 돌아가 조금 다르게 보자.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는 트럼프 시대 이래 좌우가 극단적으로 갈려 소위 '문화 전쟁'을 겪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분열은 19세기에도 있었고, 그때는 원인이 노예제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분열성과 극단성은 21세기 들어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시점부터 존재했고, 각종 제도적 장치로 그동안 억눌러오긴 했지만 간간히 터진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세계사에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이 역시 달리 볼 여지가 있다. 규모상 미국 보다 한참 더 작은 나라들에서조차 민족 갈등이나 종교 갈등과 같이 여러 요인에서 기인하는 갈등과 충돌이 빚어지고, 가끔 내전으로 번지거나 국가가 분열되는 경우로도 이어진다. 교과서에 이름이 나온 제국이나 왕국(그리고 공화국)치고 반란과 내전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미국은 공공연하게 '제국'으로 불리고 연구될 정도로(제국으로서의 미국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다니엘 임머바르가 지은 『미국, 제국의 연대기』(2020)를 추천한다) 거대한 국가이다. 5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종도 다양하고 매일 새로운 이민자가 유입되는 나라다. 매일 뉴스만 보면 인종 관련 이슈가 빠지는 날이 없음에도, 미국이 국내 갈등을 법적 절차에 따라 수습하고 봉합하면서 국가적 분열을 어떻게든 차단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워 보일 정도다.


한편 1969년 브랜든버그 대 오하이오 판결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아이러니가 집약된 KKK단과 관련이 있다. 브랜든버그 대 오하이오 판결은 판결 당시에는 인종주의적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보장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다. 대법원은 "폭력 행위에 대한 옹호와 실행은 구별되어야 마땅하다"는 판결을 내리며 KKK단 지도자 브랜든버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관은 언론의 자유에는 예외가 없어야한다는 보충의견도 내놓았다. 요컨대 KKK단 단원이 "모든 유색 인종, 유태인, 가톨릭 신자들은 미국땅을 떠나라"(p. 187)고 울부짖을 권리는 있다는 것이다(해당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해당 판결은 각종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지금 시대에 '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아야하는가?'라는 문제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판결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KKK단이다. KKK단의 근거지는 주로 남부였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기 당시를 다룬 20세기 초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바로 이 KKK단의 창설 과정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역사가 펼쳐지는 데, 한때 KKK단의 후견인 역할을 한 미국 민주당이 21세기 현재에는 진보적 어젠다를 내세우며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되었다. 반대로 19세기 중반 노예제 해방에 앞장선 공화당은 현재 보수 정당이 되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흥미로운 판결들이 많다. 20세기 후반의 판결들을 보고 있으면 지금 한국 사회가 겪은 많은 문제들에도 참고가 될만한 판결들도 많다. 직장 성희롱 문제를 다룬 1998년 벌링턴 산업 대 앨러스 판결, 예술과 외설의 기준이 문제가 된 1973년 캘리포니아 대 밀러 판결,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둘러싼 1967년 케이시안 대 뉴욕 조립대 이사회 판결 등, 현대 사회의 여러 쟁점들에 참고가 될만한 판결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문제를 꼽자면 이 책 자체가 지닌 한계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되었고 2012년까지의 판결만을 수록하고 있다. 2023년 지금 시점에서 몇몇 판결은 뒤집혔다. 대표적으로 2003년 그루터 대 볼링저 판결은 2023년 현재 대법원에서 적극적 우대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뒤집혔다. (2003년 당시 반대의견을 낸 대법원장 토마스 클래런스도 이에 관여했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 역시 작년에 뒤집히면서 미국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 


부연설명 해보자면, 전자의 경우, 어떻게 보면 이미 예견된 결과일 수 있다. 2003년 시점에서 이미 대법원 측에서 적극적 우대조치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당장 판결문에서부터 "지금부터 25년 후 쯤이면 입학 심사에서 소수 인종의 선호는 그 필요성이 없어지리라 본다"(p. 257)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25년 후에 일어날 일이 20년 후에 일어났을 뿐이다.(그만큼 미국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그렇기에 인종을 초월해 미국 여성 전반과 관련된 문제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에 비해 그 파급력이 세보이지 않는다. 한편, 여성의 낙태권과 관련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은, 작년 중간 선거에서 인플레이션 덕분에 한창 기세가 오른 공화당의 이른바 '레드 웨이브'가 별거 아니게 보일 만들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이처럼 과거의 판결이 뒤집히는 사례들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역사의 진보로, 어떤 이에게는 역사의 퇴보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2020년대 들어 뒤집힌 두 건의 판례(로 대 웨이드, 그루터 대 볼링저)를 보자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 역시 미국 사회의 제도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연방 대법원의 판결 자체가 미국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제가 아니라, 문제를 임시 봉합하는 미봉책이 아닌가 한다.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 각자의 삶의 여정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어느 사회나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미국 대법원에서 동성결혼은 합헌이라 판결내린다고 미국 내의 동성결혼 반대자들이 하루 아침에 그동안 고수한 가치관을 버리고 전향할까?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동성결혼 지지율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개개인 각자의 신념이 하루 아침에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판결을 보고 있으면 사법부의 권위로 사회의 갈등을 잠시 억누르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법원이라는 중재 수단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법원이 없었다면 미국의 모습은 지금과 너무 딴판일 것이다.


이 책이 법률 문제를 다루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미국 사회도, 미국 사회의 연방대법원도 구성원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에 맞춰 법률도 계속 재해석되며 판결도 달라진다. 때문에 새로운 판결이 나오거나 기존의 판결이 뒤집힌다면 그에 맞춰 내용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번 인쇄되면 수정할 수 없는 책이라는 매체로는 그 같은 변화를 반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위키백과가 훌륭한 보완수단이 될 수 있다. 영어가 된다면 영문 위키에서 List of landmark court decisions in the United States 문서를 통해 이 책이 다루지 않거나, 이 책 이후의 이루어진 중요 판결에 관한 내용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연방 대법관에 대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기대는 그 호칭 자체에서 잘 나타난다. 미국에서 정의가 이루졌다Justice has been served는 표현은 악당을 처치하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 속의 히어로가 아니라 실은 재판의 결과를 일컫는다. 즉 적절한 법률적 절차(재판)를 거쳐 나온 공정한 판결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법관을 일컫는 호칭이 정의Justice 자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고 보니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들은 영화 스타워즈에서처럼 멋진 망토를 입고 광선검을 휘날리며 우주 공간을 누비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 D.C. 1번가에서 검은 법복을 입고 앉아 말words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 P22

그러나 대법관들이 항상 순도 100%의 공명정대한 판결, 즉 모두가 이견 없이 인정하는 정의를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연방대법원의 기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예들은 헌법을 통해 연방대법원의 설립을 구상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 즉 삼권분립을 통한 정부 기관들의 상호견제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한 반증일 뿐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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