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코너스가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라는 축복이자 저주와 씨름할 때, 그는 철학의 주요 주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이 도덕적 행위인가?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가? - P364

깊은 밤 한 악마가 찾아와 네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반복해서 수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그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기쁨과 생각과 한숨, 네 인생의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 온다. 이 거미도,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이 순간도, 나 자신도 전부 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끝없이 다시 뒤집힐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모래알 중 하나인 너 자신도!" - P369

니체는 이 생각에 영원회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생각은 니체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 P369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 P372

니체가 보기에 춤추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목표를 향한다. 바로 삶의 찬미다. 니체는 그 무엇도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세상을 바라보기를, 자기 힘으로,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기를 원할 뿐이다. - P378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니체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나 소설가의 진실을 보여준다. ‘마치 그런 것처럼‘ 접근법이다. 마치 눈에 보이는 표면 아래에 실재의 다른 차원, 예지체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라. 마치 인생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삶을 살아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너의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가? 좋다. 그렇다면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을 다른 식으로 (그것이 허리를 굽혀서 다리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던 소로처럼 ‘부정확‘한 방식일지라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 P378

영원회귀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전부냐 전무냐, 둘 중 하나다. 인생이 하나의 패키지다. 당신의 삶은 정확히 똑같이 반복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편집은 불가능하다. 모든 결함과 지루한 대화가 그대로 들어 있는 이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 P381

완전 쇼펜하우어처럼 되어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결론 내릴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하지만 니체는 힘들고 너무 짧았던 자기 삶의 끝을 향해 다가가면서 인생 전체에 감사한다고 공표하고 쾌활한 다 카포!를 덧붙인다. 다시 한번. - P384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나는 니체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안다. 성공의 모습은 자기 운명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공의 모습은 시시포스의 행복이다. - P386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삶(외부인의 관점에서는 전과 똑같은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이를 갈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셔야 할 일이 아닌 축하할 일이 된다. - P388

이 베를린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스토아철학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스토아철학의 핵심 교리(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는 격동의 시기에 더욱 매력을 뽐낸다. - P399

스토아학파는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다.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지도, 안으로는 벌벌 떨면서 겉으로만 용감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이들은 모든 감정을 다 내던지지 않는다. 불안, 두려움, 질투, 분노, 그 밖의 다른 ‘정념‘처럼 오직 부정적인 감정만 내던진다(정념이라는 의미의 pathe는 ‘감정’과 가장 가까운 고대 그리스어 단어다). - P401

스토아학파는 이기적이지 않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다. 감상벽이나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손가락이 손을 돕듯이 그렇게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돕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불편, 심지어 고통까지도 기꺼이 감내한다. - P402

대부분이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본인의 성공과 자식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 P404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므로 스토아철학은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 P404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감정적 삶이다. - P407

최초 정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동의해보라고 에픽테토스는 제안한다. 정념에 다른 이름을 붙여라.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고독에 평온함이라는 이름을 붙여라.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에 가면 그 상황에 축제라는 이름을 붙이고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여라." 정신승리라고? 물론 그렇지만, 이건 도움이 되는 정신승리다. 어차피 우리의 정신은 늘 현실에 농간을 부린다. 그런 농간을 잘 활용하면 좋지 않겠는가? - P412

스토아철학은 미래의 고난을 상상하는 것은 미래의 고난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걱정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다. 하지만 고난을 예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며, 더 구체적일수록 좋다. - P417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우주는 내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는 직접 연출을 하고 싶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연기자다.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내가 나이팅게일이라면 나는 나이팅게일의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 내가 백조라면 백조의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 P419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혼동한다. 스토아철학은 헷갈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빌릴 뿐, 절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잃어버릴 것이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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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나곤은 한 길에만 머무르길 거부한다. 그녀는 "세련되고 우아한 것들"에서 "가치 없는 것들"로 방향을 꺾었다가 다시 "진정으로 훌륭한 것들"로 돌아온다. 쇼나곤이 길을 잃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쇼나곤은 "붓 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의 즈이히츠隨筆를 하고 있다. 즈이히츠는 일본의 글쓰기 기법 아닌 글쓰기 기법으로, 내 눈엔 책이 아닌 책을 쓰기에 완벽한 방식으로 보인다. 즈이히츠를 실천하는 작가는 주제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 지적 가려움을 긁은 다음,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글에 구조를 부여한다기보다는 구조가 스스로 나타나게 한다. - P336

나는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즈이히츠를 활용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자기계발서들은 조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지를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움직일 것. 지금 있는 곳에 - P336

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 일단 붓을 들고 붓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볼 것.
쇼나곤은 세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상을 묘사한다. 중립적인 관찰은 없다. 쇼나곤은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안다. 쇼나곤은 몇 세기 후 니체가 발전시킨 철학 이론인 관점주의를 따른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쇼나곤은 말한다. 너만의 것으로 만들어. - P337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 P337

모든 것은 딱 좋거나 완전 글렀거나 둘 중 하나다. 1센티미터 삐끗하는 것은 1킬로미터 삐끗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P339

쇼나곤이 진정한 기쁨이라 선언하는 것은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알맞아야 한다. 분위기와 계절에 어울려야 한다. 본질에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름은 극도로 더울 때가 최고이며, 겨울은 지독히 추울 때가 최고다." - P339

쇼나곤은 우리에게 세상을,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 좀 봐. 정말 놀랍지 않니? 너무 작고 너무 아름다워. 만약 니체의 말처럼 철학자의 일이 "삶을 더욱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쇼나곤은 철학자다. 쇼나곤의 글을 몇 시간 읽고 나면 색채가 더욱 선명해 보이고 음식은 더 맛있어진다.
쇼나곤의 철학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는 선택이다. 철학은 우리가 내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깨닫는 것은 더 나은 선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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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원론적 문화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어떤 생각이나 사람들을 스펙트럼의 정반대 양쪽 끝에 나누어 놓고 식별하는 이분법적이고 계층화된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 P325

우리는 타자를 적으로 보고 오만하게 우리만 ‘옳다‘거나 신은 우리 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만들어낸 대립과 비판과 판단을 합리화한다.
양극화(polarization)라는 이 방식은, 지금껏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강한 존재가 될 수 있게 보호하는 반면에 다른 쪽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지하고 약한 상태로 두었다. 자기가 경멸하는 세계관이나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국수주의를 허용해 왔다. - P326

인간의 오만은 우리 모두가 생명의 연속체 속에서 공존하며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 P325

가부장적 관계에서는 종교적 차원이건, 정치적 차원이건, 개인적 차원이건 오직 한 사람만이 최고의 지위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다. 지배적인 인물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파트너를 한 단계 낮은 위치에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은 지배자의 위치에 있기를 기대하고 다른 사람은 지배받기를 기대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창출한다. 이런 배합의 유형을 구체적 사물로 비유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일 때는 시소와 같고 셋 이상의 관계일 때는 피라미드와 같다. - P330

인류 역사에 협력 관계가 중심인 사회들이 존재한 시기가 많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생명을 잉태하고 보살피는 신성성의 양상이 일상적 삶의 한 부분으로 숭배되었고, 종교적이거나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데에 성차별이 없었다. 서유럽의 구석기 시대 동굴과 차탈회위크와 하실라르의 무덤뿐만 아니라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영지주의 기독교, 초기 켈트족, 아메리카 원주민들, 발리섬의 원주민들, 그밖에 많은 곳에서 이런 사회가 존재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336

우리는 지금 함께 여행하는 순례자들이다. 모든 생명의 존엄성—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을 존중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행 중이다. 그 안에 우리의 영웅적 힘이 있다. - P346

낡은 이야기는 끝났다. 영웅적 탐색의 신화는 진화의 나선 위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일시적인 명예에 불과한 직함이나 성취, 갈채, 부의 추구 같은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한 탐색은 더는 타당하지 않다. 그 엉뚱한 탐색은 여성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어머니 대지에 너무 비싼 통행세를 치르게 했다.
오늘날 여성 영웅은 자신을 과거에 묶어놓았던 자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기 위한 분별의 칼을 들어야 한다. 어머니를 향한 분노를 놓아버리고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우상화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한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할 용기를 찾아야 한다. 그녀의 그림자는 이름 지어주고 껴안아줘야 할 바로 자신의 것이다. 여성은 자신 안의 이 어둡고 그림자 진 공간에 명상, 미술, 시, 연극, 의식, 관계 맺기, 흙을 만지는 일을 함으로써 빛을 비춘다. - P347

오늘날의 여성 영웅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녀 자신의 내면에서 은과 금을 캐내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내면의 ‘가슴을 가진 남성‘과 긍정적인 관계를 발달시키고 신성한 여성성과 소원해진 자신을 치유하도록 내면의 지혜로운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녀가 정신뿐만 아니라 몸과 영혼도 존중할 때 비로소 자신과 문화의 분리, 그리고 자신 안의 내적 분리가 치유된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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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에게 인만큼 중요한 단어는 없었다. 인은 《논어》에 105번 등장하는데, 그 어떤 단어보다 많은 횟수다. 이 단어의 정확한 번역어는 존재하지 않으며(공자 자신도 이 단어를 정확히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동안 연민, 이타주의, 사랑, 어짐, 진정한 선, 온전한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은 ‘인간다운 마음‘이다.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공경과 아량, 신의, 민첩함, 친절이라는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을 항상 실천한다. 물론 공자가 친절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공자는 친절을 개인이 원할 때 베푸는 것에서 철학의 핵심 개념이자 훌륭한 통치의 근간으로 한 단계 승격시켰다. 공자는 친절과 사랑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려놓은 첫 번째 철학자였다.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보다 약 500년 일찍 황금률을 제시했다. 공자에게 친절은 무른 마음이 아니다. 약함도 아니다. 친절은 실용적인 덕목이다. 공자의 한 추종자는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면 "손바닥 위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 P311

가족은 우리가 인을 계발하는 헬스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서로 간의 거리는 중요한 요소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서 시작하라. 우리가 자기 자신에서 가족으로, 이웃으로, 국가로, 모든 지각 있는 존재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할 때 친절은 연못에 던진 돌멩이처럼 점점 커다란 원을 만들며 퍼져 나간다. 한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으면 모든 생명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 - P314

공자의 ‘공부‘는 기계적 암기를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배움 그 자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공자에겐 더 깊은 뜻이 있다. 바로 도덕적 자기 수양이다. - P319

친절은 힘든 것이다. 친절에는 감정 이입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으로는 충분치 않다. 유교 의례가 필요하다. 결혼과 졸업, 죽음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의식을 치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너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의례는 우리를 하나로 모아준다. 의례는 우리의 감정을 담을 그릇을 제공한다. - P324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친절은 힘든 것이다.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 P325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인과 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는 그 그릇이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예다. 이런 예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공자는 말한다. 그래도 마치 예의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라. 마치 예의가 중요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식사를 하라. 이런 의례가 따분하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공자의 목표는 인성 개발, 즉 도덕적 역량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효도만큼 중요한 역량은 없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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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창조적인 여성성과 분리되었다. 우리가 직관과 감정과 우리 몸의 심오한 앎을 거부하면 우리의 이성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평가 절하한다. "에로스보다 로고스의 영역으로, 우뇌보다 좌뇌의 영역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여성성, 여신, 성배라 부를 수 있는,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어떤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소외감이 더 커졌다." 우리는 소외되었다는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 감정이 우리 본성 내부의 불균형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 P298

남성성은 원형적 힘이다.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성처럼 모든 여성과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적인 힘이다. 남성성은 균형을 잃거나 삶과 유리될 때 전투적이거나 비판적이거나 파괴적으로 변한다. 이렇게 삶에서 유리된 원형적 남성은 차갑고 비인간적일 수 있으며,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 남자다움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저 전진하라고 말한다. 완벽과 통제와 지배를 요구한다. 어떤 것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남성적 본성은 어부 왕처럼 상처를 입었다. - P298

성배는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신성하고 창조적인 여성적 원리의 상징이다. - P298

파르시팔과 어부 왕처럼 우리도 우리 안의 성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의식을 확장해야 한다. 상처 입고, 메마르고, 부서지기 쉽고, 지나치게 힘이 세진 남성성을 치유하려면 촉촉하고, 싱싱하고, 자상한 여성성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황무지에서 살게 된다. 파르시팔은 성배의 성에서 성배를 경험했고 상처 입은 어부 왕을 만났다. 하지만 "무엇이 그대를 아프게 합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 싶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각자 안에서 통제 불가능한, 단절된 남성적 요소는 우리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균형을 잃게끔 몰아댄다. - P299

여성이 자기 내면의 이러한 불균형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 세계의 빛을 암흑 세계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 안의 실체 없는 폭군을 대면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최면에 걸린 듯한 수동적인 삶과 경제적 이득과 자아 권력을 향한 분별없는 애착을 의식적으로 버려야 한다. 용기와 연민과 겸손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 P303

여성 영웅의 도전은 정복을 위한 도전이 아니라, 스스로 제어 - P303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군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름 없고 사랑받지 못한 부분을 수용하기 위한 도전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내면에서 서로 충돌하는 부분들을 모두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용이 있다. - P304

여성 영웅은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대로 숨쉬면서 우리 모두에게 지 - P320

식을 불어넣어 우리를 치유한다. 여성 영웅은 양쪽 세계의 여왕이 된다. 그녀는 일상이라는 삶의 바다를 항해하며 심오한 가르침에 귀 기울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여왕이면서 동시에 지하 세계의 여왕이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서 지혜를 얻었다. 더는 다른 쪽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바로 그 다른 쪽이다. 여성 영웅은 세상과 지혜를 나누려고 자신이 얻은 지혜를 되가져 온다. 그녀의 경험이 세상의 여성들, 남성들, 아이들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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