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우리 영혼의 본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우리는 돈독하게 결속되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소속감과 공동체를 갈망한다. 우리 문화가 잃어버린 여성성의 긍정적인 특질, 즉 강인하고 잘 보살피는 특질을 열망한다. "개인 또는 사회가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거나 인간 경험의 깊이와 진실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질 때, 진실을 회복하기 위한 어떤 움직임이 내면에서 꿈틀거린다. 기존의 틀을 깨뜨리면 순식간에 일상의 현실이 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삶이 자유로워지고, 자기 치유와 더불어 내적 통과의례라는 심오한 영적 작용이 활성화된다." 우리는 강하고 힘 있는 어머니를 갈망한다. - P256

현실의 어머니가 자상하게 보살펴주는 어머니이건 냉정한 어머니이건, 아이에게 자율을 주건 조종하건, 곁에 있어주건 방치하건 간에 어머니와 내적으로 맺은 관계는 어머니 콤플렉스(mother complex)로 남아 우리의 정신에 흡수된다. - P260

우리의 집단 심리는 ‘어머니‘의 힘을 두려워하고 폄하한다. 또 그 힘을 파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어머니의 양육을 당연하게 여긴다. 기회가 되는 대로 어머니를 이용하고 학대하고 지배한다. - P262

교회는 신의 여성적 이미지를 파괴하고 남성 신들을 위해 여신의 힘을 찬탈하면서 오랜 세월 신의 여성적 얼굴을 지하로 밀어 넣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가 여성성을 잊어버리도록 온갖 짓을 다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여성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탐욕, 지배, 무지의 신들을 숭배하고 돌봄, 균형, 관용의 여성적 이미지를 조롱한다. 우리는 훼손하고 약탈하고 파괴하면서도 대지가 우리에게 끝없이 베풀어주기를 기대한다. 이 모녀 분리의 상처는 깊다. 이를 치유하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 P262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경험한 여성들은 종종 평범한 경험 속에서 치유를 얻는다. 많은 이들이 신성한 일상에서 치유를 받는다. 설거지이든 화장실 청소든 정원에서 잡초 뽑기든 모든 일상의 행위에서 신성함을 보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을 평범한 일상에 내려놓으면서 보살핌을 받고 치유된다. 내면의 여성성을 회복하는 이 기간에 여성이 헤스티아 여신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내면의 현명한 여성‘을 발견하는 일은 아주 흔하다. - P269

헤스티아 여신은 따뜻한 마음, 안전, 인간관계 같은 가치들과 관련이 있다. 가족이나 조직에서 헤스티아는 세세한 부분까지 보살피고 모든 사람이 각자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아는 사람, 촘촘하게 관계의 그물망을 엮는 ‘거미‘ 같은 사람이다. - P269

신화 만들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신화는 삶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 필요하다. 마크 쇼러(Mark Schorer)는 시의 맥락에서 신화의 개념을 논하면서 이렇게 썼다. "신화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할 때 쓰는 도구이다. 신화는 평범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실들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거대하고 지배적인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 신화는 경험을 체계화한다는 데 가치가 있다. (집합적 의미의) 신화란 그러한 이미지들이 어느 정도 분명하게 구체화된 것, 판테온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없다면 경험은 그저 혼란스럽고 파편적이며 일회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 P274

여성들이 꾸는 꿈은 어둠에 관한 것이고 삶과 죽음의 가혹한 현실을 대면할 필요에 관한 것이며, 격변과 고통과 정신 이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속에서 자신을 보살펴주고 새로이 창조해주는 거대하고 강한, 피부가 검은 여성을 만난다. - P280

동화는 대개 어린 소녀(또는 소년)의 관점에서 그녀가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부모, 형제자매, 마법적인 존재들과 그녀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동화 속 소녀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거나 못되게 굴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여정에서 겪는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떻게 성공이나 화해의 열매를 얻는지 듣게 된다.
동화 속에서 계모, 마녀, 미친 여자는 성장하는 아이들 앞에 장애물을 놓는 인물이면서 비열하고 몰인정한 데다가 아이를 굶기고 조종하고 시기하는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된다. 그들의 사악한 행위는 대개 죽음으로써 벌을 받는다. - P283

동화는 계모나 사악한 마녀가 잔인해진 원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는 그저 그들은 원래부터 그랬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아이, 징징거리고 말 안 듣고 영악한 아이에 관해 그녀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사악한 계모는 ‘완벽한 엄마‘를 갖지 못해 실망한 아이들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이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엄마‘란 항상 집에 있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이해해주고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이웃집 엄마‘의 환상에 불과하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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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의 당부는 더 단순하지만 결코 더 쉽진 않다. 베유는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아무 관심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베유가 생각한 관심은 그동안 내가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르다. - P220

관심은 중요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 관심은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금 당장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것만이 우리 앞에 존재한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사실이다. 많은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한다.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기억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가? 어쩌면 결혼식처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우체국의 말도 안 되게 긴 줄에서 뒤에 선 사람과 나눈 뜻밖의 다정한 대화처럼 작은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순간일 확률이 높다.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 P222

베유의 급진적 공감 능력은 관심에 대한 베유의 급진적 견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베유는 관심을 어떤 수단이나 기법으로 보지 않았다. 베유에게 관심은 용기나 정의와 다르지 않은, 똑같이 사심 없는 동기가 요구되는 미덕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더 훌륭한 노동자나 부모가 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지 말것.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에서 관심을 기울일 것.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베유는말한다.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타인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을 때에만 우리는 이 "가장 희소하고 순수한 형태의 너그러움"을 베풀게 된다. - P227

결국 관심은 우리가 주어야 하는 전부다. 돈이나 칭찬, 조언을 포함한 나머지는 불충분한 대체재다. 시간도 불충분한 것은 마찬가지다. - P228

베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짧은 질문 한마디가 마음을 녹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신가요?" - P228

진정한 관심이라면 그저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인정하고 공경해야 한다. - P229

베유는 진정한 관심이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믿었다. 베유에게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관심의 반대말은 산만함이 아니라 조급함이다. - P234

베유는 내가 예루살렘에서 드러낸 일종의 계산적 조급함 외에 다른 종류의 조급함도 경계했다. 불안에서 나오는 지적 조급함이다. 지적 조급함은 물에 빠진 사람이 칼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처럼 나쁜 아이디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베유는 우리의 모든 실수가 "생각이 아이디어를 너무 성급하게 붙잡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일찍 차단되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 P238

모든 부주의는 이기심의 한 형태다. 우리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머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더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들이 그토록 부주의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억눌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관심은 우리 삶의 피다. 피는 잘 돌아야 한다. 관심을 썩히는 것은 곧 삶을 죽이는 것이다. - P239

나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욕망은 관심과 양립할 수 없다. 무언가를 욕망하는것은 곧 거기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뜻인데, 바로 그 상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제인 것은 그 주체, 즉 ‘나‘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환상이다. 헤로인 중독자는 헤로인을 갈망하지 않는다. 헤로인을 하는 경험,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헤로인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 즉 아타락시아다. - P252

베유가 말을 이어나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오로지 간접적인 방법만이 효과가 있다. 우선 한발짝 물러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P253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 P255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더욱 기꺼이, 더욱 끈기 있게. 기다림은 그 자체가 보상이므로.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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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하강을 하고 가부장제의 정신적인 딸이라는 정체성을 끊어버릴 때, 그 대상이 여신이든 어머니는 내면의 어린아이든지 간에 다시 여성성과 연결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생긴다. 영웅적 탐색을 하는 동안 지하 세계로 내려가버린 자신의 육체, 정서, 영혼, 창조적 지혜 같은 측면을 발달시키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아버지의 미성숙한 부분들과 맺은 관계에서 자신의 진정한 여성적 본능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20

역사적으로 육체와 영혼의 연결은 지모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파괴되었다. ‘어머니 대지‘가 대대적인 파괴의 위협을 느끼는 지금에 와서야 관계가 회복되고 있다. 인류가 대지의 신성함을 잊고 숲이나 언덕이 아닌 교회나 성당에서 신에게 예배하기 시작했을 때 자연과 맺은 신성한 ‘나와 너(I-Thou)‘의 관계는 잊혀졌다. 우리는 어머니 대지의 모든 종(種)과 서로 연결된 대지의 자손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 나무, 바위, 대양, 짐승, 조류, 아이들, 남자, 여자로 구현된 신성함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자연의 성스러움을 무시하는 것이 육체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 P221

하강을 끝내고 돌아올 때 여성은 자신의 몸을 되찾는다. 그 결과로 그녀는 자신의 건강한 몸 상태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여성성의 신성함을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한다. 그녀는 이 표현의 필요성을 분명히 의식하기 시작한다. 의식적인 영양 섭취, 운동, 목욕, 휴식, 치유, 섹스, 출산, 죽음을 거치며 그녀는 우리에게 여성성의 신성함을 일깨워준다. - P230

여성 영웅의 여정에서 가장 큰 도전은 자신이 여성성과 분리되어 있다는 데서 깊은 슬픔을 느끼는 것과 어떤 식이든 자신에게 적당한 방식으로 이 상실에 이름을 붙이고 애도하는 것, 그런 다음에 그 슬픔을 발산하고 나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 P236

다. 여성 영웅이 슬픔과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그러한 감정을 표출하는 동안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어머니나 자매 같은 인물—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여성성의 지지가 필요하다. 슬픔의 강도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제대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고 느끼는지 그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녀가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는 데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해야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 P237

하강을 한 여성은 여성성의 탐욕스러운 파괴자 양상을 경험한다. ‘지상의‘ 삶에서 분리된 이 기간 중에 자신이 쓸모없다거나 자기 삶이 메말라버린 느낌을 경험하고 나서 여성은 창조적인 여성성의 촉촉하고 푸르고 물기 많은 측면을 갈망한다. 자신의 여성성과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여성은 창조성이 솟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때 천천히 자기 정체성을 되찾기 시작할 것이다. 정원에서, 주방에서, 집을 꾸미면서, 인간관계 속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춤을 추면서 재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여성의 심미적이고 관능적인 감각은 색깔, 냄새, 맛, 촉각, 소리로 새로운 활력을 얻으면서 되살아날 것이다. - P245

여성성은 어떤 일이든 만물의 자연스런 순환 속에서 일어나고 흘러가도록 둔다는 특징이 있다. 깊은 무의식 차원에서 치유나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고요함과 재생의 단계가 있다는 것과 이 단계들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 누구도 탄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발현의 신비를 믿는 것이 여성성의 여 - P248

정이 주는 심오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 P249

존재함은 자신을 증명하려고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머무르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P249

여성들은 자신의 자궁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허락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있는 그대 - P250

로 존재하는 것을 지지하고 존중한다면 여성들은 지혜를 낳을 것이다. 우리의 행성인 가이아 여신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과 긍정적이고 원만한 관계를 맺도록 정신을 집중해서 존재함의 지혜를 발휘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해 온 행위가 엄청난 환경 파괴를 불러 왔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삶에서 영웅과 여성 영웅을 재정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영웅적 탐색은 권력, 정복, 지배에 관한 탐색이 아니다. 영웅적 탐색은 우리 본성의 여성성과 남성성 두 측면의 결합을 통해 우리 삶에 균형을 가져오는 일이다. 현대의 여성 영웅은 자신의 개인적 힘, 즉 느끼고 치유하고 창조하고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인 여성적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대면해야 한다. 여성 영웅은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지혜를 가져다준다. 그녀는 이 지구라는 그릇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우리의 삶에서 여성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여성 영웅을 그리워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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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시기는 치료 용도의 철학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헬레니즘 시대라고 불리는 그 시기에 사람들은 오늘날 배우자나 통신사를 고를 때처럼 열정적이고 신중하게 철학 학파를 골랐다. 리스크는 컸다. 프린스턴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었다. 자기 성격을, 그러므로 자기 운명을 형성할 일생일대의 선택을 내리는 것이었다. - P195

먼저 그는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왜 관심이 있겠는가? 신으로 사느라 너무나도 바쁜데. 에피쿠로스에게 신은 유명인사와 비슷했다. 그들은 걱정도 없고 늘 원하는 자리를 예약할 수 있는 부러운 삶을 살아간다.
죽음에 관해서 에피쿠로스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말한다. 물론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고통에는 본질적으로 끝이 있다. 그 고통은 평생 지속되지 않는다. 고통이 가라앉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두려워할 것은 없다. - P196

진정해. 에피쿠로스가 말한다. 그리고 즐기라고. 그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인 쾌락을 옹호했다. 그리고 도발적으로 덧붙였다. "만약 내게서 맛의 쾌락을 빼앗는다면, 성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듣는 쾌락을 빼앗는다면, 아름다운 형태를 보았을 때 느끼는 달콤한 감정을 빼앗는다면, 선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196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positive affect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였다. - P197

에피쿠로스는 쾌락에는 종류의 차이도 있지만 작용 속도의 차이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적인 쾌락과 동적인 쾌락을 구분한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행위는 동적인 쾌락을준다. 물을 마신 후에 우리가 경험하는 만족스러운 기분(갈증 없음)은 정적인 쾌락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물을 마시는 행동은 동적인 쾌락이고 물을 마신 상태는 정적인 쾌락이다.
우리는 보통 동적인 쾌락이 가장 큰 만족감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적인 쾌락이 더 우월한 쾌락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적인 쾌락은 목표지, 수단이 아니다. - P200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올바른 마음가짐만 갖춘다면 아주 적은 양의 치즈만으로도 소박한 식사를 성대한 만찬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 P202

에피쿠로스 철학은 수용의 철학이자, 수용의 가까운 친척인 감사의 철학이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P203

제퍼슨은 부처의 가르침을 잘 몰랐지만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숫자 4를 좋아했던 것 같다. 부처에겐 사성제가, 에피쿠로스에게 네 가지 치료법이 있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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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2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까말까하다가 내려놓은 책인디....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하강은 영혼의 어두운 밤, 고래의 뱃속, 암흑의 여신과의 만남, 지하 세계로 가는 여정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그저 우울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강은 대개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 상실에서 비롯된다. - P177

지하 세계로 가는 이 여정은 혼돈과 비탄, 소외와 환멸,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 P177

지하 세계에는 시간 감각이 없다. 시간은 무한하고 그곳을 서둘러 떠날 수도 없다. 아침도 없고 낮도 없으며, 또는 밤도 없다. 칠흑같이 어둡고 혹독하다. 온통 암흑뿐인 지하 세계는 축축하고 차갑고 뼈가 시리다. 지하 세계에는 쉬운 해결책이 없다. 빠져나가는 지름길도 없다. 울부짖음이 그친 그곳엔 침묵뿐이다. 여성은 벌거벗은 채 죽은 자들의 뼈 위를 걷는다. - P178

위로 올라가고 빛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그들 존재의 근원 아래로 깊이 내려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땅을 판다는 비유는 여성의 입문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에게 영적인 경험은 자아의 바깥이 아닌 자아의 내부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 P180

어머니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의 거울이 산산조각 난 여성은 분리된 자신의 부분들을 되찾기 위해 땅속 깊이 내려간다. 이 여행중에 여성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감정, 자신의 성적 취향, 자신의 직관,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가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될 수 있다. 이것들이 그녀가 그 깊은 곳에서 찾는 것들이다. - P181

하강은 강박 행동이다. 우리는 모두 하강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삶의 어떤 순간에는 내면 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하강은 매력적인 여정은 아니지만 반드시 여성을 강하게 하고 여성이 자아감을 분명히 하게끔 한다. 오늘날 몇몇 여성들은 하강 과정을 꿈속에서 암흑의 여신을 만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P183

칼리 여신과 다른 여신들의 창조 원리(creatrix principle)는 아버지 신들(father gods)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 P183

"모든 어머니는 자기 안에 딸을 품고 있고 모든 딸은 자기 안에 어머니를 품고 있다. 모든 여성은 뒤쪽으로는 어머니와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자신의 딸과 이어진다." - P197

헬렌 루크(Helen Luke)는 모자와 모녀 경험의 엄청난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형적 차원에서 아들은 어머니 자신의 내적 탐색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반면에 딸은 바로 어머니 자신의 확장이다. 딸은 어머니를 어머니 자신의 과거와 젊음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자기 인식과 새로운 존재로의 재탄생을 약속하며 미래로 이끈다." - P198

자신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딸‘로서 살아왔음을 깨달을 때, 우리에겐 몇 가지 캐내야 할 것이 있다. 문화라는 의복으로 덮어 감추기 전에 우리들 것이었던 우리의 일부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 P203

자연이나 몸과 관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에레슈키갈은 남성 신들에게 강간당하고 지하 세계로 추방당했다. 그녀는 지하로 가버린 여성성의 일부이다. 격노, 탐욕, 상실의 공포를 상징한다. 원초적이고 거친 성적 에너지이다. 의식의 세계와 분리된 여성적 힘이다.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여성의 본능과 직관이다. "그녀는 태어나기 전의 잠재적 생명이 출산의 진통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장소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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