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올컬러 특별판)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 년사 ㅣ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1월
평점 :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일부를 포괄하는 유라시아 동쪽 지방이고, 시간적 배경에 해당하는 것은 일본의 전국시대 종식에서 시작해 태평양 전쟁의 종식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에 걸친 시기다.
책의 구성은 크게 16-17세기를 다루는 1부, 17-19세기 초를 다루는 2부,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를 다루는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우리가 잘 아는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까지의 시기다. 다만 저자는 그 시간적, 공간적 범위를 확장하여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식되는 시점부터 시작하고 일반적인 한국사나 동아시아 역사책이면 잘 다루지 않고 넘어갈 타이완 섬까지도 서술 범위에 포함시킨다.
이를 염두에 두면 1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전국시대가 종식된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후 명과 조선의 만주 지역에 대한 감시와 감독이 소홀해지면서 여진족이 급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여진족은 후금에서 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조선을 복속시키고 멸망한 명나라를 대신하여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전국시대가 끝나면서 시작된 동아시아의 대변동은 타이완 섬이 청나라에 점령당하면서 끝나게 된다. 1부의 마지막은 이러한 대변동 속에서 국제적인 노예무역을 통해 동북아시아에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유럽세력, 그리고 동남아시아 곳곳을 오간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마무리된다.
2부는 한반도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박연, 하멜) 및 한반도 밖으로 표류한 문순득과 같은 표류민들에게서 시작해, 가톨릭 세력과는 거리를 두는 신교도 세력인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류, 북쪽 시베리아에서부터 점차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러시아, 그런 러시아를 두고 외교적 접촉 및 국지적인 무력 충돌을 벌이며 신경전을 벌이는 중국과 일본. 임진왜란을 두고 복수를 외치는 조선과 임진왜란의 보복이 러시아와 연계될 것을 우려하는 일본, 서로에 대한 심리전을 펼치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통신사 외교. 1부에서 언급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부상하여 조선과 일본에서 불평등한 신분사회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는,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가톨릭 교인들과 그런 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신교도 네덜란드 세력까지. 기존의 범주를 대입하자면 정치사, 사회사, 문화사, 외교사, 종교사 등 다양한 분야가 교차하는 지점이 2부다.
마지막으로 3부는 1부에서 슬쩍 모습을 드러낸 서구 열강들이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동북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손길을 뻗치기 시작하고 중국과 일본, 조선은 각각 다른 운명에 처하게 된다. 청나라는 서구 열강 세력의 압박 앞에 무너지기 시작하고, 일본은 청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기존의 네덜란드, 러시아와의 접점, 소속 번들이 서양 세력에게 패배한 경험 덕분에 상황을 넘기는데 성공한다.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이용하면서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곧이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우위를 점한다. 이때 조선은 잠시나마 러시아와의 밀월관계를 통해 안보를 보장받으려하나 일본의 집요한 공격 아래 러시아도 패배하고 조선은 멸망하고 만다. 이때 조선인들은 조지 워싱턴과 같은 이를 영웅으로 여긴 반면 일본은 나폴레옹 같은 이를 영웅으로 여겼다. 조선은 멸망했으나 조선인은 만주를 비롯해 각지로 흩어져 대일항전에 나선다. 연해주와 만주에서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으나 단명했다. 일본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워 제국주의적 착취 구조를 정당화하려 한다. 한편 일본의 전쟁은 인도의 찬드라 보스에게는 조국 독립을 위한 가능성으로 보였다. 결국 일본은 패망하나 그 직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일본은 한편으로는 평화헌법이, 다른 한편으로는 전범들이 반공주의의 흐름 속에 올라타는 모순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 책의 특징과 장점을 들자면, 첫째는 저자가 이 책에서 해양세력(일본)이 대륙과 충돌하면서 일으킨 파란을 중심으로 서술을 전개하고, 서태평양 연안에 인접한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을 조망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서 활약한 인물이나 사건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문순득과 같이 동남아시아까지 표류한 조선인의 사례, 임진왜란부터 일찍이 그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한 가톨릭교도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이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보다 중요한 두 번째 장점은 흔히 일국사의 역사서술을 중심으로 삼는 역사서와 달리, 본서에서 저자는 서태평양 연안과 동유라시아 대륙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축을 수 차례 교차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 덕분에 독자들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나선정벌, 통신사 파견,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과 같은 근현대사의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기존의 역사서와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역사학에서 늘 추구해야하는 미덕이자 역사학이 가지는 미덕이라할 '관점(혹은 사관)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번째 장점에 크게 점수를 주고 싶다. 특히 본서에서 '한중일', '한미일', '한미중' 같은 《삼국지》적 세계관에서 탈피할 것을 반복해가며 강조하는 점은 독자들에게 기존의 역사관을 탈피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덧붙여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는 장에서 《삼국지》적 세계관의 탈피 뿐만 아니라, 전근대 한반도 주민의 역사적, 지리적 활동 영역이 예상보다 더 넓었으며, 한반도가 항상 지정학적 요충지이지도 않았고, 한반도 바깥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역시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국제 사회의 정세를 바라볼 때 일국사적 관점을 취하는 것 보다 더 도움이 되는 중요한 조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지점은 3부의 근현대사 파트가 급전개된다는 점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해양과 대륙이 맞서는 동아시아를 그리는 과정이 주를 이루다보니, 세계사적으로 크고 중요한 사건이더라도 이 책의 내용 상으로는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어서 생략된 지점이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일찍이 2부에서 부터 진작에 모습을 드러낸 러시아와 달리, 서태평양으로 한창 세력을 뻗쳐나가던 미국이 동아시아에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서양사의 '대서양사(Atlantic History)'처럼, 동아시아라는 공간적 배경을 넘어 태평양이 중심이 되는 '태평양사(Pacific History)'를 다루는 책도 나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