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은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자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이끈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가 남긴 마지막 글이다. 원제는 La flamme d'une chandelle로, 번역하자면 '초의 불꽃' 정도가 될까. 어쨌든 제목에 미학이 들어가지 않는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문예출판사 번역본  제목 『촛불의 미학』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져 있어 부득이하게 촛불의 미학으로 번역했다고 언급된다.


바슐라르가 과학철학자의 길을 걷다가 인간의 객관적 정신을 탐구하기 위해 시의 상상력이라는 영역에 처음 발을 들인 책이 『불의 정신분석』이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4원소설에 기반한 상상력 연구자로서 바슐라르가 불로 자신의 상상력 연구를 불지핀 끝에 마지막에 도달한 곳이 촛불과 램프로 밝힌 어두운 방에 도달한 것 같아 흥미롭다.


본서는 역자후기를 제외하면 약 150페이지 가량의 분량에 불과하며, 서론, 본론 5장과 에필로그, 모두 합쳐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서론 첫 페이지 첫 문단에서, 바슐라르는 왜 불꽃에 관한 책을 썼는가, 그 목적을 말한다.

단순한 몽상을 담은 이 작은 책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지식도 과도하게 담아내지도 않고, 어떤 통일된 연구 방법에 구애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사람의 몽상가가 고독한 촛불을 관조하면서 어떤 새로운 몽상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말하고자 한다.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세상의 사물들 가운데 불꽃은 가장 훌륭한 이미지 작동체(opérateurs d‘images)의 하나이다. 불꽃은 우리가 상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불꽃 앞에서 꿈을 꾸자마자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불꽃은 지극히 다양한 명상 영역에서 은유와 이미지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P. 9

나름대로 바꿔 말해보자면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바라보는 한 몽상가에게 촛불이 어떤 몽상을 가져오는가를 밝히는 것, 바로 그것이 본서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바슐라르는 본서에서 각각의 장들을 통해 여태까지 몽상가들이 촛불을 통해 어떤 몽상을 하였고, 촛불로부터 어떤 시적 이미지를 구하였는지 밝힌다. 


마지막 5장에서는 스위치로 전등불을 키고 끄는 모습을 두고 램프를 키는 것 만큼 다양한 순간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촛불도, 램프도, 전등도 밀려난 시대, LED조명이 대세인 이 시대에 더 이상 어두운 방안에서 촛불을 키고 조용히 몽상에 빠지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바슐라르의 글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촛불의 몽상을 느끼고 만족해야 하는 시대다.   


사실 원래는 이 책을 읽고 어떻게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뭐가 되든 글을 쓰고자 했다. 분량이 짧기에 나름의 해석이나 평가까지는 힘들다하더라도 최소한 요약은 어떻게든 가능하지 싶었으나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이 책은 요약하기도 힘들다. 요약은 곧 글이라는 덩어리에서 뼈대를 남기고 살을 발라내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을 텐데, 이 책은 문장 하나하나가 시적이고 압축적이며 난해하기까지 해서 함부로 요약할 수가 없다. 결국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대신 이 책이 어떤 책인가, 이 책을 읽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에 관해 글보다는 한 장의 그림으로 더 잘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렘브란트의 작품 〈명상 중인 철학자〉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본서에서 바슐라르가 조르쥬 상드의 《콩쉬넬로》의 주석을 인용할 때, 해당 주석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그림 속에 촛불은 없지만, 어두운 방안에서 명상에 빠진 철학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책을 쓰고 있었을 바슐라르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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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가 1988년 발표한『악마의 시』는 작중 예언자 무함마드를 불경하게 묘사했다는 점이 논란이 되어 문제작이 되었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파트와를 선언하고, 일본, 노르웨이 등지에서 번역가가 피살 당하는 등의 여러 사건이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도, 2022년 8월 작가 루슈디가 뉴욕에서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루슈디와 이 소설은 여전히 문제적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소설보다 소설을 둘러싼 현실의 정황이 더 극적이다. 하지만 역자가 말하듯이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이다.


이 소설은 총 9장으로 구성되며 홀수장에서는 소설의 두 주인공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의 이야기가, 짝수장에서는 지브릴이 보는 환상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2만 9천피트(에베레스트산 높이) 상공에서 두 남자,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가 런던 해협으로 떨어지며 시작된다. 런던 상공에서 비행기 AI-420 보스탄(낙원의 두 동산 중 하나를 의미)이 폭발하였고, 두 사람은 비행기의 잔해와 구름을 거치며 추락한 끝에 런던 해협에 무사히 도착한다. 이어서 지브릴과 살라딘이라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소개되고, 런던을 주 무대로 지브릴과 살라딘은 얽힌 실타래처럼 꼬인 여정에 나선다.


비행기 폭파 사고에서 살아남은 지브릴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후 머리 뒤에 후광이 생기면서 점차 천사처럼 변해간다. 반면 살라딘은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고 발굽과 꼬리가 생기는 등 악마처럼 변해간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지브릴은 인도 영화계의 슈퍼스타다. 지브릴은 살라딘과 달리 소설에서 거의 신체적인 고난을 겪지 않는다. 지브릴의 곁에는 알렐루야 콘이라는 금발백인의 미녀가 있다. 대신 지브릴은 정신적인 고난에 시달린다. 환상을 보기 때문에 억지로 잠들지 않으려 한다. 소설 도중에는 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존재를 실제로 만나기도 한다. 


지브릴은 2장, 4장, 6장, 8장, 총 4개의 장에서 환상을 3번 본다. 첫째는 예언자 무하마드(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표현인 마훈드로 지칭된다)가 자힐리아(메카의 옛날 이름)의 대공 아부 심벨에게서 아라비아 토속 신앙의 세 여신을 이슬람교에 편입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려다가 그것이 '악마의 수작'임을 깨닫는다. 뒤이어 자힐리아를 떠난 무하마드는 야트리브에서 군세를 몰고 귀환하여 자힐리아의 우상들을 파괴한다. 두 번째 환상은 런던에 망명 중인 이맘이 지브릴의 도움을 받아 이란으로 되돌아가 이란을 집어삼키는 내용이다. 마지막 환상은 나비소녀 아예샤가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내세워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바다로 떠나는 이야기다. 지브릴은 환상들을 보면서 자신이 하늘에서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관객이자, 동시에 무대에 서서 환상 속의 인물 역할을 일부 맡는 동시에 환상 속의 인물들이 마주하는 '대천사 지브릴' 역을 맡은 배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반쯤 잠들어 있는, 혹은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 지브릴 파리슈타는 이 지긋지긋한 꿈 속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신에게 종종 분노를 느낀다. 내가 죽어갈 때, 내가 간절히 간절히 필요로 할 때도 나몰라라 하던 그 ‘하나‘, 알라 이슈바르(Ishvar) 하느님. 이 모든 일이 자기 때문인데도, 자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데도 신은 예나 지금이나 온데간데 없다.

‘절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장면, 무아지경의 예언자와 배꼽 탈출과 빛의 탯줄이 자꾸 반복될 뿐이고 그때마다 일인 이역의 지브릴은 위에서내려다보는 동시에 밑에서올려다본다. 그리고 둘 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두려워 돌아버릴 지경이다. - 『악마의 시』, 상권, P. 167


마훈드가 눈을 크게 뜬다, 어떤 환상을 보고 있다, 뚫어지게 바라본다, 아하, 그렇구나, 지브릴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나였어. 나를 보고 있어. 내 입술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움직여지고 있으니까. 무엇이, 누가?

모른다,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나온다, 내 입에서, 목구멍을 지나, 이빨 사이를 뚫고 말씀이.

신의 우체부 노릇도 재미있는 건 아니라네, 친구.

그러나그러나그러나: 이 장면에도 신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누구의 우체부인지 알 게 뭐냐. - 『악마의 시』, 상권, P. 168


지브릴과 관련해 유달리 강조되는 점은 에베레스트 산이다. 처음 지브릴이 추락할 때의 높이도 에베레스트산과 동일한 높이이며, 지브릴에게 수 차례 유령처럼 나타나는 레카 메르찬트라는 여성은 지브릴이 사는 건물인 '에베레스트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인물이다. 소설에서 지브릴과 서로 사랑하는 금발 백인의 유대인 여성 알렐루야 콘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등반가이다. 


지브릴이 목격한 환상이 정말 소설 속에서 현실로 일어난 일인지, 단지 정신병에 시달리는 지브릴의 망상인지, 둘 다인지는 소설에서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어쨌든 지브릴은 살라딘 참차와 대비했을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천사의 역할을 맡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반면, 또 한 명의 주인공, 살라딘 참차는 온갖 수난에 시달린다. 권위적이고, 엄하고, 뻔뻔하기도 한 아버지 창게즈 참차왈라가 싫어서 이름을 살라후딘 참차왈라에서 살라딘 참차로 바꾼 그는, 영국으로 유학가 철저한 영국인이 되고자 한다. 


분노의 불길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 숭배를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그를 세속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부터 그는 어떠한 종류의 신도 섬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르고 또한 아버지가 결코 될 수 없는 존재, 즉 철두철미철저한 영국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어쩌면 그 분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 『악마의 시』, 상권, P. 70


처음 유학왔을 때 청어 요리 먹는 법 조차 몰랐던 살라딘은 영국 여성 파멜라 러브레이스와 결혼하고 말투까지도 철저히 영국식으로 바꾼다. 종종 화자는 살라딘을 두고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처럼 피눈물나는 살라딘 참차의 노력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해변가에서 지브릴과 살라딘을 데려온 노인 로사 다이아몬드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과 이민국 직원들은 지브릴은 신경쓰지도 않고 살라딘만 체포해간다. 끌려가는 도중에 학대까지 가한다. 다행히 살라딘의 신원이 조회되긴 했으나 경찰과 이민국 직원들은 적당히 넘어갑시다라며 아무도 책임지는 일 없이 넘어가버린다. 


부상당한 살라딘이 억류된 병원에는 살라딘처럼 몸이 변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놈들은 우리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뿐이에요. 놈들에겐 묘사의 힘이있고 우리는 놈들이 그려놓은 모습대로 변하는 거죠." 『악마의 시』, 상권, p. 246


말하자면 몸이 변한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묘사한 모습대로 변해버린 이민자들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살라딘은 그토록 영국인이 되고자 했건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에게 악마로밖에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이 변한 사람들과 함께 탈출한 살라딘은 자기 집에 갔다가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조시 점피라는 남자와 사귀는 파멜라 참차를 만나게 된다. 한술 더 떠 살라딘은 파멜라 사이에 자녀를 갖지 못해 관계가 사실상 파탄에 이르고 말았지만 파멜라는 조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살라딘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국에서 미미 마물리언이라는 유대인 배우와 같이 〈에일리언 쇼〉라는 TV쇼에서 성우로 출연하고 있었는데, 제작자 헬 밸런스가 인종문제로 클레임이 들어온다면서 살라딘을 해고해버린다. 순식간에 일자리 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소설 중반 시점인 5장 1부 마지막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오긴 한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살라딘의 처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러나, 그는 꿈 속의 아이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에게 무자식의 운명을 선사했고,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녀를 멀어지게 하고 그의 대학 동창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만들었고, 그는 한 도시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를 히말라야 산맥의 높이에서 그 도시를 향해 내팽개쳤고, 그는 한 문명을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가 악마로 변하고 모욕당하고 그 문명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망가지게 했다. - 『악마의 시』, 하권, P. 165


그런 살라딘 앞에 영화계 복귀를 선언한 지브릴이 나타난다. 지브릴을 향한 분노로 가득찬 살라딘은 자신의 재능인 목소리를 살려, 지브릴과 지브릴의 연인 알렐루야 콘에게 시를 선물한다. 한때 악마로 변했던 자가 천사 같은 인물에게 시를 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악마의 시'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 상세한 과정과 그로 인해 초래된 사태는 소설을 참고해주길 바란다. 


지브릴과 살라딘, 두 사람 이외에도 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각자 나름의 고유한 배경과 생각을 지니며 서로 충돌하고 협력하고 갈등한다. 소설의 주 배경이 런던임에도 불구하고 주요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앵글로-색슨계 영국인이 아니다. 인도계 영국인을 비롯한 이민자들이다. 인도 뭄바이 태생의 무슬림 작가가 그려내는 런던 답다고 할 수 있다. 일부는 지브릴하고만 관계있고 일부는 살라딘하고만 관계있지만, 많은 등장인물들이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지브릴과 살라딘 두 인물이 교차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또한 지브릴이 환상속에서 보는 인물들과 지브릴, 살라딘이 현실에서 만나는 인물들 중에는 빌랄, 칼리드, 힌드, 아예샤처럼 동일한 이름을 지닌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서술자다. 소설의 시점은 문학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데, 이 서술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나 악마에 준하는 존재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첫 장면,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하고 지브릴과 살라딘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도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마치 성경의 「욥기」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시험하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초월적인 존재 '나'가 에베레스트 상공에서 천사 같은 지브릴과 악마 같은 살라딘을 런던이라는 혼탁한 세상으로 내던지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소부재(無所不在)니 무소부지(無所不知)니 하는 것들을 주장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 일은 참차가 의지력으로 원했고 그 의지에 따라 파리슈타가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어느 쪽인가?

파리슈타의 노래는 어떤 것이었나, 천사의 노래, 악마의 노래?

나는 누구냐고?

이렇게 표현해보자: 누구의 노래가 최고인가? -『악마의 시』, 상권, P. 25


악마가 된 자신을 두고 왜 하필 내가 벌을 받느냐고 호소하는 살라딘 앞에서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악의 화신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든 간에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혹은, 나만이 아니다. 나는 온갖 그릇된 것들과 ‘우리가 증오하는 모든 것‘과 죄악이 유형화된 존재다.

그런데 왜? 왜 나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도대체 내가 어떤 사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또는 저지르려 했다고?

내가 무엇 때문에 — 그는 이런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 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누가 내리는 벌이지? (이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나름대로 ‘선(善)‘을 추구했고 내가 가장 선망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강박 관념이라고 할 정도로 집요하게 매진하지 않았더냐? 열심히 일하고 말썽을 피하고 새사람이 되려고 분투하지 않았더냐? - 『악마의 시』, 상권, P. 370


알렐루야 콘의 침대 위에서 신의 형상으로 지브릴 앞에 나타난 후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라. 계시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창조의 규칙은 상당히 명확한 편이다. 이것저것 만들어 차려놓은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놓은 뒤에도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규칙을 바꾸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면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제법 자제력을 발휘해 왔는데 이제 와서 일을 망칠 생각은 없다. 물론 나도 참견하고 싶을 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꽤 많았다. 그리고 한 번은 참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알렐루야 콘의 침대에 걸터앉아 슈퍼스타 지브릴에게 말을 걸었으니까. 우파르발라냐, 니차이발라냐: 녀석은 그걸 알고 싶어했지만 나는 확실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 저렇게 알쏭달쏭해 하는 참차에게 수다를 떨 생각도 물론 없다.

난 이제 떠나겠다. 저 녀석은 곧 잠들 것이다. - 『악마의 시』, 하권, P. 176


소설의 특징을 하나 더 들자면, 작가가 인도인이라는 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양 작가들의 글과는 다른 시각, 다른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저자는 이슬람, 인도, 서구문명을 비롯해 다양한 레퍼런스를 언급하는데, 이를 통해 인도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서구문명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다. 


한편 이 같은 다양한 레퍼런스를 통해 루슈디라는 작가가 얼마나 깊은 학식을 지녔는가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각 레퍼런스마다 역주가 달려있는데, 아쉽게도 본문에 역주를 삽입한 탓에 읽다가 흐름이 끊긴다는 문제가 있다.



다행히 문학동네에서 작년에 새로운 판본을 출간하였다. 번역자는 동일하고 역주는 모두 각주로 처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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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가이드 - 브리태니커 편집장이 완성한 평생학습 지도
모티머 J. 애들러 지음, 이재만 옮김 / 유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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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출간된 이 책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5판의 편집장인 모티머 애들러(Mortimer J. Adler)의 1986년 저작, A Guidebook to Learning: For a Lifelong Pursuit of Wisdom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본문을 다루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책의 취지를 설명하는 서문, '독자들에게'와 '가이드는 누구를 위해 필요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서 1부 우리가 직면한혼란: 알파벳주의, 2부 20세기 이전 지식의 조직, 3부 백과사전의 결함을 치유하기 위한 현대의 노력, 4부 철학적 성찰로 본문은 마무리되며 이어서 역자 후기와 부록 3가지까지 나오면서 책은 끝난다.


서문에서는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가 언급된다. 그에 따르자면 교육 과정을 끝마치고 성인이 된 사람들이 전문화가 아닌 종합적 지식으로서 인문학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며, 이를 위해 이 시대 학식의 지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질문해볼 수 있다. 왜 인문학을 추구해야할까? 학식의 지도란 무엇일까? 국내 번역명인 평생공부 가이드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이러한 질문의 해답은 각 장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찾게 된다.


1부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장이다. 저자는 백과사전의 항목이나 대학의 학부 구성이 특별한 지적 연관성을 지닌 지식 체계에 따라 구성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편의를 위해 알파벳 순으로 나열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를 두고 저자는 알파벳 순 배열을 '알파벳주의'라 명명한다. 이러한 알파벳 순 배열은 정보를 간편하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각 항목 간의 지적 연관은 알기 어렵고, 어느 지식이 중요하고 어느 지식이 덜 중요한지 지식의 가치판단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백과사전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백과사전이 지녀야할 역할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백과사전은 "그저 사실을 저장하는 창고 이상", 즉 사전과 마찬가지로 항목을 알파벳순으로 배열해 이용자가 무언가를 찾도록 돕는 참고 도서 이상이어야 한다그러려면 백과사전은 알파벳이 아닌 방법으로 내용에 접근할 길을 이용자에게 내놓아야 한다지식을 체계적으로 혹은 주제별로 개관하는 방법다시 말해 학식의 전 영역에서 서로 연관된 모든 부분을 탐험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지도를 어떻게든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 P45

말하자면 백과사전, 나아가 대학은 지식을 아우르는 지도의 역할을 맡아야한다. 그러나 이 책이 쓰인 시점에서 백과사전과 대학을 지배하는 '알파벳주의'는 그런 지도 역할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저자의 문제 의식이다. 알파벳주의 대신 듀이의 10진법을 사용하는 도서관의 도서분류법 역시 어느 범주가 더 가치있고 중요한가, 하위 범주나 상위 범주의 구분과 명칭이 적절한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2부에서 여러 철학자들의 지식 분류법을 탐구한다. 


2부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근대 19세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이 지식을 어떻게 범주화하고 가치를 매겼는가 요약해 설명한다. 고대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세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로저 베이컨이, 각각 17, 18, 19세기로 구분되는 근대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 토마스 홉스, 존 로크(17세기), 드니 디드로와 장 달랑베르, 그리고 칸트(18세기),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앙드레마리 앙페르, 오귀스트 콩트, 빌헬름 딜타이, 허버트 스펜서 (19세기)가 언급된다. 저자는 이들의 지식 분류법을 두고 어떤 측면에서 허점이 있는지, 어떤 점에서는 장점을 지니는지, 중세와 근대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분류법이 고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에서 낫고 어떤 점에서 결점이 있는지를 제시한다.


3부에서 저자는 알파벳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20세기에 시도된 노력을 개관한다. 크게 '지식의 골자'라고 할 프로피디아와, 서양의 위대한 명저를 분류한 '신토피콘'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프로피디아는 알파벳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에 참가한 저자의 노력의 일환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5판은 알파벳순 배열을 보완하기 위해 마이크로피디와 매크로피디아라는 범주로 나누고 이를 보완하는 '지식의 골자'로서 프로피디아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프로피디아에는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이는 저자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참가한 신토피콘도 공통적으로 지니는 문제였다. 즉, 20세기 후반은 문화적 다원주의와 지적 이설의 시대인데 지식의 위계를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 것이다. 저자는 그 답으로 "학식의 모든 부분은 원 위의 점들처럼 서로 대등한 관계로 다루어져야 한다"(p. 140)고 보았다. 3부를 마무리 지으면서 저자는 철학에 바탕을 둔 지식의 분류를 강조한다.


지식을 조직하거나 지식의 갈래를 배열하고 연관 짓는 것은 본질적으로 철학의 과제다. 그것은 역사가나 과학자가 할 일이 아니다. 역사가나 과학자가 자신의 탐구 영역을 정의하고 그 영역을 다른 학문과 구분하려고 시도할 때, 그는 역사가나 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 P156

이어서 4부에서 저자는 20세기에 필요한 통찰과 분별을 서술하며, 그 핵심을 파이데이아(종합적 학식)과 에피스테메(전문적 학식)의 구분 및 앞서 2부에서 살핀 과거 철학자들의 구분법으로부터 찾아낸 통찰을 수용하는 것에 둔다. 저자는 신체와 마찬가지로 정신에도 자산이 존재하며, 정신의 자산은 크게 정보, 지식, 이해, 지혜가 있으며 그 중요도는 정보<지식<이해<지혜 순이다. 이어서 '알다'의 의미를 통찰하는데, 알다는 크게 '그것', '무엇', '어떻게', '이유', '원인'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철학은 이해와 지혜('이유', '원인')에 대한 앎을 제공한다. 이에 따라 '앎'의 형식도 달라지는데, 인공물을 생산하는 기예는 '어떻게'의 앎으로써 생산기술이나 실행기술을 지칭한다. 학문은 '그것', '무엇'에 대한 모든 형식의 앎을 지칭한다. 


한편 저자는 학식을 위해 시와 철학 간의 불화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는 지적 상상을, 철학은 이성적 지성을 이용하는데 둘 모두 지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 분야의 관계도 짚고 넘어간다. 예컨대 역사와 철학은 과학과 비교했을 때 초월적 형식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에 관한 역사나 물리학에 관한 철학은 성립할 수 있으나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역사와 철학은 일종의 초월적 형식으로서 학식의 모든 형식에 두루 적용 가능하다. 반면 과학은 초월적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4부는 본서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지점으로,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 특히 철학적 지식이 필요한 지점이다. 독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저자는 15장 '독자들을 위한 비망록'에서 4부의 전체적인 내용을 12가지 항목으로 다시 한번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요약 이후 저자는 4부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뒤이어 결론에서 살펴보겠지만, 특정한 분과나 주제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 이들은 수학이나 경험 과학의 어떤 분야, 역사적 연구나 철학적 학문의 어떤 갈래에 집중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종합적 교양인이 되고 싶은 이들은 모든 분과와 주제에 대한 인문학적·종합적 접근을 중시해야 하며, 그러한 분과와 주제는 학식의 초월적 형식인 역사와 철학, 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 P200


마지막으로 결론,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파이데이아'에서, 저자는 파이데이아의 의미를 조금 바꾸어 쓴다. "청년기에 학교 교육을 끝마친 이후 성년기에 스스로 공부해서 교양을 두루 함양한 인간이 되기를 열망하는 이들의 종합적 공부를 위한 길잡이"(p. 201) 아울러 저자는 모든 사람이 종합적 교양인이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본 학교 교육(유치원에서 고등학교) 단계와 성년기에는 종합인이, 대학 시절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오늘날 학교와 대학이 "전문가인 동시에 종합적 교양인"(p. 205)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각자 공부 기술을 보완하고 종합적 교양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평생공부를 지속하는 데 특히 필요한 것은 시와 상상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이해다."(p. 205) 이어서 저자는 학교 교육을 마친 후 혼자 공부하는 이들에게 간단하면서도 실질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읽고 토론하라!"(p. 207)


이 책은 부록을 제외한다면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그리 많은 분량을 지닌 책은 아니다. 1, 2, 3부의 내용은 쉽지만 4부의 내용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학식의 범주와 각각의 학식 간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이해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저자가 4부 마지막 15장에서 4부의 전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두었고, 역자 후기를 먼저 읽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4부는 다른 1, 2, 3부에 비해 얻어갈 수 있는 게 많은 장이기도 하다. 4부는 시, 역사, 철학을 강조하긴 하되,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문사철이 중요하다'식으로 공허하게만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시, 역사, 철학이 다른 분과학문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특징을 지니며 어떤 점에서 실제로 중요한 가를 보여준다. 아울러 대학원 과정, 그 중에서도 박사학위를 바탕으로 마련된 이른바 대학의 '전문가' 양성 구조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책의 결론에서 저자가 아주 간단한 답, '읽고 토론하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세기 후반의 알파벳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19세기의 콩트와 스펜서, 나아가 20세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구성, 이어서는 '앎'에 관해 어떤 '앎'을 추구해야하는지까지의 여정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면밀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가이드북이라기 보다는 '학식'의 지성사를 추적하는 책에 더 가까워보이긴 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가 종합인을 추구하는 독자들을 위해 학식의 지도를 알려줄 가이드북을 집필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결국 납득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간단하고 실질적인 조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지금 시대에 던져주는 의미를 살펴보자.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시점은 1986년이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났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국립대는 그래도 각종 어문학과, 사학과, 철학과를 비롯한 인문학 학과가 남아있지만 그외에는 인문학 관련 학과를 통폐합하는 추세였고, 이 흐름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게다가 역자 후기에서 말하듯이 인문학을 바라보는 시선도 '돈 안되는 학문'이 되어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문학에 관심을 돌리기 위한 방편과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 그 자체에 대한 고민도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행 분과학문 체제가 과연 지금 시대에 적절한지, 그동안 국내 인문학이 추구한 바가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종합적인 접근 방식으로서 인문학을 추구한 것인지 말이다. 지금의 인문학은 분과학문으로 학과를 나누고, 박사학위로 이루어지는 전문화과정에 너무 매몰되어 있지는 않았나?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평생공부를 위한 가이드를 제공하기도 하고, 동시에 다양한 학식의 가치와 체계를 고찰한다. 이 책은 시, 역사, 철학(=문사철)의 가치를 재고하고, 전문화의 물결 속에서 해당 학식들이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다른 분과학문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따져볼 계기를 마련하게 해주는 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약 40년 전의 책이긴 하나 지금 우리 현실에 유효한 메시지,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1부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왜 인문학을 추구해야할까? 학식의 지도란 무엇일까? 국내 번역 명 평생공부 가이드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학식의 지도는 책에서 배움을 위한 지도로 언급된다. 인문학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인문학이 단순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제외한 나머지 잉여 과목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다른 학식에 종합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빛의 물리학, 열의 물리학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역사와 철학은 뇌과학의 역사, 경제학의 역사, 물리학의 역사, 역사학의 역사, 역사학의 철학, 과학의 철학과 같이 특정 전문 분야에 종합적으로 접근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맡는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명은 왜 '평생공부 가이드'가 되었을까? 우선은 원서의 부제까지도 아우르는 점이 있겠지만, 또 다르게 보면 학교 교육을 끝마친 이후 전문가가 아닌 종합인으로서 얼마나 걸릴지 모를, 어쩌면 평생에 걸쳐야 할지도 모를 기나긴 공부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학식의 지도를 제공하는 가이드북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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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1-11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신 분을 만나다니 반갑네요^^ 저도 잘 읽었던 사람으로 이 책의 메시지대로 실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의 인문학은 점점 돈 안 되는 학문으로 비선택 종목이 되어가고 있지요. 삶을 위한 공부는 분명 인문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현실은 그와 반대로 가고 있으니 참...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Heath 2023-01-12 05:54   좋아요 0 | URL
감사히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어렵게 읽었던 책이다. 정독 2번에 훑어보기는 몇 번을 한 건지. 이 책은 디아스포라와 혼종성에 관한 연구들을 논평하는 연구서다. 그래서 디아스포라, 혼종성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은 당연히 숙지하고 있어야 하고, 나아가 해당 개념들에 관해 디아스포라 연구자와 문화 연구자들이 개진한 전체적인 연구가 어떤 흐름 속에 있었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책의 맥락을 그나마 따라갈 수 있다. 


이 책은 원서는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은 2014년이다. 그러다 보니 서론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느껴볼 수 있다. 각 장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서론에서는 2001년의 사건 이후 세계가 크게 변화했으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같은 개념이 여전히 유효한 지를 검토할 것을 천명하고, 1장에서 7장까지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지 간략히 소개한다. 1장에서는 디아스포라의 대명사,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잘 알려진 고전적 디아스포라의 한계를 지적하고, 기존 연구자들이 디아스포라를 범주화하려는 시도가 어떤 점에서 단점이 있는지 따져보며, 이어서는 디아스포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검토한다. 2장에서는 디아스포라의 문화적 특성을 개관한다. 디아스포라는 민족이라는 소속감에 의문을 제기하며, 음악, 영화, 문학을 통해 디아스포라 문화가 생산되는 과정을 고찰한다. 이어서 이러한 문화상품들이 기존의 구조에 도전할 힘이 있는지 검토한다. 3장은 디아스포라와 젠더의 관계를 다룬다. 디아스포라와 호스트 사회 속에서 젠더 관계는 대단히 복잡한 것으로 나타난다. 호스트 사회는 디아스포라의 젠더 관계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는가가 의문으로 제시된다. 4장부터는 혼종성을 다룬다. 혼종성은 디아스포라의 문화와 호스트 문화를 자르고 뒤섞어 혼종적 문화를 창출해낸다. 혼종성은 상품화될 가능성이 있다. 5장에서는 혼종성이 헤게모니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6장에서는 그동안의 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개념인 백인성이 다루어진다. 저자들은 '블랙'(아프리카인과 남아시아인)과는 구분되는 백인의 구조적 특권을 지적한다. 전자에 속하는 이주자나 디아스포라는 호스트 사회에서 위험한 이주민 취급을 받는 반면, 백인은 어딜 가나 안전한 원주민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백인성'이라는 개념이 아일랜드, 유대인과 같이 한때 2류백인 취급당한 이들을 가리는 점을 문제시한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는 2001년의 사건으로 인해 국경과 민족국가가 강화되는 시점에서 디아스포라와 혼종성 같은 개념이 실질적으로 효용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에서는,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영국 사회에 많은 '블랙'(아프리카인, 남아시아인)이 유입되었고 그들의 디아스포라, 그들이 만들어낸 혼종성이 이미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저자들은 2001년 9.11 사건 이후 종래 진행되었던 흐름이 단절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만, 현실은 저자들의 기대, 혹은 불안을 완전히 비껴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으리라. 흐름은 단절되지 않았다. 다만 이민자의 유입과 디아스포라 및 혼종성이 긍정적 결과만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읽고, 메모로 남긴 내용을 참고했는데 내용 요약하기도 힘들다. 그만큼 나에게는 어려운 책이자 지적 도전이라 평가할만한 책이었다. 책의 내용을 다시 요약해보자면, 크게 디아스포라/혼종성/백인성 3가지 주요 개념을 두고 기존 연구자들의 주장을 검토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는 학계 연구자라면, 해당 분야를 두고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영어권 연구자들이 어떤 논의를 진행했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굳이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이 개념이나 이 분야에 관심은 있는데 '어려운 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문체라고 본다. 저자들의 문체가 어려운 건지, 번역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쉽게 읽히지 않는 문체였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표현처럼 읽을 때 꼼꼼하게 단어 하나하나 꼭꼭 씹어서 소화 시켜야 하는 책이다. 이게 무슨 책이지? 하고 읽다가는 금방 덮어버릴 지도 모를 책이다. 그렇긴 하나 책을 읽고 해당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지금의 세계가 조금은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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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21세기 지금 시점을 15, 16세기 대항해시대와 비교한다. 그러면서 1995년 이후 출생한 소위 Z세대를 두고 디지털 현실이 고향이며 이들이 마치 과거 대항해시대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한 'Z세대'에 빗댄다. 비교하려는 시도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비교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대항해시대 때 원주민 학살이 일어나고, 유럽 각국의 아메리카 대륙 점령이 뒤따랐고, 그 뒤에는 대서양을 잇는 노예 삼각 무역이 전개된 것처럼 많은 역사적 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더 많은 역사적 변화들이 있지만, 아무튼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일어난 변화는 지금 현재에도 대서양에 인접한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각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에 비해 메타버스는 내 편협한 관점에서 볼 때 '4차 산업혁명'과 유사한 마케팅 용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시류에 뒤처진 구세대 취급을 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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