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 역사적인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크 캐스터.사이먼 정 지음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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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여러 종류의 책이 있다. 그중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담고 있는 내용의 가치가 높아지는 책이 있는 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의 가치가 퇴색하고 마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아쉽게도 후자에 가깝다. 저자들의 잘못은 아니다. 단지 이 책이 2012년에 나왔기 때문에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이 책은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심의한 31가지 역사적 재판을 다룬다. 각각의 판결은 크게 다음의 테마들로 구분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 종교, 사상, 양심 /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 대통령 대 연방대법원 / 비즈니스 / 긴급판결. 이중 단 하나의 판결만 다루는 긴급판결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테마들은 대체로 5~8가지 판결을 다룬다.


각각의 개별 판결은 판결이 시작된 배경을 다루는 '프롤로그', 대법원의 판결을 요약정리한 '판결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 판결 이후의 뒷이야기를 다루는 '에필로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판결이 만장일치로 나왔을 경우, 반대의견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이나 고레마츠 대 정부 판결에서는 반대의견이 판결문보다 더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독자는 첫째로 해당 판결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고, 둘째로 판결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셋째로 해당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을 확인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판결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가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는 법률 문제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맞추어 읽기 쉽게 풀어 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가령, 나 자신의 사례를 들자면, 작년에 번복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그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해당 판결이 나오게 된 배경이나 전개 과정, 판결 이후의 영향 등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 책을 통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는지, 제인 로라는 이름을 내세워 실제 소송을 걸었던 인물은 누구였으며, 판결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개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각각의 판결을 전부 다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31가지의 다양한 판결들을 보면 시대상의 변화를 잘 체감할 수 있다. 예컨대 1856년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과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시 교육위원회의 판결을 비교해보자. 책에서 두 사건은 연이어 배치되어 있고, 두 사건 사이에는 98년의 격차가 있다.


먼저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을 보자. 판결부터 정신이 아득해진다. 여러 내용 언급할 필요 없이 핵심은 간단하다. "흑인 노예는 인간이 아니다" 실제로 이 판결은 대법원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회자되며, '스콧 대 샌포드 판결 이래 최악의 ...' 같은 수식어구로 자주 활용된다. 


이어서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시 교육위원회 판결이다. 이 판결은 인종 격리정책에 관한 판결이다.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 이후 98년이 지난 후 미국 연방대법원은 "격리는 곧 차별이다" 라는 판결을 내렸다. 거의 1세기 걸려 이룬 진보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판결 중 코레마츠 대 정부의 판결도 충분히 놀랍다고 할만하다. 정부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본계 미국인(그것도 미국 시민)의 권리 제한을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도 연방대법원 역사상 수치스러운 판결로 남았다. 


여기서 다시 드래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로 돌아가 조금 다르게 보자.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는 트럼프 시대 이래 좌우가 극단적으로 갈려 소위 '문화 전쟁'을 겪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분열은 19세기에도 있었고, 그때는 원인이 노예제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분열성과 극단성은 21세기 들어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시점부터 존재했고, 각종 제도적 장치로 그동안 억눌러오긴 했지만 간간히 터진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세계사에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이 역시 달리 볼 여지가 있다. 규모상 미국 보다 한참 더 작은 나라들에서조차 민족 갈등이나 종교 갈등과 같이 여러 요인에서 기인하는 갈등과 충돌이 빚어지고, 가끔 내전으로 번지거나 국가가 분열되는 경우로도 이어진다. 교과서에 이름이 나온 제국이나 왕국(그리고 공화국)치고 반란과 내전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미국은 공공연하게 '제국'으로 불리고 연구될 정도로(제국으로서의 미국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다니엘 임머바르가 지은 『미국, 제국의 연대기』(2020)를 추천한다) 거대한 국가이다. 50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종도 다양하고 매일 새로운 이민자가 유입되는 나라다. 매일 뉴스만 보면 인종 관련 이슈가 빠지는 날이 없음에도, 미국이 국내 갈등을 법적 절차에 따라 수습하고 봉합하면서 국가적 분열을 어떻게든 차단하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워 보일 정도다.


한편 1969년 브랜든버그 대 오하이오 판결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아이러니가 집약된 KKK단과 관련이 있다. 브랜든버그 대 오하이오 판결은 판결 당시에는 인종주의적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보장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다. 대법원은 "폭력 행위에 대한 옹호와 실행은 구별되어야 마땅하다"는 판결을 내리며 KKK단 지도자 브랜든버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윌리엄 더글러스 대법관은 언론의 자유에는 예외가 없어야한다는 보충의견도 내놓았다. 요컨대 KKK단 단원이 "모든 유색 인종, 유태인, 가톨릭 신자들은 미국땅을 떠나라"(p. 187)고 울부짖을 권리는 있다는 것이다(해당 행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해당 판결은 각종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지금 시대에 '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아야하는가?'라는 문제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판결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KKK단이다. KKK단의 근거지는 주로 남부였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기 당시를 다룬 20세기 초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바로 이 KKK단의 창설 과정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역사가 펼쳐지는 데, 한때 KKK단의 후견인 역할을 한 미국 민주당이 21세기 현재에는 진보적 어젠다를 내세우며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되었다. 반대로 19세기 중반 노예제 해방에 앞장선 공화당은 현재 보수 정당이 되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흥미로운 판결들이 많다. 20세기 후반의 판결들을 보고 있으면 지금 한국 사회가 겪은 많은 문제들에도 참고가 될만한 판결들도 많다. 직장 성희롱 문제를 다룬 1998년 벌링턴 산업 대 앨러스 판결, 예술과 외설의 기준이 문제가 된 1973년 캘리포니아 대 밀러 판결,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둘러싼 1967년 케이시안 대 뉴욕 조립대 이사회 판결 등, 현대 사회의 여러 쟁점들에 참고가 될만한 판결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의 문제를 꼽자면 이 책 자체가 지닌 한계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되었고 2012년까지의 판결만을 수록하고 있다. 2023년 지금 시점에서 몇몇 판결은 뒤집혔다. 대표적으로 2003년 그루터 대 볼링저 판결은 2023년 현재 대법원에서 적극적 우대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뒤집혔다. (2003년 당시 반대의견을 낸 대법원장 토마스 클래런스도 이에 관여했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 역시 작년에 뒤집히면서 미국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 


부연설명 해보자면, 전자의 경우, 어떻게 보면 이미 예견된 결과일 수 있다. 2003년 시점에서 이미 대법원 측에서 적극적 우대조치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당장 판결문에서부터 "지금부터 25년 후 쯤이면 입학 심사에서 소수 인종의 선호는 그 필요성이 없어지리라 본다"(p. 257)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25년 후에 일어날 일이 20년 후에 일어났을 뿐이다.(그만큼 미국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그렇기에 인종을 초월해 미국 여성 전반과 관련된 문제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에 비해 그 파급력이 세보이지 않는다. 한편, 여성의 낙태권과 관련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은, 작년 중간 선거에서 인플레이션 덕분에 한창 기세가 오른 공화당의 이른바 '레드 웨이브'가 별거 아니게 보일 만들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이처럼 과거의 판결이 뒤집히는 사례들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역사의 진보로, 어떤 이에게는 역사의 퇴보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2020년대 들어 뒤집힌 두 건의 판례(로 대 웨이드, 그루터 대 볼링저)를 보자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 역시 미국 사회의 제도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연방 대법원의 판결 자체가 미국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제가 아니라, 문제를 임시 봉합하는 미봉책이 아닌가 한다.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 각자의 삶의 여정이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어느 사회나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미국 대법원에서 동성결혼은 합헌이라 판결내린다고 미국 내의 동성결혼 반대자들이 하루 아침에 그동안 고수한 가치관을 버리고 전향할까?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동성결혼 지지율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개개인 각자의 신념이 하루 아침에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판결을 보고 있으면 사법부의 권위로 사회의 갈등을 잠시 억누르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법원이라는 중재 수단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법원이 없었다면 미국의 모습은 지금과 너무 딴판일 것이다.


이 책이 법률 문제를 다루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미국 사회도, 미국 사회의 연방대법원도 구성원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에 맞춰 법률도 계속 재해석되며 판결도 달라진다. 때문에 새로운 판결이 나오거나 기존의 판결이 뒤집힌다면 그에 맞춰 내용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번 인쇄되면 수정할 수 없는 책이라는 매체로는 그 같은 변화를 반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위키백과가 훌륭한 보완수단이 될 수 있다. 영어가 된다면 영문 위키에서 List of landmark court decisions in the United States 문서를 통해 이 책이 다루지 않거나, 이 책 이후의 이루어진 중요 판결에 관한 내용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연방 대법관에 대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기대는 그 호칭 자체에서 잘 나타난다. 미국에서 정의가 이루졌다Justice has been served는 표현은 악당을 처치하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 속의 히어로가 아니라 실은 재판의 결과를 일컫는다. 즉 적절한 법률적 절차(재판)를 거쳐 나온 공정한 판결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법관을 일컫는 호칭이 정의Justice 자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고 보니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들은 영화 스타워즈에서처럼 멋진 망토를 입고 광선검을 휘날리며 우주 공간을 누비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 D.C. 1번가에서 검은 법복을 입고 앉아 말words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 P22

그러나 대법관들이 항상 순도 100%의 공명정대한 판결, 즉 모두가 이견 없이 인정하는 정의를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연방대법원의 기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예들은 헌법을 통해 연방대법원의 설립을 구상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 즉 삼권분립을 통한 정부 기관들의 상호견제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한 반증일 뿐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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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코스타의 '언어의 뇌과학(El Cerebro Bilingue)'을 읽으며 떠올린 잡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과 크게 상관은 없지만 이중언어자가 '어떤 언어'를 구사하는 가도 중요해 보였다. 


현재의 한국만 따져보자. 지금 한국은 이중언어 구사자에 유리한 환경이 되가는 것 같다. 이유는 여러가지 일 것이다. 이민자 및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세계화로 인한 기업들의 해외 진출, 국제결혼의 증가 등. 수능에서도 영어와 제2외국어 시험을 실시하고 서점가에 외국어 코너를 가보면 다양한 외국어 학습 서적들이 즐비하다. 영어야 말할 것도 없고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교육 기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언어 사이에도 격차가 있다는 것이다. 절대다수 한국인의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외한 외국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를 꼽으라 하면 영어일 것이다. 

영어는 아무래도 다른 언어에 비해 위상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영어보다 사용자 수가 많은 언어가 있긴 하나, 해당 언어가 국제 공용어인가? 라고 다시 물어보면 저절로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특히 지식 생산과 관련해 영어는 압도적이다. 어떤 분야든 새로운 지식과 그 지식을 담아 전달하는 매체는 영어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이 속한 범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의 범주는 뇌과학 일반, 언어학/언어사, 뇌과학/인지심리학이다. 해당 범주로 들어가 번역서의 목록을 쭉 훑어보면 영어권에서 번역된 번역서 비중이 압도적이다.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된 영어권의 무수한 뇌과학 저작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스페인어' 저작이다. 

텍스트가 영어로 생산되고 이어서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경우는 많다. 그런데 그 반대는? 


한국에서 영어의 위치는 여러 경험적 근거로 확인 가능하다. 앞서 서점가의 외국어 코너를 떠올려보자. 영어는 외국어 코너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알라딘은 영어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이트이기도 하다. 먼저 국내 도서에서 '외국어' 분야를 보면 외국어의 하위범주 절반 가량이 영어로 채워져 있다. 토익/토플/텝스/영어회화/영어독해/영어학습법 등등. 나머지 언어들(중국어, 프랑스어, 일본어, 스페인어, 러시아어)이 범주 하나만 할당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어의 독보적인 위상을 체감할 수 있다. 이제 국내 도서 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외국 도서 탭으로 넘어가보자. 여기도 마찬가지다. 역시나 영미도서가 압도적이다. 


교육과정도 마찬가지. 초등, 중등교육과정에서 한국 학생들은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배우고, 대학에 가서 학교나 학원, 인강을 통해 영어 수업을 듣는다. 졸업 후에도 취업을 위해 영어 학원을 다니며 공인 영어시험을 준비한다. 대표적으로 수능은 한국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입지를 아주 잘 드러낸다. 수능은 국어, 수학, 영어, 한국사, 탐구, 제2외국어와 한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어는 국어, 수학과 대등한 과목인 반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은 모조리 제2외국어라는 범주에 속해 있다. 


이외에도 영어가 침투한 사례들을 다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과거 '영어 공용어화론'이 제기되었으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지금 누군가가 영어 공용어화론을 제기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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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뇌과학 - 이중언어자의 뇌로 보는 언어의 비밀 쓸모있는 뇌과학
알베르트 코스타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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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원제는 El Cerebro Bilingue으로 2017년에 출간되었다. 원제와 저자의 이름, 그리고 번역자의 경력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어권에 비해 보기 드문, 스페인어권 저작이다. 


알라딘에서는 이 책을 크게 뇌과학 일반, 언어학/언어학사, 뇌과학/인지심리학 이라는 범주로 구분해놓았다. 각각의 범주를 검색해보면 주로 영어권 저자들의 책이 검색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은 보기 드문 '스페인어권' 저작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간략한 책 소개로 들어가보자.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과학 서적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 답하려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하나의 뇌에 언어가 공존할 있을까?" 책에는 우리가 자주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뇌의 언어적 기능을 알고 싶다면 이중언어 현상을 살펴봐야 한다. 연구를 통해 언어가 주의력, 학습, 감정, 의사 결정 등을 포함한 다른 인지 영역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있다. 이런 점에서 이중언어 사용은 인간 인지(human cognition) 연구에서 창문 역할을 한다. - P9


저자는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부차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특히 이 여행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과연 두 언어에 노출된 아기들은 두 언어를 어떻게 구분할까? 이중언어와 단일언어를 사용하는 아기들의 언어 학습 과정은 어떤 점이 다를까? 이중언어자가 두 언어를 계속하게 해주는 뇌 영역은 어디일까? 이중언어 사용은 다른 인지 능력 발달에 어떤 영향을 줄까? 뇌 손상을 입으면 두 언어가 어떻게 손상될까? 제2언어(외국어) 사용은 의사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 P9


그리고 이에 맞춰 가설을 세우고, 해당 가설을 입증하는 연구 자료를 제시하여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나간다. 사실 저자가 이 책에서 답하려는 내용은 프롤로그에 언급되어 있다.


1장에서는 어린아이가 언어를 동시에 학습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살핀다. - P13


2장에서는 성인 이중언어자의 뇌에서 언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다룬다. 특히, 인지 신경과학과 신경심리학을 바탕으로 연구를 살핀다. - P13


3장에서는 일반적인 언어 처리 과정에서 이중언어 학습 사용 결과를 분석할 것이다. - P14


4장에서는 이중언어 사용이 다른 인지 능력, 특히 주의 체계(attentional system) 발달에 끼치는 영향을 중점적으로 것이다. - P14


마지막 5장에서는 2언어(외국어) 사용이 의사 결정 과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본다. - P14


여기서 각 장의 내용을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1장은 이중언어에 노출된 아기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는 장이다. 정확히는 두 언어에 노출된 아기가 두 언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아기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끊임없이 언어를 흡수한다. 그것이 단일언어든, 이중언어든. 아기들은 말하는 사람의 입모양을 보면서 무슨 언어를 말하는지 구분할 줄 안다. 또한 서로 다른 말을 들으면서 언어를 구분할 줄도 안다. 다만 언어에 단순히 노출되기 보다는 상호작용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결과는 사회적 접촉이 외국어 학습에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 작용할 있는 환경에 있지 않고 단순히 언어만 노출시킨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을 때보다는 누군가와 상호 작용을 아이의 집중력과 동기가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자녀가 외국어를 배우길 바란다면, 동영상이 일을 대신 해줄 거로 너무 기대하지 말고 언어를 사용해서 아이와 놀아주길 바란다. - P52


아울러 언어는 아이들이 편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피부색이 같지만 영어를 할 때 외국인 억양이 있는 아이보다는 피부색이 달라도 모국어처럼 영어를 하는 아이들과 더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즉 그들의 원하는 친구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는 피부색보다 말하는 방식이었다. - P54 



2장에서 저자는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나의 뇌에 두 언어가 공존하는가, 그리고 두 언어를 계속 사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P. 60). 처음에 저자는 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의 언어 능력과 관련된 연구들을 소개하고 이어서는 이중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중언어자에 대해 논의로 넘어간다. 2장에서 저자는 언어를 자유롭게 전환하는 이중언어자를 두고 저글링을 하는 곡예사로 표현한다. 하지만 언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책에서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장기간 쓰지 않아 한국어를 잃어버린 사례가 언급된다.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의 언어 행동 연구와 뇌 영상 기술을 통해 확보한 건강한 사람의 뇌 활동 평가로 이중언어자의 언어 사용이 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뇌에서 언어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언어를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사용(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다가왔길 바란다. - P102


3장의 제목은 '이중언어를 하면 뇌가 어떻게 변할까'이다. 3장에서 주로 제시되는 가설과 연구들은 이중언어가 언어 처리 및 다른 인지, 뇌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의외로 3장은 이중언어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비교하면서 시작된다.


이중언어 사용이 일반적으로 언어 사용과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수십 년 전이긴 하지만, 이중언어 사용이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상가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극단적인 의견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중언어 사용이 가져올 수 있는 악영향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 P104


한편, 최근의 어떤 연구에서는 이중언어 사용이 특정 인지 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이중언어자가 '더 똑똑하다'(P106)고 선전했다. - PP105-106.


그러나 저자가 관심을 가지는 지점은 이중언어 사용 경험이 뇌의 언어 처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여기서 저자는 어느 한 편을 들지 말고 사람들의 언어 능력에 대해 신중히 말할 것을 강조한다. 이중언어 사용은 분명 뇌 구조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긴 하나 영향을 끼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중언어 사용은 우리의 언어 발달과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중언어 경험이 주는 혜택이나 문제에 대해 글이나 말을 접할 신중해야 한다. 적어도, 과학을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 P141


4장에서는 이중언어 구사자의 주의력을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책에 언급된 실험 결과에 따르면 단일언어 사용자에 비해 이중언어 사용자가 갈등 해결 측면에서 뛰어나다. 이어서 다중작업, 즉 멀티태스킹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결론은 이중언어 사용이 주의 체계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노화로 인한 인지 저하와 이중언어간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저자는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인지력 감퇴를 방지하는 실험적 증거는 있으나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마무리한다. 


5장은 감옥에서 적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를 배운 넬슨 만델라를 인용하며 시작된다. 


어쨌건 만델라가 했던 말 중에 도움이 될 만한 문구가 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머리로 간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가슴으로 간다." 어쩌면 만델라가 적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염두에 두었던 말일 수도 있다. 그는 도리에 맞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길 원했다. - P183


이어서는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을 따져본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리 합리적이지 못하다.


우리 행동의 기대 가치를 극대화하고 문제의 여러 변수를 늘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위대한 경제 사상가들이 말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우리의 결정은 신중하고 합리적인 유형보다는 직관적 과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 P195


나아가 저자는 외국어가 우리의 감정에, 그리고 의사 결정에 얼마나 관여하는지를 밝힌다. 저자는 I love you와 Te quiero 중 모국어인 후자에 더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예전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때 외국에서 잠깐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어로 말했으면 낯 뜨거웠을 말을 영어로는 잘도 뻔뻔하게 말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다시 저자가 언급하는 사례로 돌아가자면, 여러 도덕적 딜레마를 모국어로 접했을 때와 외국어로 접했을 때 차이가 있다. 그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도 여기에 언급된다. 트롤리 딜레마 같은 도덕적 딜레마를 접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그 반응이 다르다. 해당 딜레마를 모국어로 접할 때에 비해 외국어로 접했을 때 피험자들은 보다 냉철하고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책에서 저자가 염려하는 점은 누군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이중언어자와 단일언어자를 비교하면서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거나 한쪽을 폄하하는 것이다. 저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과학이 남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처럼 과학을 이용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다.


아울러 저자는 도중에 본인의 경험에 의거해 과학계에 만연한 관습을 비판하는 모습도 잠시 보인다. 과학적 실험 그 자체가 아니라 연구 결과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 연구자의 연구물 출간 여부가 결정되며 그 결과 많은 연구가 발표되지 못한다. 저자는 실험 결과가 부정적이더라도 다른 연구자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샀던 이유,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외국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언급되지만 이 책은 어떻게 외국어를 공부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실용서적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이중언어의 사용과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논의를 다루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이중언어의 습득과 구사 과정에서 아기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뇌가 얼마나 경이롭게 작동하는가 알려주는 교양 과학서이다. 특히 외국어가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5장은 독자에게 다른 의미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마지막으로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장점이 될 수 있겠다. 이 책은 참고문헌을 포함하여 232페이지에 불과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머리로 간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가슴으로 간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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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 WORD POWER made easy : 미국 대학 최고의 영단어 명강의 - 미국 대학 최고의 영단어 명강의, 개정판
노먼 루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윌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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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3개의 파트, 12개의 챕터, 44개의 레슨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 챕터 하나 마다 2~3개의 레슨으로 이루어진다. 각 레슨마다 복습용 퀴즈와 연습문제가 수록되어 있고 1개의 챕터가 끝나면 챕터 전체를 복습하는 테스트가 수록되어 있다. 레슨 별로 또 구성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보통 한 챕터에서 첫 번째 레슨은 해당 챕터의 테마 및 그에 해당하는 주요 어휘들을 소개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레슨은 첫 번째 레슨에서 다룬 어휘들의 어근과 어원을 자세히 설명하고 주요 어휘들에서 파생되는 단어들을 학습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특징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첫째, 평소에는 접하기 쉽지 않은 영어 어휘가 등장한다. 둘째, 구체적인 테마(의사, 전문직, 성격 등등)로 어휘를 분류하고 해당 어휘를 이루는 어근과 그에 붙는 접두사, 접미사의 어원, 형태상의 변화 등을 분석하여 해당 어휘들을 해부한다. 셋째, 단어를 구성하는 어근의 유래를 살펴보면서 단어와 단어가 지닌 의미를 쉽게 연결 짓게 해준다. 


가령 이 책 챕터3에서 다루는 psyche라는 어근을 예로 들어 보자.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어근은 영어로 mind, soul, spirit에 해당하며 치료(medical healing)을 의미하는 -iatreia와 결합하여 psychiatrist(정신과 의사), 학문(science, study)를 의미하는 -logos와 붙어 psychologist, psychology, psychological 등의 단어를, 이외에도 -pathos(=suffering, disease)와 붙어 psychopathic, psychopathy, psychopath, -soma(=body)와 붙어 psychosomatic 등등의 단어를 만들어 낸다. 복잡한 단어들이 나오긴 하나 일단 psyche라는 어근을 인지할 수 있다면, 영어를 접할 때 psych-로 시작하는 생소한 단어를 만나도 의미를 대강 유추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와 같이 다양한 어근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레슨이 끝나면 풀게 되는 퀴즈에는 해당 레슨에서 학습한 어근에 관한 퀴즈도 꼭 들어가 있다. 


다만 이 책은 내용에서나 분량에서나 절대 쉽지 않다. 우선 두껍다. 책 페이지만 해도 632페이지다. 게다가 이 책의 학습량도 만만찮다. 아예 책에서 '개인차에 따라 최소 48일에서 0일, 혹은 그 이상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사람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레슨 1개의 내용을 그날 완벽히 습득하기도 어렵다.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도 일이다. 완벽히 공부했다쳐도 시간이 지나면 학습한 내용을 자연스럽게 망각하므로 복습을 해줘야 한다.


그렇기에 이 책 하나만 읽는다고 영어 어휘를 마스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이 책은 기본이고, 계속 새로운 어휘를 접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뒤따라야만 한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목표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새로운 어휘를 끊임없이 습득하라고 조언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어) 글을 많이 읽고 새로운 어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책등이나 책 앞표지를 보면 '미국 대학 최고의 영단어 명강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즉 이 문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책의 원서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미국 학생을 독자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을 소화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 거기다가 새로운 어휘까지 꾸준히 습득하려면 앞으로 얼마만큼 노력해야 하는지! 


어쨌든 이 책은 단기간에 고득점 획득이 목표인 공인 영어 시험보다는 어려운 영어 원서나 〈뉴요커(The New Yorker)〉같이 단어 수준이 높은 영어 매체를 읽고자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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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스캔들 - 누구의 그림일까?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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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0년대 중후반에 이슈가 된 '조영남 대작 사건'을 두고 저자가 펼친 주장과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루어져 있다. 해당 사건에 직접 관여한 저자의 심정은 다음의 인용 구절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조영남은 (본의 아니게) 우리 미술계에 한 가지 중요한 의제를 던져주었다. 바로 미술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의제다. 대중은 이 사건에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나는 외려 이미 수십 년 전에 창작의 정상적인 방법으로 확립된 그 관행을 여전히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를 절망시킨 것은 현업에 종사하는 화가, 비평가, 이론가마저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대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 P5


정작 나는 해당 사건이 공론화 되었을 당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은 이 사건에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는 저자의 언급에 비춰보자면 나 역시 이 책을 펼칠 당시 이런 대중에 속했다고 볼 수 있겠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책의 구성을 크게 4부 14장으로 나누었다고 밝힌다. 1부(1-8장)에서는 중세 말 르네상스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사 속에서 '저자성'(간단히 말해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핀다. 2부(9-10장)에서는 조영남 사건 당시 저자가 매체에 기고한 기고문으로 저자성의 현대적 기준을 설명한다. 3부(11-13장)는 당시 저자에게 반론을 제기한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저자가 펼친 재반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4부(14장)에서는 법적 측면에서 해당 사건을 검토한다. 


서양 미술사에 관해서는 중고교 시절에 배운 얄팍한 지식밖에 없기에, 다른 장에 비해 1부가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저자는 1부를 열면서 '우리'가 그동안 서양 미술사를 바라본 관점이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역사와 관련해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바로 제 시대의 기준을 과거로 투사하는 것이다. 미술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르네상스 시대에도 예술문화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두 시대의 문화는 너무나 다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시대의 예술관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예술관념을 이해하지 못할 게다. 르네상스를 1250년과 1550년 사이로 잡는다면 우리의 예술제도는 18세기 이후에, 그리고 우리의 예술가상은 19세기 이후에 탄생한 것이다. 두 문화 사이에는 무려 수백 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이 엄청난 간극을 무시하고 우리의 예술관념을 그 시대로 투사하는 것은 엄청난 시대착오다. - P18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의 미술 작품을 재단하려는 시대착오적 사례로는 렘브란트를 근대철학의 선구자로 바라보는 관점을 들 수 있다.


서구의 근대철학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내성철학, 의식으로 의식 안을 들여다보는 반성철학, 자기의 속말을 자기가 듣는 s‘entendre parler 독백철학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위의 여러 기술들은 렘브란트를 벌써 이 내성적 주체, 반성적 주체, 자기와 대화하는 고독한 존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데카르트의 《성찰》이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때다. 이것으로 보아 위의 여러 기술들은 데카르트 이후의 관념을 데카르트 이전의 화가에게 투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 P60


1부에서 저자는 이 같은 시대착오가 어떤 점에서 오류인지 드러내고 그러한 오류의 근원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밝힌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는 누구나 알만한 화가들(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 들라크루아, 고흐 등)의 '작품 제작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사족을 덧붙이자면, 본서는 유명 화가들의 명작들을 꽤 수록해놓았다.) 


중세 당시 '장인'에 가까웠던 '예술가'는 점차 장인에서 탈피해 독자적인 '예술가'로 거듭났다. 책의 내용에 의하면 대다수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친작', 즉 직접 그린 작품도 물론 있긴 했지만,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들이 조수들에게 작품 제작을 맡기는 경우도 많았고 해당 관행이 문제로 불거지지도 않았다. 책에서 제시되는 사례 중 한 가지는 네덜란드의 화가들이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공장제 작품 제작 방식을 채택하였다.


사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시장을 위한 생산을 했다. 발달한 상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그림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고, 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화가들의 워크숍에서는 거의 공장에 가까운 시스템으로 이른바 ‘어셈블리라인 회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구입하는 일반대중은 그림의 저자가 누구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사가 주로 그림의 주제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제자의 그림에 자기 사인을 하거나 그마저 제자에게 시키는 관행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 시절에 사인은 브랜드, 즉 상표의 역할을 했다. - P77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연히 떠올리는 이미지, '캔버스 앞에 앉아 매순간 고뇌하며 창작하는 화가'라는 이미지는 어디서 왔을까? 저자는 그 같은 이미지가 바로 낭만주의-인상주의를 거치며 형성된 결과물이라 말한다.


조금 상세히 설명해보자면, 낭만주의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정착된 예술관행이었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예술의 소비층이 귀족계급에서 시민계급으로 바뀌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물의 생산방식이 주문제작에서 시장생산으로 바뀜에 따라 작가 역시 더 이상 '주문자'에게 의뢰를 받지 않고 '작품의 제작이 전적으로 작가에게'(P113) 맡겨지게 되었다. 이 두 가지 혁명은 낭만주의적 관념이 예술의 관행으로 자리잡는 데 일조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낭만주의적 예술은 어떤 특징을 지닐까?


예술의 낭만주의적 관념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미의 주관화다. (...) 이제 작가들은 작품에 담을 최고의 미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기 시작한다. 예술의 관념이 외부의 미를 ‘재현‘하는 것에서 내면의 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작품의 실행을 타인이 대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타인이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잖은가.

둘째, 예술의 신비화다. 고전주의자들은 예술을 이성적 활동으로 규정했다. 예술이란 합리적 규칙에 따른 제작활동이라는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을 초超이성적 활동으로 보았다. - P113

 

셋째, 예술가의 영웅화다. 고전적 예술가의 상은 ‘장인‘maestro이었다. 장인이란 오랜 훈련과 실전을 통해 창작의 모든 규칙과 기법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경지에 이른 이를 가리킨다. 반면 낭만적 예술가의 모범은 ‘천재’genius였다. 천재란 창작에 필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탁월하고 예외적인 개인을 가리킨다. 낭만주의 시대에 예술의 천재는 거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된다. 중세에 성인들의 자취가 담긴 성 유물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듯이 이 세속적 성인들의 손길이 스친 작품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바로 여기서 친작에 대한, 거의 종교적 열정에 가까운 집착이 생기는 것이다. - P114


이 같은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로 소환되는 이는 들라크루아다. 그러나 들라크루아 조차도 조수를 적극 활용한 점에서 낭만주의를 대표하지만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P125) 작가였다. 저자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로 인해 '낭만적 관념'이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이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을 포착하려 했고, 그 결과 창작은 조수가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외롭고 고독한 작업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부에서 저자가 재구성한 미술사는 우리의 통념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밝혀내어 통념을 깨부순다. 저자의 주장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 머리 속의 '손수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상상된' 신화다. 이 신화는 19세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를 거치며 등장하였으며, 그 정점에는 고흐가 위치한다.


오늘날 많은이들이 여전히 신화화한 고흐의 이미지를 화가의 전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허구와 뒤섞인 고흐의 이미지를 화가 일반에 투사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고흐는 화가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외에 가깝다. - P154

 

화가의 신화는 당연히 창작의 신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낭만주의적 관념에 따르면 창작은 미쳐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예술을 위해 작가는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며, 예술 작품이란 그 고통의 결정체이기에 관객은 거기서 작가의 정신적 고뇌와 신체적 고투의 자취를 읽는다. 이런 관념을 가진 이들에게는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런 행위를 "예술에 대한 모독" 혹은 "예술가들에 대한 모독"이라 부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관념이 너무 낡았다는 데에 있다. - P155


적어도 이 책의 미술사에서 고흐는 종래의 화가들에 비해 예외적 존재이다. 고흐는 생전에는 예외적 존재였으나 사후에는 화가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저자는 이 같은 사실을 들추면서 '상식'으로 주입된 '상상으로서의 역사' 혹은 '신화로서의 역사'를 무너뜨린다. (물론 역사 서술은 그 본질 상 저자의 주관이 항상 개입될 수 밖에 없고, 개입되어야만 하기에 늘 '상상된 신화'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한편 1부 7장 아우라의 파괴는 20세기 미술사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장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나 개념들을 쉽게 설명해준다. 발터 베냐민이 제시한 저 유명한 '아우라' 라던가, 아우라의 파괴가 지니는 의미라던가(간단히 말해 예술의 민주화라 할 수 있겠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듯한 현대 미술 작품들이 어째서 비평가들에게 극찬 받는가 등.


20세기 미술사에서 핵심은 역시 산업혁명과 기술이 가져다 준 변화일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물의 세계를, 그리고 사진술은 영상의 세계를 각각 원작에서 복제로 바꾸어 놓았다. 사물과 영상의 세계가 달라지면 지각의 방식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예술의 성격도 변할 수밖에 없다. 워홀은 그 누구보다 철저히 창작 과정에 대량생산의 방식을 관철했다. 그에게는 작가의 아우라도, 작품의 아우라도, 창작의 아우라도 없다. 그에게 작가는 대중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존재이고, 작품은 범상한 것 중에서도 가장 범상한 대상이며, 창작은 공장의 대량생산을 닮은 기계적 과정일 뿐이다. 워홀에 이르러 뒤샹이 주장한 비미학의 상태가 객관적 현실이 된다. - P191


2부의 내용이긴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20세기 미술사에서 일어난 변화가 지니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발터 베냐민은 그 유명한 논문에서 복제기술로 인해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인 것에서 기능적인 것으로 변하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즉 과거에는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이어서 저자는 쓰기만 하고 독자는 읽기만 했다. 하지만 복제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제 글을 복제·배포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독자도 저자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이들의 과거 저자들이 읽을 수도 있다. 이로써 저자와 독자 사이를 갈라놓았던 신분제가 무너진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저자가 되느냐 독자가 되느냐는 이제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기능의 문제가 된 것이다.

베냐민은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본다. 과거에 ‘예술가‘는 특정한 이들만 가질 수 있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복제기술에 힘입어 누구나 원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세기의 작가들은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아우라마저 파괴함으로써 복제기술이 열어준 이 평등주의를 작업 속에 구현하려 했다. - P213

 

예술 창작에 공장제 대량생산을 도입함으로써 워홀은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누구도 더 이상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 말에는 동시에 다른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시대에는 누구나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냐민은 사진이 전통적 예술(회화)이기를 포기하고 저 자신(기술)으로 머물 때 비로소 미학성을 띤다고 지적한다. 그 역설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머리에 아우라를 뒤집어쓴 과거의 예술가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스스로 아우라를 치우고 대중과 같아질 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 P215

 

복제기술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진화하면서 삶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려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대중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독자는 웹툰을 통해 만화가가 되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기자가 되고,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칼럼니스트가 된다. 나아가 유튜브를 통해 소형영화 감독이 되고, 팟캐스트를 통해 아예 방송국이 된다. 90년 전 베냐민의 비전이 실현된 것이다. - P215


부끄럽게나마 몇 번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신분' 관계에서 '기능' 관계로의 변화가 특별히 체감되는 점이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글이라도 독자가 서평이나 리뷰를 쓰는 순간, 독자와 작가 사이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무너지고, 독자와 작가는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1부는 이어지는 2, 3, 4부에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기능한다. 2, 3부에서 비판의 대상이나 설명하는 주안점이 다르긴 하지만 저자의 핵심적이고 일관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친작'을 근거로 '대작'을 비난하는 행위는 시대착오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오히려 '친작'이야 말로 19세기 낭만주의,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등장한 예외다. 19세기의 미술을 근거로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대작' 행위를 비난하는 바는 오히려 20세기 현대 미술이 성취한 바를 부정하고 19세기로 돌아가는 퇴행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부는 '조영남 사건'을 미술계 내부의 논쟁으로 해결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사법부로 올려 보내 법이 현대 미술의 불문율과 관행을 침해한 상황을 비판하는 장이다. 


이 같은 사태의 전개를 두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 부분을 하나 인용해보자.


내가 보기에 검찰이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예를 들어 검찰에서 축구 경기장에 들어와 태클로 상대 팀 선수를 다치게 한 선수를 ‘과실치상‘으로, 혹은 고의성이 있다고 ‘폭행치상‘으로 기소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지금 검찰이 하는 일은 그와 다르지 않다. 스포츠에도 법이 건드릴 수 없는 규칙이 있듯이 예술에도 법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검찰이 그 경계선을 침범했는데, 다들 이 심각한 문제를 아예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 P232


책에 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자. 뉴스를 검색해보면 '조영남 사건'은 이제 화젯거리로 보기 힘들다. 나조차도 이 글을 쓰면서 '조영남 사건'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이 책은 2020년대 들어 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본다. 바로 AI의 등장 덕분이다. 


2018년 AI가 생성한 초상화가 앤디 워홀의 작품보다 비싸게 팔렸다는 뉴스가 나왔다. 단지 해당 사건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2022년 가을 미국에서 AI로 그림을 생성하여 수상한 사례는 2018년 시점에서 이미 예견된 일었다. 


AI가 등장하면서 이제 누구나 명령어를 입력하고 마우스 버튼 몇 번 클릭하는 것 만으로 그림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 AI로 만들어낸 그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해야 하는 가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갔다. 어떤 기사 제목에서는 '예술의 사망'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저자성'에 바탕을 두고 재구성한 미술사의 흐름에 비추어보자면 미술에서 AI 문제를 달리볼 여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종래에는 예술가가 아이디어를 내고 조수가 아이디어를 실행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었다면, AI의 등장은 단지 '조수'가 AI로 대체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아울러 앞에서 언급된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미술사의 각 시기가 지니는 고유한 컨텍스트 및 21세기 현 시점의 컨텍스트를 따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전문가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은 (AI가 화두에 오르기 이전의 책이므로 AI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으나) AI가 등장한 작금의 상황을 파악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술의 사망'과 같은 식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무의미하다. 반대로, 앞으로 미술에서, 그리고 다른 분야들에서 AI가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를 따져보는 게 더 건설적이다. 이 책은 미술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 그 같은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있다. 


요약해보자. 한편으로는 중세 말 르네상스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의 흐름을 다른 각도(예컨대 '저자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기존의 서양 미술사를 달리 볼 여지와 관점을 전해준다. 아울러 20세기 이후 복잡해지는 미술사를 아주 쉽게 설명해준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 한편, 이 책이 제시하는 관점은 AI의 등장과 같은 사례가 보여주듯 변화의 복판에 있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도 도움을 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 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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