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뇌과학 - 이중언어자의 뇌로 보는 언어의 비밀 쓸모있는 뇌과학
알베르트 코스타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 원제는 El Cerebro Bilingue으로 2017년에 출간되었다. 원제와 저자의 이름, 그리고 번역자의 경력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어권에 비해 보기 드문, 스페인어권 저작이다. 


알라딘에서는 이 책을 크게 뇌과학 일반, 언어학/언어학사, 뇌과학/인지심리학 이라는 범주로 구분해놓았다. 각각의 범주를 검색해보면 주로 영어권 저자들의 책이 검색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은 보기 드문 '스페인어권' 저작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간략한 책 소개로 들어가보자.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과학 서적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 답하려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하나의 뇌에 언어가 공존할 있을까?" 책에는 우리가 자주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뇌의 언어적 기능을 알고 싶다면 이중언어 현상을 살펴봐야 한다. 연구를 통해 언어가 주의력, 학습, 감정, 의사 결정 등을 포함한 다른 인지 영역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있다. 이런 점에서 이중언어 사용은 인간 인지(human cognition) 연구에서 창문 역할을 한다. - P9


저자는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부차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특히 이 여행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과연 두 언어에 노출된 아기들은 두 언어를 어떻게 구분할까? 이중언어와 단일언어를 사용하는 아기들의 언어 학습 과정은 어떤 점이 다를까? 이중언어자가 두 언어를 계속하게 해주는 뇌 영역은 어디일까? 이중언어 사용은 다른 인지 능력 발달에 어떤 영향을 줄까? 뇌 손상을 입으면 두 언어가 어떻게 손상될까? 제2언어(외국어) 사용은 의사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 P9


그리고 이에 맞춰 가설을 세우고, 해당 가설을 입증하는 연구 자료를 제시하여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나간다. 사실 저자가 이 책에서 답하려는 내용은 프롤로그에 언급되어 있다.


1장에서는 어린아이가 언어를 동시에 학습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살핀다. - P13


2장에서는 성인 이중언어자의 뇌에서 언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다룬다. 특히, 인지 신경과학과 신경심리학을 바탕으로 연구를 살핀다. - P13


3장에서는 일반적인 언어 처리 과정에서 이중언어 학습 사용 결과를 분석할 것이다. - P14


4장에서는 이중언어 사용이 다른 인지 능력, 특히 주의 체계(attentional system) 발달에 끼치는 영향을 중점적으로 것이다. - P14


마지막 5장에서는 2언어(외국어) 사용이 의사 결정 과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본다. - P14


여기서 각 장의 내용을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1장은 이중언어에 노출된 아기에 관한 연구를 소개하는 장이다. 정확히는 두 언어에 노출된 아기가 두 언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아기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끊임없이 언어를 흡수한다. 그것이 단일언어든, 이중언어든. 아기들은 말하는 사람의 입모양을 보면서 무슨 언어를 말하는지 구분할 줄 안다. 또한 서로 다른 말을 들으면서 언어를 구분할 줄도 안다. 다만 언어에 단순히 노출되기 보다는 상호작용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결과는 사회적 접촉이 외국어 학습에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 작용할 있는 환경에 있지 않고 단순히 언어만 노출시킨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을 때보다는 누군가와 상호 작용을 아이의 집중력과 동기가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자녀가 외국어를 배우길 바란다면, 동영상이 일을 대신 해줄 거로 너무 기대하지 말고 언어를 사용해서 아이와 놀아주길 바란다. - P52


아울러 언어는 아이들이 편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피부색이 같지만 영어를 할 때 외국인 억양이 있는 아이보다는 피부색이 달라도 모국어처럼 영어를 하는 아이들과 더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즉 그들의 원하는 친구를 결정할 때 중요한 요소는 피부색보다 말하는 방식이었다. - P54 



2장에서 저자는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나의 뇌에 두 언어가 공존하는가, 그리고 두 언어를 계속 사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P. 60). 처음에 저자는 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의 언어 능력과 관련된 연구들을 소개하고 이어서는 이중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중언어자에 대해 논의로 넘어간다. 2장에서 저자는 언어를 자유롭게 전환하는 이중언어자를 두고 저글링을 하는 곡예사로 표현한다. 하지만 언어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책에서 프랑스에 입양된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장기간 쓰지 않아 한국어를 잃어버린 사례가 언급된다.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의 언어 행동 연구와 뇌 영상 기술을 통해 확보한 건강한 사람의 뇌 활동 평가로 이중언어자의 언어 사용이 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뇌에서 언어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언어를 아는 것 뿐만 아니라, 사용(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다가왔길 바란다. - P102


3장의 제목은 '이중언어를 하면 뇌가 어떻게 변할까'이다. 3장에서 주로 제시되는 가설과 연구들은 이중언어가 언어 처리 및 다른 인지, 뇌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의외로 3장은 이중언어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비교하면서 시작된다.


이중언어 사용이 일반적으로 언어 사용과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수십 년 전이긴 하지만, 이중언어 사용이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상가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극단적인 의견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중언어 사용이 가져올 수 있는 악영향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 P104


한편, 최근의 어떤 연구에서는 이중언어 사용이 특정 인지 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이중언어자가 '더 똑똑하다'(P106)고 선전했다. - PP105-106.


그러나 저자가 관심을 가지는 지점은 이중언어 사용 경험이 뇌의 언어 처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여기서 저자는 어느 한 편을 들지 말고 사람들의 언어 능력에 대해 신중히 말할 것을 강조한다. 이중언어 사용은 분명 뇌 구조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긴 하나 영향을 끼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중언어 사용은 우리의 언어 발달과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중언어 경험이 주는 혜택이나 문제에 대해 글이나 말을 접할 신중해야 한다. 적어도, 과학을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 P141


4장에서는 이중언어 구사자의 주의력을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책에 언급된 실험 결과에 따르면 단일언어 사용자에 비해 이중언어 사용자가 갈등 해결 측면에서 뛰어나다. 이어서 다중작업, 즉 멀티태스킹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결론은 이중언어 사용이 주의 체계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노화로 인한 인지 저하와 이중언어간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저자는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인지력 감퇴를 방지하는 실험적 증거는 있으나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마무리한다. 


5장은 감옥에서 적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를 배운 넬슨 만델라를 인용하며 시작된다. 


어쨌건 만델라가 했던 말 중에 도움이 될 만한 문구가 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머리로 간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가슴으로 간다." 어쩌면 만델라가 적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염두에 두었던 말일 수도 있다. 그는 도리에 맞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들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길 원했다. - P183


이어서는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을 따져본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그리 합리적이지 못하다.


우리 행동의 기대 가치를 극대화하고 문제의 여러 변수를 늘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위대한 경제 사상가들이 말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우리의 결정은 신중하고 합리적인 유형보다는 직관적 과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 P195


나아가 저자는 외국어가 우리의 감정에, 그리고 의사 결정에 얼마나 관여하는지를 밝힌다. 저자는 I love you와 Te quiero 중 모국어인 후자에 더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예전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때 외국에서 잠깐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어로 말했으면 낯 뜨거웠을 말을 영어로는 잘도 뻔뻔하게 말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다시 저자가 언급하는 사례로 돌아가자면, 여러 도덕적 딜레마를 모국어로 접했을 때와 외국어로 접했을 때 차이가 있다. 그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도 여기에 언급된다. 트롤리 딜레마 같은 도덕적 딜레마를 접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그 반응이 다르다. 해당 딜레마를 모국어로 접할 때에 비해 외국어로 접했을 때 피험자들은 보다 냉철하고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책에서 저자가 염려하는 점은 누군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이중언어자와 단일언어자를 비교하면서 어느 한쪽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거나 한쪽을 폄하하는 것이다. 저자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과학이 남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처럼 과학을 이용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다.


아울러 저자는 도중에 본인의 경험에 의거해 과학계에 만연한 관습을 비판하는 모습도 잠시 보인다. 과학적 실험 그 자체가 아니라 연구 결과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 연구자의 연구물 출간 여부가 결정되며 그 결과 많은 연구가 발표되지 못한다. 저자는 실험 결과가 부정적이더라도 다른 연구자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샀던 이유,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외국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언급되지만 이 책은 어떻게 외국어를 공부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실용서적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이중언어의 사용과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논의를 다루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이중언어의 습득과 구사 과정에서 아기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뇌가 얼마나 경이롭게 작동하는가 알려주는 교양 과학서이다. 특히 외국어가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5장은 독자에게 다른 의미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마지막으로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장점이 될 수 있겠다. 이 책은 참고문헌을 포함하여 232페이지에 불과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머리로 간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상대방의 가슴으로 간다." - P1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 WORD POWER made easy : 미국 대학 최고의 영단어 명강의 - 미국 대학 최고의 영단어 명강의, 개정판
노먼 루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윌북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3개의 파트, 12개의 챕터, 44개의 레슨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 챕터 하나 마다 2~3개의 레슨으로 이루어진다. 각 레슨마다 복습용 퀴즈와 연습문제가 수록되어 있고 1개의 챕터가 끝나면 챕터 전체를 복습하는 테스트가 수록되어 있다. 레슨 별로 또 구성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보통 한 챕터에서 첫 번째 레슨은 해당 챕터의 테마 및 그에 해당하는 주요 어휘들을 소개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레슨은 첫 번째 레슨에서 다룬 어휘들의 어근과 어원을 자세히 설명하고 주요 어휘들에서 파생되는 단어들을 학습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특징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첫째, 평소에는 접하기 쉽지 않은 영어 어휘가 등장한다. 둘째, 구체적인 테마(의사, 전문직, 성격 등등)로 어휘를 분류하고 해당 어휘를 이루는 어근과 그에 붙는 접두사, 접미사의 어원, 형태상의 변화 등을 분석하여 해당 어휘들을 해부한다. 셋째, 단어를 구성하는 어근의 유래를 살펴보면서 단어와 단어가 지닌 의미를 쉽게 연결 짓게 해준다. 


가령 이 책 챕터3에서 다루는 psyche라는 어근을 예로 들어 보자.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어근은 영어로 mind, soul, spirit에 해당하며 치료(medical healing)을 의미하는 -iatreia와 결합하여 psychiatrist(정신과 의사), 학문(science, study)를 의미하는 -logos와 붙어 psychologist, psychology, psychological 등의 단어를, 이외에도 -pathos(=suffering, disease)와 붙어 psychopathic, psychopathy, psychopath, -soma(=body)와 붙어 psychosomatic 등등의 단어를 만들어 낸다. 복잡한 단어들이 나오긴 하나 일단 psyche라는 어근을 인지할 수 있다면, 영어를 접할 때 psych-로 시작하는 생소한 단어를 만나도 의미를 대강 유추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와 같이 다양한 어근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레슨이 끝나면 풀게 되는 퀴즈에는 해당 레슨에서 학습한 어근에 관한 퀴즈도 꼭 들어가 있다. 


다만 이 책은 내용에서나 분량에서나 절대 쉽지 않다. 우선 두껍다. 책 페이지만 해도 632페이지다. 게다가 이 책의 학습량도 만만찮다. 아예 책에서 '개인차에 따라 최소 48일에서 0일, 혹은 그 이상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사람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레슨 1개의 내용을 그날 완벽히 습득하기도 어렵다.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도 일이다. 완벽히 공부했다쳐도 시간이 지나면 학습한 내용을 자연스럽게 망각하므로 복습을 해줘야 한다.


그렇기에 이 책 하나만 읽는다고 영어 어휘를 마스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이 책은 기본이고, 계속 새로운 어휘를 접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뒤따라야만 한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목표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새로운 어휘를 끊임없이 습득하라고 조언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어) 글을 많이 읽고 새로운 어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책등이나 책 앞표지를 보면 '미국 대학 최고의 영단어 명강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즉 이 문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이 책의 원서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미국 학생을 독자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 책을 소화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 거기다가 새로운 어휘까지 꾸준히 습득하려면 앞으로 얼마만큼 노력해야 하는지! 


어쨌든 이 책은 단기간에 고득점 획득이 목표인 공인 영어 시험보다는 어려운 영어 원서나 〈뉴요커(The New Yorker)〉같이 단어 수준이 높은 영어 매체를 읽고자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학 스캔들 - 누구의 그림일까?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2010년대 중후반에 이슈가 된 '조영남 대작 사건'을 두고 저자가 펼친 주장과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루어져 있다. 해당 사건에 직접 관여한 저자의 심정은 다음의 인용 구절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조영남은 (본의 아니게) 우리 미술계에 한 가지 중요한 의제를 던져주었다. 바로 미술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의제다. 대중은 이 사건에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나는 외려 이미 수십 년 전에 창작의 정상적인 방법으로 확립된 그 관행을 여전히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를 절망시킨 것은 현업에 종사하는 화가, 비평가, 이론가마저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대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 P5


정작 나는 해당 사건이 공론화 되었을 당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은 이 사건에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는 저자의 언급에 비춰보자면 나 역시 이 책을 펼칠 당시 이런 대중에 속했다고 볼 수 있겠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책의 구성을 크게 4부 14장으로 나누었다고 밝힌다. 1부(1-8장)에서는 중세 말 르네상스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사 속에서 '저자성'(간단히 말해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핀다. 2부(9-10장)에서는 조영남 사건 당시 저자가 매체에 기고한 기고문으로 저자성의 현대적 기준을 설명한다. 3부(11-13장)는 당시 저자에게 반론을 제기한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저자가 펼친 재반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4부(14장)에서는 법적 측면에서 해당 사건을 검토한다. 


서양 미술사에 관해서는 중고교 시절에 배운 얄팍한 지식밖에 없기에, 다른 장에 비해 1부가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저자는 1부를 열면서 '우리'가 그동안 서양 미술사를 바라본 관점이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역사와 관련해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바로 제 시대의 기준을 과거로 투사하는 것이다. 미술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르네상스 시대에도 예술문화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두 시대의 문화는 너무나 다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시대의 예술관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예술관념을 이해하지 못할 게다. 르네상스를 1250년과 1550년 사이로 잡는다면 우리의 예술제도는 18세기 이후에, 그리고 우리의 예술가상은 19세기 이후에 탄생한 것이다. 두 문화 사이에는 무려 수백 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이 엄청난 간극을 무시하고 우리의 예술관념을 그 시대로 투사하는 것은 엄청난 시대착오다. - P18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의 미술 작품을 재단하려는 시대착오적 사례로는 렘브란트를 근대철학의 선구자로 바라보는 관점을 들 수 있다.


서구의 근대철학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내성철학, 의식으로 의식 안을 들여다보는 반성철학, 자기의 속말을 자기가 듣는 s‘entendre parler 독백철학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위의 여러 기술들은 렘브란트를 벌써 이 내성적 주체, 반성적 주체, 자기와 대화하는 고독한 존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데카르트의 《성찰》이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때다. 이것으로 보아 위의 여러 기술들은 데카르트 이후의 관념을 데카르트 이전의 화가에게 투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 P60


1부에서 저자는 이 같은 시대착오가 어떤 점에서 오류인지 드러내고 그러한 오류의 근원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밝힌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사는 누구나 알만한 화가들(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 들라크루아, 고흐 등)의 '작품 제작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 (여기서 사족을 덧붙이자면, 본서는 유명 화가들의 명작들을 꽤 수록해놓았다.) 


중세 당시 '장인'에 가까웠던 '예술가'는 점차 장인에서 탈피해 독자적인 '예술가'로 거듭났다. 책의 내용에 의하면 대다수의 유명한 예술가들은 '친작', 즉 직접 그린 작품도 물론 있긴 했지만,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들이 조수들에게 작품 제작을 맡기는 경우도 많았고 해당 관행이 문제로 불거지지도 않았다. 책에서 제시되는 사례 중 한 가지는 네덜란드의 화가들이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공장제 작품 제작 방식을 채택하였다.


사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시장을 위한 생산을 했다. 발달한 상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그림의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고, 그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화가들의 워크숍에서는 거의 공장에 가까운 시스템으로 이른바 ‘어셈블리라인 회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구입하는 일반대중은 그림의 저자가 누구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사가 주로 그림의 주제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제자의 그림에 자기 사인을 하거나 그마저 제자에게 시키는 관행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 시절에 사인은 브랜드, 즉 상표의 역할을 했다. - P77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예술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연히 떠올리는 이미지, '캔버스 앞에 앉아 매순간 고뇌하며 창작하는 화가'라는 이미지는 어디서 왔을까? 저자는 그 같은 이미지가 바로 낭만주의-인상주의를 거치며 형성된 결과물이라 말한다.


조금 상세히 설명해보자면, 낭만주의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정착된 예술관행이었다.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예술의 소비층이 귀족계급에서 시민계급으로 바뀌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물의 생산방식이 주문제작에서 시장생산으로 바뀜에 따라 작가 역시 더 이상 '주문자'에게 의뢰를 받지 않고 '작품의 제작이 전적으로 작가에게'(P113) 맡겨지게 되었다. 이 두 가지 혁명은 낭만주의적 관념이 예술의 관행으로 자리잡는 데 일조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낭만주의적 예술은 어떤 특징을 지닐까?


예술의 낭만주의적 관념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미의 주관화다. (...) 이제 작가들은 작품에 담을 최고의 미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기 시작한다. 예술의 관념이 외부의 미를 ‘재현‘하는 것에서 내면의 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작품의 실행을 타인이 대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타인이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잖은가.

둘째, 예술의 신비화다. 고전주의자들은 예술을 이성적 활동으로 규정했다. 예술이란 합리적 규칙에 따른 제작활동이라는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을 초超이성적 활동으로 보았다. - P113

 

셋째, 예술가의 영웅화다. 고전적 예술가의 상은 ‘장인‘maestro이었다. 장인이란 오랜 훈련과 실전을 통해 창작의 모든 규칙과 기법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경지에 이른 이를 가리킨다. 반면 낭만적 예술가의 모범은 ‘천재’genius였다. 천재란 창작에 필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탁월하고 예외적인 개인을 가리킨다. 낭만주의 시대에 예술의 천재는 거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된다. 중세에 성인들의 자취가 담긴 성 유물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듯이 이 세속적 성인들의 손길이 스친 작품도 숭배의 대상이 된다. 바로 여기서 친작에 대한, 거의 종교적 열정에 가까운 집착이 생기는 것이다. - P114


이 같은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로 소환되는 이는 들라크루아다. 그러나 들라크루아 조차도 조수를 적극 활용한 점에서 낭만주의를 대표하지만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P125) 작가였다. 저자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로 인해 '낭만적 관념'이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이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을 포착하려 했고, 그 결과 창작은 조수가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외롭고 고독한 작업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부에서 저자가 재구성한 미술사는 우리의 통념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밝혀내어 통념을 깨부순다. 저자의 주장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 머리 속의 '손수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상상된' 신화다. 이 신화는 19세기 낭만주의와 인상주의를 거치며 등장하였으며, 그 정점에는 고흐가 위치한다.


오늘날 많은이들이 여전히 신화화한 고흐의 이미지를 화가의 전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허구와 뒤섞인 고흐의 이미지를 화가 일반에 투사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고흐는 화가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외에 가깝다. - P154

 

화가의 신화는 당연히 창작의 신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낭만주의적 관념에 따르면 창작은 미쳐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예술을 위해 작가는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며, 예술 작품이란 그 고통의 결정체이기에 관객은 거기서 작가의 정신적 고뇌와 신체적 고투의 자취를 읽는다. 이런 관념을 가진 이들에게는 화가가 자기 그림을 남에게 대신 그리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런 행위를 "예술에 대한 모독" 혹은 "예술가들에 대한 모독"이라 부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관념이 너무 낡았다는 데에 있다. - P155


적어도 이 책의 미술사에서 고흐는 종래의 화가들에 비해 예외적 존재이다. 고흐는 생전에는 예외적 존재였으나 사후에는 화가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저자는 이 같은 사실을 들추면서 '상식'으로 주입된 '상상으로서의 역사' 혹은 '신화로서의 역사'를 무너뜨린다. (물론 역사 서술은 그 본질 상 저자의 주관이 항상 개입될 수 밖에 없고, 개입되어야만 하기에 늘 '상상된 신화'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한편 1부 7장 아우라의 파괴는 20세기 미술사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장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나 개념들을 쉽게 설명해준다. 발터 베냐민이 제시한 저 유명한 '아우라' 라던가, 아우라의 파괴가 지니는 의미라던가(간단히 말해 예술의 민주화라 할 수 있겠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듯한 현대 미술 작품들이 어째서 비평가들에게 극찬 받는가 등.


20세기 미술사에서 핵심은 역시 산업혁명과 기술이 가져다 준 변화일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물의 세계를, 그리고 사진술은 영상의 세계를 각각 원작에서 복제로 바꾸어 놓았다. 사물과 영상의 세계가 달라지면 지각의 방식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예술의 성격도 변할 수밖에 없다. 워홀은 그 누구보다 철저히 창작 과정에 대량생산의 방식을 관철했다. 그에게는 작가의 아우라도, 작품의 아우라도, 창작의 아우라도 없다. 그에게 작가는 대중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존재이고, 작품은 범상한 것 중에서도 가장 범상한 대상이며, 창작은 공장의 대량생산을 닮은 기계적 과정일 뿐이다. 워홀에 이르러 뒤샹이 주장한 비미학의 상태가 객관적 현실이 된다. - P191


2부의 내용이긴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20세기 미술사에서 일어난 변화가 지니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발터 베냐민은 그 유명한 논문에서 복제기술로 인해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인 것에서 기능적인 것으로 변하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즉 과거에는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이어서 저자는 쓰기만 하고 독자는 읽기만 했다. 하지만 복제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제 글을 복제·배포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독자도 저자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이들의 과거 저자들이 읽을 수도 있다. 이로써 저자와 독자 사이를 갈라놓았던 신분제가 무너진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저자가 되느냐 독자가 되느냐는 이제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기능의 문제가 된 것이다.

베냐민은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본다. 과거에 ‘예술가‘는 특정한 이들만 가질 수 있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복제기술에 힘입어 누구나 원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세기의 작가들은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아우라마저 파괴함으로써 복제기술이 열어준 이 평등주의를 작업 속에 구현하려 했다. - P213

 

예술 창작에 공장제 대량생산을 도입함으로써 워홀은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누구도 더 이상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 말에는 동시에 다른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시대에는 누구나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냐민은 사진이 전통적 예술(회화)이기를 포기하고 저 자신(기술)으로 머물 때 비로소 미학성을 띤다고 지적한다. 그 역설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머리에 아우라를 뒤집어쓴 과거의 예술가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스스로 아우라를 치우고 대중과 같아질 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 P215

 

복제기술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진화하면서 삶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려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대중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독자는 웹툰을 통해 만화가가 되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기자가 되고,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칼럼니스트가 된다. 나아가 유튜브를 통해 소형영화 감독이 되고, 팟캐스트를 통해 아예 방송국이 된다. 90년 전 베냐민의 비전이 실현된 것이다. - P215


부끄럽게나마 몇 번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신분' 관계에서 '기능' 관계로의 변화가 특별히 체감되는 점이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글이라도 독자가 서평이나 리뷰를 쓰는 순간, 독자와 작가 사이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무너지고, 독자와 작가는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1부는 이어지는 2, 3, 4부에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기능한다. 2, 3부에서 비판의 대상이나 설명하는 주안점이 다르긴 하지만 저자의 핵심적이고 일관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친작'을 근거로 '대작'을 비난하는 행위는 시대착오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오히려 '친작'이야 말로 19세기 낭만주의,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등장한 예외다. 19세기의 미술을 근거로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대작' 행위를 비난하는 바는 오히려 20세기 현대 미술이 성취한 바를 부정하고 19세기로 돌아가는 퇴행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부는 '조영남 사건'을 미술계 내부의 논쟁으로 해결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사법부로 올려 보내 법이 현대 미술의 불문율과 관행을 침해한 상황을 비판하는 장이다. 


이 같은 사태의 전개를 두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 부분을 하나 인용해보자.


내가 보기에 검찰이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예를 들어 검찰에서 축구 경기장에 들어와 태클로 상대 팀 선수를 다치게 한 선수를 ‘과실치상‘으로, 혹은 고의성이 있다고 ‘폭행치상‘으로 기소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지금 검찰이 하는 일은 그와 다르지 않다. 스포츠에도 법이 건드릴 수 없는 규칙이 있듯이 예술에도 법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검찰이 그 경계선을 침범했는데, 다들 이 심각한 문제를 아예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 P232


책에 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자. 뉴스를 검색해보면 '조영남 사건'은 이제 화젯거리로 보기 힘들다. 나조차도 이 글을 쓰면서 '조영남 사건'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이 책은 2020년대 들어 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본다. 바로 AI의 등장 덕분이다. 


2018년 AI가 생성한 초상화가 앤디 워홀의 작품보다 비싸게 팔렸다는 뉴스가 나왔다. 단지 해당 사건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2022년 가을 미국에서 AI로 그림을 생성하여 수상한 사례는 2018년 시점에서 이미 예견된 일었다. 


AI가 등장하면서 이제 누구나 명령어를 입력하고 마우스 버튼 몇 번 클릭하는 것 만으로 그림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 AI로 만들어낸 그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해야 하는 가를 두고 많은 말이 오갔다. 어떤 기사 제목에서는 '예술의 사망'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저자성'에 바탕을 두고 재구성한 미술사의 흐름에 비추어보자면 미술에서 AI 문제를 달리볼 여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종래에는 예술가가 아이디어를 내고 조수가 아이디어를 실행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이었다면, AI의 등장은 단지 '조수'가 AI로 대체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아울러 앞에서 언급된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미술사의 각 시기가 지니는 고유한 컨텍스트 및 21세기 현 시점의 컨텍스트를 따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전문가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은 (AI가 화두에 오르기 이전의 책이므로 AI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으나) AI가 등장한 작금의 상황을 파악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술의 사망'과 같은 식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무의미하다. 반대로, 앞으로 미술에서, 그리고 다른 분야들에서 AI가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를 따져보는 게 더 건설적이다. 이 책은 미술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 그 같은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있다. 


요약해보자. 한편으로는 중세 말 르네상스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의 흐름을 다른 각도(예컨대 '저자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기존의 서양 미술사를 달리 볼 여지와 관점을 전해준다. 아울러 20세기 이후 복잡해지는 미술사를 아주 쉽게 설명해준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 한편, 이 책이 제시하는 관점은 AI의 등장과 같은 사례가 보여주듯 변화의 복판에 있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도 도움을 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 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학생들을 위한 핵심 커리큘럼 안내'(A Student's Guide to the Core Curriculum)로 원서는 2000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인문학(정확히는 서양의 인문학)이라는 방대한 분야를 일부 소개하고 해당 분야와 관련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본서가 소개하는 분야는 크게 4가지 분야(문학 · 예술/철학 · 정치/역사학/기독교 사상)이며 각 분야 별로 2-4가지 세부 분야를 소개한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 원하는 부분부터 골라 읽으면 된다.


한편 이 책은 번역서가 아닌 '편역서'다. 편역자들이 서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자 할 때 도움이 되고자 원서의 내용을 편집, 재배열하고 원서에는 없는 참고도서 목록을 추가하였다.


'인문학 스터디'라는 제목 답게, 이 책은 인문학의 특정 분야에 입문하고자 할 때 유용하다. 저자는 각각의 세부 범주(역사학을 예로 들자면 고대 로마, 1865년 이전의 미국, 19세기 유럽 지성사, 과학사)를 간단히 소개하고 저자가 더 읽어보면 좋은 책을 제시한다. 각각의 장 끝에는 편역자들이 추가한 국내에 번역 · 출간된 참고 도서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 얇은 책자의 핵심은 편역자들이 수록한 참고도서 목록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참고 도서 목록은 원전-참고도서 순으로 열거되어 있으며 참고도서 역시 개괄적인 입문서에서 세부적인 전문서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 어느 참고 도서를 읽어야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단점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원서는 2000년에 출간되었고 번역본은 2009년에 출간되었다. 편역자들이 수록한 참고도서 목록의 서적들도 2000년대 초중반 저작들에 멈춰 있다. 또 다른 단점이 있다면, 원서가 2000년에 출간되었으며, 그에 더해 미국 대학 강좌들을 조사, 연구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20세기 말 미국 대학의 커리큘럼에 치우쳐 있다는 태생적 한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서양) 인문학 관련해서 이 책은 여전히 유용한 가이드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립백 코스타리카 라 알퀴미아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평점 :
품절


산미가 좋네요. 묵직함과 산미가 잘 조화된 느낌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