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심주의 서강번역총서 3
사미르 아민 지음, 최일성.조현수 옮김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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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에서 활동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사미르 아민(سمير أمين)은 1988년의 저작 『유럽중심주의』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해당 개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 『유럽중심주의』는 2000년 국내에 번역되었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는 『유럽중심주의』(2023)는 2008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근대성, 종교와 민주주의: 유럽중심주의 및 문화주의 비판』(Modernité, religion et démocratie : Critique de l'eurocentrisme et critique des culturalismes, Parangon, 2008)을 번역한 것으로 역자들이 역자 서문에서 밝히길 옮기는 과정에서 『유럽중심주의』로 의역하였으며 그 이유는 저자 아민이 1988년 『유럽중심주의』의 2부와 3부를 『유럽중심주의』(2023)에 그대로 싣고 있고 이 책은 『유럽중심주의』(1988)의 완결판이라 볼 수 있기에 그리 하였다고 들고 있다. 2010년에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출간된 영문 번역판도 국내 번역판처럼 『유럽중심주의』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2023)은 1부 근대성과 종교적 해석들, 2부 공납제 문화의 중심부와 주변부, 3부 자본주의 문화, 4부 역사의 비유럽중심적 전망을 위하여, 이렇게 총 4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 아민은 근대성의 개념을 밝히고 이러한 근대성이 과연 기독교 유럽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인지 의심하며, 나아가 근본주의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 이슬람 문화권에서 이슬람 근본주의(혹은 원리주의)가 발흥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 한계를 분석한다. 


2부에서는 자본주의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 존재한 다양한 문화권들의 정치, 경제, 사회가 지닌 공통점을 한데 묶은 '공납제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민에 따르면 현재의 동아시아, 인도, 중근동은 유럽보다 앞선 선진적인 공납제 사회였으며 공납제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공납제 이데올로기(이슬람교나 유교가 이에 해당한다)를 발전시켰다고 본다. 반면 봉건제가 대표적인 유럽은 공납제라는 측면에서는 주변부 사회에 속한 사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봉건제 유럽은 공납제라는 측면에서 다른 유라시아 지역들보다 뒤처졌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3부에서 아민은 자본주의를 유럽만의 전유물로 여기고 다른 문화권 혹은 대륙들에게 유럽 대륙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만 현재의 빈곤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현혹하는 유럽중심주의적 주장들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시키며 문제가 되는지를 폭로한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아민이 앞서 제시한 논지들에 맞추어 유럽중심주의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으며, 그 대안으로서 자신의 가설들이 어떻게 유럽중심주의가 왜곡한 현실을 설명하고 보다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지점들이 무엇인가를 검토해본다.


이 책에서 저자 아민의 주장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머리말에서 제시되듯이 문화주의 비판이다. 아민이 이 책에서 규정하는 문화주의는 문화를 초역사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관점으로, 현실의 여러 사회들은 각각의 특유한 초역사적 문화적 요소를 지닌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현실의 여러 사회들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으로부터 보편적인 일반법칙을 추론하는 것이 방해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아민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 문화주의 비판을 기본 전제로 깔고 진행된다.


이어서 이 책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2, 3부에서 아민은 이러한 문화주의에 맞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문명권들로부터 공통점을 추출하여 보편성이라할 법칙을 추론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는 '공납제 생산양식'이라는 가설로 이어진다. 앞서 2부를 요약할 때 설명했듯이,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나타나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여 병합시키기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나아가 아메리카까지도 공납제 생산양식이 존재했으며 각각의 사회에는 공납제라는 해당 지배구조를 정당화하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 공납제 생산양식이 가장 완성에 다다른 지역은 중국, 인도, 중동권이었고 봉건제 유럽은 이런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볼 때 오히려 그 완성도가 떨어지는, 후진적인 지역이었다. 


이러한 아민의 주장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실제로는 레닌과 스탈린을 거치며 변형되어 전파된) 5단계 역사발전단계론,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부르주아 자본주의-미래에 도래할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라는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발전 단계론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역사발전 5단계론은 유럽, 그중에서도 산업혁명을 제일 먼저 겪은 영국의 사례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때문에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로 이행한 소련과 중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법칙'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역사발전 5단계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아시아 사회들을 이른바 정체된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고 말았다. 이와 비교했을 때, 아민이 제기하는 역사 단계론은 원시 공산제 혹은 공동체적 단계-공납제-자본주의-향후 도래할 사회주의로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아민의 시도는 유럽의 사례를 벗어나 다양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문화권들을 역사발전의 법칙에 포함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 지점은 유럽중심주의가 자본주의를 내세워 다른 국가들에게 유럽의 발전 경로를 따르라는 거짓된 신화를 주입시킨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이 거친 진보의 단계를 비유럽권이 따라갈 때에만 유럽처럼 선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민은 이를 '따라잡기'라고 간결히 표현한다. 그러면서 각 사회의 생산양식을 분석하여 유럽이 아닌 보편적인 사회 발전 단계를 제기할 수도 있었을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앞서 역사발전 5단계론이 보여주듯이 유럽중심주의적라는 덫에 빠지고 말았고, 제3세계의 발전이 지체된 이유도 유럽중심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대안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아민에 따르면 이 같은 유럽중심주의의 모델은 허상이다. 


아민은 유럽중심주의가 중심부/주변부로 나뉘어 주변부(대체로 비유럽권)로부터 이익을 이전받아 자본을 축적하는 중심부(유럽권, 미국, 일본)의 착취적인 현재의 세계체제를 은폐해왔음을 폭로한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부르주아들은 국경을 넘어선 계급동맹을 통해 국가를 지배하고 주변부의 민중을 억압해왔으며, 중심부의 노동자계급조차도 주변부로 부터 이전받은 이익 덕분에 높은 소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하여 발전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비유럽권의 각 국가들의 내부적 요인(예컨대 민족성이나 지리 등등)을 저발전의 탓으로 돌리며 이런 세계체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아민은 현재 상황에서 '따라잡기' 모델을 제시하여 비유럽권 국가들을 현혹하는 유럽중심주의적 모델이 아예 불가능한 기획이라 말한다. 전 세계인구가 서구인들의 생활 혹은 소비수준을 누린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기에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를 넘어설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 대안은 사회주의이며 그렇기에 실패로 돌아간 사회주의 기획들은 유럽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아민은 과거 공납제 생산양식에서는 그 어느 사회보다 뒤처졌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흥하였던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측면에서 세계경제체제에서 뒤처진 주변부에서 오히려 새로운 체제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진단한다. 요컨대 주변부에서 현 세계경제체제와 '절연'함으로써 그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민은 유럽중심주의에 가려진 역사 발전의 보편성을 강구한다. 저자는 그 유명한 막스 베버의 주장처럼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만이 자본주의의 등장을 낳은 토대가 될 수 있었는지 묻는다. 그 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한때 중국의 퇴보를 설명한 유교가 오히려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 따라 해당 국가들의 성장을 견인한 요인으로 설명된 것처럼, 다른 문화권들의 이데올로기들(이슬람교, 힌두교, 애니미즘 등등)도 언제든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유럽에서 나타난 부르주아 자본주의 문화는 그 이전의 그리스-로마와도, 기독교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유럽중심주의적 기획은 자신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와 결부지었다.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가 역사적으로 거치는 보편적인 단계의 생산양식으로 둔갑했고 그리스는 동방과의 연결 없이 순수하게 독자적으로 발달한 문화가 되었으며 동방에서 등장한 기독교는 서구만의 종교적 토대가 되었다.  


이 책에서 아민의 비판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이슬람교의 특징을 먼저 설명한다.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기독교를 수용할 수 없었던(그랬다간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아랍 부족들은 유대교를 변용하여 수용하였다. 아민은 이슬람교가 태생부터 '종교기획'이었지 사회를 개혁시키는 '사회기획'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예언자는 아랍 부족 사회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쩌면 '아랍 민족의 유대교'가 될 수도 있었던 이슬람교는 아랍 부족 사회보다 월등히 발달한 동방 기독교 사회를 정복하면서 손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꿔말해, 현재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바로 이 헤지라가 시작된 시기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에는 사회를 바꾸는 '사회기획'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아민이 지적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2세기 이후 이집트를 비롯한 이슬람권 지역에 전사 계급(예컨대 맘루크)가 정치 권력을 쥐고 신학자들에게 샤리아를 주재할 권한을 용인하는 이른바 '맘루크' 모델이 출현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민이 보기에 현재(2008년 당시겠지만) 이슬람권의 맘루크 체제는 군인, 신학자, 그리고 현지의 매판 부르주아들이 결탁하여 세계경제체제를 지배하는 현실자본주의와 동맹을 맺어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의례적 측면(예컨대 여성에게 각종 의복을 강제하는)을 규제하는 데 그칠뿐이지, 세계체제로부터의 절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사회를 기획하려는 역량도, 의도도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서적에 가까운데, 저자가 '세계체제'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점에서 이메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기에, 그리고 '공납제 생산양식'처럼 과거 역사에 대한 분석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주목할만한 지점들이 있다. 


첫째는 공납제 생산양식이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해 전(前)자본주의 시대 각 문화권으로부터 '공납제 생산양식'과 이를 정당화하는 '공납제 이데올로기'를 추출하려는 아민의 기획은 어떻게 보면 대담한 역사학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아민의 주장에 화답하는 길은 역사학자들이 정말 그게 가능한지 따져보는 것일 것이다. 이 같은 아민의 주장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각지의 문화권들을 직접 비교하면서 과연 이론적 틀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를 따지며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아민이 제시한 중심부/주변부를 바탕으로 삼는 현실자본주의와 세계경제체제를 다른 세계체제론자들이 내세운 세계체제, 예컨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세계체제론과 비교하면서 이론에 대한 비교를 진행해보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보다는, 이러한 비교를 통해 보다 정합성있고 현실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수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세 번째는 기존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아민은 근대에 들어 사회생활 전반을 경제로 환원하는 점을 지적한다. 아민의 비판점은 특히 경제학을 향한다. 속류 경제학은 균형 잡힌 허구의 자본주의만을 상정하나 현실적으로 그 결말은 마르크스와 케인즈가 이미 내린 결론, 즉 시장에는 불균형만이 존재한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계체제를 아우르는 현실자본주의는 속류 경제학이 간과하고 다루지 못한 지점이며,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유럽중심주의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제3세계나 주변부를 위한 대안적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이 아민의 요지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은 현실을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네번 째로 세계사와 관련해서 조금 길게 짚고 넘어갈 지점들이 있다. 아민은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시대발전 도식으로 익숙한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을 조금 다르게 본다. 아민은 중세를 헬레니즘 시대로 앞당긴다. 적어도 중근동 지역에서 고대는 고대 그리스로 끝나고, 그리스의 각 폴리스들이 마케도니아에 굴복한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세워진 시점부터 중세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아민이 내세우는 바는 고대 그리스 말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출현해 헬레니즘 시대에 개화한 형이상학이다. 이성의 연역을 내세우는 헬레니즘 형이상학은 이집트의 플라티노스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로 완성되면서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다면, 토착 종교(그리스, 로마의 다신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에 불만을 품은 일반 민중들을 만족시킨 것은 동방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이며, 두 종교는 이성을 내세우는 헬레니즘 철학을 신앙과 화해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방)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헬레니즘의 유산을 이어받은 쌍둥이이다. 나아가 이슬람교의 철학은 고스란히 서구 기독교권에 전해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중세를 앞당긴 것은 (얼마나 사실에 적합한지를 떠나) 서양사의 고대-중세-근대의 도식을 달리 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 대한 지적도 눈여겨볼 점이다. 아민은 유럽 국가들이 노동자계급이 형성되면서 시민사회로 가는 길이 열린 반면, 미국은 근본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 정착한 이래 끊임없는 이주의 물결 속에서 공동체주의가 주도권을 쥐었다고 본다. 기존의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몰려와 자리를 잡을만 하면 새로운 이주민들이 미국에 몰려오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민자 집단 끼리 뭉쳐 세력을 형성하여 이민자 끼리 다투고 지배계급은 그러한 상황을 이용했다는 점을 꼬집는다. 아울러 미국의 독립전쟁이 혁명으로 많이 연구되긴 하나 미국의 이데올로기에는 프랑스처럼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최우선시하는 의미에서의 자유와 소유만이 있을 뿐이며, 정치의 시장에 대한 개입을 중단시켜 미국에서 노동자 정당 대신 '자본주의 정당'을 출현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러한 미국화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로 한정지어 말하자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2023)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주지했듯이 아민은 중심부/주변부로 나뉘는 현실자본주의의 구조 내에서 주변부가 중심부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한데 유럽중심주의는 이런 불가능한 기획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포장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아민은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중심부였던 중국에 비해 주변부에 해당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점에 주목하고, 중국이 '따라잡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관심을 품는 반면, 한국 근현대사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틀어 한국은 두 어차례 언급되는데 그친다. 여기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은 아민의 주장을 약화시킬 수도, 강화시킬 수도 있는 헐거운 연결고리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19세기 말 일찍이 중심부로 도약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음에도 20세기 중반 해방 이후 우여곡절 끝에 21세기 현재에 이르러 중심부 국가이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 특히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유럽중심주의의 '따라잡기' 모델을 정당화하여 아민의 논증을 무너뜨리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따라잡기' 모델의 허구를 입증하여 아민의 주장을 강화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일본, 중국의 근현대사와 유사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시작은 일본보다 늦었지만, 중국보다 먼저 '따라잡기'에 성공했거나 그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 희망찬 모델이 될수도, 아니면 발전의 기회를 혼자 독차지하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의 사다리를 걷어찬 선두주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보다 엄밀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리고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처한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세계사 속에서 재평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연구범위를 한국의 경제 발전을 한국 사회 내부의 내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 동아시아 및 태평앙의 주변국가들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이러한 주변국가들과 세계를 한데 묶는 세계체제라는 분석단위로 넓힐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세계사를 보편적이고 대안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한국 사회의 경제 발전은 유럽중심주의에 충실히 따라간 결과인지, 아니면 유럽중심적인 발전경로를 벗어나면서도 근대와 근대 너머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럽중심주의』(2023)는 단순히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떠나 인문사회과학이라는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 지금 보기에 아민의 가설들은 어떤 것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민의 가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독자들에게(유럽권이든 비유럽권이든)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현실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동안 알지 못한 현실에 눈뜨게 만드는 것, 혹은 그러한 통찰력을 길러주는 것, 그것이 아마 현실 사회를 엄청난 속도로 변화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맡아야할 여러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유럽중심주의』(2023)는 2008년, 좀 더 거슬러가자면 1988년의 진단임에도 과거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지배한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이상, 항상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으로서 앞으로도 시의성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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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과 유럽 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 2
강철구.안병직 지음 / 용의숲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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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화를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잖아, 수백 년이 지나서 이젠 우리 전통의 일부가 됐으니까" - 살만 루슈디,『악마의 시』상, P355.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은 이집트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 1980년대에 제기한 개념으로, 유럽인의 관점을 중심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거대한 담론 체계에 붙은 이름이라 요약할 수 있다. 아민의 저작『유럽중심주의』(2000)는 아쉽게도 지금은 구할 수 없다. 작년에 같은 제목으로 서강대학교 번역출판부에서 번역하여 출판한 『유럽중심주의』(2023)는 역자들이 의역한 제목이긴 하나 2, 3부는 『유럽중심주의』(2000)의 내용을 그대로 싣고 있다. 따라서 34,000원이라는 가격에 대한 심리적 저항만 어떻게 한다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미르 아민, 더불어 『오리엔탈리즘』으로 널리 알려진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각각의 저작들을 통해 으레 보편적이라 당연히 여긴 지식 체계가 사실은 유럽중심적 시각을 보편성으로 위장시켰다는 점을 들춰냈고, 21세기 초 한국의 서양사학계도 그 같은 지적 파동에 휩쓸리게 되었다. 『서양사학과 유럽중심주의』는 바로 그런 지적 흐름이 한국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9년 작고한 한국의 서양사 원로 연구자 이민호 교수의 2주기를 기리는 차원에서 고인의 논문 4편, 그리고 그와 친분을 맺은 뉴욕 주립대의 조지 이거스 교수, 고인의 가르침을 받은 서울대 출신 제자들의 논문을 모은 단행본이다. 


이 책은 총 12개의 논문으로 구성되나 읽는 기준에 따라 임의로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부는 이민호 교수의 논문 4부로, 2부는 조지 이거스 교수 및 제자들의 논문으로 구성된 총 8장의 논문으로. 책은 2011년에 발간되었고,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2000년대에 저술되었다. 2024년 시점에서는 이미 상식 수준에 다다른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거나, 서구중심주의, 혹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비판이 이루어졌다거나, 현재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지점들이 거슬리더라도 시기상의 한계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총 12장의 논문이 수록되어있고 각각의 논문들이 다루는 주제가 상이하기 때문에 내용을 완전히 요약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각된다. 그보다는 이 책의 저자들이 생각하는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유럽인들이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로 이어지는 유럽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진보, 특히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인들이 내세운 가치관에 '보편성'을 부여하였으며, 나아가 비유럽권은 '역사가 없다'거나 '정체되었'으므로 유럽의 발전 과정을 따라야만 한다는 거대한 지식 체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이 여태 서구만을 추종하여 여태 이 같은 유럽중심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흔히 '보편적 가치'나 유럽의 특성으로 간주된 개념들, 예컨대 국민국가, 민주주의, 자본주의부터 시작해 시민혁명, 산업혁명, 인권, 자유, 평등을 비롯한 다방면에 걸친 개념과 사실의 재검토가 요구된다. 나아가 종국에는 유럽중심주의와 그에 의거한 세계사 서술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적 역사 서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중심주의라는 논쟁적 주제를 다루는 책이니 만큼, 유럽중심주의와 연계된 개념들에 대한 내용을 충실히 다룬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민호 교수의 논문들은 식민지 타자에 비추어 유럽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한 과정, 오리엔탈리즘,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1장, 세계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유럽에서 국민국가의 형성과 위기(3장, 유럽과 국민국가), 동아시아에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수용하고 적용한 과정(4장, 동아시아의 민족국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동아시아의 서양 수용과 민족국가의 지평)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5장, 조지 이거스 교수의 논문은 서발턴 연구에서 시작된 인도 학자들의 연구를 해설하고 있다. 크게 3명의 인도인 학자가 언급된다. 각각 아시스 낸디, 디페시 차크라바티, 슈미트 사카다. 그 중에서 차크라바티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유럽을 지방화하기』이다.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었으나 읽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한 책인데, 이거스 교수의 논문은 이 책을 읽기 전 참고용으로 읽으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민호, 이거스 교수 이외의 논문 저자들도 각각의 개별적인 주제를 다룬다. 한국 서양사학의 발전 과정을 돌이켜보며 한계점을 반성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제기하거나(6장,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대안적 역사상의 모색), 유럽과 이슬람권의 근대사 인식에 관해 다루거나(8장, 유럽중심주의 극복을 위한 일모색--유럽과 이슬람 세계 근대사 인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계몽사상이 유럽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어떻게 창조해냈으며, 보편사를 추구하던 유럽의 지식인들이 계몽사상을 기점으로 비유럽 세계에 대한 우월의식을 지니게 되었는지(9장, 계몽사상과 유럽의 이념), 자본주의 개념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의 논리적 한계점을 지적하고(10장, 서구중심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페르낭 브로델을 중심으로, 11장, 유럽중심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 마지막으로 유럽 연합과 유럽 민족에 관해 다루는 12장 "유럽 연합은 유럽 민족이 될 것인가"로 요약될 수 있다.


6장의 경우, 한국 서양사학계의 역사를 다루는 점에서 한국 서양사학계가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알아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9장의 경우, 서구의 계몽주의에 숨겨진 우월의식이 등장한 양상이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데 유용할 것이다. 10, 11장은 유럽이 아시아를 경제적으로 추월하게 만든 근대의 등장을 두고, 유럽이 중국을 넘어선 것은 불과 19세기의 일이며 서구의 우위는 200년에 불과하다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데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2024년 시점에서 13년 전의 책이긴 하나,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먼저 한국의 서양사 연구자들이 서양의 연구성과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양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닌지, 한국에서 서양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서양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너무 비판에 몰두하다가 자가당착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일깨워준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떠오르는 곳은 인도다.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인도는 한편으로는 서구문물을 장기간 수용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서구문물과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이르렀다는 점에서 복잡한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쩌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앞서 이 책의 5장과 관련해 언급된 학자들을 비롯해 인도의 학자들이 유럽중심주의 비판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할 것이다. 살만 루슈디의 작품에서 언급된 것처럼, 서양을 그만큼 잘 알기 때문에, 차크라바티 식으로 말하면 오랫동안 '유럽을 지방화'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인도의 학자들은 인도라는 특수한 문화적 환경을 바탕으로 그러한 성과를 냈다. 한국의 서양사학자들도 연구성과가 충분히 누적되고 훌륭한 연구자들이 연구에 매진하다보면 분명 세계의 역사학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 6장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대안적 역사상의 모색"은 한국의 역사 교육 체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한국의 전문 역사학계는 크게 한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마치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연상케하는 구조다. 이 3가지 상위 분류 휘하에서 전문 연구자들은 세부적인 시대/지역사를 주제로 삼는 학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개별 학회들은 연구자들이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장인 동시에 연구 경력을 인정받는 장이기도 하다. 전국역사학대회처럼 한국의 역사학계가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학회가 열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세부적인 행사는 앞서 말한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나뉘어 진행된다. 


이는 대학의 역사학 학부 교육과도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대학은 '사학과'나 '역사학과'를 마련해두고 있지만 일부 대학들은 한국사/동양사/서양사를 나누거나, 한국사/동양사와 서양사를 나누거나 하는 식으로 학과를 나누어두는 경우도 있다. 다만 최근들어 사정이 악화되어 역사학과가 '역사문화콘텐츠학과'와 같은 식으로 다른 학과와 통폐합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구성 속에서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은 전문분야인 서양사에만 매진하기도 바쁘다 보니 한국사나 동양사 연구자들과 협업하기 힘들게 된다. 여기에는 전문주의라는 벽도 있다. 같은 서양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사료 해석을 위해 각기 다른 언어가 요구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언어의 장벽이 낮은 미국사나 영국사의 비중이 큰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사학자가 동양사나 한국사를 다루고자 큰맘 먹고 '월권'을 행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서양사 전문분야와 접점이 있는 동양 근현대사 정도에만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이루어지는 역사학 삼위일체의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전망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학과가 사라지거나 통폐합되는 것처럼,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해 역사학자들의 주무대라 할 대학의 축소가 이미 예정된 상황이다. 여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일자리를, 나아가 계급상승을 전혀 담보해주지 못해 입시 결과가 나날이 추락한 탓에, 수능과 내신 점수에 맞춰 입학하여 졸업할 때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진로를 택하는 학생들이 많다. 물론 과도한 비관주의로 치닫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는 것과 대책없이 절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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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 -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존중하는 삶의 시작
원은수 지음 / 토네이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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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정신건강 관련 영상을 찾다 보면 영상마다 거의 항상 보이는 유형의 댓글이 있다. '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는 병원에 안가고 그 당사자에게 해를 입은 피해자만 병원에 가야 하나'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존중하는 삶의 시작』은 아마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제목만 놓고 보자. 제목과 책 표지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이 책이 심리학, 그것도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교양심리학서라는 것 정도다. 뒷표지를 살펴보면 이 책이 출간된 목적을 알 수 있다. "나에겐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 '지독한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기저부터 주로 보이는 반응과 행동 패턴, 가장 확실한 대응법까지.' 이어서 그 아래 추천사들과 종합해서 따져보면, 이 책은 우리 주변의 '나르시시스트'를 다루는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유튜브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프롤로그에서 밝히는 바에 따르면 내담자들과 수만 번의 면담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 그리스 신화에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한 나르키소스에서 유래한 이 명칭은 흔히 과도한 자기애(흔히 말하는 왕자병, 공주병이 그 사례다)에 빠진 사람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는 나르시시스트는 보다 스펙트럼이 넓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나르시스스트의 유형은 5가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며 세상이 자신을 대접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사람, 늘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며 관심받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다. 그러나 둘다 내적 결핍으로 인해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줄 수 있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심리적 안정을 누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외에도 반사회적 성향이 가미된 악성 나르시시스트, 대외적으로는 선행을 베풀면서 주변인들을 이용해먹는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 도덕성을 내세워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고 고결하게 포장하는 독선적 나르시시스트가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찬사와 환호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주는 외부 공급원인 나르시시스틱 서플라이narcissistic supply와, 자신의 결함을 투사하며 평가 절하하는 대상이 있어야만 자존감을 조절할 수 있다. 따라서 주변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항상 필요로 하고 그들에게 의존한다. - P74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사이코패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사이코패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악성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는 유능하고 성공적이며 자급자족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실패와 평가에 취약하고 비난에 민감하여 자신의 과대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경우 자기 조절 능력을 상실하여 두드러진 감정변화와 분노감 및 공허감을 경험한다.

반면에 사이코패스에게는 악성 나르시시스트에게 보이는 내적 취약함이나 불안감 등의 감정적인 반응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이에 안팎으로 완벽하게 냉담하고 매사에 초연한 듯한 무관심함이 두드러진 특성이며, 이 때문에 극단적인 도덕적 이탈이 더욱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고의적인 행동을 할 때 스트레스를 받으며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어 불안하고 땀이 나고 심장이 뛰는 증상들을 경험한다. 그런데 사이코패스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교감 신경의 활성화와 그로 인한 반응이 부재하다. 따라서 극악무도한 범죄도 아주 차분하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 P102


책의 목차로 돌아가보면, 파트1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르시시스트들의 행동 양태를 제시하고, 그러한 나르시시스트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지 살펴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각 챕터의 내용을 간략히 다뤄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챕터 1 "그 사람은 왜 자기밖에 모를까?"는 일반적인 나르시시스트의 행동 양상을 제시하면서, 독자들이 일상적인 인간 관계에서 겪어 보았을 사례들을 상기시킨다. 챕터 2,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인간 관계에서 타인을 지치게 만드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여러 면모를 조망한다. 남탓을 일삼거나, 타인을 험담하면서 이간질하거나,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내거나,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심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린다거나.


챕터 3, "당신이 몰랐던 나르시시스트의 다양한 얼굴들"은 앞서 언급한 나르시시트들의 유형을 제시한다. 챕터 4, "어떻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었는가"는 인간이 나르시시스트로 성장하게 되는 이유들을 제시한다. 프로이트가 언급되긴 하지만 책의 특성상 쉽게 풀어 설명해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나르시시스트들이 탄생하는 원인이 부모로부터 "미러링" 즉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반영해 비추어주는 행위가 결여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양육 환경, 그 중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부모는 자녀가 나르시시스트로 성장하거나 그렇지 않게 되는 점에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챕터 5, "그들의 가족을 들여다보면"은 부모가 나르시시스트이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관해 다루는 장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닌 부모 밑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해 자녀가 나르시시스트로 자랄 수 있다. 그렇긴 하나 저자가 보다 중점을 두는 지점은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자녀들의 경우다. 저자는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녀에게 특정 역할을 강요한다 보며, 그 역할을 크게 4가지로 분류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스케이프고프(Scapegoat),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골든 차일드, 나르시시스트 부모들이 상대하기 귀찮아하는 인비저블 차일드 혹은 로스트 차일드, 마지막으로 부모의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을 일찍부터 알아차린 트루스 텔러 4가지 유형이 있다. 저자는 이러한 분류와 더불어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자신들이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 성장했음을 인지하고, 부모와는 확실히 선을 긋고 형제 자매간의 관계를 회복하여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파트2는 주변의 나르시시스트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이다. 크게 3가지가 제시된다. 나르시시스트들의 수법,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대처하는 법,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챕터 6 "나를 조종했던 것들과 헤어지기"는 나르시시스트들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들, 나아가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다루는 장이다.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임을 알고 거리를 두려 하면 나르시시스트들은 여러 수단을 사용해 이를 봉쇄하려 한다. 그러한 수단으로 나르시시스트들이 사용하는 여러 수단이 제시된다. 각각 '가스라이팅,' '미끼,' '투명인간,' '러브바밍,' '스크루지,' 그리고 조력자들. 앞의 5가지는 나르시시스트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들이다. 가스라이팅은 최근 워낙 많이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미끼'는 나르시시스트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여 억지로 관계를 이어나가는 수단이다. '투명인간'은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요구를 잘 안들어주는 상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상대가 스스로 '내가 뭐 잘못했나?'하는 의심을 유도한다. '러브바밍'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때 애정공세로 상대를 유혹하는 방식이다. '스크루지'는 러브바밍과는 반대로 상대와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을 때 인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 '조력자들'은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임을 알고 관계를 두려 할 때 옆에서 '걔도 사정이 있겠지, 네가 이해해'라면서 만류하는 주변인들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주변인들은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게 만드는 외적 요인이 된다.


챕터 7,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나르시시스트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선 세가지 원칙을 숙지하라고 말한다. 1.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임을 인지한다. 2. 나르시시스트가 변화되기 어려움을 인지한다. 3. 나르시시스트와의 거리를 두라. 이어서 저자가 나르시시스트를 상대로 이용할 수 있는 방어수단들로는 제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육감,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회색돌 전략,' 그리고 정신적 거리를 둬서 상대에게 함부로 속내를 드러내 약점을 노출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 챕터 8은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들에 대해 다룬다. 나르시시스트와 거리를 두려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조금씩 호의를 베풀면서 거리두기나 관계 단절을 막으려 든다. 그러나 이에 넘어가면 다시 나르시시스트에게 이용당할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명백히 나르시시스트의 잘못임에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반추를 그만두고, 마음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저자는 공감 능력, 용서하는 능력,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가짐 등이 주변에 나르시시스트들을 꼬이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으나, 이러한 건전한 능력을 보다 건전한 관계를 맺을 때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이 책은 다양한 유형의 나르시시스트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북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나르시시스트들이 본인이 문제가 있다고 자각하는 경우는 대개 드물다. 저자는 대체로 나르시시스트들에게 시달린 환자들을 내담하는 과정에서 환자에게 문제를 유발하는 원인을 찾다보니 환자의 주변인물이 나르시시스트인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깊이 있는 면담을 통하여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 갈등 상황의 핵심적인 원인 제공을 하는 측은 내담자가 아닌, 그 관계에 함께 놓여 있는 상대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많은 경우 그런 상대들은 자기애성 성격narcissistic personality 특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 PP8-9.


이 같은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나르시시스트의 행동 패턴을 알려주고 그들의 기저 심리를 파악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돌이켜보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그러나 상대를 나르시시스트라고 다짜고짜 낙인 찍기 위한 책은 아니다. 상대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이 사람 좀 이상한데? 뭔가 특이한데?' 하면서 이상 현상을 감지하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신체 질환을 두고 '문제가 있다,' 증상의 정도에 따라 '심각하다,' '경증이다' 정도는 인식할 수 있지만 정확한 병명을 알려면 병원에 가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무턱대고 '좋아, 나를 괴롭히는 XX는 나르시시스트인게 틀림없어! XX를 정신차리게 해줘야겠어' 라면서 나르시시스트에게 덤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챕터 7에서 저자가 말하듯이, 나르시시스트는 변화되기 어렵다. 책에서도 제시되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 소위 '팩트'를 제시하면서 상대가 저지른 잘못을 조목조목 짚어봐야 그 상대에게는 안 통한다. 상대의 분노와 보복 심리만 자극할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나르시시스트의 과대하고 적대적인 특성은 내면의 불안정한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나르시시스트라고 인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비대한 보호막의 안쪽에서부터 균열이 생기는 것이고, 이는 자존감 저하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극구 현 상태를 부인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사이트 insight, 즉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측면에 대한 인식이 특히나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이상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본인만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 나르시시스트는 선천적으로 싸움을 즐기고 잘하는 부류이다. 그들은 많은 경우 언변이 화려하고 상대를 가스라이팅하는 것에 능숙하여,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이 모든 잘못을 한 것처럼 상황을 몰아간다. 그들은 대립 상황에서 프로파이터처럼 가뿐하게 케이오 KO시킬 수 있으며, 상대는 크나큰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 P239


저자는 차라리 나르시시스트에게 반응하지 않고,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이라 말한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는 나르시시스트가 상대방을 이용하는 착취적 관계인 경우가 많다. 부모가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연인이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아니면 직장 상사가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이러한 잘못된 관계를 먼저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나르시시스트가 이용하는 여러 수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며, 나르시시스트와 맺은 잘못된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자기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살아오면서 쌓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잘 알아본다. 우리는 모두 상대의 조종에 대해 어느 정도의 취약성을 지닌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신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부족함, 다른 사람을 실망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 특정 사람이나 사안에 대한 양가감정 등을 때때로 경험하고, 불필요한 책임감이나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 등의 취약한 감정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감정을 나르시시스트가 공략하기에 이에 크게 좌지우지되는 사람일수록 그의 조종에 취약할 수 있다. - P170
정말 건강한 사람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직시하고, 거기에서 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천천히 소화해 나가는 사람이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내가 앞으로 나르시시스트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끈다. - P291 


아마 그렇기에, 글을 시작하면서 함께 언급한 '왜 괴롭힌 사람은 병원에 가지 않고 피해자가 병원에 가야 하느냐'는 댓글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내적 결핍을 인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남을 비난하는 데 급급한 나르시시스트보다는 병원에 내담하여 스스로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상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가장 문제가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 한, 그리고 그 로빈슨 크루소조차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쌓은 여러 지적 자산을 적극 활용해 무인도에서 생존하면서 나중에는 원주민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보면 대인 관계 및 이를 형성하기 위한 기술 역시 역시 생존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자원이라 말할 수 있다. 데일 카네기의 저작들이 아직도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크고 작은 고통을 초래한 나르시시스트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자신 역시 의도치 않게 다른사람에게 준 상처들이 기억나며, 자신의 마음속에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는 나르시시스트적인 측면들 또한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건강하지 않은 나르시시즘이 내면에 어느 정도 존재한다. 자신이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견고한 정체성과 안정적인 자존감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강하지 않은 측면들 이상으로 우리에게는 건강한 측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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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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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여러 신을 낳았다. … 이자나미는 결국, 불신을 낳을 때 얻은 병으로 죽는다. … 이자나미를 다시 보려고 황천국으로 간 이자나기는 그 입구 문에서 말했다. 

“아름다운 나의 아내여, 그대와 만든 나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 함께 돌아가자!”

“애석하군요. 어째서 당신은 좀 더 일찍 오지 않았어요? 나는 이미 황천국의 음식을 먹어 버렸어요. … 되돌아갈 수 있을지 잠시 요모쓰신과 상의해 보겠어요. 그러나 내 모습은 결코 보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들어간 사이, 기다리기 지쳐 참을 수 없게 된 이자나기는 아내와 한 약속을 깨고 아내의 모습을 엿보려고 머리에서 빗을 빼 빗살 하나를 꺾어 불을 붙여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소리가 들려와서 보니, 이자나미의 입에서는 구더기가 모여 소리가 났으며, … 이자나미의 모습에 놀란 이자나기는 도망가며 … 이자나미가 직접 쫓아왔다. 이에 이자나기가 황천국과 이 세상의 경계에 커다란 바위를 놓아 왕래할 수 없도록 하고 있을 때, 이자나미가 말했다. 

“사랑스러운 당신. 어째서 그랬습니까? 이제부터 당신 나라의 사람들을 하루에 1000명씩 죽여 버리겠어요!”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하루에 1500명의 사람을 낳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1000명씩 죽게 되고, 1500명의 사람이 태어나게 되었다.


-오노야스마로, 고사기

“…한데 고향에 돌아가서도 그 여자의 얼굴을 못 잊겠더란 말일세. 아무리 매력적인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도, 아무리 마음씨 고운 여자를 만나봐도 머릿속에는 그 여자뿐이었어. 꼭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지. 말하자면 내 정신이 그 여자에게, 그 망령에게 홀딱 씐 걸세." –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P100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네—내가 여자의 반쪽밖에 보지 못했다는 걸. 여자는 늘 내게 왼쪽 얼굴을 보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어. 움직임이라고 해봐야 눈을 깜박이거나 이따금 보일락 말락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야. 요컨대 지구에 사는 우리가 달의 한쪽 면밖에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여자의 한쪽 겉면만 보고 있었던 걸세.” - P100


“마음이 마구 요동쳤어. 어떻게든 그 여자의 오른쪽 얼굴을 봐야겠다고. …” - P101


그래서 보셨나요. 여자의 오른쪽 얼굴을? 나는 힘겹게 소리내어 물었다.

“그래, 봤네.” 노인은 말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가위 눌림을 떨쳐내고 몸을 일으켰어 … 그리고 보름달 빛을 받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지…… 그런 짓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 P101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 P102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은 총 3부, 70장, 본문 페이지만 761페이지에 이르는 장편 소설이다. 1부에서는 저 세계로 가기 이전 나의 과거(홀수장)와 저 세계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꿈 읽는 이’로서 나의 현재(짝수장)가 병렬적으로 제시되다가 ‘나’가 저 세계에 오게 된 경위가 드러나면서 부터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진다. 2부는 이 세계로 돌아온 ‘나’의 일상을 따라 이야기가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2부에서 ‘나’는 시골 마을의 도서관장이 되면서 전임 도서관장 고야스 씨, 옐로 서브마린 소년, 커피숍 여주인의 개인사를 차례로 알게 된다. 1부가 나의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가며 제시되는 구조였다면 2부는 관찰자로서 ‘나’가 다른 인물들의 내밀한 비밀에 도달한 끝에 최종적으로 ‘나’의 비밀을 알게 된다. 3부에서는 1부와 2부의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나’는 마침내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귀환하게 된다. 


달리 말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구조상 6가지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째는 본체인 ‘나’가 ‘너’를 만난 후 저 세계(도시) 속 시시각각 변하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도달하여 도서관에서 ‘꿈 읽는 이’로서 ‘너’의 본체와 함께하는 이야기. 두 번째는 이 세계(현실)에서 '너'가 '나'에게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들, 세 번째는 본체인 ‘나’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로서 ‘나’가 이 세계(현실)에서 진짜인 척 가장하면서 일상을 보내는 이야기. 셋째는 그림자로서 ‘나’가 일상에서 만나 관찰하며 알게되는 고야스 씨의 비극적인 과거사. 고야스 씨 못지 않게 불운한 상황에 처한 옐로 서브마린 소년, 이들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마을로 떠나와 조용히 일상을 이어나가는 커피숍 여주인의 이야기. 그렇긴 하나 이 소설의 줄기를 이루는 것은 ‘나’의 본체와 ‘나’의 그림자의 이야기다. 


‘너’를 만나는 ‘나’의 이야기에서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신화를 떠올릴 수 있다. ‘나’가 도시에서 열병에 시달릴 때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자나기, 이자나미 신화나 다름없다.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일까? ‘나’와 이자나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한 끝에 현실을 떠나(‘나’는 도시로, 이자나기는 황천국으로) ‘너’와 이자나미를 만난다. 그러나, ‘나’가 만난 ‘너’는 현실의 ‘너’와 다른 사람이다. 이자나기가 저승에서 만난 이자나미는 몸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나’와 이자나기는 현실로 도망친다. 추격자들(도시의 벽, 이자나미)이 ’나‘와 이자나기를 뒤쫓는다. ‘나’와 이자나기는 추격을 뿌리친 끝에 무사히 현실로 돌아온다. 물론 차이는 있다.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우연히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에 머무르면서 한 동안 ‘꿈 읽는 이’로서 ‘너’와 함께 지냈다. 반면 이자나기는 자의로 저승에 내려갔으며, 이자나미의 본 모습을 보고 바로 도망쳤다. ‘나’는 그러지 않는다. 웅덩이를 눈 앞에 두고 나는 마음을 바꿔 도시에 남는다. 탈출하는 것은 ‘나’의 그림자 뿐이다. ‘나’의 탈출은 3부에 가서야 실현된다. 


‘나’가 도시에 머무를 동안, 2부에서는 도시를 탈출한 ‘나’의 그림자가 일상에서의 '나'의 본체의 대역을 맡는다. ‘나’의 그림자는 고야스 씨의 인도를 받아 마을의 도서관장으로 일하면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만난다. ‘나’는 커피숍 여주인과 교감을 나누면서 수십년 간 마음 한구석에서 ‘나’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 ‘너’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2부의 마지막장 62장에서 ‘나’의 그림자가 ‘너’의 그림자와 만나는 장면은 ‘나’가 ‘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의 본체는 여전히 도시에 머물고 있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귓볼을 깨물어 전해지는 통증은 ‘나’의 본체와 ‘나’의 그림자가 도시(저 세계)와 현실(이 세계)에 나뉘어져 있으면서도 이어져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나’는 두 세계 모두 발을 걸친 상태, 한편으로는 ‘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의 곁에 머물려는 상태다.


"...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 - P752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 P754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나’는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육체는 시간이 흘러가는 현실 속에서 늙어가지만, ‘나’의 의식만은 16세의 ‘너’를 떠나지 않으려 한다. 그런 ‘나’ 앞에 유령으로 나타나는 고야스 씨는 사랑으로 일군 가정이 어떻게 순식간에 무너졌는지 보여준다. 고야스 씨는 어쩌면 ‘나’와 ‘너’가 이어진 미래의 여러 가능성 중 일부 편린을, 나아가 나와 ‘너’ 사이의 순수한 사랑이 어쩌면 순식간에 ‘사랑 따위’로 전락할 수도 있는 잔혹한 현실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야스 씨가 거의 사라질 무렵 ‘나’가 인식하기 시작한 소년은 지식욕만 가득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다. 소년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도시로 가 ‘꿈 읽는 이’로서 머무르려 한다. 고야스 씨가 잔혹한 현실을 비춘다면, 소년은 현실을 외면하는 ‘나’와 겹쳐진다. 실제로 나는 소년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일부 본다. 고야스 씨와 소년을 만나면서 ‘나’는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점차 변해간다. ‘깨어난다’ 혹은 ‘현실로 되돌아 온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와 커피숍 여주인과의 관계는 손님과 커피숍 점장이라는 비즈니스 관계였다. 그러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나’, 그리고 커피숍 여주인의 생일을 물어본 후, ’나‘는 우발적으로 커피숍 여주인에게 말을 건네어 관계기 진전되고 여주인의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씁쓸한 과거사를 알게 된다.  그동안 ‘너’만을 기다리며 고독 속에서 살아온 ‘나’는 커피숍 여주인이 자신이 만나기를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을까 반문한다. ‘나’와 커피숍 여주인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나’를 붙잡는 기억 속 ‘너’는 점차 옅어진다. ‘나’의 그림자가 ‘너’도, ‘나’도 그림자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은 사실 ‘나’가 ‘너’에게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순간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름 없는 ‘커피숍‘을 혼자 꾸려나가는, 특별한 속옷으로 빈틈없이 몸을 감싸고, 주위에 도사린 (것으로 보이는) 가설적인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왠지 모르지만 성행위를 수용하기가 불가능한 삼십대 중반의 한 여자를.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그녀도 내게 호감을 갖고있다. 그 사실은 틀림없다. 우리는 산에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에서 (아마도) 서로를 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다ㅡ딱딱한 실질을 갖춘 무언가에 그렇다, 이를테면 높은 벽돌 벽 같은 것에.

그런 상대가 내 앞에 나타나기를 나는 지금껏 기다렸던 걸까? 그것이 내게 주어진 새로운 나무상자일까? - P682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

나는 흠칫 각성한다. 혹은 틀림없는 현실의 대지로 이끌려온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 또렷이 귓가에 남아 있다.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 - P696


‘나’의 그림자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소년에게 도시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소년이 ‘나’의 본체가 있는 도시로 가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다. 황천국에서 죽은 이자나미의 모습을 보고 이자나기가 현세로 도망친 것처럼, ‘나’의 본체 역시 소년과의 만남을 계기로 다시 한번 도시를 떠날 결심을 굳히게 된다. ‘나’는 ‘너’에게 ‘안녕’이라 작별인사를 전하면서, 마침내 ‘너’에게서 완전히 벗어난다. ‘나’의 본체는 ‘나’의 그림자를 향해 낙하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의 본체에 멈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너’를 만난 17세라는 시간에 얼어붙어 있던 ‘나’의 의식은 중년이 된 나의 육체에 맞춰 나이를 먹게 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독자를 고민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저자가 펼쳐놓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과 그들의 행위, 그리고 상징을 놓고 퍼즐을 맞추듯이, 아니면 탐정이 추리하듯이 추적할 수 있다. 나와 ‘너’의 관계, ‘너’의 정체, 나와 ‘너’가 함께 창조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정체, 1, 2, 3부의 나의 정체, 고야스 씨의 정체,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정체, 나와 커피숍 여주인의 관계, 가미카쿠시로 언급되는 소년의 실종 등.


‘너’가 창조하고 ‘나’가 받아들인, 저 세계에 위치한 도시는 사후 세계처럼 비춰보이기도 한다. 이 세계(현실)은 시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며, ‘나’는 점차 늙어간다. 반면 저 세계인 도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계절은 순환하고 단각수들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긴 하나, 끊임없이 순환하기만 할 뿐이다. ‘꿈 읽는 이’로서의 나는 오래된 꿈을 읽을 뿐, ‘너’와의 관계가 진전되는 일은 없다. 이런 측면에서 도시는 얼어붙은 장소다. 


"그건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이 도시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으니까요."

"이곳에서는 시간이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이곳의 시간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시간이 없으면, 축적이란 개념도 없는 건가?"

"네, 시간이 없는 곳에는 축적도 없습니다. 축적처럼 보이는 현상은 현재가 던져주는 잠깐의 환영일 뿐이에요. 책장을 한장씩 넘기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책장이 넘어가는데 쪽 번호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뒷장과 앞장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위 풍경이 바뀌어도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늘 현재밖에 없다?" - P737

"즉 우리는 나무를 벗어나 허공에 있다는 말일까? 붙잡을것이 없는 장소에."

소년은 작지만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입니다.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낙하하진 않았어요. 낙하가 시작되려면 시간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으면, 우리도 계속 허공에 뜬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이 도시에도 시간은 존재합니다. 다만 의미가 없을 뿐이죠. 결과적으로는 같은 얘기지만."

"즉 우리는 이 도시에 머무르는 한 언제까지나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로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높이에서 떨어지게 돼. 그 결과는 치명적일지도 모르고."

"아마도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바로 긍정했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 존재를 유지하려면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얘긴가?" - P743


도시를 에워싼 벽은 무엇일까. 벽은 자유롭게 형태를 바꾸며 도시와 도시 바깥을 경계 짓는다. 다른 한편,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벽이 역병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는 영혼이 앓는 역병이냐 물어보고 소년은 긍정한다. 달리 보면 벽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의사소통을 통해 인간의 마음으로, 의식으로 전염되는 생각이나 감정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타인의 말과 생각을 적당히 걸러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인간이 의식, 혹은 마음에 세운 벽은 그 형상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한다. 다만 벽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나’의 본체는 ‘너’의 곁에 머물려고 벽을 잔뜩 높여버렸다. 반면 ‘나’의 그림자는 도서관장으로서 새로운 일상을 이어나가며 커피숍 여주인과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벽을 낮춘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반대다. 소년은 타인이 글이나 말로 전하는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흡수한다. 소년에게는 벽이 필요하다. 마치 과거 샤먼이 속세와 단절된 성소에 머물렀던 것처럼.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 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 P178

나는 큰맘먹고 말했다. "실제 역병이 아닌 역병. 요컨대 비유로서의 역병………… 그런 걸까?"

소년이 아주 작게 끄덕였다.

"혹시, 영혼이 앓는 역병 같은 것일까?"

소년이 다시 끄덕였다. 꾸벅, 하고 확실하게. - P528


한편, ‘나’는 ‘나’의 본체(저 세계)와 ‘나’의 그림자(이 세계)로 나뉘어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 소설 밖 독자들은 잠들었을 때 꿈을 통해 현실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채로도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 그에 해당하는 행위 중 하나가 바로 독서다. 2023년 12월 31일의 독자는 언제든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아를 펼쳐 기원전 인물인 호메로스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나’의 그림자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본체가 이 세계로 돌아올 길을 마련하는 동시에, 독서를 통해 죽은 자와 접촉할 수 있는 소년을 도시로 보내 ‘나’의 본체를 일깨우게 되었다. 


소설에서 ‘나’의 그림자는 도시가 ‘나’의 창조물이라 말하지만 사실 ‘너’의 창조물이 ‘나’에게 전염된 것이다. 그러나 도시와 ‘너’ 모두 ‘나’의 기억 속 존재이다. ‘나’의 기억 속에서 도시와 ‘너’는 언제나 존재한다. 동시에  도시와 ‘너’는 ‘나’라는 한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기억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도시는 나에게 ‘꿈 읽는 이’라는 역할을 맡겨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오래된 꿈을 읽혀 도시를 벗어날 생각을, 현실에 눈을 돌릴 생각을 품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소년이 넘어온다. 소년은 ‘나’의 그림자, 그리고 ‘나’의 본체의 양 귓볼을 깨물어 도시로 들어오고, ‘나’의 본체에게서 ‘꿈 읽는 이’의 역할을 함께 한다. 점차 '나'의 본체는 생각을 바꾸게 되며 끝에 가서는 ‘너’에게 ‘안녕’이라는 작별 인사를 건넨다. 여기서, 어째서 ‘나’의 본체는 ‘너’를 데려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의 그림자도 ‘너’를 데려가자는 말은 전혀 꺼내지도 않는다. ‘나’도, 이자나기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오지 못한다. ‘나’와 이자나기는 데려오려는 대상들에게서 오히려 도망친다. 이자나기는 구더기가 들끓는 이자나미의 본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자나미에게서 도망쳤다. ‘나’는 처음부터 ‘너’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중에는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건넬 뿐이다. 어쩌면 ‘나’는 도시에서만 머물 수 있는, 도시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너’의 실체를 마침내 수용하였기 때문 아닐까?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소년은 독서를 통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역할을 맡는다. 소년은 평범하게 책을 읽지 않는다. 소년은 책의 내용 전부를 머리 속에 담는다. 소년의 독서법은 지식을 활용하거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독서가 아니다. 죽은 자들이 책이라는 매체에 남긴 기억을 삼키는 독서법이다. 이를 통해 소년은 죽은 자가 남긴 말을 읽고 머리 속에 아로새긴다. 소년은 독서를 통해 죽은 자의 기억을 현실에서 고스란히 재현하여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가교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소년은 독서라는 매개체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에 속한 영과 소통하는 샤먼에 가깝다. 그렇기에 소년은 이 세계(현실)에서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독했고, 책이 아닌 ‘꿈 읽는 이’라는 역할을 듣자마자 자신의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읽는 것이 타고난 저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쌓여 있는 오래된 꿈은 아마 저만 읽을 수 있을 특별한 책들이고요. 그러니 저는 그걸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책무이자,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행위니까요." - P737


이 소설은 본체와 그림자로 분열된 ‘나’가 한편으로는 저 세계에서 ‘너’의 곁에 머무르려 하면서(1부),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계에서 ‘너’로부터 벗어나려 하면서(2부) 마침내 ‘나’의 본체가 ‘너’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3부) 과정이다. 거칠게 말해 이자나기, 이자나미 신화를 보다 자세하게 상술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너’는 이자나미와 이자나기가 일본과 신들을 낳은 것처럼 도시를 창조했다. 이자나미가 죽은 것처럼 ‘너’는 현실에서 사라져버렸고 ‘나’는 이자나기가 이자나미를 만나려 황천국에 가듯이 ‘너’를 쫓아 ‘너’의 본체가 있는 도시로 갔다. ‘나’는 ‘너’를 만난 후 ‘나’의 그림자와 함께 도시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너’가 머무는 도시의 벽은 이자나미가 이자나기를 추격하듯이 ‘나’를 가로막는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나’의 본체는 탈출을 관두고 ‘나’의 그림자만이 탈출하여 현실에서 ‘나’의 본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과정을 집어넣어 모티브가 된 이자나미와 이자나기 신화를 확장해 놓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이야기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너’에 대한 기억에 사로 잡힌 ‘나’와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의 이중적인 면모가 제시된다. 기억과 상상, 둘의 경계는 애매하긴 하나 인간이 현실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떠나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기능은 동일하다. 두 가지 수단을 통해 인간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40대 중년의 남성 ‘나’가 10대 시절 ‘너’의 곁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대체 현실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말하듯이, 허공에 가만히 정지한 상태다. 시간이 흐르는 순간 사라질 대체 현실이며, 결국 현실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늘 높이 올랐다가 대지로 추락하면서 깨어나는 꿈처럼. 영화가 시작되고 결국 끝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것처럼. 책을 펼친 후 다 읽은 뒤 덮는 것처럼.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늘 과거의 한 때를 바라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발을 붙이면서 사는 독자들에게 일상으로 대표되는 이 세계와 도시로 대표되는 저 세계를 오가는 소설 속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이 소설의 ‘나’에 대해 저마다의 해석을 내리도록 인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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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Heath 2024-01-01 10:52   좋아요 1 | URL
2024년 첫날이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서양사강좌
박윤덕 외 지음 / 아카넷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16년에 출간된 『서양사강좌』는 총 25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서양사 개론서이다. 1-8장까지는 고대에서 중세, 9장부터 25장까지는 근현대를 다룬다. 2022년 출간된 개정증보판은 "헬레니즘," "민족주의," "러시아 혁명"이 추가되어 총 28개의 장으로 늘어났다. 『서양사강좌』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출신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집필하였다. 저자들이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이 책의 대상 독자는 대학의 교양 및 전공 과정에서 서양사에 입문하려는 학생들 혹은 서양사에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들이다. 


『서양사강좌』 이외에도 여러 서양사 개설서가 출간되었다. 해외 저자가 쓴 저작의 경우 『새로 쓴 서양 문명의 역사』가 있으며 국내 저자가 집필한 경우로는 『서양사총론』(1976), 『서양사개론』(1983), 『서양사강의』(1992)가 있다. 『서양사강좌』의 저자들은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서양사 개설서가 요구되었으며 이에 맞춰 『서양사강좌』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그 의도를 밝히고 있다.


특히 저자들이 심혈을 기울인 지점은 서양 중심의 유럽중심주의를 탈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유럽사 외부의 요소들을 고려하고 유럽과 서양을 지구상의 여러 문명과 지역 중 하나로서 바라보려 했다고 밝힌다. 나아가 정치사 뿐 아니라 사회사, 문화사의 성과들도 적극 반영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실제로 각 장의 주제나 구성에서 잘 드러난다. 각각의 장은 먼저 해당 장에서 다루는 몇 가지 주제이나 사건들을 개괄한 후, 구체적으로 설명에 들어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먼저 고대에서 중세까지에 해당하는 1-8장을 보자. 3장 '기독교의 형성과 고대 세계'는 기독교가 형성되어 로마 제국에서 국교로 성립되고 교리를 정립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4장 '중세 유럽의 탄생과 세 문명권의 성립'은 서유럽, 비잔티움, 이슬람 3개 문화권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6장 '중세 유럽 사회: 농민과 귀족, 성직자'는 3계급으로 구성된 중세의 사회문화사적 측면을 설명한다. 7장 '중세 유럽의 문화와 타 문명과의 교류'은 십자군을 필두로 서유럽과 타문명권 사이의 교류 과정을 밝힌다.


근현대 파트를 다루는 9-25장은 이런 점이 더더욱 부각된다. 예컨대 9장 '대항해 시대와 세계 체제'는 근대 유럽에서 각 국가들이 보여준 국가들 간의 관계 혹은 '체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다룬다. 15장 '19세기 전반기 대서양 양안 세계의 변화'에서는 서술 대상이 유럽을 벗어나 대서양 양안의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포괄하기에 이른다. 16장 '산업사회의 등장과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이 근대 유럽 사회에서 주도적인 정치세력으로 부각되는 과정과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사상 및 정치적 운동을 다룬다. 17장 '도시화와 근대 문화의 성장'은 근대 유럽 사회에서 이전 시대와는 양적, 질적 측면에서 현저히 달라진 도시를 개괄한다. 18장 '제국주의의 시대(1870-1914), 19장 '이주의 물결과 이동의 확대'는 유럽이 타 지역과 맺은 관계, 그리고 서양 열강들이 만들어낸 국제 질서 속에서 유럽인들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인구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잘 드러내는 장들이기도 하다. 근현대 파트에 해당하는 장들은 '서양'에만 국한되지 않는, 세계사 혹은 지구사로서 전세계가 뒤얽힌 복잡한 사건들의 전개 과정을 간략하면서도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700페이지에 가까운 벽돌책이다. 2022년 개정판은 100페이지 가량 더 늘어 800페이지에 가까운 더 두꺼운 벽돌책이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분량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각 장은 별 개의 장이며 마음에 드는 장부터 읽어도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중세, 종교개혁, 제국주의,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68운동, 소련의 붕괴 과정과 같은 커다란 주제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개론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다른 문학, 인문학, 역사학 서적을 읽을 때 배경 삼아 참고하기에도 좋다. 


한 가지 짚고 갈 점은 이 책이 1장 '고대 그리스 세계'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개정증보판에서 헬레니즘 세계가 추가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시작점은 같다. 이 지점은 어떻게 보면 고대-중세-근현대로 넘어가면서 서술의 지평을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해 유럽 전반,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로 넓혀가는 기존의 서양사 서술 구조를 답습하는 지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향후 또다른 개정판이 나온다면 유럽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은 중근동 및 아프리카 지역에 관해 별개의 장을 할애하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점을 짚고 가자면, 이 책에서의 서양사는 20세기 말, 동구권 소련의 붕괴로 끝난다. 북아메리카와 서유럽 지역의 현대사는 사실상 68운동 시점에서 종결된다. 소련 붕괴 이후의 현대사는 23장 '냉전 체제의 전개와 제3세계의 대두' 끝에서 살짝 다루어지는 데 그친다. 21세기의 사반세기에 거의 다다른 현 시점에서 21세기도 이제 하나의 장으로 서술하기에 충분한 시점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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