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구판절판


우리는 건물이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미래의 상징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는 건물이 마음을 다독여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흥분시켜주기를 바랄 수도 있으며, 조화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고 절제의 느낌을 풍기기를 바랄 수도 있다.-66쪽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내심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으면서, 왜 자신의 작품을 주로 기술적인 맥락에서 정당화했을까?
그들의 신중함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 기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비판에서 면제된 스타일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고딕이나 티롤 건축의 추종자들이 모더니즘 주택의 외양에 목소리를 높여 이의를 제기할 경우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면, 반드시 고압적이고 오만하다는 비난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민주정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학에서도 최종 심판관은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비난자를 막고 동요자를 설득할 수 있는 과학적 용어의 매력이 돋보이게 되었다.-71쪽

디자인된 물건은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심리적 또는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인상을 심어준다.
본질적으로 디자인과 건축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내부나 주변에서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다. 이 작품들은 그 거주자들에게 장려하고 또 유지하려 하는 어떤 분위기에 관해 말한다.-77쪽

아름답다는 느낌은 좋은 생활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물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 어떤 개인적이고 신비한 시각적 선호에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올바른 존재감각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80쪽

건물이나 사물이 물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주는 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한곳에 모인 돌, 쇠, 콘크리트, 나무, 유리의 배치가 자신을 표현하는―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의미심장하고 감동적인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묘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할 필요가 있다.
하얀 벽 안에 20세기의 추상 조각들을 모아 놓은 미술관에서 우리는 3차원적인 덩어리들이 의미를 얻고 또 전달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는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의 설비와 주택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지 모른다.-82쪽

때로는 거대한 귀마개나 뒤집힌 잔디 깎는 기계를 연상시키는 물체를 두고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웃음을 터뜨리기는 쉽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해몽이 꿈보다 좋다고 비난하는 대신, 추상 조각가들이 온갖 종류의 비구상적인 대상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에 한 번쯤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뭇조각과 줄, 석고와 금속 장치를 이용해 우리에게 커다란 관념들, 예를 들어 지혜나 친절, 젊음이나 노쇠와 관련된 관념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언어로 또는 인간이나 동물을 모방한 형상으로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재능이다. 실제로 위대한 추상 조각가들은 독특한 분열된 언어로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뒤집어 말하면 이 조각가들 덕분에 우리는 평소와는 달리 건물이나 가구를 포함한 모든 사물의 소통 능력에 강렬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미술관에 가서 영감을 얻고 나면 샐러드 사발은 샐러드 사발에 불과하다는 이전의 산문적인 믿음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이제는 샐러드 사발에도 희미하기는 하지만, 완전성, 여성성, 무한성 등 의미 있는 연상들이 머문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책상, 기둥, 아파트 건물 같은 실용적인 물체를 볼 때도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에 관한 추상적인 표현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85쪽

활자로 찍은 글자처럼 작은 것에서도 풍부하게 발전한 개성을 탐지할 수 있으며, 그 삶과 백일몽에 관하여 어려움 없이 단편소설 하나라도 써낼 수 있다. 헬베티카 활자 ‘f'의 곧은 등과 빈틈없는 꼿꼿한 태도는 정확하고, 깔끔하고, 낙관적인 주인공을 암시한다. 반면 폴리필루스 활자는 그 숙인 머리와 부드러운 이목구비 때문에 졸린 듯한 느낌, 수줍은 모습으로 시름에 잠긴 듯한 느낌을 준다.-89쪽

진정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투사를 견딜 만한 내적 자산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런 작품은 좋은 특질을 단지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현한다. 따라서 시간적이고 지리적인 기원을 넘어 살아남고, 최초의 관객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작품은 우리의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속 좁은 인상의 밀물과 썰물 위에 우뚝 서서 자신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
108쪽.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102쪽

우리가 환경에 민감한 이유는 인간 심리의 곤혹스러운 특징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에 수많은 자아를 품는 방식 말이다. 그 모든 자아가 똑같이 ‘나’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불협화음 때문에 어떤 분위기에 들어가면 스스로 나의 진정한 자아라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불평하기도 한다.-110쪽

우리 주위의 재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품고 있는 최고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성실과 활력이 지배하는 정신 상태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속으로 해방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깊은 의미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방 전체와 마찬가지로 그림 한 장도 우리 자신에게서 사라졌던 의미 있는 부분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125쪽

애초에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거의 언제나 불균형의 위험, 우리의 극단들을 조절하지 못할 위험, 삶의 커다란 위험물들―권태와 흥분, 이성과 상상, 단순과 복잡, 안전과 위험, 내핍과 사치―사이의 중용을 놓칠 위험에 빠져 있다는 표시다. -166쪽

취향 뒤에 놓인 심리적 기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꿀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그냥 무시해 버리는 태도는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이 결여되어 있기에 저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하고 물어야 한다. 그들의 선택에 열광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들의 박탈감은 이해할 수 있다. -175쪽

취향의 충돌은 여러 힘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파편화하고 고갈시키는 세계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 우리가 균형을 잡지 못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도 취향의 스펙트럼에서 계속 새로운 부분, 새로운 스타일로 이끌린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이 현재 우리 내부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집중된 형식으로 구현할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선언하게 된다. -178쪽

순진하게 민속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을 갈망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라들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차이가 건축적 수준에서 적절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일 뿐이다. 나는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 과거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전등스위치, 그 연장선상에서 건물 전체를 원했다.-236쪽

<겐지 이야기>의 가장 훌륭한 번역이 개별 단어에는 광범한 자유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다. 꼼꼼하게 단어만 그대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원래의 의도에 충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65
설계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었던 것을 씻어내고, 끈질기게 우리의 조건반사 뒤에 감추어진 기제를 쪼개보고, 불을 끄거나 수도를 트는 것 같은 일상적인 행동의 신비와 아연할 정도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242쪽

우리는 건물이 우리 뜻에 따라 지어진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불도저나 크레인의 방향을 안내하는 미리 결정된 각본은 없다. 잃어버린 수많은 기회를 아쉬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더 나은 쪽으로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27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장 선거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면장 선거
(0610)
이라부 시리즈 3권을 발간한 즉시 다 읽었음에도, 리뷰는 이번에 처음 작성한다. 담아두고픈 표현을 여럿 기록한 소설이라던가, 특별한 영상을 그려나갔던 소설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다 읽고 나서 그리 나쁘다는 감각이 없기에, 다시금 이라부 시리즈가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어쩐지 후일담이 쭉쭉 이어질 것 같은 어느 한 ‘점’을 보았기 때문이다.
척 보기에 터무니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극히 가벼운 소재와 분위기를 띄우기도 하는 소설이다. 통통거리다가 마구 엇나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을 보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꾸만 책을 뒤적거리게 만드는 원동력은, 내게는, ‘이라부’라는 인물의 특성덕분. 내게 비쳐지는 그는, 사람에 대한 차별대우가 전혀 없다. 그 상대가 누구든 평등하게 대한다. 그 사람이 정치가이든, 유명 연예인이든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위치가 어쨌단 말인가, 라는 뉘앙스가 팍팍 풍긴다. 간혹 철딱서니 없음에 살짝 꿈틀 반응을 하며 인상을 찡그리게 되었지만, 본능에 조건반사처럼 대범하고,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거침없다는 것에서 좀 더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신이 가진 불안, 절망, 자괴감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는 의식의 바탕. 나 자신이 다르게 해석한 건지 모르지만, 이라부의 대사들을 보고 있으면, 매번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예전에 미소 수프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 문제는 (그 증상이 같건 다르건)집합과도 같은 유형이 있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만이 소화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표출하는 이미지가 비슷비슷하다고 해도, 세부적인 면, 그러니까 껍질 안의 양상들은 제각각 복잡하게 얽혀 있을 테니까.) 카운슬링의 경우는 약간의 도움을 줄 뿐, 풀이하자면, 그 현재의 상태를 좀 더 완화시킬 수 있는 작용은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멀찌감치 방관만 하는 게 아니라(대개 소설의 초반에는 그런 분위기가 흐른다), 점점 추리소설에서 단서를 제공하듯 심리적으로 임시 안식처를 형성해가며, 함께 한다는 손 내밀기가 있다.


그리고 핵심을 찌르는 단어나 대사들이 속속 발견된다. 이라부의 처방이 바로 그러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상담 과정에서 일단 이야기로 털어놓는다는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소법의 하나랄 수 있으니까.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한다면, 돌파구는 어디든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주위의 소소한 관심&사랑도 한몫을 하겠지. 나 자신도 그런 경험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소설에 드러난 인물들의 공포는 정말이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요소들이었다.


어쨌건, 나열한 사항들이 열광 모드에 발을 푹 담그고,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 계기다. 이 책의 하드커버를 덮고 난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재충전’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유쾌한 소설을 쓰며 매달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안 되고(우울의 바다에 풍덩 빠져 몸을 내맡긴 채였다.), 갑갑한 기분을 다소나마 풀고자 질렀던 소설이었다. 술술 읽혔던 것에 비해, 리뷰는 좀 더 신중한 자세로 쓰고 싶었다.

시종일관 이라부의 능청스러움에, 벌어지는 소동에 낄낄거리며, 전체적 스토리라인 자체보다는 작은 에피소드에 주목했다. 필수조건으로 따라붙는 ‘주사’는 자극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확정적 답변은 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미로 탈출을 위해 열쇠를 찾아보라는 그런 의미가 담긴. 손에 틀어쥔 것을 스르르 내려놓아야 강박증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가 가진 것을 과감하게 버리라는 거. 스스로의 선에서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기란 밤하늘에 흐르는 별을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움을 동반한다. 나는 그런(책에서 말하는) 결단력을 아직 갖추지 않은 듯하다. (특히, 취미생활에 끌어들이는 소품에 한해서는.)

각각 단편에 등장하는, 어쩌다 쓸데없는 묘사(한 문장 혹은 두 문장)가 끼어들기도 했다. 책을 읽은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주사를 놓는 장면에서. 특별히 제시되지 않아도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 예시나 근거와도 같다. 연방 툴툴거리다가, 다시금 되짚고 했던 기억이 있다. 차라리 <카리스마 직업>의 마지막 풍경에서 밴드의 연주 묘사와 그녀의 가사가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밴드의 비판적인 가사 타입에 무척이나 열광해서인지는 몰라도.)


[이라부는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인간이다. 이 섬에 온 지 불과 2주만에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아니,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건 너무 치켜세우는 걸까. 어쨌거나 이 섬에 희귀한 생물이 찾아온 것이다.]
밑줄 긋기 끝부분에 기록했던 것처럼, (나 자신의) 이라부에 대한 다른 각도의 판단이 깔끔하게 정리된 부분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6-21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마이리뷰군요!!! ^^
저도 이책 곧 받아볼 예정인데 잘 읽었습니다!!! :)

프레이야 2007-06-2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합니다!
 
나의 소소한 일상 - 다자이 오사무 산문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시공사 / 2007년 3월
품절


W라는 이름도 기억 못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얼굴조차 잊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로 건망증이 심하다. 하지만, W군이 창문에서 불쑥 내민 둥근 얼굴은 컴컴한 무대 한가운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W군도 내향적인 사람이어서 나처럼 바깥에서 노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 꼭 한번 나는 W군을 보았고, 그것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천연색 사진으로 찍어둔 것처럼, 영상이 흐려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있었다. 나는 얼굴을 엽서에 그려보았다. 마음의 영상대로 그릴 수 있어서 기뻤다. 분명히 주근깨가 있었다. 주근깨를 점점이 뿌려서 그렸다. 귀여운 얼굴이다.-16~17쪽

뭐니뭐니해도 정말 친한 사람과 집에서 느긋하게 마시는 것보다 큰 즐거움은 없는 것이다. 마침 술이 집에 있을 때 훌쩍 친한 사람이 찾아와 주면 정말 기쁘다. 멀리서 친구가 오니 아니 즐거우랴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20쪽

술이 깨면 후회도 심하다. 땅바닥을 구르면서 와, 하고 크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 부끄럽고 후회가 되어 글자 그래도 뒹군다. 그럼 술을 관두면 될 텐데, 친구의 얼굴을 보면 역시 이상하게 흥분되어 겁에 질려 떠는 듯한 전율을 전신에 느꼈고,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이다. 성가신 일이다. -21쪽

모처럼 이런 시골 구석까지 와 주었는데 내가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해서, 모두 일종의 쓸쓸함이나 환멸을 안고 돌아간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금방 걱정이 먹구름처럼 전신에 퍼져, 이불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W군이 우리 집 현관에 술 한됫병을 몰래 놓고 간 것을 그날 아침 처음 발견하고, W군의 호의가 견딜 수 없이 마음에 사무쳐서 그 주변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23~24쪽

왜 안 쓰나? 사실은 몸의 상태가 조금 안 좋아서, 라고 궁지에 몰려서 눈을 내리깔고 애처롭게 고백하곤 하지만, 담배를 하루에 오십 개비 이상 태우고, 술은 마셨다 하면 보통 한 되 이상 쉽게 마시며, 그리고 나서 오차즈케를 세 공기나 쑤셔 넣는 그런 병자가 어디 있어. 요컨대 게으른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래서는 나는 도저히 가망 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단정 짓는 것은 나로서도 괴롭지만, 더는 자신을 응석받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괴로움이니 고매라느니 순결이니 순수이니, 그런 말은 이제 듣고 싶지 않다. 쓰라고, 만담이든, 콩트든 상관없다. 쓰지 않는 것은 예외 없이 나태해서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맹신이다. 사람은 자기 이상의 일도 할 수 없고, 자기 이하의 일도 할 수 없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인간 실격,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심각한 얼굴로 책상머리에 앉지만, 막상 아무것도 안한다.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 별반 심오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게으름뱅이의 공상만큼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나쁜 말은 천 리를 간다고 하지만, 게으름뱅이 공상도 졸졸 한없이 흘러 내달린다.-27~28쪽

가끔은 제대로 된 소설을 써라. 자네, 요즘 겨우 세상에서 평판도 좋아졌는데 또 이런 트럼프라니, 곤란하잖아. 세상 사람들이 자네가 아직 병이 안 나은 게 아닌가, 의심할지 몰라.
내 좋은 친구들은 그렇게 말하며 염려해 줄지 모르지만, 이제 걱정해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아직 노인이 아니다. 요즘 그걸 깨달았다. 알고 보니 모두 이제부터다. 미숙하다. 문장 하나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쓰고 있다. 아직 자기 생각으로 꽉 차 있다. 화내고 슬퍼하고, 웃고 몸부림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형편이다. 역시 서른한 살은 서른한 살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깨달은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이것을 고마운 발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난 아직 쓸 수 없다.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절대로 쓸 수 없다. 마음만은 다다랐어도 그것을 계속 유지할 역량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슬프지 않다. 나는 문학을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37~38쪽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꼴사나워서 낯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 그래도 이 이야기는 내 좋은 친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꼭 써 두고 싶은 것이다. 순수를 추구하다가 질식하기보다는, 나는 탁해도 크고 싶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별것 아니다. 지기 싫은 것이다.
이 작품이 건강한지 건강하지 않은지, 그것은 독자가 결정해 주리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은 결코 엉터리가 아니다. 엉터리는커녕 나는 필사적이다. 이런 소설을 지금 발표하는 것은 나한테 불이익이 될 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모험을 해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여러모로 헤맬 것이다. 괴로워하는 것이다. 파도는 거칠다. 그 점은 자만하지 않는다. 충분히 조심할 정도로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39쪽

대개의 경우, 나는 그저 쓴웃음으로 맞아질 따름이다. 많은 사람에게 나는 어쩐지 껄끄러운 그저 시건방진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모두를 두려워하고, 그리고 모두를 조금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즐겁게 하고, 자신을 갖게 하고 크게 웃게 하고 싶어서, 그것만을 염원하였다. 나는 도둑놈 흉내를 냈다. 거지 흉내조차 내 보였다.

44
나는 달한테 편지를 받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였다. 가만히 있지 못해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고 창을 열어젖혀 달을 보았다. 달은 낯선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걸려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 숨을 죽였다. 달은 그래도 모른 척 하고 있다. 냉혹하고 엄격하여, 처음부터 인간 따윈 문제 삼지도 않는다. 차원이 다르다. 나는 흉측하게 우뚝 서서 쓴웃음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니고,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신음했다. 그대로 작은 여치가 되고 싶었다.-41~42 쪽

이렇게 힘든 꼴을 당하는 것도 결국 평소의 나태함 때문이다. 이래서는 정말 안 되겠다. 각오만은 대단하지만 지금처럼 게을러서는 제대로 된 소설가는 될 수 없다.

61
꽃 피지 않는 수레국화
시생멸법(是生滅法), 성자필쇠(盛者必衰).
차라리 둔갑해서 나타날까 봐.

67
나는 나로서 잊지 못할 일만을 단편적으로 쓰려고 한다.-54쪽

되돌아보면 저로서는 확실하게 이러이러한 동기로 문학을 지향했다는 것을 모르겠고, 거의 무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저는 어느새 문학이란 들판을 걷고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정신을 차리자 그야말로 갈 길도 천 리요, 돌아갈 길도 천 리 라고나 할까. 꼼짝없이 문학이라는 들판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깨닫고 무척 놀랬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116
저의 세상 사람에 대한 감정은 역시 수줍습니다. 키를 두 치 정도 낮춰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점에도 제 문학의 근거가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112쪽

나는 집에서 늘 농담만 한다. 그야말로 마음에 고민과 번뇌가 많기 때문에 겉으로는 쾌락을 가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나 할까. 아니, 집에서뿐만 아니라, 나는 남을 대할 때에도, 아무리 마음이 괴롭고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거의 필사적으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손님과 헤어지고 나면 나는 피로에 휘청거리고 돈 문제, 도덕 문제, 자살을 생각한다.
남을 대할 때만이 아니다. 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슬플 때 도리어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 스스로는 가장 괜찮은 봉사라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다자이란 작가도 요즘은 경박해, 재미만으로 독자를 낚는다, 극히 안이하다고, 나를 경멸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 나쁜 일인가? 점잔 빼고 좀처럼 웃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인가?-132쪽

자기의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는 자기가 가장 잘 안다. 천에 하나라도 스스로 좋다고 인정한 작품이 있다면, 그보다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자 자기 마음에 잘 물어볼지어다.
- 소소한 행복에 관해.

183~184
어떤 한 남자의 정진에 대하여.
나는 혈안이 되어 진실만을 좇았습니다. 나는 지금 진실에 따라 붙었습니다. 나는 진실을 앞질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달리고 있습니다. 진실은 지금 내 등 뒤에서 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스갯소리도 못 됩니다.-170쪽

아무것도 없다. 잃어버릴 아무것도 없다. 진정한 출발은 여기로부터? 쓴웃음.
웃음. 이것은 강하다. 문화의 궁극적 불꽃이다. 이지도 사색도 수학도 일체의 교양의 극치는, 필경 포복절도하는 큰 웃음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아, 교양은, 교양이라니, 역시 그런 것에 얽매여 있으니까 포복절도감이다.
231~232
내게는 아직 이렇다 자랑할 수 있는 작품이 없어서 큰 소리는 못 치지만, 그것은 조금 묘한 창작법이다. 말을 꺼내려다 더듬거리게 되니 말해서는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괴상한 방법이다. 하긴, 전부터 무의식적으로 해 온 것을, 요즘 어른이 되어 겨우 알아챈 것뿐인지도 모른다. 말을 하면 너무 당연한 얘기라 뭐야, 아무것도 아니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200쪽

남의 일을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꼬락서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나는 이 기회에 좀 더 깊게 자신을 조사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절호의 기회다.
… 느슨함을 경멸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의외로 안이하게 살고 있다. 타인의 안이함을 조소하면서, 자신의 안이함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자기변명은 패배의 징조이다. 아니, 이미 패배의 모습이다.-233~234쪽

누구나 처음에는 본보기를 좇아 연습을 쌓지만, 창작자란 자가 언제까지나 본보기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실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 풍차가 역시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습니다. … 그저 진실하고 우직하게 인상의 정확을 기하는 일 한 가지만 노력해보세요. 강력한 하나의 주관을 지니고 나아가라!
245
표현하고 싶은 현실을 기를 쓰고 쫓아가고 있었다. 그 정색하고 기를 쓰는 점이 신선했다.-242~243쪽

스스로 한 일은 그렇게 확언하지 않으면, 혁명이고 뭐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고도 다른 일이 하고 싶어서 인간은 이래야 한다, 라는 등 말하는 동안은 인간 내면으로부터의 혁명이 언제까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288~289
원래 작가와 평자와 독자의 관계는, 예를 들면 정삼각형의 각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와 같은 위치에 각각 밖을 향해 앉아 있어서는 말이 되지 않지만, 각각 안으로 마주앉아서, 작가는 말하고 독자는 듣고 평자는 혹은 작가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혹은 미심쩍은 것을 확인하고, 혹은 독자를 대신해서 중지를 요청한다. 요즈음 바보 교수들이 묘하게 뻔뻔하게 나와서, 예를 들면 직선상에 두 점을 놓고 작자와 독자라고 한다면, 교수는 그 동일선상의, 게다가 두 점의 중간에 끼어들어 갑자기 ‘히히히’이다. 이야기 도중의 작가도 독자도 정말이지 당황스럽고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262쪽

예전에 그랬으니까, 지금도 똑같은 운명을 따를 자가 있다는 식의 건방진 독단은 말아 달라.
299
용서한다 안 한다는 그런 엄청난 권리를 자기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다. 도대체 자기 자신은 어떤데? 남을 심판할 분수도 아닐 텐데 말이다.-298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6-09 00:28   좋아요 0 | URL
속았......습니다. (뚱-)
저는 문님의 '소소한 일상' 인줄 알았단 말입니다. (흥)
그나저나, '그 불쌍하기 그지없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언제 들려주실겁니까? (집요)
 
에르미따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4월
장바구니담기


문학의 더 중요한 기능은 아마도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묘사일 것입니다.
문학은 도덕적 딜레마를 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며, 신이 부여한 도덕적 선택에 대한 자유를 구가하게 해줍니다.
어떠한 종교도, 정부도, 정치적 운동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p. 13
"이 나라를 똥구덩이 같은 역사에서 건져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버린 과거가 아니다. 오로지 우리를 짓누르는 죽음과도 같은 부패를 인식하고, 그것을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현재뿐이다."-2쪽

"예술가들이 시적(詩的)으로 아름답게 재창조하지 못하는 것들은 이 세상에 없어요. 왜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죠? 문학은 사실도 아니고 돈 버는 능력이나 상품을 만드는 기술, 살림 솜씨를 키워주는 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앞으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런 것들이잖아요.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사람들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예요. 문학과 문학의 문제들 속에서 우리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스스로를 명료하게 알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거지요."

"그러면 외설적인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알려주지요. 차별이 바로 외설이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여기, 부유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학교 안에서 무책임한 부를 자랑하는 것, 그게 바로 외설이지요!"-141~142쪽

왜 그녀는 과거를 알아내려 했고, 왜 그 망령에서 벗어나려 했을까? 그녀는 진흙을 뚫고 싹을 틔웠으나 운명은 그녀 앞에 남루한 현실을 던져주었을 뿐이다.-194쪽

"이 나라가 서서히 자멸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 같아. 이번에는 외국의 통치세력도 필요 없을 거야. 우리 스스로 파멸하는 축복을 받게 된 거지. 전쟁이 끝난 뒤 우리에게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 용기와 이상만 있었다면, 식민통치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악덕을 스스로 제거할 수만 있었다면, 무너진 돌 더미 속에서 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을 거야. 우리의 교육체제는 전혀 쓸모없어. 내가 바로 그 체제의 산물이지. 결국 우리가 만든 것이니 그 결정적인 허점을 비난할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 다가올 암흑은 우리가 불러들인 거야."-310~311쪽

"- 우리를 괴롭히는 슬픔에도 행복이 있어. 슬픔 속에는 지혜가 있고, 삶과 예술의 근원이 있지.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이 바로 그런 거야. 문학의 배후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통함이 있어. 그것은 우리를 움직이게 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창조하는 거야."-396쪽

"아니타, 그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 애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해. 아니타, 잘 들어. 나는 릴리를 존경해. 그 애는 오래전에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어. 안락함에 젖어들어 타락하기 전에 했어야 했던 일 말이야. 그 애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그리고 지금 그 애가 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 내 말 듣고 있어? 용기 말이야. 우리들 대부분이 잃어버린 것."-431쪽

나처럼 내 나라도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아무도 그것을 멈출 수 없을 거야. 만약 종말의 시간을 늦출 수만 있다면 치료 방법을 찾게 될 지도 모르지. 우리를 갈라놓고 서로 멀리 떨어지게 만든 그 틈은 지금도 점점 더 벌어지고 깊어지고 있어. …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481~쪽

아름다운 조국이 내 민족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기에 나는 울고 있어. 폭력과 무질서, 슬픔과 절망이 넘쳐흐를 날들이 오게 될 것을 알기에 나는 울고 있어.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놓쳐버렸으므로,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아이들이 고통스럽게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울고 있어. 여기 신주쿠서 길을 잃고 나는 울고 있는 거야.-49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르미따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르미따.
0605
서평단 모집 도서였다. 서평단에 처음 신청했던 터라 달리 기대란 걸 하지 않았는데, 운 좋게도 덜컥 뽑혀서 당시에 혼란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서평단 모집 글에서 스토리와 작가의 의도를 확인하고, 아, 읽고 싶다는 막연한 이끌림에, 그냥 신청 한 번 해보자 생각했던 것이다. [몇 번 눈을 깜빡거려 확인 거듭 확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라고 독서일기에 밝힌 바가 있다. 어쨌거나, 5월 12일 무사히 책을 받았고, 기한을 지키기 위해 꽤 발버둥을 쳤다. 오늘에서야 마지막 커버를 덮을 수 있었다. 여건 상, 띄엄띄엄 읽을 수밖에 없었고(책 두께가 사전 수준이다), 여러모로 생각을 펼치다보니, 느릿느릿 진행되었던 것이다. 바짝 다가온 마감일(?)에 엄청난 긴장 상태다. 별다른 탈 없이 리뷰를 올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사전 수준이라 그랬는데, 대개 양장본으로 나오고 글자가 큼직할 경우 그런 방향으로 많이들 가는데, 이 책은 양장본도 아니었고 글자 크기도 꽤 작았다.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내 시력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작가가 담고자 했던 의도와 정비례한다면, 엄청난 무게를 가지는 책이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스타트의 대사가 확 끌어당겼다. 이런 시작 달가워하지 않음에도, 단번에 강렬한 흡입력으로 소설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눈에 드러나 보이는 구성적인 면에서 몇 가지 언급한다면, 첫째, 여러 등장인물들의 특징과 성격을 잘 잡은 치밀한 묘사를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초반에 선명하고 빈틈없는 상황전개는 환호성을 지르며 파고들었던 것 같다. 지루하고도 개인적으로 난잡하다 평가한 소개가 조금 거슬렸긴 하지만.
4분의 1지점부터 본격적으로 주인공 에르미따가 등장했고, 서서히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라고 생각했다.
필리핀의 역사와 더불어 동아시아,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덧씌워 영상을 그릴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딱딱한 역사를 풀어 쓴 게 아니라, 주인공의 삶과 연관을 지어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개인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현 상황을 때로는 비참하게, 때로는 주인공의 적절한 대처로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에르미따의 삶에 오버랩하여 투영되는 필리핀의 그림자는 또한 우리 지나간 역사를 되짚게 되기에 견디기 어려운 침묵을 낳는다.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어쩜 전지전능한 신과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 과장이 섞였긴 했지만, 적절한 한 마디로 꼬집자면 그렇다. 신속한 상황 파악, 과감한 선택, 적절한 수습 그리고 대처. 뜻하지 않은 위기에 기지를 발휘해 기회로 뒤집는 그런 타입이라고 판단했다. 간혹 너무 주인공의 능력을 찬란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만큼 다른 등장인물이 부각되지 못해 아쉽기도 했다. (이를테면, 맥이나 릴리) 마냥 씁쓸해지며, 거의 중*종반에 등장한 릴리라는 소녀에게서 작은 혁명가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다소나마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간당간당한 선에 머물러 있지만. 안심&안일한 스스로에게 채찍질) 환경의 영향이 무척 크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기만을 바라거나 축 쳐져 있어서는 안 되고, 무엇이든 집중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때때로 과감해질 필요도 있다고. 늦었다는 생각에 앞서, 도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는 것도.
무엇보다도 반복적 일상에 벗어난 에르미의 마지막 결단에서 ‘능동적 대응’의 짜릿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고정되어 머무르는 것보다, 의지를 가지고 변화를 원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거. 느긋하게 돌아보기도 하고, 부끄러움, 후회를 쓱싹 지우기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해야 이상향에 도달한다는 것. 
마무리는 이렇다하게 확정된 사항이 없다. 주인공의 아름다웠던 시절(쾌락에 빠지고, 복수를 꿈꾸기 전)만을 뇌리에 각인하고 떠올리는 수녀의 모습에서, 현재 주인공의 내면 - 복수만을 꿈꾸며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빠트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 - 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 지나온 과거보다 더욱 소중한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갈 주인공에게 기대를 모은다. 조국 필리핀을 사랑하는 작가의 바람이 절실히 담긴 부분이다.
역자는 필리핀의 역사를 자세히 몰랐기에 번역을 시작하기 전, 필리핀 역사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나 또한 마지막 커버를 덮으면서, 도서관에 들러 필리핀 역사에 관한 책을 몇 권 비교 분석해 그 중 나은 것을 골라, 새로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효과란 이런 게 아닐까. 이럴 때 나는 소설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건졌다고 한다. 담아두고픈 표현을 찾았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계기를 심어주었다는 데 한편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듭 펼칠수록 새로운 양상을 가져다주는 소설이 될 수 있기를. 내가 그렇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결말은 완성이 되지 않았다. 그 양상은 나 자신과도 닮았다. 흠이 있고, 흠을 매끄럽게 해야 하고, 내면에 의식의 균열이 생겼고,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해체하여, 뒤죽박죽된 스스로를 다시 정립할 수 있도록 오늘도 한 걸음 내딛는다. 조각조각, 광적인 번득임을 가지고.

+ 띄어쓰기 틀린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253쪽
가문 이 -> 가문이
270쪽
가문 으로부터 -> 가문으로부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