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Movie : 와니와 준하

영화는 어떻게 보면 김희선이라는 여배우 때문에 실패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이 영화를 더 많이 보았을 것이고, 이 영화가 썩 잘 만들어진 멜로물임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그녀는 김희선답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줬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나오는 그렇고 그런 트랜디한 드라마같은 선입견을 주었다. 그녀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 같다.

라와 자귀모에서의 김희선. 또 그 밖에 그녀가 출연한 수 많은 드라마에서의 연기를 보자면 김희선은 연기력이라고 할 만한 그 무엇도 갖추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예쁠 뿐이다. 예쁜 얼굴 하나로 책 읽듯 대사를 하며 오랜시간 잘도 버틴 배우가 바로 그녀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 당연한 판단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 정말로 연기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관객과 시청자들이 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연기력이 아닌 그저 예쁜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머리빈 바비인형 같아 보였던 것일까?

니(김희선)와 준하(주진모)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리고 옥탑방 고양이로 동거가 화두에 오르기 이전. 그들은 영화 속에서 서로 동거를 하고 있다. 옥탑방보다 조금 더 넓고 마당도 있는 집에서 말이다. 와니는 애니메이터이고 준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다. 와니는 준하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첫사랑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형벌마저 내려진 상태이다. 그녀의 첫 사랑이 의붓 동생 (조승우)이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와니는 운전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동생과 함께 유학을 가겠다고,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다. 그 후 동생은 유학을 가고 엄마는 시골 이모네 집에 가서 살며 와니는 원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준하와 함께 동거를 하며 살고 있다. 다들 그 사실로 부터 떠났지만 와니는 그 집을 지킴으로서 매일 그 사실을 마주하고 사는 것이다.

기까지 얘기하고 나면 슬프고 구차하며 질질 짜는 멜로드라마랑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조금 어두워 졌을 뿐. 와니는 자신의 일도 열심히 하고 새로운 사랑도 한다. 다만 동생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분명 동생도 자신을 사랑했음을 알고 있다. 어느 한 사람도 와니를 비난하지 않는다. 와니의 엄마도 와니와 동생의 오랜 친구였던(와니에게는 후배였던) 여자아이도 그냥 그들의 사랑에 대해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따위의 추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써 와니와 동생의 사랑은 원색적이거나 통속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분명 통속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마치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속 인물들이 통속적이지만 눈요깃거리를 위해서 과장하지 않기 때문에 통속적으로 보이지 않는것과 마찬가지 이다. 와니와 동생은 서로 사랑했었고 지금은 그냥 다 뭍어두고 있다. 거기에는 눈물도 질투도 원망도 없다. 다만 지나간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약 준하가 이 사실 때문에 질투를 하거나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리고 와니가 죄책감에 시달리며 엄마 앞에서 고개도 못 든다거나 매일 아빠의 무덤에 찾아가 사죄라도 했더라면 이 영화는 분명 내가 좋아할 만한 성질의 영화는 아니다. 그들이 울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울 수가 있었다. 꼭 와니와 동생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서도 아니고 준하와 와니의 사랑이 아름다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고 씩씩하게(발랄하거나 깜찍하진 않다.)잘 사는 와니가 너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와니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슬픔을 이용해서 한없이 가련하고 처량한 희생양으로 둔갑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슬프지만 담담한것. 그게 와니의 매력이었고 나를 울게 한 힘이었다.

의 동거는 옥탑방의 그것처럼 알콩달콩 하거나 늘 사건이 하나씩뻥뻥 터지지는 않는다. 시장에서 장을 보며 딸기를 사려다가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마는 와니의 뒷모습을 본 준하는 딸기를 사려고 한다. 여기있는 딸기 다 주세요 하지만 준하가 가진 돈은 별로 없다. 그래도 준하는 웃으며 딸기를 사고 와니와 함께 맛있게 먹는다. 둘의 사이가 조금 서먹해져서 떨어져 있는 동안 와니는 늘 준하가 자기 배에 얼굴을 올렸기 때문에 그 무게감이 그리워서 벼개를 배 위에 올리고 잔다. 와니와 준하는 예쁘게 살지 않는다. 그냥 우리처럼 산다. 일을 하고 장을 보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이 전혀 영화같지가 않다. 물론 그 안에 지지고 볶고 싸우는, 조금 넌더리나는 현실은 거세되어 있지만 그 정도는 충분하게 봐 줄만하다. 절대로 현실같지 않게 아름답고 고귀한 하루 하루를 사는 영화속 주인공이 넘처 흐르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께 사는 것에 대한 환상도 심어주지 않고 첫사랑의 기억에 언제나 짖눌려사는 비현실도 보여주지 않는 와니와 준하는 그래서 이쁜 영화이다. 다분히 여성적인 영화이지만 남성 관객들도 충분하게 만족시킬 만하다고 생각되는 보기 드문 멜로이다.(총과 피가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보지 않는 사람은 예외) 그럼에도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또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슬프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 영화를 추천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 나오는 영화냐고 묻고 김희선이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눈빛은 너무 뻔하지만 어쩔 수 없다. 비록 김희선이 이 영화 이후에 찍은 화성으로 간 사나이에서 또다시 이쁘지만 뻣뻣한 마네킹같은 연기로 돌아가버렸지만 나는 와니와 준하에서의 그녀만 기억하고 싶다. 여배우가 그것도 정말 예쁜 여배우가 화면에서 예쁘기를 포기했을때 얼마나 더 예뻐 보이는지를 그녀가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보여주고 그 이미지로 먹고 사는것이 여배우지만 그녀가 연기를 하면서 조금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지고 싶다면 이제 더이상 예쁜 얼굴만 우려먹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그녀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그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예뻐도 대접을 받기가 힘들다. 보톡스로 땡겨 어색한 웃음이나 짓는 과거 아름다웠던 여배우에 관해 냉담한 관객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에 비해 주름은 좀 생겼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 연기력과 카리스마 하나로 영화를 압도하는 여배우는 아직까지 관객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영화는 꼭 순정만화 같다. 와니의 직업이 애니메이터 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첫 장면에서 애니메이션이 나오기도 하지만(참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이다.) 와니와 준하의 사는 모습이랄지 그들의 모양이 눈만 큰 여자가 등장하는 순정만화가 아닌 한혜연의 사실적인 순정 만화를 떠 올리게 한다.  나는 아직도 가끔 이 영화를 보면서 운다. 파이란이나 반딧불의 묘를 보고 흘리는 눈물보다는 훨씬 덜 짜고 가벼운 눈물이지만 가끔 그런 눈물도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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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19-01-19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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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고객센터 2019-01-1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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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님의 "Movie : 파이란"

파이란.. 참 좋은 영화, 잘 만든 영화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개봉하고 한참 뒤인 작년에 비디오로 봤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보게 되었을까.. 아쉬움까지 들었습니다.
영화의 전체분위기는 절제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고, 최민식의 감정과잉인듯하면서도 열정적인 적나라함, 그리고 그냥 눈물 나게 하는 장백지의 여백이 있는 연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뜯어보면 치사하고 추접다... 그 속에서.. 양심도 느끼고 감성적일 때도 있고, 눈물도 흘리는 거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파이란처럼 처절하게도 힘없이, 곱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다. 파이런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그 사실 그대로의 그 자체가...
나나 강재나 강재 똘마니, 비디오가게 문닫아놓고 그짓이나 하는 양아치, 구멍가게에 고리대금 이자나 뜯는 양아치들, 무좀 난 직업소개소 소장, 세탁소 할머니의 일상 시간 속에 파이란은 어떤 의미가 있어왔나...
영화속에서나 나오니... 눈물을 짓는다고 생각하니.. 영화 보면서 더 슬펐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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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favedesign/20000549327
 


최소공간 규정' 무시..`같은 크기.형식 고정관념 깨라'

 

(서울=연합뉴스) 이광철기자

 

정부가 새로 도입한 자동차 전국번호판이 네티즌 들로부터 대표적인 `탁상 행정'이라며 뭇매를 맞고 있다.

8일 자동차 번호판 주무 부서인 건설교통부 육상교통국 홈페이지 참여마당에는 새 번호판이 도입된 지난 2일부터 매일 수십여건씩 전국번호판의 디자인과 정부의 행정업무 처리에 불만을 터뜨리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박재현'이라는 이름의 네티즌은 "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처지에서 볼 때도 대학 신입생들조차 모두 아는 최소공간 규정도 무시한 채 여백없이 숫자로 꽉 채운 이 유를 알 수 없다"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주양씨는 다양한 색으로 디자인된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의 자동차 번호판을 올려 놓고 `건교부가 새 번호판과 비교해보라'며 쓴소리를 했다.

강소연씨는 "빨리 전국번호판 회수하고 10년이 걸려도 좋으니 좀 효과적이고 비판 안들으면서 `이번에 바뀐 번호판이 너무 멋있고 편리하다'는 칭찬글이 홈페이지 에 도배되도록 해보라"고 충고했다.

구체적으로 디자인에 대한 충고의 글을 올린 네티즌들도 있었다.

한상백씨는 `번호판이야, 철판이야'라는 글에서 "멋을 내기 위해 그렇게 디자인 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식별과 기능을 생각했다면 미국이나 유럽처럼 같은 큰 글씨 로 `30가-1234'로 한줄로 써주는 게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씨는 "녹색만 고집하지 말고 진군청 바탕에 노란색 글씨를 넣어주면 식별도 쉬워 뺑소니도 줄일 수 있을 텐데 왜 항상 같은 형식, 같은 크기 안에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해 탁상공론이란 말을 듣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건설교통부는 지난 1일부터 신규 등록차량이나 시.도간 변경등록을 하는 차량에 대해 시.도 표시가 없는 전국번호판을 교부하고 있다.

이에 앞서 건교부는 번호판독력을 높인 반사번호판을 도입키로 하고 일부 지방 자치단체에서 시범 실시했으나 무인단속 카메라에 번호판이 제대로 찍히지 않는 단점을 뒤늦게 파악해 부랴부랴 회수에 나선 뒤 사업을 전면 유보한 바 있다.

 

 

오늘의 교훈

 

안타까운 우리나라의 디자인현실

 

더 놀라운것은 2004년 부터 등록한 차들은

저 초록색 칠판을 달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

 

 

 

오스트리아

 

 

 

 

 

 

 

유럽의 번호판들  photo by james

 

 

건설교통부 육상교통부분 여론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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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kero 2004-01-0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네이버에서 이미지 가져오면 깨지네요^^;; 상대링크로 되어있나?^^

찌리릿 2004-01-08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를 클릭하면 새 창에서 확대해서 보여주는 자바스크립을 써서.. 그렇군요.
우리 페이퍼도 그렇게 되겠네요.
음.. 퍼올려면 일일이.. 스크립트 부분을 빼줘야하다니.. 이런~ ㅠ.ㅠ
 
 전출처 : 진/우맘 > 찌리릿님은 어떤 사람일까!

CP : 7. CP, 비판적 어버이로서의 자아입니다. 선무당이 말발이 딸리는 관계로 방금 자료를 몇 개 더 찾아보니 <부성적 어버이>라는 표현도 있네요. 과거의 엄부자모적인 역할분담에서 찾은 표현인 듯 합니다. 여하튼 찌리릿님은 7점, 상당히 관용적인 편이시네요. 나중에 아빠가 되신다면 엄한 아빠, 꾸짖는 아빠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아요. 그러나 여기에서 더 관용적이 되면 지나치게 <물렁한>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특이한데요. 의외로 CP 점수가 높은 사람이 많더라구요. 특히 우리나라 남자들은, 은연중에 엄부의 역할을 강요받아서인지 이렇게 낮은 점수가 흔치 않던데.^^

NP : 14. 양육적 어버이로서의 자아입니다. <모성적 어버이>지요. 와...찌리릿님은 아빠 역할보다는 엄마 역할이 더 어울리시나봐요.^0^  이 점수가 높은 분들은 다정하고 다른 사람을 수용하며 이해해 줍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돌보는 일을 좋아해서 주로 착하다는 평을 많이 듣지요. 특히 찌리릿님은 CP점수도 낮아서 착하다 소리 꽤나 들으실 것 같은데요. 웹상에서 봐도 상당히 그런 편이지요...끄덕끄덕. 앗, 그런데요 CP보다 NP가 두드러지게 높으면 과잉보호형 부모가 될 수도 있다네요. 주의하세요. 주변을 보면, 엄마보다 아빠들이 한 번 과잉보호 하기 시작하면 무서울 정도 거든요.^^;

A : 9. 성인으로서의 자아입니다. 얼마나 논리적, 합리적, 사고적인가를 나타내지요. 이 점수가 높으면 일중독이 되기 쉽습니다. 어? 평균치보다 조금 낮으시네요. 불쌍한 찌리릿님...성향은 안 그런데 알라딘이 님을 일중독자로 만드는군요.^^; 최소한 8점은 되어야 <어버이가 될 자격이 있다>는 냉정한 견해도 있습니다. 턱걸이 하셨네요.

FC : 11. 자유로운 어린이로서의 자아입니다. 이 점수가 높은 분들은 감정표현이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직관적인 성향이지요. FC가 A보다 많이 높으면 천방지축 말썽장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찌리릿님 정도의 점수는 해당사항이 없겠구요, 사회생활하기에 무난한 점수라고 보입니다. 적당히 쾌활하고 솔직한 정도?

AC : 10. 적응된 어린이로서의 자아입니다. 얼마나 칭찬과 보상에 길들여 졌는지를 보여주지요. 극단적인 예로 북한의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 이 점수가 높게 나올겁니다. 이 점수가 높으면 자기비하적인 성향이 있고 우유부단한 성품일 수 있지요. 가장 이상적인 점수는 8점 정도라고 하지만, 10점도 유의미하게 문제를 보이는 점수는 아닙니다. 너무 독단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순응적이지도 않은 <독립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점수들을 보니 평소 찌리릿님의 느낌과 상당히 맞아떨어지는데요. 하긴, 본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가는지 알기 힘들지요. 굳이 표현하자면...<보통보다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느낌입니다. 아줌마들하고 말이 잘 통하는 걸 보고 알아봤어야 했는데...ㅋㅋㅋ 농담이구요,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큰 문제가 없는 자아로 보이는데요. 굳이 문제점을 찾자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과잉보호형 부모가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CP_NP_A의 배열을 볼 때 업무처리 상황에서는 조금 더 객관적이고 단호해야할 때도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여자친구의 유무 여부를 안 밝히신 것 같은데...있다면 되게 잘 해 주실 것 같아요. 부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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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휙휙 2004-01-08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아님

찌리릿 2004-01-13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다 맞는데.. 뭐가 아니란 말이야~~~?
기스님.. 조목조목.. '절대 아님'의 이유를 밝혀주세요~ ^^ ㅋㅋㅋ(아.. 또 성질 나온다... ^^)
 
 전출처 : sunnyside > 찜질방에 대한 단상

전 집에 내려갔다가 엄마랑 찜질방에 갔다. 또 어디 좋은 곳을 알아 놓으셨는지, 딸을 데려가지 못해 안달을 하셨다.

 

어쨌든 효도하는 셈치고 가본 그곳은 가히 무릉도원이랄만 했다. 총 8개의 찜질방과 1개의 아이스룸이 있었으며, 영화상영실, PC방, 꼬마들 오락실, 안마의자, 개인 수면실, 노천 수면실, 만화책 빌려주는 곳, 헬스 클럽이 완비되어 있었고, 심지어 홀에는 가수가 와서 노래 부르는 무대까지 있었다.

 

게다가 딸린 목욕탕에는 9개의 각각 다른 테마의 탕과 3개의 사우나, 비치 의자, 발 마사지 욕조 등이 완비되어 있었다. 목욕탕 가운데에 있는 야자나무들과 진짜 금칠을 해놓은 황금탕에 이르러서는 야 정말 여기가 파라다이스구나 싶었다. 로마 황제의 욕실인들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있었을까?

 

장장 네 시간 동안 찜질방과 욕탕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내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쩌다 찜질방이라는 현상이 생겼을까? 왜 수 백 명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똑 같은 옷을 입고 이리 저리로 뒹굴고 있지?

 

누군가 지금쯤이면 찜질방이라는 현상을 문화적으로 분석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검색해 봤다. 하지만 뾰족하게 찜질방을 문화적으로 분석해 놓은 글은 없었다. 찜질방이 가출 청소년들의 서식지에다가 원조교제의 장이 되어 버렸다는 요지의 사회적인 분석은 있었지만.

 

말 한 발자국만 물러서서 찜질방의 풍경을 바라보면 희한하기 이를 데 없다. 가만히 누워서 땀을 빼다가 홀에 나와서 맥반석 계란을 까먹으며 TV를 본다. 수면실에서 한숨을 자다가 나와서 다시 땀을 빼고, 출출하다 싶으면 식당에 가서 미역국 한 사발과 밥을 먹는다. 연인들은 서로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 구석에 잠들어 있고, 아이들은 엎드려 다리를 흔들거리며 만화책을 읽는다.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이라도 하는 시간이면 수십 명의 사람들이  홀 가운데 큰 TV 앞에서 같이 웃고 같이 탄식하며 시청을 한다. 거기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아장아장 걷는 아기까지 생전 처음 보는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흡사 과거 부족시대의 축제나 마을 회의에서나 볼 수 있는 인적 구성이다.

 

우리는 부족 시대로 회귀하려는가? 서로의 맨 다리와 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며, 더불어 즐기는 법을 알게 된 것일까?

 

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도 철저하게 무시하는 법을 배우게 된 듯 하다. 이제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쉼의 공간과 그 밖의 공간이 명확히 나뉘어져 있었다. 일하거나 놀거나 타인과 교제하는 공간은 바깥이었고 은 온전히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은 나만의 공간, 즉 Privacy 가 전제되는 곳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찜질방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공공 목욕탕은 쉬는 곳이 아니었다. 그냥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때를 미는 공간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privacy 를 포기하고 황제처럼 쉬기를 택했다. 단 5천원만 있으면 8개 방과 9개 탕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데 구질한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진 못했다. 다만 우리 삶이 privacy를 주창하는 게 더 이상 무의미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개인적 통신 수단이었던 이메일과 핸드폰이 온갖 스팸과 원치 않는 일방 커뮤니케이션으로 얼룩진지 오래이고, 지하철 화장실 몰래 카메라에서 포착되었다는 민망한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돈다. 인사동 거리 곳곳에는 이미 CCTV가 설치되어 행인들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녹화 중이라고 한다.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위해서도 privacy 는 버려야 할 악덕 중 하나. 언제 급한 업무가 나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에 개인적인 시간에도 스탠바이 해야 하는 샐러리맨도 있고(실제 친구 중 한 명은 퇴근 이후에 핸드폰을 꺼 놓았다는 이유로 상사의 질책을 들어야 했다), 새벽 시간에 들이닥치는 남편 회사 동료들에게도 웃는 낯을 보여줘야 멋진 와이프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이미 privacy 의 침범이 일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무뎌진다. 내가 남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도, 남이 나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도. 그렇게 점점 관용되는 무례, 관용되는 사생활 침범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 같다. 너무나 바빠서, 작은 것을 신경 쓸 틈 없이 돌아가는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고, 우리들 역시 저항 없이 너무나 쉽게 적응해 살고 있다.  

 

찜질방에 대한 단상이 길어졌다. 누군가 더 많이 배우고, 더 생각 깊은 분이 이 찜질방 문화를 속시원히 분석해 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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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4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ntreal florist 2009-11-13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국에도 한국 사람을 위한 찜질방 만들어 놓으면 현지사람들도 참 좋아한다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