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왼쪽 책일 것이다. 세르와 라투어의 대담. 메를로-퐁티는 가소로운 철학자다. 그가 유명하던(유행하던) 때 그의 책을 처음 펼치고, 터지던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하찮음이, 철학인가? : 세르가 대략 이런 얘길 하던 책. laughable, ridiculous, 둘 다 아니면 둘 중 하나 단어를 쓰면서. 


확인을 못하는 것이, 이 책도 대학원 시절 도서관 책으로 읽었고 (노트는 꽤 많이 남겼다. 메를로-퐁티 얘기는 적혀 있지 않지만. 최초 인상이 강력한 무엇이면, 내가 이걸 잊을 리 있겠어? 라며 적지 않는 일. 그랬던 것일 듯. 그럴수록 오히려 인용 + 내 반응과 생각, 형식으로 적어두어야 함에도) 채워야할 공백으로 남아 있는 책. 어쨌든 세르라는 저명 철학자가 그런 얘길 하는 걸 보고, 그리고 앞뒤 문맥으로 보아 내가 이해하는 그 뜻에서 하는 말이 맞음에 분명하다며, 갖고 있던 메를로-퐁티 책들을 아마존 중고로 팔아버렸다. 그 중엔 적어도 몇 페이지 고심하며 읽은 것도 있는데 (<지각의 현상학>?), 그 정도로는 전혀 공백이 될 수 없어서 메를로-퐁티 책들을 다시 봐야(사야) 할 일은 아직까진 없었음. 


저 대담집은 곳곳이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여러 인용들을 이 블로그에도 할 수 있을 텐데, 재미있는 지점들 중 하나가 바슐라르를 향한 적의. 세르도 아마 바슐라르의 (적어도 한때) 지도학생이었을 것이다. 알튀세르도 그랬던가 아닌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알튀세르도 바슐라르 험담을 하던가 아닌가. 그런데 세르의 오른쪽 책 <오감>. 이건 그가 바슐라르에게서 배우지 않았다면, 적어도 바슐라르에게서 자극 혹은 격려받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책이라고 바슐라르 애독자면 생각할 것이라는 점. 많은 공명이 (거의 간접 인용에 가까운) 있고, 주제와 방법에서 바슐라르 프로젝트의 확장 심화같은 것이라고 해도 한편 타당할 책이라는 점. 


*갑자기 자판 입력이 잘 되지지 아않ㄴ는ㄴㄷㄴ다. 아침ㅁ먹ㄱ고 다시 쓰겠ㅅ다. 


**아침 먹고 다시 와서: 얼마 전 읽은 어떤 책은, "가소로운" 이런 말을 쓰진 않았지만 그만큼 강하고 분명히 레비나스를 디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책이지? 뭐였지? 프랑스 저자인 장 그롱댕의 <형이상학 입문> 이 책도 레비나스를 강하게 비판하긴 한다. 그런데 <형이상학 입문>은 꽤 오래 전 읽은 책. 레비나스에 대해서 이런 얘길 하고 있구나. 기억해 두었던 책. 이 책이 아니라 최근, 며칠 전이 아니라면 적어도 한 달 전까지는 가지 않는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레비나스가 했던 것같은 철학은 지혜는 커녕이고 사람들을 혼란으로 이끈다.. 


같은 내용이 있었던 듯한데, 무슨 책인지 기억이 안난다고 쓰려다, 기억 남!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마신다> 이 책이었음. ㅋㅋㅋㅋㅋㅋ 하. 이게 사는 건지, 삶은 죽음의 특별한 형태인 건지. 여하튼. 무엇이든 그것의 원천(원전)으로 가본 다음에야 결정할 수 있겠긴 한데, 소문만으로도 거의 정확한 짐작이 가능한 경우들도 있지 않나? 레비나스는 실제로 읽은 건 없는 가운데 사람들이 하는 얘길 들으며 (특히, "얼굴") 그런 생각이라면 그건 자기위안용, 자기기만용.. 이겠네 결정. 그 결정이 과히 틀리지 않다는 얘길 나중 계속 듣는 것이다. 지금 속도로 읽으면 80세까지 1200여권의 책들을 더 읽을 수 있다고 알라딘 17주년 기념 통계가 말해 주던데, 이미 사둔 책들(중에서도 안 읽은 것들)로도 채우고 남을 이 1200여권에서 레비나스 책은 없도록 함. 


이 저자를 읽고 나면 생기는 것. 알게 되는 것.  

이 저자를 읽는 동안 답해야 할 질문들. 그 질문들에 나왔던 답의 예들 (저자 자신의 답의 재구성 포함). : 주로 이런 내용으로 주요 저자들의 기여, 업적이 정리된다면 좋을 것 같다. 명백히 그런 방향의 작업은 아니더라도, 보통의 학술 논문들이 저런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준대도 좋겠고. 어쨌든 메를로-퐁티는 "가소로운" 철학자라던 세르의 말은, 심지어 계시같은 것이기까지. 봐 가소로운 철학자도 있다니까! 내 말이 아니니까 믿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도르노가 "의미의 우리" 이 말을 쓴 건 <문학노트> 2권에 포함된 에세이 "참여"에서. (*같은 글이 다른 번역으로 오른쪽 책 <미학과 정치>에 실렸던 것 같은데 확인해보고 싶지만 집에 있는 책이 어제부터 지금까지 찾아지지 않고, 알라딘이나 아마존이나 책 목차를 볼 수가 없다. 루카치를 반박하는 글 "강요된 화해"는 분명 둘 다에 실렸다. "강요된 화해" "참여" 아도르노의 글은 이렇게 두 개가 저 책에 실렸다. 아니다 하나만 실렸다, 이게 확인이 안되니 확인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님에도 계속 더 하고 싶어지고..... 오후에 집에 오면 샅샅이 또 찾아보기로). 


사르트르에게 문학이 참여일 수 있는 건 문학이 개념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의미를 다룬다." 


이렇게 말하고 반박을 시작한다. 반박하는 아도르노에 따르면: 작가는 의미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쓰는 어떤 어휘도, 그것이 작품에 쓰임으로써 작품 바깥에서 소통의 언어일 때 가졌던 의미 전부를 박탈당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 변화도 겪지 않는 게 아니다. 어휘가 작품 안에서 갖게 될 변화한 의미, 그리고 그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는, 작품 바깥에서 가졌던 의미의 잔재. 예술적 계기와 비-예술적 계기.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이 작품의 형식 법칙을 구성한다. 


이 반박의 문장들이, 이게 번역의 문제일까. 아도르노식 복잡한 문장의 어딘가가 훼손된 것같다..... 느끼게 하는,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문장들이긴 하다. 작은 훼손을 견디지 못할 문장이면 좋은 문장이냐? : 이런 쓸데없는 질문이 떠오름. 작은 훼손도 견디지 못할수록 좋은 문장이구나 당연히. 어떤 훼손도 하지 말아야 할 문장.  


어쨌든 저 제목의 문장은: "구속을 찬미하는 이들이 사르트르의 <출구 없음>을 심오하다 여길 것이다. 이들은 언어가 의미의 우리를 흔들고, 언어가 의미로부터 갖는 거리를 통해 작정하고 의미의 실증적 행세에 거역하는 텍스트를 참을성있게 듣지 못할 것이다." 


 아도르노를 번역해 본 모두가 이랬겠지.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다: "Those who sing the praises of binding ties will be more likely to find Sartre's No Exit profound than to listen patiently to a text in which language rattles the cage of meaning and through its distance from meaning rebels from the outset against a positive assumption of meaning." 


모더니즘 언어 실험의 핵심, 그 의의를 더 잘 말하기도 쉽지 않을 한 문장이며, 

책을 얼마나 더 느리게 읽을 수 있나. 천천히 읽어야만 하나. 읽기의 어휘당 속도에서 내 책이 가장 느린 책이다. 이런 걸 놓고 모더니즘 작가들은 경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길 쓰려던 포스트. 


오직 천천히만 (아주 아주 천천히만) 읽을 수 있는 책. 아무나 쓸 수 있는 책이 아닌 책. 

이제 나가야 하니, 다음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 다시 더 잘 실패...;;;;; 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시가 되기 전에 깨서 

4시에 새벽 산책 나갔다가 들어옴. 며칠 전만 해도 4시 20분이면 밝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오늘 4시 40분이 넘어도 컴컴했다. 하지. 하지를 지나고 나면. 1년의 365일이 쇠털처럼 많아 보여도 실은 그 각각의 날들이 매우 큰 것이다, 하루가 다른 걸 보면.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면서. 그러니: 


Make each day matter. 

(어떻게?) 


걸으면서 Entitled Opinions 최근 에피 들음. 잉가 피어슨이 게스트, Frankenstein이 주제. 

잉가 피어슨은 뉴욕대에서 이탈리아문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고 스탠포드의 신입생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강사로 일했다 (이런 거... 그런 거 알면 뭐하나일 것들을 EO 애청자라서 모를 수 없다). 몇 년 전 이미 게스트였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주제는 시몬 베유. 베유를 알았던 이들이 그녀를 "붉은 처녀 red virgin" 혹은 "치마를 입은 정언명령 categorical imperative in skirt"이라 불렀다고 말해주던 에피. 정언명령이고 치마를 입어야겠다. 결심하게 만들던. 


어제 수업에서, 첫 시간엔 세계언어로서의 영어, 이게 주제였다.  

친구와 이태원에 갔을 때, 영어를 아주 잘하는 친구가 외국인 친구와 영어로 대화하는 걸 보면서, 

그 전까지 영어공부에 관심이 없다가 그 때 영어는 자유를 준다는 생각을 했다는 얘길 한 학생에게서 들음. "꼭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서도 자유를 주지 않나" 완전히 정확하진 않겠지만 거의 저와 같은 표현을 쓰면서. 또, 미드 Game of Thrones 보면서 영어는 "멋있게" 말할 수 있는 언어란 걸 실감하기도 했다고. (*"정신의 영역에서 자유" 이런 말은, 그런 말이 수업에서 나왔다면 그 자체로 기록해 둘 가치가 있다. 미래의 어떤 날 뜻밖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서). 


한국어로, Entitled Opinions 호스트와 게스트처럼 대화하는 경우를 본 적이, 혹은 들은 적이 있나? 

지배를 하지도 지배를 받지도 않겠다는 태도. (태도가 맞는 말인가? 그보단, 결단? 욕망? 심성? 인성? 감수성?) 하여간, 지배하겠다는 욕구도 지배당하겠다는 욕구도 없이 살아감. 이것이, 서른 다섯 넘은 인간에게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곳인 이 곳. ㅋㅋㅋ;;;;; 있다면 희귀, 외산 식물같은 것이라서일 이 곳. 그렇게 살아가려면, 살고 싶다면 고립을 택해야 하는 이 곳에서, Entitled Opinions 호스트와 게스트처럼 대화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기적에 속할 일. 


여하튼 이 프로그램이 내겐 자유의 체험. 혹은 자유의 체험의 체험. 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데, 

아니 이게 무슨 정말 2016년에 이래도 되냐는 반발이 일기도 한다. 자유의 체험. 혹은 자유의 체험의 체험. 이 정도는 한국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세월이 이 정도 지났으면? 지금이 무슨 70년대임? 


"내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어제 수업 둘째시간엔 케인스의 이 글에서 출발한 토론을 했다. 여기서도 좋은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그건 건너뛰고, 

우리 손자 세대의 정신적 가능성...... ㅋㅋㅋ;;;; (겸연쩍은 웃음, 불필요한 웃음을 남용하는 것 같긴 한데, 이 대목은 쓰자마자 실제로 현웃;;;) 하여간 우리 손자세대라면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할 일로, Entitled Opinions 같은 토크쇼 진행. 이런 걸 생각하게 하는 이 곳의 현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섹스와 언어가 얼마나 밀착하는지는 외국어로 포르노그래피를 읽어보면 안다. 드 사드를 원어로 읽을 때 사전은 필요하지 않다. 가장 난해한 외설적 표현들, 학교도 부모도 문학적 경험도 가르친 바 없는 표현들이, 본능적으로 -- 어린 시절, 성과 관련한 가장 우회적인 표현과 고백들이, 정확한 표상으로 결정(結晶)할 수 있었듯이 -- 이해된다. 마치 갇혔던 열정들이, 이 표현들에 의해 이름을 얻으면서, 자기들을 가두었던 억압과 함께 눈 먼 언어의 벽을 뚫고 나와서는, 막을 수 없는 힘으로 의미의 가장 내밀한 세포 -- 그 열정들을 닮아 있는 -- 까지 진입하는 것같다.  

 

- Minima Moralia, 27, "On parle français"



6월의 마지막 날. 16년 상반기 결산을 해도 좋겠다. 

몇 년을 그냥 두었던 (under review 상태에서) 페이퍼를 끝내고 보냄. 그거 몇 년 그냥 두느라 착수하지 못했던 다음 페이퍼들에 마침내 착수할 수 있었음. : 이게 최고 ㅎㅎㅎ 업적;;;;;. 장하다. 속도는 느리고 결과는 볼품없더라도 이게 내가 가야할 길이네... 어쩔 수 없네, 저위의 누가 날 이렇게 가라는걸 어떻... (ㅋㅋㅋ) 이런 걸 몰라볼 수 없기도 했다. 


잘 못한 일은 뭐가 있을까. 

술을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끊은 지경이지만 그래도 가끔, 습관적으로 술 마시고 다음 날 피곤했던 일. 이 정도? 


어쨌든 아도르노의 위의 단장은, 

매체로서 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이 (그만하면) 또렷이 담긴 단장이 아닌가 한다. 언어가 논증의 수단이 아니라 미메시스의 매체일 때? 그러면 인간의 열정이, 정신이, 거기 담기며 그것이 가졌던 의미의 경계를 바꾼다.................... 언어로(단어로) 옮겨진 주체. 그런 거. 




*섹스, 포르노그래피, 외설, 

이 모두가 한 번은 언급되는 다섯 줄 문단으로 심오한 무엇을 말해보라. 


라면 아도르노는 당연한데, 성공하고. ;; 

(이제 그만 자러 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비정규직으로 멸시받으며 근근히 겨우 존재하고) 있는 학교엔 상대평가 과목에서 40% rule이 있다. 

B+ 이상 성적은 40%까지만 됨. 이런 게 있어도 되나? 미국 학교엔 있었나? 처음엔 좀 반발했지만 벌써 몇 년을, 이거 때문에 B+ 이상 받을 학생에게 주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 학기 성적 마감하면서, 처음 겪는 일 발생. 35명 클래스에서 한 15명이 일제히 다 잘함. 퀴즈 만점, 중간시험 기말시험 80점 이상 등으로. 흐으. (어이 없어서 웃는다, 한편 좋기도 하나. 나 때문에 열심히 한 거 아니냐 뭐 이런. 그건 물론 아님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 다음 5명 혹은 10명도 그리 못하지 않음. 5-10명 정도만 C-이하일 성적. 처음 있는 일이고 아마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자주 있진 않을 것 같다. 연달아 이런 일이 있다면 40% 규정을 바꿔야겠지.


그라면 받아야 마땅한 성적이라고 내가 예상했고 그도 예상했을 

성적을 주지 못한 학생이 둘, 그 중 한 학생에게서 성적 문의(임에 분명한) 이메일이 와서, 

열어서 읽지 못하겠고 그러니 (한숨) 맥주를 마시며 이걸 쓰고 있는 중이다. 성적 마감을 하자마자 여름학기가 시작했고 그 때문에 매일 학교를 가는데, 내일은 벌써 여름학기 중간시험. 수업 없이 시험 감독하다 오면 되니까 맥주를 마실 수 있다며 마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답하기가 쉽지 않을 이메일 때문에도 마시는 맥주다. 


수업에서 내가 질문을 하고 학생이 답을 하면 가만히 듣고 있는 일. 

이거 참 좋은데 (죽음이 주제였던 글을 읽고 나서.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기억은? 같은 질문에,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어머니가 데려다 주시고 데리러 오시다가 처음으로 어머니가 안 오셔서 혼자 학교에 갔던가 아니면 학교에서 집으로 왔던가 여하튼 혼자 가며 보았던 풍경. 이런 답이 나오면, 들으면서 나도 혼자라 더 잘 보았던 풍경들을 기억한다든가.., 여하튼 듣고 있으면 "becoming" 이게 일어난다) 답을 할 때마다 감탄했던 학생이었다. 그 침착함에. 


침착함 말고도 여러, 놀라며 그(라고 쓰지만 여학생이다)를 보게 했던 면모들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쓸 수는 없겠다. ;;;; 


수업의 경험으론 (다른 데서도 비슷하냐 하면, 그게 또 아니니) 

여자들이 남자보다 100배쯤 뛰어난 거 같다. 


*라며 끝나는 괴이한 포스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거서 2016-06-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 rule이 궁금하여 열중하면서 따라 읽어내려갔는데 끝맺음에 괴이하다고 하시어 저한테 쓴미소를 짓게 하시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