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샌 아침(은 물론 새벽)에도 에어컨을 켜야 하던데, 

새벽 산책 다녀와서 환기, 청소하고 에어컨 켜려고 하니까 리모컨이 건전지 소모로 작동이 안됨. 이 리모컨은 물에 한 번 빠진 적이 있어서 (잘 말려서 다시 쓸 수 있게 되긴 했으나. 어떻게 그걸 물에 빠뜨릴 수 있었는지는 참) 건전지보다는 리모컨 자신이 끝난 거라고 처음 생각했다. 그럼 적어도 오늘은 에어컨을 못 쓰는 건가. 리모컨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가. 


그리고 생각함. 건전지는 AAA 전지. 그럼 키보드 전지를 대신 넣어보면 알거 아니냐 전지 문제인지. 

(ㅋㅋㅋㅋ 흐으. ;;;;;;; 순간 내가 대견했다. 확인 같은 것도 할 줄 아네? 나같은 전과학적 정신이? ;;;;;) 건전지 문제가 맞았으며, 나는 나가서 전지를 구입하고 에어컨을 켰는데, 


이상하게도, 

어제까지도 소리 크고 (드륵드르륵 정도는 아니어도, 이이잉기이잉이나 휘이-시이; 이 정도는 항상) 

26도로 종일 틀어도 그렇게 아주 시원하진 않던 에어컨이, 아무 소음도 없이 그러나 27도 설정에서 완벽한 냉기를 내보내고 있다. 그런 지 벌써 한 시간이 넘는다. 


에어컨이 작동이 잘 안되면 리모콘 전지부터 바꿔봐야 한다. 

고 배우려는 (아주 짧게, 진짜로 그러고 있었음) 나를 막으며 쓴 포스트. 

그런데 진짜, 에어컨의 변화는 분명한데 명백하고 현존하는데 이 변화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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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x Feet Under의 의외의 명대사로 올리비에가 클레어의 첫 전시회에서 하는 말이 있다.

바깥의 인정을 받는 기쁨에 취해 (화장실에서 코케인인가 마약도 하지만) 기고만장한 클레어에게, 올리비에:

"최초의 성공. 다음엔 바로 타락이 오지. (너라고 예외이겠니?)"

 

(*마침 딱 맞는 이미지가 구해진다. 바로 그 말을 하는 때의 올리비에.

그리고 전시회의 클레어. Six Feet Under는 아무리 안 보더라도 몇 달에 한 번씩은 봤던 거 같은데,

그렇다고 치면 지금, 굉장히 오래 (적어도 1년 넘게) 안보고 있던 중, 이 이미지 보니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그랬듯이, 미친 듯이 술을 마시며.......; 그럴 수는 없지만.)

 

성공은 타락의 어머니.

아마 저것을 법칙으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일찍 성공하는 경우엔 거의 예외가 없고, 심지어 늦게 성공하는 경우에도, 성공 이후 곧장 타락하는 일이,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정말, 훨씬) 많은 거 같다.

 

지금 생각하는 하나의 예는 알랭 드 보통. 그의 책을,

외부적인 이유로 강제로 읽어야 하는 게 아니면 찾아 구해서 읽을 일은 없을 거라고 몇 년 전부터 생각하기야 했지만,

요즘 어쩌다 보게 되면 (미국에서도 아주 성공적인지라, 여러 곳에서 출연했다), "세상을 다 얻는다 한들,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지?" 헨리경이 도리언 그레이에게 하는 이 질문이, 정말 이것이 가짜 질문일 수가 없는 사례가 저기 있다고 생각하게 될만큼,

 

영혼을 잃은 어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대머리) 남자,

그런 남자가 앞에 있는 것이다. 그의 데뷔작 Essays in Love 에는, 만일 이 소설이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가 이후 계속 고생만 해야 했다면, 그럼에도 꾸준히 뭘 쓰긴 썼다면, 지금의 그보다 더 좋은 작가가 되었을 거 같다고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재능과 평범하지 않은 정신이 있는 거 같긴 하다. 그것이 반, 나머지 반은 이미, 영리하지만 타협적이고 순응적인 정신.... 이런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바로 그 '반'의 문제에서 말이다. 그것을 개척할 기회가, 그가 실패를 했다면 주어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실패/고생도 타락의 어머니일 때가 참 많은 걸 생각하면,

성공하고 타락하는 것이 낫겠다.




*내 삶에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우연. <식스핏언더>가 그런 것이고. ;;;;;;

대학원 시절 이 명대사 저 명대사, 감격하고 열광하며 기록 많이 남겼다. 그 중 지금 기억나서 찾아온 게 위의 포스트. 

그런데 정말, 예외라면 누가 있을까? 성공했으며 타락하지 않은 인물. 성공 전에도 타락한 사람이라서 이 질문이 해당하지 않는 경우들 빼고. ;;;;; 아니면, 알랭 드 보통과 비슷한 사례라면 누가 있을까. "great" ("great American novel" 같은 구절에서) 이 말을 써도 될 무엇을 해낼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그러지 않았고 mediocrity, philistinism, (또 어떤 단어들이 있을까, 하여간) 영합의 길을 간 사람. 


니체가 간 길은, 

그냥 그 길만으로도 그가 위대해진단 생각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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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유툽에서 식스핏언더 클립들 찾아보다가 발견. 

일반인(?) 시청자가 만든 것 같은데 숨막히게 고퀄이다. 

전시즌 디비디로 갖고 있고 그걸로 여러 번 보았지만 유툽에서도 자주 검색하고 찾아보았으면서 

어째서 이제야 발견했냐고 실망하는 심정이 되기까지. 만든 사람이 이 업계 사람이 아니고 동영상 편집같은 건 재미로나 하는 사람이라곤 상상하기 힘들 지경. 댓글들을 보면 나만 깜놀한 게 아니다. "내가 미친놈일 수도 있는데 나 이거 150번 봤다. 내가 유툽에서 본 최고다 같은 말은 무의미하다 여겨지지만, 진짜 이게 최고다. 전시즌을 다시 볼 시간이 없는 난 이걸 보며 견뎠다" 이런 댓글도 있다. 4시즌이던가 Death Cab for Cutie 노래 Transatlanticism이 배경 음악이고 미대에 간 클레어가 미대 친구들과 자기 방에서 "art"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노래 쓰고 있다. 하여튼, 어쩜 이렇게 잘 만들었지? 어떻게 하는 거야 이런 건?  







수위 조절을 아예 안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TV 드라마가 (사실 영화도. 문학이나 철학도, 과장한다면) 간 적 없는 많은 곳들에 아무렇지 않게 갔던 드라마시죠 식스핏언더는. ;; 이 트리븃에 인물들이 오열하는 장면들도 편집되어 있는데 그 장면들 다수가 그렇게, 미답의 영역으로 첫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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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재에 써야겠다 했던 게 있는데 

Six Feet Under 2시즌의 에피였던 The Invisible Woman. 

에밀리 프레빈(1954-2001)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독신이고 직장과 집, 집에서는 혼자 (혼자 조용히). 이게 삶의 전부. 어느 날 퇴근하고 저녁 먹다가 감자 조각이 목에 걸리며 질식사한다.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파리가 끓고 시신은 부풀고) 다음에야 발견되어서, 그런 상태 시신으로 open casket 장례는 할 수 없다며 "왜 사람들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죽는 거야??" 리코가 그런 취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있다. 


처음 볼 때 에밀리 프레빈은 언니도 아니고 이모 정도. 지금은 그냥 바로 내 얘기다. 

식스핏언더 1시즌은, 그러니까 이게 시작할 때 네이트와 브렌다가 삼십대 초반인데 그 때 이들이 내게 언니, 오빠였었던 것을 생각하면 과연 소년은 쉽게 늙고 학문은.... (소녀는?) ;;;; 어쨌든 지금은 그냥 바로 내 얘기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이모 뻘이던 처음 볼 때부터 매혹되고 잊기 힘든 여러 장면, 대사들이 있던 에피. 


죽으려면 에어컨 잘 돌아가는 데서 죽으라고! 

이러는 리코 말곤 Fisher & Sons Funeral Home의 성원 전부가 에밀리 프레빈의 죽음을 한편 자기 일처럼 느낀다. 루스는 강력히 그녀와 동일시하고 (애를 셋이나 낳아 키웠어도, 이 여자보다 내가 덜 외로운가?) 네이트는 그녀가 살았을 (거라 그가 상상하는) 조용한 절망에 공감하고 데이빗은 그녀의 온전히 혼자이던 삶이 우리의 미래, 너와 내가 반길 미래.. 라 보며 반색함. 그런 방향의 공감. 


에밀리 프레빈 장례식 날 저녁 네이트, 데이빗 형제와 루스가 부엌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그들 모두가 한편 그녀에게서 자기를 보지만 

인생이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완전한 혼자로 살아도 좋은 삶일 수 있나? 이런 의문, 반발도 있기 때문에 싸우듯이 말들이 오감. 특히 루스가 자기 아들들에게, 이런 장례를 치른 오늘 우리는 우리 삶을 바꿀 필요를 느껴야 한다. 가족이면 서로 알고 지내자 입장이어서 아들들에게 부담을 안김. ;; 세 사람이 그러고 있을 때 클레어가 귀가하고 "지옥은 타인이다"를 변주한 그녀의 명대사를 한다. "중요한 건 당연히, 그녀가 그렇게 살고 싶었느냐 아냐? 그녀 자신 진정 그렇게 살고 싶었다면? 만일 그녀가 원한 게, 타인이라는 고통에서 면제된 삶이었다면?" 


영어로는 What if that's the life she wanted? Life without the hassle called other people? 대략 이런 말이었을 것인데, 지금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나 이 말이 내겐 어찌나 사무쳤던 말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는지. TV를 껴안고 울라 하면 알았다며 껴안고 울었을지 모른다. 특히 저 마지막 네 단어 (이 네 단어는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할 것이다). hassle called other people. 


막내딸 클레어가 별 생각 없이 했을 이 말을, 그들 가족의 삶, 특히 모친인 자신에 대한 코멘트라 여기면서 격분하는 루스가 "그런 인생도 인생이냐? What kind of life is that?" 소리소리 지르게 한, 그 선택도 참 탁월했던 그 장면. 




타인은 언제 축복이고 언제 지옥인가? : 이것도 수업에서 쓸 때가 있는 질문이고, 

이 질문에 학생들이 답할 때 가끔 정말 놀라운 답들이 나오기도 한다. 음 쓰다보니 이 포스트도, 애초 쓰려고 했던 건 쓰지 못하고 변죽 울리다 끝나고 말 것 같은데, 여하튼 클레어의 저 명대사는 사실 중요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담고 있는 대사라 보겠다. 


그게 놀라워지는 건, 

Fisher & Sons Funeral Home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무관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브렌다에게, 

그런 브렌다의 삶에서도 피셔가 가족들이 묻고 답하려하는 그 질문이 성립하게끔 얘기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위의 이미지는 브렌다가 멜리사와 점심 먹는 장면. 멜리사는 sex worker(그녀의 표현)이고 브렌다가 마사지스트로 일하던 동안 만나 잠시 친구가 되는 인물이다. 브렌다가 멜리사에게 얘기하는 삶의 곤경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네이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사실은 그녀가 모른다는 것..... 이런 것이 있다. 


타인은 언제 축복이고 언제 저주인가. 

이 질문은, 우리는 서로 알고 살아가긴 하는 건가. 이 질문과 사촌 아닐까? 

사촌이 아니면, 친형제...? ;;;;; 







*음 나중 이어서 쓰거나 재방문할 수 있으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식스핏언더 이 에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부에서 조금 틀린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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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더 then and now 검색해 보다가 

크리스테바가 했다는 이 말 발견. Love is the time and space where "I" give myself the right to be extraordinary. 

생각해 보니 그런 것(그런 것도) 같고, 어쨌든 기억해 두고 싶은 말이다. 이 사진에서 크리스테바 얼굴은, Manhattan에서 우디 앨런이 "인생을 살 가치가 있게 하는 것?" 이 질문에 자답하면서 내놓는 긴 리스트. 스웨덴 영화들, 말론 브란도, 모차르트의 교향곡, 세잔이 그린 그 놀라운 배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쌤우네 가게에서 파는 게요리, 등등. 등등등 나열하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Tracy's face. 그 Tracy's face같은 얼굴. 


이 말을 남자 사상가가 했다면, 

굉장히 유치하게 들릴 것같다. 아니 자뻑도 아닌 것이. 에고의 과잉이자 결핍?

그런데 여자가 하는 말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정말 남과 여는 다르게 인간이 되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인가 보다...;;;; 





장 바니에, 내겐 금시초문인 분의 사랑 정의도 같이 발견. 

"Love doesn't mean doing extraordinary or heroic things. It means knowing how to do ordinary things with tenderness. 사랑은, 비범하거나 영웅적인 무얼 하는 게 아냐. 평범한 일들을 다정하게 하는 법을 아는 게 사랑이지." tender, tenderness. 이것도 거의 번역불가인 말 아닌가. 부드럽고 다정하고 약하고. 


이 말은 크리스테바의 위의 말과 반대를 말하는 것 같다가,

조금 생각하니 거의 같은 말로 들린다. 





번역하기 힘든 아도르노의 말. 

출전은 <미니마 모랄리아>다. 

"힘(공격)을 도발하지 않으면서 약해질 수 있는 곳. 

사랑은 그 곳에만 있다." 이거 뜻밖에도, (그리고 여기처럼 '헬'에선 더더욱) 진리이지 않나? 

약한 모습; 보이는 순간, 그게 누구든 상대의 먹이가 되는 일. 이 말을 이런 정도, 이런 방향으로 이해함은 온당치 못한 것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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