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번 단장. 제목은 "완벽한 적수를 원하는 것". 기독교적 이상의 실현에서 가장 탁월한 나라였던 프랑스에서 

그것의 정반대, 비기독교적 자유정신도 생산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장의 끝으로 가면서: 


프랑스의 위대한 인물들은 다른 어떤 곳의 사람들보다도 이러한 개화(開花)를 잘 이해하고 있다. 결코 피상적인 존재가 아니면서도 위대한 프랑스인은 항상 자신의 표면, 즉 자신의 내용과 깊이에 부합되는 자연스러운 피부를 갖고 있다. 이에 반해 위대한 독일인의 깊이는 대부분 복잡한 상자 안에 밀봉되어 있다. 흡사 딱딱하고 기이한 껍질을 통해 빛과 경박한 손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영약(靈藥)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인의 완전한 전형을 구현한 이 민족이 왜 비기독교적인 자유정신이라는 완전한 반대 전형 역시 산출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라! 프랑스의 자유정신은 항상 위대한 인물들과 싸웠던 것이지 다른 나라들의 자유정신처럼 단지 도그마들과 숭고한 괴물들하고만 싸웠던 것이 아니다




밑줄 친 문장에서 "숭고한 괴물"은 케임브리지판에서는 sublime abortions, 

독어판에서는 erhabenen Missgeburten. 영어 단어 abortion엔 '낙태'의 뜻만 있지 않고 실패, 좌절, 중단, 이런 뜻 있다. 독어단어 Missgeburt는 어원 혹은 조어의 면에서 영어론 abortion보다 miscarriage (miscarry)에 더 가까운 단어일 것같단 짐작. 독한사전 찾아보면 "기형" "불구"의 뜻. 독한사전의 정의만 보면, 이 단어에도 "실패"의 의미가 있는 듯한데 그게 abortion의 "실패"와는 좀 다를 듯. 앞쪽은 결과의 실패, 뒤쪽은 결과에 가지 못함으로서의 실패. 


박찬국 번역의 책세상판 읽으면서 이 대목에서, 

여기 역주가 있었기를 짧은 순간 소망. "괴물"이라는 역어선택에 대해서 말이다. 원문의 독어단어엔 이런 뜻들이 있고, 

"괴물"로 번역되지 않은 다른 작은 의미들도 실은 모두 작용하고 있으니 유의 바람.. 이 구절로 니체가 염두에 둔 건, 무엇보다 --- 이었을 것이다. 같은 역주. 독일어와 니체를 잘 안다면 내가 "독자주"로라도 달고 싶었으나, 좌절. 


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니체 책들 <비극의 탄생>, <안티크리스트> 둘 다 경탄, 감사하며 읽었고 

내겐 "믿고 보는" 역자. 아카넷에서 나온 저 두 책들에선 역주가 상세하고 많은 편이다. <아침놀>은 그렇지 않은 편. 


프랑스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얘기 읽을 때 

거의 늘 바슐라르부터 생각하는데, 오늘 이 단장에서 프랑스적 자유정신에 대한 니체의 말은 

바슐라르에게 그대로 할 수 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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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genröte. 니체에게 "도덕에 맞서는 전투"의 시작이었던 책. 

책세상판은 <아침놀>, 케임브리지판은 Daybreak. 스탠포드판은 Dawn. 


이 책도 책 전체 제사가 한국어판에 누락되어 있는 걸 보고 쓴다. 

영어판, 그리고 독어판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There are so many days that have not yet broken.' Rig Veda 

„Es giebt so viele Morgenröthen, die noch nicht geleuchtet haben.“ Rigveda 


독어 문장은 직역하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새벽들이 있다"일 것같다. 

어쨌든 문장 속 Morgenröthen은 책의 제목 Morgenröte (니체 생전의 표기로는 Morgenröthe)의 출전이 되기도 하는 셈. 그렇게 보인다, 니체가 여기서 이 책 제목을 가져왔음. 케임브리지판의 영어 문장에선 day, 그리고 broken이 있으므로 Daybreak라는 제목의 "출전"까지는 아니지만 명확한 인유처럼은 보이는데, <리그베다>의 가장 널리 쓰이는 영어번역이 저렇게 번역하고 있을 따름일 수도 있겠으니, 그런지 아닌지 스탠포드판에선 같은 문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볼만도. 


여하튼 이 제사가 빠져 있다.  

이 경우엔 이게 설령 책 본문 어딘가에서 그대로 등장하며 게다가 니체 자신이 그에 대한 논평을 한다 해도, 

그래도 이건 빠져선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 책들에 비해 한국어 책들에 제사가 있는 경우가 희귀한 건 

그 자체로, 우리의 지적 유산의 매우 작음....... 혹은 작기도 하고 작기도 한데 간수(건사)도 안함. 이것의 증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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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을 보면 책 전체의 제사로 <즐거운 학문> 366번 단장 첫 문단을 쓰고 있다. 


박식한 책이 앞에 있을 때. — 우리는 책들 사이에서만, 책들에 의해 자극될 때만 생각을 얻는 이들에 속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며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사람 없는 산이나 바다 근처, 길들도 생각에 잠기는 그 곳을 우리는 좋아한다. 



한국어판에 이 제사가 빠져 있는데 

불어판에도 없는 것을 영어판이 포함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든 아니든 이게 크게 잘못은 아닌 것같다. 이 제사가 니체 장에서 그대로 전부 인용된다. 이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책이고 책세상판 <즐거운 학문>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선 이렇게 되어 있다: 


어느 박식한 책을 앞에 두고. —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밑줄 친 부분이 카우프만의 영역에선, (lonely mountains or near the sea) where even the trails become thoughtful. 이렇게 되어 있고, 독어판에선 da wo selbst die Wege nachdenklich werden. 영어판의 "그 (작은) 길들도 생각에 잠기는" 이건 읽는 순간 매혹될만한 구절이고, 독어는 모르지만 독어 원문에서도, 이 대목 구문(이라 짐작되는 것)에 근거해 보면 독어 원문도 같은 말을 하는 걸로 여겨진다. 이 구절이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으로 번역된 건 오역도 오역이지만 (짧은 구절이라 사소해 보이더라도, 그렇지 않고) '나쁜' 종류의 오역이라 보겠다. 저자와 "내밀한" 관계가 생기는 건, 이런 구절들에서 아닌가? 


사상. 사색. 사고. 사유. 이런 말들과 ideas, think(thinking), thought, 등과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는 (없을 수도 있는 불일치) 생각이 여기선 사치이기 때문인가? 그렇겠지. 


책상 주변에 책들이 너무, 도저히 감당이 안되게 쌓여 있어서 치우는 중. 

책을 둘 곳이 없어서, 식탁 밑에도 두기로 했다. 일단 바닥을 좀 닦고 나서. 

니체 책들 중에서 중요하게 쓸 것들 남기고 치워야 하는데, 치우면서 어떤 책들은 여기 이런 기록들을 남기고 치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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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스스로 라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니체는 메타포의 

절대를 실현하는 한편, 이류 시인이라면 덕지덕지 사용하였을 사소한 메타포들을 파기하며, 메타포의 절대적 현실을 살기 위해 메타포의 부조리함까지도 유발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즉, '너 전신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기 위해, 전신으로 뛰어내리라'라고 니체는 말하는 바, 그것은 또 하나의 행위로써 위버멘쉬의 해방과 정복을 실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위와 아래라는 이러한 단어 사이의 모순 너머에서, 상상력은 완전한 일관성을 견지하는 상징들의 분석 속에 작용하고 있다. 즉, '너 바다에 뛰어들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거기 망각 속에서 죽음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모든 육신적이며 대지적 존재, 이 모든 인식의 잿더미, 이 모든 결과의 집적, 인간 존재에 다름 아닌 이 모든 탐욕스런 수확을 죽이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럴 때, 너에게 위버멘쉬의 표지를 부여할 결정적 역전이 실현되며, 너는 공기적이 되어 자유로운 하늘을 향해 수직적으로 위로 떠오를 것이다. 


전에는 내게 무거워 보이던 모든 것이 

망각의 푸르른 심연에 삼켜지다. 





260쪽이다. 원문에선 '니이체'인데 '니체'로 수정. 

"그것이 인간 존재인 탐욕스런 수확" 영어판에서 that whole avaricious harvest that makes up a human being, 

불어판에서 cette récolte avaricieuse qu’est l’être humain. 이 구절에서 특히 "탐욕스런 수확" 이 두 단어는, 오직 이 두 단어를 읽기 위해 4년을 보내야한다해도 그렇다면 그 4년을 보내도 좋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이 소중한 두 단어였다. 처음 읽던 때. 이것도 벌써 한 10년쯤 전인가. 바슐라르의 개성과 뛰어남과 오직 그만이 가진 것같은 종류의 지성과, 이런 것들이 압축되는 구절들이 (그렇다고 그것들이 따로 노는 경우가 없으며, 전체 속에서 바슐라르적 조화를 이루면서) 그의 책들을 열면 곳곳에 숨어 있다 독자를 놀라게 함. 


베버에 따르면 이렇다지만: 

"오늘날 진실로 결정적이며 유용한 업적은 항상 전문적 업적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다른 (비슷하며 다른) 종류의 "영혼의 운명"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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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 (Paperback, 4th)
Walter Arnold Kaufmann / Princeton Univ Pr / 1975년 2월
평점 :
품절


올해 니하머스의 서문과 함께 재간된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 수요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먼저 적어두자. 50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영어권에서 니체를 보던 관점을 혼자서 바꾼 책이라는 게 이 책의 의의에 대한 합의고, 그것만으로도 (그 사이 내용으론 그를 능가하는 책이 혹시 나왔다 해도) 읽을 이유가 있을 책. 니하머스가 신판의 서문에서 정리 및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논의의 면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참고할 지점들이 있고 또 카우프만은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겠지만) 문장이 개성과 매력이 있는 저자라서, 그것도 이 책이 절판 상태에 있지 않게 해야할 이유에 속할 것이다. 


오늘 "힘에의 의지의 발견" 장을 읽다가 

카우프만의 한계라면 이거겠구나 했던 걸 적어두기 위한 리뷰. 

저 장엔, 카우프만 자신이 여기 니체 해석의 난점이 있다고 먼저 말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장의 끝으로 향해 가면서: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인간이 가진 힘에의 의지에 의해 추동된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구상한 힘에의 의지 개념은, 그가 가졌던 힘에의 의지의 산물임을 그가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니체는 크레타의 에피메니데스가 빠졌던 곤경에 빠진다. 그의 말이 맞다면, 그 말은 허구다. / 이런 문제들은 니체가 잘 다루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는 쓸만한 인식론을 만들지 않았다. (...) 이 지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자기-반박을 하고 있으며 부조리하다 보이고, 그러니 더 이상의 고려는 없는 게 좋을 것같다." 


이게 니체 해석의 난점이다.. 다음 그의 코멘트가 거의 전부 이런 식이다. 

니체 자신 그걸 못했다. 그 점을 그 자신 모호하게 두었다. 그 점에 대해 그는 "결코 명시적이지 않다." 

특히 이 "그 자신 명시적이지 않다"가 여러 번 반복된다. 


바슐라르의 "개념의 지성주의 vs 이미지/상상력의 행동주의" 구분에 따른다면, 

개념의 지성주의의 한계. 니체의 사상을 오직, 혹은 거의 전적으로, 개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걸로 볼 때 발생할 한계. 이게 오늘 조금 신기했던 건, 카우프만은 영어권 니체 연구자들 중에선 아마 드물게도, 시인 니체가 철학자 니체기도 하다... 입장일 거라서다. (그게 주제인 글도 있었던 것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명시적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 찾을 수 없다). 


상상력의 행동주의, 이 관점에서 니체를 읽는 바슐라르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바슐라르를 알았다면 (<공기와 꿈>이 카우프만의 책보다 7년 먼저 나왔다) 그가 가졌을 출구. 문제의 만족스런 해결. 이런 것이 거의 보일 정도다. 정복과 지배, 힘에의 의지를 향한 도취한 긍정, "무리"를 향한 경멸. 이런 것들에 대해 카우프만은, 여기 민망한 "우월감"과 지배욕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것들이 바로 승화되며 정신화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같은 논평을 한다. 카우프만은 뛰어난 학자였기 때문에, 저것들에 대한 바슐라르의 진정 독창적인 (니체 해석의 여러 곤경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할) 이해를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말했을까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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