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판을 보면 책 전체의 제사로 <즐거운 학문> 366번 단장 첫 문단을 쓰고 있다.
박식한 책이 앞에 있을 때. — 우리는 책들 사이에서만, 책들에 의해 자극될 때만 생각을 얻는 이들에 속하지 않는다. 바깥에서,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며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사람 없는 산이나 바다 근처, 길들도 생각에 잠기는 그 곳을 우리는 좋아한다.
한국어판에 이 제사가 빠져 있는데
불어판에도 없는 것을 영어판이 포함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든 아니든 이게 크게 잘못은 아닌 것같다. 이 제사가 니체 장에서 그대로 전부 인용된다. 이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책이고 책세상판 <즐거운 학문>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선 이렇게 되어 있다:
어느 박식한 책을 앞에 두고. —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밑줄 친 부분이 카우프만의 영역에선, (lonely mountains or near the sea) where even the trails become thoughtful. 이렇게 되어 있고, 독어판에선 da wo selbst die Wege nachdenklich werden. 영어판의 "그 (작은) 길들도 생각에 잠기는" 이건 읽는 순간 매혹될만한 구절이고, 독어는 모르지만 독어 원문에서도, 이 대목 구문(이라 짐작되는 것)에 근거해 보면 독어 원문도 같은 말을 하는 걸로 여겨진다. 이 구절이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으로 번역된 건 오역도 오역이지만 (짧은 구절이라 사소해 보이더라도, 그렇지 않고) '나쁜' 종류의 오역이라 보겠다. 저자와 "내밀한" 관계가 생기는 건, 이런 구절들에서 아닌가?
사상. 사색. 사고. 사유. 이런 말들과 ideas, think(thinking), thought, 등과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는 (없을 수도 있는 불일치) 생각이 여기선 사치이기 때문인가? 그렇겠지.
책상 주변에 책들이 너무, 도저히 감당이 안되게 쌓여 있어서 치우는 중.
책을 둘 곳이 없어서, 식탁 밑에도 두기로 했다. 일단 바닥을 좀 닦고 나서.
니체 책들 중에서 중요하게 쓸 것들 남기고 치워야 하는데, 치우면서 어떤 책들은 여기 이런 기록들을 남기고 치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