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즈윅이 대비하는 망상적 읽기와 치유적 읽기의 차이는 곧 학문과 예술의 차이이기도 하고, 그러니 아도르노가 제안한 바의, 학문과 예술의 노동 분업 철폐, 이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만하다. 예를 들면, 5개의 챕터 대신 150개의 아포리즘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대신할 수 있다. (*세즈윅의 글은, 저 책에서 "Paranoid Reading and Reparative Reading").
이 문제에 대해,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장점이라면, 지도교수를 늦지 않게 정하고 지도교수가 지도를 적합하게 한다는 가정 하에, 논문 일정이 밀리지 않고, 거의 계획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사 코스웍을 마친 다음 3년, 그리고 1주일에 1편. (이것을 학기 중에는 1주 1회의 미팅에서 1-2편씩을 모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방학 중 작성되는 단장들을 읽는 계획은, 지도교수와 학생이 결정하고. 미팅이 힘들다면, 어쨌든 그것을 지도교수에게 보내고, 지도교수는 이메일로 피드백을 줄 수 있다. 이렇게 모아지는 단장들을 1-3개월마다 취합하여 검토하고, 그것들을 묶을 공통의 주제를 찾아볼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이 지도교수에게도, 일의 부담을 늘리는 것이 아니고 줄일 방법이다. 꾸준히 조금씩 일이 진척되고, 학생의 지적인 발달을 꾸준히 조금씩 보고, 지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장점은,
삶과 공부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니마 모랄리아>가 보여주는 모범 중 하나가 이것이기도 하고. 어떤 공부도, (어쨌든 아도르노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할 수 있다면), 낭비되지 않는다. 그를 통해 삶이 강해지고, "self-fashioning"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단점이라면,
전통 논문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논문같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 외에는?
그리고 단장으로 씌어지긴 하지만 그것들을 묶을 공통의 주제가 있게 하는 것이 좋을텐데,
이것이 사후의 문제이므로, 보장될 수는 없다는 점. 그러나 공통의 주제로 4 가지 주제를 생각할 수 없다 해도,
<미니마 모랄리아>가 보여주는 모범을 따라, 그 단장들 전체가 하나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초록" 대신 "헌사"가 중요한 문서가 되게 하면 된다.
박사 코스웍을 마쳤고 논문을 써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물론 지적 관심이라는 것이 여전히 형성 중이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어느 정도 지도교수의 역할이기도 할테고), 3-4개로 분류할 수 있는 "주" 관심사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라면, 모더니즘, 울프, 조이스, 니체. 이 정도를 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일 처음 쓰는 1번 단장이,
"I'm not giving up"
이런 제목으로 <텔마와 루이스> 마지막 장면들 중 긴장에 찬 한 순간에 집중하면서,
강한 개인. 영화가 제시해온 영웅상. 그것과 이 영화의 강한 개인의 차이. 니체에게, 개인. (*이런 내용의 두 페이지 글을 쓰기 위해 읽어야할 책과 아티클이 10건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여서는 안된다. 나에게, 이미 존재했던 무엇이어야할 것이다. 코스웍하던 동안 썼던 글들, 읽었던 책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의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쓰면서 생겨날 니체에 대한 다른 질문, 다른 관심에서,
2번 단장, 그리고 한참을 넘어 앞날의 단장들이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쓰면서 떠오른 것은, 역시 이 접근의 단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챕터의 장점을 갖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한 주제에 대한 sustained effort. 하긴 그 단점을 보완할 방법이 바로 옆에 있기도 하다. 같은 주제의 단장 (그것이, 챕터라면 섹션이 된다고 여기고) 여러 개를 쓰면 되므로.)
카우프만의 <니체> 78쪽.
"니체의 스타일은, 심오한 통찰이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파편적인 단장, 혹은 아름다운 문장 하나 이상의 형태로 제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 대한 잔인하도록 정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이것 뿐만이 아니고 "니체의 방법" 챕터 전체를, 단장적 글쓰기를 (니체 자신의 옹호를 따라) 옹호하는 걸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80쪽에도 참고할 내용이 있다. *단장쓰기를 허하라는 페이퍼를 쓴다면, 바로 저것을 에피그래프로 하고 그에 대한 해설로 시작할 수도 있다. 철학 노동자와 함께, 철학자도 아카데미가 수용할 필요에 대하여.
니체 뿐 아니고, 단장적 글쓰기를 옹호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예도 많고, 아마 '증언'도 많을 것이다.
개인적/자전적 글쓰기의 옹호와도 만나는 점이 있다.
*The Gay Science (우리말 제목이 <즐거운 학문>(책세상판)이기보단 "즐거운 과학"이었어야 하지 않나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러나 한국어판 제목이 저러함에도 내가 좋다고 내 생각대로 제목 쓰기가, 그건 그러지 않고 싶어서 영어 제목으로 표시함. ;;; 하여간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읽고 있다가 대학원 졸업하던 해 자주 했던 생각, 대학원생에게 니체처럼 쓸 수 있게 하라. 그 생각하면서 적어두었던 건 뭐였나 찾아보았다. 지금 Gay Science 읽으면서, 더 확신하게 된다. 단장쓰기가 허락되는 게, 그걸 권하고 그걸 가르치는게, 어쨌든 그러지 않는 것보단 (니체처럼 쓴다고? 택도 없는 소리....) 좋은 방향임에 대해서.
**<논문에서 책으로> 이 책. 13년에 2판이 나왔고
내가 읽은 건 그 전 (졸업하던 해 학교를 떠나기 직전에 읽었다), 08년쯤에 나왔을 1판이었다. 저자 윌리엄 저마노는 영문학 교수. 이 책은 이 주제에서 가장 많이 참고되는 책들에 속한다. 지금 이 주제로 찾아보면서, 이 책에서 강력한 옹호를 찾음.
"<제임슨에 대한 몇 개의 각주>, <브레튼 우즈에 대한 두 개의 단상> 이런 제목들로 논문이 쓰여질 수 있다면 건강하고 정직할 것이다. 저자들이 취직은 못하겠지만." 이런 얘길 19쪽에서 하고 있다고.
***<미니마 모랄리아>의 형식을 따라 한다면,
졸업하기 전 3년의 연도들로 단장들을 나누고 그것이 세 개의 챕터... 쯤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2008, 2009, 2010. 나라면, 내가 살았던 해들의 숫자가 있고 그 해 동안 내가 쓴 단장들이 있는 문서, 그것이 내 논문인 게 더 좋을 거 같다. 아... <미니마 모랄리아> 같은 책들이 정말 아무나 쓰는 책이 아니긴 하지. ;;; 사실 단장쓰기가 academic writing 형식이 될 수 없는 건, 그게 진입장벽을 낮추기는커녕 (나는 이것도 꼭 필요하다 보는 편이어서), 실은 몇 배는 높이는 일일 거라서일수도. 라고 지금 생각함. ;;; 그렇긴 한데, 만일 이게 시행된다면, 걸작은 극히 드물더라도 괴작은... 많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