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하며 고고하게 만듬 (Lofty and ennobling). 

니체 언어의 특징으로, 혹은 어쨌든 그의 의도의 특징으로 이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언어와 의도 둘 다가 후기 낭만주의의 "사후강직"이랄까, 초월을 향한 재점화된 믿음 그것의 시적인 표현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니체의 독자들 다수가 니체를 전통 사유의 경계 안에 곧 포함시켜왔음은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독자들이 그를 수준이 좀더 높은 사회진화론자로, 무제한이며 파괴적인 의지의 교사로, 최고의 니힐리스트로, 유대-기독교 사유에 필요했던 구조적 보완물로, 문화가 억압해온 섹슈얼리티의 해방자로, 혹은 새로운 교설의 (초인, 영겁회귀, 힘에의 의지) 교사로 여길 때, 이들은 니체의 사유를 전통 형이상학의 연속일 뿐 아니라 전통 형이상학 안에 온전히 갇힌 것으로 본다. 요약하면, 여기 새로운 말이나 새로운 교설은 사실 없다고, 니체는 그가 맹렬히 공격했던 전통 안에 그 자신 갇혀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전통은 지금 존재-신학 사유라 알려진 것이며, 니체는 이걸 신이라 불렀다. 


그들의 주장을 판단하는 일이 우리에게 갖는 의의는 그러니 작지 않다. 

니체라는 수수께끼같은 사상가의 본성만이 아니라, 전통 사유 자체의 생존가능성의 문제가 여기 있다. 전통 사유의 한계, 쇠락, 혹은 미래에 관한 전망의 문제가 여기 있다. 이 책의 기저에 놓인 문제가 이것이다 -- 그것이, 상이한 여러 관점들에서 접근되긴 하지만. 그래서, 이 책에 담긴 텍스트들은 모두, 우리의 판단이 필요한 이 더 큰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니체 사상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해석의 작업은 더 이상 주변적인 것일 수 없다. 한편에서, 니체는 해석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의 비평자들이 해석의 역학을 수행하고 있다. 해석의 가치는 -- 적어도 그 가치의 일부는 -- 이 책에 실린 텍스트들의 시도를 통해 판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쓰기 자체에 대하여, 우리가 그에 대한 어떤 접근(접근권)을 주장할 수 있나? 니체의 쓰기를 해석할 수단은 무엇인가? 니체의 텍스트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해석"되어야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책은 MIT 출판부, 85년간. 

하이데거, 들뢰즈, 클로소우스키, 블랑쇼, 데리다 등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저자들이다. 위의 두 문단은 "인트로덕션"의 처음 두 문단. 


지속적으로 제대로 공부한 적 없으니 어디서 어떻게 그러한가 분명히 알진 못하겠으나, 

후기구조주의... 그것이 인문학자들의 문장에 남긴 악영향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여기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번역을 잘했다는 소리가 전혀 아닌데, 당연히. 지금 옮겨 놓고 다시 읽으니) 한국어로 오히려 더 말이 된다 느껴진다. 영어로 보면 횡설수설에 근접. 


그렇긴 한데, 

니체를 해석함은 전통 사유의 한계, 쇠락, 혹은 미래를 조망하는 일. 

이 말이 이상하게도 바슐라르의 니체 읽기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 부분에서 "전통"을 뺀다면. 바슐라르의 읽기에서, 니체는 사유의 한계, 쇠락, 혹은 미래를 보게 하는 사상가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음. what should be called thinking? (하이데거의 what is called thinking? 처음 알았을 때 웃겼던; 제목. 그 제목을 향한 논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하이데거를 모르므로. 어쨌든 그 제목을 조금 비틀어) 바슐라르는 이 질문에도 답하려 한다, 니체를 통해. 


오늘 아침에도 동네 철봉에서 매달리기를 조금 했다. 턱걸이는.. 내년이라면 1은 하려나? 

집안 문에 설치하는 철봉, 그거 달고 싶어진다. 서재에 글 하나 쓰고 20초 매달리고. 팔굽혀펴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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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에서 구입하고 배송 대행한 것이라 

6권 밖에 안되지만 라면 박스만한 박스로 왔다. 파손 방지 뽁뽁이가 공간 대부분을 차지. 

읽지도 않을 책들을 알라딘으로 모자라 미국에서도 ;; 사나르느라 바쁘.... 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올해 초 60만원 정도를 두 달 연달아 쓰고 나서. 그땐 정말 거의 매일 아마존에서 책들 검색하고 카트 담아뒀다가 들어가 보고 빼고 다시 넣고 보고 빼고 추가하고 마침내 결제해서 카트가 비면 다시 카트 채우기 시작해서, 반복. 이러면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든 필요하고 동시에 좋은 책을 사야겠다며. 돈이 많으면 한 번 눈이 간 책이면 다 사겠지만. Leo Damrosch가 쓴 윌리엄 블레이크 전기, 퍼시 비셰 셸리 전기 (정신과 의사가 쓴), 조지 엘리엇 전기도 샀고. 철학책들 다수. 블룸스베리 그룹 관련 책들 다수. 이 중 읽은 책이, 있긴 있다. 아마 한 권. The Bloomsbury Cookbook. 블룸스베리 사람들이 먹었던, 혹은 묘사한 음식들의 레시피 재연하면서 한편 그들의 역사도 복원하는 책. 아무튼 내 형편 내 기준에 책값으로 너무 많이 연달아 쓰고 카드 결제 해본 다음, 안쓰고 있다. 한참 안쓰다 이 달에 다시... frenzy) 박스를 풀고 책들 꺼내고 포장재 정리해서 박스와 포장재는 버리고, 6권 책이 오는 데 쓰인 엄청난 양의 포장재에 잠시 가책을 느끼고, 하면서 나름 감정 복잡해졌다. 언제 다 읽지. 어디다 두지..? ;;;; 


마지막의 Life of Pi는 내가 주문한 책이 아니다. 

배송대행 업체에서, "배송신청하지 않은 상품이 도착했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해주세요"라길래 보고 확인했더니 

(나는, 내가 술 취하고 아마존 들어가서 책들 보다가 어떤 미친 순간에 알지도 못하는 책을 주문했을 가능성을.... 꽤 높게 잡아야했다) 내가 주문한 책이 아닌게 확실했다. 발신자는 thrift books라는 중고 서점. 내가 그 서점에서 중고로 산 책이 꽤 되긴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상상할 수 없지만 하여간 그런 일이 일어남. thrift books에서, "괜찮습니다. 가지시거나 아니면 책이 필요한 곳이 근처에 있다면 기증하세요"래서 내가 갖게 된 책. 


대학원 시절엔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였나 

아마존 중고로 주문했더니 상품 정보의 판본과 다른 (아주 다른. 상품 정보에선 프린스턴 출판부에 98년간, 일반 판형이었다면 내가 받은 건 Knopf의 57년간 초소형판. 만지면 먼지될 것같이 낡은. 그렇게 다른) 책이 와서, 이게 뭡니까? 이메일 했던 적 있다. 그랬더니 바로 "환불했습니다. 책은 버리세요" 답장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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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7-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응들이 쿨하네요. ^^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오늘 유럽에서는 검역 제도처럼 민족과 민족이 갈라지고 서로 차단되어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 분방하고, 너무 악의적이고, 너무 제멋대로이고, 너무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너무 여행을 많이 했다. 우리는 산 위에서 사는 것, 멀리 떨어져서 "반시대적으로" 사는 것, 과거나 미래의 세기에서 사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독일 정신을 허영심에 들뜨게 하여 황폐화시키는 저 옹졸한 정치의 목격자로서 느끼는 분노를 경감시킬 수 있다. 




출전은 <즐거운 학문> 377번 단장이다. 책세상판 번역으로 옮겨 적으면서 아주 조금 바꿈. 

밑줄 친 부분, 영어판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For that we are too open-minded, too malicious, too spoiled, also too well informed, too "traveled": we far prefer to live on mountains, apart, "untimely," in past or future centuries, merely in order to keep ourselves from experiencing the silent rage to which we know we should be condemned as eyewitnesses of politics that are desolating the German spirit by making it vain and that is, moreover, petty politics. 


저녁을 좋아하는 반찬 (시금치무침, 동태전) 만들어서 먹고 

이 단장 읽다가 이 문장에서, 예상 않던 일인데 격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니체 언어로, 발이 가벼워졌다. 몸은 춤추게 되고...;;; 공기는 차고 건조하다. (에어컨, 언제나 자동건조 설정). 이 대목 읽을 때 이미 산에 와 있는 거 같았고,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고정 독서대에 몽테뉴 전집을 펴서 고정해두고 매일 한 번 이상 16세기로 가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20세기의 어떤 연대도 허락되지만, 21세기는 2016년으로는 오지 않는다. 그러다 


분방함. open-minded. 이 둘을 놓고 잠깐 생각하다 

아 내게 독어 원서도 있지 참. ㅋㅋㅋ 독어 어휘는 어떤 건가 찾아보았다. 

그 단어는, unbefangen이었고 이 단어를 독영사전에서 찾아보니 impartial. 

독한사전에서 찾아보니 공평무사한, 솔직한, 자연스러운. 


이 단어의 의미도 감격스러웠던 것임. 아아. impartial. 이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지. 으흑으흑. 혹은, 하악하악. 

무사한. 이 말도. 자유인. 


프란츠 오버벡이 니체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니체 편의 일방적인 추종 관계였고 부르크하르트는 그를 언제나 불편해 (혹은 무서워) 했다.. 고 하던 때. 그리고 니체와 그 자신의 관계에 대해선, "그에게 진정한 친구는 없었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진정한 세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그는 언제나 "난제"였다"고 하던 때, 그럼에도 니체가 쓰러지자 바로, 만사를 제쳐두고 그를 구하는 일에 합심하는 두 사람을 기억하면서 감동했었다. 편파적이지 않을 때, 그럴 때 진정 편파적일 수 있다니깐. 아니아니, "정의가 사랑에 앞선다"일 때 사랑할 수 있다니까. 오버벡이 쓴 어떤 글엔, 니체의 마지막 편지를 받자마자 놀라고 걱정하며 바로 그를 찾아온 부르크하르트를 기억하는 내용이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오버벡과도 별 친분이 없었음에도, 그가 니체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고. 그 대목도 예상치 않게 감동;; 감동적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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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즈윅이 대비하는 망상적 읽기와 치유적 읽기의 차이는 곧 학문과 예술의 차이이기도 하고, 그러니 아도르노가 제안한 바의, 학문과 예술의 노동 분업 철폐, 이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만하다. 예를 들면, 5개의 챕터 대신 150개의 아포리즘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대신할 수 있다. (*세즈윅의 글은, 저 책에서 "Paranoid Reading and Reparative Reading"). 

 

이 문제에 대해,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장점이라면, 지도교수를 늦지 않게 정하고 지도교수가 지도를 적합하게 한다는 가정 하에, 논문 일정이 밀리지 않고, 거의 계획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사 코스웍을 마친 다음 3년, 그리고 1주일에 1편. (이것을 학기 중에는 1주 1회의 미팅에서 1-2편씩을 모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방학 중 작성되는 단장들을 읽는 계획은, 지도교수와 학생이 결정하고. 미팅이 힘들다면, 어쨌든 그것을 지도교수에게 보내고, 지도교수는 이메일로 피드백을 줄 수 있다. 이렇게 모아지는 단장들을 1-3개월마다 취합하여 검토하고, 그것들을 묶을 공통의 주제를 찾아볼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이 지도교수에게도, 일의 부담을 늘리는 것이 아니고 줄일 방법이다. 꾸준히 조금씩 일이 진척되고, 학생의 지적인 발달을 꾸준히 조금씩 보고, 지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장점은,

삶과 공부가 일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니마 모랄리아>가 보여주는 모범 중 하나가 이것이기도 하고. 어떤 공부도, (어쨌든 아도르노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할 수 있다면), 낭비되지 않는다. 그를 통해 삶이 강해지고, "self-fashioning"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단점이라면,

전통 논문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논문같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 외에는?

그리고 단장으로 씌어지긴 하지만 그것들을 묶을 공통의 주제가 있게 하는 것이 좋을텐데,

이것이 사후의 문제이므로, 보장될 수는 없다는 점. 그러나 공통의 주제로 4 가지 주제를 생각할 수 없다 해도,

<미니마 모랄리아>가 보여주는 모범을 따라, 그 단장들 전체가 하나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초록" 대신 "헌사"가 중요한 문서가 되게 하면 된다.

 

박사 코스웍을 마쳤고 논문을 써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물론 지적 관심이라는 것이 여전히 형성 중이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어느 정도 지도교수의 역할이기도 할테고), 3-4개로 분류할 수 있는 "주" 관심사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라면, 모더니즘, 울프, 조이스, 니체. 이 정도를 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일 처음 쓰는 1번 단장이,

 

"I'm not giving up"

이런 제목으로 <텔마와 루이스> 마지막 장면들 중 긴장에 찬 한 순간에 집중하면서,

강한 개인. 영화가 제시해온 영웅상. 그것과 이 영화의 강한 개인의 차이. 니체에게, 개인. (*이런 내용의 두 페이지 글을 쓰기 위해 읽어야할 책과 아티클이 10건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여서는 안된다. 나에게, 이미 존재했던 무엇이어야할 것이다. 코스웍하던 동안 썼던 글들, 읽었던 책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의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쓰면서 생겨날 니체에 대한 다른 질문, 다른 관심에서,

2번 단장, 그리고 한참을 넘어 앞날의 단장들이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쓰면서 떠오른 것은, 역시 이 접근의 단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챕터의 장점을 갖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한 주제에 대한 sustained effort. 하긴 그 단점을 보완할 방법이 바로 옆에 있기도 하다. 같은 주제의 단장 (그것이, 챕터라면 섹션이 된다고 여기고) 여러 개를 쓰면 되므로.)

    

카우프만의 <니체> 78쪽. 

"니체의 스타일은, 심오한 통찰이 있는 그 누구도 그것을 파편적인 단장, 혹은 아름다운 문장 하나 이상의 형태로 제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 대한 잔인하도록 정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이것 뿐만이 아니고 "니체의 방법" 챕터 전체를, 단장적 글쓰기를 (니체 자신의 옹호를 따라) 옹호하는 걸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80쪽에도 참고할 내용이 있다. *단장쓰기를 허하라는 페이퍼를 쓴다면, 바로 저것을 에피그래프로 하고 그에 대한 해설로 시작할 수도 있다. 철학 노동자와 함께, 철학자도 아카데미가 수용할 필요에 대하여.

 

니체 뿐 아니고, 단장적 글쓰기를 옹호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예도 많고, 아마 '증언'도 많을 것이다.

개인적/자전적 글쓰기의 옹호와도 만나는 점이 있다. 

 



*The Gay Science (우리말 제목이 <즐거운 학문>(책세상판)이기보단 "즐거운 과학"이었어야 하지 않나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러나 한국어판 제목이 저러함에도 내가 좋다고 내 생각대로 제목 쓰기가, 그건 그러지 않고 싶어서 영어 제목으로 표시함. ;;; 하여간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읽고 있다가 대학원 졸업하던 해 자주 했던 생각, 대학원생에게 니체처럼 쓸 수 있게 하라. 그 생각하면서 적어두었던 건 뭐였나 찾아보았다. 지금 Gay Science 읽으면서, 더 확신하게 된다. 단장쓰기가 허락되는 게, 그걸 권하고 그걸 가르치는게, 어쨌든 그러지 않는 것보단 (니체처럼 쓴다고? 택도 없는 소리....) 좋은 방향임에 대해서.

 


 















**<논문에서 책으로> 이 책. 13년에 2판이 나왔고 

내가 읽은 건 그 전 (졸업하던 해 학교를 떠나기 직전에 읽었다), 08년쯤에 나왔을 1판이었다. 저자 윌리엄 저마노는 영문학 교수. 이 책은 이 주제에서 가장 많이 참고되는 책들에 속한다. 지금 이 주제로 찾아보면서, 이 책에서 강력한 옹호를 찾음. 


"<제임슨에 대한 몇 개의 각주>, <브레튼 우즈에 대한 두 개의 단상> 이런 제목들로 논문이 쓰여질 수 있다면 건강하고 정직할 것이다. 저자들이 취직은 못하겠지만." 이런 얘길 19쪽에서 하고 있다고. 


***<미니마 모랄리아>의 형식을 따라 한다면, 

졸업하기 전 3년의 연도들로 단장들을 나누고 그것이 세 개의 챕터...  쯤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2008, 2009, 2010. 나라면, 내가 살았던 해들의 숫자가 있고 그 해 동안 내가 쓴 단장들이 있는 문서, 그것이 내 논문인 게 더 좋을 거 같다. 아... <미니마 모랄리아> 같은 책들이 정말 아무나 쓰는 책이 아니긴 하지. ;;; 사실 단장쓰기가 academic writing 형식이 될 수 없는 건, 그게 진입장벽을 낮추기는커녕 (나는 이것도 꼭 필요하다 보는 편이어서), 실은 몇 배는 높이는 일일 거라서일수도. 라고 지금 생각함. ;;; 그렇긴 한데, 만일 이게 시행된다면, 걸작은 극히 드물더라도 괴작은... 많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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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아침(은 물론 새벽)에도 에어컨을 켜야 하던데, 

새벽 산책 다녀와서 환기, 청소하고 에어컨 켜려고 하니까 리모컨이 건전지 소모로 작동이 안됨. 이 리모컨은 물에 한 번 빠진 적이 있어서 (잘 말려서 다시 쓸 수 있게 되긴 했으나. 어떻게 그걸 물에 빠뜨릴 수 있었는지는 참) 건전지보다는 리모컨 자신이 끝난 거라고 처음 생각했다. 그럼 적어도 오늘은 에어컨을 못 쓰는 건가. 리모컨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가. 


그리고 생각함. 건전지는 AAA 전지. 그럼 키보드 전지를 대신 넣어보면 알거 아니냐 전지 문제인지. 

(ㅋㅋㅋㅋ 흐으. ;;;;;;; 순간 내가 대견했다. 확인 같은 것도 할 줄 아네? 나같은 전과학적 정신이? ;;;;;) 건전지 문제가 맞았으며, 나는 나가서 전지를 구입하고 에어컨을 켰는데, 


이상하게도, 

어제까지도 소리 크고 (드륵드르륵 정도는 아니어도, 이이잉기이잉이나 휘이-시이; 이 정도는 항상) 

26도로 종일 틀어도 그렇게 아주 시원하진 않던 에어컨이, 아무 소음도 없이 그러나 27도 설정에서 완벽한 냉기를 내보내고 있다. 그런 지 벌써 한 시간이 넘는다. 


에어컨이 작동이 잘 안되면 리모콘 전지부터 바꿔봐야 한다. 

고 배우려는 (아주 짧게, 진짜로 그러고 있었음) 나를 막으며 쓴 포스트. 

그런데 진짜, 에어컨의 변화는 분명한데 명백하고 현존하는데 이 변화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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