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를 읽을 때) 우리는 여기서라면 늘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걸 안다.

여기엔 자기 집의 확고한 주인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움, 꾸밈없음이 있다.

게다가 그의 집은 얼마나 부유한 집인지.

 

쇼펜하우어는 심오함을 간명하게, 감동을 수사 없이, 엄밀한 과학성을 지루한 현학 없이, 표현하는 방법을 안다 (....) 스타일과 관련해, 그 자신의 말이 가장 잘 그의 특징을 요약한다: "시나 수사학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고 글을 쓰려면, 철학자는 대단히 정직해야 한다." 세상에 정직이라 불리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게 심지어 미덕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은, 이 여론(public opinions)의 시대엔 표현이 금지된 사견(private opinions that are forbidden)에 속한다. 따라서 내가 다시, 쇼펜하우어는 정직한 저자라고 강조한다면 나는 그를 칭송하는 게 아니라 그의 특징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정직한 저자는 거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든 불신하고 봐야 한다. 쇼펜하우어와 비교할 만한, 아니 실은 그보다 위에 놓을 다른 저자로 나는 단 한 사람만을 알고 있다. 그는 몽테뉴다. 이런 사람이 글을 썼다는 게, 그게 지상에서 우리 삶의 즐거움을 얼마나 증대했는지. 영혼들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막강한 이 영혼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가 플루타르크에게 느꼈던 그것을 나도 느끼게 되었다. "그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내겐 다리 하나가 아니면 날개 하나가 생긴다." 내게 그 과제가 주어진다면, 몽테뉴와 함께 이 세계를 내 집으로 만들며 나는 살 것이다.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2절, p. 135)



책세상판 <반시대적 고찰>을 샀던 걸로 알고 있다가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구매리스트를 검색. 사지 않았다. 사려다가, 번역에 비판적인 독자리뷰 보고 안 샀나 봄. 이 대목이 한국어판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나 궁금하고 찾아서 같이 올리고 싶었으나 일단 영어판 보고 내가 한 번역만. 


마이클 더다의 "at home in the world" 이 구절과 두 곳에서 공명한다. 

(1) 쇼펜하우어는 자기 집의 주인이다. 그리고, (2) 몽테뉴와 함께 이 세계를 내 집삼아 살아볼 수 있(었)으리라. 


(2)에선 (물론 영어 번역으로 그런 것이니, 독어 원문 표현은 어떤 건지 확인해야겠지만) 이 구절 그대로 반복된다. 마지막 문장 전체를 옮겨 오면: If I were set the task, I could endeavor to make myself at home in the world with him. 


이거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함. 

세상을 내 집처럼 느껴보기. 내 집의 주인으로 살아보기. 정신의 영역에서 말이다. 몽테뉴나 쇼펜하우어의 방식으로. 

물리적 거주공간으로서의 집..... 의 문제라면, 니체 자신 세입자로 평생 살았던 데다 ;;;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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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더다의 이 책, 서문 제목이 "At Home in the World"인데 

이게 서문의 핵심 구절이기도 하고 책 전체의 주제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서문 도입부의 한 문단에서 이렇게 다시 쓰인다. (*나중에 여러 군데서 재등장할 것이다).


"A normal enough life, then. Yet even as a kid back in working-class Lorain, Ohio, I decided that what I wanted most of all was -- how shall I put this? -- to feel at home in the world, which meant to know something of the best that has been thought, believed, and created by the great minds of the past and present."

 

더다는 진보적 학풍으로 유명한 오하이오의 오벌린 칼리지를,

장학금 받고 다녔다. (고액 장학금 - 학비 면제, 생활비 약간 지급 같은 - 이었고 그런 장학금 없인 오벌린처럼 비싼 리버럴 아츠 칼리지는 다니지 못했을 환경 출신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듯 오하이오 촌구석의 워킹 클래스 출신). 오벌린에서 학부 마친 다음 코넬 대학원에서 비교 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도 받았다. 이 문단은, 출신 성분에 비해 너무 많이, 너무 정신적인 교육을 받은 그가 자기 교육에서 원한 게 뭐였나 꼭 집어 말하는 문단. 이 앞에선 자신이 지독한 애서가, 탐서가 시절을 거쳐 이젠 직업 독서가이고 동시에 건실한 생활인이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평범하다고, "A normal enough life, then" 이렇게 그 다음 문단을 시작함. 


대학원 시절 어느 날 더다의 책 영어판으로 읽고 있다가 "at home in the world" 이 구절 거의 번역불가 아닌가? 나라면 "세계를 내 집처럼" 일단 이렇게 하고 고민하겠다. 어떻게 번역되었을까 궁금해서 한국어판 알라딘 미리보기로 찾아본 적 있다. 찾아보면, 서문의 제목으로는 "세상을 내 품에"로 번역되었고 위의 문단은 이렇게 되어 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자랄 때부터 내가 가장 원한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서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현재의 위대한 인물들이 생각해 냈고 믿었으며 창조해 낸 최고의 것에서 뭔가를 배우고 싶었다."


찾아본 다음 당시 내가 남겼던 노트: 

사실 무엇보다 "at home in the world"를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본 것이었는데,

저렇게 번역된 걸 보니, 딱히 실망이라기보다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신기하고, 뭐랄까 생각을 자극한다. 내겐 저 대목이, 한편 학교 인문학 교육의 (특히 '교양' 인문학 교육의) 목표를 간명하게 전해주는 말이면서, 다른 한편 정신적 자수성가를 원하는 촌놈의 의지, 이것의 노골적으로 정직한 표현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 부지런히 주인의 언어를 배워 주인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내 집을 짓겠다?

 

저런 욕망은 대개는 음험하거나 촌스럽게 보일 것인데,

더다가 고백할 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그 자신 정신적으로도 무산계급 출신이며 (그렇다는 사실을 참 자주 말햇던 거 같다), 그가 짓는 집이 뭐 크고 위압적이고 웅장하고 약탈적이고 .. 등등이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일급의 집이지만 작고 소박한 집. 누구라도 그런 집을 짓고 거기서 주인이기 때문에 "feel at home" 하면 좋겠을 집.

 

어쨌든 더다가 고백하는 "feel at home"의 욕망은,

"내 집처럼 편안하게"의 뜻인진 몰라도 "마음 편하게"는 아니지 않은가, 생각했다. 강주헌씨가 혹시, 더다가 고백하는 이런 욕망을 전혀 이해 못할 환경에서 자랐던 걸까? 그렇다면 의도치 않게 역자의 계급을 반영한 번역인가? 이런 한가한 생각을 잠깐 하다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에피그래프로 쓴 다음 유명해진, 정신이 가장 성숙한 사람은 어딜 가든 타향을 보는 사람이라는 내용의 인용문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에피그래프로 쓰인 걸로 기억하는데, 책을 찾아서 보려니 보이지 않아 구글에게 부탁.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부드러운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하다" 


*지금 나라면 뭐라고 할 건진 나중 다른 포스트로..... (이거 너무 좋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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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젊음, 정신의 젊음이라는 답을 어제 기말시험 시험지에서 읽음. 

이 말이 진부하지 않고 가슴을 치네. 잃고 나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것. 잇몸만이 아니라. 라며 읽다가, 

그래서 잃어버린 나의 순수가 그립다 지금 내가 아는 걸 모르던 때의 내가. (말은 조금 바꾸었다. 직접인용이지 않게) 

라니까, "나는 다시 잃어버린 젊음의 열차를 타려 한다"였나, 그런 문장을 28세에 썼던 자신을 돌아보던 38세의 최승자가 생각나기도 하고. 



지금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책. 있어야 하는데, 없다 해도 (누굴 주었거나 잃어버려서) 

조금 가슴 아프고 말 책이긴 하다. 무엇에도 놀라지 않고 믿을 수 없는 무엇도 없고 상태로 오래 살면. ;; 


처음 들었을 때 공감의 폭발이었고, 

감사의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질주? ;;; 그걸 만든 이들을 향해 고맙다고 그리오?  

하여간 그랬던 <식스핏언더>에서 네이트의 대사. 


장의사 일이 너무 우울하고 힘들어 다른 일 하고 싶다면서 

그가 잠시 하게 되는 일이 펫시터. 개와 산책하고 노는 일 하면서 행복한 그에게, 

그 일의 무엇이 좋냐니까 그의 답. "스물 다섯 살로 돌아간 것 같아. 끔찍한 일은 몰랐던 그 때로." 


역시 적고 보니 최초의 충격은 거의 사라지고 재생 안된다. 

식스핏언더 칭송하는 이들이 자주 쓰는 말 "raw emotion" 그걸 보여주는 대사고, 그러니 순간 살이 쓸리는 아픔이 느껴질 수 있는 대사라, 적기 직전까지 생각했지만. 


그렇긴 한데, 여기서 출발해서, 

적지 않은 이들에게 그들 삶에서 어떤 한 기원이 되는 끔찍한 일이 있겠으니까 그것에 대해 얘기해볼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순수의 상실 그것이 일어났던 (시작했던) 때.  




스물 다섯 이전의 네이트는 두 번 정도 나오는 듯. 

커트 코베인이 죽었을 때... (라고 쓰고 보니 코베인이 죽은 건 94년, 

네이트는 65년생. 그러므로 이 때 이미 28, 29세다. 코베인이 67년생이니 실은 네이트가 형. ;; 맞다 식스핏언더가 매우 무리했던 한 대목이 이 대목. 코베인 죽고 우는 장면을 무슨 수를 써서든 넣어야 해, 우겼던 사람이 있었던 건지도). 


확실한 한 번은 대학 1학년이던 네이트의 유럽 여행 장면. 시실리에서 미국과는 다른 장례 풍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 스무살 네이트. 머리를 짧게 하는 정도로 대학생으로 보이게 하느라 것도 약간 무리인 장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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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간된 카우프만의 이 책에 니하머스의 "서문"이 실려 있다. 

카우프만이 서른도 되지 않았을 때 나왔던 이 책으로 니체에 대한 통념의 급진적 전환이 일어났던 일에서 시작해 이 책의 의의를 제시하는 글. 마지막 문단은 대략 이렇다. 


카우프만의 <니체>는 다른 이유에서도 중요하다. 이 책은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거의 없는 책이다. 니체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뒤집는 일은 성공했으니, 안전히 무시해도 될 책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혹은 다시 읽으면) 들인 노력의 보상을 받는다. 카우프만의 니체 읽기는 내가 여기서 말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섬세하며, 니체와 괴테의 관계, 니체의 자연주의, 승화의 기제, 그리고 미국 실용주의에 니체가 갖는 친연성에 대한 카우프만의 설명은, 이 여전히 유혹적이며 수수께끼같은 철학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바쳐진 진정하고 지속적인 기여다. 이 철학자는 카우프만의 이 책 덕분에 우리의 지적 유산의 견고한 일부가 되었다. 카우프만의 니체는 여전히 살아 잇으며, 그의 <니체>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밑줄 친 부분은 꽤 긴 (9줄)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일부 옮겨 오면 이렇다. (....) the mechanisms of sublimation, and his affinities with American pragmatism are genuine and lasting contributions to our understanding of this still seductive and enigmatic philosopher who is now, thanks to this book, part and parcel of our intellectual heritage. 


이 책 재간된 걸 알고 아마존 미리보기에서 이 "서문" 부랴부랴 찾아봤을 때, 

"지적 유산" 이 말이 사무쳤었다. 니하머스 말이 사실임 앞에서. 니체가 영어권에서도, (심지어?) 미국에서도, 

그들의 지적 유산의 견고한 일부가 된 건 사실이라는 게 어쩐지 분한 느낌이었다. 사무쳐서 그 이후, 몇 번 이 말 기억하고 의식적으로 써보기도 했었다. 민요는 우리의 spiritual heritage, hitherto uncherished. 이런 구절도 써보고 (이건 뭔가 번역하면서, 실제로 저런 내용은 아니었는데 내가 해석을 하여). 


무엇이 우리의 "지적 유산"인가? 

자생 문화에서도 외산 문화에서도 그런 건 만들지 못하는 채 세월이 가지 않았나? 

지성의 세계에서 고아 아닌가? 


*무엇이 한 문화의 "지적 유산"이다 아니다를 객관적으로 측정 혹은 판정하기는, 

음 의외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혹시 어렵다 해도, 그러나 직관적으로는 바로 알지 않나? 

니하머스의 저 서문을 읽던 때 내겐, 정말 단 하나의 유산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도 독고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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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루소 전기 한국어판 읽으면서 했던 생각인데, 

영어판도 같이 읽은 건 아니어서 실은 근거없는 망상일 수도 있다.   

원서로는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을수록 받는 보상(지적 보상)이 커질 문장들이 한국어론 그렇지 않다. 영어에선 각각의 단어가 그게 선택되고 그 자리에 있는 이유를 알아보며 즐거웠을 문장들이, 한국어에선 거의 상투어들의 진부한 조합이 된다. 원서는 (저자가 독자에게 의식적으로 행하는 요구에 따라) 어느 정도는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데, 한국어라면 천천히 읽든 빨리 읽든 큰 차이가 없으며 아니 오히려 천천히 읽을 때 빨리 읽을 땐 보지 못할 결함들을 본다. 그래서 실은, 허겁지겁 읽기가 장려된다. 


번역이 나쁜 편은 아닐 것이다. 아니 좋은 번역일 수도. 대략 다 이해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루소> 한국어판의 번역이 나빠서가 아니라, 번역서들에서 흔히 보는 특징이 (심지어 번역이 좋은 경우에도) 이런 거지 않나는 생각이었다. 물론 <공간의 시학>같은 예외들이 있지만, 그 예외들은 적고 다수가 저렇지 않나. 


쉽게 빨리 혹은 자연스럽게 읽히는게 자명한 미덕인 것처럼... 그러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여하튼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꼭 번역서만이 아니라 책들이 대체로,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읽을수록 보상이 커지는 책... 이기보다는, 그러든 않든 큰 차이 없는 편이지 않나. 영어 포함해 서양 언어로는 천천히, 조금씩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읽을 수 없는 책들도 많이 씌어졌지만 한국어에선 아직 아니지 않나? 


이런 얘기 하면 욕;;;;; 먹거나 아니면 강력한 반발을 자극한다. 수업 시간에 비슷한 얘기했다가 경험해 봄. 

그러나 사람들이 (고위직 공무원 이런 사람들까지) 하는 막말의 수준, 이걸 보면... 그리고 (역시, 대통령부터 시작해 고위직... 그들, 그들만이 아니지만) 굉장히 유아적인 정신들을 보면, 천천히 무엇인가에 반응하고 따져보는 (Mona Lisa Smile 이 영화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교육의 목표로 제시하는 "consider" 이것의 능력)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라고는 볼 수가 없어지면서..... 


괜한 책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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