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 스스로 너라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니체는 메타포의
절대를 실현하는 한편, 이류 시인이라면 덕지덕지 사용하였을 사소한 메타포들을 파기하며, 메타포의 절대적 현실을 살기 위해 메타포의 부조리함까지도 유발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즉, '너 전신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기 위해, 전신으로 뛰어내리라'라고 니체는 말하는 바, 그것은 또 하나의 행위로써 위버멘쉬의 해방과 정복을 실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위와 아래라는 이러한 단어 사이의 모순 너머에서, 상상력은 완전한 일관성을 견지하는 상징들의 분석 속에 작용하고 있다. 즉, '너 바다에 뛰어들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거기 망각 속에서 죽음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모든 육신적이며 대지적 존재, 이 모든 인식의 잿더미, 이 모든 결과의 집적, 인간 존재에 다름 아닌 이 모든 탐욕스런 수확을 죽이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럴 때, 너에게 위버멘쉬의 표지를 부여할 결정적 역전이 실현되며, 너는 공기적이 되어 자유로운 하늘을 향해 수직적으로 위로 떠오를 것이다.
전에는 내게 무거워 보이던 모든 것이
망각의 푸르른 심연에 삼켜지다.
260쪽이다. 원문에선 '니이체'인데 '니체'로 수정.
"그것이 인간 존재인 탐욕스런 수확" 영어판에서 that whole avaricious harvest that makes up a human being,
불어판에서 cette récolte avaricieuse qu’est l’être humain. 이 구절에서 특히 "탐욕스런 수확" 이 두 단어는, 오직 이 두 단어를 읽기 위해 4년을 보내야한다해도 그렇다면 그 4년을 보내도 좋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이 소중한 두 단어였다. 처음 읽던 때. 이것도 벌써 한 10년쯤 전인가. 바슐라르의 개성과 뛰어남과 오직 그만이 가진 것같은 종류의 지성과, 이런 것들이 압축되는 구절들이 (그렇다고 그것들이 따로 노는 경우가 없으며, 전체 속에서 바슐라르적 조화를 이루면서) 그의 책들을 열면 곳곳에 숨어 있다 독자를 놀라게 함.
베버에 따르면 이렇다지만:
"오늘날 진실로 결정적이며 유용한 업적은 항상 전문적 업적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다른 (비슷하며 다른) 종류의 "영혼의 운명"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