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의 바슐라르는, 과학자들의 활동과 시인들의 활동에서 차이가 아니라 유사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하다. 특히 <로트레아몽>에서 바슐라르는 이 유사성을 강조하고 싶어하며, 시의 논의에 수학 언어를 도입한다. 투사적 시(projective poetry)를 향한 욕구와 투사적 기하학(projective geometry)을 향한 욕구를 병치할 때, 수학과 시는 명시적으로 같은 위상에 놓인다. 그의 역동적 상상력 개념은 암묵적으로 이 비교를 수행한다. 이런 작업은 초점이 물질적 상상력에 있는 <불의 정신분석>에선 볼 수 없는 것이라서, 독자는 어떻게 바슐라르가 <로트레아몽>에서 그것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해 한다. 바슐라르의 <말도로르의 노래> 읽기는, 텍스트가 말하는 그것에 그가 얼마나 민감하고 지적으로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다. 여러 비평가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을 시인의 광기의 증거로 보기, 바슐라르는 그러지 않는다. 텍스트를 그것 아닌 무엇의 증거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면 이 작품의 꼼꼼한 읽기만으로 바슐라르가 역동적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걸까? 왜 하필 로트레아몽에 대해 그는 쓰고자 했을까? 바슐라르가 한 저자에 집중하는 저술은 <로트레아몽>이 유일한데다, 이 책은 그의 사원소의 상상력 연구의 틀 안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미셸 망수이는 로트레아몽이 선택된 건 당시 출판 시장에서 있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라고 말한다. 1938년의 4월에서 8월까지 단 5개월 동안, 로트레아몽 전집이 세 판본으로 출판되었다. 뱅상 테리엥은 이런 주장을 일축하며, 1937년 디종 대학에서 바슐라르가 했던 철학 강의의 주제가 로트레아몽이었다고 지적한다. <로트레아몽>은 바슐라르의 과학 저술의 맥락에 속하는데, 대단히 기이하고 또 당시 독서계의 유행이던 로트레아몽의 작품에서 그가 알아본 수학적 배경이 그의 관심을 자극했던 것같다. <로트레아몽>을 읽으면서 이 인식론적 문맥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이 책 이전의 10년 세월이 그에게 변형/왜곡(deformation)의 개념에, 사유가 갖는 역동적 성격에 친숙해지게 했으며, 그리하여 시 독자로서의 바슐라르가 로트레아몽의 기이한 이미지들을 "역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로트레아몽의 "행동주의적" 혹은 "운동적" 상상력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음을 알아보게 된다.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2차적 현실, 그것에 근거한 사유에 바슐라르는 익숙했고 그래서 그는 이미지를 즉각적 현실의 미친 왜곡이 아니라 현실이 가진 가능성의 실현으로 볼 수 있었다. 날개가 달린 물고기 꼬리. 파동처럼 행동하는 입자, why not? 


- 6장 "역동적 상상력과 물질적 상상력: 1938-1948" (97) 


91년에 위스컨신 출판부에서 나온 이 책도, 바슐라르 입문서로 아주 좋은 책이다. 바슐라르 저술들에서 발췌하고, 발췌된 글들마다 (바슐라르 저술 거의 전부를 세심하게, "민감하고 지적으로" 읽었음을 몰라보기 힘든) 메리 맥알리스터-존스가 해설의 글들을 쓰고 있는 책. 좀 특이한 형식이긴 하다. 같은 형식의 입문서를 이것말고는 본 적이 없다. 영역되지 않은 과학철학 저술들에서도 발췌하고 있어서 좋기도 하고, 해설 에세이들이 다 뛰어나다는 것도 좋음. 올해가 가기 전에 긴 서평을 써보고 싶은 책. 


역량이 된다면 바슐라르는 굉장히 흥미롭고 중요한 작업을 같이 할 수 있을 사상가. 

쓰고보니 이상한데 조금 더 맞게 쓰자면: 당신에게 그럴 역량이 있다면 당신은 바슐라르와 함께 (그리고, 바슐라르로부터)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의 문학 책들에, 아직 아무도 몰라본 것 같으며 어쨌든 그에 대한 연구는 나온 바 없는 중요한 질문들, 주제들이 있다. 고 쓰면, 너는 알아보았느냐? 고 자문해야겠고 내 답은, 아무도 몰라보았음만 알아봄. 그게 다에요. ㅜㅜ  


어제 아침엔 <공기와 꿈>을 다시 보면서 (여러 번 본 책임에도 볼 때마다 도전이다), 

못하겠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할 수 있는 건 뭐니?) : 쓰고 보니 하찮아 보이지만 느낄 땐 땅이 꺼질 듯 막중했던 좌절. 오늘 아침 다시 사는 그 좌절. 그런데 어쨌든, 심지어 메리 맥알리스터-존스처럼 민감하고 지적인 독자도 가지 못한 혹은 가지 않은 (가지 못하며 가지 않은) 곳들이, 바슐라르 저술들을 열면 여기저기 있다. 그야말로 미답. 바슐라르 한 사람만 가본 그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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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나 아니면 사조, 혹은 현상 하나를 주제로 20분 정도 대담하는 팟캐스트 Minerva가 있는데 

여기 스티븐 내들러가 한 번 출연했다. 주제는 스피노자. 내들러가 말을 참, 잘 하고 목소리도 들으면 바로 끌리는 목소리. 이 에피에서도 그렇다. 그를 선생으로 스피노자 (뿐이겠어, 누구든. 그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해도 좋으니 모두) 배우고 싶어진다. 끝나기 전에 스피노자에게 자기 인식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아는 것. 

감정과 의지의 영역에서도 자연의 법칙에 종속됨을 아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에겐 중요한 moral step이다. 이런 자기 인식이 있을 때,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을 견디며 자신을 이끌 힘을 갖는다." 


이런 얘길 한다. <햄릿>에서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그 명대사 (명대사. 쓰고 보니 이제야 처음으로 말뜻에 합당하게 쓰는), 거기 등장하는 저 유명한 구절을 잠시 망설이다 쓰면서 말하고 나서, You're an English major, you get the reference. 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 때 그 말투가, 아주 뭐랄까 음악적이고 매력적이다. 





내들러의 한 인터뷰 링크. 

http://www.3ammagazine.com/3am/on-descartes-spinoza-for-sure/


나는 저 대목이 듣자마자 사무치더니 오래오래 기억했고 생각했다. 

이 말의 한국어 대응문을 할 수 있는 한 (내들러라는 사람의 말투, 어휘등을 고려하여) 정밀하게 만들어 본다면? 


"영문과 나왔으니 아시잖아요."

"영문학 하셨으니 지금 제 말 출전은 아실 거에요." 

"영문학 전공이셨으니까 레퍼런스는 제가 말할 필요도 없겠고..." 


한국어로는 이 (이런 하찮은) 말도, 내들러가 하듯이 하기는 참 어렵다는 결론을 나는 내리고 맘. ㅋㅋㅋㅋㅋ;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자문했는데, 그에 대해 나온 자답은: 한국에서는 정신의 삶이라는 것에 근접하고 그것을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도 (ex. 교수들) 정신들이 대개는 난폭하고 유치하다. 난폭함이 유치함이고, 유치함이 난폭함이다. subtlety, 이런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정신. 무엇으로도 그게 "art"가 되게끔은 못하는 정신. 



*표현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게 아니라, 

내들러처럼 '발화';;;;(가 맞는 말이겠지)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렇게 발화될만한 맥락이, 한국에서는 그런 맥락조차도 사실 어렵다는 생각도. 

다들 어째 그냥 (말 줄임....) 


**하긴 내가, 나야말로 그렇다보니 알아보고 괴로운 걸 수도. 나나 잘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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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PUF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직영 서점이라는 곳. 

벽에 걸린 저 포스터를 큰 걸로 보고 싶었는데 지금 검색력으론 이 정도가 끝이다. 

바슐라르 알아보고 뭉클... 했던 사진. 바슐라르 (오른쪽 끝 아래에서 두번째), 니체, 쇼펜하우어. 

이 순서로 되어 있는 것도 좋다. 니체는 지금까지 타계한 니체주의자들 중 바슐라르를 제일 좋아할 것 같음. 

쇼펜하우어와 잠시, 짧지만 의미심장하게 인사하고 바슐라르와 오래 얘기하겠지. ;; 


쇼펜하우어 위는 루 살로메. 

살로메 위는, 푸코인가? 대머리처럼 보이는 머리는 푸코같지만, 목을 몸으로 집어넣는 '찐따'같은 자세는? 

살로메의 오른쪽으로 옆은, 마틴 스콜세지?? 와 비슷하게 생긴 철학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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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의 일. 

현실의 일곱 베일 중 한 베일만 벗기면 바로 그 시절 그 시간 그 방으로 갈 수 있을 것같게, 

선명히 기억나고 멀지 않게 느껴지는 어느 날이다. 비 무척 많이 오고 나는 집에서 오후 내내 바슐라르를 읽던 날. 바슐라르를 워낙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바슐라르 읽다가 가슴이 터지는 것같았다거나 극적인 경험을 한 적은 없는데, 이 날은 그에 근접했었다. 바슐라르만이 쓸 그 놀라운 표현과 문장들에 감탄하고 감사하며 읽고 있는데, 독서대 위 바슐라르 책을 감싸고 빛이, 빛이 나더니 그 빛이 나를 감싸고 온 방을 채우는 것 같았던 날. ;; 형광등 없이 간접조명들로 워낙 늘 컴컴하게 사는 미국식 방이라, 책상 위 스탠드 빛에 시력 약해지던 눈이 갑자기 민감하게 반응했던 거 아니냐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행복감을 기억함.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미래에 대한 특별한 한 태도이기도 해서 용기의 한 종류인데, 무엇도 두렵지 않고 무엇도 싫지 않던 그 날의 그 "용기"도 기억함. 


<대지 그리고 의지의 몽상>에 굉장히 놀라운 문장들이 많고 

사실 울프 <올란도>에 바쳐진 주석들은 이 책에 담긴 최고는 아니다. 

그래도, 언제 보아도 나는 반응한다. 수업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한 장면.. 이런 게 화제였을 때, 

귀촌한 부모님 때문에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했는데 입학하던 날 학교 운동장의 커다란 나무. 부모님과 셋이 팔을 둘러도 둘러지지 않았던 나무. 이런 얘기 한 학생이 있는 걸 보면, 나만 반응하는 건 아닐 것임. 





태풍이 왔는지,

지금 비가 무섭게 퍼붓고 있다.

한 두어시간 전부터 퍼붓기 시작해서,

한 시간 전쯤에, 빗속을 운전하여 세차를 하겠다며 나갔다 왔는데,

그때도,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들통 같은 걸로 "들이 붓듯이" 쏟아지던 비였다가,

계속 그리고 여전히 그런 비다. 공중에서 강물이 엇갈리며 흐르는 거 같은 비. 물 "방울"이 아니라 물 "길"이 오는 비. 지금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록적인 강수량일 거 같다. 여기 산 세월 동안 거의 처음 보는, 난폭한 비.


 

 

 

 


 

빗소리를 들으며 바슐라르를 읽고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은 바슐라르를 읽은 일.

이라고 생각하며, 가장 잘못한 일은 바슐라르로 논문을 쓴 일.

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뭐 성공적이지 못한; 농담 같은 생각을 했던 적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인문학은 삶의 밑천이라는 김우창 선생 말에 따르거나, 같은 취지에서,

교양은 삶에서 더 많은 것을 뽑기 위해 (Cultivated men get more out of life than uncultivated men) 필요한 거라는 시릴 코널리의 말에 동의한다면, 그러한 인문학과 그러한 교양의 무궁무진한 원천 중 하나가 바슐라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지와 의지의 몽상>엔,

울프의 <올란도> 서두에서, 벌판의 참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땅 위로 만져지는 뿌리 위에 누워서는 "참나무 뿌리는 지구의 등뼈"라 느끼는 올란도에 대한,

아주 아주 좋은 문단들이 있다.

 

그 중 하나:

"울프의 소설에서 참나무는 그 자신 하나의 인물이다. 책의 표지에 참나무 이미지가 그려진 건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올란도>에서 참나무가 하는 역할을 이해하려면, 우린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 웅장한 한 나무와 그것이 우리에게 주었던 견고함의 교훈을 사랑했어야 한다."

 

요 문단이 등장하기 위해서,

다른 여러 문단들이 있어야 했고, 그것들 없이 요것만 요렇게 똑 떼어놓으면,

어째 이것이 감동적일 것인지, 이해가 .... 안될 거 같긴 한데 ........... 그렇다고, 모두를 옮겨올 수도 없고.. ㅠ.ㅠ 어쨌든, 이 짧은 세 개의 문장들이, 오늘 나의 오후를 환히 밝혀주었고, 비가 미친듯이 퍼붓고 있는 날씨다보니 어째 더, 그랬다고 적어두고 싶어졌다.

 

견고함의 교훈.

웅장한 한 나무.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 우리가 사랑했던 웅장한 한 나무.

그것이 우리에게 주었던 견고함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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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학기 종강이 겨우 나흘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아침. 

한 시절이 끝나고 나면, 끝난 바로 다음 날이면 이미, 그 시절이 전생의 어느 희미한 기억같아지는 일. 

이거 혹시 한국적인 거 아닌가? 생각한 적 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어지기. 특히 한국에서 절실한 무엇 아닐까? 

















아도르노에게 (아마 비판이론 전체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경험의 위기." 미국의 비판이론 연구자들은 특히 이 주제일 때, 믿을 수 없어하는 것 같다. 이 문제로 그들이 진정 고심했을 거라고는. 마틴 제이의 저 책도 한 예. 사실 이 주제만이 아니라 아도르노가 고심했던 많은 문제들이, 그가 하는 여러 심란한 말들이, 서구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적실하다는 생각을 글쎄요, 아도르노 책들을 읽다보면 피할 수 없는 것같습니다만. Minima Moralia에서 중요한 주제인 "중요성의 위계" (그걸 허물라는 요구가 있으니 그 주제가 저 책에서 중요하다고 지목함이 아이러니... 아이러-닉;) 그게 정신을, 프랑스나 독일 미국에서라면 이 정도로 옥죄진 않을 것같다. 비교 대상을 브라질이나 터키, 일본으로 해보란다면, 옥죔에선 우리가 덜할지라도 어쨌든 위계의 물신화.... 이런 면에선 우리가 짱드실 것같은 건, 망상인가. 


벌써 7월도 후반으로 진입.  

서재질이 저절로 뜸해지게끔 올해 꼭 하기로 한 일들에 집중하는 여름이 되어야 한다고 

조금 전 다짐했으나, 오늘은 일요일이고 청소 포함해 밀린 집안일들이 있고, 집안일들을 하기 전에 

집안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써 두면 좋을 것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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