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acker (1991). 

로버트 솔로몬은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 철학과에 재직했고 

오스틴 출신이며 오스틴 배경 영화들도 만든 링클레이터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 영화가 이거 Slacker 아니었나? 해서 찾아보니, 이 영화가 아니고 그가 출연한 건 이로부터 10년 뒤, Waking Life. 그런데 이 영화에도 솔로몬은 아니지만 텍사스 오스틴 철학과 교수가 출연하는데 그는 Louis Mackey. 바로 위의 장면이다. (영화 전체도 유툽에 올라와 있다. 좀 있다 맥주 마시면서 보면 좋겠다고......... 유혹 든다). 


대학원 시절 이 영화 보고, 특히 이 장면 좋아서, 노인이 읽어주는 수첩 속 문장들 포함 뭐라 적어두었다: 


진짜 전사가 넘어야할 최초의 장애물:

"내가 아끼고 믿는 인간들을 향해 빈다. 그들에게 고통이, 버림받음이,

질병이, 냉대가, 모욕이 있기를. 그들에게 심오한 자기-혐오가 남의 일이 아니기를.

그들이 자기-불신이라는 고문과 패배라는 비참에 친숙하기를. 그들을 향한 연민은 나의 몫이 아니다.

오늘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기준이, 그가 버텼는가이므로."

 

The first hurdle for a true warrior:

"To those humans in whom I have faith, I wish suffering, being forsaken,

sickness, maltreatment, humiliation. I wish that they should not remain unfamiliar with profound self-contempt,

the torture of self-mistrust, and the misery of the vanquished. I have no pity for them because I wish them the only

thing that can prove today whether one is worth anything or not: that one endures."

 

*총 백명쯤 되는 인물들이 출연했다 하고, 그중 다수가 끝없이 말을 하는 이 영화에서,

내게 가장 흥미로운 대사는 이것이었다. 은퇴한 대학 교수로 짐작되는 노인 남자가 딸과 함께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서,

5단 책장 두 개에 책이 가득한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강도 청년과 마주친다. 총까지 준비해 오긴 했으나, 강도짓은 영 어설픈 청년을 붙잡고 이 노인 남자 ("경찰을 부르진 않을 거야. 내가 자네보다 더 경찰을 싫어할 걸세"), 세상을 바꾸는 일에 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서의 아나키즘에 대하여, 자신의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에 대하여, 그밖에도 여러 주제에 대해, 들려준다. 그리고 헤어질 때, "잠깐!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있어"하고 수첩을 꺼내더니 위의 문장들을 읽어준다. That one endures. 동의한다. 박노자가 얼마전 썼던 말을 빌면, "지구라 불리는 정신병원에서 정신 온전히 유지하기".






Waking LIfe에는 솔로몬도 출연하고 매키도 출연. 매키가 철학 얘기 하는 장면이 이것. 

"고통을 겪는 유형에서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삶의 부족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과, 삶의 과잉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 

생각을 좀 해보면, 인간의 행동과 활동이 동물의 행동과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네. 가장 진보한 테크놀러지라도 우릴 기껏해야 가장 똑똑한 침팬지 수준이 되게 할 뿐이야. 사실 플라톤이나 니체같은 인간과 보통의 인간 사이의 차이가, 침팬지와 보통의 인간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크다네. 진정한 정신의 영역, 진정한 예술가, 성자, 철학자의 세계는 아주 드물게만 성취돼. 왜 그토록 적을까? (....)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진짜의 잠재력,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두려움일까, 게으름일까?" 


업로드한 사람이 대사 전체를 영어로 올려두었다: 

There are two kinds of sufferers in this world: those who suffer from a lack of life and those who suffer from an overabundance of life. I've always found myself in the second category. When you come to think of it, almost all human behavior and activity is not essentially any different from animal behavior. The most advanced technologies and craftsmanship bring us, at best, up to the super-chimpanzee level. Actually, the gap between, say, Plato or Nietzsche and the average human is greater than the gap between that chimpanzee and the average human. The realm of the real spirit, the true artist, the saint, the philosopher, is rarely achieved.


Why so few? Why is world history and evolution not stories of progress but rather this endless and futile addition of zeroes. No greater values have developed. Hell, the Greeks 3,000 years ago were just as advanced as we are. So what are these barriers that keep people from reaching anywhere near their real potential? The answer to that can be found in another question, and that's this: Which is the most universal human characteristic - fear or laziness?


정작 Waking Life에서 솔로몬이 출연하는 장면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이 영화 남자 주인공이 대학 강의실을 가고, 강의실에선 한 노교수가 열정적인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지금 우리에게 실존주의의 적실성. 우리 삶을 우리가 만든다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설 힘을 실존주의에서 찾으라. 이런 장면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철학자가 솔로몬일 것이다. 


Slacker에서 "진짜 전사가 넘어야 할 장애물"로 시작하는 짧은 문장들은 니체의 직접 인용이고 <힘에의 의지>가 출전. 영화를 볼 때 몰랐고 몇 년동안 몰랐다가 누군가가 알려줘서 찾아봤었다. <힘에의 의지>에서 910번 노트. Waking Life에서 나오는 대사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가 출전. "fear or laziness" 이 구절은 그대로 인용. 내용엔 명확한 니체의 메아리? 


벌써 8시 반을 향해 간다. 유툽에서 이것들 찾아보다가 대학원 시절이 그리워졌었다. 

그 시절에, "지나고 나면 이 시절이 좋았다고 한다며? 심지어 진심으로 그리워한다며?" 그랬었는데 사실 그 때도 그게 전적으로 안 믿겨서 했던 말이 아니었.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건지 그때도 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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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오전 산책할 때 철봉도 그냥 지나치지 않긴 했다. 

매달려 있으면 상체가 쭉 펴지는 느낌이 좋아서, 그 정도. (그런데 유툽에서 찾아보니 이것이 상체 스트레칭에 좋다는 내용 동영상들 있다). 학력고사, 체력장 세대면 아는 그 "매달리기"가 아니고 발을 땅에서 떼지 않고 기분으로만 매달리기여서, 하여간 날림. 대충 슬쩍. 그렇게 해도 좋다보니, 그렇담 제대로 이것저것 철봉으로 할수 있는 것들 해보고 싶어져서, 턱걸이에 도전. 아마 영영 못할 가능성 크지만, the journey not the arrival matters. 













  

  

   


오늘 아침 극미미하긴 하지만 진척이 있어 기록. 

발을 땅에서 떼고 꽤 오래 매달릴 수 있었으며, 그러다 아주 조금이지만 순간 상체를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같은, 그러지 않았나 하는 감과 함께 내려올 수 있었다. 매일 이 정도 아주 작은 기적이 있다면 3년 뒤엔 턱걸이하는 (중년)....  





니체의 위버멘쉬를 바슐라르는 순간의 심리학, 

이것으로 설명한다. (위버멘쉬에 대한 가장 뛰어난 이해고 해설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어떻게 그 내용을 내 말로 바꿔 쓰거나 요약도 도저히 못하겠다. 요약도 못하겠으면서 

그것으로 페이퍼를 쓰고 있는, 쓰겠다는 막막한 시간들을 보내, 오늘도 보내겠지......) 


그런데 어쨌든 위버멘쉬와 순간의 심리학, 

이것을 암벽 등반가들이 아주 잘 알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클라이머 Jan Hojer 동영상이 유툽에 꽤 있는데 그가 클라이밍하는 (혹은 gym에서 훈련하는) 장면들 보면, 바로 저것이 그런 (초인이 체험하는 극복의, 행복감의) 순간이겠음. 그러게 된다. 암벽등반은 지구력, 지속만큼 순간이 중요할 것같으며, 게다가 이건 자기 체중이라는 "중력의 정신"과 벌이는 싸움이기도 하잖음? 


암벽등반이 그런 것이길 바라며 나도 해보고 싶어서 

유툽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여자 클라이머 훈련 동영상 발견했다. 멋있음! 

나야 동네 철봉 매달리기 정도 근근히 하면서, 그런 신세지만 보는 걸론. 눈은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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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강의는 사실 독백에 가까웠다. (....) 그는 강의의 내용에 완전히 몰입했다. 니체는 다른 존재와 자기 사이에 어떤 관계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천천히 말했고 자주 말을 멈추었는데, 그건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기가 하는 말이 가질 인상을 (마치 자기가 화자이면서 동시에 청중인 듯이)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풀려 나가는 그의 사고의 실[絲]이 특별히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그를 이끌면, 그의 목소리는 잠기듯 낮아졌고 그럴 때 그 목소리는 가장 부드러운 '피아니시모'였다. 그러니 아니다, 니체는 '질풍노도'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말없이 고통을 겪어내는 사람이었고, 자기를 산산히 부술 운명에 대항한 싸움을 벌이며 철학에서 위안을 요청하고 있었다. 철학은 아직 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철학이 그의 감정을 위로했다. 그의 강의에 담겼던 그 따스함이, 그가 가졌던 세계관이 그의 말을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지던 그 방식이, 새롭고 온전히 개인적인 무엇을 내가 보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이 남자의 전존재를 구름처럼 감쌌던 세계관. 그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이런 질문이 떠오르곤 했다: "이 남자는 누구인가?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진정, 사유하는 존재인 이 사람, 이 사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갑자기 그는, 하던 말을 끊고 비틀며 거기서 에피그램이 나오게 하곤 했다. 그의 수업은 대개는 결론이 아니라 아포리즘으로 끝났다 (....) 우리의 수업이 끝남을 알리던 그 격렬한 언어의 분출. 수업이 끝나면 니체는 자기 의자로 돌아가 무얼 듣는 자세로 잠시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고, 마치 교실에 들어올 때 그랬듯이 부드럽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 바젤 대학에서 그의 학생이었던 루드비히 폰 셰플러의 회고 (67) 


Conversations with Nietzsche (1987). 니체를 알았던 사람들이 남긴 니체 회고의 글들을 모은 책. 

이 책에 의외로 (단지 니체 생전에 그를 알았던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이 좋은 얘길 해줄 수 있겠냐는 회의가 있었다면, 의외로. 아니면, 기대한 대로) 재미있고 도움되는 내용이 있다. 위와 같은 회고를 한 루드비히 폰 셰플러는, 회고를 참 길게도 하는데 (다른 회고자들은 2-3 페이지일 때, 그는 무려 13페이지) 처음부터 책 제목을 잘못 말하기도 하고 (아래처럼) 


"그 당시 내가 저자로서 니체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단 얘긴 아니다. <비극의 재탄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반시대적 고찰>은 꼼꼼히 읽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이 책 편집자가 "sic"을 넣어줌. I had heard of The Rebirth [sicof Tragedy. 비극의 재탄생. ;; 이거 생각보다 웃김. 명작, 명서들의 제목에서 한 글자만 바꾸기, 한 글자만 넣거나 빼기. 해도 재미있는 결과 나올 거 같. "다락방에 미친 여자" 등. 


니체 회고를 핑계로 자신을 미화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 긴 회고 곳곳에서 짐작되고, 

그러니 그의 얘길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되겠고 경계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의 회고에서 갑자기 니체가 살아 걸어나오는 것같은 그런 감이 있기도 하다. 


프란츠 오버벡의 회고도 있는데,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의 관계에 대해, 

니체가 일방적으로 부르크하르트를 추종한 관계라면서 부르크하르트 쪽에서는 편지 포함 니체가 쓰는 모든 글에 "horror" 아닌 다른 것을 느낀 적이 없다고 (그런 내심을 니체에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한다. 그리고 니체가 우정에 대한 칭송을 많이 하지만, 그 점에서 그는 오직 불행만을 알았다는... 얘기를 아주 담담하게 함. 그 얘기하는 문단에, 이런 문장이 있다: "니체의 실제 친구들 (그의 진정한 친구들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는 아예 없었다. 니체에 따르면, 현실 세계가 아닌 진정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니체는 "감당하기 힘든 난제"였다." (48)


꽤 놀라운 건, 프란츠의 아내 이다 오버벡의 회고. 프란츠 오버벡 자신 훌륭한 학자고 사람이었을텐데, 여기 실린 이다의 여러 회고들을 보면 남편보다 더 똑똑하다는 생각이 한 몇 문장 안에 들, 어쨌든 내겐 들었다. 관찰력, 표현력, 주제 장악력. 이런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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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Radio 3 Documentary. 

아동문학과 검열 주제로 저 팟캐스트에 올라온 에피 들었는데, 

인터뷰로 나오는 누군가가 저런 말을 한다. "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한 세계도 태어난다. 

어떤 아이이든 문화의 착오를 고칠 자연의 기회라고 테드 휴즈가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걸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위한 책을 쓰면서, 언제나 희망과 낙관주의를 가질 수 있다.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다고 한편의 우린 느낀다.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아이들이 가져올 것이다." 


아동문학에 현실을 가져와라. 아동문학의 검열을 폐하라. 

이 쪽 주장인 것 같고, 위의 인터뷰이도 그의 생각에 '이 세상을 아는 아이가 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서 저렇게 말하는 거지 '타락한 세상에서 보호된 아이일수록 타락한 세상과 싸울 전사가 된다'여서 저렇게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어수선하게 이것저것 인용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인터뷰하고 있는데 

아동문학과 검열 주제에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나라면 어떤 입장일지 바로 알지 못하겠던 게 이상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고전적인 질문, 세상엔 악서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이 다큐 팟캐스트 에피는 "절대적으로 없다!"고 답함. 그런가? 그렇게 보더라도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을 강력히 옹호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라면 악서가 있다 쪽에 서겠다. 덜 좋은 책, 정도의 의미에서라도 나쁜 책.. 의 개념을 갖고 있어야지 않나. 나쁜 책이 하는 나쁜 일들에 대해서도. 


어쨌든 테드 휴즈가 했다는 저 말은, 

자명하며 나도 알던 걸 말만 멋있게 한 것일 뿐...... 인것처럼 순간 느껴지더니, 

아니다 심오하다고까지 말할 건 아닌지 몰라도, 생각을 자극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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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근방. 13년 7월. 0.8개 하던 12년 4월로부터 1년 3개월 지난 다음 장면은 

오오...... 과연 과연 풀럽의 힘 놀랍습니다. 


내일부터 동네 체육공원 철봉에서 나도 해보려고요. ;;;; ㅋ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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