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루틀리지, 93년 간.
Nietzsche's Case: Philosophy As/And Literature.
"서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들의 의심의 해석학과 함께, 철학자들에게 니체에 대한 "문학 비평적" 접근은,
잘해 봐야 단순소박한 오용, 잘 못하면 자격없는 이들이 저지르는 만행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문학 비평가"들이 보기에, 철학자들이 꼼꼼히 길들여온 니체는 절망적으로 순진한,
혹은 재미없는, 혹은 순진하고 재미없는 철학자다. 이 니체는 아주 "얇은" 니체다. 그 니체는 위대한 죽은 (백인 남성) 철학자들의 밀랍 인형 박물관에서 볼 것 같은 니체다. 철학자는 니체의 텍스트에서 일관된 의미를, 그리고 무엇보다 엄밀성의 증거를 찾는다. 비평가는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새로운 통찰을, 단절을, 균열을, 모호성을, 실현되지 못한 기회들을 찾는다. 그렇게, 우리의 문학 문화와 철학 문화의 상호 외면은 지속된다.
그리하여 공동 연구의 결과인 이 책은
기관이 절단, 해체한 니체의 문학, 철학적 사유의 몸, 그것의 봉합을 시도한다고 한다.
요약과 다시쓰기를 거부하기. 철학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아도르노가 말하지 않았나.
니체 말들은 거의 다, 직접인용만 허락하지 요약도 다시쓰기도 불허하지 않나. (<비극의 탄생>, 긴 에세이들로 된 <도덕의 계보> 포함해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것들 제외하면. <짜라투스트라>나 <즐거운 과학>의 단장들은 전체로나 개별적으로나 그냥 자기들끼리 일류를 이루고 아류를 허락치 않지 않나. 하긴 저 예외들도 합당하게 요약하고 바꿔쓰려면 재능이 작지 않아야 할 것같고).
어쨌든 (범용한) 철학자들이 (위대한) 철학자를 길들일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위에서 말하는 내용에 순간 깊이 공감했다. 그들의 손에서 그는 "순진하고 재미없는 naive and uninteresting" 사람이 된다.
그를 직접 읽음과
그에 대해 전해 들음 사이에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는가로
저자들을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물론 예외 없이 그 간격은 크지만,
더욱 더더욱 매우 심지어 메울 수 없이 큰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존 스튜어트 밀의 그 간격이 1이면,
바슐라르의 그 간격은 3000쯤 되지 않을까.
어쨌든 니체는 '읽기'(철학을 읽기)와 관련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 지 않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