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꺼낸 이 책 계속 보고 있는데 

실린 글 중 "니체의 철학에서 스타일의 문제 / 니체의 스타일에서 철학의 문제" 이런 제목 글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니체의 문장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다시쓰기(paraphrase)에 저항한다. 

우선, 그의 문장에 성공적인 주석을 달 수 있는 경우에도, 니체의 원문이 우리의 주석보다 더 중요하다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쓴 어휘들 중 무엇도 그보다 나은 것으로 교체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주석이 얼마나 성공적이든 그의 문장이 갖는 힘이 거기 담기진 않는다고 우리는 느낀다. 들으면 잊지 못할 그의 한 줄 단장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두가 나를 강하게 한다" 같은 단장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이 점에서, 니체의 글쓰기를 우리는 그 말의 적합한 의미에서 시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브라우닝의 시 "Childe Roland"에 담긴 인지적 내용의 좋은 요약이 있을 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면 그 시를 대신해 요약을 택하지 않을 거라는 바로 그 의미에서, 시적인 면모가 니체의 문장들에 있다. 시 작품의 성공적 다시쓰기를 그 시 작품보다 더 선호함은, 진짜 백달러보다 가상의 백달러를 선호하는 것과 같다. 


그의 문장이 다시쓰기에 저항한다고 말할 수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이것이다. 

니체 저술의 어떤 면모에 대한 어떤 논평이든, 그게 니체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우리는 갖는다. 그 논평만큼 적실하고 그러나 그와 양립이 불가한 다른 방향이 여기 반드시 있다고, 그러니 니체 저술엔 누구도 마지막 말을 할 수 없다고 우리는 느낀다. 니체만 그런 게 아니라 철학, 문학 텍스트는 예외없이 그렇다고 당신은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인정하겠다. 하지만 니체의 경우는 그 저항의 종류가 좀 다르다. 





이어, 그 저항의 종류가 어떻게 다른가 보여주기 위해 칸트와 비교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은 그 내용에 대한 꼼꼼한 주석이 그 내용을 대신할 수 있는 책. 

니체의 경우엔 무슨 주석 어떤 논평을 하든, 그것이 원저를 대신할 수 없다고 독자는 느낌. 

해서 니체의 철학하기와 니체의 철학하기에 대한 해설... 의 관계는 

걸작 소설과 그 소설의 줄거리 요약의 관계. 줄거리에서 우리는 그 소설에 대해 알아야할 모두를 배우지만 또한 무엇도 배우지 못한다. 


나는 아니 이건 어제 내가 이 책 "서문" 읽으면서 했던 생각과 거의 같은 얘기 아님? 흐으. 놀라고 지겹(?)기도 했으며, 

그러다 진짜 백달러와 가짜 백달러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조금 웃었다. 이 정도면, 학술서에서 등장하는 농담으로는 실제로 웃긴 농담, 성공하는 농담에 속하지 않을까. 


이런 농담을 쓸 수 있었던 이 글 필자는 얼마나 순진한 사람일까. 

이것 혼자 그를 순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건 아니고, 글 전체가 데리다의 강력한 영향 하에 지적 흥분에 빠져 있는 글인데 그 흥분이 순진함의 편. 순진한 사람만이 할 그런 흥분? 그런 흥분. 아도르노가 그의 삶과 저술 전체로 보여주듯이, 순진함이 사실 재능의 필수 요소일텐데. 한국은 순진하게는 살 수 없는 곳이라서도 '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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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는 니체 페이퍼 다음엔 울프 페이퍼를 쓰겠다는 계획인데, 

실은 이것들이 다 바슐라르 프로젝트다. 널리 읽히지 않고 연구되지도 않지만, 바슐라르는 20세기의 유례 없이 독창적이고 위대한 정신이었다. 아도르노와 동급일 모더니티의 비평가로, 바슐라르를 읽읍시다. 정도만 설득하더라도 (그런 게 통하기만 하더라도) 만족할 프로젝트. 


바슐라르로 가는 길을 걷는 동안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머물 수 있는 아름다운 지점들. 그들이 이 정도로 사소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니체의 탁월함, 울프의 탁월함보단 그들의 탁월함을 탁월하게 알게 하는 바슐라르의 탁월함이 주제. 


그런가 하면 

울프가 남긴 그 단어 하나 어김없이 뛰어난 글들을 (일기, 편지들처럼 뛰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뛰어난 것들 특히) 

꾸준히 오래 읽으며 한탄, 감탄하고 싶어진다. 이상이 실현된다면, 오전엔 페이퍼를 막 씀.. 오후엔 다음 페이퍼와 연관된 책들을 막 읽음. 그 중엔 당연히 울프의 일기와 편지, 블룸스베리 그룹에 관한 책들이 있고 나는 꾸준히 오래 (3시간?) 읽으며 생은 여기에 있노라고 한탄하고 감탄함. 이런 일이 일어나겠지만, 이상은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책들 정리를 좀 하고 울프 여사님도 ;; 더 가까이 두고 있어야겠다. 




*아 위의 이미지는 My Dinner with Andre에서 또 하나의 명대사. 

이 영화는 모더니즘 정신의 상속자... 인 영화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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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루틀리지, 93년 간. 

Nietzsche's Case: Philosophy As/And Literature. 


"서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들의 의심의 해석학과 함께, 철학자들에게 니체에 대한 "문학 비평적" 접근은, 

잘해 봐야 단순소박한 오용, 잘 못하면 자격없는 이들이 저지르는 만행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문학 비평가"들이 보기에, 철학자들이 꼼꼼히 길들여온 니체는 절망적으로 순진한, 

혹은 재미없는, 혹은 순진하고 재미없는 철학자다. 이 니체는 아주 "얇은" 니체다. 그 니체는 위대한 죽은 (백인 남성) 철학자들의 밀랍 인형 박물관에서 볼 것 같은 니체다. 철학자는 니체의 텍스트에서 일관된 의미를, 그리고 무엇보다 엄밀성의 증거를 찾는다. 비평가는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새로운 통찰을, 단절을, 균열을, 모호성을, 실현되지 못한 기회들을 찾는다. 그렇게, 우리의 문학 문화와 철학 문화의 상호 외면은 지속된다. 





그리하여 공동 연구의 결과인 이 책은 

기관이 절단, 해체한 니체의 문학, 철학적 사유의 몸, 그것의 봉합을 시도한다고 한다. 


요약과 다시쓰기를 거부하기. 철학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아도르노가 말하지 않았나. 

니체 말들은 거의 다, 직접인용만 허락하지 요약도 다시쓰기도 불허하지 않나. (<비극의 탄생>, 긴 에세이들로 된 <도덕의 계보> 포함해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것들 제외하면. <짜라투스트라>나 <즐거운 과학>의 단장들은 전체로나 개별적으로나 그냥 자기들끼리 일류를 이루고 아류를 허락치 않지 않나. 하긴 저 예외들도 합당하게 요약하고 바꿔쓰려면 재능이 작지 않아야 할 것같고).


어쨌든 (범용한) 철학자들이 (위대한) 철학자를 길들일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위에서 말하는 내용에 순간 깊이 공감했다. 그들의 손에서 그는 "순진하고 재미없는 naive and uninteresting" 사람이 된다. 


그를 직접 읽음과 

그에 대해 전해 들음 사이에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는가로 

저자들을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물론 예외 없이 그 간격은 크지만, 

더욱 더더욱 매우 심지어 메울 수 없이 큰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존 스튜어트 밀의 그 간격이 1이면, 

바슐라르의 그 간격은 3000쯤 되지 않을까. 


어쨌든 니체는 '읽기'(철학을 읽기)와 관련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 지 않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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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Genius of the Modern World 진행자 베타니 휴즈는 

고대사 전공 학자, 방송인이라고. 그녀의 진행은 그냥 무심히 넘어갈 편인 진행인데 

BBC에서 만든 다른 다큐, <공포, 로베스피에르와 프랑스 혁명>의 여성 나레이터 목소리는 아니다. 

편파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이성이 담긴 목소리. 사태를 날카롭게 꿰뚫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태를 (그 전모를) 껴안으며 그 너머로 가기까지 하는 목소리. ;;;; 감정의 생각하는 힘, 생각의 힘으로 절실해지는 감정, 그런 게 담기는 목소리다. 그게 연출만으론 아닐 것 같은. 남자가 비슷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여러 번 상상해 보았는데, 남자라면 이렇게 탁월하게 '느끼며 생각하는 인간'으로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상상할 때마다. 들어본 적이 없는 걸, 그런 건? 





프랑스 혁명에 관해 유툽에서 볼 수 있는 다큐 중엔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이것도 있다. 

이건 "나레이터의 성별이 달라질 때 메시지에 일어나는 효과와 시청자 반응"이 궁금한 우리를 위해서인지, 여자 나레이터 버전이 있고 남자 나레이터 버전이 있다. 위의 것이 여자 나레이터 버전. 유툽에서 이걸 보면 옆의 리스트에서 같은 제목으로 뜨는 것들 중에 남자 버전이 있다. 이 다큐는 정말, 실제의 목소리로 웅변한다. 여자 나레이터가 하면 여신이 말함 (그 여신은, 정의의 여신. 이성의 여신). 남자 나레이터가 하면... 음, 보편이라는 것에 무능한 범부가 말함??? 


정말 그런 차이가 있다. 

사실 아래 Genius of the Modern World의 베타니 휴즈도 그렇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진행에 (그 강한 영국 악센트, 뭐 기타 등등 '로컬'한 요소들이 있을 테지만) 보편이 실린다. 그게 보편으로 들리는 네가 문제다... 라는 반박도 가능하겠지. 음.. (뭐라 뭐라 쓰다가 지움...) 어쨌든 한 번 들어보세요. ;;; 내 말이 맞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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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작된 BBC 3부작이라는데, 

맑스, 니체, 프로이트. 이 세 사람 다루고 있다. 

어제 발견해서 니체 편은 이미 몇 번, 맑스와 프로이트 편도 

집에서 고추잎 다듬으면서, 청소나 정리하면서 들음. 


그런데 genius, 이 말도 일종의 나름의 컴백을 하는 듯. 

스탠포드 불문과의 프루스트 전문가 Josh Landy는 한 7년전쯤 인터뷰에서 

"이젠 가질 수 없는 믿음일 천재에 대한 믿음이 내겐 있어요" 이런 말 하기도 한다. 

08년엔 아도르노 전기가 Adorno: One Last Genius, 이런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원저는 독어고 03년에 나온 독어판도 (지금 책 꺼내서 확인해 봄) 같은 제목이다. Adorno: Ein Letztes Genie. 

BBC의 이 3부작 제목에서는, 복수형으로 Geniuses라고 썼다면 말이 거추장스러워지기도 하고 (이 3인을 향한) 영웅숭배, 재능의 물신화... 같은 것이 됐겠지만 단수형으로 쓰면, 이게 꼭 "천재"만이 아니라 "정신"이기도 하지 않나? 어원상 그렇고 특히 독어에서는 영어보다 더 그런 용례가 있는 어휘 아닌가 한다. <미학이론> 독어판과 같이 보던 때 (하루 몇 줄만 보니까 가능) 몇 번 그런 경우 있었던 듯. 어쨌든 이 시리즈의 제목을 보니, 이 말은 그러자고 해서 그만 쓰게 될 어휘는 당연 아니라는 생각이 듬. 그러기엔 지나치게 모호하고 신비한 의미가 있다. 


한 20분 지점에서 니체의 실스마리아 시기가 시작하는데 

진행자에 따르면 니체는 실스마리아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삶을 최고로 긍정하는 그의 아이디어들 대부분이 실스마리아의 극히 아름다운 풍경들 안에서 얻어졌다. 


실스마리아... 뿐 아니라 유럽에 

가고 싶어짐. 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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