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글을 쓰지 않으니 몇줄 감상을 남기기도 어색하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머리와 마음에서도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에 짧게 쓴다. 


'맨스필드 파크'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읽으면서 제인 오스틴의 주제, 결혼과 재산에 몇번이나 팩폭을 당했는지 모른다. 이백 년 전에도 이랬는데 난 뭔 배짱으로 21세기를 낭만주의자로 살고 있었는지. 남는건 쌓인 책과 블로그 뱃지 뿐. 흑. 이 소설, 19세기 초 속세의 가장 중심에 있는 노리스 부인 만큼 찰지고 꾸밈 없이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이 없다. 바로 이 인물에 집중하며 줄거리를, 그러니까 이십대 초반의 애송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읽어갔다. 애들이 몸은 냅두고 말로만 사랑을 합디다.


나보코프의 해석과는 달리 (이래서 비평서만 믿지 말고 원전을 만나야) 크로포드 남매는 완전 악의 화신은 아니다. 적어도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엘렌과 아나톨 쿠라긴 남매와는 매우 다른 남매다. 그들은 좀더 빠른 현실 감각과 제대로 인생을 즐길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에서 구미호처럼 마지막 마무리를 못해 흐트러지고말지만. 그저 헨리 크로포트에게 쓸쓸한 마음이 들....지만 결혼 3년 후를 상상하면 미리 쪽박을 깬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챕터들에서 후루루 주인공 패니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는 저자의 쨍한 목소리가 많이 어색했고 (차라리 우리의 노리스 이모를 불러오지 그랬어요) 좋게 좋게 주인공 중심으로 이야기를 급하게 마무리 하는 통에 열심히 소설을 따라가는 유부만두는 맘이 조금 식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은 매우 재미있고요, 결혼과 돈 타령에 아침드라마 같고 지겨운 인상을 줄 지언정, 그 사이사이 묘사나 인물들 사이의 갈등, 그 텐션, 그 안 보는 척, 배려하는 척, 모르는 척, 하는 온갖 척들을 읽으면서 '아, 나는 독자라서 다행이야' 라는 느낌이 들다가 ... 아 그래, 이백 년 전에도 중요했던 돈과 지위를 나는 왜 아즉도 모르고 이리 허덕대며 살고 있을까, 라는 냉혹한 깨달음을 만나게 됩.... 하지만 이 씁쓸한게 또 좋...다?? 


쨋든, 재밌어요. 노리스 이모가 너무 낯익어서 징그럽게 좋았고, 크로포드 남매는 이라이자 니일 남매와 달리 친해지면 재밌을 사람들이더라고요. 반면 에드워드는 판에 박힌 공무원 스타일이라 (이 시대의 교구 목사는 어쩌면 7급 공무원쯤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끝에 가서야 여자의 성품이나 마음을 알아보는, 그러면서 이야기 듣는 주인공 패니 생각은 전혀 안해주는 (이눔아, 패니의 기분을 읽었어야지) 무덤덤 사나이 입니다.  


짧게 남긴 이야기, 맨체스터 ... 아니 맨스필드 파크 재미있습니다. (설득은 그에 비해 노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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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5-18 10: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설득 읽고나서 오만과 편견하고 너무 비슷한 패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나저나 맨스필드 파크 저 사놨는데 곧 읽어야겠네요. 사실 저는 제인 오스틴을 그동안 재미있게 읽진 않았지만.. 아무튼 맨스필드 파크는 재미있다 하시니 곧 만나야겠어요.

유부만두 2022-05-18 11:24   좋아요 2 | URL
이것도 결국 비슷한 얘기에요. 집안, 돈, 결혼 이야기. 10살 꼬마가 부자 이모네 가서 성장하면서 겪는 이야기라 제인 에어 생각도 나고요, 하지만 뭣보다 장면 장면에서 인물들 속내 계산을 보여주는 게 흥미로워요. 특히 노리스 이모!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모부네 재산이 어디서 어떻게 생기고 불어났나 생각하면 …. 욕이 나옵니다.

레삭매냐 2022-05-18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설득>을 드라마로 보고 나서 읽어서 그런지 재밌게 읽었던 기억입니다. <맨스필드>도 읽어 보고 싶네요.

유부만두 2022-05-23 11:53   좋아요 0 | URL
오스틴 소설은 거의 드라마나 영화로 나와있더라고요. 맨스필드 파크도 영화가 있어서 찾아봤는데 앞부분부터 주인공 성격이 완전히 다르게 설정되어서 5분을 채 못 견디고 포기했어요. ^^
설득 드라마는 어떤지 찾아보고 싶네요.

persona 2022-05-18 15: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리스 부인 하면 해리포터가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2-05-23 11:55   좋아요 1 | URL
아!!! 노리스 이모 이름이 어쩌면 오스틴의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겠네요. 남 참견 잘하고 동생(들)에게 시기를 하는 캐릭터거든요. 완전 똑 같진 않지만요. 흥미로운 점 말씀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

psyche 2022-05-28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장이 바로 내 맘이네 ㅎㅎ 유부만두 말대로 나는 안 썼더니 머리랑 마음에서 사라졌어. ㅜㅜ

유부만두 2022-06-01 17:09   좋아요 0 | URL
몇줄이라도 감상을 남기면 조금은 기억이 길어지겠죠? .... 하지만 예전 기록을 봐도, 으잉? 할 때가 많아요;;;
 

"레이디 러셀이 좋아하실 만한 친구예요. 책을 한 권 주면 아마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읽을거예요."

"맞아요,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메리가 비웃듯이 외쳤다. "가만히 앉아서 완전히 책에 빠져 가지고 다른 사람이 자기한테 말을 걸거나 말거나, 가위를 떨어뜨리거나 말거나 무슨 일이 있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사람이라고요."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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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6
제인 오스틴 지음, 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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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저지른 죄의 몫에 합당한 크기의 벌, 공공연한 치욕의 벌이 따라야 맞겠지만, 알다시피 이것은 사회가 미덕을 위해 마련한 보호벽에 포함되지 않는다. 현세에서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공평한 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꼭 내세의 더 정의로운 처벌을 고대하노라 할 필요는 없으니, 헨리 크로퍼드 같은 분별력 있는 남자라면 적지 않은 울분과 회환의 벌을 스스로 가하고 있을 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 P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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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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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할머니가 만나는 건 가오나시 아니고 죽음의 사신. 사신은 달콤한 빵 케키를 좋아합니다. 당분이 입 안에 퍼질 때 정신이 아득해 집니다. 아… 탄수화물 짱이죠. 그래도 사신은 사신, 자기의 일은 절대 잊지 않습니다. 근데 여기 사신이 여자다요? 두 여자 고수가 생명줄을 두고 기싸움하는 이야기. 빨간 점이 뭘까, 사신의 얼굴이 어디까질까, 생각해보면 이건 역시 귀여운 그림으로 된 아주 무서븐 책. (빵도 먹고 싶어짐) 권장 나이 : 마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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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2-05-11 1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얀 팡도르 빵 먹고 싶어지네요. ㅎㅎㅎ완전 달달하겠어요. 그런데 권장 나이가 마흔이상이라고요? ㅎㅎㅎ

유부만두 2022-05-18 09:08   좋아요 2 | URL
네, 이건 인생의 쓰디쓴...그러다 달콤해지는 순간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절대 제가 마흔, 쉰 넘은 나이라 그런거 아님요. (강하게 도리도리)

mini74 2022-05-11 1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신도 달콤한 빵을 좋아하는군요. ㅎㅎ

유부만두 2022-05-18 09:08   좋아요 1 | URL
달콤한 빵,은 사신도 굴복시킵니다. ㅎㅎ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승원 옮김 / 창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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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버드는 사람에게 시간보다 잔인한 것이 없다는생각이 들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지독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 시간, 그러나 시간은 결코 처벌받는 일이 없다. 그는 프로그램은 쳐다보지도 않고 수없이 많은 고생으로 등껍질처럼 거칠은 노파의 손에만 눈길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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