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 작가의 단편집에서 골라읽었다. '봄날에도 흰곰은 춥다'. 학기가 시작한 지 한달, 아직도 전학을 갈껄, 후회하는 동민이. 괜한 시비를 거는 반장 창식이가 미워죽겠다. 사소하게 말다툼을 하는데 사정을 모르는 담임은 동민이만 혼내고 벌청소를 준다. 늦게 돌아간 집은 반지하, 아빠는 지친 얼굴로 동민이를 맞는다. 엄마가 보고 싶다. 지방 친척네 식당일을 도우러 떠난 엄마.

 

아빠의 실직과 경제적인 이유로 엄마가 지방으로 일하러 가고, 아빠는 병마에 시달리거나 술을 마시는 반지하 집, 그곳에 홀로 있는 아이.....를 또 만났다. 이런. 어디라도 지붕만 있으면 밥먹고 학교 가니까 공부 잘하고 쑥쑥 커서 의사 판사 될거라고 믿고 싶은 ....의사 판사 아닌 어른들. 임금을 떼어먹히고도 분해서 소리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사람들. 동민이 친구 태식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겠지. 동민이 아빠 같은 어른이 되겠지, 퉁퉁한 비곗살 몸에 힘이 없어서 근육통에 시달리며 파스나 붙이고, 밥 대신 라면이나 먹고, 아이에겐 '판사가 되어서 정의를 구현하라'고 하소연 하는 ,고작 그런 흰곰이 되겠지. 새벽 잠결에 부엌에서 소주를 따라마시며 으헉으헉 우는 흰곰을 보고, 그 흰곰의 등짝이 서러워서 동민이도 운다.

 

소설 속 아이의 가난에는 해법이 없다. 아이 주변에 기댈 어른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초등 5학년 열두살 소년에게 하루 오천원 주는 알바가 고작이다. 엄마가 전화라도 자주 해주면 좋을텐데. 아빠랑 셋이 다함께 그 식당이 있다는 지방으로 가면 안될까요. 할머니 병원을 챙겨야하니 그것도 어렵겠구나. 그것도 아니면 창식이네 지하실 방에서 이사만 나갔으면 좋겠는데, 어른들 사정이 따로 있겠지. 돈이 웬수다. 해도 소용없는 말. 이런 처지의 아이가 이 책을 읽으면 괴롭고 속상할테고, 편한 사정의 아이들이 읽으면 불쌍하기라도 할까. 불쌍하면 그 동정은 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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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6-2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안 읽었는데 가슴이 답답해져 ㅜㅜ

라로 2018-06-21 15:4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ㅠㅠ

유부만두 2018-06-23 08:59   좋아요 0 | URL
애들 고생시키는 이야기는 읽기 힘들어요.
 

오늘 아침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에서 '다코네의 우울'과 '엄마' 두 편을 읽었다. 남편의 지인 딸 결혼식에 가야하고, 남편 근무지를 따라 해외로 이사해야 하는 여자들. 남편의 출근 후 혼자 남아 자신의 고민과 긴장을 감당해내야한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물건을, 혹은 커다란 상실을 감당해야 하는데 남편은 그녀들의 애원하는 눈길에서 어떤 적의를, 혹은 악의를 느낀다.

 

커다란 서양식 호텔, 처음 먹는 양식에 긴장해서 예행연습까지 하는 다코네. 자신과 함께 벽 안쪽에서 숨어 걷는 쥐 한마리의 기척마저 느낀다. 지인의 딸 결혼식, 신부 머리에 쓴 흰 장식을 흘끗 쳐다본다. 이미 거쳐온 의식, 이제는 어른의 자리에 앉아서 무사히 치뤄낸 한 편의 사교극.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식당에서 여종업원을 희롱하는 사내의 자유를 보고 신문에서 읽은 어느 여직공, 성추행 당해 미쳐버렸다는 다른 여자의 사연을 생각한다. 그날밤, 다코네는 기차에 치고도 살아 의식은 생생한 악몽에 시달리고 아침까지 그 여운이 지난밤 양식당의 긴장과 함께 몸에 서려있다. 음식은 무엇이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그 음식의 기름기가 찻물 위에 어린다. 소화가 잘 되었을라나.

 

두 명의 도시코, 이제 갓 엄마가 된 이 두 사람은 남편들을 따라 중국에 왔다. 근무지로 정식 이주를 하기 전 항구도시 여관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이 된다. 한 명의 도시코는 얼마전 아기를 폐렴으로 잃고 이웃 도시코의 통통하고 '날카로운 젖냄새' 나는 아가를 부럽고도 아픈 마음으로 쳐다본다. 이후 중국 내지쪽으로 이사한 '아기 잃은' 도시코는 나른하고 편안한 오후, 남편은 정원의 해먹에 누워 새장 안의 금문조를 쳐다보는 옆에서, 자신에게 온 분홍빛 편지를 펼친다. ... 타인의 비극에, 흥분하는 부인의 모습이 섬찟한 남편. 아내는 고집스레 금문조를 풀어줘야 한다고, 방생해야 한다고 하며 닿지 않는 새장쪽으로 손을 뻗는다. 달큰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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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4 정도 읽는 중인데 미리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다. 육아의 아름다움, 보람, 따위는 넣어두고 현실적인 '부모되기'에 대한 이야기. 미국에서 2014년에 출간된 책이니 요즘 책이고 한국 실정과도 꽤 맞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도입부에는 개인들의 경험들을 생생한 목소리 인용으로 실으면서도 1950년 이후 가족생활, 육아법 등에 대한 통계와 기존 학술서등을 언급한다. 인간이 '어린이'를 가족 안에서 낳아 키우는 경험이 지난 100년 이후 얼마나 그 의미가 달라지고 사람을, 부모를 변하게 만들었는지 서술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된지도.

 

부모가 되서 겪는 변화, 부부 사이의 갈등과 개인 (특히 엄마)의 고립, 여러 성장단계에 걸친 아이들의 '미친' 반응들, 과 '바른' 부모의 개입의 정도, 그리고....두둥 사춘기와 그 이후의 아이들과 부모, 그 모든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살아있다면) 이루어낼 부모의 성과에 대한 아웃라인이 목차에 보인다. 이제 2장, 남녀 차이인지 사회 불평등인지 육아와 집안 살림의 격랑 속을 헤쳐나가는 서로 다른 모습들을 읽고 있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과거 (더 젊지만 더 지치고 더 무지했던) 나의 모습이 보인다. 지식도 요령도 없던 나여, 하지만 도와주기 보다는 간섭하고 훈장질로 나를 둘러쌌던 사람들이여.

 

그래도 재미있게 읽고 있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일단 부모라는 굴레를 쓴 다음에는 무를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회에 만연한 '아이들은 소중하고 착한 존재'라는 신화에 집착하지 말아야한다. 십년을 주기로 바뀌는 유행 육아법에 이끌리지 말고, 아이 때문에 빼앗기는 시간, 잠, 에너지를 미리 알고 대처해야한다.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아, 눈물 나)사회에서 격리되엇 자존감을 떨어뜨리지 말고, 도움을 청해야할 때는 손을 내밀어야한다. 아직 고생담 부분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내 주목적은 '사춘기 육아' 부분) 자꾸만 추억에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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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6-2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다 키워놓고 남들은 엠티 네스트네 어쩌네 하는데 나는 늦둥이 아들 놈 때문에 이 책 읽어야 할거 같네.

유부만두 2018-06-23 09:00   좋아요 0 | URL
하하하 동감 십만개 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내 몸도 늙었는데 아직도 학부모 하는 우리!
 

베르뒤랭 씨 부부는 스완 씨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자신들의 의견에 덮어놓고 찬성하지도 않고 은근 귀족과 고관대작들과 친한데다 그걸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다고, 무화과도 포도도 아닌 사람이라고 흉본다. 주석을 따르면 '말린 무화과 열매와 건포도를 지칭하는 표현인데 정체가 의심스러운 사람을 가르킨다'고 한다. 말린 두 과일을 빵에 넣어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정체가 의심스러운 게 아니라 달콤한 사람입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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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6-19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있는 음식의 정체가 궁금하군요

유부만두 2018-06-19 10:02   좋아요 0 | URL
건포도와 말린 무화과, 호두 등이 들어있는 통밀빵이에요. 다이어트 하려고 패스츄리 대신 샀는데....너무 맛있어서 마구 먹어버렸어요. 스완씨 달콤한 사람, 이러면서.
 

일찍 잠에서 깨버려서 억울하기도 하지만 다시 잠들기도 아깝고 힘들어서 책을 읽었다. 아침에는 전날 읽었던 책 보다는 단편을 찾아 읽는편인데 벌써 6월, 벌써 17일, 나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어. 맑은 하늘에 일상이 어색한 기분이 드는 아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같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읽는다.  

 

'마죽'에는 마흔 훌쩍 넘고 낡은 옷 두 벌로 연명하는 말단 '오위'가 나온다. 이름도 없이 그저 빨간 코에 굽은 등으로 묘사되는 이 사내는 온갖 멸시와 조롱에도 바깥으로 분노를 표현하기 보다는 조용히 자책하고 도망가는 편을 택한다. 참다참다 한 마디, '안돼겠구먼, 자네들' 에는 비애와 서글픔이 배어나온다. 다만 그 '박해에 울상짓는 인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을 뿐. 그에게 작은 소망, 혹은 집착이라면 '마죽' (저자의 시대에서도 백여년 전의 미식이라고...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듯)을 실컷 먹는 것. 부유한 집의 사위인 도시히토라는 사내가 그의 소망을 들어주겠다며 술김에 약속하고 오위를 얼러 숲을 지나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숲에선 여우를 만나 자신의 도착을 알리라 호령도 하는 도시히토. 모든 면에서 오위와는 정반대의 인물. 집에 도착해선 마를 마당 가득 쌓아두고 큰 솥 가득 마죽을 쑤게 한다. 큰 은그릇에 넘칠듯 담긴 마죽에 질려버린 오위. 감당할 수가 없는 그의 집착은 사라진다. 그 많은 마죽을 억지로 먹이는 고문이 이어질까, 걱정할 찰나 다시 나타난 어젯밤의 그 여우!

 

'묘한 이야기'에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전령이 나온다. 이번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나이. 지에코라는 젊은 새댁은 비오는 날 한사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겠다며 친정집을 나선다. 그녀의 남편은 1차대전 참전으로 유럽에 나가있는 상태. 지에코가 기차역에 도착해 바라보는 역 창문 밖은 착시인지 바닷가 풍경이 펼쳐진다. 인사를 건네는 낯선 빨간 모자의 사나이 (짐꾼이나 노동자의 복장인듯)가 남편의 상태를 알아오겠다면서 사라진다. 섬뜩한 느낌에 지에코는 그후로 빨간 모자만 보면 소스라치게 되는데. 남편이 귀국 후 더욱 이상한 이야기를 듣곤 남편과 함께 근무지로 이사한다. 그녀의 행동의 배후에 숨겨져있던 계획이 설명되는 마지막 부분이 귀엽기도 했지만 '자네가 조선에 갔을 때'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쎄한 기분이 들었다.

 

식구들은 아직 잠에 빠져있는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는 식구들이 야속하기도 부럽기도 하다. 현실은 여기, 지금은 유월. 자꾸만 마음이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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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6-17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당할 수가 없는 그의 집착은 사라진다..요 문장에 자꾸 시선이 갑니다. 라쇼몬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 책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어요. 다시 읽고 싶네요. 유부만두 님의 글을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유부만두 2018-06-18 09:54   좋아요 0 | URL
오위가 마죽을 기다리고 또 그 순간을 두려워하는 장면은 꽤 섬세해요. 아마 다시 읽으시면 예전 감상을 강하게 느끼실지도 모르겠네요. 조금씩 천천히 떼어 읽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음산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