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고 햇볕도 난다. 반갑네. 오늘은 빨래를 밖에 널 수 있겠어. 모든 일과가 날씨와 빨래로 결정되는 이런 아침. 군대의 아이도 그렇다고 했다. 차라리 비가 오면 나아요, 여기선. 막내는 비가 와도 신나게 쫄딱 젖어서 하교 한다. 우산도 썼다면서? 네, 그런데 비가 옆으로 와요.

 

아침에 단편 읽기는 가뿐하게 하루 시작하기에 좋은데, 아,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해는 났는데, 마음은 발랄하게 말라가는 대신 차분하게 젖은 채로. 조용하게 한줄 한줄 읽었다. '지나가는 밤'의 두 사람은 그 밤을 지나고 함께 아침밥을 먹을까. 콩나물 국을 다시 뎁혀 아침상을 차릴텐데. 먼저 잠을 깬 편은 윤희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서 잠이 든 주희 얼굴을 쳐다보겠지. 아까부터 잠이 깼을 주희는 자는 척, 아직 누워있다. 일정이 하루나 이틀 남았을까, 그 중요한 일은 오늘인가. 너무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하겠지. 그래도 만약에, 그 일이 잘 된다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밤이다. 북향집이라 아침도 저녁같고 조용하다. 그래도 밖에선 새들이 지저귄다.

 

등장인물 이름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나이와 성별, 그리고 처지를 더듬는다. 큰 가방을 들고 그 집에 들어선 윤희는 소녀인줄 알았는데 어른이고, 혼자 인줄 알았는데 다른 이가 함께 있었다. 남인줄 알았던 그 사람은 가족, .... 어린 시절 그 '무용한 시간'을 함께 지내고 채웠던 사람이다. 어른인줄 알았던 사람도 아직 ... 회상 장면, 특히 그 아픈 기다림의 시간의 묘사로 내 마음도 아팠다. 위로 받는 아침이다. 가만히 책을 덮고, 아이를 깨운다. (우리집 아침은 콩나물 국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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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날 신간이 나오면 사기만 하고 읽지 않아서
이번에는 구간으로 묵혀서 읽을까 합니다.

다음 주 독서모임 책인 <빛의 호위>도 읽다
말았는데... 도서관에 가서 빌려다 다시 읽어
야겠네요.

해가 나니 좋은데, 덥네요.

유부만두 2018-07-04 08:01   좋아요 0 | URL
어젠 더웠죠. 오늘도 비슷할 거 같고요.
의외로 빨래는 잘 안말랐어요. 아직 습기가 꽤 있었던지...

전 신간이 나오면 욕심이 나서 사서 읽기 시작하는데
책이 구간이 될 즈음에야 완독하거나 잊거나 하게되요.
후회 하지만 늘... ^^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 제습기 검색은 5년전쯤 부터 여름마다 하는데, 검색으로 최종 후보를 고를 즈음 장마는 끝났다. 새 기계를 들이는 일은 꽤 귀찮고 부담스럽다. 제습기를 들이기 전에 진공청소기를 바꿔야 하고, 다리미도 스팀형으로, 가능하다면 무선으로 마련하고 싶은....마음만 몇년째니.

 

비 내리는 월요일,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꿈'을 읽었다. 찜찜한 소설. 월요일 오전에는 특히나 피했어야 하는 소설. 하루키의 액기스를 추출한 것 같은 소설.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이 드는 화가 '나'는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져있다. 어느날, 돈이 들어온 날, 갑자기 창작의욕이 솟아올라 (그거슨 돈의 힘) 모델 에이전시에서 모델을 섭외하고 그녀의 나신을 그리기 시작한다. 못난 얼굴에 비해 풍성한 몸매, 특히 가슴. 어쩐지 그녀 안의 생동감, 혹은 폭력성에 무엇보다 풍성한 가슴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고 그림은 진척이 잘 되지 않는다. 주도권을 놓친 그는 전전긍긍. 그중 계속 되는 선잠 깨기와 경계가 불분명한, 하지만 선명하고 기괴한 꿈. 고갱의 화집을 뒤적이고, 어린시절 불꽃놀이를 꿈꾸고, 태반무덤을 언급한 그녀의 목을 조르는 꿈을 꾼다. 방에 깔린 자줏빛 카펫트를 들어올려 뒤집어 보기가 왠지 두려운 기분이 든다. 꿈 속에서 그녀를 죽인 다음, 작업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그녀를 찾아 에이전시로, 숙소로 가는 화가. 어쩐지 이 모든 골목과 상황이 낯설지 않다. 그녀는 아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 속에도 굵은 비가 내리는 것만 같다. 라쇼몬 단편집은 장마철에 제격. 눅눅하고 찜찜하다.

 

화가의 집/작업실 근처의 돌 무더기가 태반무덤, 이라고 모델이 말했다. 어떻게 아냐고 묻자 '그렇게 써있다'고 당연한듯 무심히 대답하는 그녀. 태반. 태아의 뱃속 지지대. 그녀는 아이를 낳은 적이 있었을까. 여자의 몸 자체가 태반인 건가. 아이를 뽑아내고 남은 육신은 돌 아래 눕는가.

 

왕가의 아기씨들이 태어난 후 만든 태반 항아리 특별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왕실의 특별한 태반은 따로 항아리에 곱게 모시고 태실이라 칭한 귀한 땅에 모셔두었다지. 사방으로 뻗는 오늘의 연상작용. 빨래가 쌓인다.

 

http://www.gogung.go.kr/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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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8-07-0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반항아리라는 것이 있었군요. 왠지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할거같은 궁금해디는 전시입니다

유부만두 2018-07-02 22:39   좋아요 0 | URL
저도요. 챙겨 가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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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7-0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계속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한땀 한땀...

라로 2018-07-0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 님께 땡투하고 주문한 책도 보이네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많이 소개해 주세요.

유부만두 2018-07-02 09:32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한 책들 얘기 계속 올릴게요. ^^
싫어한 책들 얘기도요.
 

<문학>

섬의 애슐리, 정세랑, 한예롤 그림, 미메시스, 2018

문맹, 아고타 크리스토프/백수린 역, 한겨례출판, 2018

살육에 이르는 병, 아비코 다케마루/권일영 역, 검은숲, 2016

야간비행, 생텍쥐페리/용경식 역, 문학동네, 2018

Vol de nuit, A. de Sanit-Exupery, Gaillimard, 1972

 

<청소년 어린이>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햇살과 나무꾼 역, 프레데릭 백 그림, 두레아이들, 2002

깜박깜박 도깨비, 귄문희, 사계절, 2014

여우는 거짓말 안 해!, 울리히 후프/이옥용 역, 하이케 드레벨로브 그림, 주니어RHK, 2015

날고양이들, 어슐러 르귄/김정아 역, 쉰들러 그림, 봄나무, 2009

투명인간이 된 스탠리, 제프 브라운/지혜연 역, 양정아 그림, 시공주니어, 2002

창비어린이 2018 여름

헌터걸, 김혜정, 윤정주 그림, 사계절, 2018

 

<만화>

우연한 산보, 타니구치 지로, 구스미 마사유키(원작), 미우, 2012

다이어터 1, 네온비, 캐러맬 그림, 중앙북스, 2011

다이어터 2, 네온비, 캐러맬 그림, 중앙북스, 2011

다이어터 3, 네온비, 캐러맬 그림, 중앙북스, 2012

 

<비문학>

마녀체력, 이영미, 남해의봄날, 2018

Why Information Grows, Cesar hidalgo, Basic Books, 2017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민음사, 2018

 

<영화>

몬스터 콜

안녕 나의 소울 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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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7-01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몬스터 콜 영화 어때? 책은 정말 좋았는데

유부만두 2018-07-01 12:09   좋아요 0 | URL
영화도 좋아요!!!!!!! 추천!
 

롯데의~ 아니, 삼성의 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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