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정희진 작가의 독서책 한 권, 그 단 한 권을 읽고 작가의 '투박함' 혹은 공격성, 아니면 기존 질서, 정전에 대한 무시에 놀란 적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 이번 책은 다시 독서, 책읽기와 신념에 대한 글이라 오랜만에 마음을 다잡고 읽었는데 (그러니까, 정희진 작가를 싫어하지 혹은 그에 - 나 나름대로의 기준에 맞추어 -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읽으면서 계속 나 따위가 감히, 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 책이 다루는 스물일곱 권, 그 중 내가 읽은 단 두 권에 대한 내용 보다도 정희진의 문장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특히 철학적 개념을 짚어내며 짧고 곧은 문장으로 논지를 펼 때, 한 단어 한 단어, 괄호 안의 영어나 한자어와 함께 부옇던 '어떤 생각'을 단단하게 붙잡아 주며 내 앞에 섰다. 곧고 단단하게 읽고 고민하는 그에 비해 나의 책읽기는 얼마나 허랑방탕한가. 하지만 가끔, 혹은 자주 정희진 작가의 '치열한' 글을 만나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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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속성, 심지어 동사(‘권력하다)로까지 사유하는 것이 권력에 대한 새로운 사유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능력, 세상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 그리고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집단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권리다. 많은 여성이 갖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 그렇기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의 권력이다.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가 (많은 남성이 이 용어에 강렬한 반감을 갖는데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말이 여성들의 심금을 크게 울리는 이유는, 그것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내가 트위터상에서 로마사 강의를 들을 때 느끼는 감정과 매우 유사하다. 이 어떤 느낌인지를 정확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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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극이 시작되는 시점은 허기가 우리를 압도할 때, 허기가 언어의 체계화 역량을 초과할 때다. 언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몸에 의지하게 되고, 우리가 느끼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몸의 행동과 강박과 충동을 허락하게 된다."  


"여자들이 세계 내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던 때에, 남자들이 주도하며 동시에 전통적 권력 구조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던(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문화가 여자들에게 반대의 메시지를 날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자들이 정신적으로 더 큰 존재가 되자, 육체적으로는 더 작아지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한때 남자들이 장악했던 영역(각급 학교, 스포츠, 직장, 침실)에서 여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여성을 어린애로 취급하고 수동적이고 연약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묘사하는 여성성의 이미지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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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인간의 말과 글을 (독학으로) 배워서 편지를 남겼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은 이 여우8은 철자법이 매우 서툴지만 지적 능력과 공감 능력은 어느 인간 못지 않다. 그가 비관적인 미래를 바꿔보려 인간에게 협력을 구하며 애쓰는 것이 안타깝다. 그에 더해 책이 기대보다 재미가 없어서 더 안타까웠다. (어쩜 조지 손더스의 전작 '바르도의 링컨' 만큼이나 재미가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동물의 목소리, 더 나아가 동물의 글을 '그대로' 전하는 소설은 이미 만난 적이 있다. (소세키의 고양이는 글을 쓰지는 않았고 이야기만 전했지, 아마?) 직접 타자를 쓰느라, 혹은 글자를 쓰느라 (해부학적 어려움을 안고) 고생하는 개를 두 마리 안다. 온다 리쿠의 '충고'의 개는 주인에게 닥친 위험을 경고하고 장자자/메시의 개 리트리버는 타자기를 사용해서 오랜 시간 주인과의 인연, 인간의 생활사를 관찰하고 있다. 



자연의 친근하고 순수한 시선으로 인간의 파괴적 행동을 묘사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여우8의 편지는 의미가 크다. 하지만 -해요, 투의 어느 정도 귀엽고 (하지만 애써 안 귀여우려 쿨하게 군다) 망가진 철자로 수십 쪽의 이야기를 따라가기는 지치는 일이다. 나 역시 멍청한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저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의 개이고'에 관심이 생기는 분들께, 재미 없어요. 읽지 말아요. 저도 이 책 추천한 친구랑 싸웠어요.) 


그나저나 동물 목소리 (여우8 보다 덜 똘똘한) -새오체는 영화 <검은 사제들>의 돼지의 편지글 패러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게 다 인간 편의주의고 인간 중심이고 인간 나쁘고 못됐고.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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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26 15: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추천한 친구랑 싸웠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6-26 18:55   좋아요 3 | URL
친구 추천을 믿고 꾸역꾸역 완독했는데, 정작 친구는 책 앞부분만 읽고 재미있다고 했던 거였어요. ㅎㅎㅎ

청아 2021-06-26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떤 내용으로 싸우셨을지 궁금해오ㅋㅋㅋㅋㅋㅋ저 <아무튼 스릴러>에서 읽고 다짜고짜<나와 춤을> 사서 ‘충고‘읽었어요~♡ 짧지만 넘넘 귀엽고 마음아팠어요! 흑흑

유부만두 2021-06-26 18:55   좋아요 2 | URL
책이 재미가 심하게 읍드라고요. ㅋㅋㅋㅋ ‘충고‘는 은근 슬프고 번역체가 귀여웠어요.

붕붕툐툐 2021-06-26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싸움을 부르는 책이군요!ㅎㅎㅎ
기대보다 재미가 없어서 안타까운 거 넘 웃겨요!ㅎㅎ

유부만두 2021-06-27 07:47   좋아요 0 | URL
붕붕툐툐님께 웃음을 드렸다니 기쁩니다. 네. 전 그걸로 오케이에요. ^^
 

전자책으로 읽었다. 집에만 있는 주제에 (난 명랑한 은둔자니까 - 하지만 혼자 못 있는다는 게 함정), 바쁜 척하면서 핸드폰으로 짬짬이...는 아니고 어제부터 줄창 읽었다. 노안의 가속화. 나도 안경을 쓰다 벗다 하면서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종이책으로 살걸 그랬지. 


여성은 왜 원하는가, 라고 부제처럼 적혀있는데, 책은 저자의 이십대 초 거식증 경험부터 이야기한다. 왜 굶는가, 굶으며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상처 주고 싶었나, 를 하나씩 이야기하는데 말/글솜씨가 유려해서 후루루룩 이야기가 전개된다. 쉬운 해답이나 이유, 혹은 핑계나 악역을 찾는 걸 경계한다. 강박적인 쇼핑, 체중조절, 도벽, (나쁜) 연애에 빠지는 습관 등은 그 자체가 물질주의/가부장제 사회/문화가 여성에게 강요한 뒤틀리고 대체된 욕구로 인해서 생겼다. 그 욕구는 '허기'에서 오는데 이 인과 관계를 인정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이 치료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어째 익숙한 전개다) 이 결론을 말하기 전에 무수한, 적나라한 여성들의 케이스들이 묘사된다. 처절하고 민망하고 측은하고 슬퍼지기까지 한다. 그 많은 얼굴들에 어쩌면 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하야, 제대로 긍정하는 '나의' 주체적 욕구는, 허기를 채우는 만족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케바케라고 한다. 결국엔 사랑인데 그것 역시 완성이나 종결이 아니다. 긴 과정으로 보아야하고 순간에 충실하는 것이 좋다는 ..... 캐럴라인 냅의 뜨겁고 날카로운 챕터들이 따숩게 마무리 된다. 


911 테러를 겪으며 쓴다는 언급이 증명하듯 벌써 이십 년 전 글이다. 중간에 얼핏 '제3세계' 여성의 목숨 걸린 고난에 자신들의 '투정'을 비춰보는 백인여성 이야기가 들어있기도 하고, 페미니즘 연구의 변이와 위기, 한계를 짚어가는 것은 좋지만 결국 너무 나이브하지 않나 싶었다. 저자의 아버지가 정신과 전문의라서 더 그럴까, 이 책은 꽤 정석적인 문제제기-탐구-해법-희망 의 공식을 착착 밟는다. 내용 하나 하나 디테일은 펄떡거리지만 전체적으론 얌전한 느낌이 드는 건 저자가 생을 정리할 시기의 글이라 그런가, 생각했다. 


냅의 책은 '드링킹'을 사두었다가 - 그 시절, 나도 꽤 드링킹 했었... - 괜히 찔려서 안 읽고, 이번이 처음 책이다. 솔직한 이야기들이 넘치고, 그 하나 하나가 아프게 와 닿았다. 이렇게 여성들의 욕구들/사연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작가는 (요즘 범람하는 일기 엣세이들의 징징대는 솔직함과도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리 잘 엮어서 (유우머 감각도 좋다. 번역이 잘 살린 듯) 큰 주제 아래로 묶어 큰 울림을 만들어 낼 작가는 흔치 않다. 낸 캐럴라인 냅, 역시 대단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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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6-25 2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반드시 읽어야겠어요. 유부만두님의 정리도 너무 깔끔하고 읽기 좋지만 캐럴라인 냅의 문장을 직접 보고 싶네요. 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 명랑한 은둔자가 자주 눈에 들어와서 읽어볼까 하고 있었는데, 이 책도 ‘읽고 싶어요!!!!!‘

유부만두 2021-06-26 10:28   좋아요 1 | URL
단발님의 감상이 궁금해요.
여기 적진 않았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한 부분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자는 계속해서 ‘단정‘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고요, 능숙한 문장 속에 많은 여성들의 고통이 담겨있어서 즐거운 독서이지만 또 아픈 독서이기도 했어요.

청아 2021-06-25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또 한 작가 알아가는군요! 저도 찜할래요. 음...제 얘기도 분명 있을것 같아요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6-26 10:29   좋아요 1 | URL
있을거에요. 여성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고통과 허기, 강박, 욕구 이야기에요.
그런데 많은 경우 속으로만 끌어안고 있을 것 같아요.

희선 2021-06-26 0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명랑한 은둔자라는 말을 보니 혼자 있어도 명랑하면 좀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어두운 은둔자네요 혼자 있을 때는 그렇게 어둡지도 밝지도 않던가 싶기도 합니다 얼마전에 알았는데 이 작가가 쌍둥이였다고 하더군요


희선

유부만두 2021-06-26 10:30   좋아요 1 | URL
네. 그 쌍둥이 언니의 출산 이야기도 실려있어요. 오빠도 있었다는데 삼남매 중 자신이 유독 어머니와 애착 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썼더군요.

저도....실은... 명랑은 못하고, 그냥 은둔자 쪽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