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스티븐스 씨, 당신이 대체 어떤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해지네요."

"그냥 책이오, 켄턴 양."

"그건 알아요, 스티븐스 씨, 과연 어떤 책이냐, 그게 제 관심사죠."

고개를 쳐든 나는 캔턴 양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얼른 책을 덮어 품에 끌어안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봐요, 캔턴 양." 내가 말했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책을 가지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스티븐스 씨? 난 뭔가 난잡한 내용이 아닐까 의심스럽군요."

"캔턴 양, 그게 말이나 됩니까? 당신 표현대로 '난잡한' 것이 어찌 우리 나리 서가에 꽂혀 있을 수 있겠소?"

"제가 비록 베짱이 없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학구적인 책 중에도 지극히 난잡한 대목들이 담긴 게 많다고 들었어요. 자, 스티븐스 씨, 뭘 읽고 계시는지 한번 보게 해 주세요."

"캔턴 양, 부탁이니 날 혼자 내버려 둬요. 모처럼 잠시 여가를 즐기는 사람을 이렇게 쫓아다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204)

 

실랑이 끝, 켄턴 양은 책을 빼앗는데....

 

 

그녀가 손을 내밀더니 내 손아귀에서 가만가만 책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나는 외면하고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지만 그녀가 워낙 바짝 붙어 있어, 고개를 다소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비튼 후에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캔턴 양은 아주 천천히, 내 손가락을 한 번에 하나씩 풀어 내며 책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이 내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그동안에도 나는 어렵사리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스티븐스 씨, 별 창피할 것도 없는 책이잖아요. 감상적인 연애소설일 뿐인데."

(205-206)

 

하, 이 달콤한 장면에서 당황한 스티븐스 씨의 얼굴이 또 그의 코앞에서 장난하는 캔턴 양의 장미꽃 향수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티븐스 씨의 변명. 연애 소설은 훌륭한 어휘 구사력 습득을 위하여 읽는 것일 뿐이라고. 연애소설의 황당하고 감상적인 줄거리는 시간낭비처럼 느껴지지만, 자신은 원칙을 세워두고 읽는다는 그. 아,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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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4-0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부분에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서 죽는 줄 정도는 아니지만 답답했다는요~~~ㅋㅎㅎㅎㅎ 가즈오 이시구로 넘 얄미웠어요~~ㅋㅎㅎㅎ 독자를 갖고 놀아~~~~^^;;;

유부만두 2015-04-08 17:27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막 변명하고 부끄러워하는 스티븐스 씨가 상상되서 우습기도 했고요.
 

파이 소가 양념에 재워지는 동안 거기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는 것은 정말 흐뭇했다. 냄새는 기억 속의 소리와 향을 전하며 과거의 어떤 시간을 떠오르게 하는 특성을 지녔다. 티타는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며 그 각별한 냄새나 향과 함께 자신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걸 좋아했다 (16)

고개를 돌리자 페드로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티타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 넣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티타는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페드로의 눈길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24)

어머니 옆에서는 가차 없이 미리 정해진 일을 해야만 했다. 질문의 여지도 없었다. [...] 매일 매일, 해마다 그렇게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그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어머니의 명령에서 자유로워진 손을 보며 티타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린 적이 한번도 업성ㅆ다. 이제 그녀의 손은 뭐든지 할 수 있었고, 무엇을 만들건 상관없었다. 손이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그 손이 자신을 멀리, 가능한 한 아주 멀리 데려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티타는 안뜰로 난 창문에 다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117-118)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124)

티타는 인형의 섬세한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어렸을 때 소원을 비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 생각했다. 그때는 불가능이라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바랄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금기시되는 것과 죄악시되는 것, 정숙하지 않은 것은 바랄 수 없다. (184)

나는 나예요! 원하는 대로 자기 삶을 살 권리를 가진 인간이란 말이에요. 제발 날 좀 내버려 둬요!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예요! 나는 어머니를 증오해요! 항상 증오해왔다고요!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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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설명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죽순 1킬로그램을 9천원에 샀다. 우선은 닭볶음탕 - 난 이 근본 없는 '볶음탕'이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볶음이면 볶음이고 탕이면 탕이지 볶음탕은 어느나라의 요리법이란 말인가. 닭도리탕의 '도리'라는 말이 일본어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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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학생들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뭐가 다르냐고 질문해오면 저는 이렇게 답하고는 합니다. '복잡한데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리얼리즘은 의사의 발화, 즉 진단하고 치료하고 예감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모더니즘은 환자의 발화, 즉 찡그린 표정이고 새어나오는 신음이며 기괴한 몸부림이다.' __ 신형철

 

 

물론 70~80년대 작가들에 비해서 90년대 작가들의 약점은 있어요. 이전 세대는 현실과 체험의 영역이 컸던 반면, 90년대 작가들의 경우에는 뒤에 텍스트의 그림자가 어른거려요. 그걸 금방 간파하겠더라구요. '아, 이 작가는 무슨 책을 읽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로 오면서는 형식적으로 한층 세련되어갑니다. 내가 어릴 때 쑥스럽다고 여겼던 것처럼, 이들은 '쿨하다'고 해야 할까? 징징대지 않고, 표를 안 내고, 쓱 눙치면서, 돌려서 다른 이야기처럼 하는... [...] 뿐만 아니라 옛날의 서사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접근해 들어가기도 하더군요. 나는 그냥 애들이 놀고 있는가보다 그랬지. 요새 작가들은 딴짓하고 딴 데 가서 놀고 있겠지 그랬는데, 나름대로 지근거리에서 놀고 있었던 거요. __ 황석영

 

 

태도라는 것은 작가로서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태도이기도 할텐데, 그런 일말의 책임을 좀 가져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태도와 관점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도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관점이 뛰어나면 태도가 저절로 뒤따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관점이 먼저였어요. 그리고 태도는 늘 뒤늦게 허덕거리며 관점을 쫓아왔었죠. <객지>를 발표했을 때 저는 정작 <객지>에서 나오는 그런 세계인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어요. 뒤늦게 '내가 쓴 것이 이런 것이었어?' 하면서 '땜빵'하느라고 몇년이 걸렸지요. __ 황석영

 

 

 

 

황석영 작가께서 집필하실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꼭 읽고 싶다. 작가님 건강 지키시게 적금 들어서 황 작가님께 보약 몇 첩 지어드리고 싶은 심정. 이 대담은 읽고 나면 울컥, 하며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이 막 샘솟아...서 책을 더 지르게 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래도 두 번 읽을 만큼 특 A+ 급 한우랑 결줄 수 있는 특집임. (고기 사랑, 문학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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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의] 원작자인 이사야마 하지메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거인의 모티브는 어디서 온 것인가요? 라그나뢰크며 오딘이며 북유럽의 거인 신화를 머릿속에 그렸을 기자에게 이사야마는 전혀 엉뚱한 현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전에 넷카페에서 심야 알바를 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 상대했던 취객들을 모티프로 삼은 겁니다. 정말 무서웠어요. 같은 인간인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무서웠습니다. 거인은 다름 아닌 왕(손님), 취객의 갑질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작가의 눈 코너는 지난 주부터 입소문을 탔던 그 글, 박민규 작가의 <진격의 갑질>이 힘차게 열었다. 아, 그렇구나. 괜한 데다가 정열, 분노를 퍼붓고 멍청이처럼 굴지 말아야지. 벽을 쌓아올릴 때 구경만 했던 착한 아이였던 내가 진격의 거인 앞에선 도망가기 바쁘구나. 이제라도 적어도 반성은 해야될텐데. 윤이형 작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 더 공감을 하는걸까..) '그물'의 의미를 조근조근 말해준다. 편가르기에 혹, 하고 넘어가는 단순한 나란 인간.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책을 덮어버리는 우매한 짓을 저지르지 말자고 하는 최민우 작가의 글까지. 작가의 눈, 코너 정말 좋다. 불편하게 있으라고, 생각 좀 하고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겠지. 그들이 더 섬세하고 민감하게 알아채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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