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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그들은 어떻게든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 그 열망을 충족시키려면 다른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거고."
"자기를 사랑하능 사람까지도 말이에요?"
"물론이지."
"그렇다면 단순한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 아닐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래리가 죽은 옛날 언어를 배워서 뭐하려고 그럴까요?"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지식 그 자체를 갈망하기도 해. 그건 멸시당해야 하는 욕망은 아니야."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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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 앞에 다다르자 초콜릿빵이 먹고 싶지 않느냐고 뤼크가 물었다. [...] 우리 둘은 초콜릿빵과 커피 에클레르를 단번에 먹어 치웠다. -- 마크 레비 <그림자 도둑>

 

 

아침 7시에 문을 여는 그 빵 가게에서는 갓 구운 빵을 살 수 있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편 - 이 사람은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나는 이곳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빵을 한 개 먹는다. [...] 빵이 담긴 봉투를 들고 돌아갈 대는 기운이 넘친다.

                                            --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남자와 그의 브뢰첸.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그림이란 말인가! 물론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어쩐지 저 남자에 비해 너무 어려 보이지 않아? 언제고 브뢰첸이 나이를 먹어 신선함을 잃어버리고, 그때 마침 저 남자가 예쁜 크루아상을 만나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가여운 브뢰첸에게는 관계의 빵 부스러기만 남겠지..." 그러나 우리의 신뢰는 그들의 구설보다 강했다.

                                           -- 호어스트 에버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새 잠옷, 모직 양말 두 켤레, 위에 초콜릿을 끼얹은 렙쿠흔 한 봉지, 남태평양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책 한 권, 스케치북,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고급 색연필 한 상자가. 마르틴은 너무나 감격해서 부모님에게 입을 맞추었다.

                                         -- 에리히 캐스트너 <하늘을 나는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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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블랙홀

                        안현미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으며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잠시 사는 것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인용해서 살고 있는 것만같은

불혹, 블랙홀

 

곤드레나물밥을 먹는다

꼭꼭 씹어 먹는다

 

곤드레나물밥을 먹는 일만으로도

나는 잠시 너를 사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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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으로 느릿느릿 더디기만 했다. 시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잖아, 하고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생각했다. 가축들이 그러하듯, 시간 또한 인간의 엄격한 감독 없이는 꿈쩍도 않는다. 시간은 말이나 양처럼 어른의 호령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웅덩이 속에서 교착 상태에 있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갇혀 있는 것만큼 힘겹고 초조하고 뻣속까지 피로감에 찌들게 하는 일은 없다. (100)

 

그들은 우리에게 발치에서 날아오르는 새 같은 공포를 일으켰으나 아직은 골짜기 저편, 바리케이드 뒤로 엽총을 그러안고 우리를 거부하는 어른들, 외부의 비열한 어른들보다는 우리에게 더 가까웠다. 밤이 와도 누구 하나 우리를 부르러 죽음의 거리에서 달려 나오는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참으로 오랫동안 흙을 계속 밟아 다졌다. (115)

 

 

"알아? 너 같은 놈은 어릴 때 비틀어 죽이는 편이 나아. 칠푼이는 어릴 때 해치워야 돼. 우린 농사꾼이야, 나쁜 싹은 애당초 잡아 뽑아버려." (228)

 

 

나는 갇혀 있던 막다른 구렁텅이에서 밖으로 추방당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도 나는 여전히 갇혀 있을 테지. 끝까지 탈출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나를 짓이기고 목을 조르기 위한 단단한 손가락, 우람한 팔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 (231)

 

 

그러나 나는 흉포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달아나 밤의 숲을 내달려 나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맨 먼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미친듯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불현듯 바람이 일고, 그것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온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를 실어 왔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몸을 일으켜 한층 캄캄한 나뭇가지 사이, 한층 캄캄한 풀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23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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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중국인 지주네 집에 더부살이를 하는 중이다. 외출하고 돌아온 지주에게서 여인은 아들의 처형 장면 소식을 들었다. 지주는 자기의 아이까지 밴 여인과의 관계에 혐오를 느끼며 여인을 내쫓아 버린다. 지주가 본 공산주의자 처형 장면은 이 아주 공들여 묘사되고 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본 지주, 그리고 그 묘사를 읽는 나, 를 생각하다가 수전 손택을 떠올렸다.

 

친구와 교외에 나갔다가 공산당을 죽인다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뒤를 따라가서 들여다보니 벌써 십여 명의 공산당을 죽이고 꼭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는 좀더 빨리 왔더라면 하고 후회하면서 사람들의 틈을 삐개고 들어갔다. 마침 경비대에게 끌리어 한가운데로 나앉은 공산당은 봉식이가 아니었느냐!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몇 번이나 눈을 비빈 후에 보았으나 똑똑한 봉식이었다. 전보다 얼굴이 검어지고 거칠게 보이나마 봉식이었다. 그는 기침을 칵 하며 봉식이가 들으리만큼 욕을 하였다. 그리고 행여 봉식이가 돈을 벌어가지고 어미를 찾아오면 자기의 생색도 나고 다소 생각함이 있으리라고 하였던 것이 절망이 되었다. 

누런 군복을 입은 경비대원 한 사람은 시퍼런 칼날에 물을 드르르 부었다. 그러니 물방울이 진주같이 흐른 후에 칼날은 무서우리만큼 빛났다. 경비대원은 칼날을 들여다보며 슴벅 웃는다. 그리고 봉식이를 바라보았다. 봉식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도 기운 있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입 모습에는 비웃음을 가득히 띠고 있다. 팡둥은 그 웃음이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때인가 공산당에게 위협을 당하던 그 순간을 얼핏 연상하며 봉식이가 확실히 공산당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자 칼날이 번쩍할 때 봉식이는 소리를 버럭 지른다. 어느새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선혈이 솨 하고 공중으로 뻗칠 때 사람들은 냉수를 잔등에 느기며 흠칫 물러섰다. (334-335)

 

책을 읽다가 끔찍한 처형 장면에 책장을 덮고, 한참을 찜찜해 한 적은 역시 최근의 위화의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중국의 그 유명한 처벌을 내리고 있었다. 아, 기억만 떠올려도 손가락이 저릿하게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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