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 시기에는 음식재료가 증가하였다. 채소의 종류가 특히 증가했다. [...] 시금치 '파채'는 원래는 '파릉채'라고 했다. <신당서> '서역전'에 "네팔은 정관21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시금치를 바쳤다"라고 했다. (53-4)
중국 전통 악기의 연주를 들으면서 술과 차는 계속 마시며 손님들과 큰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중국에선 식사중에 시끄럽게 떠들어야 한다. 식사중에 너무 시끄럽다고 중국 사람이 예절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있는데 이건 중국인의 풍속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중국인은 시간이 꽤 소요되는 중요한 식사 중에는 시끌벅적해야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106)
뜨겁고 익힌 음식을 먹는 것도 중국 음식 습속의 하나이다. 뜨거운 음식은 중국 요리의 관건이자 영혼이다. <수원식단>에서 "요리의 맛은 신선한 재료를 모두 솥에서 조리하고 중요한 때에 갑자기 멈추었을 때 생겨난다. 너무 오랫동안 천천히 익히면 곰팡이가 핀 옷처럼 비록 비단옷이라도 어두컴컴해 곰팡이가 잘 보이지 않지만 모양이 흉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147)
'징갱취제'라는 말은 "뜨거운 국에 덴 사람은 냉채도 불어서 먹는다"는 뜻이다. (148)
주나라의 개국 원로인 강상은 태공망으로 80에 이르러서야 문왕 희창의 중용을 받았다. 그는 문왕을 보좌하였고 남북으로 정벌을 나섰으며 폭군 주왕의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는 주나라에 중용되기 전에 상당히 오랫동안 요리ㅏ로 일했다. 그는 또 은나라의 수도 조가에서 백정이었고, 황하의 맹진에서 밥과 반찬을 팔았다. 강태공은 고대 중국의 두번째 재상 요리사였다. (188)
삼국 시대의 만두는 북방 사람들이 즑 먹는 오늘날의 소가 없는 만두와는 달랐다. 당시의 만두는 고기로 소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사람 머리만큼이나 컸다. 제갈량 이후의 위.진 시대 사람들이 만든 만두는 모두 소가 있었고 삼촌(三春)때 만들었다고 한다. [...]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완수하고 회군할 때가 삼촌이었다. 혼돈(餛飩)과 만두는 다르다. 혼돈의 속에는 거의 고기를 넣지만, 만두는 고기 외에 채소도 넣는다. 만두가 혼돈보다 크고, 혼돈은 동전 모양이고, 만두는 조개나 초승달 모양이다. 껍질의 모양도 혼돈은 네모 혹은 삼각형 등 다양하지만 만두는 대부분 원형이다. 혼돈은 고기국물에 삶지만 만두는 맹물을 끓여 삶는다. (216)
'초근'은 당나라 때 술안주와 밥반찬이었다. 이 음식은 보통의 미나리를 발효시킨 후에 조미료를 넣고 요리한 탕이다. 이 음식은 본래 그렇게 진귀한 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맛이 뛰어나 당태종 이세민이 간언으로 유명한 위징에게 하사한 후에 역사책에 실리면서 유명해졌다. (224)
'호마병'은 서역의 음식으로 한나라 때 중국에 전래되었다. 한영제가 이 호병을 아주 좋아하여 장안 사람들이 모두 이 호병을 먹었다고 한다. [...] 당나라 때 백거이는 16세 때 장안에 있었고, 장안에서 여러해 관리로 있었으며, 장안에서 늘 '호마병'을 먹었고 만들줄도 알았을 것이므로 그가 시에서 말한 호마병은 사실과 샅다. 또한 "호마병 속에 소를 넣었다"는 말도 맞다. [...] 호마병은 외국과의 음식 문화 교류의 산 증거로 한대부터 당대까지 사람들에게 환영받았고, 오늘날에도 '소병'이라는 음식으로 남아있다. 보통 중국인은 아침식사로 소 없는 만두나 국수 또는 속에 계란 부침이나 기름에 튀긴 '유조'를 넣은 소병을 콩국이나 우유와 함께 먹는다. (228-9)
삼립호빵은 한국사람들이 겨울철에 즐겨 먹는 음식으로 발효 찐빵 안에 소를 넣는다. 호빵이 원 이름이나 상표인 삼립이 입말로 붙어 네음절 전체가 음식을 통칭하기도 한다. 주로 단팥소를 넣은 '호빵'이 많고, 양념한 채소와 고기 소를 넣어 '채소 호빵'이라고 부른 만두 형 호빵도 인기다. 찜기에 넣어 익혀 먹는 게 보통이나 21세기에는 물에 뭍혀 전자레인지에 거꾸로 넣어 30초, 바로 세워 30초 돌려 먹는 식이 유행이 되었다. 호빵마다 붙어있는 종이는 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