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게으름 - 게으름에서 벗어나 나를 찾는 10가지 열쇠, 개정판
문요한 지음 / 더난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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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으르다. 그래서 이런 확실한 제목의 책을 골라 읽었다. 게으름을 떨칠 수 있길 바라면서, 용기를 좀 얻을까 싶어서.  

내가 하는 짓꺼리들과 갖다 대는 핑계들이 모두 다 게으름이 만들어 낸 것들이었고, 더 놓아두었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단다. 그리고, 성과에 급급해서 살아온 내 습관이 그 원인이기도 하단다. 우선 내가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믿고,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단다.  

책은 쉽게 잘 읽히고, 설득력도 있다. 그런데, 40에 접어든 게으른 아줌마가 실천할 수 있는 게으름 떨치기 방법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집안을 깨끗하고 예쁘게 꾸미기, 가족에게 영양가 풍부한 식사 준비하기, 뿐은 아닐텐데. 아이 전교 1등 만들기, 뭐 이런것도 아닐테고. 

요즘 우울하다고 칭얼거렸었는데, 실은 "나 게을러요" 라고 광고를 하고 다녔던 꼴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진짜 우울해 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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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7-30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으르면 좀 어때서요. 게을다고 아니고 여유로움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유부만두 2010-07-30 18:0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자가 꼬집은 말 중에 하나가, 여유로움과 게으름은 다르다는 점이야. ...나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어. ㅜ ㅜ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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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으로 묶여 나온 <강남몽>을 먼저 만났다. 복사된 대학교 교재같이 생긴 책을 처음 보기도 했지만, 남보다 먼저 (이른바 '어얼리 어댑터' 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미 인터넷 연재가 된 소설이기는 하다) 읽는다는 것에 흥분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읽어냈다. 광복전 만주에서부터 1995년 6월 강남의 백화점 지하실까지, 한숨에 내리 달려가면서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가, 실은 소설이나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강남 싸모님 박선녀는 이름 마냥 하늘거리면서 시골 식당집에서 대그룹 회장님 부인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고, 김회장님은 광복과 동란, 쿠테타와 군정들을 살아내면서 돈과 힘의 냄새를 기막히게 좇았다. 양태는 깡으로 서울에서 삼대 주먹 중 하나가 되고, 심남수는 젊은 시절의 씁슬한 강남 땅장사의 업을 덮고 교수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정아양은 이 모든 것들이 욕심과 허영으로 무너져 내린 백화점 지하실에서 아름답게 '희망'으로 피어난다.  

작위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이 아쉽긴 하지만, 이 책은 1971년광주 대단지 사건을, 제주 4.3 사건을, 중간중간 나오는 현대사의 이름들은 한글자 차이로 실존 인물들을 떠오르게 한다. (조양은, 장영자, 이준, 등등)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숨찰 만큼 나를 다그쳤고, 내가 읽는 것이 소설인지 아니면 현대사 교과서나 신문 기사인지, 그도 아니면 김훈 선생의 글인지, 헷갈렸다. 중간 중간 생각하면서 숨을 고를 여유를 주지 않는 건조하고 무서운 문장이, 황석영 작가의 전작 "개밥바라기 별"과 달라서 당혹스럽지만, 읽는 재미가 있다.  

제목마냥, 이런 지저분한 우리들의 과거사들이 다 꿈이었다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삼풍 백화점 자리에 화려하게 서 있는 새 건물을, 그 근방에 장성마냥 늘어선 부촌 아파트들을 생각하면, 우리네는 아직도 그 꿈에서 못 깨어나고 계속 허우적 대는 게 아닌가 싶다. 정아양은 지금쯤 어디서 뭘할까. 그녀는 가족들과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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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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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면 (가능한 한 밤에 읽으시라, 고 작가는 썼다) 끝내기 전에는 덮기 힘들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인 노시인은 이미 죽어버렸고, 그의 연적이었을 다른 남자도 죽었다. 그리고 한 "처녀"는 요망하게 실쭉거리며 웃는다. 읽는 나를 잡아 끄는 힘, 그 관능은 바로 문장이다. 소설이 담는 이야기 못잖게 매력적인 문장은 끝까지 독자를 놓지 않는다.  

이미 난 독한 일본 소설을 한 권 읽었기에 어떤 설정에도 놀라거나 질리지 않을 준비가 되었고, 원조교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도 코웃음을 치면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들의 별난 사랑 이야기를 읽어 주리라, 그리고 그들이 그 어떤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이나 애욕을 꺼내도 내려다 보아 주리라, 마음 먹었다.  

늙은이라 자신을 자책하는 이적요는 이제 일흔이 되었고, 합병증으로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 내내 풀어 내놓는 것은 젊은 사람의 문장이다. 그 나이의 절반인 서지우는 (소설 후반부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나오는 따블, 따따블을 다시 생각해 본다. 소설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 그 차이만큼 더 늙어 보인다. 이 두사람이 만드는 애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고 은교는 불평했지만, 그건 은교라는 인물이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제목까지 안겨주었지만 (한달반 만에 폭풍같이 만들어 냈다는 이 이야기의 인터넷 연재시 제목은 <살인 당나귀>다) 이적요 시인에게 은교는, 젊은 생명력을 품는 "사랑"의 본질로, 한은교 개인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시인도 은교의 마지막 모습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걸 깨달았는지 "너를 너무 몰랐구나" 하고 독백한다. 그에게 은교는 "처녀",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내 집의 아내 (300)" 였다. 서지우도 그렇다. 처음엔 미지근한 관계였다가, 동침도 하고, 욕심도 부려본다. 그러다 두 남자가 합창으로 "사랑"을 부르짖는다. 그 사이사이, 은교는 무용을 좋아하며, 어려운 집안에서, 일하는 홀어머니 (에게 습관적으로 맞고) 대신 동생들을 거두기도하고, 아는 오빠한테서 가슴에 헤나로 그림도 그리게 하고, 재수도 안하고 대학으로 진학한다. (그리고 왕따인가 보다. 여자 친구가 하나도 없다) 아, 무엇보다 흰살에 매혹적인 가슴선, 허리선을 가졌고, 물론 긴 생머리를 흩날린다. 작가도 이 완벽한 십칠세 소녀가 민망했던지 노래만은 못하는 설정을 안겼다.

사랑인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랑이었다면, 이적요를 향한 서지우의 마음이었을까, 서지우를 거두던 이적요의 배려였을까. 그둘은 진정 애증으로 묶여있었다. 헤어지기에는 서로의 과거가, 그리고 치부가 부끄러웠을 게다. 글쓰기를 둘러싼 그 둘의 이야기가 더 발전되지 않고 은근슬쩍 은교에 대한 감정싸움으로 방향을 튼 것이 못내 아쉽다. 은교를 내세우고 여신으로 치켜올렸으니, 덩달아 젊음도 칭송되어야 했다. 그러니 늙음은 죄요, 추함이라는 대비가 만들어진다. 죽어가는 이적요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시 한번, 책 읽는 내내 노시인의 나이가 절감되는 순간은 노랑머리가 등장하는 그 한 장면 뿐이다.  아무리 은교가 "할아부지~" 하면서 콧소리로 부르고 큭큭 거려도, 그는 정정한 몸과, 문장으로 내 앞에 있었다. 

박범신 작가의 책은 <고산자>만 읽었다. 지루하게 읽었던 전작에 비해 생생하고 관능적인 이 책은 주제나 문학적 의의는 제껴두고 (이야기 속에도 경직된 문단에 대한 비판도 많다)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폭풍같이 읽어냈지만, 끝내고 나서도 남는 이 찜찜함은....음....내가 열일곱의 따블도 이미 넘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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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피어싱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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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인용되었던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사라진 애인을 향해서 원망을 내뱉다가 어금니를 꽉 깨물어서 부러뜨린후, 우적우적 씹어서 삼켜버리는 여 주인공. 

아, 이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 책이 그저 예사스런 사랑이야기가 아니란 걸, 드러내놓고 줄거리를 말하기 뭣한 SM 장면이 넘친다는 걸. 

하지만 번역자의 해설에도 나오듯, 깔끔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상황은 끔찍하고 외설스러운데 주인공의 말이 이해가 되는....지경에 이른다. 아, 내 친구는 이 책을 읽다가 던졌다는데, 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어낸 나는, 그럼, 정상이 아니란 말씀? 

번역자는 사랑이야기 보다는 생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열정을 읽었다고 했고, 루이의 등에 새기는 문신에서 그 답을 찾았다. 나는 그녀가 씹어 삼키는 어금니, 그리고 아마가 건넨 이빨 두개를 빻아 맥주와 함께 넘기는 장면에서 ....엉뚱하게 사랑을 읽었다. 

물론, 아마의 사랑은 그의 겉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정상'이었고, 그의 표현도 '어리숙'했지만, 그의 살과 살이 맞닿고, "누가 널 만지기라도 하면 죽여버릴래" 하는 일차적이고 유아적인 사랑은 (아, 그래서 그는 루이의 가슴에 매달렸겠지) 시바의 "널 아프게 하면서 난 흥분해"라는 사디스트 적인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뭣했지만, 결국, 그도 루이에게 결혼을 해버리고 싶다고.... 고백을 하니까) 과 비교되면서, 그 사이에서 정작 루이는 자기 자신 (살아내는 루이와 죽고 싶은 루이 둘다)에 대한 애정으로 어쩔줄 모른다. 혀에 꽂아 넣은 피어싱을 점점 더 굵은 것으로 바꾸고, 혀 끝을 갈라내어 뱀처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몸을 바꾸는 것은 신의 영역일까, 그럼 생명을 주고 뺏는 신이 되는 걸까, 생각하는 루이.  

아, 뭔가, 나는 왜 루이의 이 느낌이 이해되는 건가? 번역자의 말처럼, 나도 변태인거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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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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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정신없이 굶고, 일하고, 술마시는 뒷골목의 생활을 따라 가다보면 <안젤라의 재>를 쓴 프랭크 맥코트가 생각난다. 그 역시 뉴욕 생활의 처음 몇년간 호텔에서 청소를 하며 하루 하루 지냈다. 고생담이긴 한데 타지에서 보내는 젊은 나날이었기에 어느정도 즐긴다는 기분이 조지 오웰의 글에서도 느껴진다. 그래서 별로 고생이 고생스럽지 않고, 우리 말로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훈수를 둘라는 찰라, 조지 오웰은 목소리 톤을 싹 바꾸면서 뼈있는 말을 남긴다.  

이런 고생이 과연 무엇이냐고. 정말 사회에 필요한 값진 땀의 노동이냐고. 아니라고. 그건 그저 노예의 값싼 사치를 위한 헛된 삽질이라고. 더 나은 곳에 더 낫게 쓰일 수도 있는 시간과 노력을 이렇게 노예의 노예의 또 노예에게 '서비스' 하는데 들이는 것 뿐이라고. 왜? 사람들은 노예들, 대중들이 놀고 있는 꼴을 못 보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잠을 줄이면서 일을 해 봤자, 노예의 형편은 더 나아지지도 않고, 그럴 여지도 없다고.  

바쁘게 달달 볶아대는 가난의 삶이 파리의 경험이었다면, 역시나 가난한 런더너들은 바삐 일을 하는 대신, 빈민 구제소 여기 저기를 규칙에 따라서 (한 곳을 한 달 안에 다시 방문할 수 없으며, 구걸 역시 불법이기에 피해야한단다) 방랑해야만 했다. 런던의 가난한 사람들은 바쁘지 않지만 역시나 배가 고팠다. 그리고 그들도 상황이 더 나아질 듯 싶지 않다. 어디선 음식이 남아 썩어가지만 배고픈 이들은 (편한 맛을 보면 절대 안 되기에) 배를 곯는다.  

어째 낯선 이야기들이 아니다. 끝없는 고생과 노동, 한심한 탁상공론에 대한 분노가 어쩜 1984에 스며있겠다 싶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이곳 서울에도 별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신문에, 뉴스에, 그리고 골목마다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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