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종교 이야기 - 이야기 고전 백과 시리즈 4
폴 발타 외 지음, 윤정임 옮김, 윤이흠 감수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1.

프랑스 갈리마르사의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물'을 번역한 것으로 30명의 종교전문가, 20명의 삽화가가 참여한 책이라고 한다.  보고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종교와 신화의 입문서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많은 양을 할애하지 않으면서도 삽화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뼈대가 되는 얼개를 볼 수 있어 한두사람이 쓴 입문서에 보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편협한 시각은 줄어든 것 같다.

2.

유대교,기독교-정교,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외,이슬람교, 인디언,북극지방, 아프리카 정령... ... 강을 낀 농경지문명에서 생긴 종교-신화와 달리, 유목지, 북극, 인디언..이 있는 곳엔 신과 사고의 영역이 차이가 나는 것 같다.

3.

한 젊은 시인이 마을 숲에 들어선 공장을 빗대어 숲에 고래가 들어섰고 조금씩 숲을 갉아먹더니, 사람을 끊이없이 들락거리게 하고, 물대신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선술집을 만들고 기어이 마을을 황폐하게 만들고 죽어간다는 고래이야기에 빗대어 묘사하였다.  신자는 아니지만 많은 종교가 곳곳에 고래한마리 들이는 것 같다. 마을 한가운데서 고래는 점점 더 커지고, 사람들은 헌금과 죄인의 마음을 가지고 들락거리고 교회는 면죄부를 끊임없이 발행하는데, 그로인해  고래의 몸집은 더욱 커진다.

4.

아무도 하느님, 신에 대해 왜?라고 묻지 않는다. 내 하나님만 중요한 것은 아닐까?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라고 했으나 발급된 면죄부로 마음은 씻은 듯하다. 그 헌금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고래몸을 얼마나 줄여야 하는지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우리 마을에도 고래가 끊임없이 커지고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속에 책 2005-07-1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리뷰 분류된 명칭이 참 멋져요~
 
3일만에 읽는 면역 3일만에 읽는 시리즈 8
오쿠무라 고 지음, 이계성 옮김 / 서울문화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아토피(그리이스 어원 a topos-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반응), 알레르기, 기관지 천식,

스트레스와 면역, 스테로이드제의 순기능과 역기능, 암과 면역체계 등등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

심도깊게 들어갈 수 없었지만, 하룻밤 시리즈 처럼 오른편에 도식, 아래 간단한 상식겸 요약, 서

술형태로 관심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아토피 피부에 금해야 할 것(콩류.우유...), 벌에 쏘여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일부 암에는 결핵

균을 임의로 넣어 면역시스템을 강하게 가동하여 치료할 수도 있다는 점,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면역시스템에 어떤 이상이 오는 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 세부적

인 지식이 없더라도 고개가 끄덕여 진다.

 

각박하고 정신없는 세상, 먹을거리, 피부에, 몸에 별반 좋은 환경들은 없는 것 같은데, 맹목적인

반대보다 기본적인 이해가 있으면 훨씬 수월할 것 같다.  천식, 아토피, 항생물질 남용은 어쩌면

현재 우리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한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balmas > 아렌트와 함께, 아렌트를 넘어서
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폭력의 세기>는 흔치 않은 깊이를 지닌 책이다. 적은 분량이지만, 권력과 폭력 같은 정치학의 기본 개념들에 대해 깊이 있고 참신한 논의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반면 이 책의 번역은, 심각한 오역이 문제되는 건 아니지만, 영어의 통사 구조를 그대로 옮긴 게 여실히 드러나는 전형적인 번역투 문장들로 되어 있어서 읽기가 매우 불편하다). 아렌트의 논지는 (1)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인 개념들이지만, (2)서양 정치학의 한 전통으로부터 양자를 같은 것으로, 또는 적어도 동류의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생겨났으며, 이는 결국 20세기에 폭력 혁명론의 예찬자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인 것이며, 폭력은 어떤 부당한 압제나 횡포에 맞서 행사되었을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즉 폭력이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부당하게 실행된 권력에 대해, 다른 어떤 대용물이 아니라 바로 그 권력을 응징하고 바로 잡기 위해 행사된 경우다. 반대로 권력은 [제휴해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상응](74쪽)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집단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권력의 좀더 중요한 특징은 정당화를 요구하는 폭력과 달리 정당성(legitimacy)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즉 폭력은 사후적인 결과들에 따라 정당화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지만, 권력은 정치적 공동체의 기원에서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예컨대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 또는 반혁명의 행위는 엄격하게 구분됨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정치, 특히 20세기 정치의 문제점은 권력과 폭력의 이러한 본질적 차이가 망각되고 은폐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는 16세기 절대주의 권력론 이래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이해하고, 권력 역시 [조직되고 합법화된 폭력]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관점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유일한 관점도 바람직한 관점도 아니며, 오히려 좀더 근원적이고 심오한 이해 방식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형성하는 공적인 참여 행위로 권력을 이해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경험, 그리고 18세기의 미국 혁명의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제기되는 폭력혁명론의 위험은 폭력의 도구적 성격을 망각하고 폭력을 목적화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아렌트에 따르면 폭력혁명론의 진정한 위험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관료제의 확산에 따라 생겨난 [전쟁과 폭력의 자율화] 경향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을 저지하고 근절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더욱 부추기고 심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적어도 문제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가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아렌트의 매력은 서양의 철학 전통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복잡한 현실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혁명적이거나 진보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읽는 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또한 바로 이 때문에 아렌트의 논의는 보수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지나치게 규범적인 방향으로 경도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을 해보자. 폭력과 권력이 구분되는 [시점]은 어느 시점인가? [누가] 이 양자를 구분하는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헌의 행위와 쿠데타는 [언제], [누구]에 의해 구분되는가?

아렌트는 [과거시제]로 말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라는 인칭을 사용할 권리를 부당전제하고 있다. 이는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미국혁명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정치적 전통이 지니는 규범적 힘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는 이 두 전통은 [현재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또 오늘의 투쟁 속에서 [변용]되고 [변혁]될 수밖에 없음을 그가 얼마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20세기 후반이 탈혁명의 시대이며, 문제는 오래된 혁명의 전통을 [복원]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 역시 하나의 폭력일 수 있음을. 따라서 경계는 권력과 폭력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 자체 내에 있음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급변하는 사회이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모순의 양상은 그 태동부터 지금까지 그리 변하지 않은 듯 하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주름잡는 질서가 되었지만, 한나 아렌트가 이미 오래 전 이 문제를 꿰뚫어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예가 아닐까 싶다.


한 때 그녀는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현학적이다 못해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하이데거의 학풍은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색채를 정치적 사유의 영역에 도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글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독특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유태인이었고 보다 많은 폭력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가 자본주의 사회, 인간이 지닌 폭력이라는 문제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떤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 시장만을 위한 시장. 그 안에는 인간이 설 곳이 없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노동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성함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에 의해 속박 당하는 주객전도의 아픔을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의 존재 기반을 튼튼하게 해주는 다원주의가 부정되던 순간부터 인간은 이 사회의 주체 아닌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성시된 노동은 너무도 과대 포장(?)된 나머지 결국 인간이 주관할 수 없는 영역의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고, 자본주의는 생산성 향상에 끊임없이 목 말라 한 나머지 무의미한 생산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은 인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없었다. 그것은 보다 빠른 속도의 생산을 감당해낼 수 있는 기계화된 인간을 요구하였고, 어느 순간 인간은 기기로 대체되어갔다. 그렇게 인간과 노동은 분리되었으며, 이는 인간 실존의 조건인 생명, 세계성, 다원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생산의 비인간화. 그 안에는 지난 20세기 인류를 떨게 만들었던 전체주의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생산 주체 간의, 더 나아가 모든 인류 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재는 자연적으로 모든 가능성의 부재로 이어졌다. 인간은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의문시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요구하기 때문에 하는 단순 행위들의 결합 속에서 인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법을 잊었고, 세상에 저항하는 방법을 잃었다. 무조건적인 추앙, 반대파에 대한 폭력 속에서 단 하나의 질서만이 의심 받지 않는 것으로 절대화될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을 비롯,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독재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지금껏 인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어두운 면모에 너무도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에겐 희망이 없음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실제로 힘의 논리에 의해 우리 사회는 운영되고 있으며, 권력을 소유한 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의, 그렇지 않은 자의 행위를 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힘마저도 소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악을 탄생시킬 수 있었듯, 선 역시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력을 지닌 존재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아직 현실화되고 있지 못한 한나 아렌트의 긍정적 태도가 언젠가는 실현될 날이 오지 않을까?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으며,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혜를 획득하는 그 날을 기다리기에는 나의 삶이 너무도 짧은 게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나아렌트와 새로운 정치철학  - 김석수


“고,중세 시기에는 관조적 삶의 영역을 담당하는 자들이 활동적 삶을 담당하는 자들을 압도함으로써, 농민, 상민,노예, 여성들은 공적인 정치적 담론의 장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근대 이후는 신흥상업계층, 이른바 시민계급이 시민혁명을 계기로 공적 담론의 영역을 독차지 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자본가 집단이 공적 활동의 영역을 독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오늘의 세계는 인간의 실천적 활동의 세 계기를 이루고 있는 노동,작업,행위중에서 행위 영역이 노동과 작업의 계기에 흡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알 수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조건지어진 존재”라는 사실뿐이다. 그녀는 활동적 삶의 요소를 구성하는 노동, 작업, 행위 및 관조적 삶의 요소를 구성하는 사유,의지,판단이 인간의 삶을 조건짓는 요소라고 본다. 이처럼 아렌트는 인간이 이와 같은 다원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

 

3. 근대이전의 정치는 관조의 노예, 종교의 노예가 되었다면, 근대 이후의 정치는 노동, 경제의 노예가 되었다.

 

7.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신체적 필요를 드러내고, 작업을 통해서 솜씨를 드러낸다면,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4. 노동은 인간이 자연과 갖는 신진대사로서 그 목적은 생명 그 자체의 재생산이며 그 과정은 부단한 순환운도에 포섭되어 있다.

5. 작업은 자연적 환경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인공적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개별적인 삶의 한시성을 넘어서 지속적인 초월적인 삶을 지향하고 한다. 작업의 목적은 사용에 있다면, 노동의 목적은 소모에 있다. 인간이 제작자인한 그는 모든 것을 도구화하며, 이런 도구화는 모든 사물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제작인은 자신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생산품을 전시하는 교환시장에서 최종적인 회합의 공간으로서 공론 영역을 확보한다.

6.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없이 인간들간에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서 다원성이라는 인간적 조건, 다시말해 (보편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의)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살고 또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8. 행위는 정치적 조직체를 창설하고 개입하는 한에 있어서, 기억을 위한 조건, 다시 말해 역사를 위한 조건을 창출한다. 그렇지만 이 세가지 활동 중에서 탄생성이라는 인간적 조건에 가장 밀접한 연관성을 갖은 것은 행위이다. 게다가 행위는 탁월한 정치적 활동이기에 사멸성이 아니라 탄생성이 형이상학적 사고와 구별되는 정치적 사고의 핵심적 범주가 될 수 있다.

2. 아렌트는 서양의 전통적 사상에서는 활동적 삶이 그 고유한 위치를 지니지 못하고 관조적 삶에 의해서만 의미를 부여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관조적 삶의 시녀)

............................................................................................................................................

** 우리가 '작업'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능인으로 만족하고, 평생 정치적 탄생을 해보지 못하고 뭍혀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모리배만 있고 공적영역이 살아숨쉬는 공기가 아니라 가서는 안될 비밀의 방처럼 꼭꼭 숨겨놓은, 마치 비밀스런 길이 있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