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넷이 다 거기 한자리에 있었다니까.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까.
블::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잖아? 그 사람의 해석밖에 모르고 있다니까. 17

에: 디디, 넌 그렇게도 인정머리가 없냐? 내 악몽 얘기를 너한테 못한다면 누구한테 하란 말이야?
블: 너 혼자서 삭여야지. 내가 그런 얘긴 질색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21

포조: 난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기쁘단 말이오.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만나면 다 배울 점이 있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더 많은 행복을 맛보게 되거든 45
포조: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 웃음도 마찬가지지요. 51

블: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133 블: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134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짖거리를 다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ㅅㅏ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135

베케트는 삶을 지배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말한다. 나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ㅌㅏ인의 고통, 즉 인간의 고통을 말한다. 169 베케트는 인간의 존재를 극히 가늘고 작은 것으로 축소시켜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가 앉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와 같은 실험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시킬 수 없음을, 그 ㅇㅓ떤 허약한 인간도 완전히 침묵시킬 수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 171


볕뉘

0. 책들 사이 자주 언급이 된다. 시모임에서 일장 연설을 들은 샤무엘 베케트. 연극을 하고 싶다는, 연극을 해야한다는....여러 이야기들이 앙금처럼 남아 책이 손에 왔다.

1. 어제 한차례 밀린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다가 밤이 이슥해져서야 어찌된 일인지 이 책이 손에 들려 읽었다. 실존주의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한다. 세상은 정지하면서도 움직인다. 움직이면서도 변화한다. 샤무엘 베케트가 있다면 전혀 다른 톤의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쓰지 않을까 싶다.약동이 곳곳에 스며있거나 움츠리고 피동의 존재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른 장치를 두지는 않을까 싶다.

2. 세기에 필요한 문학의 총량이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이 더 필요한 때이지는 않을까....수없이 개화선을 넘는 꽃들처럼...........사실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무너뜨릴 묘수들이 존재를 관통한다면.....내장 깊숙히...

3. 비단 꿈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4-24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4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색이 선호되기 시작한 것은(색에 대한 선호도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세기에 청색은 신학적으로 중요시되었고 예술적으로도 그 가치가 상승했으며, 13세기에는 염색업자들이 아름다운 청색 염료를 만들어 냄으로써 청색의 인기 상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14세기 중반부터는 문장학적으로 중요한 색깔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2 세기 후인 16세기에는 종교개혁에 발맞춰 도덕적 차원에서 경건한 색이 되었다. 그러나 청색이 결정적으로 승리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199

중세 신학에서 빛은 감각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시적이면서도 비물질적인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시계”인 빛은 그 자체로서 신의 현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ㅇㅣ런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색이 빛이라면 색 역시 비물질적인 것인가?아니면 사물에 덧입힌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 것인가? 교회의 입장에서는 ㅇㅕ기에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었다. 만약 색이 빛이라면 색은 본디 신성한 성질을 띠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특히 교회 내에 색을 확산시키는 일은 빛, 즉 신을 위해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색과 빛의 추구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로 색이 단순한 껍질이자 구체적인 물질이라면 신성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신의 창조물에다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통로‘을 가로막는 부도덕하고 해로운 것으로 마땅히 거부하고 억제해야 하며 교회에서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68

혼합하는 것, 뒤섞는 것, 합병하는 것, 화합시키는 것 등은 창조주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질서와 자연 상태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곧잘 악마가 하는 짓으로 여겨졌다. 직업상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염색공, 대장장이, 연금술사, 약제사 들은 물질을 ㄱㅏ지고 속임수를 쓴다는 느낌 때문에 일종의 두려움이나 의혹을 품고 있었다. 어떤 작업은 직접 하기를 꺼렸는데, 예를 들어 염색 작업실에서는 세 번째 색을 내기 위해 두 가지 색을 섞는 일을 기피했다. 색을 배열하거나 겹쳐 놓는 경우는 있어도 혼합하는 일은 없었다. 15세기 이전까지 염색에서건 회화에서건 색 제조법을 설명하는 책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초록을 만들려면 파랑과 노랑을 섞어야 한다는 설명이 전부였다. 116

14세기 중반 염색업자들은 검은색을 염색해낼 수 있었는데, 주된 원동력은 염색 분야의 화학적 발견이나 그때까지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염료의 도입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새로운 수요인 듯하다. 당시 사회는 양질의 검은색 천과 옷들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고, 염색업자들은 빠른 속도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여기서도 이데올로기적 요인과 사회적 수요가 화학적, 기술적 진보를 이끌고 촉진시킨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었다. 137

서양에서는 색에 대한 여러 가지 윤리가 아주 오랫동안 큰 줄기를 이루며 지속되어 왔닥 볼 수 있다. 12세기 ㅅㅣ토파의 예술에서부터 14-5세기 그리자유 기법의 세밀화와 종교 개혁 초기의 색 파괴 물결을 ㄱㅓ쳐, 17세기의 엄격한 칼뱅파나 얀센파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단절도 없이 오히려 일관성있는 논리를 지닌 채 이어져 왔다. 바로 색은 겉치레, ㅅㅏ치, 인위적인 것,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색이란 물질일 뿐이므로 헛된 것이고, 진실과 선을 왜곡하므로 위험한 것이며, 유혹하고 속이려 하므로 책망받아 마땅하며, 형태와 윤곽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게 하므로 거슬리는 것이다. 173

16세기 말부터는 청색이 완전히 ‘정중한‘색깔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177 종교 개혁은 교회 장식이나 전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상에서도 ㄷㅏ색 배합을 강력하게 거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중세의 색에 관한 윤리는 색조만이 아니라 색의 농도도 규제했다. 말하자면 고상하더라도 지나치게 진한 색깔의 천을 만들어 내는 화려하고 짙은 색을 내는 염료는 금지되었다. 반면에 종교 개혁이나 근대의 의상 규정들은 색의 농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지 색깔만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청교도주의나 경건주의 교파들은 세상의 허영심에 ㄷㅐ한 혐오에 ㄸㅏ라 개신교파 의상의 엄격함과 획일성을 강화했다./유채색들 중에서 청색을 유일하게 올바른 기독교인에게 어울리는 ‘정중한‘ 색으로 만들었다. 178, 179

나는 일상생활의 대량 생산품에서 색채가 상당히 제한되었던 까닭은 신교도 윤리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마치 ㄱㅣ술적으로는 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나 사회윤리가 이를 거부한 듯하다. 182

18세기에 들어서 새로운 안료가 점점 많이 생겨나, 작업장에서 색소를 선택하여 빻고 혼합시키고 칠하는 오래된 방법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대체되면서 경쟁하거나 혼란에 빠졌다. 이 새로운 제조 방법은 작업장마다 달랐고 심지어 화가마다 다른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17세기 말에 있었던 뉴턴의 발견과 스펙트럼의 부각은 점차 색의 질서를 바꾸어 놓았다....그리고 원색과 보색의 개념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으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같은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개념도 생겨났다. 18세기 말의 색상 ㅊㅔ계는 18세기 초와 완전히 달라졌다. 185

페르메이르의 노란색, 흰색, 파란색 터치 위로는 특유의 음악성이 흐른다. 바로 이 음악성이 우리를 ㅁㅐ혹시키고 그를 자기 시대뿐 아니라 아마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화가이게 하는 것이다. 189

예전의 대가들은 화가가 어떤 경지까지 올랐는지 알아보는 기준으로 살갗의 묘사를 삼았다. 데생보다 채색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논거로 내세운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즉 색깔만이 살을 가진 인간에게 생명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깔이 곧 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살아 있는 생물에게서만 회화가 나오기 때문이다. 195

괴테의 색채론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이 책 내용을 보충하였는데 가장 고유한 장은 ‘생리학적인‘ 색을 다룬 부분일 터다. 여기서 작가는 색 인식의 주관성과 문화적인 성격을 힘주어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거의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226

일본인들의 감성에는 파랑인지 빨강인지, 또 다른 색인지 보다는 그 색이 광택을 지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일본어에서 흰색을 가리키는 말을 예로 들자면, 가장 불투명한 흰색부터 가장 번쩍거리는 흰색까지 단계적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이름을 지닌다./대부분의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빨간색 계통을 갈색 혹은 노랑, 나아가 초록이나 파랑으로부터 구분하는 데에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면 어떤 주어진 색이 있으면 그것이 건조한 색인지 축축한 색인지, 그리고 부드러운 색인지 거친 색인지, ㅁㅐ끄러운 색인지, 꺼칠꺼칠한 색인지, 즐거운 색인지 슬픈 색인지를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색은 다른 감각 요소와 짝을 이루어 ㅇㅣ해되므로 빛깔이나 색조 따위는 핵심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291

이러한 ㅅㅏ회 간의 차이는 사실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은 색인식의 문화적 성격이나 거기서 비롯하는 색에 대한 명명현상등을 강조해 줄 뿐 아니라, 여러 다른 감각과 관련한 복합적 지각 현상과 공감각 역할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또한 이 차이점들은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나타나는 감수성을 비교 연구할 때 신중해야 함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293

오히려 파랑이 다른 색, 특히 빨강, 초록, 하양, 검정보다 상징성이 ‘덜 강한‘색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인지도 모른다/파랑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점, 조용하고 평화적이며 아득한 느낌과 함께 거의 중립적인 색이라는 점이다. 물론 파란색은 꿈꾸게 ㅎㅏ는 색이지만 이 멜랑콜리한 꿈은 약간 마취제 같은 일면을 가진다.300

파란색과 물의 관계, 그리고 특히 파란색과 차가움의 관계다. 이에 대해 길게 언급하기에는 이 책의 지면이 모자랐지만, 이것은 파랑색을 살필 때 아주 중요한 문제다. 특히 근대와 현대에서 그러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따뜻한 색이나 차가운 색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순전히 관습적인 문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는 ㅍㅏ란색이 따뜻한 색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17세기에 ㅇㅣ르러서야 파란색은 점차적으로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비로소 ㅍㅏ랑은 차가운 색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물이 ㅍㅏ란색으로 인식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과거의 그림들을 보면 물은 모든 색으로 표현이 가능했지만 상징적으로는 초록이 물의 색으로 꼽히곤 햇다. 15세기에 와서야 ㅇㅣ 초록이 ㅈㅓㅁ차 파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302

볕뉘.

0. 책방에서 책을 확인하고서야 구입했다. 상징사를 전공으로 문장,인장,이미지들을 연구한 거장이라고 한다. 개인적인 관심은 문양, 상징, 색 등이 있었는데 안성맞춤이지 않을까 했다.

1. 명불허전이라고 할까. 매끄럽고 깔끔한 기술이 마음에 든다. 미셸 파스투로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반드시 말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며, 우리의 사유는 대부분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달리 말해서, 언어는 물질적 대상들 사이에서와 같은 선명하고도 명확한 구별, 즉 불연속성을 우리의 관념들 사이에도 확립할 것을 요구한다./혹시 비연장적인 것을 연장적인 것으로, 질을 양으로 부당하게 번역함으로서 답 속에서도 여전히 모순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닌가/형이상학과 심리학의 공통적인 ‘자유‘의 문제도 논쟁들의 전제속에 지속과 연장성, 계기와 동시성, 질과 양 사이의 혼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혼동이 일단 걷히기만 하면, 아마도 반론과 정의들...어쩌면 자유의 문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서문에서

제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영혼의 어떤 상태들은 옳든 그르든 자기 충족적으로 보인다. 깊은 슬픔과 기쁨, 숙고한 열정, 미적 감동이 그러하다. 25

무한한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기에, 미래에 대한 생각은 결국 미래 자체보다도 더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보다는 희망에서, 현실보다는 꿈에서 더 많은 매력을 발견한다. 28

기쁨

열정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기쁨은 우선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가 점차적으로 그 자리를 넓혀가는 고립된 심리적 사실이 아니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것은 우리 의식의 상태들이 미래로 방향을 잡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음에는 마치 그러한 인력이 심리상태들의 무게를 감소시킨 것처럼, 생각과 감각들이 더 빨리 이어지며, 우리의 동작들은 더 이상 동일한 노력을 지불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극도의 기븜에서는 우리의 지각과 기억들이 정의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 띠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열기나 빛과도 비교될 수 있는 그리고 너무도 새로워서 몇몇 순간에는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와 존재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성질이다. 28

우아함

우아함의 느낌 – 용이한 동작이란 하나가 다른 것을 준비하는 동작이므로, 종국에 ㄱㅏ서는 스스로를 예견케 하는 동작, 즉 앞으로 올 자세가 지시되어 있고, 그것도 미리 형성되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현재의 자세에서 더 고급의 편안함을 발견하게 된다./움직임의 용이함을 지각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간의 진행을 멈추게 하여 미래를 현재에 잡아두는 즐거움과 합쳐지게 된다./율동의 규칙성은 그와 우리 ㅅㅏ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의사소통을 확립하고, 박자의 정기적인 반복은 우리가 그 상상적 꼭두각시를 움직이게 할, 그만큼의 보이지 않는 실과 같다./우아함이란 느낌 속에는 일종의 신체적 공감이 들어가 있으며, 그러한 공감의 매력을 분석해 보면,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신체적 공감이 미묘하게 그 관념을 암시하고 있는 정신적 공감과의 인접성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30-31

미적 감정의 점증하는 강도는 여기서 그만큼의 다양한 감정들로 해소되고, 그 다양한 감정들 각각은 이미 그에 앞선 것에 의해 예고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볼 수 있게 되지만, 그런 다음에는 그 앞선 것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바로 그러한 질적 진전을 우리는 크기의 변화라는 방향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단순한 것을 좋아하고, 우리의 언어가 심리적 분석의 미묘함을 번역하기는 곤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33

예술, 시

예술의 목적은, 우리 인격의 활동적인 또는 오히려 저항적인 힘을 잠재우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완벽한 순종의 상태로 이끌어서, 그 상태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생각을 깨닫게 하며, 표현된 느낌과 공감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우리에게 음악의 소리가 자연의 소리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면, 그것은 자연이 느낌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표현해 버리는 데 불과한 반면, 음악은 그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시의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인이란 그 안에서 느낌이 심상들로, 심상 자체는 또 운율에 복종하면서 그것을 번역할 언어들로 발전되어 가는, 그런 사람이다...규칙적인 심상의 운율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아기가 요람에서 흔들리듯 잠재워져 마치 꿈 속에서 처럼 스스로를 잊어버림으로써, ㅅㅣ인과 함께 생각하고 보게 된다. 34

여러 분석으로부터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은 특별한 느낌이 아니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느낌이 유발되지 않고 암시되기만 ㅎㅏ면 미적 성격을 띨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예술 작품의 ㄱㅏ치는 그 감정 ㅈㅏ체의 풍부함에 의해 측정된다. 다른 말로 하면, 세기의 정도와 더불어 본능적으로 우리는 깊이, 또는 높이의 정도를 구별한다....감동은 거기에 스며드는 수많은 감각과 감정과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각각의 감동을 그 복잡한 본래의 상태에서 감싸 안으려면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의 삶을 다시 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36, 37

연민

연민의 본질은 따라서 겸손해야 할 필요성이며, 낮아지려는 열망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열망은 게다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자기 평가에서 우리를 높여주고, 우리의 사유가 거기서부터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바로) 그 감각적 이득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ㅎㅐ주기 때문이다. 연민의 증가하는 강도는 따라서 질적인 진전, 즉 혐오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그리고 공감 자체에서 겸손함으로의 이행에서 성립한다. 40

크기의 관점에서 신체적 현상과 의식의 상태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수 있는지 탐구하여야 한다./증가하는 강도의 고통을 점점 커져가는 음계의 한 음에 비교하기보다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 의식은 특징적인 감각 ㅎㅏㄴ ㄱㅏ운데서 근육수축이나 모든 종류의 신체 기관들의 움직임을 구분해낼 것이다. 그러한 요소 심리상태들의 협주는 한 유기체 앞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상황에 대면한 그 유기체의 새로운 요구를 표현한다....고통이 약할수록 더 정확한 장소에 아픔을 지정한다. 즉 고통이 커지면, 온몸이 아프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통은 커지는 만큼 더멀리 퍼진다...고통의 강도야말로 의식이 보는 앞에서 그 고통에 동조하고 반응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라고 정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56

쾌락

쾌락의 매력은 자발적으로 시작된 운동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맛보는 동안의 쾌락의 세기 ㅈㅏ체는 모든 다른 감각을 거부하고 거기에 빠져 버리는 신체의 무기력에 불과하다....어떤 매력에 사로잡힌 사ㅇ태는 거기서 ㅎㅔ쳐 나오려 해도 ㄴㅏ올 수 없는, 즉 몸을 뺄 수 없는 옴쭉달싹할 수 없음, 즉 무기력의 상태이다...그러한 무기력이 없다면 쾌락은 여전히 어떤 상태이나 더 이상 크기는 아닐 것이다. 59

이상을 요약하면 강도의 개념이 외부 원인을 표상하는 의식의 상태를 연구하느냐, 그 자체로서 충족적인 상태를 연구하느냐에 따라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강도라는 말의 두 의미는 매우 자주 상호침투하는데,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노력이 포함하고 있는 더 단순한 사실들이 일반적으로 표상적이며, 대부분의 표상적 상태들은 동시에 정조적이기도 ㅎㅏ여 그들 자체가 많은 수의 기본적 심리상태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도의 관념은 따라서 두 흐름의 접합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ㅎㅏ나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외연적 크기의 관념을 가져오며, 다른 ㅎㅏ나는 의식의 심연에서 내적인 다수성의 상을 찾으러 가서 표면으로 가지고 나오게 한다. 94

볕뉘.

0. 25년전 들른 책방에 들러, 북핑을 하다가 손에 들렸다. 저자별로 전시가 되어있어 궁금증이 돋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선뜻 손이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1.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의 베르그손 부분이 다시 생각나 들추어보았다. 다시 보아도 정리가 잘 되었다 싶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공간화하여 해석하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 순수한 시간을 공간으로 측정될수도 분절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직관에 의해 파악된다. 운동은 제논의 토끼와 거북이의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다. 시간적인 사건이다. 심리상태의 강도나 크기를 재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생명은 다른 경로를 산다.

2. 만남에서 느낌이 생겨나면 시간은 싹트고 자랄 수 있다. 느낌이 생겨나는 순간은 사건이 된다. 이야기는 탄생한 느낌을 보존하면서 시간을 연장해나간다.

3. 만물은 운동한다. 철학에 불을 질러 폐기시켜 땅에 묻어버린다. 주체를 죽이고,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백지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자. 세간에는 철학의 아인슈타인이라고....뉴턴의 고전물리학이 아니라 양자역학이라고....정지된 것이 아니라 다 움직이는 것이라고....그래도 남겨놓아야 될 사상가 가운데 베르그손을 든다. 그렇게 하자. 상황, 운동, 느낌, 사건.....이어읽기 가운데 하나. 잠깐 한숨 돌리고 갈 필요가 있다. 그의 감정에 대한 수사가 얼마나 날렵하고 적확한가. 미려하기 그지없다. 아까운 책이다. 읽히지 않는...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7-04-17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물질과 기억> 주문했는데 반갑네요^^ 여울님과 읽고 싶은 책이 자주 겹쳐 재밌습니다.

여울 2017-04-17 19:29   좋아요 1 | URL
ㅎㅎ 이 책도 다시 봐야하는데요. 반가워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감은 탐색에서 길어 올리는 발견이다. 246

1. 존재하는 모든 특성을 가지는 하나의 대상이 있을까?
2. 대상은 남김없이 모든 다른 대상과 구분될까?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도, 사실들의 총체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영역이 등장하는 영역이다. 존재하는 모든 영역은 세계에 속한다. 그러니까 세계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정확히 표현했듯 <모든 영역의 영역>이다. 77

칸트와 하버마스는 세계란 일종의 <규제적 이념>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우리가 일단 세계 전체를 전제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을 세계 전체의 단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모순이 없는 통일성을 갖춘 세계관을 보장받을 수 있다...하버마스는 이런 세계 개념을 항상 의사소통의 실천에 의해 실현되는 세계 인식과 결부시켰다. 79

철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발전과 퇴보를 거듭한다. 철학이 이룩한 위대한 발전은 세계개념을 보다 더 낫게 개선해 낸 것이다. 82

모두의 질문에 동의하지 않으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세계는 존재하는가? 당신에게 89

존재하다라는 동사는 발생하다, 돌출하다라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옮겨본다면 비집고 나옴, 두드러져 나옴, 혹은 우뚝섬이라고 할 수 있다. 92/단 하나의 유일한 실체, 모든 특성을 가지는 슈퍼 대상이 있다는 주장은 틀렸다. 일원론은 슈퍼 대상이라는 게 앞뒤가 맞지 않은 개념인 탓에 필연적으로 잘못이다/일원론(스피노자)이 틀렸으며, 이원론(데카르트)은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단순히 맞지 않는 것을 지워나가는 배제 논리를 이용하더라도 남는 것은 다원론(라이프니츠)뿐이다. 100,10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미장에서 나타난다. 존재는 의미장의 속성이며, 곧 의미장 안에서 나타나는 무엇이다. 115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어떤 단 하나의 대상을 다른 모든 대상과 격리한다면 그 대상은 당장 존재하기를 멈춘다/완전하게 격리된 대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상은 반드시 의미장 안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그렇다면 의미장 역시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132, 133

존재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의미장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어떤 의미장이냐 하는 것이며, 바로 ㅇㅕ기서 우리는 흔히 착각을 일으킨다. 146

과학적 세계관은 인간을 우주에 있는 일종의 돼지라고 가정한다. 존재를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과 혼동해, 인간이 가지는 감각적 욕구로만 광활한 우주를 바라본다. 인간을 우주의 돼지처럼 바라보면 모든게 무의미하게만 여겨진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울 게 없다./현실의삶과 거리를 두면서 우리는 이미 이론적으로 많은 예단을 하고 만다....우리는 끊임없이 조작된 허블 망원경 ㅅㅏ진과 최신의 입자 모델로 세뇌당한다....오늘날에는 과학자와 전문가가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신의 입자와 힉스 장뿐이며, 우리 인간은 우주의 돼지, 근본적으로 번식과 먹이에만 관심을 가지는 돼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인다. 149, 150

형ㅇㅣ상학으로 끌리는 충동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충동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154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 무한한 변형으로 무한하게 늘어나는 의미장들만 존재한다는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의 자기 인식을 다룰 수 있게 허락해 준다. 모든 세계관은 틀렸다. 세계관은 하나의 세계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전제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56

자연과학의 세계관

과학은 우리에게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를 선물하며,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을 선사한다. 과학은 그 방법을 체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검증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식을 이끌어 낸다. 165

과학적 세계관이 좌초하는 첫 번째 이유는 <존재론적>이다. 존재론은 과학적 세계관의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해 준다. 그러니까 잘못된 전제로부터 이끌어 낸 결론은 잘못이거나, 적어도 학문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다. 두 번째 이유는 <인식론적>이다. <그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가질 수 없다. 167

자연, 곧 우주만 존재한다는 이런 주장은 자연주의라 불린다. 그러니까 존재론이 자연 과학의 영역으로 분류하는 것만 존재할 뿐, 다른 모든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자연주의다. 168

근대 초의 철학은 그때부터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실제로 있는 세계와 허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었다. 현실의 세계, 우주는 곧 우리의 상상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 결과 자연주의는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171

새로운 무신론 역시 하나의 통일적인 전체를 상정하고 이루어지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주장이다. 이렇게 보았다는 전체, 곧 그 자체로서의 세계나 현실은 시공간의 거대한 통과 같다....물질적 일원론은 모든 일원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슈퍼 대상, 곧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무너지고 만다. 174

유명론..본래 모든 말(馬)을 포섭하는 말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은 없다. 단지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말들만 존재한다. 우리는 편의상 단순화해서 그걸 <<말>>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이렇게 강변하는 게 유명론이다./리얼리즘은 우리가 쓰는 개념(사랑, 국가라는 추상개념도 포함)이 ㅅㅏ실을 단순화하는 공허한 ㅇㅣ름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가 ㄱㅐ념으로 ㄴㅏ타내는 것이야말로 구조다./새로운 리얼리즘은 이중의 논제, 곧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물과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과 ㅅㅏ실 그 ㅈㅏ체가 하나의 유일한 ㄷㅐ상 영역에만 속하는 게 아니라는 두 개의 논제를 내세운다. 물질로 이루어진 대상만 존재하는 게 ㅇㅏ니다. 예를 들어 논리 법칙이나 인간의 지식 역시 우리는 물질 ㄷㅐ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알아볼 수 있다. 183-185


새로운 리얼리즘은 주관적 진리, 그러니까 특정 레지스트리를 쓰는 인간이라는 주관의 진리 혹은 보다 더 일반적인 동물이라는 주관의 진리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이라고 해서 모두 자의적 환상이라거나, 전부 틀렸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음매를 넘나들며 얼마든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202

과학적 세계관은 특정 인간관을 전제한다. 이 인간관은 과학자를 철두철미하게 합리적 존재로 이상화한다. 209

인물이나 정치 문제 혹은 예술 작품의 이해는 생물학이나 수학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완전히 자의적이거나 단순한 취향 문제도 아니다. 과학적 세계관은 우주, 곧 자연 과학의 대상 영역이라는 특권적인 사실 구조만 중시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의미는 건너뛰어 버리는 잘못을 저지른다. 213

과학적 세계관은 합리성의 왜곡된 인식에 기초한다. 과학적 세계관은 이해를 ㅇㅟ한 우리의 모든 노력에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거나 폐기하는 방법만 인정한다. 나름 의미를 ㄱㅏ지기는 하지만,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는 없다....가다머는 예술 작품 ㅎㅐ석과 인간 세계의 ㅇㅣ해는 우리의 자연 이해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을 강조한다. 214, 215

전체로서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우리가 현실을 보다 더 바로 보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돕는다. 인간은 정신으로 활동하는 존재다. 정신을 무시하고 우주만 관찰한다면, 당연히 인간의 모든 의미는 사라진다. 217

종교의 의미

전체라는 것을 흡사 자연수와 같다고 하고, 최대의 자연수를 찾는다고 가정해보자/최대의 자연수와 똑같이 전체는 존재할 수 없다. 223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마법화는 사회 질서가 합리적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현상이다...베버는 탈마법화를 반어적으로 <우리시대의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225 니클라스 루만은 이 유산을 <합리성 연속체>라 부른다. 이 말이 품은 뜻은 전체로서의 세계를 조망하며 세계의 질서 원칙으로 떠받드는 합리성이 단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ㄱㅏ정이다......물신 숭배는 모든 대상에 이 거대한 전체를 투사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할 책임을 사회로 떠넘기는 방임이 생겨난다. 227 라캉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의견을 <그 아래에 두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낄 주체를 찾는다..그는 이런 사정을 ~를 안다고 가정할이라는 말로 표현한다....사회 질서는 언제나 이 질서를 잘 알고 ㅈl켜 주는 주체를 전제로 한다. 228, 229 우리는 이런 <위대한 타자>에 의지하는 믿음을 빅브라더 신앙에 빗댈 수 있다. 230

과학을 향한 물신 숭배는 질서를 갈망하는 우리의 소원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전문가 위원회에 떠넘기도록 조장할 뿐이다. 전문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인생인지 결정을 내려 달라고 매달리는 일은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다. 230 모든 것을 지배하고 질서 ㅈㅣ우는 ㅅㅔ계 원칙을 갈망하는 믿음이 물신 숭배다. 231

슐ㄹㅏ이어마허가 종교에 관하여 하는 책에서 종교 개념을 정의했듯, 무한함을 바라보는 우리의 취향과 의미의 표현이다. 종교란 우주를 대상으로 가지며 인간이 우주와 맺는 관게라고 보았다...그러나 우주만 무한한 게 아니라, 우주를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도 무한하다고 강조한다. 231 서로 다른 의견들이 어깨를 ㄴㅏ란히 하고 똑같이 소중한 것으로 보호받아야 할 개별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통찰이야말고 실제로 종교 역사가 일궈 낸 위대한 성과 가운데 하나다. 233


과학적 세계관은 무수히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있짇 않은 전체에 의미를 불어넣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가 과학적 세계관이다. 233 종교는 ㅎㅏ나의 ㅇㅣ야기를 들려주며, 인간을 포함하는 동시에 인간을 훌쩍 넘어서는 사건의 질서를 알아내려 진력했다. 그러니까 종교는 본래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나아간 의미의 탐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인간의 정신적 진화는..어떤 것도 이미 결정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활짝 열린 의미다. 245


인생경험은 모두 나 자신을 찾아가는 ㅇㅕ정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것이 정신의 이해 과정, 곧 자아와의 만남이라는 의미의 이해과정이다/실제 존재하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종교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는 일종의 의미 탐색이라고 하는 말이 전적으로 옳다. 종교는 최대한의 간극을 뛰어넘어 신에게 나아갔다가 ㄷㅏ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서 비롯한다. 250, 251 종교는 전체라는 에움길을 통해 빙 돌아 오는 고난의 여정 끝에, 자아를 이해할 때 터져 ㄴㅏ오는 감격의 표현이다. 252

동물과 달리 사람은 정신을 갖는데 정신은 인간이 ㅈㅏ기 자신을 인격체로 끌어올리는 정황이다. 다시 말해서 자아를 탐색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과정에서 정신은 영글어 간다/정신이란 우리가 자기 자신을 다루는 ㅌㅐ도라고 썼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이 곧 우리 정신을 나타낸다./정신이 ㅈㅏ기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ㅇㅣ해라는 점이다. 또 자신을 변화시키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발견이다.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255,257 무한함에 빠져 자신을 잃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지 않을 때 정신의 길은 열린다./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어떤 악행이나 음흉한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하는 ㅌㅐ도, 곧 자신의 정신을 지워 버리려는 태도다. 258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며, 의미 맥락 안에서 인간이 서야 할 자리를 찾아주려는 안간힘이다. 264

예술의 의미

상상은 정확히 현실과 혼동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상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현실과의 접촉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한다. 272 예술의 의미는 우리에게 의미의 양면성 혹은 다의성을 친숙하게 만들어 준다. 275 시는 잘 정리된 수학 명제와 똑같이 진리 능력을 가진다. 중요한 차이는 시가 지닌 특성에서 나온다. 시는 언제나 그 자체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284

프로이트는 농담이 어떤 단어가 가진 심리적 강세를 전이시켜 줌으로써 무의식의 연상을 허락해 주어 우리가 웃어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 심리적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은 농담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287

말레비치 작품, 흰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이라는 작품을 감상할 때 세계, 곧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세계는 예술 작품이 앞으로 나오는 배경이 됨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291 배경은 배경으로만 남음을 의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293

다른 것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정황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294

의미장 존재론은 인간의 관점을 존재론적 사실로서 이해한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안에 던져져 있고, 그 사이에서 연결 통로를 만드는 무한하게 많은 의미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점은 인간 관점 그 이상의 것, 곧 존재론적 사실이다. 298

무한함을 향한 감각의 긴 여행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 낸 지식이다. 감각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저 바깥>에, 그러니까 생쥐나 사과나무처럼 <현실 안>에 있다./모든 다른 감각과 마찬가지로 생각감각을 더욱 갈고 닦으며 비판적으로 키워 나가야 하지 않을가. 318

볕뉘

0.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이다. 이어 읽기의 한 권으로 챙겨보다.

1. 계몽, 과학, 예술, 영화, 종교 모두 자신이 원하는 신과 환원할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있다고 여기는 것과 없다고 여기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나은가? 이 분야에 공통사항으로 사람, 인간을 공약수로 두었다. 인간을 위한 과학이고 세계관일까? 종교도, 감각도, 상상도....어쩌면 우리는 무엇에 얽매이거나 발아래 두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사유하는 근저를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2. 저자의 사유는 뭔가 있다고 사유하는 전제를 의심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얽매이지 않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3. 반지성주의라는 책의 한귀퉁이 말이 생각난다. 마찰력을 크게 하기 위해서 그것에 작용하는 모든 힘들이 거스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의 세상이 다양해지려면 마찰력이 커져야 한다. 다른 것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 다르게 다르게......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선결조건.....당신의 뼛 속 깊이 지긋지긋한 X환원론이다. 차근차근 귀기울여야 할 부분들을 적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태도)”도 영웅주의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삶을 다 산 것으로서의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나약한 기분(분위기)에 젖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웅적 태도는 죽음을 마주보고 거기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 을 향해 존재할 때 굳센 “내가 있음(나의 존재)”이 싹틉니다. “그때그때마다 ㄴㅐ가 죽으면서만 경험하는 죽음과 함께 나에게 닥친 것은 나의 가장 고유한 존재, 즉 매 순간 나의 존재가능성입니다. 나는 ㅁㅐ 순간 나의 현존재(삶)dㅢ ‘마지막‘에 있을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ㄱㅏ능성은 나의 가장 고유한 ‘내가 있음‘의 가능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ㄴㅏ는 나의 ㄱㅏ장 고유한 나(자아)로 있을 것입니다. 144, 145

영웅주의와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태연함은 유한성을 거슬러 일하지(슬퍼하지) 않고, 마치 유한성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습니다. 147

‘삶‘과 ‘죽음‘을 분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살고, 전체적으로 죽습니다. 판단 작용에도 들어 있는 구분에서 걱정이 생깁니다./죽음이 죽지 않은 한, 다시 말해서 죽음과 삶이 ㄷㅐ조를 이루는 한,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있습니다. 죽음을 죽이고 나서야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삶과 다른 것으로 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삽니다. 155,156

친절

주인도 손님도 아닙니다. 주인이자 손님인 것이 분명합니다./헤겔의 투쟁에서는 각자가 ㅈㅏ기를 비우기보다는 절대적 자아로 정립하기를 ㅅㅣ도합니다./내가 소유한 것에서 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의문시하는 것은 나 자신의 전체에 해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ㄴㅏ의 부분들 가운데 하나를 ㅊㅣㅁ해하는 것은 무한한 침해입니다. 그런 침해는 절대적이고, 나의 전체와 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으로 인한 ㄷㅐ립은 모두 전체가 걸린 투쟁입니다. 162, 163 성스러운 바보 165 그 친절은 온화하고, 관찰하고(사려깊고), 태연합니다...반면 니체의 귀족적 친절은 “창문”의 친절입니다. 창문 뒤에는 내면성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내면성은 창문이 달린 단자의 친절입니다. 이런 친절은 다른 곳에서 산책하는 온화한 관찰자의 시선의 고귀함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ㅌㅐ고의 치ㄴ절은 ‘선한‘ 것보다 ㄷㅓ 오래되었고, 모든 도덕법칙보다 ㄷㅓ 오래되었습니다.....모든 법과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167, 168

친절의 공감은 심리적 동일시를 매개로 함께 슬퍼하거나 ㄱㅣ뻐할 자아를 모릅니다. 모든 ‘감정‘이 ‘주체‘에 묶여 있다고 한다면, 공감은 ‘감정‘이 아닐 것입니다. 공감은 ‘주관적‘ 감정도 아니고, ‘경향‘도 ㅇㅏ닙니다. 공감은 나의 감정이 ㅇㅏ닙니다. 아무도 느끼지 않습니다. (무아가 느낍니다) 공감은 ㅅㅏ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공감은 친절합니다. / 친절한 함께함(공)은 자아와 다른 ㅅㅏ람 간의 구분이 없는 비어 있음 덕분에 있습니다. 그런 함께함은 자기가 공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자아를 ㅎㅓ용하지 않습니다....이는 증오와 사랑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호의와 혐오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174, 175

선불교의 비어 있음은 부버가 말하는 ㅅㅏ이와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비어 있음은 나도 ㄴㅓ도 없는 부차별한 장소입니다. 그와 반대로 사이는 ㅂㅣ어 있음만큼 비어 있지도 개방적이지도 않습니다. 나와너의 ㅅㅏ이는 ㄴㅏ와 너가 굳게 자리한 ㄷㅜ 개의 극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179

부버는 대화의 끈들을 묶고, 끈들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뻗게 합니다./부버가 ㅁㅏㄹ하는 “너”는 사랑과 긍정의 말로서 강조되어 말해집니다. 감동 혹은 숭고가 근본 분위기를 이룹니다. 이런 근본 분위기는 대화를 나누는 관계의 분위기를 규정합니다. 부버의 말이 친절한 말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182, 184

볕뉘.

0. 벽암록은 사무실 책꽂이 앞에 두고 가끔 봐주었고, 바쇼의 하이쿠도 보면서 다른 느낌에 놀란 적도 있는데, 그렇게 선불교와 하이쿠를 이어놓은 책이다. 사실은 문지강연 소식를 보다가 스스로 소개한 책이어서 수소문을 해서 보게 되었다.

1. 소승을 너머, 대승....불교의 마음 자리는 혜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빡빡한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우기 위해 살펴보기도 한다. 주체와 개인, 이분법의 철학과 학문은 이렇게 다시 짚지 않으면 현실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하이데거의 죽음이 관건인 듯 싶다. 서동진도 최근 감정, 정서 등등 감정이론의 배후가 하이데거의 죽음, 그 존재론에 머물고 있어, 정작 마르크스의 구조를 보지 못하는 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후속 글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일정 일리가 있어 보인다. 진은영 역시 하이데거의 죽음이 지나치게 개인을 돋보이게 만들고, 사유를 거기에 멈추게 한다고 한다.

2. 하이데거와 부버를 다룬 것. 특히 부버를 다른 것이 새롭다. 김상봉교수가 너와 나의 정신적 임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겹쳐지는데, 어쩌면 부버의 자장인 것을 아닐까하는 의심도 곁들여진다. 이렇게 서양철학의 경계를 지워나가거나 새롭게 사유해보자. 멈추거나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대로 흐름을 쫓아가며 총체적인 사유를 곁들이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이나 통찰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3. 한병철은 어쩌면 자신의 책은 쓰레기같다고 자조하는 지도 모른다. 너무도 쉬운 책들을 써내어 부끄럽다고, 그 중에 그래도 덜 부끄러운 책이 이 책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4. 지금 여기, 한반도는 섬나라인지도 모르겠다. 어디 철도도 사유도 이어지지 못하고 섞이지 못한다. 서양철학과 서양사고가 횡행한다고 할 수 있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확장과 연장이 절실한 지도 모르겠다. 몸에 맞는 옷처럼, 진리와 철학도 계절을 타고, 몸에 맞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어읽기 가운데 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