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고 이동하지 않는 주체, 운동, 언어는 ‘운동권/域‘이라는 또 다른 기득권 집단과 ‘연줄‘ 집단을 만들 뿐이다. ‘서울, 중산층, 젊은,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 중심의 여성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면 이들은 사회가 수용 가능한 이른바 ‘여성다운 여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문제는 연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령에 따라 권리가 분배되는 정치경제학적 조건에 있다는 것이다. 성관계의 자유를 요구하는 입장도, 금지의 필요를 주장하는 입장도 모두 섹슈얼리티를 ㄷㅏ른 사회 관계로부터 독자적인 장치로 본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적인 문제 의식이다. 14

양성평등에 기반한 이성애 가족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없다면,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양성평등 패러다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동성애자는 양성평등 패러다임의 ‘가장 큰 피해‘ 집단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는 양성의 범주, 인간의 범주를 문제 제기하고 교란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다.....동성애자 인권 억압의 맥락은 종교 갈등, 계급, 혁명 후의 건국, 영토 분쟁, 섹슈얼러티 통제 등 다양한 시공간의 역사적 상황에 맞게 분석되어야 한다. 17

우리가 비판받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역사를 채우겠는가 19

이분법은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적, 서구 중심적, 미국 중심적, 서울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논리는, 말하는 주체와 그에 의해 규정된 대상의 존재를 전제한다....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29

모든 차이는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만드는 사람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이분법적 사고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3의 성‘이든 모든 인간의 해방과 상상력을 제한한다./이분법은 인간의 지식 전반의 구성 원리다. 30

언ㅇㅓ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나머지 세상만 묘사한다/이분법은 무엇인가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인식의 절차이자 과정이다./이분법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를 위한 사고다 A가 아닌 것을 사용하고 배치하고 규정할 수 있는 A의 권력을 말한다32,33

성별 사회에서 여성은 외모와 나이, 남성은 사회적 자원 여부가 남성과 여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기 전에, 남성과 여성이어야 하는 젠더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진정한 남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37

여성을 규정하는 수많은 개념의 핵심은 성적 활동이다/실제로 그렇게 살다 보면 남성처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남성‘이 된다. 이것이 몸의 체현이다. 38,39

섹스 스펙트럼도 컬러 스펙트럼처럼 생각할 수 있다. 자연 세계에는 저마다 다른 파장, 주파수가 있고 이는 빨강, 파랑, 오렌지, 노란색 따위로 변색된다. 41

인터섹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생물학과 사회학에 대한 기존의 인식 모두를 바꿔야 하는 일이다./보편성은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평등은 희망이자 지향이지 현실이 아니다/보편과 특수는 짝을 이루면서 권력의 필요에 따라 평등, 자유,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특정 사회 구성원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 아니라 ㅊㅏ이다. 이 차이를 ‘또 하나의 보편‘으로 드러낼 때, 기존의 보편성이 실제로는 편파적이고 당파적임을 인식할 수 있다 특수성은 보편의 하위 개념인 반면, 차이는 보편성의 전체주의를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보편과 동등한 개념이다./양성평등은 ㄱㅏㄹ등, ㄷㅐ립논리일 수밖에 없다 44,45,46,47

평등은 다른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ㄷㅏ른 이들과 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ㄱㅐ인의 상황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평등은 언제나 논쟁적이고 경합적이다. 또 평등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D 안 된다. 적용의 주체와 ㄷㅐ상의 구별 자체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47

한국 사회에서 ‘사적 영역‘의 변화없이는 여성의 지위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여성이 집 밖으로 나와 사회로 진출한, 그 내용은 무엇인가? 이중 노동, 워킹 푸어, 비정규직의 여성화, 빈곤의 ㅇㅕ성화, 남녀 임금 격차의 지속...사회 진출 자체가 평등 혹은 여성 상위로 인식되는 것은 그만큼 “여성이 있을 곳은 집”Dㅣ라는 강력한 의식의 반영일 뿐이다./..노동조합, 지여가회, 진보 정당,학부모 역할까지 요구될 경우 삼중, 사중 노동이 된다. 50, 51

여성들은 지난 30여 년간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 깨달아 가고 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에서 이제는 “엄마, 다시 ㅌㅐ어나면 그 남자랑 결혼하지 마, 나 낳지 말고 엄마 인생 살아”Fㅏ고 외친다./평등의 기준이 경쟁, 승부, 부패, 우열이 작동 원리인 남성중심의 ‘사회‘인 한, 진정한 양성평등은 없다...평등보다 책임감으로서의 여성주의 윤리의 전환이든 ㄷㅏ른 세계가 ㄱㅣ준되어야 한다. 비유하자면 칼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몇 배에 해당하는 발본적인 변환이다. 53

나는 육아에서 국가보다 남성 ㄱㅐ인의 인식과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국ㄱㅏ는 남성을 ‘따라갈‘뿐이다.....남성도 여성이 겪는 육아와 모성으로 인한 죄의식, 스트레스, 자기 분열, 커리어 포기 경험을 겪어야 한다/..한국 남성들은 자기 ㄱㅖ발과 시간 ㄱㅣ획처럼, 인간으로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기 관리부터 선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5

볕뉘

0. 여성운동이나 장애인운동을 읽으면서는 늘 오독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운동이나 진보운동이 이 흐름들을 받아들이거나 흡수하면 어떨까하고 말이다. ㅇㅓ쩌면 그것이 과정이나 여러가지 연결된 몸짓이라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부문?운동이란 것이 자신의 흐름을 확장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간절하기도 한 것 같다.

1. 다른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여성운동의 맥락, 기독교가 반동성애 활동에 올인하는 이유 등 여러 최신흐름들을 적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2. 며칠 전, 자 살자라는 책에서도 언급한 이야기는 이분법이다. 남을 발견해낸다는 것. 존재의 근거를 남에게 둔다는 것. 삶이란 것은 어쩌면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남도 좋고, 나도 좋고...죽음앞에 선명해지는 것. 활동이라는 것. 운동이라는 것. 이런 활동의 문제는 서로 서거나 피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생각이나 활동의 영점을 늘 염두에 두는 일이 시작이자 끝일 것이다.

3. 사회의 변화는 무척이나 빠른 듯하다. 기득권-중산층이자 남자이자 수도권이자 이성애자 젊은이지향자-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배려뿐만 아니라 더 혹독한 자기반성과 개혁의 시기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다. 일에 호흡도 맥락도 없이 일만 하고 있다. 시간을 앓고 있다. 장ㅅㅣ간 일문화를 도려내는 일과 자신의 일상을 다르게 사는 일이 그래도 화두처럼 앞으로 십여년이 지났으면 좋겠다. 지금보다는 서로 살맛나는...십년 뒤가 도ㅣ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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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 살더라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곁의 경험을 듣지 조차 못하는 우리의 문제를 사회사상사 측면에서 쉽게 잘 짚어놓은 [단속사회]. 그 책의 끝 부분에 우리에게 가장 큰 폭력은 사회가 낳은 자살임을 강조한다.

 

그(녀)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의사표시를 했다. 사회의 그 구조만큼, 그 구절에서 생각을 가다듬게 되는 것은 죽기전에 다른 삶의 선택이나 다른 삶들의 갈래들을 서로 상상해보거나 기댈 수 있는 틀이 있기나 한 것일까? 낭떠러지 직전의 사는 여러 갈래갈래 길들의 사유는 못해보고 우리는 극단적 선택밖에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가장 용감하지만 가장 용감하지 못한 삶들이 꽃잎처럼 지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화두로 삼아 우리의 아픔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구조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볼 것을 저자는 요구한다.

1. 죽음의 사유 그리고 그 낭떠러지에서 얻는 삶의 응어리들.

작은 서점 매대에 놓인 이매진출판사 기획도서들을 보다나니 출판사의 성향이 보인다. 팔리지 않을 책들만 굳굳이 출간하는 이유가 보였다. 굳이 평한다면 예술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그렇다고 하자. 얻고자 하는 사유의 언저리들이..가끔 실뿌리들이 더 땅 속 깊이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책들과 책들 사이의 연결점들도 보이니 말이다. 그 매대에서 몇 권이 손길에 갔다. ㅇㅣ 책은 위의 연유로 읽게 되었다.

 

자살을 대신할 수 있는 101가지 지침이 보기 좋게 있었지만, 정작 읽으면서 저자의 간결한 논리에 푹 빠지게 된다. 억압의 출발은 우리 편인가 ㅇㅏ닌가에서 ㅅㅣ작한다고, 이분법의 적대에서 비롯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말과 단어, 낱말에 휘둘리면 안된다. 회색지대에 있는 새로운 낱말과 단어와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에게, 우리에게 알맞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상력은 억압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의 쳇바퀴는 계속 그 안에서 ㅁㅓ금는 것이다. 그 틀밖의 말과 낱말과 언어로 사유해야 새로운 상상이 나오고, 그 쳇바퀴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거야 라고 한다.

 

죽음과 맞딱뜨려놓고 생각해보자. 살고싶지 생각해봐. 젤 하고싶은 거. 꼴리는 ㄱㅓ. 그래그래 살잖아. 억압과 모멸과 수치란 삶의 구렁텅이는 늘 따돌리고 죽음꽃을 ㅍㅣ우고야 말지. 거기야. ㄱㅓ기서부터 시작된거야. 잘못된 삶이란... 꼴리는거에 이름을 붙여봐. 새로운 ㅇㅣ름을.하고싶은 것을 나누어봐. 거기에도 이름을 붙여줘. 포기해. ㄱㅏ진 것을 ㄴㅐ려놓아. 살아. 어떡하든 다 살아. 걱정하지마. 죽음으로 말하지 않아도 돼.

2. 과로를 국민병으로 여겨야 풀리는 우리의 문제들

여성의 절반, 기혼여성의 절반, 배우자가 있는 가구의 절반. 맞벌이 모델이 일반적인 가구 형태를 자리잡으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지체된 혁명기라고 표현한다. 노동시장으로 여성의 진출은 급격히 늘었는데, 가정 영역으로 들어간 남성은 적고, 그 변화 속도가 무척 느리다는 것이다. 이런 변환기에 가사노동의 불균형은 심화되고, 장시간 노동은 고착되고, 성별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지체를 고착시킨다. ㅇㅣ런 이유로 여성들은 결혼이나 출산을 지연하거나 회피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신성 ‘일‘과 ‘이주‘ 일 휴가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세븐일레븐(7출근/11퇴근)의 사회는 칼퇴,땡녀,마미트랙, 삼팔선,사오정,사필귀정,오륙도,육이오라는 말들을 만들어내 자발적 관리를 ㅇㅣ끌어낸다. 빨ㄹㅐ는 더 자주 빨며, 집안 청소는 ㄷㅓ 자주 하며, 요리하는 시간은 더 세심해야하고, 아이는 더 공을 들여야 한다. 집밖은 24시간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다. 일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남편과 아내는 바톤터치를 하듯 일과 가정생활시간이 비껴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장시간노동이 낳는 휴가라는 것은 티브와 스마트폰을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일상에 붙어있는 영역을 상품화시키고 맡기고 산다. 악순환은 끝이 없다.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하고 싶어 하던 일이 어느 사이, 영혼조차, ㄱㅏ족의 영혼들 조차 팔지 않으면 살아지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자유가 무언가를 하지 않을, 무언가를 따로 할 자유라는 것을 잊으면서 살아질 수밖에 없다.

3. 시장은 집요해도 아주 집요하다.

시장은 감정을 점유했고, 사생활를 포위하고 있다. 사라. 바쁠텐데 그냥 사시라. 감정을 케어해드릴텐데 무슨 걱정이신가? 저자는 감정노동의 출발 연구자이다. (1983) 돈잘버는 여자 밥잘하는 남자란 책을 읽었는데 그 저자이기도 하다. 사적인 삶의 상품화라는 읽고 싶은 책과 연구결과를 대중화하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분이기도 하다.

도와준다. 시장은 늘 손을 내민다. 바쁠텐데. 도와줄테니 손을 잡으시라고...어여 잡으시라고 말이다. 덥쑥 잡거나 마지 못해 잡으면 그 도움의 손길이 달콤하다. 아. 향긋하다. 왜 진작 이 맛을 몰랐던가. 결과는 감미롭다. 과정은 서서히 잊혀져 간다. 그냥 의식하지 않고 ㅎㅏ던 일들이 나에게서 ㄸㅓ나간다.
렌트 카, 렌트 프렌드, 임대주택, 임대친구라....

볕뉘.

0. 편의점 인간, 안녕주정뱅이의 월 35만원으로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을 조카에게 남긴 이모. 또 다른 삶의 결을 가타부타 할 수 있을 것인가? 엑스맨을 두어 저성과자를 평가하고 따돌린 ㄷㅐ한항공 승무원들의 자살. 경쟁의 시스템에서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 외에 삶의 길은 없다고 느끼는 자의 추락. 어떻게 그렇게 살아. 차라리... ...노무사?가 100억을 만들고 편히 살려고 음란물 시장에 뛰어든 자. 추락한 뒤 삶들이 없다고 생각하는자. 추락한 뒤 삶들에 아무 관심조차 없는 자. 우리는 ㅇㅓ떻게든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합격품이 아니라 불합격품에도 동일한 한 번의 삶이 존재한다. 삶들을 ㅇㅏ끼는자. 삶들을 존중하는 자. 그래야 살 수 있다. 제대로. 무너져도 일어설 수 있다. 삶들을 예비하는자. 다가오는, 닥칠 삶들의 길목에 서서 새로운 사ㄹㅁ들을 안내할 줄 아는 자.

1.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삶을, 삶들을 살아야 하고, 살아가야 하고, 뻥 뚫리도록 우리의 신작로를 걸ㅇㅓ가야 한다. 쫓기지 않는 삶의 길. 쫓기지 않는 삶의 말, 낱말, 단어들. 우리만의 삶의 상상으로 거침없이 가야한다. 필요하고 원해서가 아니라 살아지지 않도록 살아가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야 한다. 가다가 또 터벅터벅 걷는 ㅇㅣ를 만나고....또 타박타박쫓는 아이들과 함께.....살아지는 길은 하나이지만 살 길은 무한하다.

2. 알ㅇㅏ야 할 것도, 알아내야 하는 것도, 공부할 것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 느낌을 믿고 ... 가는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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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은 각자의 지도력, 지위와 권력, 정직성, 감정, 성격, 성별, 나이, 사회적 계층, 격식을 차리는 정도, 조직 내의 서열관계등에 따라서 기능어를 다르게 사용한다. 결국 이렇게 사소하고 숨어 있는 단어들이 우리의 정체성, 성격, 사고방식, 심리 상태, 타인과의 관계, 상대적 지위 등을 훨씬 더 많이 드러낸다. 우리 뇌는 이런 단어들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 <미묘한 힘>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10

단어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심리학책이다. 언어학자들은 주로 언어 자체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그들의 심리 상태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에 관심이 있다. 이때 단어는 사람들의 생각, 감정, 동기, 사회적 관계 등을 알아내는 강력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11

여자들은 <따뜻한 우리>를, 남자들은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는 우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단어인 이유는, 이 단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절반이고 말하는 사람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데 쓰이는 경우가 절반이기 때문이다. 13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명사 그룹에 속하는 단어들을 더 많이 사용하고 권력과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대명사와 동사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는 대명사의 사용을 통해 동료들 사이에서 자기가 제일 서열이 높다고 혼자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도 있다. 13

진실을 말한 사람은 거짓을 말한 사람에 비해 더 많은 단어, 더 어려운 단어, 더 길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고 더 적은 감정 단어를 사용한다. 또 <나>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많이 언급한다. 특히 무죄로 밝혀진 사람들은 1인칭 단수 대명사를 훨씬 많이 사용했다. 15

억제된 권력 동기를 발견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이 부정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16

대입 논술에 구상명사와 어려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현재형 동사와 대명사를 적게 사용하면 이후 대학생이 되어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이는 더 똑똑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 체계가 사물과 사건을 범주화하여 생각하는 ㅅㅏ람에게 ㄷㅓ 유리하기 때문이다. 17

사람들은 긍정적 경험에 대해 쓸 때 <우리>라는 단어를 특히 많이 사용한다. 행복할 때는 구체적 명사를, 슬픔과 분노에 차 있을 때는 인지적 단어를 많이 쓴다. 18

나의 접근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 중에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인지 과학자 스티븐 핀커, 사회 언어학자 데보라 태넌, 인류학자 애나 비어즈비스카 등이 있다. 19

기능어 사용은 기본적인 사회적 기술을 갖추었다는 표시다. 이와 반대로 명사와 동사에 대해 말하려면 어떤 문화에서 공유하는 범주와 단어의 정의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62

1.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나>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2.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남녀가 같다.
3. 긍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남녀가 같다.
4.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인지적 단어를 ㄷㅓ많이 사용한다.
5.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사회적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246-249

남ㅈㅏ들은 자기가 마주치는 사물의 수를 세고, 이름을 붙이고, 체계화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여러 범주로 나눈다. 반면 여자들은 주제를 ㄱㅐ인적 문제로 바꿔 생각할 뿐만 아니라 주제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더 역동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따라서 변화에 대해 말하려면 동사가 ㄷㅓ 많이 필요하다. 250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삶에서 더 중요한 부분이 된다고 본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 상태에 ㅈㅓㅁ점 더 많은 관심을 쏟음으로써 감정을 더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결국 부정적인 감정을 덜 느끼고 더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70세가 넘으면 친구가 ㄷㅓ 적어지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 관계망은 더 튼튼해진다. 265

2.

 

 

우에노 지스코의 느낌을 팝니다.와 중년은 처음이라는 책을 욕실에 두고 조금씩 본다. : 앞의 책은 별반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 없어 중동에 그만두었는데 인상깊게 읽었다는 일인으로 인해 관심을 조금 넓혀본다. 두 번째 책 역시 생활과 삶에서 그 주제 역시 남녀차이가 크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노익장을 발휘하는 철학자나 올리버색스의 전기들만 살펴봐도, 말년이 때론 세련미와 숙련미에서 남다르다. 그런 혜안 역시 중년을 중년답게 보내는 기술들의 축적이기도 하겠다. 중년이 되자마자 조로하여 어른이로 가득찬 지금여기가 숨막히기도 하지만, 그런 ㅇㅓ른이들은 강박처럼 젊음만을 쫓으려한 연유때문인 것 같다. 마음의 젊음은 잊고 포르말린에 잠긴 젊음과 건강만을 추구하기에 벌써 ㅁㅏ음은 파뿌리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예의를 차리자란 ˝매너를 지켜주시겠습니까˝란 책자 가운데 ㅎㅏ나가 자주가는 상점에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했을 ㄸㅐ 껄덕대지 않는 기술이라고 굳이 적어둔 기억이 난다. 늙어가는 것. 늙어간다는 것. 압축근대화의 물결에 정신들도 차리기에 버겁지만, 그 결들을 발견하는 풍요를 누리는 법도 일찍 알아두면 나쁠 것도 없을 것 같다. 일본와 우리 사이는 10-15년이란 삶의 격차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 같다. 말년의 양식이 아니라 중년의 양식이라는 것 삶문화로 틀지어지는 것. 한번 생각해봄직 하지 않을까? 아직도 많이 남은 말년을 위해서라면... ...

3.

늙어가는 것을 너무 경멸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없는 청춘이 그림자의 여운처럼 기억의 뒤편에서 꽃피듯이, 젊음도 하나둘 늘어나는 희끗희끗하는 흰 머리결 속에서 찬란해지기도 하는 법은 아닐까? 지금 여기 여성 남성 단어의 결이 아니라 빼앗긴자들의 행성에서 나뉘는 ㄸㅏ뜻한 <우리>의 단어를 많이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쓰는 단어의 3할이라도 바뀌는 삶들을 꿈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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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나니
읽다가 보지 못한
시인의 동선과 호흡이 콕콕 박힌다

사월을 노래하기가 쉽지 않고
노래하는 김사월의 음색은 쿡쿡 박히고
이렇게 절창의 사월로 채우기는 더 쉽지 않고

메워진 틈은 더 벌어지는 에이,프럴

시가 어렵다는 사람에게
시집을 선물하며 꼭 쓰는 말이있다는
지방의 등단하지 않는 한 시인은

‘삶은 더 어렵다‘고...더 어려운데
‘시가 뭐가 어렵냐?‘
고 쓴다.
그말을 들은 나는 그 말을 꼭 써먹어야지 한다.
시는 이리 손 쓴 것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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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3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삶을 고요하게 흥분시키는 것들 중 하나는 너 자신에게서 잠시 떨어져 서서 너 자신이 아름다운 어떤 것의 창조자가 되는 것을 차분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그것이 단지 흩날리는 재일지라도 말이다.”

더욱이, 댄디즘은 정치적이지도 현상학적이지도 않은 예술의 개념을 사용한다. 댄디들에게 예술은 아름다움, 외양 그리고 치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학적인 삶은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댄디즘은 예술로서의 삶으로 유혹하는 그러나 오도하는– 매력적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의 미학적인 이상은 참여에 대한 모든 욕구를 단념하는 것이다. 그 참여가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그 외의 것이든 간에 말이다.

니체는 신을 믿을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꾸며낸 존재로 이해하는 신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기는 확고한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니라 생산되고 형성되며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실러에게서처럼, 우리가 완전한 도덕과 시민성을 끝까지 함양할 수 있도록 만드는 미학적인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중반의 댄디들의 경우와 같이, 우리는 예술작품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확고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항상 우리의 개성과 예술작품의 동일성이 잘해야 규제적인 이상이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들 또는 자아에 대한 이전의 우리의 확신을 상실하고, 자기는 창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아래에서 보게 될 것처럼, 자기 창조를 위한 목적뿐 아니라 수단 또한 대부분 예술과 미학에서 비롯된다.

그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며, 또한 시인이면서 배우이고 관객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가는 그의 작품과 하나가 된다. 비극배우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작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근원적 연합이라는 최상의 환희를 위하여 모든 자연의 예술적 힘은 이 격렬한 도취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예술가는 잠깐이긴 하지만 예술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능력을 소유한다. –예술가는 예술을 위한 매개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예술이 될 수도 있다.

철학자와 예술가의 우아한 춤과 비슷할 것이다. 학문과 예술, 냉엄한 진리와 가상은 변증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3의 상태”, 대립되는 영역들 사이를 종합하는 예술을 통해서 합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의 예술이 철학이다……-우리에게 우리 자신인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빛과 불꽃으로 변화시키는 이 삶은 또한 우리와 만나는 모든 것, 그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특정한 생리적 선결 조건이 필수 불가결하다:도취……도취의 본질은 힘이 상승하는 느낌과 충만함의 느낌이다. 이런 느낌에서 우리는 사물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물들에게 받기를 강요하며, 사물들을 파괴한다–우리는 이 과정을 이상화라고 부른다.

보다 암시적이고 구체적인 어조로, 니체는 명백하게 삶의 기술이 존재의 사소한 것들”, 우리의 식습관, 즐거움을 주는 것들, 가치들, 실수들, 목적들 그리고 우연한 사건들을 선취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삶의 기술은 이런 다양한 존재의 차원들을 예술과 학문의 이중적인 힘으로 지배적인 새로운 이상에 맞춰 변경하는 것이다. 자기 실험과 자기 생산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는 삶 그 자체의 사소한 것이다. 오직 일상의 삶의 다양한 양상들을 지배하고 변형시킴으로써 우리는 완성가능성과 특별한 이상을 지향하는 삶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니체의 학문 개념에서 비판개념으로 그리고 가상으로서의 예술에서 혁명으로서의 예술로의 변형을 드러낸다. 예술로서의 삶에서 저항의 계시는 예술 그 자체 안에서 발견되는 부정성에 의해 고양되고 주체와 파괴된 객체의 관계를 다시 구상하는 사유의 부정적인 형식들을 위한 가능성에 달려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창조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것들을 강제하는 사유방식과 존재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주체와 인식된 객체의 잘못된 동일성에 반대하는 사유는 우리가 억압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사유방식과 존재방식의 해체를 시작하는 수단이 된다.

부정 변증법이 사유의 자기 반성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유가 참이려면, 어쨌든, 오늘날에도 사유가 참이려면, 사유는 또한 그 자체에 반대하는 사유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함의한다. 만일 사유가 극단적으로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그것은 친위대가 희생자의 비명을 들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 즐겨 사용한 음악과도 같다.

만일 예술이 잘못된 객체성 또는 주체성에 빠진다면, 예술은 선전이나 나르시시즘이 될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실재에 너무 많이 의존하거나 너무 조금 의존하는 일 없이 사회적인 비판을 유지하는 능력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전의 부정적인 사유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본질적으로 저항이다.

예술작품은 그 자신을 넘어섬으로써, 즉 그것의 고유한 주체와 객체의 매개를 넘어섬으로써, 초월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술작품이 그것의 실현되지 않은 부재, 모순 그리고 가능성들을 해명하는 허구 또는 가상을 통해야만 하더라도 말이다.

예술이 완전하게 경험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분석을 통해서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만일 그것이 완전하게 경험되는 것이라면, 사유를 필요로 하므로 다른 것이 아닌 모든 제한을 거부하는 사유인 철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자율적인 반성의 가장 유용한 수단인 예술작품은 그것의 실천적인 중요성을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한층 더 비판적인 사유를 요구한다.

예술작품(그리고 그것에 의해 미학적 이성)은 역사, 사회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편전을 통하여 부재를 변증법적으로 확인함으로써 객체들에 대한 잠재적인 변형과 객체를 그것의 충만함에서 보도록 만드는 실재에 대한 개혁을 시사한다. 애도의 행위와 그것의 긍정적인 전환은 예술에서 이 치유적인 운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일련의 개념들을 확장시킴으로써 아도르노의 중심개념인 형이상학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의 형이상학이 현재의 부정성과 긍정성을 고려하고 그것들을 넘어서 사태의 다른 측면들을 보여 주는 사유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형이상학이 숙고해야 하는 것은 개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로 자기 자신 너머를 볼 수 있는가이다.” 요컨대 형이상학은 소망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를 초월하는 능력은 결국 아도르노의 형이상학개념이 되는 미학적 추론의 특징이다. 예술작품에 의해 조성되고 미학에 의해 소생되는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은 변화되고 희망적으로 회복된 미래를 설정하기 위해 현재하는 실재에서의 부재를 입증한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은 미학적 이성의 필연적이고 실천적인 결과물이다.

아도르노에 의해 제시된 형이상학은 구체적이지도 실천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상상력의 작업으로 계속해서 무산된다.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의 많은 작업과 같이, 형이상학은 대체로 실전적인 충족을 필요로 하는 초-이성적 개념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기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르쿠제는 암암리에 아도르노의 미학과 규범적인 인식론의 많은 부분을 제 것으로 삼아, 저항적이면서 즐겁고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그리고 마르쿠제는 그렇게 하면서 미학이라는 개념을 그것과 부정 변증법과의 순수한 결합에서 그 개념의 그리스적 근원인 아이스테시스, 즉 감각성과 느낌이라는 방향으로 수정한다. 마르쿠제는 미학에 대한 이 두 번째 정의를 통해서 현재의 현실들과 단절한 진보된 사회를 위해 더 큰 평등과 기쁨 그리고 고통과 부정의의 축소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가라는 새로운 명령을 전개한다. 이 개념은 결국 산업주의와 과학기술의 방편들을 폭력과 압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희망을 위해 사용하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라는 마르쿠제의 개념이 된다.

마르쿠제의 맑스 독해에 따르면, “올바른 이론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실천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러한 변화된 세계라는 목적은 부르주아적인 산업주의에 의해 창조된 물질적인 잉여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양질의 삶이 무엇인지 긍정적으로 다시 구상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인간의 행복에 관한 관심과 개인의 해방을 획득하는 데에 필요한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이해, 이 모두는 마르쿠제의 사유에 가득하다. 이와 유사하게, 더욱 확장된 맑스와의 만남 이후에,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작업을 그의 기획에 긍정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에 착수한다. 예를 들어,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현실 원칙이라는 개념을 진보된 산업사회에서 수행 원칙으로 재해석한다. 그리고 억압적인 합리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강조는 보존하되 그것을 생산성의 현대적 기준에서 고려한다.

관건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을 소비하고 무엇이 그들의 걱정거리와 의욕을 차지하는가이다. 마르쿠제는, 이를 위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형태들을 개선하고 그것들을 다른 삶의 방식, 스스로 선택하고 즐거움을 주며 정의로운 삶의 방식들로 대체하는 야심찬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꿈은 인간의 조건들을 상상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 꿈은 정치적인 힘이 되어야 한다.” 또는 더욱 명시적인 언어로 말하면, “예술작품은 현실의 지배적인 질서를 변형시킨다.” 마르쿠제는 명백하게 예술을 정치적인 행동에 필요한 비판적 의식의 발전에서 주요한 요소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혁명적인 기획의 부분으로 이해한다. 아도르노가 미학과 부정 변증법이 형이상학으로 끝나는 데 만족했던 반면에, 마르쿠제는 정치적인 차원을 미학의 핵심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이 마르쿠제의 공식적인 설명에서, 감각적인 사태는 또한 예술작품에서 단순하게 표상되는 것이 아닌 해방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성은 예술작품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에 정치적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은 세계에 대한 표상과 감각의 해방 사이의 주름을 가로지른다. 후자의 의미에서 예술은 인간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끼고 볼 수 있도록 만든다. 마르쿠제의 예술의 두 번째 차원에 대한 이 독해는 그리스 전통에서의 아이스테시스의 개념들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자율성을 윤리적 요구와 연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추가적인 이로움을 가지고 있다. 미학을 감각성을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은 정치적인 혁명에 대한 요구가 미학적 부정성과 그것의 형이상학적 차원에 놓여 있는 이론적인 기초와 연결되는 마르쿠제의 사유에서의 중요한 변화를 나타낸다. 이런 방식에서 이해된 미학은 감각의 해방에 대한 요구를 포함해야 한다.

그는 이 슬픔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래서 새로운 과학기술적인 일-세계는 노동 계급의 부정적인 태도를 강제로 약화시킨다. 후자는 더 이상 확립된 사회의 삶의 모순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만일 노동 계급이 더는 확립된 질서를 부정할 수 없다면, 미래에 대한 미학적 충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필요에 대한 만족에 근거하는 마르쿠제의 미학적 사회라는 개념은 실현되지 않는다는 심각한 위험에 처한다. 만일 미학적 의식의 임계량을 창조하기 위한 가능성이 억압된다면, 미학적 삶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그러나 마르쿠제가 사회 개혁을 위한 토대를 진보된 산업사회의 부와 수단적인 합리성에 대한 거절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았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직 문화, 물질주의 그리고 정치의 복잡한 관계를 해체함으로써만, 우리는 사회 그 자체의 물질적인 토대들을 바꾸는 체계적 변화를 정초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미학적 추론과 그것의 일상적인 대상의 가치 그리고 가능한 구원– 에 대한 관심을 통해 시작해야 한다.

비판이론이 예술로서의 삶에 해방과 정의를 위한 추동력을 제공한 반면, 현상학은 세계에 관한 생생하고도 신성한 체험의 가능성을 엿본다.

그리고 수많은 서구의 사상이 지배와 억압으로 형성되었다면, 시도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는 능력을 가진 비판적 사유와 동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적 사유가 저항으로 얻어진 것인 반면, 시는 복원과 긍정으로 돌아간다. 시는 그것이 치유적이고 소통적인 것인 한, 시는 복원과 긍정으로 돌아간다. 시는 그것이 치유적이고 소통적인 것인 한, 엔드레제의 산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부름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고 근원적 대상으로 통합된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데 필연적인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각 장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통 가까운 것에 더 관심을 가질지라도이러한 부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안식과 운동의 측면에 있는 대지라는 존재의 존재방식을 다시 배워야 한다. 이것은 그로부터 모든 안식과 운동이 분리된 토대인 존재이며, 신체를 구실로 삼지 않는 존재, 그것들로부터의 분할을 통해 도출된 원천으로서의 존재, ‘장소를 가지지 못하는 원천으로서의 존재이자 모든 장소를 에워싼 존재, 노아의 방주가 홍수로부터 살아 있는 피조물을 지켜 주었던 것처럼, 무를 넘어 모든 존재자를 지켜 주는 그런 존재이다.

인간이 그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인간은 성찰하고 애쓰고 건축하고 노동하며, 간청하고 감사하는 일에 자신을 넘겨주고, 그는 그러한 자신을 이미 탈은폐로 데려온 모든 장소에서 발견한다.” 성찰적 사유는 존재자와 세계가 부름을 받고, 심지어는 간청하며, 나타나는 과정이며, 곧 열림과 복종으로 받아들여진다. 성찰적 사유의 행함은 세계 앞에서의 간청과 굴복에 속하는 것이다.

사건은 분명해진 공간 안에 인간과 더불어 일어나는 존재자를 통해 존재를 허용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공간, 시간적 의미에서의 발생도 아니다. 오히려 사건은 비이성적이고 공간적이거나 시간적이지 않은 장소를 나타낸다. 이 장소에서 존재와 인간은 주어진 근거이자 사유하는 존재자로서의 그 본성 자체에 있어 서로에 대한 상호의존성 안에서 마주한다. 우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사유할 수 있고, 이와 유사하게 존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남 안에서 자신을 내어 준다. 이 경우 시와 사유는 사유와 나타남의 가능성을 모두 보호한다.

그것은 바로 체화된 시적 사유 안에 전조된 열림이 우리 주위세계를 압도해 버리는 어떤 경험을 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리옹이 드러남과 같은 경험을 벼리어 내는 것과 관련해서, 나는 그러한 특정 경험이 개념화와 관련하는 우리의 능력을 압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점일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러한 논증의 노선은 메를로-퐁티와 하이데거의 노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주장이 특정 경험이 변혁적이면서도 경이로운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예술로서의 삶이 내재성에 대한 긍정을 확고하게 견지하긴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경외와 자기 초원의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열어 준다.

체화된 시적 사유가 내용을 특성화하지 않고, 현상의 잠재적 지평이 나타남에 관한 신체적 부름과 보호를 통해 밝혀지는 한, 그것은 포화 곧 계시의 경험에 개방적인 것으로 남겨진다. 체화된 시적 사유는 평범한 또는 비범한– 현상의 본질만큼이나 불가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술 작품과 계시의 유비적이고 기능적인 관계 때문에, 본질상 예술적인사유형식은 계시를 사유하는 가시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작품이 포화에서 자신을 개방하는 한, 예술작품 내에 있는 긍정적 요소를 그 자체로 모형화하는 사유방식 또한 일어난다. 왜냐하면 마리옹에게서 계시는 언제나 현상 내에 기재된 것이기 때문에 계시는 체화된 시적 사유 내에 있는 항구적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체화된 시적 사유는 특별히 선-반성적 감각 경험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 마리옹에 의하면, 모든 계시는 경험이 그 본질상 선-반성적인 방식으로 개념적 범주들을 압도하는 감각적 직관에 대해 잠재적이다.

오히려, 나는 계시와 같은 어떤 것이 일어난다면, 이 경우 체화된 시적 사유는 그 수용을 위해 필연적인 선행조건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싶다. 이처럼 체화된 시적 사유는 계시와 같은 어떤 것의 가능성으로의 단호한 개방성이다.

반향이 파괴로 나타날 때, 그것은 비논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 조건의 통일성을 요구하는 것은 삶의 힘이지 죽음의 힘이 아니다. 그것의 가장 심오한 논리는 파괴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논리다. 본래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반항의 운동은 그것이 존속하고 있는 모순의 항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허무주의적 해석이 반항 속에 고립되는 아니오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담고 있는 예에 충실해야 한다. 반항의 논리는 인간의 조건의 불의함에 포함되지 않는 정의를 뒷받침하려는 것이면서, 보편적인 오류를 증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밋밋한 언어를 내세우는 것, 그리고 인간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위해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다.

혁명의 정신은, 만일 그것이 살아 있는 것으로 남아 있으려면, 반항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고 그 기원에 충실한 유일한 사유의 체계에서 그 영감을 도출해야만 한다. 그것은 한계를 인정하는 사유다.” “한계를 인정하는 사유는 카뮈의 초기 저작에서 요청되는 투명한 사유다. 그런데 부조리의 경우처럼 한계에 대한 인정은 이제 역사 구조와 혁명의 정치 내에서 관찰된다. 우리의 한계는 더 이상 인간의 열망에 대한 추상적 부정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억압이다.

사유처럼, 예술은 중간 길을 확고하게 지지함으로써 그 자체로 유지된다. 비판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역사를 부정하거나 넘어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부터 역사를 변형시키고 역사 내에 머무름으로써 자율적인 것으로 남겨지게 된다.

모든 반항 속에는 통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요구에서 통일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불가능성과 대체적 우주의 구성이 발견된다. 이런 관점에서, 반항은 우주의 구성자다. 이것이 또한 예술을 정의한다. 반항에 대한 요구는 실질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미학적인 요구다.

우리는 만인 공통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예술가로서의 존재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힘이 닿는 한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순간에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국가나 당파가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술가에게는 가해자가 특권화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니체, 비판이론가들, 그리고 현상학자들이 모두 예술에 대한 미학을 지지한 반면, 카뮈는 헌신과 저항의 논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윤리적 미학을 제시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술작품에서 자율성과 연대성 간의 긴장을 강조함으로써, 카뮈는 미학적 수용과 생산의 윤리적 차원을 효과적으로 문제화한다.

카뮈는 이렇게 진술한다. “다만 실질적으로 헌신된 작가란 전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최소한 정규군에는 가입하지 않은 채 용병으로 머무르는 자입니다. 그가 아름다움 속에서 발견하는 교훈은, 이를 공정하게 이끌어 내자면, 이기성이 아니라 어려운 형제애라는 교훈입니다.” 물론 카뮈가 덧붙인 것처럼, ‘용병에게서조차, 우리는 억압에 대한 구체적 투쟁 속에서 발견되는 형제애를 경험할 수 있다. 실제로, 카뮈가 후기에 인정한 것처럼, 예술가를 통해 요구된 자율성은 박애 및 형제애로 이끄는 직접적 개임의 형식에서 발견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 부딪히는 벽이 아닌 다른 문을, 출구를 찾지 맙시다. 대신에 전투가 한창일 때 한 번쯤 숨을 돌리도록 합시다.”

맞습니다, 맞고요라고 말했다. “당신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리유는 애써 웃었다. “인간의 구원은 나에게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없습니다. 나는 인간의 건강에 관심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건강이 최우선의 문제입니다.”

아내는 결국 고독하거나 연대하거나라는 말이 적힌, 삭막한 흰 캔버스를 발견한다. 그 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조나스의 작은 그림에는 조나스와 카뮈의 상이한 이상적 유형에 살아 숨 쉬는 비판적 긴장이 압축되어 있다. 우정과 고립 사이의 항구적 긴장 속에 만들어진 예술을 목표로 삼은 조나스, 그의 자기 의식적 표현과 소박함은 예술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와 자신과의 모순적 관계를 요약한다. 조나스가 보여 준 것처럼, 이러한 모순감은 양식화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절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예술가는 창조적∙고립적∙연대적∙저항적 실천에 착수하고 아스케시스[고행]과 연계된 자신의 반항의 한계와 위험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러한 실천들을 자기 안에 통합한다. 이 작업은 쾌락의 강화 내지 예술적 생산의 기획을 통해 해명된다. 요컨대, -예술가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실천한다. 카뮈에게, 이는 삶의 기술로 추출될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파악하기 어려운 다양한 부조리에 대한 느낌이 지성의, 삶의 기술의, 또는 예술 자체이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활기차게 사는 것이 투쟁 속에서 기쁨을 갖게 한다. 투쟁 자체에서 과도한 부담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간성을 즐겨야지 정치적 행동주의가 인간성을 탈인간화해서는 안 된다. 열정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동안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한다.” 열정적 분리와 기쁨의 저항이라는 동기는 동시다발적인 것이면서도 분리되는 것으로, 이것들에 관해 시바의 행동주의가 언급하는 바는 잠재적으로 예술로서의 삶을 위해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시바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저항과 긍정, 공동체와 자율성, 이와 동시에 부정성과 구성주의의 이중적이 미학적 의무를 이해한다. 그녀 이전의 디덜러스와 다른 이들처럼, 시바의 노동과 삶은 일견 대립적인 의무 사이에 있는 지점에 놓인다.

시바는 저항과 구성에 대한 기획을 작동시키고, 조나스와 조네프 그랑은 겸손한 이타주의의 삶과 소박한 예술적 추구를 양식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각각의 형태는 자율성, 연대, 그리고 창조성이라는 미학적 주제를 매일의 삶의 구조 속에서 엮어 내는 삶의 양식을 성취한다. 푸코가 주장한 것처럼, 주어진 자기가 부재하는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창조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행하는 작업은 발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효과적으로 형성해 내는 창조적 활동의 형식에 속한다.

푸코의 작업이 예술로서의 삶에 부여하는 바는 미학적 이성과 체화된 시적 사유를 위한 요구를 통합할 수 있는 더 넓은 미학 개념이다. 이는 일상적 삶의 다양한 구성요소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요소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사∙성욕∙타자와의 관계∙노동은 자기 규제, 실험, 그리고 창조의 장소로 나타난다.

관계적인 권력을 형성해 냄으로써, 푸코는 권력을 일방향적 억압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서의 권력에서 행위자들이 서로와의 항구적인 투쟁 안에 존재하는 다차원적이고 다계층적인 전략적 지형에 속하는 것으로 그 작동 영역을 변경시켰다. 권력을 소유하는 군주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운 지점은 없다.” 권력은 권력과 관계가 이 안에서 획득되는 한 편재한다.

권력관계는 세포의 작동처럼, 느슨하게 조정되고 그 파생형식과 배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다양한 망의 집합을 통해 작동한다. 권력관계의 작동은 자연과 다양한 차원의 망을 기반으로 삼아 작동하는 여러 요소의 다중적인 망으로 제일 잘 묘사된다. 푸코의 권력관계 이론은 권력이 도입한 다양한 행위자와 전략 및 기예들 간의 복잡하면서도 이원론적이지 않은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 모두가 이 기반을 통해 행위를 하게 되는 다양한 가변적전략적 지형이 형성된다.

권력은 더 이상 직접적 개입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으로 그것을 퍼뜨리는식으로 작동하며, 미묘한 강압, 메커니즘 자체–운동∙몸짓∙태도∙신속함–의 차원에서 존속되어 획득되는 것으로 작동한다. 즉 능동적 신체에 대한 무한한 권력이 바로 그것이다.” 신체는 가족, 우리의 일상, 수축 등을 통해서 열리는 권력의 다양한 작용을 위한 장소다. 권력은 우리의 습관, 몸짓, 말의 미묘한 강요를 통해서 작동한다. 실제로 권력은 우리가 살아가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소유하는 데 이르는 다양한 가능한 수단들을 통과하는 무한정한 관통의 노선을 인정한다.

권력관계는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자극하는 규범성의 생산적이고 발생적인 형식이다. 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차적 수단은 쾌락과 희열의 형식과 짝을 이룸으로써 존재한다. 권력은 규범화된다. 왜냐하면 권력이 생산하는 규범성의 형식이 쾌락을 일으키거나 흥미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용어로 권력에 대해 말하는 비판이론적인 성향에 반하는 권력관계는 권력과 쾌락의 영속적인 나선을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는 희열-처벌의 에워쌈을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권력관례는 주체들을 규범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권력관계가 만들어 내는 규범성과 주체성의 형식이 우리에게 쾌락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권력체계와의 순환관계 속에 연결되고, 진리를 유발시키고 확장하는 권력의 효과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진리의 체계.” 진리가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권력은 진리를 생산한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내에 참된 담론들을 만들어 내고 담론들을 끼워 넣음으로써 작동한다. 여기서 담론들이 포착되고 표현되며 다른 참된 담론의 주체가 형성된다.

저항한다는 것은 단순히 부정이 아닌 창조적 과정이다. 상황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실제로 그 과정의 능동적 일원이 된다는 것인가?” 이에 푸코는 답한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내가 제시한 방식이다.” 저항은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권력이 개인들과 행동들의 생산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테크네[기예]는 이제 자신의 욕망, 쾌락, 그리고 행동 방식에 대한 윤리적 주체의 작업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기에의 배려는 실질적 만족의 삶을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경제를 산출하는 고유한 행동, 곧 깎기, 정제, 그리고 조각의 은유를 요청하는 관념, 기술-제작이다.

그리스-로마 윤리는 결혼, 우정, 그리고 친척 관계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더 넓게 문제화하려고 한다.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는 일로 타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르러야 하고 그렇게 해서 잠재적 변형과 자기 양식화에도 이른다. 푸코는 이 새로운 실존의 양식자기로의 퇴거가 아니라 아내, 타자, 사건,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활동–그리고 쾌락의 주체로 자신을 간주하는 다양한 방식–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술한다.

아스케시스[훈련], 더 나아가 사유를 통해 정의된 투쟁의 일부로, “이를 통해서 우리가 행위의 지속적인 원리로 진리를 변형하고, 흡수하고, 획득할 수 있는 일련의 실천이다. 알레테이아[진리]는 에토스[윤리]가 된다.” 아스케시스[훈련]은 우리의 활동성, 사유, 그리고 욕망에 주의 깊은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작동한다. 또한, 이 경우 훈련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변형해 낸다. 금욕의 윤리는 우리가 특수한 이념을 따라 자기 자신을 주조할 수 있는 방식을 향해 일관적으로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따라서 매순간, 절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하나의 색체, 형식과 강도를 부과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기술이다. 삶의 기술은 심리학을 제거하는 것이면서, 자기 자신 및 타자와 더불어, 개별성, 존재자, 관계들, 명명할 수 없는 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나의 실존은 완전하고 숭고한 작품일 수 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대상들에만 연관되고 개인이나 삶에 연관되지 않는 어떤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예술은 예술가인 전문가들을 통해 특수화되거나 시행된 어떤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는 없을까? 등잔이나 집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왜 우리의 삶은 예술의 대상이 되면 안되는가?

현대의 미학 윤리는 저항에 추가적인 차원을 더한다. 그런데 그것은 아도르노, 마르쿠제, 카뮈, 심지어는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망각될 수 없는 것이고, 선견지명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배의 최소화이다.

이러한 구속의 어조에 더해지는 것은 예술로서의 삶의 시간에 대한 재평가이다. 여기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긍정적인 가치와 무게를 가지게 된다. 세계를 향한 잃어버린 방향설정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함에 있어, 현상학은 본래적으로 현대에 무게중심을 두기 위해 과거의 생생함을 평가한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이론은 현재 속 의미를 투사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으로 개혁된 미래를 전망한다. 또한, 미학적 윤리는, 그것의 모든 것에 선재하는 기능에 있어서, 자기를 미래 속에서 창조되는 것으로 보는 반면, 과거를 권력과 부조리의 관계를 분석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세 가지 계기들의 누진적 효과가 시간을 선사해 준다.

예술로서의 삶에서, 자기는 자기 자신과 세계를 체화된 사유방식과 실천을 통해서 형성해 내는 합리적 신체-주체다. 이 자기는 그 자체로 미학적 명령에서 모형화되어 감각화된, 계시적이고 전략적인 행동방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따라서 니체의 이상적 유형이 전조되어 있는 예술로서의 삶은 자기 창조와 변형의 실험적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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