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우주들

어떤 사람이 ‘세상‘을 그려보고자 작정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지방, 왕국, 산, 만, 배, 섬, 물고기, 주거지, 도구, 별, 말, 사람 들의 이미지로 한 공간을 채운다. 죽기 직전, 그는 그 끈기 있는 선들의 미로가 그려낸 것이 자기 얼굴의 이미지였음을 발견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산마르코 카페는 진정한 카페다. 단골들의 자유로운 다원주의와 보수적 충실성을 확인시켜주는 역사의 주변부다. 착한 신사든, 멋진 희망을 품은 젊은이든, 대안적 집단이든, 아니면 현대적 지성인이든, 단일한 무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이라면 사이비 카페일 뿐이다. 모든 동족 결혼은 숨막히게 한다......산마르코 파페를 압도하는 건 활력과 생명력 넘치는 다양성이다. 장거리 항로에 나서는 늙은 선장, 시험을 준비하고 사랑의 전략을 연구하는 학생,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감각한 체스게이머, 그 탁자의 예전 단골로서 크고 작은 문학의 영광에 바쳐진 자그만한 이들 명패에 호기심을 보이는 관광객들, 조용히 신문을 읽는 독자들, 맥주나 백포도주에 이끌린 쾌활한 무리, 시대의 사악함을 통탄하는 주름투성이 노인, 아는 체 토를 다는 항의자, 이해받지 모산 천재, 몇몇 멍청이 여피가 있고, 영광의 환호처럼 튀어오르는 병뚜껑들이 있으니, 특히 무엇보다 이런 활력이 넘치는 때는....웨이터가 말대꾸도 못할 어조로 계산서를 모두 자기 앞으로 달아놓으라고 외칠 때다. 16-17

이제 ‘세상‘은 대체로 그 전모가 잘 알려져 있는데다 거기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를 우리 눈앞에 제공하는 책들이 아주 많긴 해도, 그럼에도 단지 한 ‘지방‘을 다루는 경우에는 간신히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니...... 아메데오 그로시, 1791

볕뉘.

0. 화폭이 커지면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여전히 꼼지락거리며, 멀고 가까운 것의 채도 조절이 잘 되지 않는다. 같은 사진을 작은 화폭에 그리면서 색과 터치 연습을 한다. 떨구던 고개가 조금 들렸다.

1. 1987은 잘 된 영화가 아니다. 페북의 그룹은 요란스럽고 갖은 의미를 담으려 노력하면서 어수선하다.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에 대한 한 친구의 일갈처럼 국풍이다. 그저 그럴 뿐이다. 박근혜도, 박정희도 살아나지 않는다. 서서히 자맥질하면서 명멸할 뿐이다. 관객을 영화의 문법대로 거칠게 호흡을 몰아부쳐 ‘감정‘하나는 토하게 하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무장해제하게 할 뿐이다. 어쩌다 감정의 해우소가 될 뿐이다. 천만이 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 세상이다. 어쩌면 우리는 감정에 능멸을 당했는지 모른다. 거칠고 전국을 몰아부치는 감정의 위무에 그 심연을 헤아리지 못한다. 국가와 정치에게 다른 것을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당연이 아니라, 느리거나 더디거나, 턱턱 막히는 호흡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의 생체기를 달리 읽고 나누는 연습이 필요로 하다. 국가는 그저 관성대로 간다. 달리 요구하고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인 걸 경험하지 않았는가. 거칠고 빠르고 내리누르는 맥박을 가진 것들을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 부드럽고 설득하고 세세히 달라지는 결들을 살피기로 한다.

2. [코뮤니스트]의 관심있는 장들을 꼽아서 본다. 마르크스 이전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에 대한 도전으로서 바쿠닌과 베른슈타인, 로자와 그람시....보다나니 깔끔하면서도 정리하기가 쉽다. 요점들이 잘 박혀있는 듯 싶다.

3. 어젠 30여분 이곳에도 눈이 푹푹 나렸다. 그리고 말았지만 걸어서 출근하는 맛은 남달랐다. 그제 꺾어온 매화와, 어제 가져온 개나리와 조팝을 사무실 한켠에 두었다.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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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무라 고타로 - 촉각의 세계

나는 조각가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나에게 세상은 촉각이다. 촉각은 가장 유치한 감각이라고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가장 근원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각은 가장 근원적인 예술이다. 나의 약지 안쪽은 매끈매끈한 거울 표면에서도 요철을 느낀다. 이건 최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유리에도 가로세로가 있다. 눈을 감고 평범한 유리의 표면을 어루만져보면, 흡사 나뭇결이 살아 있는 오동나무 나막신 같은 무늬가 느껴진다. 잘 닦인 거울 표면 같은 경우는 나막신까진 아니지만, 겨우 15센티도 안 되는 너비에 두 개가량의 물결무늬가 있다는 걸 손끝은 알고 있다. 약지에는 경사를 느끼는 감각이 있는 것 같다. 거울 표면의 파동을 느낄 땐 흡사 배가 파도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약간 기분 좋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볕뉘.

0. 다카무라 고타로는 ‘촉각의 세계‘란 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감을 이렇게 촉각으로 하나 하나 결을 다시 음미하고, 그리고 여섯번째 위치감각을 말한다.

1. 처음 읽으면서 글쓴이가 그저 작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조각가다라고 시작하지만 어쩌면 이리 상상력이 생생할까 싶은 의구심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지금 그 글의 말미 뒷장 그 이력을 보니 이렇게 씌여 있다.

˝다카무라 고타로 (1883-1956): 조각가. 시인. 목조 조각가 다카무라 고운의 장남으로 뛰어난 조각가다. 시집 [치에코 이야기] 등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문학사에도 족적을 남긴 시인이다. 이 시집에는 그의 아내이자 영원한 사랑인 치에코를 처녀시절부터 죽기까지 30년에 걸쳐 곁에서 지켜보며 쓴 시와 산문이 수록돼 있다.˝

2. 그리고 탁자 위의 유리를 약지로 느껴보았다. 수직의 결이 몇가닥 들어왔다.

3. 지난 주말에 백석을 읽고 나누었다. 읽다보니 순수한 사춘기 소년소녀가 느껴졌다. 선명하게 과거의 서정을 기억하는 그 결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신형철평론가는 장석남의 시를 읽으며 서정성을 이야기했다. 몸이 안고 있는 서정성.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서정을 찾는 것일까. 왜 이리 늘 갈증에 허덕이는 걸까. 세상이 그만큼 각박하다는 얘기겠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언제나 퍽퍽하거나 팍팍해서, 사람들은 늘 마음의 근원이나 원형을 찾으려고 애쓴다고....굶주림이나 고향이나 어머니가 그 원형이라고 김현은 이야기했지만, 달라진 시대는 거기에서 원형을 구걸할 수 없다고....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사람이다. 앞으로는 바다가 보이고...그가 쓰는 시어들은 평안도 사투리이긴 하지만 고어들이나 우리말에서 애써 가져왔다고 한다. 윤동주가 그리 갖고 싶어했던 초판본 [사슴]을 읽었다. 노천명을 사슴도 백석을 가르킨다는 말을 좌장은 전했다.

4. 백석은 비와 바람과 햇살, 산, 하늘....을 나누고 나누었다. 고기부위와 산해진미만 나눌 줄 아는 이들에게서 볕과 바람과 시와 구름의 가지가지를 나눌 수 없다. 하지만 그들도 서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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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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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 서울행, 이동 중에 읽으려 책이 손에 잡혔지만 오고 가는 길 외려 이 책보다 [생각하는 피부]가 빠르게 읽힌다. 곁의 아주머니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통화에, 화장실에, 수다에 모든 것이 다 읽힐 듯이 일거수 일투족이 밟혔다. 늦은 밤 막차로 내려와 맥주 한캔에 읽다가 다음 날 커피 한잔에 마저 읽고, 또 몇 대목을 다시 읽었다. 몇 번 만난 작가는 말 수가 적었다. 하지만 소설은 적은 말수가 빙산의 일각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 분야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끊임없는 수다쟁이였다. 포르노로 할 말을 다하는 그가 경이롭다. 책이 책 밖을 나와야 하고, 성은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성 밖으로 나와야 그제서야 현실은 꿈쩍거린다. 많은 책과 저자의 은유에 공감한다. 다시 한 번 더 봐야 할 듯 싶다. 이리 소설에 애착을 갖다니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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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 나눈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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