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사회적투자로서 실업수당: 새로운 조건들 아래에서 실업수당은 실직 상황에 대한 보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엥떼르미땅 일부에 의해 그들의 활동고 삶을 위한 ˝융자˝로서, 그리고 고용시간, 노동시간, 실업시간, 삶의 시간과 같은 여러 시간들의 비교적 유연한 배치를 허용하는 ˝사회적 투자˝로서 사용된다. 13

[ ] 왜 문화 산업의 고용시장 구성은 ˝사회복지정책˝의 운영을 통해 이뤄지는가? 16/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과 ˝사회˝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19

[ ] 신자유주의적 의미에서 경쟁은 욕구, 본능, 행동의 ˝자연적 놀이˝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불평등 사이의 ˝형식적 놀이˝다. 제정되어야 하는 놀이, 계속해서 양육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놀이다. 이들이 보기에 욕구와 본능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직 불평등만이 욕구와 본능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드는 역동성을 생산할 능력을 가지며, 그 경쟁을 통해 개인들의 욕구, 본능, 뇌를 예리하게 다듬고 그들의 행동력을 최대화한다. 이들이 가진 시장 개념은 따라서 널리 퍼진 의견과는 반대로 반자연주의적이다....시장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장을 위해서 개입해야 한다. 20 경쟁과 기업에 기반을 둔 시장의 통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불평등˝의 상태에 있도록 감시해야 한다....푸코는 개인들이 위험을 개인적으로 책임지고 맞설 수 있는 경제적 공간을 구성하는 목적을 가진 사회보장정책의 ˝개인화˝라고 지적한다.(개인적 사회보장정책) 24

[ ] 엥떼를미땅의 실업보험 문제는 기업과 ˝인간 자본˝의 노리에서 벗어나는 실업보험의 우회와 유용 전략에 너무 많은 공간과 자유를 허용했다. 따라서 이문제는 우선 유연한 생산의 새로운 조건들 안에서 품행을 통치하는 문제이다. 27

[ ] 품행의 통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혁명적 정치˝, 즉 이 불평등을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사생결단˝의 전투로 뒤엎을 수 있었던 혁명적 정치를 무력화하고 탈정치화하기 위한 기술들의 총체이다. 33 사회를 ˝기업사회˝로 만드는 것, 그리고 노동자 자신을 ˝일종의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34 자본화는 노동자를 ˝인간자본˝으로 바꾸는 데 기여해야 하는 기술 중의 하나이다. 인간자본은 비용/투자 관계의 논리에 따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모든 관계 선택 행동을 관리하면서 스스로 교육 성장 축적 개선 그리고 ˝자본˝으로서의 ˝자기˝의 가치를 부여를 떠맡아야 한다....그래서 개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노동 생산성이 아니라 자본의 수익성을 보장하는 일이다. 개인은 자신의 자본의 일부분, 자본의 분자단위 부분으로 간주해야 한다. 노동자는 더 이상 생산의 단순한 요인이 아니다. 개인은 엄밀히 말해 노동력이 아니라 자본-역량, ˝기계-역량˝이다. 이것은 ˝생활양식, 생활방식˝, 도덕적 선택, ˝자신에 대한, 시간에 대한, 주위 사람에 대한, 미래에 대한, 집단에 대한, 가족에 대한 개인의 관계 형태˝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36-37

[ ] 사회보장은 법률적인 것을 포함해서 임금 종속관계에 대한 보상으로 고안됐다. 그런데 이 생각은 경제의 금융화에 의해 완전히 뒤집혔다. 이것은 위험과 보호에 대한 완전히 다른 생각을 도입하며, 법전과 법률을 철저히 비웃고,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비롯된 협정이나 타협과 완전히 결별한다. 따라서 화폐문제를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40 들뢰즈는 화폐를 가능한 것들에 대한 권력으로서 가상성의 자본주의적 전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현대 경제는 소비자들에게 제공되는 수많은 선택권, 선택사양, 가능한 것들처럼 재현된다.....신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화폐의 재민영화 정치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것들을 결정하고 구획 짓는 권력의 재민영화이다. 따라서 시장과 경쟁의 분석에 경제적이고도 정치적인 관점에서의 화폐 분석도 통합해야 한다. 즉 ˝바로 화폐와 시장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경찰이다.˝ 42-43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마디로 뉴딜에 대한 복수이다. ˝자본을 가진 자˝들이 ˝내전˝과 1929년 공황 이후 자본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공황이라는 위협을 받고서 비소유자 계급들과 맺을 수밖에 없었던 타협에 대한 복수이다. 45 신자유주의는 소유에 대한 개인적 접근을 거치는 ˝탈프롤레타리아화˝를 선호하기 위해, 이 정치적 획득물들을 번복하는 것을 자신의 존재 의미이자 주요 목표로 삼는 정치이다. 사적 소유에 대한 개인적 접근을 통한 탈프롤레타리아화가 바로 신자유주의 탈정치화의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다. 46 경제의 금융화는 더 이상 고용, 생산성 과실의 재분배, 사회보장에 기반을 두지 않고 주주와 저축에 기반을 둔다...주식시장에서의 연기금 동원은 매우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은 ˝노동자들의 저축을 자본주의적 변환-재구조화 과정과 엄밀하게 연결하면서 포드주의적 임금 형태 안에 있는 암묵적인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48 신자유주의적 목표는 ˝경제의 임금노동자 비율 증가 경향˝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자본가이기도 한 임금노동자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50˝자기의 경영자˝로서의 개인이라는 생각은 예속 기계로서의 자본의 도달점이다. 51

[ ] ˝사회적 재건˝에 의해 도입된, 실업자들에 대한 추적조사는 ˝배제된˝ 개인, 실업자, 기초생활수급자, 노조탈퇴 임시직을 ˝인간자본˝으로 전환하려 애쓰는 안전기술처럼, 다시 말해 고용 정책들이 스스로 부여하는 ˝동기부여적˝ 재현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재편성되는 것은 바로 징벌, 복종, 의무, 종속, 죄의식의 규율적 도구이기 때문이다....실업은 실업자의 잘못처럼, 개인의 ˝도덕적˝ 질병처럼 나타난다. 예속은 책임을 통해, 더 나아가 죄의식을 통해 이뤄진다. 52-53 사장단의 ˝사회적 재건˝에 따르면, 우리는 따라서 행동과 생활양식에 대한 모니터링의 시대, ˝개인적 추적조사˝의 시대로, 수혜자들에게 ˝행동 변화에 대한 책임˝과 사는 방식을 요구하는 명령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54

[ ] 화폐의 기원과 기반은 상품의 교환(맑스)이 아니라 빚의 감소(니체)이다. 빚의 체계는 피통치자들 안에 죄의식과 ˝책임감˝을 동시에 유포한다. 55

[ ] 자본주의는 장래를 미리 처분한다. 왜냐하면, 빚의 강제는 현재의 행동과 다가올 행동 사이의 균형을 예상하고 계산하며 측정하고 수립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다리를 놓도록 하는 것은 바로 주체성에 대한 빚의 권력효과(죄의식과 책임감)이다. 56 복지국가의 ˝서비스˝는 투쟁에 의해 획득된 사회적 권리가 아니라 체계가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부여한 ˝신용˝이다....주체성에 대한 화폐의 권력효과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집단적 권리의 논리에서 나와 신용(인간자본의 ˝투자˝)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57

[ ] 빈곤은 경제 성장이 흡수할 지연의 증후가 아니다. 빈곤은 분화, 분리, 나누기 장치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부유한 사회 안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창조된다...새로운 빈곤은 ˝물질적 비참함˝을 ˝이긴˝ 자본주의 사회 안의 정치적 의지의 산물이다.....신자유주의 사회는 일정한 비율의 임시성, 불안전, 불평등, 빈곤이 있을 때 편안한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불평등의 축소나 근절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차이들을 이용하고 차이들을 바탕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개인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체계적이 아니라 일회적인 방식으로만 받을 수 있다. 59-60 최소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전˝의 한계치, 사회적 평화의 단절 위험의 한계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61

[ ] 정부는 위기의 관리를 고용 및 사회통합부가 아니라 문화부에 맡겼다. 엥떼르미땅의 실업보험 문제를 사회적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문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경제적 원칙-정규직 고용-이 예수적이거나 문화적인 활동의 계량 척도이자 동시에 사회적 미분화도구가 된다....국가는 품행의 새로운 통치 양식들을 발의하고 실험하고 실행하고 유포하는 제도이다. 65, 67

[ ]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경쟁을 부추기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정규직 고용에 대한 노조의 논리도 노동자들 사이의 가차 없는 경쟁을 불러일으킨다....고용에 대한 정책들은 경제적인 만큼이나 사회적인 차이와 불평등을 증가시키면서 자유주의적 정부의 미분적 관리를 조장하고 신자유주의적 차이들의 최적화 정책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 69 일반적으로 정치 좌파와 노조 좌파는 노동 조직의 유연성(임시성)을 다른 인구에게 전가하면서 인구 일부의 노동권과 사회보장권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수년을 보냈다. 70

[ ] 사회적 권리 없이 문화도 없다.....연대, 평등, 안전 없이는 자유, 자율, 진정성도 없다 73 약자들의 이동성은 대부분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이동성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네트워크를 만들 속성을 갖지 않는다. 74 ˝예술적 비판˝의 담지자라고 보는 사회 집단들은 이동성에 대해 어떤 종류의 관심도 갖지 않는, 사회적 위계의 다른 쪽 끝에 있는 임시 노동자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 그들은 전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77 균열은 새로운 자유직업들과 ˝창조적˝ 직업들을 가로지른다.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 거기에서 일하는 개인 중의 일부가 보장 없이 가난하고 임시직이기 때문이다. 78

[ ] 중간계급의 빈곤에 잘 오셨습니다; 중간계급들에 들어갈 수 있는 잠재적 지원자들이 넘쳐나는 반면, 공적 영역의 중간 범주들의 자리 중 절반이 사라졌고 사적 영역의 중간 범주들의 자리들은 지원자들의 확대를 흡수하기에는 너무 느린 속도로 증가했다. 80

[ ] 사회보장은 단순히 사회적 위험(실업, 사고, 노화)에 대비하는 보험이 아니라 개인들을 예속시키는 생활양식의 통치 기술이다....1960년대와 1970년대의 사회적 투쟁은, 자율과 평등을 연합하고 복지국가의 ˝권력효과˝, ˝예속효과˝, ˝개인화˝에 대해 비판하는 ˝새로운 사회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각자에게 진정한 자율을 보장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자신의 환경과의 좀 더 풍부하고 좀 더 많으며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유연한 관계로의 길을 여는 안전에 대한 요구이다.....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 영역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적 주도권에 맙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 ˝사회적 비판˝은 현재 그러한 것처럼 품행 통치의 장치들에 종속될 것이다. 84

[ ] 노동은 엄청난 양의 활력을 소비하고 성찰, 사색, 몽상, 걱정, 사랑, 증오로부터 활력을 빼내기 때문이다. 노동은 끊임없이 쩨쩨한 목적을 드러내기 쉽고 규칙적인 만족을 보장한다. 85

[ ] 목자사제형 권력은 개인화시키는 것이다. 목자사제형 개인화 기술들은 출생이나 부의 지위들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장점들과 단점들, 그것들의 경로와 그것들의 순환을 결합하는 ˝정교한 경제˝를 거친다. 이 영혼들의 경제는 법률이나 ˝합리적인˝ 원칙들이 아니라 다른 개인의 의지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과 순종 관계, 전적인 의본을 창출한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기독교적 복종의 신조이다. 수도 생활의 규칙들은 그것의 도달점이다. 반면에 그리스 시민은 법률과 사람들의 수사학에 의해서만 지휘를 받는다. 100

2.

[ ] 사건은 열림이고 자기 변형의 가능성이며 결과적으로 사회정치적 상황의 변형 가능성이다. 새로운 우주가 이 한계를 넘는 사람에게 열린다. 새로운 관계들, 생각하고 행동하는 새로운 방식들, 새로운 지식들, 새로운 정동들은 거기에 참여하는 자에게 가능하다. 이 가능한 것들은 우선 고안되기 보다는 느껴진다. 왜냐하면, 주체적 변이는 우선 비담론적이기 때문이다. 거부와 반발에는 수많은 이유와 원인(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등)이 있다. 그러나 거부와 반발을 구현하는 행위의 의미는 비담론적인 양식 안에서, 그것의 이유와 원인 들에 결부된 증거와는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닌 증거와 함께 단숨에 행위자들에게 주어진다. 120

[ ] 사건의 역실행: 역사 안으로 사건이 다시 떨어지는 일은 적어도 세 개의 다른 특이화 과정의 교차점에서 이뤄진다. 1) 사건을 역실행하려고 하는 여러 권력장치들(정치적, 경제적, 미디어, 복지국가 등)과의 정치적 싸움 2) 도달할 목표들과 조직과 투쟁 양식들, 그리고 건설해야 할 동맹들과 실행해야 할 전략들에 대해, 구성된 정치적 세력들(조합, 트로츠키주의자, 공산주의자, 마오주의자 등)과 구성 중인 세력들(연합) 사이에서 벌어지는, 운동 내부에서의 정치적 싸움, 3) 이 몰단위 주체화 수준이 노동, 실업, 고용, 삶의 실천들로부터 떠오르는 분자단위 주체화 과정과 유지하는 관계가 그 특이화 과정들이다. 123

[ ] 역사 안으로 사건이 ˝다시 떨어지는 일˝과 사물들의 기존 상태 안에 사건이 기입되는 일은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결정한다. 이 다시 떨어짐, 이 기입이 일어나는 방식, 그것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제도들을 뒤흔드는 방식, 또는 그것이 충돌 없이 그 제도들에 통합되는 방식, 그것이 고용 실업 노동에 대한 지배적 담론들을 심문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 또는 그것이 경우에 따라 ˝문제들˝을 다르게 규정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은 ˝정치적˝ 싸움에 속한다. 이것은 정치적 전략과 전술의 문제들이고 이질적 관점들 사이의 충돌의 문제들이다. 125

[ ] 정치적 사건은 우리에게 세계와 주체성을 되돌려준다. 그것은 세계에 그것의 진정한 속성을 되돌려준다. 세계가 사건에 의해 열리고 찢기자마자, 세계는 자신이 단지 존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만들어지고 있는 세계와 만들어야 하는 세계는 항상 윤리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것들은 항상 실존적 닫힘을 추구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건적 열림은 우리에게 주체성의 생산과 변형의 과정에 접근하게 한다...사건은 우리에게 ˝선택 재료˝로서의 세계와 ˝실천적 교차로˝로서의 주체성을 다시 준다....사건으로 인해 주체성은 대안선택, 결정, 그리고 위험 감수를 해야 한다. 사건과 함께 우리는 즉각적 방식으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이동한다...우리가 이 도전들과 약속들의 현실화에 뛰어들고 참여하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의 옛 세계(옛 믿음들, 옛 욕망들, 옛 타성들)를 다시 손질하고 새로운 것과 함께 구성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건은 새로운 주체성의 ˝재전환˝이거나 생산의 과정이다.....이 시대에는 역사가 미리 세계의 운명을 그리지 않도록 역사와 역사적이지 않은 것-사건-이 함께 배치되는 방식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128

[ ] ˝역사˝와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들을 결정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우선 사건-운동을 출현시키는 (˝사회-경제적˝이고 주체적인) 조건들의 묘사로 돌아와야 한다. 129 예속 양식들을 거부하고 규준들과 규칙들을 전용하면서 분자단위 대항품행들은 살아가는 방식들의 발명을 그 품행들이 할당된 시간성들(고용 시간, 노동 시간, 실업 시간, 삶의 시간)의 새로운 배치와 연결한다. 130

[ ] 거의 세 명 중 한 명의 엥떼르미땅이 자신을 임금 받는 고용인이라고 한다. 이 비율은 기술적 직업들에서보다는 예술적 직업들에서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임금받는 고용인은 가난한 노동자이거나 프롤레타리아화 되는 중인 사람이지 고전적 의미에서의 경영자는 아니다. 131 이 진화는 고용인들과 임금노동자들이 각각 가진 기능, 역할, 책임들의 혼종화를 동반한다....진정한 지시자는 극장, 지자체, 텔레비전이나 영화 업체이다. 그들은 거대 산업 기업들이 가장 작은 기업들을 하청업체로 이용하는 것처럼, 이 작은 문화업체들을 이용한다. 132

[ ] 사회적 변이를 동반하는 ˝주체적 재전환 운동들˝은 ˝불안정성의 발생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잠재성들˝과 ˝모호성들˝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엥떠르미땅 제도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절대자유주의, 또 하나는 극단적 자유주의 얼굴이다. 이 체제는 ‘나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일한다˝와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한다‘ 사이에 있는 모든 공간을 없애버린다.....완전한 불규칙함과 이동 (따라서 외부 활동들 - 스포츠나 음악 활동, 동아리 활동 - 에 뛰어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특히 임시정에서 기인하는 반복되는 스트레스, 특히 임시성이 더 이상 ˝사회보장 제도들을 동반하지˝않는다고 느낄 때의 스트레스가 있다. 135

[ ] 가득찬 시간: 그들은 실업을 ˝가득 찬˝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실업개념은 잘못 선택된 단어이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개념입니다. 실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생각하고 창조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갖도록 허용하는 체제가 있었습니다....실업은 엥떼르미땅이 구직 외에 다른 일들로 채우는 고용의 빈 시간이다....한 음악가는 실업 시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반응했다. ˝실업 시간은 없습니다. 내가 집에 있을 때, 내 손은 악기를 만지고 있고 눈은 컴퓨터를 보고 있고 귀는 전화를 듣고 있습니다.˝ 136

[ ] 분자단위 실천들의 ˝의식˝이 되거나 그 실천들을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화의 이질적 수준들의 격차를 보존하면서 그 수준들을 배치하는 것이 관건이다. 138 ˝도덕˝안에서, 품행 안에서 일어난 큰 변화들은 규준들과 규범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규준들과 규범들 ˝아래에서˝, 자기와의 관계 안에서, 자기 변형의 실천들 안에서 일어난다. ˝윤리˝는 권력의 관점이든, 운동의 관점이든, 정치적 싸움의 중심에 있다. 140 견유적인 투쟁적 활동은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통치를 실천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동시에 ˝관습들, 법률들, 제도들˝을 공격한다고 주장한다. 141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이 주체들이 모든 권력관계들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항상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47 권력이 주체와 그의 세계를 ˝생산한다˝는 것은 권력이 주체의 총체성을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권력이 세계를 완전히 포맷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148 관계는 항상 관계를 연장하는 접속사 ˝와˝를 자기 뒤에 끌고 다닌다. 149 푸코에게서 ˝자기와의 관계˝의 발견은 권력관계들과 지식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발견이었다..그것은 집단들이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그리고 구성된 지식으로서 확립된 세력관계들에서 벗어나는 개체화 과정이다. 150 권력관계들은 정치적 공간 안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경제 안에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전통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는 영역들을 가로질러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가 윤리와 맺는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151

[ ] ˝임금노동자˝,˝예술가˝ 또는 ˝전문직업인˝이라는 말들은 분쟁을 진부하고 알려진 틀 안에 매우 빨리 가둬 버렸을 것이다...˝ -와 임시직˝은 그래서 사건을 제도화되고 진부한 틀 안에 가두려는 의지에 맞서 사용됐다. 157 여러 정당과 여러 노조는 모두 예외없이 우리 사회나 사회집단들에 닥치는 일을 더 이상 문제시하지 못한다. 19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양식들(특히 경제와 정치 사이의 분리/모순)에 따라 개입하기에, 그들은 문제들을 정치화하는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다...처음 보기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정치화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세속적˝ 지식과 ˝학술적˝ 지식 사이의 새로운 배치들을 실험한다. 159전문평가를 실행할 때, 우리가 실험한 것은 이질적인 지식들(˝박식한 지식˝과 ˝자격 없는 지식˝) 사이의 협력, ˝함께 유지하기˝이다. 160 시민평가와 달리 연합의 전문평가는 투쟁의 차원들 중의 하나로, 집단적 ˝자기˝구성 과정의 도구로 고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투쟁의 지식˝의 전통과 공명한다...이 장치 안에서 지식은 집단적 요구와 행동을 만들고 내세우는 데 사용된다. 전문평가는 이처럼 집단적 주체의 건설과 변형 과정의 일부분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노조, 미디어, 학자, 전문가들의 지식에 대항해 ˝투쟁중인 지식˝을 표명한다. 그것은 따라서 ˝싸움의 기억˝을 건설하는 데 속한다. 161 세상은 다수의 관점들과 다수의 이질적 관계들로 구성돼 있어 상대적으로 가소적이고 유연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세상에 대한 지식은 이 다양체를 부분적이고 잠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결정하면서 그 관계들의 복사가 아니라 자르기를 실행하는 것을 내포한다 162 말과 생각의 진리는 ˝전략적˝ 과정 안에서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그 전략적 과정 안에서 증명된다. 진리는 그것의 기능과 효과를 갖고 정치적 전투에 참가한다. 진리는 의견을 만드는 도구들 중의 하나이고 주체성을 생산하는 기술들 중의 하나이며 또한 싸움의 양식들 중의 하나이다. 165

[ ] 지적인 정치적 불임 상태는 내가 보기에 우리 시대의 주요 사실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푸코) 양자 물리학에서는 어느 날 물리학자들이 물질은 동시에 입자이고 파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적 투쟁들은 동시에 몰단위이고 분자단위이다.(가타리) 문제화한다는 것은 행동과 생각을 위한 새로운 대상들(임시성, 불연속적 고용, 유연성에 대한 사회보장, 이 불연속성의 시간성 등)과 새로운 주체들(임시직, 다수 고용인을 둔 임금노동자, 임금 받는 고용인 등)을 정치적 공간 안에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5

[ ] 시간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비춰 말하자면, 이 관심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투쟁이 자본주의 기계의 예속과 노예화롭터 가장 중요하게 빼내게 되는 것은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운동이 정체될 때, 사람들이 가장 빨리 잃는 것이기도 하다...집단이라는 것은 개인들의 모임이란 뜻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 ˝집단˝을 생산하는 연합 ˝기계˝와 연합을 지지하는 계층, 작동 절차와 의사 결정 절차들, 활동과 발언 획득의 관리 기술들, 장소들의 조직, 역할 들의 정의, 시간성들의 배치, 분위기 등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해야 한다. 181, 182

[ ] 이접적 종합은 서로 뒤얽힌 다수의 권력관계들을 ˝정치화하기˝위한 방법이다. 그것은 착취 관계들과 인종적, 성적, 문화적 지배 관계들이 끼여 박혀 잇는 ˝공통 세계˝를 탈구시키고 각자의 특이성을 확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184 미시정치는 ˝자발적 참여주의˝, ˝운동주의˝, 그리고 ˝삶의 형태들˝(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가 작은 경멸과 함께 말하는 ˝생기론˝)에 대한 단순한 확언이 되기는커녕 매우 높은 수준의 조직, 기능들과 정치적 행동의 과도한 분화, 다수의 솔선 행위들, 지적이고 조직적인 확실한 규율을 요구한다. 미시정치는 엄밀함을 요구한다....미시정치는 투쟁, 거부, 봉기, 문제화, 실험, 발명, 조직, 그리고 주체성의 재전환이기도 한 구성주의이다.....미시정치는 이질적인 것에서부터 바탕을 만들고 움직이는 능력 안에 있다. 바로 이런 조건이라면, 정치적 행동의 여러 자락들을 붙잡으면서 사람들은 현대의 정치적 행동에 없는 세력과 세력관계들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186, 187

[ ] 경제와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노동운동의 전통 안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더 이상 해방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규정하지 않는다/운동은 국가나 제도적 틀 안에서의 정치적 출구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당이나 전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운동은 새로운 ˝정치적인 것˝과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발명하기 때문이다...전통적 형태의 당과 노조는 구조적으로 차이들과 특이성의 가로지름과 결합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투쟁은 국가와 국가 제도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처럼 표명된다./현대 자본주의에서 정치적 운동은 과두제의 민주주의와는 구별되고 분리되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전제한다./연합, 가로지름, 민주주의, 자율성은 새로운 투쟁 형태들의 조건들이다. 이것들의 도달점은 ˝사회의 봉쇄˝이다...이 투쟁 형태들의 양식들은 ˝권력˝획득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자율성과 독립을 확인하고 확장하며 강화해야 하고 ˝생산적˝ 배치들을 재구성해야 하는 주체성의 ˝재전환˝ 과정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권력 획득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제도들의 구성과 ˝주체성이 재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노조 좌파와 정치 좌파의 논리인 노동주의적 논리의 출구는 ˝산문적인 것˝(임금, 소득, 사회보장, 새로운 생산형태들)과 ˝시적인 것˝(삶의 내용과 의미, 활동의 내용과 의미, 다른 ˝생산˝과 다른 활동을 바탕으로 한 주체성의 재전환 등)을 배치하면서 가능하다. 189-192


3.

[ ]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들에서 예술이 개인들이나 삶과는 관계를 갖지 않고 대상들과만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그러나 모든 개인의 삶은 예술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림이나 집은 예술작품이고 우리의 삶은 예술작품이 아닌가? 푸코

[ ] 당신은 문학가라는 명칭처럼 화가라는 명칭을 거부합니다...그렇다면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뒤샹은 이렇게 답한다. ˝왜 당신은 온 힘을 다해 사람들을 분류하려고 합니까? 내가 무엇인지 나는 압니까? 그저 단지 한 사람, 하나의 ‘인공호흡기‘...˝ 201

[ ] 분자단위 실천들은 예술과 예술가를 종목별로 항당하는 것을 고치고 변형하는 데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구와 공중의 ˝문화적˝ 통치와 자본주의적 가치부여 과정들 안에 포획되기도 한다. 214 자본주의의 가치부여는 이 ˝대항품행들˝, 이 의미론적 혁신들, 새로운 표현 재료들의 실험과 참신한 언술 양식들의 실험을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재화들의 모든 생산들 안에 통합할 수 있다. 215 ˝창조산업들˝의 자본가들은 이 혁신의 원천들을 내버려 두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들을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공중은 뒤샹이 원했던 것처럼 항상 작품의 공동생산자들이다. 그러나 문화 산업과 예술 시장 내부에서만 그렇다..216 결정불능성과 불확정성은 통치 장치들의 행동 ˝자유˝와 피통치자들의 행동 ˝자유˝ 사이의 교차와 충돌 지점에서 분출하는 정치적 행동의 가능태들을 지칭한다. 결정불능의 것은 ˝대표적인 혁명적 결정들의 씨앗이고 장소˝이다. 그것은 주체성의 변형들이 활성화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지배 관계들의 가능성이 그려지는 장소이기도 하며, 새로운 자본주의적 가치부여의 씨앗이고 장소이기도 하다. 217

[ ] 기업들은 새로운 상업화와 마케팅 전략들뿐만 아니라 특히 임금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변형하고 지도하는 ˝사제목자적˝ 기술들도 발명해야만 한다....218 현대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는 기업의 하이퍼모던하면서 동시에 네오아카이크한 행동 안에 잡혀 있다. 여러 위계 층위들을 동반하는 변조에 따르면 임금노동자는 주체적으로 열중하고, 자신의 감성을 투자하고, 유능하고 자율적인 ˝인간자본˝이 돼야 한다. 그러나 항상 위계적 종속의 틀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창조성에 대한 명령은 새로운 소득이나 새로운 권리에는 관계되지 않고 임금노동자들 스스로 위험과 책임을 떠맡는 것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219

[ ] 자본주의의 통치성과 가치부여는 ˝다수 권력들˝(기업, 국가, 지자체들, 예술기관들)과 ˝사회적인 것˝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생산된다. 221

[ ] 예술가/지식인의 새로운 형상에 대한 질문, 시간/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회 안의 소유권에 대한 질문222 ˝집단 지성˝을 활동의 헤게모니적 모델로 만드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어떤 조건들에서 이 ˝직업들˝이 무예술과 무예술가의 개인적 경험을 다시 취하고 확장시키고 재발명하고 집단적 층위로 옮겨놓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관건이다. 224

[ ] 시간을 규제한다는 것은 시간과 함께 주체성을 획일화하고 동질화하기 위한 것이다. 주체성의 빈곤화는 우선, 그리고 특히 시간의 빈곤화이다. 변화의, 변환의, 가능태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시간을 무력화하는 것이다../실업보험은 우리에게 보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줍니다./내 자본은 시간이지 돈이 아니다/ 빈 시간, 중지와 단절의 시간, 목적성 없는 시간, 주저의 시간은 모든 예술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생산의 조건들이다. 225

[ ]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그 시간들에서 변환의 힘을 빼낸다. 이 정책들이 알고 있고 인정하는 유일한 시간성은 고용의 시간과 구직의 시간의 시간성이다. 반면에 소위 ˝자유로운 ˝ 시간은 문화와 관광산업들을 위한 시장으로 변형된다. 225 자본의 논리가 ˝죽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살아 있는 시간˝이다.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 개념은 소위 ˝인지자본주의˝에 , 소위 ˝지식사회˝에, 또는 소위 ˝문화적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주요 모순이다. 226˝부자되세요˝라는 자유주의적 좌우명 옆에 ˝자신을 표현하세요˝ ˝창조적이 되세요˝라는 신자유주의적 좌우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표현은 장려될 뿐만 아니라 고용적격성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창조에 대한 독려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 권리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227

[ ] 벤야민에 따르면, 바로 소유권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대중들의 표현을 조직하겠다는 의지가 파시즘을 특징짓는다. ˝전체주의 국가는 새롭게 구성된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을, 그 대중들이 폐지하려고 하는 소유권의 조건들을 건드리지 않고서 조직하려 한다. 자유주의 정부는 전체주의 국가의 것과는 다른 틀 안에서 동일한 목표를 겨냥한다. 그것은 ˝대중들에게 그들의 권리들의 표현이 아니라 그들의 본성의 표현을 허용하는 것이다. 228

[ ] 뒤샹의 예술에 대한 원칙과 기준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변형을 위해 ˝행동하려는 경향˝이기 때문이다...예술가는 주체성의 출현 지점으로 체계적으로 되돌아오는 ˝영매의 방식으로 행동한다...예술가-영매의 활동은 따라서 주체성이 ˝반복˝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체적인 잠재적 변이들의 발생지가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전개돼야 한다....그 단절은 우리에게 단지 변화과정을 향해 열린 그것의 출현 지점만을 준다. 이 변화과정은 내재적 방식으로 그것의 규칙들, 그것의 절차들, 그것의 기술들을 퍼뜨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주체성이 변환될 수 있다. 231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의 주체화 전이는 사용된 재료들(대상뿐만 아니라 사상, 기호 등)의 ˝상호침투˝,˝물질전환˝,˝변성˝을 실행하면서 하나의 우주를 펼치고 하나의 세상을 짠다...창조적 행위는 가능한 경험의 장을 이동시키고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미적인 행위이고, 새로운 감성과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장치를 구성한다. 232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간격 안에 우리는 뒤샹을 따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을˝가능성을 위치시킬 수 있다....예술적 창조와 임금노동 사이의 양자택일안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최소로 행동하기˝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최소로 행동하기˝는 현대 자본주의의 능력 분배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고, 모든 창조의 조건인 비목적성의 시공간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234

[ ] 같은 것 안에서의 격차를 파악하는 것, 동일자 안에서 앵프라맹스한 간격을 발견하는 것, 대량생산을 다시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언어에 의해 실행되는 환상들, 일반화들, 분리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차이와 반복의 모든 방법론을 내포한다. 235

[ ] 지성은 예술적 실천의 효과들을 파악하기 위해 좋은 도구가 아니다. 예술적 실천은 ˝종교적 믿음이나 성적인 끌림과 약간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감정을 통해 느껴지기˝때문이다. 뒤샹은 주체성의 생성적이고 구성적인 힘으로서의 정동(미적 메아리나 미적 감동)과 기존의 ˝미적˝습관들과 그것들이 운반하는 권위를 반복하는 데 그치는 감정들(취향들)사이의 구별을 도입한다. 237 미적 감동(재현이나 이미지가 동반되지 않는 집중적, 실존적 정동)의 속성은 사랑에 빠지는 ˝바보˝의 유연성과 신뢰 안에서만큼이나, 신을 믿는 ˝바보˝의 순수함과 믿음 안에서도(다다주의의 바보안에서도) 표명된다. 238 종교는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힘들에 호소한다. 그 힘들의 본성은 ˝감정적이고 활동적˝(제임스)인 동시에 비상식적이다. 239

[ ] 실재는 가능태의 사례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이 보이지 않는 세계는 더 이상 저승을 구성하지 않고 실재에 내재한 ˝바깥˝을 구성한다. 뒤샹이 말한 예술의 세계처럼, 그 세계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사건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다. 이 사건의 논리는 연대기적 시간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이질적인 것이고, 선적인 발전을 단절하는 것이며, 그렇게 단절하면서 새로운 연대기를 여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력을 청구하면서 가능태들의 세계를 육성하는 것이다. 비결정된 것 안으로의 이 도약으로부터 경험은 실험으로, 위험 감수와 내기로, 자기자신, 타인들, 세계를 시험에 들게 하고자 하는 의지로 변형된다. 241 문제가 되는 힘들과 행동은 심리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유기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는 ˝비에너지적이고 비정보적˝일 것이다..뒤샹이 레디메이드를 생산할 때처럼 이제부터 행동한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과 행위를 구분한다. 행동(감각운동적)은 천연의 사실들이나 완전히 주어진 사실들에 대해 작용하는 반면에, 행위는 가능태들에 대해 작용한다. 행위와 함께, 우리는 어떤 점에서 현장에서의 도약을 실행한다..신앙은 행위를 설립하고 지지하고 규정하는 정서적 힘이다...그것은 실존적 자기위치결정의 힘의 출현을 확언하고 표시하고 서명하는 집중적이고 의도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한편 신앙은 가능태들 안의 세계들을 주고 ˝재충전˝하고 ˝미래를 향한 열림˝(제임스)을 구성한다.....반면에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바로 모든 신뢰를 파괴하고 그것의 반대자인 불신과 두려움을 산업적으로 생산하는 통치이다. 243

[ ] 주체성은 더 이상 ˝운동적이거나 물질적이 아니라 시간적이거나 영적인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감각운동적 행동과 무기적 행동 사이의 관계, 물질적 주체성과 영적 주체성 사이의 관계는 사건의 역동성에 의해 주어진다. 시간적이거나 영적인 주체성과 무기적 힘들은 ˝비육체적˝정동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 심리적인 것, 유기적인 것 안에 개입한다. 244

[ ] 왜 뒤샹과 함께 지성과 감성 사이에, 지식과 감정 사이에 신앙을 집어넣어야 하는가?...지식도 , 느낌도 우리에게 공백에서 출발해 행동할 힘을 주지 않는다..246 하나의 대상, 하나의 생각, 하나의 관계, 하나의 기능에 집착하고 고착되는 신앙은 바로 뒤샹이 상기시키는 것처럼 권위라고 불린다...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생산하는 것처럼 신앙을 제작한다...예속은 신앙을 내포한다. 자율성, 책임, 위험감수를 명령하는 현대 경제는 신앙을 단순히 좋아하는 것 이상이다. 자기의 경영자정신이라는 논리에 예속되는 것은 믿는 힘의 제정이나 이전을 요구한다. 247

[ ] 일단 습관-신앙이나 권위-신앙과 단절을 한 후, 레디메이드는 비결정된 미지의 세계 안에서 행동의 조건들을 노출하고 조직해야 한다....공백과 마취의 바로 옆에서, 신앙은 신뢰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어떤 생각이나 어떤 의미에 집착하거나 어떤 습관에 순응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어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품행들 대부분은 어떤 행함이나 제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함˝을 가리킨다.. 248

[ ] 삶과 예술 사이에는 항상 채워질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나는 회화를 이용하려 했다. 삶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방식으로...내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시도하기 위한 일종의 방식으로, 삶의 방식을 수립하기위해서 예술을 이용하려 했다...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고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249 삶의 방식을 수립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는 것, 그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과 시간의 강도를 파악하는 능력을 내포한다. 250

[ ] 주체성은 이질적 구성요소들의 교차로에 있다. ...개인은 이질적이고 부분적인 구성요소들의 종점에 있다.(가타리) ˝주체적 변이˝는 무엇보다도 우선 담론적이지 않다. 이 변이는 주체성의 비담론적, 정서적, 실존적 발생지를 건드린다. 즉, 자본주의는 존재양식들과 삶의 형태들을 공격한다. 251

[ ] 우리가 제도화된 예술을, 사회적 장에서 전시된 그것의 작품들을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 상태에 있으며 항상 자기 자신에 앞서 있는 출현 역량인 창조의 차원을 참조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원생-미적 패러다임에 대한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252 미적 패러다임은 창조성이 항상 집단적 배치의 결과라고 확언한다. 주체성과 자기 변형 과정은 항상 언술과 행동의 집단적 배치로부터 나온다. 이 집단적 배치는 개인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의 단일체를 폭발시키고 주체 안과 언어 안에 갇혀 있지 않다. 254 20세기의 예술은 언어학과 사회과학 훨씬 전에 ˝언술의 문제가 더 이상 기호 영역에 특수한 것으로 머물지 않고 이질적 표현 재료들 전체를 가로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258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닫기 전에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260

[ ] 윤리-미적패러다임: 실존적 자기위치잡기..지식과 언어를 통해 표명되기 전에 우선 느끼는 방식 안에서의, 실존 안에서의 변화를 표명하는 힘에 대한 파악을 바탕으로 이 윤리-미적 패러다임이 세워진다....실존적 기능의 건설로 번역되는 가타리의 언술 개념의 이런 확장은 새로운 프락시스를 위한 필요불가렬한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 조건은 ˝신뢰˝를, 행동하려는 경향의 동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261 실존적 기능은 감정적, 집중적 힘이다..사랑의 정동이 리비도의 해소에 대한 기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세계들의 교차로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폭동의 정동, 분노의 정동, 통치되지 않겠다는 의지는 이 열정들의 표현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다. 그리고 펼쳐야 할 가능한 세계들과 줴적 갈라짐들을 포함한다.264 사람들이 주체성 생산에 대해 말할 때, 작품이 아니라 창조 과정이 패러다임으로 나타난다. 생산물이나 결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바로 행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에 대해 우리의 관심이 주어져야 한다. 65 윤리적 시간이 주체화를 프락시스적 교차로로 따라서 자기에 대한, 타인들과 세계에 대한 신뢰를 내포하는 선택으로 위치 지우고 파악하도록 허용한다.265

[ ] 들뢰즈에게 있어서 근대적 사실이란 우리가 더 이상 이 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 타인들, 세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신뢰의 붕괴에 의해 열린 구렁 안에 자기, 타인들, 세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265

[ ] 이제부터, 바로 관계가 신앙 대상이 돼야 한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만 다시 주어질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이다. 신앙은 다른 세계나 변형된 세계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믿을 이유가 필요하다.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와 그것이 감추는 행동과 삶의 가능성들을 믿을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회의주의는 인지적이 아니라 윤리적이다. 정치적으로 막다른 길은 우선 윤리적으로 막다른 길이다. 세계, 타인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위치, 참여, 실험과 관계된 막다른 길이다. 266

볕뉘

0. 랏자라또. 출간이 잦아 구입해서 읽다. 단숨에 읽으려고 했지만, 며칠 걸리고, 밑줄을 옮기는 과정에 저장이 되지 않아 다시 워드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말미 워딩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손님들이 오고, 달리 다른 독서가 맞지 않아 이리 타자에 시간을 보냈다.

1. 이탈리아 사상가는 묘하다. 그람시도 그러하지만 서유럽의 분위기와 다르면서도 우리와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간만에 가타리를 불러내었고, 알랭바디우와 랑시에르의 허전함을 잘 들여다봐주어서 기쁘기도 했다. 숭숭 내용이 빠진 그 무엇을 채우는 듯 싶어 묘한 기분이기도 하다.

2. 말들이 어수선스럽지만 좀더 매끄럽게 순탄하게 만들면 손에 쥘 수 있는 유용한 공구가 될 듯싶다. 푸코도 묘하게 잘 살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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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1.

[ ] 오셀로의 비극은 그가 사랑과 질투라는 양극 사이에서 사고와 감정이 분열되고 그 결과 고통을 겪을 줄만 알았지 양극을 동시에 받아들이거나 뛰어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201

[ ] 오셀로의 말에 의하면 데스데모나는 오셀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겪은 위험때문에 그를 사랑했고,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험에 반응하는 그녀의 동정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과 동정은 이야기가 일으키는 감정이고 이야기에 대한 반응이다. 따라서 오셀로의 사랑의 핵심은 실재가 아니라 허구인 셈이다. 204

[ ] 오셀로의 사랑이 생각과 감정으로 양분될 때 그의 생각은 이야고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이다. 그는 사랑의 현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이야고의 생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208

[ ] 오셀로의 사고와 감정은 거의 언제나 극단적으로 양분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의 갈등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반면 이야고의 이분법적 존재 방식은 거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선과 악 사이에서 아무런 갈등 없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209

[ ] 오셀로는 사랑에 과한 한 생각보다 감정이 강한 인물이다...그러나 사랑이 뿌리를 내려야 할 현실적인 조건들에 대하여 차분하게 생각하고 따지는 일에 관한 한 그는 에밀리아의 말처럼 얼간이이고 멍청이이며 흙처럼 무식하다. 215

2.

[ ] 미움을 주축으로 하는 이야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그의 비존재를 존재케 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그가 끊임없이 약행을 구상하고, 거기에 동기를 부여하며, 그것을 실현할 대상을 구하는 이유는 그런 일련의 활동들이 그의 삶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가 악행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이나 위험 또는 기쁨을 느낄 때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낀다. 206

[ ] 오셀로에게 그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지만 이야고에게 그것은 삶의 전략이며 본질이다. 그런데 이야고의 신비는 그의 생존을 노력이 거의 본능적이고 자동적이어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는 거의 갈등 없는 이분법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208

3.

[ ] 사랑과 질투로 양극화된 오셀로의 모든 사고와 감정은 대립하고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갈등은 허구와 실재, 천국과 지옥, 사랑과 질투, 창녀와 천사, 순결과 음욕, 조화와 혼돈, 흑과 백, 선과 악처럼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이분법적 생각과 감정과 사물과 상황의 그물망을 형성한다.그것은 우리 몸의 혈액 순환계와 흡사하다. 동맥과 정맥이 큰 줄기에서는 그 차이가 뚜렷하지만 실핏줄에 이르면 그 경계선이 모호해지듯이 오셀로의 사고와 감정 또한 명백한 양극의 대조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모호하게 섞이면서 교차한다. 이런 식으로 셰익스피어는 오셀로의 사랑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을 극명한 대조에서 가장 미세한 섞임까지 잡아낸다. 219

[ ]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나 강렬하고 대비되는 양극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13

[ ] 그녀는 오셀로의 얼굴을 그의 마음에서 보았다. 그녀는 극중 인물 누구에게도 질투심도 시기심도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녀는 성을 오셀로처럼 천사와 창녀의 행위로 양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와 나눌 사랑의 의식이었다....우리가 오셀로의 죄와 벌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랑의 진실은 드러나지 못한다. 사랑의 진실은 이분법적 양극의 어느 쪽에도 또한 양극의 그 어떤 조합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데스데모나는 물론 창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화 석고 묘사이나 순수하고 완벽한 홍옥이나 진주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그려는 사랑을 말한 대로 실천하는 아름다운 여성이다. 이런 데스데모나를 보려면 우리는 모든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241-243

[ ] 이야고 - 내약이 듣는구나. 쉽게 믿는 바보들은 이렇게 붙잡히고 바로 이런 식으로 수많은 훌륭하고 정숙한 부인들도 아무런 죄 없이 치욕을 당한단 말씀이야. 142

4.

[ ] 씨-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248 한글자사전에서

볕뉘.

0. 셰익스피어 작품을 모티브로 한 몇 편의 시. 그리고 시를 주제로한 시극을 지난 가을에 보았다. 그렇게 출발하여 한켠에 두었던 책들을 보고있다.

1. 어쩌면 올초 연희단거리패의 30스튜디오에서 본 백석우화 연극을 보곤 희곡에 관심이 더 생긴 연유인지도 모르겠다. 참 무난히 읽어냈다. 백석 시를 토해내는 오동식이라는 배우를 보았고, 따뜻한 밀크티를 주는 이승훈배우를 기억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낭독의 힘이 스며들기도 전이다.

2. 예약을 할 수 없어 대기번호를 기다리며 연희단거리패 30년사를 들추어보았다. 그만큼 시간이 남았었고, 빈 자리를 내주고 간신히 극을 보았다.

3. 번역자는 멕베스도 그러하지만 오셀로도 이분법에 중독된 자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비극적 인물의 말로가 어디서 시작하며, 어떤 여파를 일으키는지 미세하게 살펴보려 하고 있다.

4. 성공과 책임감은 이분법을 양분으로 자란다. 쑥쑥. 좋은 것만 취하고, 자라게 하는 것만 취하고, 그렇게 조직을 살리고 키웠다고 자부한다. 그러다가 잘라버린 이분법이 아닌 것들은 모두 다 쓰레기통으로 쳐넣어버린다. 이런게 세상이자 조직이다. 업적을 치하하고, 또 다른 적을 만들어 그 대지에 의기양양하게 그 조직을 보인다. 우러른다.

5. 이분법의 인물로 오셀로와 이야고를 말한다. 이분법에 사로 잡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오셀로와 이분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것을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이야고라는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괴기스러운 일은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고, 그것이 가져온 사고에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거나, 느낌조차없는 일이 혼재한 세상이다.

6.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그 말로를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이다. 여전히 위기와 위험으로 조직을 보존하기에 급급한 그 삶의 논리를 생생히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일은 선한 일이라고......저들이 하는 일은 악한 짓이라고 하고.....저들은 뱀이라고 여우라고....이분법의 꼬리표를 다는 자를 의심하라. 언어의 대비가 강렬한 자를 의심하라. 그들은 현실에서 살고 있지 않다. 허구. 지금과 다가올 미래에서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자신을 의심조차하지 못할 것이다.

7. 어쩌면 이분법의 울타리에서 걸러진 말들을 간수해야 할 것이다. 그 말씨들을 따사로운 솜에 물을 조금 뿌리고...양지바른 봄볕에 두고 며칠 기다리고....여기저기 심으려해야 할 것 같다.

8. 지난 흔적들은 늘 부끄럽고 위태롭다. 지금 흔적들도 위태롭고 부끄럽다. 가녀리고 스러져가는 손을 잡으려면 얼마나 나를 뒤집어야 하는 일인가 두렵다. 그렇지만 기쁨이기도 할 것이다. 아주 작은 사실을 느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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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맥베스의 경우 야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의 표현 방법이다. 맥베스의 갈등은 언제나 양심과 야심, 선과 악, 충성심과 역심과 같은 상반되는 가치의 대립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맥베스의 권력욕 자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욕망을 표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구조이다. 바로 이 이분법적인 사고 구조와 표현 방식이야말로 맥베스의 혼란을 가중시켜 그를 점점 더 깊은 갈등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더 깊은 악의 세계로 빠뜨리는 주범이다. 140

[ 2 ] 진실은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이런 틀에서 진실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완전한 허구에는 못 미친다. 또한 시간적으로 현재와 예언이 실현되는 꿈꾸는 미래 사이에 위치한다. 이런 중간자의 위치 때문에 맥베스의 진실은 어느 쪽에나 소속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느 쪽에도 소속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불확실성의 지점이고 태풍의 눈이며 맥베스 비극의 시발점이다. 강력한 욕망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이러한 마음은 내분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과는 끔찍한 환상이 그의 심신을 무력화시키는 ‘없음의 혼돈‘이다. 141

[ ] 맥베스의 허무한 인생 결산에서 우리가 듣는 것은 삶의 철저한 부정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강력한 염원이기 때문이다. 삶의 무의미를 이토록 깊이 꿰뚫어 보는 이 사람은 지상 최고의 권력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최대로 맛보려 했던 바로 그 맥베스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러운 건 고웁다˝라는 마녀들의 궤변은 다시 한 번 그 힘을 발휘한다. 맥베스의 악행은 그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인간성의 고귀함을 비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47

[ 3 ] 그자는 운명을 걷어차며 죽음을 비웃고 지혜, 자비, 공포보다 자신의 소망을 더 위에 둘 거야. 83

[ 4 ] 시간이 내 무서운 위업을 미리 알고 막았어. 쏜살같은 목표는 행동이 없으면 절대 잡지 못하는 법. 바로 이 순간부터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은 곧바로 손으로 갈 것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 생각에게 행위로 보답하기 위하여 내 생각을 실천하자. 95

[ ] 아 불쌍한 나라! 못 알아볼 지경이오. 어머니가 아니라 무덤이란 할 수밖에 없는 그곳에선 무지한 자 말고는 어떤 것도 웃지 않고 탄식과 신음과 대기 찢는 비명을 토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며, 격렬한 슬픔은 흔해 빠진 감정 같소. 조종을 듣고도 누구인지 안 물으며, 착한 사람 목숨이 모자 위의 꽃보다 더 빨리 시들어 병들기도 이전에 죽습니다. 108

[ ] 이보시오! 모자를 눈 아래로 끌지 말고 슬픔을 말하시오. 비탄이 입 못 열면 미어지는 가슴에게 터지라고 속삭인답니다. 110

[ 5 ] 전의는 마음 아픈 사람에게 약을 주어 기억 속에 뿌리 박힌 슬픔을 뽑아내고 뇌수에 각인된 고통을 지우며 감미로운 망각의 해독제를 사용하여 왕비의 심장을 짓누르는 위험한 것들을 답답한 가슴에서 못 씻는가? / 그 일은 환자가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120


볕뉘

0. [3,4]의 인간유형이 지금과 무척 닮아 있는 듯싶다. 소망과 목표에 쫓기거나 중독되어, 지혜도, 자비도, 공포도, 죽음조차 보지도 느끼지도 않는 인간말이다. 삶은 현재에 놓여있지 않아, 현재와 미래의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2]

1. 이러한 인간은 애석하게도 [1]의 사고구조라는 곱셈이 된다면.......


2. 어쩌면 그 이분법이라는 무한회로로 익히 양심을 잃었을게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시선과 자신의 회로로 남는 것만 취하여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지경까지.......

3. 어쩌면 그 회로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스스로 해야만 할 것이다. 슬픔과 가슴이 미어지면서 삶을 밀어가면서.....그것이 가장 빠른 길인지도 모른다. 삶의 회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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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년에 한 번 저녁 회식, 고졸자들과 자식또래의 신입사원...팀장인 제수씨는 대부분의 회식이 점심이며, 자기가 주장해서 일 년에 한번 저녁회식을 한다고 했다. 두루 아래위로 잘하는 눈치있는 사원이 좋다고 한다. 그럴까. 그렇지만 꼰대소리 듣는다고...달라진 일상의 수준을 바라보는 법을 느끼고, 그렇게 사고하지 않는 순간. 꼰대라고 나눈다.아쉬움과 심리적 안정을 옛날에서 찾으려하는 관성이 지체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자아에 대한 고민, 삶에 대한 고뇌를 스스로 향유하지 않으려는 삶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이들은 뒤늦게 감기가 든다.

2. 역사는 새롭게 보려는 노력이자 시도이다. 읽고 있는 책들이 한결같이 전하려는 흔적이다. 현실은 아마 그 사이나 또는 그 밖에 있을 것이다. 역사가 보려는 경계들 사이나 또 다른 너머에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3. 미투라는 쓰나미. 아니 이미 예고된 경고였을 것이다. 권력의 기울기를 갖고 있는 것. 그 기울어진 운동장에 사는 이들은 늘 무게중심을 체감하나 말은 갖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예외가 없다. 수평을 향해 더 멀리가려고 할 것이다. 언어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거꾸로 어른들의 언어를 빌려 신음하는 비명. 갇혀 있거나 스러져가 볕도 보지 못하는 이들의 퀭한 눈동자들. 어쩌면 인간은 본디 괴물인지도 모른다. 괴물임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순간, 괴물임을 거꾸로 증명하는 것이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밖으로만 향해있지 않다. 똑같은 크기로 안으로 향해있다. 무심하고 지나치는 것들의 안타까움을 눈치채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도 나도 없고, 경계란 본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싫으면 남도 싫다는 정언명령을 따지지 않더라고 말이다.

4. 시시다방의 진은영편을 들었다. 몇년이 지난 것을 우연히 듣고서......마지막 말이 맺혔다. 존재가 달라진다는 것.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충만하거나 새로 피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겹쳐 다정했다. 아프면 색깔이 선명하게 들어오고 그 선명함에 기대야만 고통이 감해진다는 말. 한 평론가의 진은영시에 유난히 색깔이 많이 나온다는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5. 아픈 계절이자 변곡의 시절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행적과 그 자장을 갖는다. 결코 예외는 없다. 백석의 시를 살핀다. 수라. 아버지이기에 어머니이기에 형이기에 오빠이기에 어른이기에 정상인이기에 사업주이기에 자본가이기에 a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젊기때문에 수도권에 살기때문에.......안으로 향하는 낮고도 긴 저 저음을 느껴야하는 봄인지도 모른다. 참 아프다. 피기 전엔 늘 아픈 것이라고 다독일 수 있을까.


볕뉘.

0. 설 명절, 다른 때보다 오래 쉬다가 두 곳의 상가를 조문하고 돌아오니 봄빛이다. 인간-욕망이라는 갤러리고트빈의 전시를 내려오기 전 잠깐 봤고, 내려와 알게 된 지인들에게 새봄인사를 한다.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하는지 이리 난망하고 잡히지 않아 어설프다. 스러져가는 것을 볼 줄 알거나 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않으면, 스러진 것의 아픔이 철철 넘쳐흘러 진창인 것을....그래 아프지만 봄이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 나가는 것, 아니 해 결의 결을 나누고 나누어 보는 일...그것에서 겨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의도하지 않는 의도가 넘치는 세상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일까.....낡은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추스릴 것이 없는지도 모르겠다....그래서 더 아파하기로 하자. 더 아픈 곳을 애써 찾자. 밖과 안으로...안으로밖으로.....그래야 겨우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생겨가는 것인지도.....

 

1.

철 지나버린 자작 시 몇편▼

 

불일치란 구원

 

보가 움쭐한다. 몇 년전 평야 지근거리에 있는 저수지 보가 터졌다. 민원이라든가 아우성이라든가 할 만큼 다 이야기를 했는데도 곪아 터졌다. 갈라진 으로 물은 미어져 나와 도로를 휩쓸고,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주택을 향해 낮은 곳으로 거 칠 것없이 흘러갔다.

 

염치의 보가 금이 갔다. 몇 년전 숨도쉬지 못할 것 같은 불일치의 보가 터졌다. 낮거나 비우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내동댕이 칠 기세를 많이많이 모으고 있다. 틈이 점점 벌어지면 그 틈으로 부릴 것들을 휩쓸고, 비우지 못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먹고 잡을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다. 숨도 참지못할 것 같은 부릴줄 만 아는 것들에게 도를 넘어섰다. 부끄러워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렸다. 틈새는 봉합되지 않으며 넘친 선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쓸어버릴 조짐이다. 넘쳐버린 것들은 막혀버린 것들을 거리낌없이 무너뜨릴 것이다. 비워진 것들은 스쳐지나갈 것이다. 비울 것들을 밀어내면서 갈 것이다.

 

버티는 것들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제 무게를 이길 수 없다는 것 들은 한번씩 무너질 것이다. 무게를 감당하려면 할수록 주변의 감당하고픈 존재들과 짐짝처럼 우르르 밀려다닐 것이다. 틈은 점점 벌어져 감당하려는 것들을 휩쓸고, 감당하는 것들을 거리낌없이 밀어붙일 것이다.

 

경계는 없다. 모멸찰 것이다. 삶의 마당뿐만 아니라 제 가슴과 마음 속을 박박 긁어댈 것이다. 내 안의 불일치라는 광맥을 따라 모멸과 관성과 억장은 물밀듯이 밀려올 것이다. 내 밖의 불일치라는 심장 소리를 따라 걸어야 할 것이다. 뛰어야 할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스며들 것을 예비하여야 할 것이다. 비움과 환대의 그릇만이 쓸려간 뒤의 것들을 끌어담을 수 있을 것이다.

 

 

문책

 

 

 

지난 시간을 불러 세운다

등짐처럼 눈꺼풀이

내려와도

모질게 지나버린 시간을 채근한다

 

온몸이 쓸려내려갈

기세의 말들은 용케도 몸 속을

침식해 들어간다.

 

삭히면 삭힐수록 단어 하나하나

 

날을 세워 낚시바늘처럼 온몸을 되찌른다

 

뚝뚝 떨어진 시간을 불러 세웠다

흘러가버린 시간들 속,

몸에 박혀

심장 가까이 꽂힌

 

사금파리 같은 시간들을 거꾸로 세웠다

 

얼굴은 붉어지고

피는 거꾸로 솟고,

툭 불거진

혈관 가까이 실금같은

사기조각이 통증을 짓누른다

 

하늘은 흐리고

바다는 색을 잃어 슬프고

바람은 한겹한겹 온몸을

발가벗겨 체온을 내렸다

 

몸도 시간도

간당간당 깃발처럼 날린다

흘러올 시간들 속에

숨표처럼 또렷하다

 

 

궁리와 혁명 사이^^

 

- 진심은 어딘가 걸려있다

 

 

꼴같지않은x 들과말도섞지않는다는가끔룸펜지경도되는j 를만나

 

 

술을섞고답답함도섞고눈에보이는생활고도느끼다가

 

 

취하지도 않은 또렷한 소리로

 

"혁명이 필요하다 "는 말에

 

 

서슴지 않고

 

"그래"라고 했다.

 

 

한시간

 

하루

 

이틀

 

나흘

 

한주가 지나도

 

 

또렷이 서성거리는

 

"그래"

 

불러들인다.

 

 

세상x같은곳에서

 

김수영만

 

들먹거리는 방구둘의

 

거울속에서

 

짓는다

 

 

"컹컹"

 

"혁명할 궁리도"

 

"못하는것들이"

 

 

 

한달

 

두달

 

세달

 

 

'혁명할 궁리'

 

궁리에 방점도 못찍고

 

앞말은 잊고

 

들어앉은

 

'처자식버릴 궁리'하다

 

 

머리가 쇤다

 

자화상

 

 

무너뜨린다

쌓아놓은

벽돌들을

툭툭 흔들고 쳐서 무너지게 한다

 

그리곤 다시 쌓는다

아귀는 맞는 것인지

벽돌이 채워지지 않아 빈 곳은 있는지

 

또 부수고

다시 짓는다

 

흔든다

흔들어 무너뜨린다

제대로 갈피잡지 못한

시간들을 거두어 낸다

거둔 시간들을 쌓는다

 

쌓는다

흔든다

서지못해

기댄 곳을 부수곤

다시 기둥과 벽들을

무게중심선에 맞춘다

 

공들일 하루를

인내할 한주를

고달플 한달을

외눈의 한해를

겹눈의 수해를

다시

무너뜨린다

다시

안으로 쌓는다

 

무엇을 하는지

잊을 때까지 허문다

무엇을 하는지

잊는 때까지 쌓는다

 

바닥이 있지도

않는듯 허문다

그리곤 쌓는다

숨결이 메마르도록 짓는다

 

메마른 대지에

다시 물을 붓는다

스며들 시공간부터

채운다 다진다 곁의 바닥까지

 

완장

충성을

맹세하다 부르짖다 줄세우다

 

권한과 월권의

경계가 무너진다

 

잘 해야한다 잘 할 수 있다 잘 해내었다

 

합리의 무한궤도

일에 걸리적거리는

불합리의 궤도는 무거운 그림자다.

 

감성도

감정도

사람도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를 달고 이유가 증식한다.

 

목적과 수단이

일순간 어긋내며

그날그날을 핍박해낸다

 

일거수일투족이

다 증거다.

관계밖과 관계안과 위를 살며

언제든 법과 말로 균열을 낸다

 

말과 법은 늘 무기다

동일한 협박범이다

권한은 일상들을 숨가쁘게 한다

 

발가벗은 채 추는 춤은

법의 장식과 말의 노리개를 달고 구경거리가 된다.

 

어제의 나도 오늘의 너도 제물이다.

 

사회는 말라비틀어졌으며

사회적인 것은 스스로 설 수 없어

일과 목적의 밀림을 헤쳐가는 것은

타겟이된 혼자일 수밖에 없다.

 

성인들을 관음할 수밖에 없어

점점 멀어지는 유격은

세상의 습기조차 빼앗는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품지 못하고

사회는 보습기능도 잃어

각질처럼 벗겨진다

 

발가벗겨진 지평선의 군상들

발가벗겨질 수평선의 무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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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것이다.˝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고 외친다. 어떤 세상인데, 왜 그럴 수 있냐고 되묻지 마라.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마라.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것이니 그리 한 숨을 쉬지도 마라. ‘도‘와 ‘모‘만 필요한 윷판인가? 개, 걸, 윷의 목소리는 늘 잊히거나 전체와 관계없는 목소리로 소멸된다. 백색소음이었던 것이다. 백과 흑, 흑백, 검정과 하양을 한 번 경험해본 이를 회색이라고 해보자. 회색이란 사건을 경험한 이만이 흑과 백의 농도를 느끼고 있다.

경주지진에 이어 포항지진은 아직 진행중이다. 지진멀미에 아직도 몸은 여지없이 반응한다. 존 듀이는 국내에 십진법, 실용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은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쓴 인물이다. ˝삶은 아무런 문제없이 물 흐르듯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은 역사적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경험은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이며, 경험 특유의 줄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언제나 경험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다.˝ 고 하면서 ˝경험이란 우리가 살아오면서 직접 겪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그러한 (하나의) 경험을 한 적이 있어˝고 말할 때의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고 한다. 물론 여기서 경험은 정서나 감정의 고저를 안고 있다.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는 관조의 의미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멀미의 여파와 불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건을 보는 것이다. ˝사고를 통해 구분할 수 있는 다양한 성질은 실제 경험 속에서 각각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하나의 경험에서 보면 사고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지각되는 관념들을 일정한 질성이 드러나도록 계속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존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1, 89-93 그는 따로따로 떼어놓고 분석하는 사유가 맹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완결과 성숙으로 소소하고 미미한 것들의 역할을 포함해서 전체를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이 충만함으로서 경험을 유도하며,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하나의 경험‘을 그토록 강조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것이 그리 잘못이냐고 물을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성과 감성을 나누듯이 육체와 영혼을 나누고, 자연과 사회를 갈라놓고 어른과 아이를 분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나누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알 수 없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이것임을 유념해두고 가자.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랏자라또는 ˝우리가 가능성을 ‘기존 체제에 의해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 자연/사회, 어른/아이, 정신/육체 등)에 의거하게 된다.˝ 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욕망이나, 감정, 지각 역시 그 이항대립의 틀내에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양자택일의 거부는 일종의 중단 혹은 무력화로 보이더라도 주어진 것의 저쪽에 주어지지 않는 것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16-18 라고 말하면서 이항대립의 문법을 다시 고민할 것을 권면한다. ˝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 있다. 서로 마주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정, 친애의 정, 슬픔은 전부 공감 관계의 표현이다.˝ 여러 경험과 사건들이 감정과 관계로 확산될 수 있고, 다른 선택지의 표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는 발명과 삶의 세뇌를 반복하므로 다른 출발을 할 것을 주장한다. ˝기쁨과 슬픔의 존재론이야말로 발명과 반복의 존재론으로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32, 150-153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사건의 정치

한편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는 양자택일 못지 않게 ‘이것이다‘라는 것도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다. ‘이것이다‘라는 확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인식의 경계로 불러들여 합리화하는 것으로 한 몫한다. 모든 문제는 ‘남북을 갈라져서야‘, ‘자본/노동의 계급때문이야‘, ‘서울/지방으로 나눠져서야‘, ‘남/여란 가부장제때문이지‘, ‘그래 거봐 생태란 개념이 없어서잖아‘.....그렇게 갈라보는 시선은 끝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긁어모으는 정보는 한계가 없다. 이것이라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종북이나 좌파때문이라는 상황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피셔-리히테가 삶과 예술, 몸과 정신, 관객과 배우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사건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경계가 갖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사유해보는 작업은 참고할 만하다.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른다.˝ 라고 한다. 이것이다라는 경계가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면서 풍부해질 수는 없을까? ˝ 450-452 ˝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떨어져서 세상을 분석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놓치고 있는 것이 많지는 않은가? 456 이상 에리카 피셔 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마지막은 레비나스다. 제자를 자초한 우치다 타츠루는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며,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의 자유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 약함은 타자성 그 자체를 형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일, 그것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며, 타자의 약함에 도움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우치다 타츠루, 사랑의 현상학 레비나스는 스승이 존재의 철학에 머문데 비해 숱한 죽음을 목도하며 삶만이 아니라 죽음의 무한을 철학에 들여왔다. 그런면에서 창조의 베르그송 철학도 존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고 한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나의 지배나 파악을 벗어나 있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우리는 사랑할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의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휘어잡는다.˝ 264 -266 나의 시야에서,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타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르게 읽고 다르게 만나는 책과 사랑받는 사람의 다양성의 철학으로 읽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조금 기존의 철학과 다른 것은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보와 소통이 넘친다는 0과 1의 디지털시대에 어쩌면 우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이런 낡은 사고습관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눈과 말, 시선과 감정의 느낌을 전유할 수 있는 아날로그의 사유나 사건 부재로부터 나오는 증상은 아닐까? 눈에 드는 물건과 음식처럼 사람도 느낌과 정서의 새로운 공유로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낯선 이를 만나도 환대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전도하기에 급급해 다른 이의 감정과 그 줄기에 붙은 많은 지혜와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경계를 더 튼튼히 하고, 자신을 흔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와 도뿐인 나만의 생각에서, 너로 이어지는 개 윷 걸의 시선으로 겨우 다가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온전한 사유와 삶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빠이거나 까인가? 아니면 꼰대인가? 생각이나 삶을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에 기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이것도, 저것도,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뿐만 아니라는 특이함이 있다. 그래서 겨우 전체를 향해가는 사유를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과 저것이 결코 보지 못하는 달의 이면을 같이 볼 수 있는 사유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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