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의 상업화는 성적 욕망의 과잉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성적 욕망이 전반적으로 억압되었을 때 나타나는 비정상적 현상이다. 안으로부터 분출되어야 할 성적 에너지가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영위되고 충족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왜곡이다. 자율적 판단이 ㅇㅏ니라 사회에 의해서 관리된 행동으로 변질된다. 관리되면서도 자율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복종이다. 223 성적 욕망은 상호간 향유라는 본질을 잃고, 구매자와 상품의 관계에서 소비로 전락한다. 224

식욕.수면욕.성욕이 대표적인 인간 본능임을 부인할 ㅅㅏ람은 아무도 없다....빵을 달라는 요구.생존권 보장이 깔려있는 식욕이라는 본능을 ㅅㅏ회를 통해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욕구가 각종 사상적, 정치적, 법적 이념과 요구로 정식화된 것이다.....수면욕도 단순히 자ㅁ만 자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휴식을 취해 몸을 정상적인 상태로 유지하려는 욕구를 반영한다....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노동 강도를 완화하려는 오랜 노력은 수면욕을 ㄱㅣ본 동기로 한다. 또한 편하게 쉴 수 있는 주거환경과 만족할만한 여가 역시 연관을 갖는다./동일하게 본능에서 출발한 생존 욕구임에도 시민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성욕이다. 식욕과 수면욕, 즉 식사를 하거나 잠을 ㅈㅏ는 행위에 대해 그 누구도 부끄럽다거나 타락이라고 규정하지 안ㅎ는다. 하지만 여전히 성욕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숨겨야 한다고 여긴다. 성적욕망을 정신보다 중시하는 순간 ㅂㅣ정상적 충동으로 분류된다. 225 이상 생각의 미술관 chapter 7 욕망을 생각하는 사람에서

2.

새벽의 세계 – 새벽 두시건 세시건 눈만 드면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어떤 때는 샛별이보일 때까지 혼자서 쏘다닌다. 그건 서성이는 것도 아니며, 더욱 무어ㄹ 찾는 것도 아니다. 새벽을 사랑하고 새벽을 느끼고, 새벽이 곧 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새벽 산책으로부터 돌아와 화폭과 마주하면 거기 또 하나의 세계가 형성된다. ㄴㅏ는 그것을 추구하며 이룩해 가는 것이다. 나의 작업은 이렇게 새벽으로부터 출발한다. 57 깜박이는 등잔불이나 촛불은 아아한 정취가 느껴져 오는 시골의 밤 빛깔이다. 44(덕소 화실에서 사는 나의 고백) 강가의 아틀리에 에서


3.

마틸다는 어린이책이 반드시 ㅈㅐ미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들은 어른들만큼 심각하지 않고, 또 웃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11

또 하나는 어린이가 책을 좋아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서를 학습의 일부로 소비하는 것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19

어린이들과 나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곡 차를 한 잔 마시며 한 주간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ㄴㅏ눈다. 그 일상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어린이에게 권할 책을 고르거나 그날의 수업 내용을 아예 바꾸기도 한다. 20

책읽기의 가장 큰 소득은 성적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고력이 커지고 안목이 높아지는 것이다. 25 중요한 것은 언제나 독자인 채로 자라나는 것이다. 어린이가 책 읽기를 배우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든 평생 독자가 되기 위함이다. 151 어린이책 읽는 법에서

볕뉘.

0. 책방에 보지 않았던 책을 볼겸 가벼운 책도 섞어 넣어 차 한잔하러 간다. 책을 짬짬이 보다가 뜬금없이 책구경을 하다가 주인장 낚시에 걸려들었다. 읽고 싶던 쇼코의 미소와 장욱진화가의 강가의 아틀리에, 어린이책 읽는 법.....그리고 박홍규교수가 인물과 사상에 연재해서 묶은 인문학의 거짓말 가운데서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눈에 띄는대로 읽었다.

1.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견해가 겹치는 것 같다. 박홍규교수는 플라톤을 옹호하는 매개 역할을 한 것으로 가라타니 고진은 자연철학과 이오니아의 배경을 갖는 산파술, 이원론을 경계하고자 하였으며 온전한 영혼을 깨닫을 것으로 묘사했는데 많이 갈리는 것 같다. 좀더 긴장감있는 읽기를 하고 싶다.

2. 조금씩 책들의 읽으면서 어제 포럼 생각이 겹쳤다. 쾌락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고 서열을 뒤에 둔 것을 문제 삼은 박홍순 저자의 ‘음울한 마법‘이란 마그리트의 그림을 소개한다. (다른 장들은 그림으로 읽는 철학이란 주제로 평이한 느낌인데, 이 7장은 잘 잡아 묘사한 듯싶다.) 이원론의 자장이 몹시도 크다.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감안한 제목으로 리빙랩과 커피숍, 민주주의 그리고 섹스라고도 붙여보았다. 커피숍은 다 망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마주 보며, 여기저기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성업중이다. 패션일까? 유행일까? 패션이기도 하면서 유행이기도 하고, 술자리보다 가벼운 대화욕구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인가 독특한 우리만의 방식. 리빙랩..파이로트 플랜트 개념, 과학상점의 개념.....테스트베드, 유저테스트,....이렇게 행정과 ,상품의 생산과 소비라고 하기에는 그것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 살아있는시험..뿌리내리려는 거시기...모든 문제에 대해 해보려는 그 무엇. 이라고 말을 붙여보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고지를 넘어섰을까? 우리의 일상으로 너머 오고 있는 것일까?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니 아마 아마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오손도손 수다와 카페문화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변화를 잘 상징?하지 않는가? 주부.....시간이 나는 유한계급이라 칭하지 않아도 ‘남 일‘에 참견하고 끼어들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타의로 일자리가 없어 메워야할 시간들 채워야 하는 시간부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생겨난 것은 아닐까?

3. 잘 모르겠다. 만약 6시간안쪽으로 일하고 나머지 자신이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늘어난다면.....민주주의의 변곡점은 또 다르게 가파르게 변할지도 모르겠다. 동네 일에 참견하려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의사를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안달인 사람들이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섹스의 구매하거나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향유하듯이, 마을의 문제, 마을의 일을 내식대로 서로 나누고 향유할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면, 리빙랩이 커피숍이나 카페처럼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패션이나 유행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백으로 든든해질 수 있는 벡터를 잊지 않는다면......

4. 장욱진화가의 덕소생활은 화집을 보면서 남달리 생각했다. 그것이 이렇게 가벼운 책으로 나온 모양이다. 새벽을 사랑하는 사람들...고독을 사랑하며 향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다. 한 번도 고독해보지 못한 채, 사물에서 시간을 발굴해보지 못한 사람들. 소화되지 않는 목표라는 등불만 달고 자신의 온 시간을 소진하며 쓰는 사람들이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울 때, 다가올 시간은 여전히 암담하고,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5. 민주주의는 밖으로 길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듯이 내면의 길을 같은 무게와 분량으로 형평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6. 집으로 가는 길이란 그림책은 학교가 끝나고 도로의 흰선만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묘사한다. 횡단보도...끊어진 흰 선을 팔짝 뛰어서 넘어 그 길을 걷는다. 외 길..다 낭떠러지.....어떻게 어떻게 집까지 왔다. 그러나 흰 선을 끊겨져 있다. 어떡해. 마무 것도 할 수 없다.....우울..급 우울..... 엄마다. 아빠다. 그 흰 선 마지막 낭떠러지에서 폴짝 뛰어 품에 안겼다. 집이다......어쩌면 민주주의나 우리가 원하는 일이라는 것은 자신을 버리면서 폭 안길 다른 이를 구하거나 찾는 일인지 모른다. 감정의 자장에서 자라는 따듯하고 시원하고 포근한 품에 서로 기대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 곳이나 아무 데가...거기가 시작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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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0. 여러 책들을 이어 읽거나 겹쳐 읽으면서 그래도 많이 머무르게 될 간이정류장 같은 책이 될 것 같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번역본의 초기작이고 본다면 최근의 가상과 사건을 먼저 보고 이 책을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책이 분량이 상당히 되어 꽤나 인내를 요구할 것이지만, 끝까지 읽는다면 어떤 통찰이나 다른 접근방식에 대한 깨달음을 느낌 같은 것이 올지도 모르겠다.

1. 관계-내-존재?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 정지한 체로가 아니라 운동하는 그대로 사유할 것. 어쩌면 생각의 기준틀을 모조리 바꿔 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베르그송을 인문의 아인슈타인으로 보고있다. 유클리드가 아니라 비유클리드....우리는 어쩌면 사유를 고정되거나 정지된 것으로 환원하여 사유하고 말하고 있다. 움직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인문을 분석하고 뜯어내어 분해하는 것으로 말이다. 난해하고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한번 속는 셈치고 끝까지 따라가보자.

2. 책에 대한 평가는 내 몫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평가되었다는 것에는 손을 들고 싶다.

3. 사유 전반과 삶의 전반을 뒤흔들고, 재사유, 재참여 하고 싶다면 사유를 어디 고정된 곳에 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시작으로 권면하고 싶다. 꽃이 붉다. 장미의 계절. 불꽃같다. 지극히 빨강....





서론

구체적으로 행하지 않아야 구체적이다

감각을 느끼는 육체에 대한 초기의 현상학적 탐구들은 상당히 뒤쳐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문화를 구조화하는 능력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과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중간에 위치하 삶이 의무로 부여받는 권력의 행사와 대항권력의 미광 둘 모두와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히 주관주의 없는 주체였다 : 외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구성된” 주체, “대주체 The Subjet” 11

위치성 개념은 실상으로부터 운동을 빼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문화적 정지화면 안에서 육체를 간파한다. 설명의 출발점은 정확한 위치, 즉 정체의 영저이다. 13

육ㅊㅔ의 질적 운동 문제에 접근했던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유물론이라고 규정했지만, 물질은 단지 간접적으로만, 즉 매개에 의해서만(계량 가능한 격자로)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물질, 운동, 육체, 감각. 매개된 다중은 미끄러진다. 14

육체가 수반하는 비결정성의 혐의는 육체와는 분리될 수 없다. 비결정성의 혐의는 육체가 이행하거나 과정 중에 있는 한에서(그것이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한에서) 육체와 정확히 일치한다/운동하고 있는 육체를 사유하는 것은, 구체성의 복원은 커녕, 육체의 비물형적 수준이 있다는 역설의 수용을 의미한다/실재적-질료적-그러나-비물형적인 것을 처음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물로서의 육체와 맺는 관계를 ㅇㅔ너지와 물질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것이다/그것은 모든 움직임에 대하여 육체로부터 동시적으로 편쳐지는 변환 혹은 전개일 것이다...동일한 실재성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수준이다. 16
화살, 그것은 비분해가능, 즉 역동적 통일이다 18

우리의 관심이 (사물이 아니라) 변화에 있다면, “직어literal”와 “비유 figural”의 대립보다는 연장과 강렬도의 구별이 더 유용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

자연의 개념은 본질이 아니라 변용과 관계가 더 깊다. 20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뉴턴의 법칙의 오류를 증명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법칙들의 적용 가능성을 제한했을 뿐이다./베르그송의 혁명은 세계를 거꾸로 세운 것에 있다. 더 ㅇㅣ상 위치가 먼저 나오고 운동은 문제의 두 번째로 나오는 식이 아니다. 반대로 운동이 먼저 나오고 위치는 두번째로, 즉 운동에 파생하는 것이다. 그것(위치)은 회고적 운동, 운동의 잉여이다. 21

“발생”은 이원론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역동적 통일이다./그 개념들은 개체발생적이다/젠더, 인종, 성적 정향성 또한 (먼저) 발생하고 ㄴㅏ서 그 실재성이 역-형성된다. 이행은 구조화에 앞선다./개체발생 혹은 문화와 사회의 생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문화의 형태들이 결정되고, 그결과 사회성이 나온다. 22, 23

가능성은 잠재성이 펼쳐지고 난 후에 역-형성된다/가능성이란 어떤 사물이 목표지점을 향해 가고 있을 때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 안에 암시되어 있는 변주이다. 잠재성이란 변해가는 ㄱㅏ운데 잔잔하게 일어나는 미결정적인 변주에의 사물의 내재성이다. 암시는 일종의 암호이지만, 내재성은 과정이다. 24

육체와 대상 간, 이들은 상호간에 되기로 릴레이 할 뿐만 아니라, 과정 속에서 동맹한다. 그들에게는 사건의 냄새가 감돈다. 27

문화적 혹은 사회적 구성에 관한 관념들은 막다른 길에 처했다...자연을 생략하면, 문화의 생성, 즉 그 발생을 놓친다. 또한 운동들이 서로를 포착하여 낡고, 새롭고,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결과로 서로를 전환시키는 쇄교의 연속성, 즉 피드-포워드와 피드백도 놓친다. 세계는 끊임없는 질적 성장의 상태에 있다/세계는 자기-증식적이다. 29

운동의 ㅅㅏ유 궤도의 연장은 부정적 비판의 테크닉을 절제하며 사용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비평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항상 그랬듯이,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중요한 ㅇㅓ떠한 것도, 그것은 오히려 투여량의 문제이다. 문제는 우리가 비평하는라고 바빠지면, 그 만큼 생산증대는 적어진다는 것이다. 31
감각, 그것은 직접적인 자기-복합이다. 일종의 공명, 혹은 침투양식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자기-관계의 복합적 즉자성에 가장 걸맞은 말은 바로 “강렬함”일 ㄱㅓㅅ이다. (공간적 개념인) 거리나 연장성을 강렬함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공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거리를 질적으로 변형시켜 ㅈㅏ기-관계의 즉자성으로 바꾼다. 33

경험이 발생하는 장은 공간-시간 연속체로, 즉 공간과 시간의 분리에 선행하는 개체발생적 수준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35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운동, 경향성, 강렬도의 개념들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으면서 짜 맞추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한다. 즉 육체가 그 자신의 이행과 일치하고, 그 이행이 그 잠재력과 일치한다는 점에서...강렬함의 변주는 느껴진다는 것이다/관계로 느껴지는 현실. 36,37

개념들을 적용하지 말 것...그러나 그것은 그들 각각을 대변하고, 모두를 위해 봉사한다/미시사례, 초기 사례, 순간적인 태만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나와 그 자체 모두의 배아가 자라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배할 수도 있고, 글쓰기의 방향을 바꿀지도 모른다. 모든 사례는 이탈과 하강이라는 끔찍한 힘을 품는다./그냥 그대로 두자 그러고 나서, 다른 ㅊㅔ계들로부터 가져온, 다른 개념들과 재연결해보라. 연결된 새로운 전체 체계가 형성될 때까지 38,39,40


7장 밝기 혼동


색들은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심지어는 고립된 상태에서는 지각불가능하다. 색에 있어 특이한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변용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성이다. 284


밝ㄱㅣ혼동은 그러한 발생체들의 거주이다. 내연적 관계에서의 요소들의 조합을 상호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상호작용은 상관적이다. “상대적인” 것의 비교 개념은 독립변수의 개념과 철저하게 묶여 있다. 상대성은 사실 어떤 기준의 가능성에 의해 예측된다...반면에 “절대적인 것은 일반화에 저항하는 것이다./분석의 반대는 종합이다/일반적 배경에 반하는 요소들의 결합을 맥락이라고 부른다. 과학적 맥락에서는 그것을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맥락과 객관성은 탈-상황의 운용들이다. 286,287


색조, 그것들은 다른 어떤 것을 보기위한 추상적 도구이다. 따라서 관찰자의 경험(색맹, 뇌손상 등)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귀납적 분석에 봉사하는 추상적 실체들이다. “하나의 특정한 빛은 하나의 특정한 표면색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 표면색과 빛은 오히려 분해할 수 없는 통일성을 구성한다....어떤 특정 빛과 아울러 모든 시각장에는 어떤 특정 특이한 흰색, 어떤 특정 회색 등에 속해 있다. 따라서 동일한 색이지만 그 명료함의 정도가 다른 것으로 ㅇㅣ들을 마음대로 대체할 수 없다. 하나의 빛이 그에 상응하는 색을 갖추고 또 ㄷㅏ른 색에 상응하는 색을 가지는 하나의 빛은 다른 것에서 발생하고, 그것과 다시 뒤섞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ㅅㅓ로에 ㄷㅐ해 양자 모두가 ㅈl표이자 운반자이다. 291-292


밝기 혼동이란 색과 빛의 발생적 분해불가능성을 말한다. 292


색이 빛과 아울러 안으로 녹아들어 밝기 혼동을 형성하는 비정향성 “밝기”는 불특정 감각양태에 특유한 강렬도를 부양시키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경험적 혼동의 수준에서 다시 출현한다. 이는 그냥 “협동일관적(감각양태들을 결합한)”이 아니라 “무양태적(감각들의 융합)”이다. 293


색ㅇㅣ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단어들의 계량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마지막 객관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295


색은 형태만큼이나 근본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색, 빛, 형태, 3차원 공간, 그리고 선형적 시간은 모두가 발생한다. 그리고 함께, 상호간에, 매번 다르게, 보다 많은 차원의, 자기-변용하는 혼동으로부터 발생한다. 301


오로지 관계의 항들만이 실제적이다. 가상적 전체는 실제적인 것의 변형을 통한 혹은 이행을 통한 테두리 장식이다...그것은 실제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둘러싸고 채우는 새로움의 “아우라”이다. 새로움이란, 오로지 그 자신 외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의 개념을 재수용할 의지가 있는 이론만이 가상적인 것에 접근할 수가 있다. 305


1장 정동의 자율


언어와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이미지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의미론적 혹은 기호학적 수준에서만 작동한다면, 그 수준을 어떻게 정의하든(언어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서사학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혹은 하나의 거대상징처럼,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52


정서와 정동 – 정동이 강렬함이라면 -이 서로 다른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며,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한다는 것이다. 정서는 주관적 내용으로, 경험의 질을 사회언어학적으로 고정하는 것이다. 경험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제한된다. 정서는 자격이 부여된 강렬함이며, 틀에 박힌 것이다. 그것은 소유되고 인식된 강렬함이다. 54

우리가 자유의지를 실행하는 것은 최초의 의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한 후에 그것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동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이다.(benjamin libet) 56

의지가 형성되려면 반드시 인지 기능을 수반하여, 그것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강렬함의 개념은 원시적 경험적 충만이라고 하는 전반성적인 영역, 낭만적이며 날 것 그대로의 영역에 대한 호소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57


육체는 맥락을 감싸고, 위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의지와 인식을 감싼다/강렬함은 초기발생이고, 초기발생의 작용이며 표현이다. 강렬함은 초기발생일 뿐만 아니라, 선택의 기원이기도 ㅎㅏ다/그들의 초기발생이 단지 과거의 보존과 재활성화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향성이다/육체에 ㄷㅐ한 사유의 개정을 요구한다. 무엇인가가 너무 빨리 일어나서, 실제로, 나타날 수 없다면, 그것은 가상적이다. 육체는 실제적인 것 만큼이나 곧 가상적이다. 가상적인 것은, 초기발생과 경향성이 밀려드는 무리로서, 잠재의 왕국이다. 58, 59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정념 안에 있는, 영향 안에 있는, 능동성과 수동성의 구별에 앞서는, 세번째 상태, 배제된 중간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 순수하고 생산적인 수용성 안에 있는 하나의 ㄱㅣ원, 즉 정동으로부터 ㄴㅏ온, 정신과 육체의 서로 평행하는 생성-능동의 철학이다. 61


논의하고 있는 정동이나 강렬함은 카오스 이론과 소산구조 이론에서 흔히 말하는 결정적 지점이나 분기점, 혹은 특이점과 유사하다/정신과 육체는 물론이고, 이에 더하여 의지와 인식, 적어도 둘 이상의 언어의 질서, 예상과 서스펜스, 육체의 심층과 외피, 과거와 미래, 작용과 반작용, 행복과 슬픔, 정적과 흥분, 수동성과 능동성 등이 그렇다. 이들을 이원적 대립이나 모순으로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공명하는 수준들로 보아야 한다. 정동은 이들의 실제적인 특수성 안에서, 이들의 발생점이다. 63

새로운 것의 조건들을, 토대의 ㅅㅜ준에서, 되풀이하고, 반복하고 복잡하게 ㅎㅏ라는 권고로 바뀌는 것이다. 관념론과 경험론이 화용론pragmatic이 되고, 발명의 산파가 되는 곳에서, 칸트는 추상적 혹은 귀납적인 힘을 잃지 않으며 스피노자와 만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양자 모두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이ㅔ 추상은 잠재의 ㅇㅑㄱ화가 아니라 그것의 ㅎㅐ방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래서 구ㅣ납법도 이제 자기-조직화를 복잡화하는 과정에 불을 당기는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이 프로젝트가 내포하고 있는 윤리는 존재의 힘의 증식에 속하는, 행위와 표현의 항상-갈라지는 ㅊㅔ제에 속하는, 근거는 없고, 욕망만 있는 ㄱㅏ치이다. 64


관계의 자율화는 “상위” 기능들의 피드백을 아우르는 조건이다. ㄷㅏ시 말해, 발생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 면에는 ㄱㅏ상적인 것이 있고(관계의 ㅈㅏ율), 다른 한 쪽에는 실제적인 것이 있다.(기능적 한계) 이 책에서 정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 이 양-측면, 즉 실제적인 것 안에서의 가상적인 것 그리고 가상적인 것 안에서의 실제적인 것의 동시적 참여를 말한다. 67


위치가 정해진 지각과 인식은 정동의 포획이자 폐쇄이다. 정서는 그 포획의-그리고 무엇인가가 항상 또 다시 빠져나가는 현실의 – 가장 강렬한(가장 수축된) 표현이다./반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구조화된 사물들은 그 자신을 빠져나가는 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 그들의 자율은 정동의 ㅈㅏ율이다. 68


각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인간적 수준은 그 고유의 특정 “양자”상태를 가진다/사회적 구성주의는 양자역학의 주관론적 해석과 유사한 문화적 유아론으로 빠지기 쉽다/자연과 문화라는 개념은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인간과의 능동적 연관 속에서 그리고 그 연관을 통해 비인간적인 것의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을 나타내는 쪽으로, 자연과 문화라는 개념은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물질은 물질로, 두뇌는 두뇌로, 해파리는 해파리로, 그리고 문화는 자연으로 되게 하라.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과의 무한한 연결 속에서. 75


신뢰란 포획가능한 삶의 잠재력인 정동을 감정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80


경제학 자체보다도 더 빠르고 확실한 경제효과를 생산하는 정동의 능력이 의미하는 바는 정동이 후기 자본주의 체계의 실제적 조건이며, 내적인 변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장에 버금가는 하부구조이다. 실제로 정동은 하부구조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든 작동한다. 85


2장 출혈


영화배우의 성공은 타인들이 자신을 보는 대로 자신을 보는 능력에 달려있다. 89


주체의 자기-일탈에서 비롯된 간극은 새로운 주체나 객체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변화 속에서의 그들의 이접disjunction을 포위하는encompassing과정에 의해 채워진다/운동-비전의 연속성은 포함된 이접 an incleded disjuncion이다. 95


정념은 추상적 공간보다는 공간적 추상의 시간-물the time-stuff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유사 물형성 단위와 정념 단위의 결합을 정동이라고, 즉 영향을 주는 능력과 영향을 받는 감수성이라고 부르자. 감정이나 느낌은 의식적으로 인지된 정동이며, 자극-반응 경로로, 감싸기와 외재화라고 하는 작용-반작용 회로로 재주입되어 식별된 강렬도이다. 감정은 정동에 의한 경험적 공간의 오염으로, 그것은 이미지 없는 육체에 속한다./자기수용감각성과 내장감각성을 합쳐서 중간지각 mesoperception이라고 부르자. 중간지각은 공감각적 감수성이다. 즉 그것은 오감으로부터 입력된 것들이, 하부감각적 자극을 가로질러, 살과 한 몸이 되어, 긴장과 떨림이 만나는 중간지대이다. 114

 

 


3장 소속의 정치경제 그리고 관계의 논리

 

 


결정. 모든 사물이 결정이라고 하는 설립 용어들-의 또는 에 ㅇㅢ해 가령 고의로, 기본적으로-로 차려진다면, 변화는 다만 그 결정의 부정으로, 즉 단순히 비결정적인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127


관계항이 미리 존재한다는 가정. 이러한 움직임들은 현상학, 구조주의, 그리고 몇몇 탈구조주의 접근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흔하게 존재한다. 그들은 이미 – 확립된 것의 틀판으로 배경영사하여 그 형성을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논리적 시간-이동, 지독한 해석학적 순환을 세운다. 그리고 다시 그 이동은 변화로 간주된다/변화 그 자체와의 관계, 토대가 없고 매개되지 않은 생성의 사이-내와의 관계로 전환될 수가 있다. “육체”와 “문화” 또는 “개인”과 “사회” 같은 항들에서만큼 이러한 전환이 필요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의 외부에서 개인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개인 외부의 사회는? 개인과 사회는 경험적으로 분리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엄밀히 동체이다. 129(축구설명)


공이 경기의 주체이다. ㄷㅓ 정확히 말해, 경기의 주체는 공의 치환이며, 그 잠재적 치환 효과가 이ㄹ어나는 장으ㅣ ㄱㅖ속되는 변형이다. 하나의 사물로서, 그 공은 주체의 객체-표지이다/선수는 공의 대상이다/그 공이 부분 주체라면, 각 선수들은 그것의 부분-객체이다/선수의 몸은 표현의 마디이다. 그것은 경기의 주체가 ㅇㅏ니라 게임의 전반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ㅇㅓ떤 사건을 촉진시키기 우ㅣ한 물질적 경로이다./선수는 땅 위에서 경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땅을 지나고 공을 지나 잠재의 장으로 간다. – 그것은 비실체적이고, 실질적이지만 추상적이다. 그는 잠재의 장에서 직접 뛴다/여러 수준들의 혼종성은, 그 효과를 향해, 그 감각 아ㄴ에서, ㅇㅠㄱ체로 수축한다. 육체에서 그들은 하나의 행위로 ㅈㅐ출현하는 것이다/육체는 하나의 대상, 특히 하나의 실체적 요소로서가 아니라, 부분 대상, 하나의 전환 경로, 하나의 변환자로서 나타난다. 134-137


잠ㅈㅐ의 ㅅㅏ건-차원이 사이-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잡종이나 혼합은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이면서도 이미-추상된 요소들의 집합과 분리될 수 없고 또 그것으로 되돌릴 수도 없다./내재성의 장은 혼합된 요소들이 아니다. 그들의 생성이다. 생성 안에는 소속이 있다./내재성의 장은 초경험적이다. 그 ㅇㅓ떤 특정한 순간의 폐쇄로는 담아낼 수 없다. 그것은 토대를 상정하지 않고 초경험적이며 초역사적이다. 내재성의 장은 그 ㅈㅏ신이 영향을 미치는 것의 우연적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논리적 순환이다. 그러나 극단적 순환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어떤 열림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존재론적 순환이기 때문이다; 즉 실체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간의 국면 전이이다./생성은 복습 ㄱㅏ능해지고 쓰기 가능해진다: 즉 생성은 역사가 된다. 138, 139


스타 선수의 스타일은 항상 심판에 대한 도발이다./스타일의 “개성”은 집단적 개별화이다/진화론적 잠재를 경로화하는 ㅎㅏ나의 육체는 집단적 생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마디이다/ 140


게이ㅁ에서 관중의 관점이 포섭되는 방식은 규제 적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동적 수단에 의해서이다. 스타디움 관중의 흥분이나 실망은 잠재 장의 강렬도를 조정하는 데 직접적으로 일조하는 혼합에 청각적 요소를 덧붙인다. 144


축적과 규율화를 통해 주로 작동하는 권력 구성체 그리고 적용과 규제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 구성체는 서로 간에 끊임없이 소통하며 서로 여함수 관계에 있다./돌봄은 입법될 수 없다 귀속의 긍정성에 ㄷㅐ한 유효한 표현들은 국가를 빠져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다른 모든 규제 장치와 마찬가지로, 항상 자신이 규제하는 대상의 뒤를 따른다/사건-공간이 규율적인 것과 규제적인 것으로 갈라지면서, 사건-차원은 다르지만 붙어있는 분열을 겪는다. ㅅㅏ건-차원은 두개의 ㅎㅏ위차원으로 갈라진다./약호화,성문화, ㅅㅏ건이행성/가정은 격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보호막이다. 끊임없이 가정 내로 진입하고 가정을 가로지르는 외면성의 필터이다. 148, 149,151


자본주의. 지불과 투자의 수단인 돈은 모든 사건-공간을 가로지르고 간극을 이루는 모든 육체를 예외 없이 실어 나르는 유일한 사건 전송기이기 ㄸㅐ문이다./상관성의 운동, ㅎㅏㅁ께-ㅔ되기, 소속, ㅈㅏ본주의는 소속의 전 지구적 찬탈이다. 즉 권력은 이제 새로운 행성의 양태로서 대규모로 잠재화되고 있다고 인식해야 한다./이것은 축복도 ㅇㅏ니고 한탄도 ㅇㅏ니다. ㄷㅏ시 말해 개인과 집단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경험해야할 요청인 것이다. 156, 157



4장 이성의 진화론적 연금술 – 스텔락


그의 매체는 몸, 즉 감각 가능한 ㄱㅐ념으로서의 몸이다. 160


지각은 지각주체와 지각대상 사이에서 생긴다. 161


지각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행위이다. 지각은 동시에 두 가지 질서에 속한다: 즉 대체의 질서(다른 연접에 의해 교체되는 연접: 즉 행위) 와 포개짐의 질서(실제적 연접 속에 다음에 교체되어 ㄴㅏ올 연접의 잠복적 현존: 즉 기대)이다. 이 두 질서는 실재적이고, 어떤 물질적 필요(음식)를 표현한다. 대체와 포개짐의 질서는 실제적인 것을 초과하는 실재로서 규정된 사유의 질서이다. 162


지각의 축과 사유의 축은 동일한 연속체의 양쪽 한계들이다. 163


연결가능성은 행위라든가 사유-해내기에 의한 기대의 질서가 아니며, 따라서 가능성의 양태에 있지 않다. 그것은 힘의 질서의 문제이다. 각각의 연결은 그 꽃-사물이 뿜어내거나 전송하는 어떤 힘에의 공유된 접속이다. 마치 빛의 파동과도 같다. 이때 잠복해 있는 것은 가능태가 ㅇㅏ니라 활력적인 잠재이다./감각이란 실제로 진행 중인 하나의 연결의 특이성 안에서 잠재적 연결들의 다중성의 등록이다. 그것은 더에서 덜로 이행하는 모든 ㅈㅣ각의 직접적 경험이다. 164


사물, 지각, 그리고 ㅅㅏ유는 그 자신과 서로를 ㅍㅏ고들고 외면하는 상호 운동 속에 있다. 그들은 상호강화와 공동-변환이라고 ㅎㅏ는 동일한 과정의 여러 계기들 혹은 차원들이다. 감각은 공동-변환점이다....가능한 것으로의 실제적인 연장, 그러고 나서 감각을 통해 잠재, 지각, 그리고 사유가 상호 강렬해지는 루프작용의 전 과정: 이것이 바로 지성이다. 가능성의 일반적 양태 속에서 지성의 체계화로 이루어진 전과정의 일부분이 ㅂㅏ로 도구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ㅇㅣ다. 도구적 ㅇㅣ성은 결코 지성의 전부가 아니다. 유일한 유일-사유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유-변종이다. 지성은 필요의 산물이다. 도구적 이성은 필요의 효용으로의 연장이다.......지성과 도구적 이성 간에 뚜렷이 구분되는 구분선을 그을 수 없다 .모든 사유-지각은 양자모두, 다야ㅇ한 정도로, 호ㄴ합되ㅇ 어있으며, 공동-변환한다. 167, 168


몸ㅇㅖ술가 – 객체(대상)는 지각된 것의 연장이며, ㅈㅣ각된 것은 감각 가능한 개녀ㅁ이며, 감각 가능한 개념이란, 지각하는 것고ㅏ 지각된 것 따로따로가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그들이 느끼는 연접 속에서 구현된 물질화된 관념이기 ㄸㅐ문이다./사물은 바로 ㄱㅡ것의 지각되는-ㅔ 존재들이다. 몸은 ㅂㅏ로 그 ㅈㅏ신의 지각작용들이다./몸과 ㅅㅏ물은 서로의 연장체들이다. 그드ㄹ은 상호함축이다: 즉 두 ㅁㅓ리달린 지각의 공동-사유. 그 두-머리달린 지각은 ㅅㅔ계이다. 168, 169


연장체들. 사물, 객체는 몸의 보철물들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170


사유-지각은 비대칭적 보철에 의한 공생이다/필요와 유용성은 자기-동일 재생산으로 간다. 반면에, 비효율성은 발명에 이바지 한다. 171


일반성(사유 가능성)과 특이성(감각된 잠재)은 어떠한 모든 실제적 연접을 초과한다. 173


스텔락의 부양 퍼포먼스는 지성을 감각의 영도로 바꾼다. 거기서, 사유는 행동과 결합하고, 몸은 물질과 결합하고, 활성은 비활성과 결합한다. 이들은 결합하자마자 재-전개되고, 여러 갈래로 재-연장하여, 서로 외적이고도 이따금씩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진입한다.(그 가능성의 조합과 일치하면서도 교정하는 관계). 부양은 차이 발생의 역-중력 낙하점이다. 물질로부터의 차이 발생, 이것이 진환의 정의이다. 197


연장된 상황 속에서 목적을 둔 행동-중-분석과 뒤섞이는 것으로 실행적 이성이 정의된다는 것이다. 실행적 이성은 실제로 불가능한 것을 생산하기 우ㅣ한 네겐트로피 유도의 실험적 세공이다. 그것은 분석적이기보다는 화용적 pragmatic이다./실행적 ㅇㅣ성은 반성적 사유보다 직관에 가깝다. 196


‘나‘같은 단어들은 사회적 실체들과 상황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위한 단지 편리한 지름길일 뿐이다...진화의 조건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조건들은 근본적으로 집단적이다. 209
자기-조직화 네트워크에서, 인간은 더 이상 지배자가 아니며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포섭된다. 통합 네트워크의 범위 내에서는 중심이나 주변이 없고, 오로지 마디들만 있다. 인간은 프랙탈화된다. 인간은 마디들을 가로질러 흩어지고, 릴레이의 끝없는 복잡성 속에서 ㅁㅏ디들에 의해 횡단된다. 인간적인 것은 “모두-여기에”도 아니고 “모두-저기에”도 아니며, 비존재도 ㅇㅏ니고 완전히 그 자신도 ㅇㅏ니다. 그것은 부분은-여기에 ㄱㅡ리고 부분은-저기에, 징후에 따라 변환되고 변형된다. 226


모든 마디가 복잡하고, 변환적이며, 중첩적인 흐름 속에서 절대적으로 특이한 하나의 접합을 점유한다. 그래서 그것은 오히려 변화의 누전이 아니라 변화의 실제적 구현이다: 즉 자기-조직적 썰물과 중개-이동의 흐름은 네트워크를 변화의 연속체로 만든다. 227

 

 


5장 아날로그의 우월성에 관하여

 

 


가상성-안으로 접히고 밖으로 접히고, 다시 증가하고 감소하면서, 일정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 자신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지시적 포위로 가며, 지나간 것들은 순간으로, 연장된 강렬도와 강렬해지는 연장으로 휘어지면서 미래로 투사된다. 230


상상은 또한 직관이라고도 불린다: 즉 느낌을 사유하는 것이다. 느끼는 사유-운동 안에서, 과정으로서, 도착 즉시, 아직은 생각하지-않고 행해지지 않은, 탈도구적이며 전실행적인 상태, 부유 상태, 루프 상태, 상상은 느껴진 사유, 오로지-느껴진, 사유만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진 ㅅㅏ유, 즉 무감각한 소요이다. 232


공명과 간섭의 함께-등장은 특이하게, 강제적으로 느껴지는데, 그것이 너무 강렬해서 감각은 한꺼번에 소진될 수가 없다. 잠재는 원동력처럼, 즉 사건들의 연속적인 전개를 추동하는 추진력처럼 난입한다. /ㄱㅏ상적인 것에 가장 주의를 기울일 때, 특질화는 우연적 이성(자신의 감각적 발생에 참여하기 위해 되돌아가는 ㅅㅏ유, 또는 상상력, 혹은 베르그송이 말한 직관)의 위상-존재론적 실행으로 변형된다. 235


디지털 매체는 가능성이지, 가상성이 아니다. 심지어 잠재도 아니다. 그것은 ㄱㅐ연성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잠재에 근접하지 않는다. 디지털 코드화 그 자체는 극단적 상황에서 개연적이다. 디지털 코드화 그 자체는 극단에 이르기까지 가능적이다. 237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오로지 ㅇㅏ날로그를 통해서만 잠재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으로 연결된다. 238


읽기의 아날로그 과정은 힘을 들이거나 동요하는 등(이마를 찡그리거나 입술을 모으거나 심장이 뛰는 것만 보더라도)의 물리적 감각이 수반되지 않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240


그 어떤 창의적 발명이 나온다해도, 그것은 코드작용 그 자체가 아니라 아날로그의 우회의 결과이다. 디지털은 아마도 처리processing일 것이다.- 그러나 아날로그는 과정process이다. 얽혀 있는 가상성 뿐만 아니라, 떠오를지 모를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도 잠재화작용 릴레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코드 속에 격납되지 않은 것 안에 있다. 245


디지털에 대한 “아날로그의 우월성”은 이 둘을 함께 사유해야 한다는 이 마지막 요청에 모순되지 않는다. 이것이 지시하는 ㅂㅏ 그들의 협력의 길-변형적 통합, 번역, 그리고 릴레이 – 그 ㅈㅏ체가 아날로그적 실행이라는 점이다. 247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비대칭적으로 함께 사유되어야 한다. 아날로그는 언제나 앞으로 ㄴㅏ아가는 주름이기 때문이다. 248


6장 시각적 “전체장”의 카오스


중요해지기 위해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느슨한 시기 동안에 그 자신을 지속할 수 있다면, 우리의 경험을 이루는 인자들은 그 변이가능성에 비례하여 ‘명료하고 뚜렷‘하다. 육체의 상대적 ㄴㅡ림과 습관의 반복은 “중요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경험의 인수분해운동들이 자신들을 연장하는 메커니즘이다.(무엇이 지속되고 무엇을 지속하는가? 바로 더 많은 인수분해운동들이다.) 262


체험의 경험적 작업들과 그들의 발생적 조건 간의 존재론적 ㅊㅏ이가 바로 시각의 “전체장”이 경험적으로 일어나는 이유이다. 비현상적으로, 그것은 과학적으로 자신에게 환류하는 쪽으로(스스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으로) 전도됨으로써 경험을 “안착시키기”보다는, 경험을 줄어들게하거나, 살아 떠 있게 한다. 시각의 발생의 장은 결코 어떤 대상이나 육체, 심지어 육체-대상의 상호작용도 아니다. 그것은 대상화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동반하지만, 진입하지 않은 카오스이며, 새롭게 갱신된다. 265


접촉 역시 ㅇㅓ떤 극한-장을 가진다. ...불확정성. 불확정적 전체성. 표면-같은 불확정적 가상적 전체성. 촉각-유도자 위상 공간. 시각이 자기 자신을 실증적으로 “확정하는” 것과 동일한 자기-유동적 방식에 의해 촉각성을 “확정하는” 요소들, 즉 압력 같기도 하고 간지럼 같기도 하고 찌름 같기도 한 요소들의 카오스적 발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상할 수가 있다. 접촉또한 비행의 한 형식이다./지방은 한 ㄱㅏ지 맛이 아니라, 모든 맛이 다 있다.설탕용해제는 미뢰들 가운데 5%에서 10%만 자극하지만, 지방은 95%를 자극한다. ㄱㅣ본적으로 모든 존재가 지방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맛을 똑같이 설명하지 않느ㄴ다....접촉의 전체장은 가상적이기 때문에 ㅍㅏ악하기 쉽지 않으며, 접근을 시도하려 하면 순간적으로 움츠러든다. 268


다른 감각 자극은 극한 장을 사라지게 한다. 우선 그 ㅇㅣ유는 그것이 더 이상 시각적 “순수”장이 아니라 혼합된 혹은 협동일관적 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의 이접적 극한은 환각적, 협동일관적(연접적) 극한에 불안정하게 인접해 있다. 그것은 순수하게 혼자 생겨나며, 대상의 항구성을 유지하기 위해 잠재를 나타내는 자율적 외관들에 의해 밀집되어 있다. 269


시력을 회복한 선천적 맹인의 최초의 시감각은 오로지 ㅈㅏ연적으로만 나타나는 시각적 “순수” 장으로 추측되는 것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물건 같은 외관들은 즉시 ㄴㅏ타나지 않는다. ㅅㅏ용되지 않은 망막으로의 협동일관적 연결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273


어떤 점에서 시각장의 분리는 다른 감각 장들과의 상호연결과 공존해야만 한다. 아니 상호유인이 ㄷㅓ 적절하다. 실제로, 감각들은 상호기능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다른 것들과의 상호기능작용을 지배하는 어떤 가상성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감각이 따로 따로 가상적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즉 미분과 적분이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가 없으며 다른 하나도 얻을 수 없다. 275


“힘”이란 효과들의 반복가능성 혹은 되풀이가능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의 “힘”은 일련의 보이지 않는, 건드릴 수 없는, 자기-재생적인 조건들이며, 이 조건들에 따라 일정한 효과들이 되풀이해서 나타난다고 예상할 수 있다./지각은 일종의 힘-효과이다. 모든 시각, 모든 촉각, 모든 협동일관적 체험은 하부경험적인 것에서 경험적인 것이 덧붙여진 실재로, 그리고 다시 하부경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강요된 (힘이 가해진) 이행의 사건이다. 모든 시각, 모든 촉각, 모든 협동일관적 체험은, 거부할 수 없는 복잡한 극한-긴장으로부터, 객관성에서의 환각적 근거를 통해, 실존적 비행으로, 다시 발생의 조건들로 이행한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이행, 즉 “힘”은 동사이다. 그 작용(힘의 작용)은 비순종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거부할 수 없는 반복의 반대편에서, 그 힘은 창조를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 명령적 표현은 ㅅㅐ로운 것이다. 279-281


고통은 새로 발생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282


8장 낯선 지평 - 빌딩, 바이오그램, 그리고 몸 위상학


대상물들의 형태와 배열 속에 씌어 있는 시각적 단서들을 “읽어내는” 것에 기반한 것이 전통적 인식모델이다. 그러나 두뇌의 정향 능력은 보다 텅 빈 공간을 증가시켰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결국 인간의 정향은 공간 안에 있는 시각적 특징들이 아니라 “공간의 형상”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312 비둘기가 집을 찾아가는 항해기술의 중요한 요소로서 추측항법이라고 부른다. 이는 운동에 대하여 위치 관계를 전도시킨다. 운동은 더 이상 위치에 맞추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위치가 운동으로부터, 운동이 그 자신과 맺는 관계로부터 발생한다.....육표들은 지도가 아니라 진로를 유발한다. 그것들은 벡터를 유발한다. 육표들은 ㅁㅏ치 정향의 공간을 벡터화하는 자극들과도 같다. 313 ㅈㅏ기수용적 추측항법이라는 어마어마한 바다가 여전히 더 포괄적이다. 우리는 항상 그곳에서 헤엄을 친다....길을 잃었다고 우리가 깨달았을 ㄸㅐ 우리가 느끼는 ㄱㅕㅇ이로운 물리적 감각은 시각적인 것과 자기수용적인 것 간의 분리를 육체적으로 등록한다. 감각차원들 간의 방해와 일치의 역동으로부터 장소가 태어난다. 따라서 우리의 정향 능력은 두가지 다른 차원의 경험의 원천을 결합한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뚜렷하게 바라보는 그 장소들은 두 가지 감각체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협동의 산물이다. 상호-지시하는 공감각 체계는 체계적 ㅇㅣ원성, 즉 오ㅣ지시와 자기-ㅔ지시, 위치와 움직임, 유클리드적인 것과 자기-변이의 모나드 같은 이원성을 보충한다...길을 이ㄹㅎ었을 때 우리가 자신을 찾으러 간ㅡㄴ 곳은 감가ㄱ들이 서로를 감싸고 서로로부터 풀려나온ㅡㄴ 바로 그곳이다. 우리는 항상 이 경험의 주름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315, 316 비유클리드적이고 질적이고 역동적인 것은, 바로 이 동시상영으로 인해, 유클리드적이고 양적이고 정적인 것보다 더 포괄적이다. ...경험의 공간은 정말로, 무ㄴ자 그대로, 무ㄹ리적으로, 변형의 위상학적 하이퍼공간이다. 318 (나머지 용어노트부터 중요)

 

 


9장 지나치게-파란 :확장된 경험주의를 위한 색-패치

 

 


관건은 이제 더 이상 사실성과 그 유익성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와 그 속격성이다. 문제는 이렇다: 생산적으로 경험된 관계의 이러한 연계가 어떤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이것은 철학의 문제이다. 이것은 철학자의 실증적 문제이다. 또한 철학자의 실용적pragmatic문제이다. 이 순간에서 철학적 방법은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단절없이 이어진다. 마치 과학적 방법이 주기적으로 테크닉과 그 자본화로 릴레이 되듯이 말이다. 363


기억된 색은 검사가 가능한 그 단어의 의미를 초과한다....기억의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된 “파란색” 사이에는, 실험자와 피실험자 모두에게 공통적인 재산으로서의 그 색-단어가 지정하지 않는, 무엇인가 여분의 것이 스며들었다./언어는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의 특이성을 동시에 표준화(축소)하고 전달(표현)하기 위해 작동한다/ 이러한 자신만만함은 흄이 “인상”의 “활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경험의 자기-활동성을 입증한다. 364, 365


그 “과잉”은, 느낌의 양이 아니라 그 느낌 스스로 문맥으로 앞서갔던 놀라운 방식이다. 즉, 그것은 소유가능한 느낌의 문맥상의 선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잉은 아무리 크더라도 단순히 느낌의 양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 느낌의 모든 양을 넘어서는 질적 잉여이다. 친숙함과 호감의 선행적 축적 없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프랭크 시나트라) 375


지나치게-파란색은 개인의 삶의 내용으로서 집단적으로 문맥화된다. 담론으로 규정된 하나의 내용으로서, 그것은 회상적, 집단적, 문맥적 인공물이다. 하나의 담론 내용으로서, 그것은 (무엇인가가) 되어간다. 과잉으로서 그것은 계속된다. 그것은 다음에 나올 문맥상의 장비로 점프를 하면서, 이 봉쇄를 뚫고 흐른다. 그 선행은 신속히 진행된다. 과잉은 계속되는 활동의 특질이다./정서는 문맥에 따른다. 정동은 상황에 따른다. 즉 우여곡절을 겪으며 문맥으로 진입한다. 연쇄적으로 그렇다. 즉 정동은 상황-변이적이다. 선행적인 것만큼이나 진행적인 정동은 이행 속에 거주한다. 그것은 진행 중에만 투입되는 연속성의 전-문맥적 그리고 탈-문맥적, 전-개인적 그리고 탈-개인적 초과이다......세계를 묶어버리는 보이지 않는 ㅇㅏ교이다....사건-연결의 ㅈㅏ율성이다....주체와 객체는 문맥 안에서 항상 함께 등장한다. 376 진정한 이원론은 진행중인 지ㄹ적 활동성(생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존재론적 긴장을 표현한다. 주체-대상 “이분”을 비판하고 해체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접근했던 이슈들을 연속성과 불연속성 양태들에 ㄷㅐ한 화용론적 연구로 방향 전환시킴으로써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 377


질서 쪽으로 점진적으로 추락하는 문맥의 역사 외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맥 ㅇㅚ에 또 무엇이 있다? 상황이 있다. 질적 과잉이라는 의외가 있다. 질적으로 표현된 자기-활동성, 아직은 “당신의 것” 혹은 “나의 것”이 아닌 정동의 질서를 ㄷㅐ표하는, 질적으로 표현된 자기-활기가 있다. 사건이 있다. 변칙이 있다. 버림받은 기대들이 있다. 378 자본주의 과잉, 잉여가치가 아니라 존재의 잉여-가치. 379-381


관ㄱㅖ성은 함께-속하기의 전반적 초과이다. 관계성은 개별 요소들로 간주되는 활동 중의 실제적 성분들의 객관적 속성들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심지어 그 속성들에 따라 논리적으로 ㅇㅖ고될 수도 있는 상호작용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관계성은 상호작용 그 자체라든가 그 개별적인 성분들이 ㅇㅏ니라 상호작용의 열림에 속한다. 389


관계성은 이미 세계 내에 있으며, 의식적으로 등록되기 이전에 이미 육체의 활동 속에 물질적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제임스는 주장한다....우리의 인식은 전개되고 있는 관계에 이미 진행 중인 참여 속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도망가기를 멈춘 후에만 나오며, 우리를 뛰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인식한다고 뒤돌아 볼 수 있게 된 후에만 나온다. 참여는 재인지를 앞선다....존재는 인지에 앞선다./주체와 대상은 미리 앞서 완전히 결정될 수 없는 방식으로 상황의 관계 속에 묻혀 있다./모호한 것은 새로움이며, 다시 나오게 될 “다음”이다. 400, 401

이상 가상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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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29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통 자유의지를 뇌작용의 초기 조건으로 파악해서 ‘없음‘을 강조하는데, 인용하신 부분
˝우리가 자유의지를 실행하는 것은 최초의 의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한 후에 그것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동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이다.(benjamin libet) 56˝
를 보면 후속 조건으로 보는군요. 제겐 나름 타당해보입니다.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짬짬이 와서 읽고 있어요^^ 그럼 다음에 또/
건강 잘 챙기시길...

여울 2017-05-29 23:49   좋아요 1 | URL
네. 포인트를 잘 읽어주셨네요. 이 이야기가 여러장에 걸쳐 다르게 이야기되고 있어요. 동의하느냐 여부와 상관없이요^^ 덥네요. 더윈 드시지 마시구요. ㅎㅎ
 

제목을 먼저 써본다. 대선과 사회운동, 소멸과 탄생, 선거와 사회운동.....키워드들은 하나같이 어색하다.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 결국 제목을 쓰지 못한다. 가까운 지인의 상과 상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드문드문 정황을 듣다가 어찌하지도 못하고 속얘기들을 전하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 사회운동세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있다면 가장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다르니 틀리다‘고 하는 부류들이 극우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그 극은 반대편과 그리 잘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르니 다르다‘가 아니라 ‘다르니 틀리다‘라는 것이 자칭진보세력에게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치면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헌데 그 보다 더 아무 생각없는 것은 무엇일까? '다르니 틀리다'라고 해서 밥 한끼, 식사 한번 나눈다라는 것은 황송한 일인데다가, 도통 우리모임의 자장만 안중에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삶의 동선에서 일년에 한번도 겹치지 않는, 마음의 동선에서 삼년에 한번도 나누어지지 않는 비진지함들을 곁들인다면 더욱 더 그렇지 아니한가.

 이것도 그렇다고 치자. 선거국면때나 지금 대선에서처럼 서로 인지도 못하면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제도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할 듯이 선거라고 해서 올인하는 모습들이 더 가관은 아닌가? 제도 정치가 모든 것을 소화해낼 것처럼 흠뻑 빠져서,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서로 인력이나 있는 것인지? 인지하려고 조차 하지 않은 모습은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것일까? 늘 그래왔으니 그래야 된다고, 다 정책이나 전략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정책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용이 있을까? 또 '다르니 틀리다'로 또 다시 수렴되면서 앙금을 곁들여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도정치의 신화는 이리 굳건한 것인가? 서로 서로 다른 캠프로 활동의 축이 이어지면서 수렴되는 모습들을 보면 제도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또 다시 도드라질 것이다. 이렇게 과도한 책임감과 과다한 알림욕구가 해소되지 않을 경우 어떤 책임들을 지려고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기도 하다.

중력이나 서로인력, 서로자장이 이렇게 제도정치, 선거안에만 있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한 것일까? 스스로 한 말들에 발목이 잡혀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제도 밖'을 의식하지도, 무게 중심을 옮기려고도 하지 않는 일이 가장 뼈아픈 것은 아닐까? 또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문제가 생기면 서로 인력도 중력도 잃은 채로 여기저기 난파하거나 난파당한 뒤, 여기저기 스스로 피는 수많은 주체와 운동의 꽃들로 힘을 받고 또 몰려다니다가 또 지지부진해지고, 닻을 어떻게 어디에 내려야 하는지 조차 느끼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까?

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래서 되지 못하게 하는 감정들을 꿰어서 선동해대기가 제일 쉽다. 스스로 하고, 이것저것 가려내어 되게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하지만 그 방향은 멈출 수가 없다. 멈추는 순간, 절반의 포기가 아니라 전부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뼈 아픈 것은 사회운동세력의 자장조차 만들려는 흔적이 사라진 것이 가장 아쉽다. 아니다 스스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조차 지난 겨울을 겪어내고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 더 뼈아프다. 제도정치의 환상에 올인하는 모습은 지나친 낙관만 만들어내어 만일과 만약을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좌냐 우냐 어이없는 선별의 강박은 상하의 파고를 파고들면서 생각하려는 노력도, 운동을 다른 결로 이끌어가려는 배아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다. 아마 십중팔구 좌우의 방향키로는 가긴 가겠지만, 불어오고 몰아쳐오는 상하의 쓰나미를 끈질기게 예상조차 하지 않으려는 관성이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대체 어디에 스스로 있는 것인지 가늠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정신차려야 할 것은 퇴행하는 지지자분들만이 아닐 것이다. 그 손가락은 고스란히 안으로 향해야 할지도 모른다.  좌우의 좌표가 아니라 상하의 좌표와 그 물결의 결을 체득하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일게다. 그렇게 되려면 어떡해야하는 것인가?

볕뉘.

0. ‘왔다‘과 ‘온다‘라는 깃발은 든 이들. ‘올 것이다‘라는 깃발을 든 이들. 나는 이들이 사회운동세력이 아닐 것이라고 본다. 미래를 가져왔고 온다고 말하는 이들을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그보다 지금 바스라지는 것, 바스라지고 있는 것, 바스라질 것에 대한 지독한 관찰력을 가진이들을 믿을 것이다. 사회활동이 이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의 저울이 한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 나는 이 과도함에 놀란다. 그런데 스스로 몸담고 있고 담았다는 분들에게서 이 균형감각을 보기가 무척 어렵다. 제도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히 제 위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 어정쩡함들을 더 보아주기가 안스럽다.

2. 촛불은 수많은 주체를 발굴해주었다. 상식과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좌우의 논리보다 형평과 안전에 대한 상하의 감수성으로 우리를 구해내었고, 앞길을 열어주었다. 좌우의 단선으로 이들을 꽃피울 수 없다. 좌우상하의 그물안에서만 서로 꽃피울 수 있다.

3. 모임은 이기적일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균열과 경계의 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아니 물러나 주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선거-제도만능의 우리 고정관념으로는 상하의 파고를 넘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모임들 간의 중력이나 인력이 있다면, 그 장을 인지하려는 마음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복기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4. 아끼는 선배의 마지막이 마련한 자리, 반가운 얼굴들이 스치듯이 지나갈 정도로 취했다. 청년들과 모임들 사이사이 ‘관계-내-존재‘의 말들을 듣다보니 말도 아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몇 분에게 조금 깊은 소회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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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를 위한 선물-“인간답게 지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확고하고, 분명하며, 활기찬 것을 의미하죠....어떤 일 앞에서도 활기차게 지내는 것이요...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은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지는 것이지요.”(친구가 감옥에 있는 자신을 애도하는 편지에 대한 답장) 15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한다. 정의라는 관념에 대한 열광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가 지니는 유익함이나 총체성, 그리고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은 모두 이 본질적인 특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절대 다수라고 하더라도-전혀 자유가 ㅇㅏ니다. 볼세비키의 위험성을 ㅇㅖ견한 로자의 단상) 16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은 역사의 일부이고, 사회적 진보의 일부이며, 역사 한가운데서, 진보 한가운데서, 싸움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반드시 싸워야만 함을 배운다” 19 “나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23

당돌함-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고아들끼리의 공모를 제안한다. 우리는 서로 윙크를 ㄴㅏ누고, 위계를 거부한다. 모든 위계를.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세계를 무시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당돌하다. 27
넘어지는 기술에 관한 몇 가지 노트 –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한다. 무언가에 쫓긴 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뒤쫓는다 30 매번 넘어질 때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인 어떤 사람.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복수성이다/심지어 반격을 할 때도 그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37

스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옷을 벗는다. 그렇게 햇빛과 물, 그리고 보상을 받는 몸이라는 세 계의 순수가 서로 접촉한다. 40 나는 늘 스벤이 ㅈㅏ신의 작품 소재를 택하는 게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그의 소재들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해안선, 체리밭, 도시를 ㄱㅏ로지는 강, 펼쳐진 산맥, 옹이가 진 포도나무 가지, 친구의 얼굴. 44

만남의 장소 – 나의 두 손으로/과거와 미래로부터/두 개의 돌멩이를 집어 들어/그것들을 쥐고 달리지 59 이제 세상을 굴러가게 ㅎㅏ는 것은 눈앞에 닥친 다음 차례의 습득뿐이다. 다음 거래, 다음 융자, 소비자들의 경우에는 다음 구매..역사에 ㄷㅐ한 어떤 감각,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 감각은 완전히 말살되었거나 있더라도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적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61 카시드는 역사를 마치 만남의 장소라도 되는 것처럼 드나든다. 그건 어떤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ㅇㅏ니라, 함께할 이를 찾기 위해서다. 62

라 라라라 라라라 라 – 장ㅇㅓ의 치어들은 어떻게 바다 밑을 가로질러 포 강 어귀에 이르는 길을 찾아올 수 있는 걸까. 치어들이 뭔가를 기억하고 있는 거라면, 그건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던 일이다. 그들은 무엇을 따라 움직이는 걸까...즉흥 음악은 수백 개의 마음에 똑 같은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걸까. 그 음악은 자신의 깊은 곳 어디에 귀를 ㄱㅣ울이는걸까. 66 파브리치오 데 안드레 fabrizio de andre 의 어부 pescatore 도피중인 남자의 허기를 달래주며 피신시킨다...말 탄 경관은 다그쳐 묻지만 어부는 지는 ㅎㅐ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그 노래는 두 소절이 끝날 때마다 후렴구가 ㄴㅏ온다 라 라라라 라라라 라....70

노래에 관한 몇 개의 노트 – 노래에서 가사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은 너무 진부합니다. 가사는 노래가 자라는 씨앗 같은 거니까요 72 노래는 과거의 경험을 전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리고 있는 동안 노래는 현재를 채운다. 이야기도 같은 작용을 한다. 하지만 노래에는 노래만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노래는 현재를 채우는 동시에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청자의 귀에 닿기를 희망한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 73 노래는 어떤 부재 앞에서 불려진다. 부재가 노래에 영감을 주고, 그 부재에 대해 노래는 이야기한다. 동시에 노래를 공유하면서 그 부재도 공유되고, 덕분에 덜 아프고, 덜 외롭고, 덜 고요한 것이 된다. 76 엘 두엔데는 ㅇㅓ떤 질, 공연을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울림이다...모든 예술은 두엔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이나 무용, 혹은 시 낭송회처럼 예술이 자연스럽고 폭넓게 전달되는 곳에서는, 그것을 해석하는 ‘살아있는 몸‘이 필요합니다. 77 매번 불리어질 때마다 노래는 그것이 빌려 온 몸의 내부에 ㅈㅏ리잡는다 북의 울림통 안에 바이올린의 울림통 안에, 가수나 듣는 이의 ㄱㅏ슴 혹은 복부에. 노래의 본질은 목소리나 뇌가 아니라 내장기관에 있다. 82 희망이 정치적 어휘들을 낳는다. 흐ㅣ망이 없어지면 단어들도 없어진다. 87 노래는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ㅇㅡ면서도 역사적 ㅅㅣ간을 두 팔로 감싸 안는다. 89
은빛조각- 이번 그림에는 열두 블록 정도 되는 지역을 덮고 있는 커다란 책이 그려져 있다. 책은 은빛 구름처럼 가볍게 빈민가 위를 떠다닌다. 99 그림의 시점은 ㄴㅏ머지 작품들과 똑같다. 보잘것없는 교외 지역의 모습이 보이고, ㅎㅏ늘에 그려 넣은 책장에는 책이 몇권 있다. 그중 한 권이 펼쳐져 있다. 알 수 없는 약어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하늘 높이, 나뭇잎과 가지와 열매가 그려져 있다. 헬리콥터는 천사로 바뀌어 있다. ....지상에 있는 건물들의 사각형 창 하나는 그대로 영혼이 된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작품 안으로 들어갔다. ㅇㅖ술이란 그런 것이다. 102

망각에 저항하는 법 –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좌파든 우파든 정치인들은 마치 현재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 계속 논쟁하고, 투표하고, 해결책을 의결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하는 담론은 공허하거나 보잘것없는 일들에 관한 것들뿐이다/하나의 구경거리는 다른 구경거리로 아무 맥락도 없이 그저 멍할 정도의 속도로, 대체될 뿐이다. 그 사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충격으로 ㄷㅏ가온다/ 표류하는 언어들은 모든 것을 ㄱㅖ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ㄷㅐ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시간은 선적인 것이 ㅇㅏ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ㅎㅐ야 할 것이다. 105-110

볕뉘. 책들이 서로 이어진다. 흔적을 옮기면서 에세이를 한 발걸음씩 일찍 기억했는데, 앞의 에세이가 뒤의 에세이를 물고 있었던 것 같다. 끝도 아마 앞을 물고 있겠다. 언어가 아닌 모든 언어들은 폐 깊숙히, 때로 내장 속 저릿하게...오감을 울리는 것이리라. 말도 글도, 그림도 음악도....모든 사물도 거꾸로 나를 안고 흘러가듯.....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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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환기 – 안목의 김환기편을 보다. 죽음을 예감한 후기작을 못봐 다소 놀랐다. 극찬을 아끼지 않은 유홍준비평가의 글이 참 좋다. 그러다가 다시 김환기의 색감에 마음이 갈 무렵, 매화도 피고, 매화와 항아리, 달.....그랬다. 그러다가 우연히 책방에서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을 접하고 무척 달떴다. 사진과 글, 그림들. 편집도 곱게 해서 그만 수중에 넣어버렸다. 천재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 일본에서 그의 죽음을 맞이했던 그의 부인인 변동림. 그녀는 지적갈망 못지 않게 나혜석에 버금가는 신여성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시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나 김환기의 호였던 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몇년 뒤 삶을 함께 꾸린다. 그 가운데 몇몇 엽서들. 안좌도에서 보낸 엽서의 한 귀퉁이 목포 유달산의 모습이 선명하였다. 옛 해수욕장에서 본 모습도 그러했다. 지성과 새로움이 끌고가는 관계들로 묘사하는 그들의 사랑도 담았다.

2. 진은영과 한강 – 숱한 불면의 밤, 새벽들. 망막함 속에 칠흑처럼 어두워지는 하늘은 온통 쇠감옥이자 쇠우리다. 통유리다. 자고 일어나면 더 짙어지는 암울함. 하루하루가 우울이자 멜랑콜리. 부수어도 부수어도 그 자리인 시지프스의 삶일 수밖에 없음. 그(녀)들은 말한다. 목없는자. 숨쉬지 못하는 자, 목이 없어진자. 없어질 자에게 연민을 쏟는다. 한결같이 우리 몸이란, 우리 육체란 항아리는 슬픔, 아픔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 항아리 안의 마음의 물결은 파문을 일어 몸의 가장자리로 번지는 것이라 말한다. 죽음은 저기 먼 것이 아니라 늘 곁에 지금 현현한 것. 스스로 죽지 않고서는 스스로 필 수 없는 것. 나는 죽음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늘 사라짐과 나타남으로 감지되는 것. 그렇게 죽음을 곁에 두고 삶을 강렬하게 돋을 새김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너가 물리적인 신체로 각별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버무려져 있음을 눈치채는 것. 스스로 엄중해지는 것. 그런 존재라는 것.

3. 말과 활 – ‘오늘날 대중운동에서 외부란 무엇인가‘란 제목아래 현재 사회운동 시론 3편을 실었고, 21세기 공장의 불빛, 서동진의 글 세편을 넘겨보았다. 사회운동시론에는 기분도 분위기도 정동도 아무 것도 없다시피했다. 강령이 필요하고 광장안밖의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좌파재편이 필요하다란 당위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무미건조함이 그 코드인가. 오히려 이주노동자들과 목없는자들의 생생한 ‘ 21세기 공장의 불빛‘이란 꼭지가 대신 답을 말하려는 듯하다. 서동진 그는 마음 감정, 심정성, 정서, 기분, 정동, 분위기, 불안, 강박, 경쟁, 고투, ㅍㅣ로, 탈진, 좌절, 포기, 불만, 원한, 불신, 반감, 피로, 수치심, 모멸, 단속 등의 개념으로 사회를 읽는 것에 불만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이론적 접근의 발단이 정동에서 시작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과도함이나 과잉, 유행적 비평이 문제있음을 지적하려는게다. 그는 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흐름들이 하이데거의 세계내(안)존재 철학의 과잉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 아류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존재론적 좌파라고 한다. 과도하다. 이것만이 ㅇㅏ니라 체계나 구조에 대해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변증법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편의상) 역사유물론적 좌파라고 칭한다.

4. 요약하자면 서동진교수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맑스주의자였지만, 지금은 맑스주의는 사라지고 실존논의만 범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동이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역사정치경제의 생생함을 곁들여 변증법적 사유를 하자는 것이다.

볕뉘.

0. 따로 생각해보건데, 우리는 멀리떨어져서 숲의 조망권을 확보해보는 것이 아니라 숲길 하나하나 나무사이사이 활력들과 분위기와 정서, 감정을 곁들여서도 사유를 해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또 한편으로 일과 노동과 경제적 살림살이와 계급의 틀로도 제대로 사유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천하여 숨통트이는 논의조차 없던 것은 아닐까. 핵심을 명료하게 하여 실전의 느낌이 나는 논쟁들의 불꽃이 일었으면 좋겠다.

1. 진은영은 문학의 아토포스에서 비인칭이라는 ㄱㅐ념을 쓴다. 하이데거의 죽음을 말하면서 발라낸 개인을 말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비인칭의 죽음. 정체성은 없다가 새로운 사유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아방가르드, 시도, 실험, 논의의 확장, 논쟁의 계절이 다시 유행처럼 왔으면 싶다. 더 이상 손해볼 것도 없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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