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 어리굴젓을 집어, 김이 모락거리는 공기밥에 넣고 꼼꼼하게 비빈다. 윤기나는 계란말이 반을 잘라 그 위에 보기 좋게 으깬다. 그리고 수저에 안다미로 채워 한 입 크게 넣는다.

2. 혓바닥 칫솔질. 맹물로 입을 행구다. 참다래를 알맞게 잘라 입안에 오물오물거려 입안에 가득 퍼지게 만든다. 과즙이 흥건해지면 다시 꼭꼭 씹는다. 검은씨가 터지며 나오는 신맛에 입안이 새그러워지며 눈물이 찔끔 감돈다.

3. 찻잔에 피운 매화에 물멍이 들었다. 꽃술은 힘을 잃어가며, 꽃잎은 색이 바래간다. 청매화는 꽃몽오리가 부풀어 오른다. 매화초옥 그림을 보내 온 벗을 통해, 그래도 헛짓이 아니구나하고 안심한다.

4. 출근길 장바구니를 챙기다. 며칠 빨리 피는 재미에 끌려, 미리 봐둔 조팝나무 새순이 마음에 걸려 흔들거렸다. 한 정거장 이전에 하차 벨을 누르고 내렸다. 에코백 안에 장바구니 자크를 열었다. 걸음은 앞선다. 잎이 난 것, 나지 않은 것, 가지가 풍성한 것을 나누어 담았다. 뭐하시냐고 검문을 받을 것 같은 눈치다. 그리고 막 가지치기를 해 둔 벚꽃 잔가지 몇 개, 버드나무 순 몇 개, 개나리 복잡한 놈 몇 개를 덤으로 챙겼다.

5. 손님이 와서 이른 저녁 겸 술 한잔. 서로 헤어지고 에둘러 돌아돌아 작은 책방에서 두근거리는 책들을 놓고, 홍차 한 잔에 ‘한 책‘하고 싶었다. 낮에 모신 책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 아불싸. 헤어진 손님들과 이슥한 다리 한 귀퉁이에서 조우했다. 한 잔 콜. 그래. 마늘 듬뿍, 발라낸 통닭과 야채을 조물조물 섞고, 갖은 양념에 소주 한 잔 콜. 그렇게 거사가 무너져내렸다.

6. ‘ㄷㅏ르니 틀리다‘ 정신에 충만한 이들이 태극기 집회를 다녀왔다고 떠들고 다닌다는 노망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다. 챙피하다. 그 놈의 ‘다르니틀리다‘ 정신은 빨갱이에서 종북 종북에서 또 무엇을 찾아다닐까. 그 끈질긴 생명력. ‘다르니 다르다‘로 가보지도 못하는 불퇴진의 정신. 사회적 유아. 다름을 경험해보려고 조차 않는 수구. 그렇게 누리고도 뭘 더 누리겠다고

7. ‘이재명‘을 다시 탐구하는 손님이 6.을 이야기한다. 강남에 사는 그는 자식들이 저녁이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고, 토지보유세로 재원을 만들어 기본소득을 취하는 정책이 실현가능성 높은 신뉴딜정책이라고 한다. 한번은 크게 바뀌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자식들의 삶이 안쓰러워 못보겠다고 한다.

8. 보들레르의 삶을 읽었다. 문학의 아토포스를 다 읽어간다. 정유라의 이인화교수의 답안지 가운데 하나로 적힌 이포토스?를 정답이라고 동그라미 친 그 단어. 토포스는 장소, a는 결여나 없는 이라고 설명하는 jtbc 부장 아나운서. 그를 보고 부장님은 도대체 모르는 게 뭡니까라고 농을 건네는 둥근 안경을 쓴 기자. 비장소, 비시간, 비윤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다시 사람이다 - 후장사실주의자의 소설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었다. 그러다가 시집을 한권 읽었고, 절반 정도 남은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를 마저 빠른 속도로 읽었다. 신경건축학란 새로운 학문이 다가온 것처럼 서문과 책날개는 설레발을 치고 있어 혹시나 했다. 성당, 도박장, 놀이동산, 할인매장 등등....빅데이터를 구하기 쉬워졌고, 뇌과학을 접목시킬 수 있어 이전에 감으로 느끼던 것이 명확해졌다. 이런 기술과 가상현실이 접목되면 놀라운 효율성을 가져오는데,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인간, 뇌의 가소성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조심스러운 우려가 있다. 하지만 과학과 건축 사이 여전히 사람이 있다. 흘러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이를 구별하게 만드는 사람말이다.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다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과정을 겪어내는 사람.

2. 관계 맺기 - 자아계발서인지 심리학서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자아계발서로 하면 더 많이 판매될 수 있다고 한 것일까. 컨셉은 온통 이 분위기이다. '발라낸 자아'는 더 없이 위태로운가. 서두에 은밀한 동반자로 11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부에 이런 마음속 동반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유형을 파악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기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한다.

 

3장은 그래도 보아줄 만 할 것 같다. ‘자아의 근원은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온다‘, ‘다른 사람없이 나도 없다‘ ‘다른 사회적 존재들이 없이는 자아는 감정도 형성할 수 없다‘라고 하며 '발라낸 자아'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한다. 갓난아이가 부모와 관계로부터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적인 자의식은 저절로 생겨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자의식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매번 변한다. 자아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던 철학자 토마스 매칭거의 말은 지극히 일리가 있다. 196‘  

며칠 전 페이퍼에 언급한 생산주의 자아와 소비주의 자아가 겹치기도 한다. 자본주의 초기의 가치나 개선을 해나가려는 생산주의 자아가 이제는 ‘소비주의 자아‘로 산개해서, 뿔뿔히 흩어지고 통일성조차 찾기 어려워졌다고 말이다. 테리이글턴이 그런 자아로는 지성적 진화주체로 설 수 조차 없다라고 했다. 현재의 무한 반복이라고 말이다. 자아는 갈 곳을 잃어 더 이상 존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일의 늪, 성과의 늪과 자학적인 채근의 반복. 결국 돌아오는 것은 유사번아웃증상들이다. 곁의 관계는 사라지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나로 고립되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집요하게 자아를 사물로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고정된 무엇으로 사회성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발라낸 자아'와 개인의 신화나 이데올로기로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주제의 3장과 다음 장은 갈등, 그리고 이별로 책을 구성하고 덮는다. 이 책 역시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행동연구, 신경학 등등 다른 학문들의 흐름들을 차용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복잡한 표현들을 쓰기는 하지만 아들러의 저작에서 자신을 보는 관점, 사람들 사이 차이점, 관계를 맺는 법 등에 대한 설명보다 기본적인 사항들을 훨씬 모호하고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 결론은 독립된 자아를 잘 간수하는 것으로 끝내는 그냥 자기계발서인 것 같다. 너에게 향하는 방점이 희미하기에 말이다. 그래 만국의 삶이나 살아가기가 비슷한 걸로 결론내자. 이 하늘 아래서는. 잠정적으로 자아에 대한 가치 전도가 필요한 것으로...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말이다. 사회 관계도 말이다. 잠정 결론이다.

3. '이틀' - 양말공장 상무(50대후반)의 의도치 않는 이틀동안의 땡땡이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목련이 나온다. 이삼십년을 연립주택에 살면서 한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목련나무를 보면서 아이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묻는다. 정말 여기에 있었느냐고 말이다. 젊은 작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짧은 단편에 싣고자 했다. 그래서 그 이틀은 호흡이 가쁘다. 땡땡이 치고 싶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아마 50대 중반쯤이 되어서야 느낄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연민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디테일은 연민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볕뉘. 후장사실주의자. 도대체 뭔말일까 궁금했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이 있다는 서점주인의 말에 갸우뚱했다. 후장이란 내장 마지막부분..음 그러니까 막장같은 것인가 보다...사실주의? 리얼리즘....1920년대 초현실주의가 판을 치던 때, 이 흐름에 맞서 잡지 한권을 낸다. 이백여부를 만들었지만 팔린 것은 이십여권..그것도 주거나 강매한 것들....정작 보게하려는 농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들 불쏘시개로 쓰이는 그 잡지가 유일하게 한권 남아...한 비평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는 후장사실주의....그러니까 초현실주의에 맞서는 뱃 속 저 막장이 찌릿해져오는 리얼리즘. 허구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 기록문화를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나름 해석했다. 이 역시 잠정적이지만...그 작품이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단편이다. 새서울백지화계획도 나오고 영친황의 손자 이구도

나온다. 무수한 참고도서도 나오고, 이 저자를 인터뷰하다 후장사실주의자가된 평론가도 나온다......건축, 공간......사람.....환대.......우리는 어쩌면 시공간도 이론도 관계도....모두 낭떠러지같은 위기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디쯤에 있는지조차도.....뱃 속 저릿한 생각들이나 일들은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기 저기, 저기 여기일까.....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000원에 커피 오지, 막걸리 오지, 안주 오지. 이쁜 아가씨까지 와서 술도 따라주고 놀아주지...2시간 남짓 앉아 있으면 2만원 정도 더 주지만...텅빈 들판에 오토바이 소리 나면서 들판 어른들 다 신났지 뭐.”

논두렁 밭두렁에서 ㄷㅏ방을 이용하는 주 고객은 70-80세 노인들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과도 다 떨어져 살고 있는 노인들은 몸이 허락하는 한계 안에서 근근이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꾸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는 관계의 단절, 혼자 ㅅㅏㄹ다 죽는 ‘무연사회‘가 먼 일본의 일만은 아니다.

사회보험을 통해 사회와 공동체가 수발을 부담하자는 취지로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만 할 수 있는 제도적 한계는 농촌의 변화무쌍한 삶의 리듬을 따라잡지 못해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통적으로 노인수발을 담당해온 가족과 여성을 대신해 다방 아가씨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것을 신속하게 제공해주는 ‘효율 성적‘ 측면에서는 다방을 따라잡을 만한 제도가 없다. 단골을 만들려고 하는 서비스겠지만 집을 청소해주고 반찬도 만들어주고, 지나가면 꼭 인사하고 가는 이들이 매일 노인들 사이를 오간다.

“다방 아가씨들의 잔소리에 자주 씻고, 면도하고, 옷도 깔끔하니 입고 다니는 노인들을 보면 다방 많은 것을 동네 흉으로 볼수만은 없다.” 기계다방 골목을 걸으며 The U&I 잡지에서


볕뉘.

0. 버스 기계정류소에 내리면 500미터 사이에 다방이 20여개나 있다한다. 이 에세이와 이어지는 꽁트를 읽고 잔상이 남아 이렇게 옮긴다.

1. 어떤 생각이 드는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농촌마다 가을추수? 농작물 수확기마다 다방이 곳곳에 생기면서 푼돈을 훑고 지나간다는 이야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간다. 어떻게 여기시는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2. 생기와 감정 -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제도가 이런 것들을 문서화할 수도, 흐름도 만들 수 없겠지. 살아간다는 것,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이렇게 또 한해가 지나가듯이 흘러가는 것이라면...이성과 냉정의 공무원 스타일 일처리로는 감당하더라도, 감당하고자하는 공무원은 왕따이거나 과로로 쓰러질 것이다. 스러지는 삶들은 애정을 갈구한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삶의 건기를, 건조한 하루를 어떻게 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3. 구매자는 남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낙원다방, 새끼쳐서 다른 다방을 차린다해도 근근히 풀칠하는 정도일 것이다. 인생에서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일까. 궁금하다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 감정서비스와 감정노동...그야말로 창조경제인가...그 시장을 찾아냈기에 상이라도 주어야 하나...

4. 인생에 유치한 것은 없다. 냉정한 행정이 읽지 못하는 곳. 순환되는 감정의 흐름을 읽을 수는 있을까. 그렇게 하면 해석이 달라지나. 감정과 활력...우리는 그런 것을 쫓기나 하는 것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양철나무꾼 2016-12-21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르신들이 환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라,
할말이 아주 많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말줄임표로 대신합니다......
생기는 들고남이 있어야 하고, 반대로 감정은 차오르고 넘쳐야 흐를 수 있는거겠죠.
생이 아닌것을 사, 진짜가 아니것을 가짜라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얘기되어질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아픈 생각거리를 던져주셨습니다..

여울 2016-12-22 08:13   좋아요 1 | URL
그쵸. 쉽지 않은 문제죠. 이성이라는 것은 사후약방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떠나가거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나 그림자같은 것은 아닐까. 감성이라는 것이나 활력이라는 것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면 떠오르거나 떠오르는 것들을 예비하는 것은 아닌가. 그림자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차오는 것에 눈여겨보면 어떨까. 다가오는 것들의 정경이 서서히 선명해지고 뚜렷해지는 것은 아닌가. 사후의 지적질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닥치는 것, 다가오는 것에 대한 감수성은 자랄 수 없는 것일까....안개같은 얘기만 자꾸 하게 되네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말줄임도 못하고 가네요.
 

1. 사회적 시야 - 함께 깊이 볼 수 있는 표현력. 점증하는 구체. 능력의 산개.- 개인적 자유의 자장 안에 움직인 진보는 외롭다. 늘 혼자임을 감수해야 하고, 혼자 해결해야하는 절명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함께하는 자유. 공화주의의 자유에 우리는 낯설다. 경험이 일천하다. 사회적 자유는 기본적으로 말하는 상대가 있는 자유. 정치행위를 하는 자유, 유적 존재인 것이다. 불편해도 함께 사는 존재. 그 관계를 전제로 한다. 끼리끼리의 낮은 관계로는 해결해나갈 수 없다. 이질적인 삶. 이질적인 일상의 다원성으로부터 배워나가는 것이 많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일상에 붙어있는 말, 언어들로 확인해봐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얼마나 갇혀있는지. 얼마나 관계를 만들고 있지 못하는지. 그것을 지시하는 말들, 언어들이 희귀한지도 말이다.

5. 오다와 피다, 그리고 그 사이
- 오다나 와라. 이해도 그렇고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와라가 아니었는가 어쩌면 피다나 피라고 한 적은 있던가. 피다 피다가 아니라 자장안으로 와라. 일단 와라가 아니었던가 설익은 계몽이 낳은 것이라곤 이질감이다. 그래 잘났다. 감정의 상처를 재생산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오다와 피다 .

4. 당당함과 침잠하는 우울사이- 뫼비우의 띠는 안과 밖이 열려있다. 이 땅위에 이론들은 하지말아야 하는 것들이 천지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 가난도 피해를 주지말기 위해...하지말것을 정교화해내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홀로 감당해내는 삶이 진보는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이론이다. 밖도 우주이고 내 안도 그러하다. 심연을 확장한다는 일은 서로 만나는 일이다. 자신에로의 배려는 더 밖으로 관계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삶의 진보는 몇백년의 삶들이 누적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삶이라는 것이, 일상이라는 것이 떳떳하고 당당하지 않다면 무슨 재미이겠는가. 삶의 냉기만 후대에 전달한다면 무슨 맛이겠는가. 자발적 가난, 채식, 자유인의 삶....모두 인정하고 존중되어야 할 삶이지만 전부는 아닌 것이다.

2. 이질적 삶의 겹침이 바뀌어내는 정치관
- 사람들의 정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활의 반경, 그 틀안의 사람들에 얽매여 있으면 변화라는 것이 요원하다. 가족 관계도 그러하며, 친구들 사이의 관계도 그러하다. 다른 삶이 부딪치지 않으면, 그 감정의 격동이 또 다른 시야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변치 않는다.

3. 박정희모더니즘과 개인적 자유주의. 그 자장안의 진보/사회적자유의 자장 - 이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산업-민주화의 이분구도도 그렇지만, 우리가 가져온 진보의 대부분은 개인적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진보라 불리는 것들이 여전히 그 논리안에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켠에는 농촌공동체나 도시변두리공동체 정서를 한 축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이질적인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갈라서 있다는 것이다. 한 축은 귀소본능처럼 움직이는 공동체의 정서와 진보가 전유해온 지식인, 엘리트의 무늬. 그것도 대부분 서민과 대중의 정서가 뱉어내어 스스로 소외당하고 있는 이미지이겠지만, (소외된 민중의 삶이 만들어낸)엘리트의식과 지식인 정서는 개인적 자유를 차용해서 일정정도의 진보를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 세대, 반 세기에 이어지는 왜곡된 구조는 지속될 수 없다. 이로서 더 이상 진보와 개인적 자유가 공존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서민과 대중 스스로 위축되어 엘리트 의식을 만들어내고 지배받기를 원했던 것 역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아야 할 것같다. 선민의식이나 대자적 존재, 사회활동하는 이들 역시, 보다 낫다는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대중과 서민의 흐름을 읽을 수도 없고, 새로운 흐름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끌어내야할 대상이 아니라 감성과 감정의 결, 그 면면히 흘러온 흐름들을 몸으로 체감하고, 삶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벗. 그 바닥의 느낌을 건져올릴 능력이 없다면, 새로운 느낌들을 만들어갈 수 없다면,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저 퇴보하는 엘리트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멍하니 시간에 바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볕뉘. 진보하지 못하는 진부한 생각들이다. 서로 물릴지 서로 물고갈지 모르겠지만 흔적이라도 남겨둔다. 사회적 자유라는 표현도 좋고, 불편해도 함께하는 관계도 좋고, 단지 현안을 해결해야하는 생각들이 아니라 삶의 자장 안에서 서로 품는 생각들을 해보고 싶은 것 같다. 일반화될 수 없는 지금여기만의 독특한 무엇. 그 일상들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묻고 싶고, 묻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