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1.
그러니 자넬 믿을 수 없어.

더군다나 자네가 전제하는 걸.
별반 흔들려 본 적이 없는 그것을 말야. 그래 묻고 싶어.
그건 무너질 수도 있고.
하면서 더 탄탄해질 수도 있지.
누가 그러던가.
자네가 믿는 사람이 그러던가.
그러면 되물어보게. 무엇을 해야하는가보다 왜 하느냐구.
그 분의 전제가 무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 사람은 그걸 의심해본 적이 있다고 하던가.


2.

들어본 적이 없다고.
헌데 왜 그러는가. 자넨.
그러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가. 사명감인가. 의무감인가.
그럼 그런 이유같은 건 애초에 없는 거라고 해보게.

왜 허망한가.
기댈 곳이 없어지는가.
삶의 끈아풀마저 잡을 수 없는가.
그렇군. 자넬 기대는 사람들도 자네에게 묻지 않았겠네.


3.

아쉽고 안타깝네.
안타깝고 아쉽네.

그래 자네도 문제야.
좀더 의심했더라면
자네가 길 하나쯤은 더 낼 수 있었다곤 생각한 적은 없는가.

그래 자네가 문제야.
좀더 흔들렸더라면 조금 더 단단해졌을거야. 아마.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불리할 때 말고, 유리할 때일수록 친해져야할 이것 말야.


4.

명심할 필요는 없네.
세상에 존경같은 건 없네. 그런 게 다 망쳐놓았네.
그런게 다 무능을 키우고 감싸니.
늘 허세가 묻어 높아지기만 하는 건 아닌가. 내 편만 원해.

5.

한 두번쯤
당신이 믿는 세상같는 건 없다고 해보지않겠나.
그렇게
원하는 건 없다고 말일세.
늘 판에 박힌 회의가 두렵지도 않은가. 실행만 원하는. 자기를 갈아넣는.


볕뉘.





1. 아마 맴돌 듯. 그 자리에 머무는 건. 이럴 자유가 없어서는 아닐까. 불확실한 걸 말하는게 아냐. 분위기라는 서툰 관성. 절망을 폐기처분해버리고야 마는 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것들. 그 거름으로 또 자라날 숱한 것들은 어디 있을까. 애매를 보장해주는 관용같은 건 왜 대기하지 못하게 하는가. 참을성같은 것은 사전에 없는 듯이... ... 앨버트 허시먼을 3/5정도 읽고 있다.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모아본다.


2. 1차별에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차별, 종차별, 나이차별, 계급차별, 차별이 위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울기를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비슷한 삶의 시선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고, 양심의 회복 방향으로 가야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사람은 복수적인 존재이므로 다양한 차별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불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시야를 확보해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2.2 인종차별을 하는 발언을 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성적인 차별을 하면 정도에 관계없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장애차별을 하면 받는가. 나이차별을 하면 받는가. 아이를 홀로두면 받는가. 종차별발언을 하면 처벌을 받는가. 계급차별을 하면 환경차별을 하면... .... 이렇게 생각을 확대해보자. 지금 당신은 어디쯤인가. 진리는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다. 그 기준으로 세상을 보면, 아직 도래하지 않는 세상을 본다면.....그럴 것이다.

2.3 대부분 그렇겠지만 자기의 아픔이 커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아픔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아픔이 가려서 덜 보이기도 한다. 차별 감정은 서로 예민해지는 것이고, 서로의 삶들을 윤택하게 하자는 것이 기본 취지일 것이다. 법과 제도는 무수히 만들어질 수 있다.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3. 참회자와 심판관. 인간의 양면성을 말해주는 것이겠다. 어느 하나로 설명해줄 수 없는...그런 과정을 살아내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단언보다는 회의와 주장의 근저에 있는 의심들이 삶의 또 다른 길을 열어주고 가게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확신들을 경계해 본다. 아마 위의 2번의 일거수 일투족이 빅데이터로 모아지는 사회라면, 이렇게 막가는 법체계 시스템을 갖는 사회라면, 스스로도 예비 범죄자로 분류되어 잠재종신형에 처해지지 않을까 싶다.

4. 어느 하나로 자신의 자리와 위계가 정해지지 않는다. 진리를 잡았다고 하는 순간 놓친 것이다. 과도함이 스스로에게 자라나고 있는지, 또 다른 우상이 슬며시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묻고 아파해야 할 것 같다. 이런 회의만이 다음을 준비하고 일상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지나친 확신이 지금을 밀고 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느 한 분야를 콕 짚어내지 않더라도 어느 하나 샘플로 들춰보더라도 맹신에 가깝다. 감내하지 못할 극단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그 벽들이 더 견고해지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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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 걱정했는데 일어나보니 어제 날씨였다. 아니 바람도 없어 고요하며 포근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하루다. 읽다보니 데카르트의 <성찰>이 걸린다. 잘 알고 있다고 더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다른 저자를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싶다. 며칠 전 구입한 중고책이 불쑥 왔다. 



허시먼의 책을 보다나면 책 속의 책들이 즐비하다. 자본주의 발흥이나 그 맥락은 베버와 맑스가 꿰고 있고, 아무런 의문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당대의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것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잡아내고 연구를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감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새로운 것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발명이나 발견처럼 어렵게 어렵게 생겨난다고 여기는데, 아닐 수도 있다.고 낡은 것으로부터 자라고 있다고,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고, 이성, 정념과 같이 선악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의 논리와 궤를 같이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스피노자와 비코가 자연스럽게 모두에 나온다. 15-18세기의 지성사를 꿰어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싶다.  정치와 경제가 분화되기전, 중세에서 상업의 발달로 중상주의가 들어설 때, 영주와 귀족의 권위와 힘이 어떻게 줄어들게 되는지, 민주정이나 귀족정이 아니라 전제정을 왜 요구하게 되는지, 그 맥락들을 짚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법칙이나 원칙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 개념이 회자되다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 전제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다보니 그렇게 웃자라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라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정리된 버전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 이면에 대한 의구심들이, 신나게 욕을 했고 사라지면 좋겠다고 여기는 주장이 어쩌면 자양분이 되어 더 자라나게 하는 이유가 되듯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하는 것들도 많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여기저기 오늘도 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텍스트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각도로 읽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류의 해석들만 남아 우리는 다른 시선들을 포착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옮기는 이들 말 역시 걸러서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또 다른 면들을 발견해낼 수 있기도 하니 말이다.


볕뉘. 퇴근 길 폰을 일터에 두고 온 걸 숙소에 오고나서야 알았다. 다른 것들은 다 챙기고 정작 급하며 중요한 것을 빠뜨린다. 왜 레비나스가 데카르트를 다시 이야기했는지, 왜 허시먼이 학문 경계를 불문하고 다방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지 다시 느낄 수 있는 날이다. 책들은 늘 다르게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새로워지는 듯 싶다. 풍요로운 독서는 늘 그렇게 지운 뒤에 새싹처럼 올라오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완독을 하고 글을 남기고 싶었지만 이렇게 해도 나쁘지 않다 싶다. 에돌아와서 성찰이란 책을 남길 수 있었고 밑줄없는 글을 남기기도 한 것이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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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친한 친구가 죽었다. 사랑하는 너를 더 이상 매만질 수 없다.
 
포탄 소리가 요란하다. 깜깜한 밤. 문은 왈칵 열리고 “당신은 어느 편이야?” 말을 거는 순간, 나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의 무게도 전장의 상흔보다 더 큰 코로나 시대에 안녕하지 못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말한다는 것과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폭력에 노출된 것이자, 그 상황을 감수하며 건네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한 철학자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그 가족들은 나치에 학살되었다면, 그는 어떤 사유를 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와 후설에게 학문을 배운 그가 이런 현실에서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원고를 막 쓰기 시작한다. 대체 철학은 무엇을 한 것이고,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세계-안-존재, 죽음 이전의 삶. 그 존재. 독립된 존재로서 개인. 발라낸 개인으로서 사유는 제도와 생산력 포식의 세상을 만들어냈다. 신은 죽었지만, 그로 탄생한 개인은 어김없이 자신과 동일한 인물을 만들어낸다. 숱한 이론과 지성도 결국 엘리트주의에 감염되어 서로를 적으로 몰아 사멸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이런 전체성을 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귀환이 아니라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아브라함에게 주목한다. 빚을 진 존재자. 책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 주체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내가 묵살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자에게 폭로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말하기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에 결정적 행위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의미의 주고 받기가 아니라 그 와중에도 의미의 생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와 타자는 동시적으로 생기하는 것이며, 나에 앞서 타자가 있는 것도, 타자에 앞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와 타자는 사건 속에서, 사건으로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까지 같아진 것은 아닌가 회의한다. 당신은 정신없이 무대만 보는 실재론자 관객은 아닌가. 아니면 시시해져서 흥미를 잃어버린 회의론자는 아닌가. 연출가로서 너무 몰입하지도 않고 너무 분석적이지도 않고, 주제와 주제 이외의 것을 느끼려고 해야되는 것은 아닐까.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시선을 섞는 지향을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닌가,하며 후설의 현상학에 기대를 걸어본다. 휴머니즘이라는 이론만 있었지,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늘 곁에 둔 적은 있었던가. 도덕과 법과 평등이란 허구에 앞서서 인간적 공정이 먼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주체의 종언과 구조주의가 만연한 그 시류에 거슬러 그는 인간주의와 주체성의 복권을 부르짖는다. 세상을 어떻게 달리 이해할 수 없을까? 준 유아적인 태도에 머무르는 철학과 학문의 습속에 대항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받는 사람은 그런 감정이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책이란 텍스트는 무엇일까? 그것 자체가 진리이지는 않다. 끊임없이 읽고 다르게 해석하는 의미만이 실천성과 사용성을 갖는 것은 아닌가? 사물 역시 규정된 무엇이 아니라 그 양태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객관적인 것도 괄호를 치고 판단중지를 해보거나 유보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방법을 갖게 되면 분리된 하나가 아니라 서로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실재일 것이다. 대상을 소유할 수 없다.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은 이렇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것이다. 그 끝을 열어두는 상태이다. 수렴이 아니라 확산. 독백이 아니라 대화로서 앎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약하게 될 자이자, 약하다. 약하다는 자체가 타자를 불러들이고 있다. 사랑하는 일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혼자 설 수 없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으로 자신을 기초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되먹임하는 일만이 점점 더 독립된 나를 만들고 나 아닌 나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면,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 나는 -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타자를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나를 향유하는 기능에서 비로소 나인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끊임없이 자기 안에 투입해나가는 운동성이야말로 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그는 되새긴다.

레비나스 그는 스승들을 쫓았지만 결국 물구나무 세웠다. 강한 자, 명료한 학문의 방식이 낳는 철학의 말로를 뒤튼다.그것이 낳는 폐해를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약한 자, 의미를 쌓아가고 연결시켜가는 점점 달라지는 사랑의 풍요로움은 결코 이전 사상가들의 사고와 이론에서 나올 수 없다. 곁의 사람에게 말 걸고 점점 달라지고 세밀해지는 곁의 삶에 아파하고 보듬으면서 친밀해지고 시공간의 집에 정주함으로써 자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타자의 유책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


볕뉘. 오랜만에 서평을 써본다. 늘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낀다. 글짓는 이들의 한 땀 한땀을 존중한다. 읽는 순서는 없다. 어디서부터 읽든 반복하시면 글쓴이의 의도를 충분히 감안해주시는 것이다. 감사드리며 새해 복많이 지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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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01-01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일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라는 구절이 와닿습니다. 첫눈처럼요.
새해도 좋은 기운으로 왕성한 활동 펼치시길 바랍니다. 여울님.

여울 2021-01-01 21: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주 뵐께요^^
 

 1. 독을 사랑하기


[ ] 니체의 전설인 수퍼맨은 살과 금속의 공생이라는 대담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니체에 대한 이러한 현대적 활용과 남용에 있어서 잊혀지고 지워진 것은 초인에 관한 그의 반복되는 기원이 인간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우리를 불러낸다는 것이다. 초인의 약속은 그러한 방식들로 묶여져 있지만 인간적인 것에 관한 기억과 더불어서는 거의 탐구된 바도, 이해된 바도 없다. 현대의 기술론적 이론화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에 관해 우리를 눈멀도록 한다. 36

[ ]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에게 인간적인 것이 영속적인 극복의 자리에 놓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원들에 관한 질문, 그리고 자기 투명성을 향하는 데에 수반되는 욕망은 그 책의 시작에서부터 추방된다. ‘우리‘ 인간들은 ‘필연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우리 자신을 낯선 사람으로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지자가 될 수 없다. 39

[ ] 그는 실존의 희극의 인간 역사의 비극을 전환시킴으로써 도덕의 시원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인해 기대되는 ‘보상‘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가 상위의 ‘영원한‘ 생성에 종속되는 동시에 ‘영혼의 운명‘에 관한 디오니소스적 드라마를 향해 새로운 반전과 성과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 서문은 인간의 새로운 기억에 호소한다. 이는 한 번 획득되고 나면 우리가 ‘근대인‘이라는 돌림병을 잊어버리게 되는, 바꿔 말해 ‘독해의 기예‘를 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예에 이르고서야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은 니체의 처방 이전에 있는 ‘어떤 시간‘, 곧 도덕적 과거와 초도덕적 미래에 대한 독해 가능성이다. 이러한 독해의 기억술은 살을 가진 글쓰기로서 우리의 신체 위에 통합되고 새겨져야만 한다. 42

[ ] 니체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를 작업하는 데에 있어 문화의 ‘실제 도구‘와 문화의 ‘잠재적 담지자들‘을 구분한다. 문화란 단순히 맹수인 인간을 문명화된 동물로 기르고 길들이는 일일 뿐이다. 문화의 기술들은 오로지 무를 의지하는 힘에의 의지를 육성할 따름이다. 즉, 힘에의 의지의 내면화 과정인 수동적 허무주의는 문화가 자기 혐오와 경멸 이외에는 그 병으로부터 빠져나올 어떤 것도 산출해 내지 못하는 지점에 이른다는 것이다...문화의 훈육을 향한 의혹의 태도는 낯설고 근대적인 지배자 혐오주의라는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49

[ ] 기억은 음악가들과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증명되는 대각선적인 운동을 통해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궁극적으로는 ‘탈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창조란 세계를 재현하는 과업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낸 돌연변이적인 추상적 선들로서 이는 정확히 그것들이 분절된 계들 하에서만 다시 포함되거나 다시 자리 잡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적 실재를 모아 내기 때문˝이다. 52

[ ] 프루스트에 대한 연구에서 들뢰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기억이란 도구로 작동한다 - 우리는 단순히 극복에 대한 복무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가적인 종류의 의도적인 조작과 선전에 굴복하지 않는다. 기억의 주체는 이 자기 극복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프루스트의 작품이 갖는 시원성을 논한다는 것은 과거와 기억의 발견이 아니라, 미래와 배움의 진보인 것이다. 56

[ ] 기억은 시간의, 지나가는 현재의 움직이는 토양을 재현해내긴 하지만 사실 그 바탕이란 능동적 주체의 시간을 빼앗아 버림에 따른 되기의 전유에 도전함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들뢰즈 이를 기억의 심오한 수동적 종합이라고 한다. 기억은 시간의 근본적 종합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라는 상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현재를 지나가도록 허용한다. 59

[ ] 보들리야르는 ‘인간이란 전갈(엉큼한 사람)‘이라고 쓴다. 살아있는 사물들을 함께 묶는 것은 ‘생태학적인, 생물권적인 연대‘가 아니라 죽음을 향한 또 다른 말인 항상적 평형론 덕분이다. 오히려 선good을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악 또한 자유롭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진정한 평형론‘과 균형을 만들어 내는 그것들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이다. 73 선과 악은 생명이 부단히 자신을 극복해야만 하는 무기들이자 멀리 울리는 상징이어야만 한다...가장 위대한 악은 가장 위대한 선에 속한다. 곧 , 그러나 이는 창조적인 선이다. 74 인간의 기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의 구성물로서 인간에 속하는 기억과 그의 소유가 아닐지도 모르는 기억인 인간적 되기에 대해 이중적으로 말한다는 것이지만, 동시에 어떤 다른 것과 ‘넘어섬‘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75


 2. 초인을 향해: 니체적 선별의 기예와 기교에 관하여


[ ] 당신은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관점주의적 감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전치, 왜곡, 그리고 기껏해야 한계가 명백한 목적론과 관점주의에 항상 들러붙은 뭐든지 간에.....당신은 모든 것을 향한 그리고 반하는 것 하에서의 필연적인 부조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부조리이자, 삶 자체가 관점주의적이고 부조리하다는 감각에 의거하여 조건 지어진 것이다 ; 해방의 수수께끼는 스스로의 덕뿐 아니라 스스로의 자기 극복을 정복하는 극기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는 관점주의 하에서의 훈련을 요구한다. 86,87

[ ] 당신은 아마도 탈주선을 그리며 도약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모든 것을 재층화하는 조직화, 기표에 대해 힘을 다시 부여하는 형식화, 오이디푸스의 부활에서부터 파시스트적인 응고물에 이르기까지....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을 다시 마주치게 될 위험이 존재한다./자유로운 영혼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사례를 일반화해 내며(한낮의 경험이라고 하는) 이러한 경험의 기초 위에서 결정하는 법을 배운다. 95

[ ] 충일함으로 고통받는다는 일 98/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을 향한 불신의 태도를 취함으로써만 낭만주의를 ‘넘어서‘ 갈 수 있을 뿐이며, 이에 따라 자신의 가장 깊은 친구로서 가장 위대한 적이 된 스스로에 반하여 다른 쪽으로 데려갈 수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낭만주의적 허위에 반대하는 용기 있는 염세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 있다. 102/ 즐거운 학문- ˝영혼의 야단법석˝에 대해 말한다. 104 철학은 ‘변형의 기예‘이다. 위대한 건강이란 그것ㅇㄹ 고무하는 병과 이상들에 대한 긍정의 도래라는 필수 부분을 포함한다....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통해 생각을 낳아야만 하며, 어머니들처럼, 피, 심장, 열정, 쾌락, 정념, 고통, 의식, 운명 그리고 파국 모두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만 한다. 107 극도로 심하고 은밀한 병들로부터 ‘되돌아와‘ ‘새로 태어난다‘108 자신의 시간이 가진 궁극적 가치에 대한 측정에 주목하길 희망하는 ‘초월하는‘ 인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안에서 이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시간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앞선 반감, 그로부터 나오는 고통, 그리고 낭만주의를 낳는 고통을 극복하는 일을 포함한다. 다시 한 번 영원회귀는 이러한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오로지 그것의 수수께깨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110

[ ] 도덕이란 선과 악을 뛰어넘어 가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것 자체가 바깥으로의 횡단이 불가능한 것이다. 112 금욕적 이상은 ˝인간의 총체적 역사˝로 스스로를 새겨 왔으며 그러한 방식에 있어서 양자는 두렵고 망각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의 이러한 ‘진정한 파국‘은 또한 진정한 문제를 제기한다. - 단순히 개별성의 초월이나 바깥이 아닌 그것들 아래에 흐르는 어떤 흐름들을 위해서 말이다. 113


 3. 죽었는가 살았는가 ; 영원회귀의 죽음에 관하여


[ ] 유고- 억압적인 것으로서 비생기적인 것으로의 회귀에 대해 생각하기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차라리 우리는 죽음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를 통해 스스로를 완전하게 해야만 하며, 따라서 실제적인 것과 더불어, 또한 사후 세게와 더불어 우리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계가 사후 세계로 가로질러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연유하여 나아가는 하나의 축제라고 쓴다. 그러한 과업은 감각 가능한 상태이기에 그것을 즐겨라는 코미디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전도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생명의 대립이 아니라 그것의 진실된 자궁으로 다루어야만 한다. 129 긍정의 힘 즉, 역능과도 같은 영원회귀는 영원성으 계기인 모든 다수성을 긍정한다./어린아이와 같이 각각의 시간과 모든 시간들을 긍정하는 상태로서 변화의 총체를 이룰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131

[ ] 영원회귀라는 형식론은 극단적 잉여로의 시험을 밀어붙임으로써 자신의 바탕에서부터 범주적 요청을 패퇴시키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미리 주어진 도덕 법칙에 관한 반복에 관계되는 대신 도덕성을 뛰어넘는 법칙의 형식일 뿐인 반복 자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블랑쇼가.. 영원회귀는 시간의 찰라성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과 존재 바깥에 있는 것으로, 또한 그것 자체를 바깥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이는 그것이 영원한 것, 곧 영원성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라고 한다. 132

[ ] 죽음은 즉자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대자적으로는 흐름과 이동성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134 죽음의 삭제가 아닌 그것의 극복. 통합적 변형은 여전히 죽음에 속해 있긴 하지만 이제 소수자적 언어 속에서 드러나며, 그것은 한계로의 이행이 된다. 135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삶을 해석하는 일은 삶이라는 잠재적 연속체를 전면에 가져다 놓는 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명령어들에 있어서 삶은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비행하고 창조해 냄으로써 그것에 답해야만 한다. 137

[ ] 바타유는 오로지 뻔뻔함만이, 음탕한 악마성만이, 충분히 행복한 자아의 상실로 이끌 수 있다고 쓴다. 죽음 이전의 유쾌함이란 삶이 뿌리에서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축하받음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찬양 그 자체이거나 그것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보수를 넘어, 제한을 넘어 그리고 보존을 넘어. 139 세계에 도래하게 된 모든 존재의 유쾌함과 같은 모든 것들의 폭발적인 소진일 뿐이다.....나는 피투성이가 되고 부서졌지만 변화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죽이고 끊임없이 죽는 시간의 먹이이자 턱으로서 세계와 일치하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140 죽음선에 대한 언급에서 신비주의적인 죽음욕동에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욕망 안의 내적인 욕마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배치들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욕망은 늘 배치의 문제였다. 142

[ ] 차라투스트라의 순수 생성을 도입하는 일에는 역행되는 잉여로서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죽었다는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이다. 즉, 그는 다시 또 다시 자신이 소멸과 변형의 지속 하에서 수많은 작은 죽음들을 갖는다. 최종적인 열사는 단번에 죽는 일이 불가능함을 증명하게 될 영원회귀의 반엔트로픽한 원리를 침식할 것이다. 154

[ ] 모든 이들은 죽음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하지만 죽음은 축제가 아니라...우리는 죽기를 배워야만 하며 도한 거기에는 임종을 맞은 이가 살아 있음에 대해 서약을 바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축제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의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생성, 니체 철학의 생성을 괴물 같은 불-‘기계‘-로 독해할 것을 제안한다. 160 불-기계는 그것을 요리하고 끓임에 다른 우연성을 긍정하는 기계로서, 결국 작고, 복수적인 조작들에 의해 해방된 막대한 힘들이다./삶 안에서의 단련이자 심지어 초월까지도 넘어서는 살아 있는 동물적 능력의 육성을 요구하는 죽음인 것이다. 161

[ ] 니체가 자신이야말로 역사 속 모든 이름임을 주장했을 때, 그는 어떤 거대하고,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정체성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갖는 통약 불가능성을 긍정하고 영겁적 생성의 거리에서 나온 역사를 확장하는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63 죽음이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자 모든 생성에 있어서 결코 끝나는 일 없이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자체 내에 주름져 있고 강도에 의해 접혀 있다. 죽음은 일어난다. 하지만 ‘생성‘에 따라서만 그러하다 165


4. 다윈에 반하는 니체


[ ] 니체가 다윈주의에 응하는 것이 생물학적 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다위주의로서의 사회 이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178

[ ] 힘에의 의지론은 적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니체에게 이는 삶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반동적인 개념이다. 삶의 능동적 개념은 오로지 그 강세가 적응이 아닌 자발성, 확장 그리고 새로운 방향과 해석을 제시하는 자기 형성적 힘들인 자기조직화가 우선에 놓일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는 삶의 과정에 있어서의 본질적 현상이 정확히 조형적이고, 형상을 창조해 내는 거대한 힘으로부터 작동하고 그 결과 외적 환경들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181 자연도태는 계통발생학적인 나무의 가지를 쳐내지만 성장을 위한 새로운 가지들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는 더 거대한 복잡성, 날카로운 차이화, 발전된 기관과 기능들의 우연성의 결과를 낳은 해석과 연결의 무의식적 과정에 따른 복잡한 진화 하에서의 능동성이다. 183

[ ] 니체가 생명의 목표와 목적이라는 관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목은 홉스, 스피노자, 애덤 스미스, 다윈류의 자기 보존인 반면, 이러한 극복의 결과인 보존을 동반한 힘을 단지 거두어들일 뿐인 것으로부터 빠져나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살이 있는 것들이 향유하는 것이다. 189 유기체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압도적이고 지배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응으로 재해석된 압도성과 지배성, 또한 과거의 의미와 목적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애매해지거나 완벽하게 제거된다. 191니체는 기계론적인 생리학과 생물학이 자연과학에 속한 투쟁을 정치화하며, 이는 결국 보다 상위의 힘으로서 지배하길 원하는 모든 것에 대립된다고 말한다....법을 도입한 사회는 힘의 결합체 간의 싸움에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일반화된 투쟁에 반하는 수단이자, 또한 마찬가지로 생명에 대해 적대적일 뿐 아니라 무로 통하는 비밀을 감춤으로써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것에 불과하다. 193

[ ] 인간이 번창해 온 것은 능동적 유형의 강함이 아니라 반동적 유형의 약함때문이라는 것이다..../생명에 대한 다윈-맬서스적인 관점의 승리가 이를 통해 설명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그러한 인간과 도덕성의 역사라는 것은 바로 역사와 문화의 수준에서 일 뿐이며..../우리가 그러한 자아라는 개졈을 가정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고립되고 자기 충족적인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연쇄 속에서 복잡한 결합에 따른 것이야만 한다는 것이다.194 니체는 누군가가 천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문화는 독특하고 특이한 존재들의 비예측적이고 계산 불가능한 섬광과도 같은 출현을 선화는 조건들 위에 있을 뿐이다. 196

[ ] 승리란 생명이 나약함의 지배하는 방식을 통한 그러한 유형의 인간을 보존함에 따르는 이해관계에 의거하여 설명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니체적인 정의의 범위 하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가치들에 대한 재평가의 관점으로부터 내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정의란 생명 그 자체를 최고로서 대표하는 것이자 선과 악이라는 협소한 관점들을 뛰어넘는 기능인 파노라마적 힘으로 파악된다. 199

[ ] 자연, 생명, 기술이라는 내재면 위에서는 더 이상 주체나 객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경계를 무너뜨려왔다. 참으로 본질적 사물은 더 이상 주체와 객체, 형상과 질료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힘, 밀도, 강도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이는 힘의 광대무변함이 제어되어 왔다는 기술, 배치 등의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초월하는 거대한 기계권에 도달해야만 하는 일이다. 231

[ ] 니체는 좋은 예술가는 힘이 넘치는 동물들처럼 넘치는 에너지로 꽉 찬 이들이라고 주장한다..../그것은 쾌락 가능한 상태가 획득되고 동물적인 잘 삶과 욕망이라는 섬세한 뉘앙스가 섞일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흥분을 경험하는 동물성의 부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지점이다/니체는 줄 수 없는 이들은 받을 수도 없다고 한다. 232, 233


 5. 바이로이드적 생명; 기계들, 기술들 그리고 진화에 관하여


[ ] 철학과 마찬가지로 생물학 분야는 태생적인 플라톤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지만 공생은 유전자들, 플라스미드들, 세포들, 유기체들 그리고 게놈드과 같은 유기적 단위들의 탈선화가 결코 절대화되거나 이상화되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의 한 양상에 관한 도구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순수하고 자율적인 존재들과 단위들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는데, 왜냐하면 혈통이 아닌 결연을 통해 이질적인 항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체들인 작동하는 배치들을 통해 기능한다. 배치들 하에서 유일한 단일체는 복수적인 기능을 하는 공생 혹은 공명인 것이다. 258 진화에서 나타나는 유일하게 정당한 되기/생성은 새로운 규모들과 새로운 왕국들을 가져다주는 공생들에 의해 탄생한다. 오로지 관통하고 자유롭게 생성하는 사물들만을 허용하는 절화만이 형성적 블록들에 의한 혈통적 진화와의 관계를 끊어 낸다. 절화는 혈통이나 유전의 질서에 입각한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잉여로서 사유된 것이다. 절화는 진정한 자유이며, 그 리좀은 계보학적인 수목과는 대립된다. 260

[ ] 초인간적 상상력은 기계들에 관한 인간중심적 편견들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 그것들에 대한 비인간적 선언이 쳐놓은 덫을 고안해 내는 방식들을 추구한다. 기계의 철학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더불어 출발하기 때문에,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소외를 통해서만 존쟇다. 추상기게는 자신의 무형식과 더불어 탈층화되고 탈영토화된다. ..지적인 특성은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료에 의해서, 형식에 의해서가 아닌 기능에 의해 작동한다. 266

[ ] 만일 살아있는 계들이 기계들이라면 결국 그것들은 관계들에 따라 이해될 필요가 있는 것이지 구성요소적인 부분들에 따라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관계들과 더불어 사고한 것이지, 구성요소들과 더불어 사고한 것은 아니다.

[ ] 우리는 기술-기게에 의해서가아니라 무엇이 기술적 요소들을 사용, 확장 그리고 이해하는가라고 하는 어떤 계기 하에서 규정된 사회적 기계에 의해 억압된다. 기술적 기계들은 경제적 범주가 아니라 항상 그것들과 구분되는 사회체 또는 사회적인 기계를 가르킨다. 280


6. 탈인간적 조건에 관한 시대적 고찰; 허무주의, 엔트로피 그리고 그 너머


[ ] 만일 인류가 역사의 목표와 목적을 생성해 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힘(자연)의 결과일 때에만 그러할 것이며, 인간적 의도나 기획에 의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바꿔 말해, 인류의 궁극적인 인간성은 비인간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298

[ ] 근대성의 상상력을 특징지어 온 것은 바로 생명의 힘에 대한 도덕화와 인간화이다. 300

[ ] 기술의 역설적인 조건 하에서 실로 변증법은 자신에게 만족해 왔으며....비판적 사고라는 꿈에서와 마찬가질 부정성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확실성인 총체성 하에서 취해진 것임을 인식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의 소외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투명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블랑쇼에 따르면 역사는 종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 질문 그리고 정식화가 이해를 멈추게 됨을 뜻한다./기술의 시간은 모든 것의 종말을 뜻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블랑쇼의 지적과 같이 모든 것의 종말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09 블랑쇼가 견지하는 바와 같이 이제 사유를 향한 모험은 근대기술의 도래와 같은 거대한 변화라는 결과로 드러나며, 철학자는 모호한 과학의 끔찍한 혼합, 교잡된 비전 그리고 의심스러운 신학을 조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허무주의를 탈인간적 조건의 피할 수 없는 특성으로 인식할 때라야 비로소 종말의 난국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중심주읮거인 자만심의 몰락한 자유 경험으로부터 출현하는 능력과 원천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이다.310

[ ] 인간적 가치들이란 인간이 자연과 외부세계를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 기획해 온 실용주의적 관점들의 결과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물들의 본질을 잘못 투사해 왔다는 것이다./인간에 관한 문제와 그것들의 아픈 상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은 인간의 비인간중심주의화된 미래의 비전으로서 초인overhuman을 상상하는 일이다. 311

[ ] 탈인간적 조건이란 인간적 상태의 초월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인 탈규범화의 내재적 과정에 있는 비목적론적인생성에 관련된다./ 인간성을 취하거나 유산하는 것이 아닌 비인간 및 탈인간과 필연저으로 묶여있는 미래를 니체가 말하는 중이다./이렇듯 깨지고 부서진 이행의 시간이라는 니체의 본질적 통찰이 지닌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냉혹함과 너무나도 두터운 현실들을 부수고 여는 힘을 갖춘 홈리스들인 것이다.315

[ ] 허무주의라는 사건의 출현과 더불어 현재는 부러진 시간, 쪼개진 시간이 되어 버렸으며, 이는 인간과 인간성의 미래에 관한 질문이 의혹에 처해 있다는 것이며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어져 함을 말한다. 315 허무주의는 그것 자체보다는 어떤 도래를 예고함으로써 늘 미래에 대해 말하며, 그러한 사건이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하다. 허무주의는 우리가 가정하는 모든 가치들과 나란히 내재해 온 필수적인 학습경험으로서 우리에게 도달한다. 따라서 허무주의가 그렇게 낯선 문제란 말인가? 니체는 근대의 가장 보편적인 신호는 인간이 터무니없는 범위의 것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 채로 위엄을 잃어 왔다.는 사실에 있다고 쓴다. 317

[ ] 역사에 관한 기계적인 철학은 남근중심주의적인 역사의 대상이자 목적인 인간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기계들이 역사를 만드는 인간과 대비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역사의 주체나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들이 인류의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발명의 시간을 말하기 위해서는 탈인간이 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잉여의 논리를 좇는다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여 선과 악을 뛰어넘어 도덕 외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모든 종류의 자연, 기계 그리고 기술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통제를 향한 편애를 동반한 목적론이라는 파우스트적인 개념화로부터, 기술의 생성의 동반한느 우리의 기계적 노예화와 그에 연루된 지각불가능성과 계산불가능성으로의 이동을 긍정하고 참여시킨다. 318, 319

[ ] 몸체가 없는 정보의 통치는 시간이라는 사건의 종말 이외의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철학의 과업은 단지 사건의 비사건성에 대한 공표를 산출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만일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향수와 한탄을 넘어 살고자 한 것이 있다면, 지금 그는 확실히 시간의 잔여를 위해 잃어버린 사건의 시간을 경건하게 애도함으로써 그러한 조건을 확립했을 것이다. 327리오타르의 허구적인 설명에 수반되는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생기론과 목적론을 자본의 탓으로 돌린다는 데에 있다. 331

[ ] 기계들 자체를 취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는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늘 기술적인 것만큼이 너무나도 사회적이라고 하는 장치와 배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특정한 에너지의 원천 및 동력원의 활용과 개발은 그러한 역사적 우연성과 속박이 결과로서, 이는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라는 사회적 기계의 결정요인이 핵심적이다. 333 발전에 관한 논의는 자연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정치에 관한 논의인 것이다. 334

[ ] 보드리야르, 자본은 사회적 관계를 지닌 악마적 마술로서 도덕성이라고 하는 어떤 탈역사적 기준이나 경제적인 합리성에 따라 고발당하지 않는, 바로 그러한 응답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도전한다. 자본은 영원한 반복이라고 하는 생산논리의 덫에 걸린 잠재적인 기계로 작동한다./마수미에 따르면 자본은 그 해위가 대상에 뿌리를 둔 것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내적 동력이라고 하는 미래적 과정에 생산물을 변형시킨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작동한다./포스트모던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의 삶은 잠재적인 양식과 변형적 경향이라는 견지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335 혹은 어떤 단계에서도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336 자본주의적 조건인 후자에 있어서 인간 존재는 더 이상 거대한 기계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노예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종속되고 중개된 노동자들이자 소비자들인 것이다. 337

[ ] 자본주의 체계의 진화는 그것이 불가피하게 일으키는 총체적인 통제가 착각이라는 기계적 분석을 통해 드러날 때 탈물화될 수 있다. 338 괴물의 손에 있는 불가피하고 비극적인 죽음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기계, 기계적으로 생성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됨을 긍정하는 문제가 된다. 340

[ ] 윌러스틴은 모순이 단순한 대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전이의 사례임을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340

[ ] 자본주의적 기게의 분열증적 논리 하에서 산출된 분자적 흐름들과 기계적인 변형들을 단번에 통제함으로써, 통화 공급을 단번에 조절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343

[ ] 시몽동은 살아있는 계들의 생성을 사유하는 방편으로서 준안정적인 평형상태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353

[ ] 우리에게 이 삶과 죽음의 잔혹극이 낳는 효과는 단순한 감염이 아니라 돌림병 사건과도 같은 잔혹함과 사악함이라고 하는 잠복해 있는 암류로의 외화를 향해 재촉하는 폭로인 것이다. 364


볕뉘

맑스는 알튀세르부터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유, 확장되어와서 이론의 지반을 풍요롭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드물다 싶었는데, 여러 철학의 흐름과 버무려져서 나왔다 싶다. 천천히 따라가면 의외로 벅차고 흘러내리거나 번지는 것이 있을 것 같다. 음미하는 독서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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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적 감정

 

 

  믿고 찾는 저자의 책이 나왔다. 급속한 행보에 놀라기도 했는데 말미, 일련의 지적 흐름를 조율하던 출판기획자의 죽음이 있었던 셈이다. 감정의 격동 3부작, 칸트가 선험성을 기반으로 이성의 역작을 만들었다면, 저자는 감정의 코드로 재구축하고 싶어했고 천여쪽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에도 분노, 혐오, 수치심 관련 저작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책의 모두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시작한다. 남성-이성-적대의 틀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감정-배려의 연주로 풀어나가는 전형의 시도로 모차르트의 작품을 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텍스트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민종교, 인간종교. 공적감정을 갖는 시민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꼼꼼이 짚어내고 있다. 그리고 남성-이성의 학문이 놓쳤던 여러 틀을 수선해내고 감정의 새끈으로 보수해서 튼튼한 동아줄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이러한 이론적 검토로 인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감정도 유아적인 발상에 다름아님을 동물과 인간의 감정의 대유에서 찾아내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펀홈, 당신엄마 맞아의 저자가 유아기의 애착과 과정을 다룬 도널드 위니캇의 연구에 많은 근거를 대고 있기도 하다. 시적 정의에서 시가 갖는 힘이 어떠한 것인지 미적 결정이 얼마나 다양한 시각을 확보하며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 말한다. 이 책에서도 비극과 희극, 그것이 공적감정을 위해 얼마나 절실할 것인지 잘 밝혀내고 있기도 하다.

 

 

 

 

 

 

 

 

 

 

 

2. 잡초 생태학

 

 

  저자의 책들을 동시에 보고 있다. 겹치기도 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약자들의 모습들이 감탄스럽게도 하다. 가늘고 길게, 추울 때 더 열심히... ...주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간간히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들. 그 방편의 진실의 방편이자 삶의 지혜라는 것. 새삼스럽지만 묶어서 분류하고 나누는 것이 때로는 좋지 않은 습관이란 것을, 세세히 살펴보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하는 것이 훨씬 풍요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을 풀들은 하나하나 말하고 있다.

 

 

 

 

 

 

 

 

 

 

 

 

 

 

 

3. 미셸 투르니에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116개의 닮음과 다름의 상상력. 상하 위아래 존재 비존재 신무신의 고립된 반대개념이 아니라 여기서 언급하는 반대 개념은 상반된 대립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는 신과 악마, 존재와 무, 선험과 경험, 포크와 스푼, 황소와 말, 시와 산문 등등 그는 산문의 묘미를 그가 이루지 못한 철학교수의 꿈이 곳곳에 스며있기도 하다. 벽으로 가득차 어쩌지 못하는 지금의 산과 같은 대립을 곁에 다른 개념들을 슬며시 집어넣으면서 풍부해지고 오묘해진다. 읽다보면 어느새 설득당하고 마는 마술의 힘과 같은 책이다. 어쩌면 우리의 사고습관과 행태가 극도로 단순해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철학을 알아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접근하기보다 삶의 여러 결을 느끼는 척도로 고민해보고 싶다면 어김없이 추천해주고 싶기도 하다. 

 

돈후안과 카사노바. 그는 이 짧은 산문에서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 대본 작성시 돈후안이 아니라 카사노바의 창작을 염두에 두었다고 흘린다.

 

 

 

 

 

 

 

 

 

 

 

 

 

4. 화영시경, 돈후안

 

 

 

 화영시경, 시와 그림글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독특한 장르의 책이다. 수필가인 저자는 시각이 불편한 분들을 함께 주석까지 읽는 음성도서 작업을 오랫동안 해오시고 영화도 같이 보기도 한다. 투르니에에서 점자책의 관능미대목이 나와 실제도 그런가 되물어봤다. 하지만 그것은 상상에 가까운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묘사라고 했다.

 

 서남유럽사에서는 돈후안이 자주 언급된다. 선을 넘나드는 그의 삶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지금여기를 너머서는 장치로서 드나들기도 한다. 그것은 지금여기의 삶이 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기 때문일 것이다. 까뮈도 그의 작품에서 돈후안이란 인물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삶은 외줄을 타려고도 하지 않고 올라서지도 않으려한다. 하물며 떨어지면 또 올라갈 수 있는 안전망을 확보해보려는 상상력 조차도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맴맴 도는 이상 예술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작가들은 여전히 변주하려 들 것이다. 삶과 사회가 바뀌는 것과 크게 상관?없이 그럴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 무엇을 찾는가? 찾아낸 것들은 어떻게 섞이는가? 섞인 것은 우리 일상의 온도를 올릴 수 있는가? 더구나 우리의 삶의 농도는 스미며 다르게 필 수 있을까?

 

 

 

 

 

 

 

 

 

 

 

 

5. 이원재, 존 러스킨

  임금이라는 것은 일을해야 받는다는 생각이 적절한가? 드로잉과 건축, 사회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경제에서 훌륭한 저작을 남겨놓았다. 제목처럼 일을 종료한 시점부근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일당을 주는 주인에게 하인들은 되묻는다. 합당하지 않다고...당신들에게 합당한 일당을 주었으므로 이것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억울해 할 일도 아니라고 말이다. 그는 일터를 빗대어 말하면 부자가 이익만 남기려고 하면, 이익을 남길 수 없는 것이 상식이라고 되짚는다.  사람들의 감정과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으면 그 조직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한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도 지금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며 경제를 위해서도 기본소득 개념을 말하고 있다한다. 의성의 한 곳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역이 일인당 천만원이상의 예산이 지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지금상황을 여러가지 각도로 되짚어볼 필요가 절실하다. 좋은 텍스트로 추천할 만하다. 나-우리의 평균적인 삶의 경제는 최소한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상위 20%가 1%를 탓하며 자신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입자의 비율이 7.*% 남짓하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토지와 인간을 발라낸 경제, 그 악마의 맷돌을 말하는 칼 폴라니, 러스킨을 적극 번역하여 알린 간디, 미국의 현실을 위의 취지에서 말하고 있는 20 대 80의 사회를 참조할 만하다.

 

 

 

 

 

 

 

 

 

 

 

 

 

 

6. 시민의 물리학 외(유상균, 야마모토 이시타가)

 

 

 

 

 

 

 

 

 

 

 

 

제도밖의 연구, 공부란 무엇일까. 편안하고 쉬운 자리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분야와 그 외부, 사회와 관계를 이어내는 작업. 본연의 물리학을 도외시 않으면서 삶을 접붙혀 나가는 노력들이 읽힌다. 과학의 탄생은 일본 전공투 의장을 하셨던 분이 연구소를 나와 학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십여년만에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서 발표한 작업 결과물이다. 뉴튼의 만유인력, 중력이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연금술, 마술...본원적으로는 자력에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7. 삶이 있는 도시디자인

 

 

 

 

 

 

 

 

 

 

 

 

 

 건축과 풍화의 저자 조성룡건축가의 작품인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를 보고 왔다. 여기에 있는 이 책들도 저자 강연에서 언질을 받은 책이다. 건축과 사회사를 읽고, 이어서 이렇게 읽고 보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사람을 이어주고 활기차게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지는 도시는 대표적인 것이 중세의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하고 보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기획의 요점들이 너무도 단순하고 쉽지만, 어느 새 우리 건축은 정작 중요한 것은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말미 책은 우리만의 독특함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한데 미술비평가의 우리 미에 대한 탐구들이 인상깊다 싶다. 좀더 세독을 해야 할 듯싶다.

 

 

8. 유라시아 견문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세계테마기행과 함께 보고 있다. 역사의 여러 지층들을 겹쳐놓아 흥미진진해진다. 더구나 막히는 부분은 그 방면의 권위자와 대담이 섞여있어 흥미롭다. 실크로드와 면화길... ...중국 신장과 위구르까지 찾고 보고 느끼는 맛이 새록새록 재미있다. 물론 이렇게 영상 리터러시는 대전아트시네마 주인장의 코멘트를 들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담당하는 이들은 가보지 않고도 훤히 아는 놀라움이 중복되었기도 하다.

 

 

 

9.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박홍규)

 

 

 

 

 

 

 

 

 

 

 

 

 

 

 

 

 

 

 

 

 

 

 

 

** 이 달의 베스트

 

 

 

 

 

 

 

 

 

 

 

 

 

 

  모임 가운데 베스트인 책

  <<어머니의 나라>>는 모계사회인 중국 모소족의 이야기이기기도 하고,  돈주앙이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책읽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OBS 취재 영상이 나와있기도 하다. 루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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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9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20-01-09 19:31   좋아요 0 | URL
아, 감사요. 수정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