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앓다 - 문학은 상처에서 출발하고 상처 위에 존재한다 민음의 비평 5
강유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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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 상처


타인을 앓다, 강유정, 민음사, 2016.


  타인을 앓는 일은, 불쑥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음에도 들이닥치는 감정의 풍랑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러 종내는 머리를 지배하기도 한다. 가령 외벽 작업 중 사망한 가장의 다섯 아이와 아내, 노모를 향한 모금 행동도 타인을 앓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고인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은 ‘정’이 많아 일컬어지는 한국인들에게는 더러 볼 수 있는 일인 듯하다. 어쨌든, 그렇다면 이처럼 타인을 앓는다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꽤나 중요한 힘이다.

  평론은 문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서 있다. 대체로 서두에 시작하는 온갖 학자들의 명언이나 문구들을 보면 늘 특정한 이의 이름과 문구가 인용되고 평론들 마다마다에 사용된다. 그러니, 문학을 읽는 방법이 학자나 타인의 문구를 통한 해설이 되어 평론은 문학을 매개로 한 비평가들의 세계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제법의 학자들을 평론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비평이 준 장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평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언어의 틀은, 오히려 소설 또는 시에 대한 이해를 저 멀리로 보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비평집을 찾아 읽은 것은 오로지 제목 [타인을 앓다] 때문이다.

  이 제목에서 전하는 바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라 여겼기에 어떤 학자들의 말들이 줄줄줄 이어진대도 견디어 볼 수 있다 생각했는데 굳이 견딜 필요가 없었다. 쉽고 평이하게 소설들을 비평하고 있어서 저자가 말하는 관점에 유의해서 소설을 생각해보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 비평집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문학과 사회비평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인지, 당대 소설의 주요 서사 소재지, 출판시장의 기획형 상품, 청소년 소설 장르란 무엇인지, S.F라는 장르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의견을 건넨다. 2부는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비평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확인할 수 있다.

  31편의 평론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바탕은 제목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소설을 읽었을 때 ‘좋다, 재미있다’를 적극적으로 말할 때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게 공감했을 때이다. 인물에 공감하지 못하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는 듯하다. 책제목이 [타인을 앓다]인 것에 대해 저자 강유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을 앓는 것, 문학을 읽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타인을 앓는 것, 깊은 공감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그게 바로 미련하지만 두터운 문학의 길일 것이다. 이해하고자 애쓰는 내가 먼 곳의 다른 고통과 소통하는 초월적 인식의 공간, 그게 바로 문학의 공간이다.


  문학의 공간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은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속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라 아무리 외면하고픈 사건의 연속일지라도 무엇 하나라도 이해의 고리를 발견하고픈 욕구가 있다. 저자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성적 도덕’이란 동시대성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근현대사의 흐름에 문학은 그 궤를 같이 했다. 그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알지 못했던 이들의 사연들을 재현하며 소설속 인물이나 그것을 읽는 독자 모두 상처를 치유하기를, 고통을 내 고통처럼 여기기를 바라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위한 소설은 기존과는 다른 플롯과 서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라는 특정한 소설적 주체가 아닌 불투명한 타인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공감하는 자가 타인을 앓는 윤리적 작가이고 시대의 보편적 감정을 목격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보편적 감정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필요하다. 저자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그냥”이라는 단어 사용과 인물이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인물의 직업도 명확하지 않다는 이 상황을 20대의 독특한 세대적 고민이거나 서사적 관점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소설에서는 부정과 무위와 냉소와 욕망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고 파악한다.

  최근의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관점이 없다는 것이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소설 속 인물들은 한국 전쟁과 절대적 가난, 1960년대 대학생들은 4·19 세대의 정서적 박탈감과 가난,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2000년대 이후의 20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면들을 발견할 수 없다. 마냥 사용되는 “그냥”과 “습관”이라는 방관의 태도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어떠한 ‘정신’ ‘상처’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작가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된다. 작가들에게 동시대의 상처없음이 결핍이 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타인을 공감하는 것,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상처’가 필요하니 말이다. 2000년대 이후의 동시대가 경험하는 상처의 부재가 작가들에게는 긍정의 요소가 될 수 없음이다.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2007년 젊은 작가 대회에서 한유주는 자기 세대의 특징으로 거대 담론, 대문자로 기록된 역사적 상처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공통의 상처가 없는 세대에게, 9·11 테러는 신선한 시적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중심의 상처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가벼움의 향락을 느낄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환부 없는 상처의 곤란을 증언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공통의 상처를 기억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세월호라는 상처, 그리고 촛불혁명이라는 벅찬 불빛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상처…. 그러니 이제 동시대가 함께 느끼는 상처를 가졌으니,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기대해도 좋으련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상처를 어떻게 풀어가는가는 작가의 역할이다. 거기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바탕이 흐른다면 읽는 독자는 더없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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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교양인, 2016-10-24.



  “아내 목 조른 남편 “징역 4년”… 납득 되나요?“

 기사를 보자 자동적으로 클릭한다. 몇몇 사건 판결을 두고 형량이 적당한지 설문조사한 결과에 관한 기사다. 대표적 보기 네 개를 본 순간, 제목에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

 ①홧김에 아내 목 조른 A씨(징역 4년)

 ②함께 도박하던 이를 흉기로 찌른 B씨(징역 7년)

 ③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한 C씨(징역 12년)

 ④한밤중 주거 침입 강도살인 D씨(징역 30년)


 ①번에 생략된 것은 “아내를 죽였다”, 첨가된 것은 “홧김에”.

  다른 사건들이 객관적인 사건을 서술했다면 ①번은 중요한 사항은 누락하고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되는 ‘홧김’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기사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이 사건에 대한 것은, “아내 목 졸라 살해한”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다른 사건은 제쳐두고 ①번에 눈이 갔는데, 물론 법정 판결이 4년인데 그 이유가 홧김이니까 저렇게 썼다고 본다. 그런데 홧김이 과연 이유인가, 홧김은 살인자의 주장이 아닌가. 이 사건을 지배하는 것이 “홧김에”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상습적인 구타와 폭력에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 사건의 경우 “계획적”이라는 말로 10년 이상이 확정된 사건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래, 그 순간엔 홧김일 수도 있겠다. 지극히 남편 혼자 주장하는 ‘홧김’. 그러나 ‘남편’ 자주, 상습적으로 ‘홧김’이 된다. 그렇다면 이 상습적인 ‘홧김’은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10대 딸 차로 치고, 별거 아내 강제 추행 `폭력남`...징역 3년”

  며칠 전 기사 때문에도 내재된 분노가 단지 이 폭력 남편때문만은 아님은 명백하다. 마침 그날의 기사는 딸을 성추행한 상담교사를 살해한 엄마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는 거였고, 그 살인은 계획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무엇보다 법이라는 제도가 있음에도 ‘사적 복수’를 행하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죄임을 명백히 했다. 

  그런데… 이 나라 법이 아내 폭력에 대해 안전망인 적이 있던가. 4년 넘게 별거한 아내도 이혼한 아내도 제 것인양 강간하고 죽일 권리를 행하는 이 사적인 화풀이의 행태는 수십년이 지나도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가. 법의 권위는, 아내 폭력 사건에 관해서는 제 스스로 차버려도 좋은가. 그것이 또다른 체제를 위함인가.

  여기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은 현실에서 늘상 경험하는 일로 분노와 학습된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또다시 현실을 깨우고, 이론적인 무장을 더해주는 책이다. 왜 ‘홧김’이라고 말하는지, 그럼에도 그것이 무방한 이유를 알려준다. 별거한 아내, 이혼한 아내에 대한 상습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를 해도 된다고 하는 남편의 이유를 알려준다.  

  놀라운 건, 이 책이 작가의 대학원 논문이었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책은 수십년 전의 사례라는 것이다. 사례자들이 30~40대 초반이 많았다. 남편의 나이도 그 또래라 생각하면 가해자들 역시 여전히 이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수십년 전의 그 가해자들이 오늘날 사건의 또다른 주인공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이 사례자들의 일들이 어제, 오늘,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주위를 둘러싼 공적 영역이나 사적 관계의 생각과 느낌들 모두가, 전혀, 옛날과 이어져 있듯이 그대로다. 페미니즘 때문에 여성인권이 높아졌느니 하며 불편한 시선을 던지다 못해 여혐이 확산되고 있는데, ‘아내’는 여성이 아닌가.

  아내 폭력이 당연시되는 여전한 현실을 접하며 작가는 이 아내 폭력의 문제는 당연하게도 사회가 부여하는 남편의 권리, 가부장제도가 당연시하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한다.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관점에서 아내 폭력의 문제도 해결하는 형태로 접근하기에 폭력의 피해자인 ‘아내’에 대한 것이 전혀 없다. 폭력의 희생자를 가해자의 집안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내는 이 관대한 법의 처사는 그 둘레에 “가부장제”가 내두르고 있는 힘이다. 가족유지. 왜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 가족은 누구를 위한 가족인지가 명백하다는 점, 오랜 동안 길들여진 이 가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타당함,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 교육을 위해서 참는다는 아내들의 말, 그러나 가정폭력이 교육에 나쁘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은 왜곡된 가족주의가 아내를 얼마나 억압하는가를 보여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해결 방안은 결코 ‘가족주의’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가족주의라는 개념에 ‘아내’의 인권은 없고 아내의 권리도 없고 오로지 타당하게 희생당할 요인들을 만들어 준다. 아주 기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공동체에는 권력 관계와 갈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가족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라고 인정한다면, 가족이라고 해서 권력 관계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은 다른 사회 조직도 마찬가지다. 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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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요즘 뉴스에 여성혐오범죄가 심심찮게 보도되더라고요. 그래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찾아 보고 있는데 왜 진작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모시빛님의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 지네요.

모시빛 2017-08-09 23:54   좋아요 0 | URL
정희진님의 글은 이론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쉽게 이해되는데 특히 이 책은 폭력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네요. 우리나라의 정서와 상황에서 얘기되니까 좋구요. 물론 읽다 보면 사례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화나긴 하지만요...
 


누가 유령소년을 만드는가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푸른숲, 2017.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치듯이 제목을 지나쳐가다 흠칫 놀랐지만 이내 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책을 쓴 이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책제목은 자극적이기도 하면서 보편적이다. 원제목이 Ghost Boy임을 생각하면 제목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얼마나 다른가. 이 책의 서술톤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담담하고 구성 자체도 기교없이 이어진다. 다만,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 있을 뿐이다. 실화의 주인공이 겪는 상황이 놀랍고 안타깝기에 그에 대한 연민과 응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눈에 띈 Ghost Boy가 이 책의 내용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단 한줄로 말하긴 너무 어렵지만 많은 시간이 건너뛴 채 세상에 눈 뜬 소년은 어느날 이유도 없이 쓰러져 세상과 단절된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열두살 소년,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퇴행성 신경증으로 사지가 마비된 채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에 의식이 깨어났다. 그리고 마틴의 의식은 열아홉살 무렵 완전히 살아난다.


나는 열여섯 살 무렵에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열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예전처럼 의식을 되찾은 듯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았고, 나의 진짜 인생을 박탈당했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이글루 안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정신이 들어 보니 빙하 속에 묻혀 있었다. 완전히 무덤 속이었다. p31 


  의식이 깨어나 있는 그 오랜 시간 마틴은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모습을 보았고 들었지만 다른 모든 이들은 마틴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를 돌봐준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움직임없는 미묘한 변화를 알지 못했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두고 반복된 싸움을 벌이는 부모님과 어머니의 자살이 있었다. 어머니가 지쳐 울며 내뱉은 말,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이 말은 마틴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희귀병이나 치매, 중증질환, 장애인 등등의 병을 가진 이를 간병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 절규일 것이다. 가족 안에 치명적인 병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은 가족이 해체되는 극강의 지름길이다. 또한 가족안에서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은, 대체로 어머니는 다른 삶은 포기한 채 헌신적인 노력으로 돌봄을 수행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며 현실적인 절망의 상태에 있다. 이때의 마틴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듣지 않아야 했을 이 말을, 마틴은 깨어난 의식으로 인해 듣고 만다. 그렇다. 듣는 마틴에게도 내뱉은 엄마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잊지 못할 고통이며 절망적인 삶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족이니까, 엄마니까 당연하다는 말로 내버려두기엔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이 세상의 엄마들은 살아내고 있다. 그 절망을 내뱉은 마틴의 엄마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또한 가족의 지지가 없다면 결코 마틴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그 절망과 지침을 이어받고 결코 마틴을 놓지 않으려 한 마틴의 아버지의 노력 역시도 잊을 수 없다. 마틴의 아버지는 직장일과 병행하며 마틴을 돌보며 마틴을 가족과 떨어지게 놔두지 않았다. 마틴이 새로운 삶을 사는데 있어 마틴을 놓지 않으려는 부모님의 강한 의지가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둘 것 같아? 아빠 여기 있다, 마틴. 내가 널 붙잡고 있어. 아무 일도 생기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나를 꽉 붙들고 있는 아빠의 팔과 나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아빠의 힘이 느껴진 순간, 나는 아빠의 사랑이 바다로부터 나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바다 위로 넘칠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p159 


  또한 마틴의 삶을 변하게 해준 이는 버나라는 요양시설 간병인이었다. 학대하고 방치하며 장애물, 당나귀, 쓰레기라고 취급하던 다른 간병인들과 달리 버나는 마틴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내 준 사람이다. 그렇게 마틴을 한 인간으로서 대하며 친구처럼 말을 건네며 돌봐준 버나로 인해 마틴의 의식이 깨어났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이후로 9년의 시간이었다.

  이제 마틴은 컴퓨터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며 제 의사를 조금씩, 더 많이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공포와 같은 삶에서 다른 이들에게 강연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기까지 당연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마틴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에 맞는 적극적 의지와 실천 노력이었다. 이 책은 그런 마틴의 힘겨운 싸움과 도전의 인생을 전하는 얘기다.


나는 무엇보다 누구든 나를 좀 바라봐주길 바랐다. 나를 본다면 내 얼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분명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엔 공포가 쓰여 있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저 유령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p217


  과거로 인해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마틴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간 동안의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견뎌낸 삶에 나태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게 되는 또하나의 지점이 있다. 그것은 돌봄인들의 얘기다. 마틴은 돌봄시설을 이용하는데 그곳의 간병인들의 행태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사실 충격을 받진 않았다. 역시 그렇군이라는 말이 내뱉어지는데, 직업윤리를 떠나서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회의가 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버나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마틴을 대하는 간병인들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이 그토록 처참한 수준이라는데 놀라고 만다. 결국 유령 소년을 만드는데 그들의 지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윤리의식이 유달리 낮은 것인지, 아니면 업무환경이 이들의 의식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인지…. 삶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사실 사무치도록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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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사카이 준코, 바다출판사, 2016.

 

  편견이 분명 있긴 하다. 일본 작가의 작품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도 아주 맘에 드는 작품도 없다는 것은 자꾸 나도 모르게 ‘일본풍’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일본풍이 뭔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나면 역시나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문체나 분위기가 유사한 것 같고 이상하게 밝고 경쾌함, 유머와 위트보다는 퇴폐미를 더 느끼게 된다. 시작이야 열린 자세로 읽지만 수렴되는 결과를 보건대, 나의 편견이 너무 깊숙한 건가. 내 취향에 맞는 책을 못 만난 건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제목에서 느낀 위트는 책을 읽어가면서 사라졌다. 심지어는 중년이 처음이 아닌 사람이 어딨어, 라는 회의적인 멘트로 마감을 하고 만다. 중년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 문제의식, 일본 사회의 관점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사라지고 딱히 통찰적이지 않은 반복된 수다를 들은 기분이 되었다.

  중년. 우리나라에서는 마흔의 나이라고 해야 하나. 마흔에 관한 흔들림과 반성과 의지와 성찰에 관한 글들이 원체 많으니 비교가 되는데, 그러고 보면 이미 마흔에 관한 사회학적인 통찰과 개인의 경험에 대한 글에 대해선 익숙했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바가 전혀 신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40대의 생각들.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중년이라는 자각을 강박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으로 그 주제를 다루다 보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열렬한 동조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이 냉소적이고 뜨뜨미지근한 반응을 얻자고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막상 나이가 들면 씁쓸함과 비애가 일상생활마다 마다 묻어나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읽다 보니 외모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비중이 상당히 많다. 그렇기에 너무 단순한 패턴으로 읽혀지나 보다. 개인의 방황과 고뇌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할지언정 낯섦을 느낄 터인데 그저 마흔의 나이는 이십대와는 다른 피부, 거죽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나열하며 아름다움이라는 외모로 인해 우울과 고뇌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자주 피력하니 동조가 잘 안된다. (아니, 이건 난 아직 거죽이 많이 변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인가…)

  인생 100세 시대는 70세 시대와는 다른 중년이란 나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당연, 공감한다. 하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중년기의 모습은 새로운 인식의 변화와는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몇 살이 되어도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인정할 수 없는 중년 여성들이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추함과 불안함. 그것은 90세 인생시대에 중년을 맞이한 버블 세대들이 내뿜는 새로운 분비물이다. 미마녀들은 그런 분비물 따위 본인한테는 없다는 듯 상쾌하게 웃고 있지만, 내 손끝에서는 그 끈적이고 진득한 분비물이 확실히 느껴진다. p15


  이 책은 중년의 경험담인데 중년 중에서도 아줌마라는 자각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가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작가 역시도 ‘난 아줌마와는 달라’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그래, 미혼이라고 하니 ‘아줌마’라고 불리는데 억울함이 있겠지.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도 제3의 성이라 불리는 ‘아줌마’라는 개념과 특성의 명명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에 반한 “미마녀”라는 명명이 생겨난 것일 게다.

  하긴 작가는 중년기 변화의 핵심을 지속적으로 외모의 변화로 바라보니까 해결책도 그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중년이라는 나이의 외모를 이십대와 비교하며 아줌마임을 거부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니까 추함과 불안함이 나온다는 것이 작가의 문제인식이니까. 시든, 노화가 진행되는 몸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중년기를 지나 노년기까지의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안정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이 책은 중년에 대한 어떤 통찰과 선언의 글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미마녀”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동정과 질투섞인 조롱같기도 하다.

  어중간한 나이. 그렇게 보이긴 한다. 청춘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어중간함. 다시 생각하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중년이라는 이미지를 한꺼번에 만들어내려는 시도만 없다면 지금의 중년은, 풍요로운 시대에 풍부한 교육과 다양한 취미를 경험한 세대답게 개개인 얼마나 다른 가치와 이미지를 창출하는 존재들인지. 적당히 안정적이고 적당히 건강한 상태로 여전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나이이기도 한. 그런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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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뜨거운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창비, 2009.


  분명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은 변했다. 민주주의가 실체가 잡히지 않은 채 피로 쟁취해야 하는 이미지에서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수준높은 우아함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를 다시 쓴다.

  그래서인지 민주주의의 국민 의사표현 방식으로으써 새롭게 ‘문자’에 대한 공방이 오가고 있다. 말끝마다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문자를 특정 집단의 테러로, 폭탄으로 규정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라 명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정보혁명 시대에 맞춘 새로운 의사표현 수단으로서 문자를 정의하며 당당하게 개인의 번호를 노출한 만큼 문제테러범, 폭탄투하범이라 규정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다.

  어쨌든 분노는 좋다. 분노는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되는 힘이다. 다만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발전은 깨어 있는 시민의 폭압적 권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국민들의 대응방식은 변화했고 여전히, 정치인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은 채다.

  100℃는 1987년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날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정신의 계승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평탄할 새가 없었다. 전쟁과 독재가 연이어지고 폭력과 폭압 속에서 짓눌리며 살아야 했다. 경제마저도 피폐한 상황에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또한 폭압아래 허물어졌다. 그 피폐한 삶에서도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으며 목숨과 민주화의 가치를 바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스러져갔고 빨갱이란 딱지를 붙이며 시뻘건 피를 빼내는 일이 당연한 듯 권력에 의해 휘둘려지던 그 때. 삶은 삶이 아니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댄 이야기만이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전해졌다. 그렇기에,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수많은 이들이 충격과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여전히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독재가 휘두르고 있었으니, 국민들이 분노의 함성을 일으키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고 깨어 있는 이들이었고 내 가족과 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영호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고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보이는 가족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대학생 영호의 이야기라기보다 영호의 어머니 이야기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어머니는 여러 의미로 정말 강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100℃는 그리고 있다. 아들의 학생운동에 반대하며 빨갱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서린 어머니가 진정, 민주화운동에 열성적이게 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강력하고 불합리한 억압이 만드는 것이다.

  눈물과 피와 목숨으로 이룬 민주주의가 어이없게도 무너지는, 독재로 회귀하는 현상을 경험한 이들의 분노와 허탈은 얼마나 강했을까. 그럼에도 촛불을 들어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꼭, 피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역사가 잘 이어져가기 위해선 또한 피흘렸던 그 시간들을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라에서 자행된 폭압적인 시위 진압방식을 보며 이 나라의 독재적이고 무식한 권력은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처럼 국민들이 폭탄 테러를 자행하지 않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이제까지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은 개인은 희생했지만 타인을 죽이면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야만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 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불을 더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100℃』가 보여주는 세계는 시민의 힘을 보여준다. 1980년, 1987년. 그리고 또한 무수한 나날들. 그리고 처음 촛불을 들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겨울부터의 경험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되고 엄숙한 분위기가 좀더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미되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의식으로 점점 변화되고 발전되어 간다. 영원히 ‘완성’ ‘완결’형이 아닌 만큼, 계속 지켜보고 관심을 쏟으며 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이 만화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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