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겨울 2024 소설 보다
성혜령.이주혜.이희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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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는 愚美[최애의 아이]


소설 보다 : 겨울 2024, 성혜령, 이주혜, 이희주, 문학과지성사, 2024-12-09.

 

 

  딱히 열광적으로 연예인의 팬이 된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한국 특성으로 대표되는 아이돌의 세계에 놀랄 따름이었다. 열광적이라고 한다면 관련된 콘텐츠를 보는것만이 아니라 굿즈라고 표현되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라거나 팬덤으로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이돌 팬덤은 경계 너머의 세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그 경계를 넘어가는데 뭔가 조건이 필요한 것 같다고(조건보다는 진입장벽인가), 그 조건이란 대표적으로 나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암튼.

아이돌 팬덤에 대한 관심과 인식 전환이 된 계기는 누가 뭐라 해도 12·3 불법계엄 이후 남태령의 밤일 것이다. 눈오는 날의 키세스 군단, 응원봉. 그리고 응원 문화의 선도적인 영향을 미치는 BTS 아미들까지.

  하지만 세상은 넓고 급변하며, 사람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어떤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 소설 보다 : 겨울 2024에 수록된 최애의 아이우미와 같은 아이돌 팬도 있으니까. ’팬덤의 분위기와 지향하는 바가 있을지언정 개개인의 팬의 마음은 또 다를 테니까.

예전에, 커다란 스케치북 한 면을 모두 연필로 검게 칠하고 가수의 이니셜대로 지우고 있더라는 어떤 학생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미는 고무지우개 위에 유리의 이니셜을 새기고 회의 시간에도 유리의 이름을 반복해서 적는 아이돌 유리의 팬이다. 애정하는 연예인에 대한 팬들의 행동은 소소하게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우미는 다르다. 하긴, 그런 이야기로 이루어진다면 소설이 나아가겠는가. ’우미의 다름‘. 우미는 미성년이 아니며, ’최애아이돌 유리의 팬으로서 다른 것을 꿈꾼다.

  최애 아이돌의 연인이 되는 것은 아이돌 팬이라면 한번쯤은 꿈꿨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돌의 연애나 결혼 기사가 파파라치든 공식적인 연예기사로 보도되면 그 아이돌의 생명력은 끝인 경우도 허다하다. 우미는 연인이라는 환상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최애 아이돌 유리의 아이를 갖는 것을 꿈꾸고, 이룬다.


그렇게 남자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던 순간이, 여자로 평가하는 눈빛과 마주치면 등골이 오싹해져 움츠리고 다녔던 자신의 이십대가 생각나 슬퍼졌다. 거기에 대한 반발로 미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인이 박여버린 높은 미적 기준이 거꾸로 자기 자신을 슬프게 했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 기회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진짜 비참하지? 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를 가졌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의 아이를.

 

  우미의 이 꿈이 가능한 현실, 에 놀랍지만 우미의 이러한 독백을 보건데, 우미가 아이돌 유리를 애정하고 유리의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애정이 아니라 에 대한 강박관념이 이루어낸 집착으로 보인다. 아름다움을 트로피처럼 갖추고 싶은 우미는 愚美가 아닐까. 아름다움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트로피처럼 갖고 싶은 우미가 있다면, 역시 그 욕망을 걸머쥐는 법을 아주 잘 아는 또다른 이들이 우미의 대척점에 있다. 욕망에 관한 탁월한 쟁취능력이 갖추어진 익숙한 그들-정치인이라거나 권력층이라 일컬어지는 혹은 남성이라 대변될 수 있는-, 어쩌면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환경, 그들만의 공고한 카르텔, 시스템.

 

우미와 같은 화이트칼라 계층에 소시오 패스 비중이 높은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나라 곳간 빼먹는 건 눈감아도 공병을 훔친 기초 수급자 노인은 실형을 주는 판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처음부터 최애아이돌에 대한 우미 행동의 의외성은 소설 마지막까지도 이어진다. 단순히, 요즘 넘쳐나는 한국형 아이돌 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이에 대한 어린 학생들의 행태를 다루는 건가 싶은 이야기는 현실과 판타지를 섞어 놓은 채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를 기겁하게 만든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황에 그저 놀라워하고만 있기에는 그저 개개인을 소시오 패스로 격앙하여 이야기하기에는 자기들만 인간인 줄 아는 역겨운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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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속삭임 위픽
예소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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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에서


소란한 속삭임, 예소연, 위즈덤하우스, 2025-02-26.

 

 

  인터넷 시대 별의별 사람의 이야기를 빠르게, 많이 접하게 된다. 세상에 그런 사람(사람이라고 칭하기보다는 인간이라 칭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한)을 봤다고? 그런 일을 겪었다고? 놀라면서 눈으로 훑게 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이 소설을 보면서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다가와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일이, 어떤 상황에 동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내게 그 일이 일어나는가 아닌가도 관건이지만 이처럼, 타인에게 쉬이 무엇을 함께 하자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특히나 소설 속의 이유를 들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문도 든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면 난 어떻게 행동하려나.

  마치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엮이지 않는 것이 최고의 하루하루를 보낸 일상인 것처럼 되어버린, 갈수록 세상에 대해 무감해지며 어떤 말도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것 같은 요즘의 삶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다시 연결을 꿈꾸고 있다. 타인을 힘들어하면서도 오히려 타인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것 때문일지도.

  그리하여 만들어진 연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속 해방클럽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속삭이는 모임의 구성원이다. 그러니까 비밀을 속삭이진 않으나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여야 하는’, ‘서로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이 주요 활동인 모임. 급작스럽게 지하철에서 만나 만들어진 이 모임. 그러면 왜 속삭이는가.


중요하지 않아도 속삭임으로써 중요해져요.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허투루 하는 말은 없는 거죠.

 

  속삭임의 힘은 있는 건가. 분명 모임의 몇몇은 속삭임이 주는 강력한 힘을 느끼고 믿는다.누군가를 설득하고 부드럽게 타이를 수 있는 힘.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할 수 있는 힘 같은 것.” 속삭이는 말의 힘을 믿으며 무엇이라도 속삭이지만 온갖 소리로 난무하는 세상에서 당연처럼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말이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그보다 오래 전부터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내려오고 있고 금값이 비싸지고 있지만 웬걸, 한국 사회에서는 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세상이긴 하다. 그리하여 모아와 시내 두 명의 회원만이 있는 모임에는 속삭임만이 아니라 소란함도 필요하다고 외치는 이가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50대 여성 '수자'. 이리하여 제목이 소란한 속삭임인가.

  궁극적으로 속삭이는 모임에서 이들은 무엇을 해방하고자 하는 걸까. 어떤 비밀을 속삭이고 싶은 건지, 결국 속삭이는 모임에 합류하게 된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인지, 당연하게도 각자가 가진 사연이 드러나고, 그 사연을 소란함으로 또는 속삭임으로 상쇄하고자 할 것이다. 다만, 홀로가 아닌 채로.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걸 모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아는 시내와 수자, 자신 모두 마음 깊숙이 어디 한 군데가 단단이 틀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서로를 감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어떤 모임이란 추구하는 목표가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나간다. 급작스럽게 만들어졌다 해도 그렇게 어느 한 모임이 만들어진다는 것, 그것은 소설에서 나타난 것처럼 서로가 가진 필요를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건 끼리끼리인가.

  짧은 소설 속에서 아래의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내게 남은 이유와 슬픔 그리고 못내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때문에. 내게도 소란한 소삭임이 필요할지는 아직은 모르겠다만, 명동역 4번 출구를 지날 때면 이 모임을 떠올려보기는 할 듯하다.

 

'저는 슬퍼요.'

'왜요?'

'분명히 이유를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이유를 잃어버리고 슬픔만 남았어요.'

모아가 시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저는 반대예요. 슬픔은 잃어버리고 이유만 남았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자꾸 이유들만 머리에 남아서 악에 받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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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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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다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2011.


  『필경사 바틀비』는 내가 가진 전형성을 발견하고 충격받은 책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처음 읽었던 때의 감정이 기억나 여전히 그 상태일까 다시 들쳐보는데 주저하게 된다. 고작 몇 년 사이 특별히 달라질리 없을 것이기에 이 책은 감동적인 책 카테고리가 아니라 미련이 남는 카테고리에 담겨있다. 그때의 감정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걸까, 작가의 의도나 평론가의 평과는 다른 내 느낌이 마치 정답을 비껴간 것 같아서일까, 생각하곤 한다.

  최근 문득문득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하기 싫어’라는 농담조의 말과는 확연히 다른 무게로 이 말을 거듭 떠올리는 요즘엔 바틀비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의 나는 화자의 감정에 더 이입했다. 화자인 변호사에 감정이입된 나는 당혹과 화가 온몸을 휘감을 때 알았다. 순종적이고 소극적인, 관습에 빗겨가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생각했음에도 바틀비가 행하는 저항에 이의와 의문을 가진 그런 직장인의 모습을 보았다.

  『필경사 바틀비』의 상징성을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차적인 것으로 책을 읽은 순간의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부분에서의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바틀비와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바틀비가 아니니 바틀비를 대면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감과 성실함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무엇에 대한’ 것인가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 같다. 바틀비에 대한, 바틀비가 하는 행동에 대한 규정 말이다. 

  바틀비는 월 스트리트의 변호사가 고용한 필경사이다. 화자인 ‘나’는 “야망없는 변호사 축에 속하며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하며” 신뢰있는 인물의 평을 빌려 자신을 “신중함과 체계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럼 바틀비는 어떤 사람인가.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온통 하얀 건물만이 가득한 월 스트리트 또한 필사하는 바틀비-묵묵하고 창백하고 기계적인-처럼 보인다. 바틀비 역시 동화되어 간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바틀비는 출근 사흘째에 필경사가 행하는 필사 검증업무를 거부한다. 필경사는 필사본의 정확도를 한 자 한 자 검증하며 서로 검증을 돕기도 하는데 이 업무 지시에 대해 바틀비는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나’의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도 필사 검증을 거부하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사무실을 떠나달라는 요구에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만 할 뿐이다. 바틀비는 “신사처럼 흐트러짐 없지만 주검 같은 느낌을 주는 확고하고 침착”하다. 휴일에도 사무실을 무단 점거·기거하며 오로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바틀비에게 ‘나’는 기묘함과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결국은 ‘니’가 자신의 사무실-바틀비가 기거하는, 바틀비는 두고-을 옮겨 이사하게 되지만 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그 저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성격이 비인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의 소극성이 전혀 무해하다면, 전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것을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추론하고자 애쓸 것이다.


  ‘나’는 바틀비의 행동을 ‘소극적인 저항’이라 표현했고 그래서인지 ‘저항’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가 많다. 그러면 바틀비는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가. 그건 ‘저항’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것이었다. ‘저항’이라고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바틀비 외침의 그 어정쩡함,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함. 의지와 의미를 품고서 하는 말인지 모를 태도에 마침내 택한 ‘아무것도’라는 것은 선택인가. 바틀비는 무언가를 선택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고용주의 필사 검증은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이자 “계약”에 의한 요구다. 필사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까지가 필사 업무 종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나도 마찬가지로- 바틀비에게 왜 그러느냐 묻게 된다. 왜? 그에 대한 답없이 바틀비는 필사만을 할 뿐이면서 기거할 명분도 없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사무실을 떠나는 것도 거부하고 먹는 것도 거부하고 구치소로 연행된다. 구치소에 연행되어 갈 때 바틀비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생기도 없고 동요도 없는 그 특유의 태도로 그들을 조용히 따랐다.”고 한다.

  저항은 전투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의미를 품고서 행하지 않은 것은 저항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전투적으로 나서 주는 사람을 원하고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바틀비의 행동이 ‘저항’이려면 바틀비의 행동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직장에서 동료가 벌이는 크고 작은 투쟁에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그의 일이 나의 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해와 지지가 형성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땅히 원하고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지지 또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내게 바틀비는 저항의 인물이기보다는 패배한 인간으로 보였다. 삭막한 자본주의 환경에 필사적으로 일만하다 병든 모습, 생각하는 것도 잃어버리고 기계화되고 피폐화된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틀비가 보여주는 것이라면.


날 때부터 그리고 운이 나빠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보면,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 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역시 1800년대의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월가나 지금이나 사회시스템은 그대로인 채 사람만이 병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틀비에겐 존재를 알아 달라는 외침이었는지 그러한 사회시스템 속에서 소멸해가고 싶은 외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틀비의 “선택하지 않음”에 더 집중하며 그것이 선택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결정은 선택이 아니라고 주장했건만 바틀비의 경우로 사례가 달라지자 생각했던 것이 흐릿해졌다. “계약”과 “규율”에 따른 행동질서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 속에 그 계약의 성립이 공정했는가를 잊어먹었다. 더 나아가 저항하는 바틀비의 태도에 대해 문제시하기까지 된다.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 바틀비의 외침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유를 이야기했다면 바틀비의 편에서 지지할 수 있었을까. 행동으로도 심적으로도 온전한 지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바틀비를 억압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게 익숙했던 그리고 성취하고팠던 다양한 가치들이 상충한다. 이해의 순간과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떠오른다. 다른 말은 없이 저 말만 남은 바틀비의 외침을 반복되이 떠올리다보니 고용주의 입장에서 바틀비를 이해하지 못함에 좀더 기울어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냥 스러져가는 한 인간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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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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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2019.


  「일의 기쁨과 슬픔」이 신인상 수상작으로 SNS에 오르내릴 때 내가 떠올린 건 알랭 드 보통이었다. 보통 책을 다시 읽어 볼까.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집중할 때면 으레 그래왔듯이 이 소설에 대해선 잠깐의 호기심 후 뒤로 물러났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에 기대었음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은 까닭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이 소설 하나를 읽게 되었는데 첫 느낌은 ‘이건 SF인가?’였다.

  당황한 건 이 소설에 대한 댓글 반응이었다. 소설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의 영역이라지만 지극히 ‘소설’로 본 나에 비해 댓글은 현실적인 공감 반응이 많았다. 웹에서 읽은 터라 댓글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실제로 같은 경험을 했다는 글을 보았을 때, 나는 내 경험과 상상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이 소설이 웹상에서 그토록 뜨거운 반응일 수 있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판교 테크노벨리 스타트업 회사가 배경이다. 중고 마켓 회사 사원 김안나는 우수 이용객인 아이디 거북이알이 매번 새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꺼림칙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거북이알을 만나게 된다. 거북이알은 인근 카드사 회사원으로 회장에게 찍혀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고 있었다. 거북이알의 생존법은 포인트로 물건을 구매해 다시 현금화하는 것이었다. 이게 소설의 줄거리인데 4차 산업혁명의 산업 현장에서 실제 이런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니 이 미치도록 리얼한 소설을 어찌 나는 SF쯤으로 생각하였나 싶다. 나는 이 공간이 낯설었다.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거북이알이 포인트로 월급을 받고 굴욕감에 밤을 지새운 것처럼 미칠 것 같이 잊고 싶은 현실감, 미세하게 구질구질한 속내들을 이 소설집은 담고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외에 8편이 담겨 있는데 하나같이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머릿속으로 드러내며 보이는 사람들의 속마음 같은 것이 펼쳐져 보인다고나 할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소설같다기보다 일상을 기록한 녹취록 같다.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그러나 내면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표현되는 것도 아닌 채 공간에 머물러 있는 어떤 불편한 심기들을 잘 뽑아내었다.


“그럼, 제니퍼부터 해볼까?”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박대식―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네 번째 아주머니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저희 집은 설거지 안 하셔도 돼요. 식기세척기가 있어서”라고 하자마다 대뜸 내 팔뚝을 가볍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새댁, 설거지는 손으로 뽀드득하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기계가 따라갈 수가 없어요.”  ― 「도움의 손길」


  4차를 지나 5차, 6차 끝없이 N차의 산업혁명이 이야기되는 시대. 인간의 패턴의 묘하게 다른 지점들. 그럼에도 직장인이라 이름 붙였을 때는 여전히 고수되는 기류. 이 미묘한 상황이 만들어낸 현실의 지점들이 잘 녹아 있다. 세상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고 이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 「잘 살겠습니다」


  이제 현재의 삶은 이런 형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묘하게 다른 공간의 질서다. 거시적 세계보다는 미시적 세계의 일들에 대한 포착, 그것을 더욱 중시하는 듯이 아니 그 무엇에도 절대성을 갖지 않는 이들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마냥 쭈구려 있지 않고 반사할 줄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해야 할까. 잘 살기 위한 세상의 이치는 가게 주인의 마음씨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특 에비동에 맞는 현금을 지급할 때에야 새우 몇 개를 더 먹는 것처럼 그런 사실을 깨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지적받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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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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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


  곧 오월이다. 며칠째 차고 강한 바람이 분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더니 참말로 잔인토록 바람만 분다. 꽃이 핀 것도 진 것도 모르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다. 멈춰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도 세상도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변해야 하는데 나는 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래로 돌아온’ 것도 아니니, 도대체 이건 뭔가.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


  디디하면 어느 소설 주인공이 떠오른다. dd하면 45도로 몸을 비튼 채 들어 올려 흔드는 양손 엄지손가락이 떠오른다. 나는 이 간극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는데 왜 디디인지 왜 d이고 dd인지, 이런 이름인지.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자꾸 선점해버린 디디가 생각나서, 그와 평행하게 dd에선 엄지 척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버스 밖으로 튕겨 나가버린 dd임에도 엄지 척,이라니. 이건 너무 어이없게 슬프지 않나.

  <디디의 우산>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 디디가 있고 분위기가 겹쳐 떠오르고 ‘혁명’도 기여한다. dd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놀라고 재밌어 했다. 그러나 혁명을 행하던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도 혁명을 말하며 행하며 웃지 않는다. 우리가 거쳐 온 세계는 좌절과 환멸 또한 가득 뿌려놓아서 혁명을 말하며 웃음짓기란 쉽지 않다. 혁명을 말할 때 생각할 때 웃음지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dd를 잃어버린 후의 d는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웃지 않는 모든 주인공의 재연 같다. d를 도려내어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보내버리면 그 시대와 분위기에 딱 맞을 것이다.

  그러나 d는 <디디의 우산>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dd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아 dd를 기억해야 한다. dd는 운동권도 아니고 단지 혁명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을 보며 혁명을 말했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기억하며 dd를 기억하는 d에겐 모든 혁명의 현장이 dd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기제가 된다. 소설은 절여진 배추처럼 곰삭아 있는 d가 다시 소금기를 털어 내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까. 그것은 ‘여소녀’를 통해 제 주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해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내는 이들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다. 하찮음에 하찮음에.


  d가 이렇게 광장에서 공명한 소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제목으로 이어져 좀더 구체화된다.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저항하는 것,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는 그나 그녀로 또는 익명으로 d나 dd가 아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형태가 등장한다. 이름을 가진 하나하나의 인물들로 말이다. 이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과 현상에 대해 책과 영화 등을 빌려 생각하고 생각하는 모습은 그저 관념으로 비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유가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이들 걸음 방향은 광장으로 향해 있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저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 문장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그리고, 그러나…. ‘혁명’속에 갇힌 것, 외면하는 것이 있음을 소설은 또한 보여주고 있다. 올바름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 침묵하거나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혁명’이란 나를 우리를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가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도 모든 이야기 끝에 남은 것 역시 이야기. 글을 쓰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도 ‘나’는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한편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한다. “말할 필요가 있다”고.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산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무섭도록 패배한 분위기와 운동권의 교조적인 문체가 후일담 문학이 가지는 특성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은 건가, 살아있음이 죄인듯 더 가라앉은 모습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것이더라도 나를 미워하는 것만으로 있던 모습은 달라져야 한다. <디디의 우산>은 과거에 이어 현재 진행이고 어쩜 황정은이기에 혁명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 여러 책들을 인용하며 사유하는 방식에서 언뜻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내리꽂히는 연설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의 갈래 속에서 확실한 나의 신념을 세워가기 위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올바름을 지기기 위해 행했던 ‘혁명’과 그 과정은 ‘혁명’이라는 단어에 무게감을 지우므로 어렵고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겪어왔던 여러 사건을 통해 혁명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묵자(墨字)의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묵자의 세계관을 지닌 이들에게 세상에 살아남은 자가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혁명이 도래했다.” 언제나 말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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