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탱크 데이[탱크]


탱크, 김희재, 한겨레출판, 2023-07-25.

 


  탱크가 핫하기에.

  이 소설은 2023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덕분에 아니 때문에, 이 책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 이 책에서 느꼈던 그 이미지에는 스타벅스가 일으킨 탱크 데이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탱크 텀블러를 확장하면 소설 속 탱크가 되려나.

 

  소설 속 탱크는 전투용 차가 아니라 컨테이너. 5평 정도되는 텅 빈 기도실이다. 흔히 이러한 기도가 먹히는 곳이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듯 탱크 또한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마을 야산에 놓인 밀폐된 공간이다. 그냥 놓인 빈 공간이 아니라, ‘자율적 기도 시스템으로 홍보되고 커뮤니티에서 예약제로 운영되고 돈도 받는 곳이다. 마케팅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상업시설 같다. 최초의 탱크 설립자 루벤에게 사사 받아 탱크의 시대를 창립한 이는 황영경이라는데, 루벤의 이름은 종교 색채가 강하고, 이런 설립자 운운은 사이비냄새를 열렬하게 풍기기도 한다.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빈 컨테이너를 기도 공간이라며 운영하는데 왜 사람들은 종교 공간이나 시설이 아닌 이 탱크를 찾는가. , 비종교인도 있을 테니……. 그것도 그렇지만 탱크에서 기도하면 원하는 미래가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그러한 형태로 이 공간은 홍보되었다. 근데, 바로 이런 이유가 사이비의 전형 아니던가.

  물론 소설에선 탱크를 이렇게 말한다. “뿌리 없는, 종교도 아니고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도 아니고 딱히 자기계발도 아닌, 그야말로 뭣도 아닌 것이라고. 하지만 설립자 루벤은 주술처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그 공간을 믿는 순간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텅 빈 공간에서 기도를 하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죠.

 

  어쩌면 너무 뻔한 말. 그리하여 사람을 현혹하는 말. 이미 저러한 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현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탱크 데이라는 날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이미 조롱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홀린 듯이 모여드는 이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 아닐까. 마음껏 욕설과 조롱을 펼칠 공간이 있다는 것, 허락이듯 구원이듯 그것을 허용하는 공간이 주어졌으니, 주저없이! 뭔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신성한’ ‘영험한곳으로 홍보되는 탱크를 찾는 사람들의 면면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그 삶에서 어려움외로움불편함슬픔등등을 겪은 이들이 찾을 것이라는 걸. 이들이 하는 기도의 내용은 욕망의 성취 혹은 결핍의 채움, 그리고 고통의 치유. 공간이 주는 상징에 의미의지를 더해 사람들은 제 결핍과 욕망을 내어놓는다. 어쩌면 자기성찰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쏟아내고 버리고 싶은 공간으로서 사람들이 탱크를 선택했다. 어떤 이는 실제 종교시설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심리상담사를 찾거나 병원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점집을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친구나 가족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을 것이다.

  ‘탱크 데이에 이 책이 떠오른 걸 보면, 제목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사이비 종교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로 탱크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탱크를 찾은 이들 중 왜 둡둡은 닉네임으로 나오는지, 둡둡은 죽는지, 성정체성은 어떤 경우라도 해결되지 못할 문제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지만, 믿음과 신념에 관한 문제 이 부분이 강한 건 여전하다. 그럴 것이라 예상한 듯 작가는 한국에 탱크의 시대를 만든 황영경이 손부경에게 하는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니라 탱크를 믿는다고.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잘못된 숭배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이야. 너는 언젠가 사람들이 탱크를 신으로 모시게 될 거라고 했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탱크 안에 가만히 앉아 억만장자가 되게 해달라고 비는 신자들만 남을 수도 있다고 했어. 그때 난 네가 나를 믿지 않는 것만큼이나 기도하는 이들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너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 그런데 부경아, 그거 아니. 그렇게 사람을 믿지 않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라는 거. 너는 삶을 방어하듯 살지. 늘 최악의 것을 먼저 상상하고 그래야 최악의 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믿지.

 

  무엇이든 결국 선택한 자의 몫이라 이야기한다. ‘탱크또한 그러한 것이라면, 컨테이너 탱크는 계속 이어질까. 적어도 탱크를 찾는 이들이 저마다의 사연들로 희망을 꿈꾸기도 하며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기 위한 믿음을 품는 곳이라고 한다면 탱크 데이 스타벅스는 어떤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적어도 문화를 파는 공간이라는 스타벅스에 맞게 어떤 문화든 파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겠다. 저렴하고 몰염치한 문화도 수용되는 곳. 그것을 부추기는 곳이 한국형 스타벅스라는 것. 권력을 향한 풍자도 아니고 5.18이나 민주적 가치나 활동, 참혹한 참사에 대한 조롱을 당연시하는 마케팅. 그러한 행태가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이루어졌다는 것도 결재라인을 거치는 동안 전혀 걸러지지도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도대체 그 공간은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이런 일들은 왜 이렇게 반복되는지, 이러한 행태를 해도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고 제미를 느끼고 나아가 돈까지 번다니, 그치지 않을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소설 속 탱크가 우후죽순 늘어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탱크 데이에 몰려드는 무리들이 있는 것처럼, 그러한 행태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이들의 지속된 신념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지 탱크에 가두어 그들의 내면의 소리가 무엇을 뱉어내는지 듣고 싶, 아니 듣고 싶지는 않다. 뻔한 말같지 않은 말이 난립할 테니까.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는 그저 긍정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조금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더라도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한 고개를 힘겹게 넘었다 싶어 숨을 돌릴라 치면 무섭게 되돌아가는 어떤 힘이 있는 듯, 계속 제자리를 맴돌게 하는 나라다.

  여러 사건들로 단련된 민주시민들이 탱크를 뒤집고 단도리를 하는데도 조금만 숨을 돌리면 되돌아가고 무수한 탱크 데이가 생겨나 회의가 들라치면, 이처럼 불매운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을 방어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수용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사의 정원바우어새


소설 보다 : 2025, 강보라, 성해나, 윤단, 문학과지성사, 2025-03-14.

 

 

  감사의 정원’. 실시간 검색어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바우어의 정원. 바우어의 정원은 따스하고 나른한 봄날의 정원을 떠오르게 했다. 모네가 그린 그림같은 프로방스의 어느 정원의 풍경을 떠올렸는데, 책을 읽고 각인된 건 새틴 바우어새였다.


  정원에서 연상된 기억으로 감사의 정원기사를 클릭했다가 다시 한번 이 새대가리를 떠올리는 아이러니. 새틴 바우어새(Satin Bowerbird)라는 이름은 (쓸데없이 정장을 갖춘) 젠틀한 새를 연상시킨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섬에서 서식하고 우리나라말로는 정자새라고 한다는데 이 새의 특징이 정원(Bower, 亭子)’을 만들기 때문이다.

  암컷새에게 구애하기 위해 수컷새가 타고난 외관을 가지고 있다거나 탁월한 기술을 발휘한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새틴 바우어새가 가진 기술은 집짓기로 한국 결혼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기술이다. 바우어새가 짓는 집은 새들이 일반적으로 짓는 둥지와 달리 크고 화려하고 정교하다. 집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란색 물건들로 정원을 꾸민다. 파란색 물건은 꽃이며 열매며 깃털이며 다른 종의 사체 등 자연에서 얻은 것 외에 인간이 만든 파란 플라스틱 종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바우어새의 종은 다양하여 파란 물건이 아니라 녹색이나 빨간색 등을 사용한다거나 집을 꾸미는 방식과 형태 또한 다양하다). 가히 탁월한 건축가요 인테리어 능력자라 할 수 있다.


[EBS 다큐프라임:천국의 새 2- 너에게 정원을 바친다]

 

  바우어새는 거대한 집을 짓고 갖가지 파란 것들로 장식하고 나면 온갖 기교를 부려 암컷에게 구애한다. 그러나, 짝짓기가 끝나면 암컷을 쪼며 괴롭히고 결국 내쫓는데 쫓겨난 암컷이 혼자 새끼를 기르든 말든 관심이 없다. 이미 짝짓기를 끝낸 후부터 새로운 암컷을 찾을 결심을 하고 제가 그토록 구애하며 매달린 암컷을 내쫓은 거니까. 이 바우어새는 그렇단다.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KBS동물티비 : 애니멀포유 animal4u_새틴바우어새의 비밀의 정원]


  그렇다. 나는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상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은기괴한 바우어의 정원이 된 광화문 광장을 본다. 마치 수컷 새틴 바우어새가 지어놓은 바우어를 보는 기분이랄까. 무엇을 위한 구애인지 누구를 위한 구애인지 구애 자체에 매몰되어 버린, 어떤 종. 감사의 정원엔 6.25 참전국들의 공을 기리기 위한 석재 조형물이 늘어서 있다. ‘감사의 빛이라는데 기사에 나타난 대로 받들어 총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조형물. ‘감사의 빛인지 감사의 빚인지 감사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이 조형물과 정원은 새틴 바우어새가 매몰되어 지은 바우어 같지 않은가!


마지막에 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제가 겪은 건 유산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출산이라고. 자기가 유학한 프랑스에서는 다들 그렇게 표현한다고요. 제가 어리둥절해하니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데, 오디션 끝나고 그 몸짓이 계속 떠오르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왜 뒤늦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지…… 왜 자꾸 뭔가를 헐값에 팔아넘긴 기분이 드는 건지……

 

  받들어 총. 우리가 기억해야 할 6.25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 마땅히 해야 할 감사가 왜곡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왜 자꾸……. 암컷 바우어에게 수컷 바우어가 지은 그 공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의 공간이자 범죄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여전하다. 어떤 이들의 결집은 억지스러운 말과 타인을 향한 비난과 험한 말을 쏟아붓는 것, 총칼을 받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지원하고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바래서는 안 될 텐데

 

혼모노, 성해나, 창비, 2025-03-28.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혼모노 열풍이 조금 비껴간 시점이었다. 난 소설보다는 외적인 부분에 더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여전히 이 책의 인기는 높은지 알라딘 서점을 클릭하자마자 40만부 기념 양장판 출간 소식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전 책 표지의 빨간 사과는 핑크빛이 감도는 사과로 바뀌었다. 사과, 그래 사과가 문제인가. 뜬금 사과의 색이 저렇게 옅어지면 안되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학습된 힘인지 DNA에 새겨진 탓인지 일본스러운것들에 대해선 기껍거나 선뜻 순순하게 몸과 마음이 나가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그럼에도혼모노에는 일곱 편의 단편 중 표제작인혼모노가 소설에서 연상되는 색채와 그 제목으로 인해 책을 덮고 나서도 기억에 가장 남는 작품이긴 했다.

  그리고 혼모노 속 역 근처 버거집을 지나다 질겁한다. 앞집 신애기가 창가 자리에 앉아 버거를 먹고 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어떤 날의 롯데리아보살집이 계속 머리를 점령했다. 그날의 일들은 지리멸렬하고 조각조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영원히 조각만 드러나는 건 아닌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멍해질 때가 있다. 정말 그 일이 일어났나, 내가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다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거나 덮이는 것은 아닌가 싶은 날들이 흘러간다. 그러다 또 한번씩 터져 나오는 조각들에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화딱지가 쌓이기만 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소설 속 문장처럼.


지금 나를 향해 조소하는 것이 할멈인지 저 애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슴속에서 불길이 일렁인다.

 

  굳이 버거집 풍경을 상상하면 이런 코미디가 있을까 싶은데, 혼모노를 보면서도 그저 코미디 같기만 했고 무당 문수를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하나,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이라거나 능력을 벗어난 것을 취하기 위해 잘못된 방식으로 행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그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작두에 베여 피를 흘리면서도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자신에게 도취되고 있는 박수무당 문수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해 한동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이미 애매한 형태로 바라보게 된 것을.

  영험한 신이 떠나가 버린 무속인은 무속인인가. 박수무당 문수가 그냥 문수가 아니라 직업인 박수무당이라면 현재의 문수를 가여워할지언정 문수무당으로 찾을 일도 박수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당이라는 역할을 맡은 문수의 역할은 끝이다. 그러나 문수는 스스로의 위치를 재정의한다. 미친 듯이 작두를 타며 자신에게 도취된 문수여, 왜 이전에는 그러하지 못했는가. 이것을 자각이라고 해야 할지, 광기라고 해야 할지 문수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어느 쪽으로 하고 싶은지 나 또한 어정쩡하다. 다만, 생각보다 벅찬 환희도 없고 문수에 대한 애정도 생기지 않는 건 분명하다.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까지도 감정의 파고는 매우 덤덤하다.

  이미, 12.3일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련의 상황들에 대입되었기에 무속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없는 자의 망나니같은 마지막 몸짓, 자의식 과잉의 몸짓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장삼이 붉게 젖어든다. 무령을 흔든다. 잘랑거리는 무령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가볍고도 묵직하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작두에서 내려오지 않던 신애기가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그애는 바닥에 주저앉아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황보와 그의 가족도 기도를 멈추고 나를 올려본다. 할멈도 이 장관을 다 지켜보고 있겠지.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나야말로 존나 흉내만 내는 놈’, 아니 존나 흉내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놈에 대해 조소하고 싶은데 실제 겪어보면 웃음조차 나오지 않던 시절이 생각나 웃지도 못했다. 이제껏 가만히 있다 무당이라는 역할 측면에서 신기가 없는 문수가 신애기에게 경쟁의식과 질투를 느끼면서 비로소 무언가를 한다는 건 그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 무언가를 어떤 형태로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니. ‘진짜가 된다는 건 뭐지. 어떻게 해야 진짜가 되는 것인지, ‘진짜는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간혹 어떤 이의 처절한 몸부림은 연민보다도 환멸을 더 느끼게 한다. 내게 박수무당문수는 환멸이었을까.

  얼른 환멸을 끝내고 싶다. 마음 속에 지속적인 환멸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한 일 아닌가. 내가 무엇을 했다고. 그리하여 누가 만들어낸 이 환멸이 얼른 명징하게 해소될 수 있기 위해선 여전히 지지부진하게 흐르고 있는 그날의 진실이 명확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그 사실, 진실을 드러내는데 문수처럼 작두 위에서 버둥거리는 관련 인물들이 너무나 많아 이들이 흘리는 저 가짜 피와 광기가 그들로 인해 피눈물 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 무엇도 아닌 양 만들어버리려는 것이 단순히 화가 난다는 말로 멈춰지지 않는다. 꽃이 피고 햇살은 따스하고 하늘은 맑다고 그날이 그 일들이 모두 빛바래지면 안되는데……. 빨간색이 분홍빛으로 변한 표지 혼모노를 보며 진짜진짜 그 생각만이 가득해지는 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친다! 받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이순영 (옮긴이), 문예출판사, 2024-10-15.


 

대체로 책을 읽고 나면 줄거리나 주인공 이름은 생각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더구나 톨스토이의 책이라면 더더욱 생각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이던가, 누군가 이 책을 이야기할 때,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라, 바보 이반이 있었는데, 이반이 무슨 일을 했더라, 왜 바보라고 했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거였지? 책은 읽었지만 전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대표적인 책이 되어버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을 텐데 왜 암전인 건가. 그때에는 이래서 독서를 한 후 기록을 해두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만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여전히 제목만 생각나며 내용이 가물가물한 이 책을 꺼내 들고 통째로 사라진 기억을 찾아 나섰다. 어라, 바보 이반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를 찾게 되었는데 그건 아마도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방관적, 방어적이었던 내 감정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 이런 형태의 이야기를 쉽게 수용하지 않았던 건 예전에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표제작으로 단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단편 전체 기독교적 사상을 핵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이 문제다. ‘기독교적 사상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신을 염려하고 돌봄으로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직 사랑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살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언제부턴가 종교, 특히 기독교사상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와닿지 않는다. 정확히는 보편적인 진리를 기독교의 형식으로 전달하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깨달음보다 반박이 뒤따르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라고 하면 너무하고, 기독교인이라고 해야 적확할까. 그러니까 기독교 사상을 수용하고 이를 실천한다는 기독교인기독교와 일치되게 생각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궁극이 사랑이라면 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사이비 종교라는 타이틀이 붙은 종교를 통으로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면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그에 대한 해석과 실천하는 이들의 정신세계와 그들만의 세상에 계속 받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책을 읽으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이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맞다.

  ‘JMS’ 같은 부류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으로 받들어지는 것도 한미정상회담전 한국의 기독교지도자라는 이들이 극우 커넥션을 찾아 벌인 행태도, 보석과 사치품을 들고서 청탁이며 부의 축재에 안달하느라 혐오를 널리 퍼뜨리는 행태들도 모두, ‘교인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다. 세계로까지 복음을 널리 떨치고 있는데, 바보 이반속 이반의 두 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탐욕스럽고 악랄한 그들이 부르짖을 ’, 그들이 전파하는 의 가르침이라니. 악은 꼼꼼하다고 하는데 더없이 성실하고 꼼꼼한 그들의 탐욕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한없이 베풀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성경에서 그들이 뽑아내는 메시지는 왜 그토록 저렴하고 더러울까. 촛불속 세상처럼, 여전히, .

 

지주가 농노를 지배하던 시절 이야기다. 지주들 가운데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과 하느님을 기억하면서 농노를 가엾게 여기는 지주들이 있는가 하면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악랄한 자들은 농노 출신 관리인, 말하자면 보잘것없는 출신으로 귀족 대열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들 때문에 농노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다. -촛불

 

  이런 자들 때문에 어떤 교인들은 계속 힘겨워지고 농도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한국에서도 제법 발생하는 사건인데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아래 사건을 보면서, 종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4세 아들 호수에 던진 엄마

https://mobile.newsis.com/view/NISX20250827_0003304704

 

  ‘바치겠습니다’, ‘바친다이런 단어에 정말 받친다’, 아니 빡친다려나. 권력을 가진 자, 기득권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인 앞에 이나 권력을 붙인 이들의 행태, 그들에게 세뇌받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바치는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정말 구원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 그건 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긴 하다. 한편으로는 톨스토이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 아닐진데, 왜 나는 이 책을 보면서도 늘 다른 부분에 더 꽂히는지 모르겠다. 마침 이 글을 읽을 시점에 나타난 일들이 강해서, 혹은 역시나 하고 터진 특정 종교들-그러나 특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아무튼 바친다’, ‘구원저러한 단어들에 연상되는 것이 그저 사랑이기만 하다면, 정말로 보편적 진리이면 좋으련만 태극기하면 어느새 태극기 부대를 떠올리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사랑이 있는 곳에 이 있을까.

 

하느님을 위해서지. 하느님이 생명을 주셨으니 마땅히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지. 하느님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운다면 더는 슬퍼하지 않게 될 걸세. 그리고 만사가 편안해질 거야.”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이 말은 체념, 포기, 전진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망각하라는, 이 말은 정녕 효과적인가. 효과적이란 건 또 뭔가. 말을 한 이의 위로라는 진심에 방점을 두고 의미는 관용어로 제쳐둔다고 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은 늘 헷갈릴 수밖에 없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조국의 시간을 통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시간어떻게 수용하고 활용하는가는 결국 위로받는 이가 해야 할 몫이라는 걸.

 

 

2021년 출간된 이 책은 2019년부터 벌어진 검찰개혁사태에 대한 기록, 사건일지다. ‘검찰개혁에 대해 광기처럼 쏟아졌던 기록보도를 대척점에 두고서 공권력의 가감없는 조작과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서술하지 못하는 언론의 행태를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개혁에 선봉에 선 이를 소멸시키면서 조작이 어떻게 가능한지,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세상에 일이 그것뿐인 양, 세상이 무너질 일인 것마냥 속보 전쟁을 벌이던 언론이 최근 사실진실에 여전히 입닥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해결의 첫 걸음은 사실에 대한 기록이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도 잊혀지기 전에 어떤 상황에 대한 것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기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될지라도, ‘거짓말왜곡’, ‘조작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는-누군가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쓸 거라는 것은 우선 제쳐두고- 무식한 이를 위해서.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의 흠결을 알면서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생환(生還), 그것이면 족했다.

 

  ‘공소권 없음으로 상황을 종결지으려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 구절은 떨리는 문장이 되었다. ‘죽지 않았다는 것. 죽을 수 없었다가 더 맞을 듯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은 이를 나로 대체한다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

 

수모와 모욕을 당한 후 기소가 이루어지고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지만, 김주대 시인이 저를 위해 쓰고 그린 문인화(文人畵) 속 글처럼,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공소권 없음을 바랐던 사람들의 은밀한 희망과 달리, 죽지는 않았습니다. 촛불시민 덕분입니다.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비운이지만, 지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저자는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었지만, 검찰의 조작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이 사건은 사면으로는 부족함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안을 판단하는데 있어 조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사람의 사실과 진실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를 볼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입만 나불대는 인간인가, 아닌가. 정녕 분노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는 제대로 아는 자인지, 내뱉는 정의가 얼마나 가소롭고 편협한지를. 또한 잘 몰라서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평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잘 몰라서가 아니라 잘 알아도조국뿐만 아니라 모든 사안에 대해 그렇게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들 마음 속에 정의라는 것은 비틀려 있거나 애당초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가 손해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래 문단처럼, 보수인사들의 부정과 비리에 그토록 관대한 것은, 결국 그들 자신과 같기 때문 아니려나.

 

    왜 언론은 보수인사들의 부정과 비리에 이토록 관대한가. 왜 진보인사는 배우자와 자녀는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털려가며조리돌림을 당하는가. 언론들이 보도 경쟁을 하며 전국적인 사안이 되는 경우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가릴 것 없이 다 함께 뛰어들 때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진영논리라는 개념조차 없어서 보수인사의 부정비리에는 쉽게 눈감고, 진보인사의 부정비리에는 사력을 다해 달려든다. 진보언론은 진보인사의 부정비리를 보수인사의 그것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진보인사의 부정비리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 합세해 금세 전국적 사안이 되지만, 보수인사의 그것은 묻혀버린다. 족보를 뒤지는 연좌제 성격의 추국행 보도는 보수언론의 전매특허이므로 보수인사에게는 적용될 일이 없다. 보수언론의 파렴치와 진보언론의 염치가 언론 보도 불균형의 주요 원인이다. 뻔뻔한 보수보다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진보가 때렸을 때의 타격 효능감도 더 클 것이다.˝

   

- 이재성, #그런데 윤석열 장모와 부인은?, 인권연대, 발자국통신(2020.5.28.)

 

  저자의 새로운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출발점에서 온전히 해결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하는 시간이 바로 조국의 시간아닌가 싶다. 2025년의 8.15는 새롭게 다가오는데 끔찍했던 최근 몇 년 동안이 쉬이 보상될 수는 없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