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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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주는 축복


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이 일주일째 지속되고 있다. 사망자와 피해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 어마가 카리브해 섬나라와 미국 플로리다에, 그 이전에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 텍사스에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는 아궁화산이 분화로 하루에도 천여 건의 화산 지진이 일어나 주민 12만명 이상이 대피 상태이기도 했다. 지난 몇 달간 허리케인과 지진 등 세계는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재해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속속 이어졌다.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10월에만도 총기난사 사건이 계속 발생해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라는 미국 라스베가스를 비롯해 스웨덴과 버지니아 주립대에서도 사건이 발생했다. 14일 소말리아 자살 폭탄테러는 수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계 곳곳에서 각종 테러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뉴스는 끊임없이 세계에서 발생한 재난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온갖 사건 속에서 ‘재난’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최악의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보인 행동을 조사하고 해석한 책이다. 100년이란 시간 동안 일어난 재난, 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분명 다르지만 그들의 행동에는 분명 공통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 점에 주목한다. 관점은 재난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 휴머니즘 관점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주제를 리베카 솔닛은 서론에 명시한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에 훌륭하게 대처한 이야기를 다루며, 그러한 대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룬다. 지금은 널리 이야기되고 있지 않지만, 이 주제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주제다.


  수많은 재난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일 또한 허다했다. 정신의학은 재난의 영향을 트라우마로 일컬으며 약한 인간을 가리키고, 재난 영화는 재난에 직면해 흥분하고 광폭한 모습의 인간을 주로 묘사한다. 하지만 재난 연구를 통해 리베카 솔닛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인간본성이 있으며 두드러진 본성은 “회복력과 임기응변 능력, 관대함, 동정심, 용기 같은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주로 조사한 대표적인 다섯 가지의 재난을 보면 재난이 발생 후 권력자·지휘부는  재난에 처한 사람들을 ‘문제’로 규정하며 대응 방식을 편다. 곧 이들을 폭도로 간주하며 또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 가운데서도 점차 이를 이겨내고 무료급식소, 응급처치소를 세우는 등 다른 이를 돕고 재난을 복구하기 위한 즉각적인 활동을 한다. 이러한 이타주의의 사례는 언론에서도 자주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다. 폐허 속에서는 어김없이 평범한 “영웅”들이 발생하고 이들의 동기는 재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이타주의의 발현이다. 엄청난 재난을 겪은 후의 사람들은 단순히 서로를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좀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형태의 조직을 갖추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로써 다양한 형태의 운동조직이 갖추어지고 서로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른바 ‘강력한 시민사회’로의 성장이다.

  언제나 재난에는 보통의,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재난 극복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재난의 심각성을 부추기거나 특정한 이들을 문제시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프레임 전환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들은 연대의식보다 위기극복보다 그 상황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익,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인간에 기대어, 그들의 인간 본성의 순수성을 이타성을 믿으며 우리는 재난을 극복해 간다. 물론 소수 이기성을 보이는 사람들은 있을 지라도.


위계질서와 기존의 제도는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시민사회는 이타주의와 상호부조를 정서적으로 훌륭하게 입증할 뿐 아니라,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창조성과 자원을 실천적으로 동원하는 데에도 성공적이다. 대재난에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이런 분산된 권력구조가 적합하다. 재난이 엘리트들에게 위협적인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이 현장의 민중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이 꼼꼼하게 조사하고 재난을 경험한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러한 특징들을 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기댈 곳은 네 이웃들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인간의 선함에 이타성에 측은지심에 기대었다고 말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시민들의 연대의식, 공동체에 대해 “축제” 또는 “혁명”과 같다고 말한다. 재난이 주는 축제로 재난상황에서 제대로 된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조작을 일삼는 지도층이나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점이 있다. 체제의 변화, 이것이 바로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긴박한 순간들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할 수 있다. 첫째, 재난은 가능한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잠재되어 있던 것을 입증해 준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가진 회복력과 관용, 다른 종류의 사회를 즉석에서 꾸려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재난은 우리들 대부분이 연대와 참여와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을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 경이로운 기쁨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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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6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휴머니즘입니다. 재난속에서 피어나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연대와 관용, 그리고 인류애.

모시빛 2017-10-16 19:48   좋아요 0 | URL
넵. 동감입니다. 자발적 시민들의 연대로 상까지 받은 국민들이 있죠 ㅎㅎ
 


역사적 자존감


영초언니, 서명숙, 문학동네, 2017-05-18.


  영초언니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실존 인물 천영초의 생애가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저자의 이야기가 서사의 중심이었고 비중이 높았다. 짧은 등장에도 천영초라는 인물이 저자의 생애를 오롯이 관통한 중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천영초라는 인물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 감정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소설이라 생각한다면 가장 궁금한 사람이자 주요 인물이 천영초일 것이다. 천영초는 그런 캐릭일 듯했다. 실존인물들의 이름이 열거될 때마다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 시대의 등장인물들의 현재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놓여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멀찍이 보는 사람이 이런데 당사자들은 오죽하랴.

  제주도의 올레길을 만든 사람으로 먼저 알게 된 서명숙 이사장이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는다. 그 과거속에 함께 있던 사람들을 풀어놓는다. 천영초라는 인물이 그때를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떻게 살았는지는 단편적으로 드러나지만 현재의 모습이 맑음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느끼게 되는 비애가 크다. 한줄로 말한다면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란 서명숙이 뭍으로 넘어와 대학생이 되어 박정희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행동한 이야기다. 소설이나 다큐에서 다루 보았던 그 시대 ‘운동권’이라 불리는 대학생의 모습들이 드러난다. 유신정권이라는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제 성질을 휘둘렀던 독재자가 그 시대를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었으며 여전히 치워놓지 않은 개판이 곳곳에 박제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서명숙 이사장을 비롯해 영초언니와 그가 함께 한 가라열의 활동은 독재에 맞선 운동에서도 남성의 주변부, 보조자로서 한정된 여성이 아니라 운동가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천영초이다. 서명숙 이사장은 천영초는 ‘운동권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머릿속에 운동권 여성이라 하면 각인되는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를 천영초는 풍긴다. 외모상으로도 상당히 부드럽고 여리여리하며 빈곤한 모습이 아니다. 70년대, 80년대 폭압에 맞서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위해 삶을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 활동한 천영초는 자신들을 따르는 후배들을 물심양면으로 챙기며 운동의 리더로서 거침없다. 당연한듯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쫓기고 잡히고 고문당하고 수감된 이력의 소유자들.

  그시대 운동권으로 민주화를 부르짖고 외쳤던 그들이 이룩한 자유와 민주의 시대는 잠깐 반짝인듯했으나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이 현실이 얼마나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익히 아는 대로 민주화 운동을 하던 그들의 현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시민운동을 하거나 정치인이 되거나, 그 기억들을 안고서 버티지 못하여 스러져가거나. 

  어떤 이들은 그때의 민주화를 외치던 몸과 마음으로 다른 민주화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멋들어짐과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보다 많은 이들이 천영초의 삶처럼 생활의 변화를 겪고 있으리라 보인다. 경제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공황을 가득 안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회변화를 위해 그들이 쫓던 이상이 현실에 적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살이는 어떠했을까. 전력질주를 한 후 골인지점을 통과한 후 급격한 피로감이 생기듯 그들이 질주해온 운동의 결과가 바라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볼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그들의 역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독재 시절의 운동권이었던 이들의 현실 적응이 전화가 핸드폰으로 바뀌는 변화보다도 더 적응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운동권의 전설로 수많은 후배들을 아우르며 제 신념을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지켜간 사람의 모습이, 사회변화를 외치던 목소리로 독재타도를 외치던 목소리로 다단계 상품의 탁월함을 말하는 목소리로 바뀌는 그 간극이 왜 이리 아득한지. 젊은 날을 지배했던 신념, 그것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하고 투쟁했지만 천영초는 한 인간의 삶으로는 ‘불행’이라고 불릴만큼의 일들과 맞닥뜨린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생활고, 이혼과 이민, 목숨을 잃을 교통사고, 그로 인한 시력상실과 뇌손상. 유독 천영초의 생애는 비애로 일관된 듯하다.

  가장 행복했던 천영초의 시절은 투쟁하던 그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기억을 잃은 채 마른 몸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천영초의 모습을 생각하면 책의 저자 서명숙이 국정농단 최순실이 재판을 받으러 가며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라 소리친 것에 분노를 느꼈다는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시절 가라열 멤버이자 꾸준히 사회변혁 운동을 해온 혜자 언니 또한 독재자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순간 비참한 심경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잃어 가며 독재에 항거했건만 그 독재정권을 추억하며 향수하는 것에 모욕과 조롱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 심정 역시 너무도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 결과가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를 겪고 있는 지금 더더욱. 나또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이 결과를 두고도 여전히 상식도 정의도 없이 행동하는 이들로 인해 속이 파닥파닥해진다. 터져 나오는 뉴스는 모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싶은 것임에도 진저리쳐지는데, 그것은 박정희 시대를 겪고도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현실이 또다시 반복될 듯한 두려움, 기대가 희망적이지 않게 느껴짐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극기를 흔드는 1%가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평생 나에 대한 자존감을 갖고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저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답답해져, 행동을 취하는 일이 더뎌진다.

  한명의 박정희와 한명의 박정희 딸이 만든 수많은 영초언니들의 삶이 지금 재판을 지켜보고 있을 터이다. 그들이 또다시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기를.


나는 그날, 학내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이간질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던 경찰초소를 내 손으로 때려부순 날, 역사와 대중 앞에 스스로 떳떳해졌다. 이후 평생 나에 대한 자존감을 갖게 되었으므로, 이미 충분히, 평생 넘칠 만큼 보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그 어떤 형태의 보상도, 인정도 더는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나라 정부와 사법부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나와 같은 이를 ‘죄인’으로 낙인찍은 선고와 판결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만 하며 그에 대해 정당한 조치를 하고 역사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나의 유죄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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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5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5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금, 울었던가


아주, 조금 울었다 - 비로소 혼자가 된 시간, 

권미선, 허밍버드, 2017-07-15.


      아예 울지 않는다면 모를까.

  조금 운다는 건 힘들어져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렇다. 혼자 울 장소를 찾는 일도 어렵다. 울지 않아야 할 일을 찾는 것도 어렵다. 울자고 들면 한없이 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된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바빠서, 일까. 바빠서 울 틈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들었던가, 했던가. 울음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에 살고 있다는 건 시선이 직선이어서일지 모른다. 그러면 울 일도 없다가 더 적절한 말이 되려나. 울음을 우는 일보다 냉소나 분노하는 일이 더 잦아져간다.

  조금, 울었던가. 그래서 조금만 울 수밖에 없었던가. 안구건조증과 눈물 흘리는 일은 상관없는데도 눈물없음을 안구건조증 탓으로 돌리며 건조한 일상을 받아들인다. 사실은 우는 것은 하고픈 일이 아닌 것인지도.

  15년 꼬박 글을 써왔다는 라디오 작가의 에세이집은 내일로 가는 새벽녘, 덜컹거리는 창문이 전하는 바람과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같다. 운문 형태의 책은 그 여백을 감성으로 채운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도 내렸고 쌀쌀해지는데 감성을 함빡 머금어도 좋을 듯하다. 저자가 써내려간 다섯 장의 혼자가 된 시간의 이야기는 한번이라도 품었을 이야기라 공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연인과의 이별 후의 감정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별후의 감성이 책 전반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립고, 미안하고, 외롭고, 보고 싶은 날들의 이야기. 더불어 시를 쓰고 싶어지게 한다. 감성이란 온갖 건조함을 뚫을 수 있는 힘일 수 있겠다. 그것이 글이든, 글을 통한 지난날 회상이든 우리는 모두 삶에서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기에.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어.

엇비슷한 경험도 해 본 적이 없는 일들.

그래서 짐작은 하지만 완전히 공감할 수 없을 일들.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아플까, 느끼려고 노력할 뿐이지,

본인이 겪어 보기 전까지는 전혀, 똑같이 알 수 없는 일들.


우리는 우리가 겪어 본 만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슬퍼하게 되니까.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오래 같이 우는 사람은

아마도 비슷한 아픔이 있는 사람들일 거야.

- 오래 우는 사람

  

  그래서 오래 울 수 있을까. 비로소 지난 경험을 그 마음을 기억하며 여전히 사그라지지 못한 그 감정들을 다 뽑아내기 위해 새로 뜯은 휴지가 모자랄 정도로 울 수 있을까. 어느 것에도 무엇에도 무뎌져 내가 너무 악해졌나, 너무 신경질적이 되었나 생각지 않을 수 있도록 물기를 내뿜을 수 있을까. 밤이 지나 아침이면 지난밤의 글이 마음을 어지럽게, 쑥스럽게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모래시계는 마모되어 시간을 삐끗한다. 급격히 변해가는 세상에서 한번쯤 삐끗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일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로 인해 오는 힘겨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 더없이 마모되는 것이 사람들과 관계하는 일의 흔적이라는 것을, 시간의 마찰을 이겨내는 일이 살아감이라는 것을. 마냥 주절주절거리는 기분이 드는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다.


그거 마찰 때문이야.

모래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쳐서 깎인 거지.

시간이 갈수록 알갱이는 작아지고, 통로는 넓어지고,

그래서 빨리 떨어지는 거야.


난 모래시계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우리 인생의 시간들도

모래시계 속의 모래 알갱이 같다는 생각을 했지.

점점 빨리 떨어져 내리는 것 같거든.

-모래시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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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이 울지는 마세요...아주, 조금만 우세요.

모시빛 2017-10-15 23:50   좋아요 1 | URL
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지난밤 왜 그랬던가, 진짜 좀 울게 되네요 ㅎㅎㅎ

sprenown 2017-10-16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 울지는 마세요..한 방울만.ㅎㅎ, 힘찬 한주 되시길...
 


내 영혼의 장소


12.jpg RED BOOK - 나를 찾아 떠나는 영혼의 여행

칼 구스타프 융, 김세용 옮김, 부글북스, 2012년 05월 10일.


   『RED BOOK』은 융의 유작이다. 융이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려 묶은 이 책을 라틴어로 새로운 책이라는 뜻의 ‘Liber Novus’라 붙였다 한다.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졌고 오랜 시   간이 흘러 2001년에야 세상에 나왔고 2009년에 책으로 출   간되었다. 융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쓰기 시작해 융의 핵심적인 이론이 다 담겨있는 바다가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융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서라고 할 수 있는데 융이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무의식의 측면을 상징하는 그림이겠지만 그림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부족하게 이해되었지만, 색감을 비롯해 그림 자체는 잘 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복잡미묘한 세계 속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융이 펼쳐보이는 환상과 내면에 대한 무의식은 이해의 차원과 별개로 계속 끌림으로 이끈다. 좀더 명확히 이 아저씨...좀 끌린다. 아니, 그가 살고 있는 집이 더욱 끌린다. 살고 있는 집, 그가 작업하는 공간인 탑. 호숫가에 자리한 집, 미로같고 문명의 기구들을 들이지 않은 그 탑. 거기서 생활하는 그의 삶을 통째 훔치고 싶다.

  융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친구가 보덴호숫가에 성을 가지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때의 호숫가에서 놀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 호소의 광활함을 즐거움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호수 근처에 갈아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고 했다. 그 어린 날의 기억이, 그를 호숫가로 이끈 것일까. 이곳이 융이 말하는 장소일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영혼 안에 조용한 장소를 두고 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자명하고 쉽게 설명된다. 사람이 삶의 혼란에 직면하게 될 때 물러나고 싶어 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선 모든 것이 단순하고 명쾌하고, 목적도 분명하고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한 어느 분이 번역서를 출간하기로 하고 번역하면서 책 속에 나오는 Jung이라는 이 명칭을 계속 정이라고 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융님을 모르다니’하며 속으로 놀랬지만, Jung를 융으로 읽는다는 것 빼고 내가 융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었나. 거듭 책을 읽어도 융에 대해서 그의 꿈에 대해서 무의식에 대해서 이론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래도 이해가 되는 대로 또는 되지 않는 대로 문득 문득 융의 무의식의 세계에 빠지고 싶은 날들이 있다. 어쩜 내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우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내면에 있는 이 시대의 정신은 궁극적 의미의 위대함과 그 광대함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하지만 궁극적 의미의 사소함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깊은 곳의 정신이 이러한 오만을 정복했다. 나는 나의 내면에 있는 불멸성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궁극적 의미의 사소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사소함이 나의 내면을 온통 들쑤셔놓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영광스럽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곳의 정신의 집게가 나를 꼼짝 못하게 잡았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쓰디쓴 약을 삼켜야만 했다.


  융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며 ‘꿈’을 발견했다. 꿈에 관한 기억을 글로 적으며 정신, 영혼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펼친다. 영혼의 본질과 의식과 무의식, 신과 악과 남성성과 여성성 등 때로는 경구처럼 글들을 기록하고 있다. 융은 자유가 외면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내면을 탐구하며 영혼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은 자유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는 일이다. 융은 강력한 행동을 통해서 외적 자유를 성취할 수 있지만 내면적 자유를 창조하는 것은 상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융의 대표적인 개념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즉 우리의 내면엔 남성 속의 여성과 여성 속의 남성이 있기에 어느 한쪽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할 때에야 완전한 영혼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이 없다면, 생명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영원성이 다시 일어나면서 생명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존재를 즐기기 위해 당신은 죽음을 필요로 하고, 한계는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를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영혼이라거나 내면을 찾는다는 것은 재미있는 놀이처럼 때론 뜬금없는 놀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실체를 잡을 수 없는 이 영혼의 목소리를 쫓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꿈의 기록에서 비롯한 상징들을 당연한듯 수용하며 내면을 해석하게 되는 까닭은 무얼까. 자고나면 사라지는 것이 훨씬 많지만 더러 생생하게 기억되는 꿈, 그 이미지에서 내 영혼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밤이다.


부디, 생각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쾌락을 받아들이고 느끼길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고를 받아들이길. 그것이 곧 사람을 제 길로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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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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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문제


나쁜 페미니스트-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최근 상당히 의아함을 자아내는 두 일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갑작스레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실시간에 올랐다. 사람들이 이 단어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검색하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누군가 관련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얼마만큼 알까. 이때의 단어는 사전상의 의미일까, 인터넷에 회자되며 부정적 의미를 가득 담은 의미일까. 이런 궁금증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될 때마다 궁금해졌다.

  실시간 검색어는 한 연예인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 일과 관계가 있다. 누군가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놀랄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뜬금없는’ 선언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은 이 선언에서 중요한 요인은 아니라고 보았기에 나름 대단한 걸이란 생각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람의 언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담배피는 사진을 올리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기에 그 이유와 연관성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야 하는 성격”이라며 자신으로 인해 “페미니스트임을 당당히 밝히는 여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에선 사실, 경악했다. 논란이 일자 “'여성스럽게 입는다”, “남성적이게 운전을 한다”라는 말을 한 것과 페미니스트 발언에 대해 경솔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페미니즘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주창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부족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요즘 한창 떠들썩한 김광석 부인의 발언이다. “이런 나라에요? 여자를 보호하지 않는 나라입니까?” 흔히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대표가 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저런 ‘불리할 때만 여자냐’라는 말이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저 발언에 또한 경악했다.

  여성이며 페미니즘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페미니스트라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나로선 이로 인해 생겨날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염려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행동력, 실천력과 관계된다. 페미니즘 또한 하나의 운동이기에 이를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길을 가다 쓰러진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을 일으켜 줘야 할 텐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행동하지 못했다면 ‘길가다 다친 사람을 도와줬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적어도 내 부족을 자각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때론 소극적 저항에 머물며 스스로의 인식전환에만 만족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는 나와 같은 사람에겐 상당히 의미있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한때 ‘나쁜’을 붙여볼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뜬금없어 보이긴 할 것이고 어쩌면 “새삼스럽긴”이나 “당연한걸”이란 반응이 튀어나올 것도 같다.


나는 페미니즘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빈틈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나도 페미니즘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좋을 것을, 너무 이론에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이 뭐 별건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만큼 부담감이나 거부감없이 이 책은 읽힌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함께 서술되어 그의 경험을 함께 나누며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리고, 재미있다. 대체로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용어의 낯섦과 어려움이 가득하다는 걸 생각하면 몇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한 페미니즘 서적 중에서 이 책만큼 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외국인의 저서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이론의 언어가 아니라 공감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된다. 좀더 대중적이도록 운동으로 한정된 느낌이 들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가 되지 않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십대 후반과 이십대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면 매사에 일관적이고 논리정연한 사람으로만 살아야 할까봐 거부했던 것도 같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으니까. (…)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얼마 전 지구촌 뉴스에서는 도로를 단속하던 경찰이 이유없이 흑인 여성을 세워 신분증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경찰은 조롱조의 태도로 일관하다 흑인 여성이 ‘검사’임을 보증하는 신분증을 받아들고 무척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흑인+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여주었는데 록산 게이 역시 흑인 여성이다. 그 역시 미국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차별과 편견을 겪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대중문화에 나타난 다양하고 많은 여성혐오와 여성폭력 언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여전히 많은 페미니스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페미니즘이 백인 여성 위주로 흘러가고 있음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록산 게이가 지적하듯 아직 페미니즘이 헤쳐 가야 할 길은 멀다. 또한 페미니즘 역시 생물로서 존재하기에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분명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불리기를 주저하거나 특정한 이가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니, 변화는 있겠으나 발전은 없겠다. 변화하되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겠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것이 ‘인신공격’ 같았다 고백했다. 그리고 차츰 록산 게이가 알아간 세상에서 어쩌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경험해야 했다. 어쩜 필연적인 것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기만의 언어를 정립한 록산 게이는 이제, 스스로를 ‘나쁜 페미니스트’라 자처한다. 이때의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이에 대항해 전혀 흠잡히지 않으려 스스로를 옥죄는 그런 페미니스트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주류로서의 페미니즘과는 다를 지라도, 그 실천방식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여성이기에 개똥같은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전제에서 행동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흑인 여성으로서 당해온 록산 게이의 경험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여성에게 인식의 문제이기보다 삶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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