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에 대한 불안 현대의 문학 이론 44
해럴드 블룸 지음, 양석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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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태어나지 못한 불안


영향에 대한 불안-The Anxiety Of Influence: A Theory Of Poetry Harold Bloom


해럴드 블룸, 문학과지성사, 2012.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일까. 블룸이란 이름에 끌리는 것은. 외국인 이름을 두고 특별히 좋고 예쁘다는 느낌이나 생각을 가지진 않았는데 유달리 생각나는 이름들이 있다. 블룸이 그 하나인데, 이유없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블룸, 블룸 말할 때의 발음의 유연함과 꽃피움의 뜻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블룸 블룸하고 있으면 주위에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드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레오폴드 블룸과 Bloomsday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인 모양이다. 해럴드 블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 비평가를 알게 된 것도 오로지 그의 성이 ‘블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밀리기엔 억울하게도 해럴드 블룸은 유명한 문학비평가이다. 많은 책들에 ‘해럴드 블룸의 추천’ 태그가 붙어 있다. 1930년생이니 지금은 87세의 이 비평가는 ‘비평가의 거인’이라 불리며 40권이 넘는 저서를 썼다. 해럴드 블룸에 대한 설명, 평가에는 그의 비평이 시대의 주류 비평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블룸은 ‘보수주의’ 비평가로 분류된다.

  낭만주의 시인들에 대한 비평을 주로 해온 블룸의 대표적인 비평 개념 ‘영향’, 이 책은 “영향”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다. 대체로 문학비평이나 문학이론서가 독특한 어휘를 사용하며 문장을 힘들게 써내려가는 까닭에, 더구나 번역서이기에 이해를 하기 위한 서글픈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이 책 <영향에 대한 불안>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해럴드 블룸은 자신의 비평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장르에서 개념을 차용했는데 철학과 프로이트 이론이었다. 이 두 개념이 어떻게 문학을 설명하는데 ‘이용’되는지 지켜보는 흥미가 있다.


시적영향은 ―강하고 진정한 두 시인과 관계할 때―항상 이전 시인을 오독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오독은 실제로 필연적으로 오역인 창조적 교정의 행위이다. 풍부한 결실을 낳는 시적 영향의 역사, 즉 르네상스 이후 주요 서구 시 전통은 불안과 자기구원적 풍자, 왜곡의 역사이며, 도착적이고 의도적인 수정주의의 역사이며, 이 수정주의 없이는 근대시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럴드 블룸은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선배 시인의 ‘영향’을 받을까 ‘불안’을 끊임없이 겪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위대한, 독창적 시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영향에 대한 불안>이 다루는 핵심 개념이다. 여기에 앞서 말한 철학의 개념과 프로이트의 방어 기제를 끌어와 선배 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심리적 갈등과 투쟁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해럴드 블룸에게는 ‘모방이 창조’라는 말보다 선배와의 차이, 왜곡, 오류가 문학 창작에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창조적인 해석을 두고 벌이는 선배와의 경쟁. 그러니까 선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자각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을 여섯 개의 수정률― 클리나맨, 테세라, 케노시스, 악마화, 아스케시스, 아포프라데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클리나맨은 선배 시에 대한 오독, 이탈, 타락으로 수사학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클리나맨을 위한 투쟁으로 블룸은 반동형성을 방어기제로 설정한다. 테세라는 도자기 파편을 의미하는 것으로 테세라는 연결성을 의미한다. 여기에 “자기 자신으로의 선회”와 ‘반전"을 방어기제로 설정한다. 욕동의 대상이 타자에서 자신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테세라는 복원과 재현인데 이것은 새로운 불안과 수축을 야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케노시스로 선재 시에 대한 ’비우기‘를 의미한다. 격리, 취소, 퇴행의 방어기제로 투쟁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자신 속에서 선구자의 힘을 취소하는 것이 자아를 선구자의 입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설명한 방어기제 이론을 적확하게 자기 의미화하며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프로이트 이론이라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여러 비판과 비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문학, 역사, 과학, 의학 등 전반에 걸쳐 거둔 영향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쯤되면 프로이트에 맞선 악마화, 여섯 개의 수정률이 필요하다 싶다.


허구의 세계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무한히 상상하는 내면의 자아를 매우 밀접히 알지 못하면서 그런 자아를 재현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말로에게는 변화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그의 과시적 인물들은 모두 똑같은 과시적 인물이고, 희생자들도 똑같은 희생자이며, 마키아벨리적 인물들도 똑같은 악마적 인물이다. 탬벌레인, 바라바스, 마키아벨리적 인물들도 똑같은 수사법을 공유하고 똑같은 욕망으로 어지러워한다. 셰익스피어는 말로에게서 이탈하면서 구별을 창조했다. 이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둔 시적 영향은 없다.


  창조적 작가라면 누군가의 이름에 종속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흔히 다른 작가들과 비견되고 실제로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면 그 이전의 선배 작가를 빌어 표현하는 경우가 작가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제2의 누구다! 이런 수식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불편과 구속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 인정욕구, 자기과시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할 때 뒤늦게 태어난 이유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먼저‘의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해럴드 블룸의 ’영향‘. 그리고 그속에 닮고픈 의지와 벗어나고픈 욕망이 공존하고 있어 ’불안‘한 상태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비단 ’문학‘에 대한 것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흔들림없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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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 은유, 서해문집, 2016.12.26.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제목을 보면서 감정의 분출로 인해 그 순간의 속시끄러움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했다. 싸웠다는 자체로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카타르시스가 작용할 테니. 물론, 일방적으로 깨지는 싸움이라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거라면 전혀 카타르시스를 느끼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그렇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제목이 좋다 생각했다.

  작가는 필명만큼이나 은유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느니만큼 “수유너머향”이 글에도 풍긴다. 철학과 인문학의 접합, 니체향이 좀더 더해지고 일상의 행위와 사유에서 존재를 생각하는 것. 아무튼 글쓰는 일이 힘들다 하지만 삶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방식이 글쓰기인 작가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에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여자, 존재, 사랑, 일. 책속에서 다루는 네 가지 주제다.

  이 땅에서 여성이란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란 특히 피곤한 일이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언제나 그렇게 되어 버린다. 본질적인 자아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여성이란 명명에 타인의 시선과 제도와 관습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는 일들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같다. 여자라서 엄마의 삶으로 더 살아가야 하는 것, 육아와 가사와 삶, 직장일을 공존시키며 행복하고 평화로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의 힘겨움, 남편과 아이에 종속된 삶의 존재로서의 ‘나’, 사랑하는 일과 노동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생각들.

 수많은 개인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그들의 경험과 거기에서 느낀 감정은 너무나 같다. 그러니 특별히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단지 너무 같은 이야기의 돌림이라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의 글쓰기를, 페미니즘이란 책을 계속 읽고 읽는 것일까.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왜.

  말하는 사람이 다르니까. ‘누가’ 이야기하느냐라는 점에서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누구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각각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건네기 위함이 아닐까. 같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각각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너의 생각이 이렇구나, 너의 경험에 네가 힘들었구나, 잘 버티어 주었다. 앞으로도 잘 버티어 나가자, 라고 말하기 위한 것 아닐까.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매번 이런 책을 찾아서 아픔의 지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결 수월하게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자 발버둥. 이러한 책들이 많아진다는 건, 아픈 이들이 많다는 얘기인가. 발버둥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인가. 사는 일에 부칠 때마다 글쓰기라도 된다면 좋으련만. 글쓰기로도 무엇으로도 위로되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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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


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마음산책, 2016-06-30.


  신문 속 단 몇 칸. 이름만 적힌 부고란을 보면서도 먹먹할 때가 있다.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들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것이 주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한가. 그런데 이름 몇 글자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한 생애까지 알고 나면 그들이 보낸 한 생에 대한 연민이 더해진다. 이 책은 그렇게, 이 세상의 보다 나은 변화를 위해 한발짝 더 멀리, 깊이, 높이 움직인 이들의 ‘부고’와 함께 그들의 생을 담담히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

  그래서 아쉽다. 타인의 생에 대한 서술에 드라마틱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송구하지만 ‘책’이라는 점으로 접근하면 담백함이 자칫 단순·지루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객관적인 생애에 대한 서술은 좋지만, 전반적으로 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들의 생애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이지 구성과 서술은 아니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들 삶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는 걸 자제했다. 여러 자료들을 더해 ‘보여주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평전이 아니라 ‘부고’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뜨겁게 우리를 흔든” 그러나 “가만한” 서른 다섯에 대한 부고라는 점을.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 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게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저자는 “가만한 당신”이란 제목을 붙였다. 가만하다는 말은 조용하다는 말이다. 사전은 “(움직임이)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라고 정의한다. 이들의 삶은 결코 “가만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경험을 “투쟁화”하며 불의와 억압에 맞서려던 그들의 정신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며 감싸안고 차분히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낯선 이의 행동 하나가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현실을 만들었다는 것을 요약된 그들의 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변화는 필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그들이 시작점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로, 인권운동가로, 장애인운동가로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것에 자유를 누릴 권리에 대해 온 힘으로 외치고 외쳤다. 저자가 어떤 기준으로 서른 다섯 명의 부고를 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른 다섯 명 중에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많았고 대체로 여성이기에 폭력과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기도 했다.

  하요 마이어라는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는데 ‘시오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었다. ‘시오니즘’이 갈수록 불편하게 느껴져 같은 지점의 생각을 만나서, 유대인의 시오니즘 비판이라 눈여겨봐졌다. 하요 마이어는 분명 강제수용소가 유대인을 비인간화하는 공간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시온주의자들의 행태에 비교하면서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시오니즘적 야심과 범죄를 감추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시오니스트들이 “아이들에게(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인 축출의) 편집증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홀로 코스트를 이용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 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의 이야기도 놀라웠다. 언뜻 “사업수완”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델 월리엄스의 동기는 “여성의 주체성 성 의식의 자유와 권리”였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에 따라 수용소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러나 두 어린 동생을 이끌고 수용소를 탈출해 9주 동안 맨발로 1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고향으로 돌아온 원주민 몰리 캘리의 삶도 잊지 못할 것이다. 또다시 끌려가고, 탈출하고, 아이들을 빼앗긴.

  돌아보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가증스럽고 극악무도하게 등장한다. 결코 가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이끌어 간 것은, 역사가 정의롭게 흘러가도록 이끈 것은 안타까이 부고를 전한 이들처럼, 끝끝내 ‘가만하게’ 미소를 짓고 손은 건넨 이들이었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삶이란 이러한 이들을 만나는 희망에 의지해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들의 부고에 깊이 머리 숙여 묵념한다. 이들의 삶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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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교양인, 2013-02-12.


더욱 중요한 시사점은 평화시 남성 중심적인 놀이 문화가 바로 전쟁시에 집단 강간이나 대략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집단 강간, 고문 등 전시 폭력은 ‘광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 문화의 연장선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폭력적인 일상 문화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납치살인사건 납치 목격자, 부부싸움하는 줄 알고 지나쳤다 

 ∙내연녀 말다툼 후 목졸라 살해, 시신 유기…지난 남자 만난 얘기에 홧김에

 ∙동거녀 목졸라 살해 교회 베란다 유기… “끝내겠다” 범행 암시

 ∙‘예전에’ 식당주인과 다퉜다고, 여친 창밖 던지려한 30대, 흉기도 휘둘렀으나…감형

 ∙하동 대안학교 40대男 교사 여중생 3명 강간·성추행, 현재 잠적. 교장, 교사 3명, 행정실장, 교직원 2명 같은 혐의로 입건


  지난 한주의 ‘흔한’ 기사다. 익숙한 사건에 놀람이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 개의 기사에서 세명의 여성이 ‘목졸라’ 살해됐고 버려졌다. 한명은 수없이 폭행당했고 죽을 뻔했다. 몇 명일지 모르는 중학생 아이들이 폭행당했고 어떤 아이들은 성폭행당했다. 한명이 아니라 몇 명일지 모르는 이들로부터 일 수 있다.

  내연녀가 “지난 남자를 만난 얘기를 해서” 홧김에 목을 졸랐다는 남편 있는 여자를 만나는 남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며 친구와 통화하고 실행한 남자, 관계를 끝내는 방법이 목졸라 화단에 버리는 것인가? 떡볶이를 먹는데 ‘전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격분해 여자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베란다로 끌고 가 창밖으로 던지려하고 흉기로 죽여버린다 위협하고 폭행했고, 이전에도 10여 차례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했으나 감형된 남자.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고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납치가 벌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직원….

  떡볶이를 먹다가 여자친구가 ‘옛날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고 “격분”하는 이도 있는데 이런 뉴스를 보면서 “격분”하지도 못하는 난 뭔가. 다음 주에도 이런 기사들은 또 나타날 거라는 걸 아는 이의 반응이다. 인터넷에 파주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인 ‘파주 내연녀’만 검색해도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 연도별로 파주에서 벌어진 내연녀 살인·폭행 사건 기사가 쏟아진다. 성폭행, 강간 사건 역시 넘쳐나는데 단순히 ‘폭력’만 행사한 사건은 수두룩하다.

  개인의 비윤리성이라 성토한다 하더라도 반복된 이 ‘구조’를 들여다보면 역시 지친다. 정말 이 모든 기사들 속 가해자들의 인성과 윤리의 부족이거나 정신병의 문제일까. 기사는 A, B, C, 혹은 김모씨, 이모씨로 나타나니 넘치는 기사들 속에서 어떤 사건이 ‘나’에 대한 기사인지 쉽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이,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이다. 부부 싸움의 경우 큰 폭력으로 번지기도 하고 이때 대체로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생명이 오가는 상황일지라도 부부싸움을 말리기 위해 접근·관여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 해도,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사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정말로 남성들에겐 폭력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희진이 지적했듯이 말이다.


남성은 여성을 때릴 권리를 타고났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 그 자체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당연하거나 폭력이 아니다. 따라서 쟁점은 폭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인가, 왜 언제인가 따위다. 그래서 여성들은 “당신 미쳤어? 너도 나한테 맞을래?”가 아니라 “왜 이러세요?(지금이 그 때인가요?)”라고 가해자에게 묻는 것이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다. 세상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한 지난 겨울과 봄의 경험이 여전히 ‘대통령’만 바뀌고 다른 것은 바뀌지 않았다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남녀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 역시 바뀐 듯 보일 뿐, 바뀌지 않았다.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이야기 중에 몇 번이라도 ‘여성’이 들어가면 당장 페미니즘이니 메갈이니 하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격분’하는 목소리가 있는 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슬픔과 분노와 비통함 등등의 감정이 마구 휘몰아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 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최근 모임 뒤풀이에서 후배가 여자 선배에게 선배를 보는 순간 자신의 시누와 너무 닮아서 지금까지 아무 말을 건네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여전히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며 오래도록 감정을 토로한 일이 없었는데, 시누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았다. 개인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들이 뒷담화로 시댁을 “까는” 그런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진솔한 성찰이었다. 그런데…얘기를 듣던 남자 선배가 “공통의 주제로 얘기를 하자”했다. 다른 남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며.

  이 말에 격분까지 갈 뻔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공통의 주제라는 말도 그러했고 남자와 여자의 선을 긋는 태도에 불쾌함, 실망감, 섭섭함이 솟았다. 한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듣는구나 싶으면서도 개인의 무의식과 성찰을 주제로 한 이야기 끝의 그 말은, 배움이라는 것의 소용없음까지도 느껴졌다. 삐딱한 마음에 그 선배 앞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만 줄창 꺼내볼까 싶기도 했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이니 여성주의니 하는 용어에 많은 이들이, 특히 남성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여성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남성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 가는 듯한데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만이 힘을 뻗어가는 기분은 왜일까. 존중, 존중하면서도 뒤에서는 비난하며 ‘결정적인’ 상황에 수용되는 목소리가 따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 폭력을 견인하는 이 권력의 힘. 여전히 페미니즘은 도전받고 있고, 도전해야 하고 갈 길이 멀다. 그나마 정희진처럼 풍부하고 쉬운 언어로 페미니즘에 대해 일상의 성정치학에 대해 글을 쓰는 이가 있어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많이 배우게 되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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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거리를 뒀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책읽는고양이, 2016-10-20.


  기차를 타며 읽으려고 선택한 몇 권의 얇은 책이 모조리 일본 작가들의 책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다」의 제목이 좋아 책을 꺼내드니 표지가 익숙했다. 제목과 표지의 연관성이 뭔가 생각할 겨를 없이,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표지가 익숙할 만큼 알라딘에서 많이 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책과 역시 제목만 들은 ‘뭐라고’ 시리즈의 작가 사노 요코 작가의 에세이를 들고 기차를 탔는데….

  너무 거리를 뒀나. 몇 문장의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약간의 거리를 두다」는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 다가오지 못했다. 덜컹이는 기차때문이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오히려 덜컹이는 기차였기에 그 감상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과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다」와 사노 요코의 책을 기차여행에 선택한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에세이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에세이가 번역되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면 이것은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거나 작가의 유명에 달린 것이라고. 물론, 우리나라 출판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두 작가 모두 소설가라 하는데 작품이며 작가며 전혀 알지 못했고 에세이의 문장에 감흥하지 못하는 것을 여전한 ‘일본풍’이라는 취향으로 돌리기에도 함께 선택한 일본 소설은 그 일본풍에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에서 탁월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이 책들의 무엇이 여행길의 내게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성’만을 작동하게 했을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었어도 점점 가까이, 그리고 계속 머물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러니, ‘약간의’ 거리를 둔 것이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산문집은 타인의 경험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이끌어내는 작가의 통찰을 접하며 나는 왜 내 삶에서 이러한 것을 간과했나 생각하게 되고 그 시선을 돌아보기도 한다. 때론 너무나 공감하는 문장들을 만나 하염없이 빠지고 때론 전혀 생각지 못한 문장들을 만나 또 풍덩인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익숙한 경험의 나열이었다. 하긴, 어떤 에세이들은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타당한 논리를 얘기하기에 신선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신선하지, 않다가 이 책들에게서 얻은 느낌이다. 소노 아야코는 차분한 가운데 어두운 느낌으로 사노 요코는 수다스럽고 경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소노 아야코는 나답게를 위해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제시한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관한한 일본인들이 월등히 잘하고 있는 점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나 했지만 일본의 원제는 「인간의 분수」. 원제였다면 이 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일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나답게 사는법에 관한 한 어느 나라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긴 하다. 타인의 기준에 매달리지 말고 나만의 법을 찾으라는 이 조언은 굳이 일본 번역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오고 들어온 이야기다. 알지만 늘, 실천에 능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런 에세이를 통해서 또다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 또 실패하고, 또 노력하다 실패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싶다.

  소노 아야코의 「인간의 분수」 우리나라 번역본 「약간의 거리두기」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 방법에서 자주 눈에 띄는 건 익숙하게 들어온 방법이나 감정적 서가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역시도 반복적으로 들어온 수사이긴 하다. 그래서 번역본의 제목보다 오히려 원제가 가지는 「인간의 분수」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걸맞은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운명과 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가 제시하는 이 나답게 살기 위해 타인과의 거리를 두는 법에서 전하고자 하는 방법은 내게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신도 좋고, 세상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세상은 좋아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가 옳지 못하기에 신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이런 모습은 악이라고 규탄했지만 의외로 신은 ‘상관없다’라고 응답해주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신은 언뜻 봐서는 공존이 불가능한 적대관계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종교인이 아니라 ‘특정’종교가 없기에 이 반복된 메시지에 감흥이 적었음은 분명하다. 힘겨운 삶의 고민들을 종교를 통해 좀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가고, 또 제 경험을 타인에게 제시한다. 그 지점에서 소노 아야코의 방법이 내게 와닿지 않았을 뿐.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을 더욱 이기적이게 한다“라고도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를 이어가는 종교와 어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도 이 생각에 한몫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할 때 불행히도 ‘종교인’은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하면 너무 억울할 것도 같지만, 종교를 갖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종교’가 제 힘들을 제대로 못써먹고 있는가, 잘 써먹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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