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상의 도서관 6
이병훈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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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랴찌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병훈 저, 한길사, 2007.12.15.


  문학에 깊이 빠져들기는 러시아문학에서 시작했다. 그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겠다고 밤을 지새우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러시아문학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러시아에 대해서도 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끼, 체호프, 뚜르게네프, 고골, 바흐찐, 푸시킨, 파스테르나크… 이들 덕분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끄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예술가를, 수많은 혁명가를, 수많은 민중을 품고 있다. 냉기가득할 것만 같은 모스끄바는 이들 생생한 인물들의 힘으로 좀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우수에 깃든 도시로 각인된다.


모스끄바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정은 거의 신성불가침에 가깝다. 모스끄바는 러시아인의 영혼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러시아 예술가들은 모스끄바를 수없이 찬양하고 숭배해왔다. 그들은 모스끄바를 러시아 영혼의 성지라고 여겨왔다.


  러시아인에게 마음의 성지이자 영혼의 고향이라는 모스끄바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가고픈 열망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대체하고 몇계절이 흘렀다. 어느 도시나 고유한 속도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러시아는 커다란 나라이고 모스끄바와 블라디보스톡의 속도는 달랐다. 같은 러시아라고 해서 모스끄바가 아닌 곳에서 모스끄바를 느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고 그것은 또한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러시아 전체에 대한, 모스끄바에 대한 책들만을 잔뜩 읽고서 블라디보스톡을 향했으니 그곳에선 레닌이 있을지언정 도스또예프스키며 똘스또이며 이런 예술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술의 자취는 묻어났다.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모스끄바를 사랑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책 속에 있다. 러시아 문학가들만 명확히 각인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러시아의 여름과 겨울에 러시아의 모스끄바와 인근을 여행하며 수많은 예술가의 흔적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만나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걸어서 멀리 이동하여 그들이 직접 살았던 장소를 찾는 여정은 그 풍광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다르다. 특히 저자는 모스끄바 내 박물관, 미술관, 인근 지역을 겨울의 풍경 속에서 거닐었다면 똘스또이가 살던 곳, 뿌쉬낀이 러시아의 파르나소스라고 불렀던 아스따피예보, 러시아 문학의 성지라고 불리는 뽈라냐, 체호프 문학이 깃든 멜리호보, 바쩨르나크의 집 등을 여름에 거닐었다.

  모스끄바 강의 여름을 느끼면서 자작나무 숲이 울창한 곳에서 길을 잃는 저자의 동선을 따라 같이 아득함을 느끼면서 러시아의 여름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은 문학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을 쫓는 여정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왜인지 러시아의 모스끄바는 가기 쉽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겹쳐져서 더 그러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득하고 깊으며 설레면서 애잔함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모스끄바의 여름과 겨울은 이렇게, 느낌이 다른가 싶으면서 이토록 러시아에서 예술가들이 탄생했고 서구에서도 많은 예술인들이 러시아, 모스끄바를 찾았던 것이 단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까 하는 물음도 들었다. 예술혼이라는 것이 자유스러울 때 절정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절정의 혼이 발현된다고 하기도 한 것 같은데. 어쨌든 러시아라는 모스끄바라는 도시가 예술가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칫하다가는 위축되기도 하겠다 싶었다. 조금만 발을 걸어도 대문호라 칭송받는 이들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기에 그들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마감될 것 같고 또 언뜻 그들과 비교하느라 마냥 위축될 수도. 아니 예술가라면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좀더 진취적으로 청출어람의 예술혼이 이루어지려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게을러진데다 겨울이라 더더욱 이불속에서 나오질 않는데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굴랴찌’라고 한다. 이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있을 수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문다고 한다. 굴랴찌! 이것은 산책하다라는 말이다. 내게도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이긴 하다. 그러다 보면 나의 정체성도 확립되어지려나. 수없이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문학으로 회귀하여 러시아문학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작가의 특성이 아무리 깃들어있다지만 나라가 가진 분위기가 글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작가에 대한 선호도를 물리치고는 여전히 문학은 러시아!라는 말이 깃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러시아의 굴랴찌 문화가 어떻게 그들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읽은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굴랴찌를 한다. 뿌쉬낀, 고골, 도스또예프스끼,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부닌의 주인공들을 보라. 예브게니 오네긴, 아까기 아까끼예비치, 라스꼴리니꼬프, 바자로프, 레빈, 아르세니예프 등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연과 교감하거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들은 길 위에 존재한다. 그들은 굴랴찌 문화의 산물이다.

 

  깊은 밤과 매서운 추위에 장편소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장편소설을 깊은 밤 내내 읽지 않았겠냐며 러시아 문학에 대해 얘기하던 때가 있었고 수긍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삼 굴랴찌를 생각하며 그 주인공들과 소설을 다시 떠올려 보니 저자가 말한 것처럼 ‘굴랴찌’ 였구나! 싶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에 아열대기후인 미국 플로리다에는 이구아나와 바다거북이 얼어서 기절하고 있는 때다. 다행인지 2018년 1월의 대한민국은 눈도 내리지 않고 강추위라고 불리기엔 미적하다. 책속으로의 굴랴찌가 아니라 진짜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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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김화영 예술기행 김화영 문학선 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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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은, 무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 김화영 예술기행, 문학동네, 2012.


  저자가 만난 성은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문이 활짝 열려지지 않을 때의 성이다. 안개가 어슴프레 끼어 있고 시선에는 보이면서도 여전히 저 멀리 물러앉아 있는 성. 관광안내 책자에서 보는 반짝반짝 빛나거나 광택이 나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을 만나온 저자의 이 책은, 성(城)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포장된, 깔끔한, 생기없는 모습이 아니라 서글프고 애잔한 모습이다. 보일듯 말듯, 울창한 나무에 가리워져 있거나 시간이 내린 빛깔의 흐름으로 흐트러져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안내하는 성을 둘러보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성의 주인들이 고개를 내밀듯하다. 어떤 이는 차한잔 해도 좋다고 기꺼이 성의 방문을 허락하고 어떤 이는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라며 눈앞에서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릴 것도 같다. 아예 성문을 굳게 닫고 문을 두드려도 내다보지 않을 곳도 있을 듯하다.

  가보지 못한 많은 성들이 가진 이야기를 저자는 들려준다. 문학에 등장하는 성, 실존 인물이 살았던 성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이 더해지고 분명 낯선 곳이지만 친숙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문학같은 문체에 한없이 빠져들다 보면 오래 시간이 쌓아올린 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더구나 저자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흥미보다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에 또 가보는 반복 속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변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자신 또한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 이외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변화와 공간의 접촉에서 여행을 실감한다고. 그렇기에 이 책을 들여다보면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낯섦과 호기심보다는 저녁밥을 지을 때쯤 동네에 피어나는 땔감의 온기처럼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하루가저물어 간다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녹아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역시나 웃긴 것이 저자가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감상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인도기행 같은 경우에는 좀더 경쾌한 발놀림과 호기심같은 게 있긴 하다. 아님 단체여행에서 오는 긴박감이거나.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프랑스의 성들을 만나 성에 살았던 주인들을 불러낸다. 성이 가진 특권일까, 살았던 사람의 이름으로 누구네 집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성만의 ‘이름’을 달고 있어서 성이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 성 모두에 인간이 살았지만 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각기 다르다. 성 자체가 품고 있는 특색 또한 달라서 성이라는 명사에 성의 이름이 곁들여지며 명백한 고유명사로서 위풍을 달리한다. 이 책을 통해서 프랑스 귀족들의 연애사를 새삼 확인했고 역시 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감각은 유효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이 서린 공간이기도 하지만 왜인이 한이 서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곳 성 하나하나는 넘쳐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파리의 또 하나의 성을 소개한다. 바로 페르 라셰즈 묘지이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고향 메닐몽탕 가에 위치한 이 묘지는 하나의 도시에 가까우며 수많은 골목길들과 늘어선 대로들이 뻗어 있다 한다. 이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 발자크, 에디트 피아프, 프루스트, 폴 엘뤼아르, 쇼팽, 뮈세, 코로, 오스카 와일드, 콜레트, 도데,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가들, 그리고 파리 코뮌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이곳에 있다. 이 무덤을 돌아보며 이 예술가들의 행적을 알아보려면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무덤이건 무덤은 그 사람 최후의 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저 돌문 뒤의 어둠, 한번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 사자(死者)의 성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 닫혀진 성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어둠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성은, 참다운 성은 그 상상과 그 짐작으로 산 사람이 짓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가장 참다운 성이다. 그 어둠 속으로 난 수많은 보도와 골목길과 지하실……다시 그 지하실 밑으로 망각의 강이 흐른다고 하던가? 


  또한 저자는 개선문과 노트르담 보바리 부인의 배경지를 찾아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비교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번역한 후의 저자가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 보바리의 삶을 풀어낼 때 소설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삶을 물리고 보바리 부인의 집, 성당, 약국 등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후손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해졌다. 그리 유쾌하거나 긍정적인 모델로이 아닌 경우에 말이다. 소문으로 인해 마을에서 쉬이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설로 인해 더더욱 강하게 굳혀져버린 가족의 일대기는 남은 자에겐 멍에일 터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플로베르나 라마라크나 빅토르 위고 모두 문장력이 탁월하기에 개선문과 노트르담과 마을을 묘사하는 필력이 남다르기에 그들이 소설속에서 그린 언어로 이 건물을 마을을 보는 기분은 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게 되는 맛이 있다. 눈으로 머물러 말을 잊었을 지 모를 곳이 어쩌면 말로써도 그려진달까.

  동화속에서 공주들이 살았을 성 아니면 유령이 나왔을 성으로만 굳혀졌을 성이 실존인물의 희노애락의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재정립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살던 성의 모습은 위셰 성이 모델이고 레오나르도가 생의 마지막을 머물다가 간 곳은 프랑스의 클로 뤼셰 성이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집이었던 성, 권력자의 애인이었던 이가 머물렀던 성은 관광지가 되어 있다. 일정한 시간에 문을 열어 휘익 둘러보아야 하는 시간을 허락한다. 당연히 그 옛날의 삶이야 느껴볼 시간은 내 마음속에서 정해야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저자는 그곳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을 뿐이고 그곳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일이다. 역시나,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찾아가고프다. 관광지이니 더 찾아가기 쉬울 것임은 분명한데도 아직은 시간으로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과 소설들과 인물들의 생애를 더욱 알고난 후에야 그 공간을 찾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냥 보고프다는 느낌이 있을 때 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터질 것 같은 방랑의 마음을 책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역시 돈과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요건 외에도 기질의 힘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에 일주일 동안 가본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쓴다. 한달 동안 가본 사람은 글을 한편 쓴다. 일년 동안 가본 사람은 중국에 대해 남이 물어보아야만 겨우 대답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중국에 살다 온 사람은 그저 미소짓기만 한다.


   여러 해 프랑스에 살아 돈 사람처럼 그저 미소짓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프랑스에 가보지 않은 채로 리뷰 하나를 썼다. 그럼, 한달 가본 사람처럼 군건가. 정말로 이 책에서 이야기한 성들을 쫒아다니다가 많은 예술가들을 떠올리다 보면 책한권의 얘기는 거뜬히 나옴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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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이마고 -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지음 / 한언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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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이미지


호모 이마고-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한언, 2013.


  세계 최대 ‘항손둥 동굴’(Hang Son Doong Cave)을 보다보니 역시 여행과 탐험에 대한, 베트남 여행에 대한 의지가 생겼다. 동굴을 보기 위해서인데 제한적 허용이라고 하니 기분을 스르륵 가라앉히지만, 생각해보니 동굴 탐험에 대한 의지와 욕구는 항손동 동굴 이전에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의지도 가라앉혔으니 동굴탐험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졌다가 다시 피어올랐다가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굴에 대한 관심으로 읽은 책이 ‘호모 이마고’다.

  『호모 이마고Homo Imago』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부제를 가지고 동굴을 탐험하고 있다. 항손둥 동굴과 호모 이마고 속에서 다루는 동굴들은 느낌이 다르다. 항손동 동굴이 자연이 동굴 속에 있는 것이라면 호모 이마고속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은 저자의 말대로 갤러리같다. 동굴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은 동굴탐험이라기보다는 동굴 속 이미지를 다룬다. 호모 이마고는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왜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삶의 본질 면면을 사유하고, 소유하며, 소통하는 존재이다. 이런 특징은 인류가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는 창조적 동력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은 내면에 오롯이 떠오르는 생각을 개인가 사회가 가진 문화와 예술적 코드가 내포된 이미지로 탄생시킨다. 따라서 이미지는 앞으로도 인류의 문명을 지속해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저자는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문화가 속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동일 시공간에서 인간이 만든 메시지를 ‘이미지 코드’로 추출·분석해서 ‘인류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저자가 추출한 이미지코드는 문자, 그림 등등 다양하다. 이것을 신화와 종교,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적용해 분석한다. 저자가 대표적인 ‘이미지’ 분석으로 사용한 것이 ‘라스코 동굴벽화’다. 구석기인들이 쇼베 동굴,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 등등에 그린 많은 벽화를 분석한다. 특히 저자는 라스코 동굴벽화는 다섯 개의 갤러리로 나누어 생생하게 라스코 동굴벽화를 현재 탐험하듯이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 코드 분석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후기구석기인들이 남긴 동일한 동물 이미지를 통해, 지역은 달라도 그들이 가진 감성의 소산에 의해 공동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은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실제로 그 부근에서 주로 서식했던 들소를 그린 것이다.


  후기구석기인들은 벽화를 ‘신성한 곳’ ‘신성한 구조’에 그리고 있다. 후기구석기를 대표하는 동굴의 구조가 여성의 자궁과 같은 구조이며 동굴은 여러 중요한 의식, 사냥꾼이 될 청년의 입문식의 장소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의 사냥꾼은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로서 입문식과 같은 통과의례를 통해 샤먼이 되는 것이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완수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인류가 문명으로 나아가는 시대,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비교하고 그 속에 나타난 건축과 의식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찾아내면서 동일성과 유사성을 발견한다.  


문화적 현상에 대한 동일한 이미지는 비단 제한된 특정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차별성을 초월하여 동일한 하고를 하였다는 점은 인간이 가진 사고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민족이든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고 가더라도 이 지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지구에 형성된 자연환경과 그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미지를 통해서 구현해낸 생각의 결을 읽고 있으면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생각할 수 있고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한정적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창조라고는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동일하고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한, 인간의 삶을 위해 추구하는 형태가 세밀화되어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지금보다 더 머언 미래의 인류가 지금 현재의 인류가 남긴 이미지를 추출해내서 비교분석하면서 그들은 뭐라고 해석을 할지가 궁금해진다. 살기 위해서 이토록 무식하게 버둥거린 인류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려나. 외경심을 가지려나. 그 이전의 인류가 해온 행위들을 통해 살아갈 미래를 위한 방법을 학습한다고 할 때 어느쪽에 무게를 더 두게 될지,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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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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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인간답다

혐오와 수치심-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제목으로는 단순히 혐오와 수치심의 연관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혐오를 하다보면 수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니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의 연결성이 있는가, 혐오를 받은 경우 혐오에 대해 같은 반응을 하고 난 뒤 찾아오는 자괴감과 수치감을 경험하였기에 이에 대한 감정의 기제를 생각했다.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이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혐오와 수치심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아닐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자는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였다. 저자는 감정이 법으로 작동하는 기제를 보여주며 흥미를 유도한다.   

  법을 판결하는 이에게는 감정이 있을지언정 ‘법률’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고 이성이 가득하다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상당부분 법률은 이 감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이다.


감정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인 사례에 초점을 맞춰, 어떠한 사람이 특정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다만 그 평가에 대해서는 개별 사례별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으며 무엇보다 수치와 혐오심에서 발현된 법의 경우 타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데 이용될 수 있기에 이 두 감정에서 나아간 법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혐오와 수치심은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을 숨기려는 욕구를 수반”하며 이것을 숨기기 위해 타인의 공격과 배제로 이어진다. 이때 이 감정은 대체로 강자들을 위한 논리로 확대 재생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은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폄하와 어떤 형태의 공격성(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올바르게 유발된 수치심의 경우에도 한 구석에는 나르시시즘과 이와 연관된 공격성이 항상 잠재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왜 부끄럽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혐오하고 수치스럽게 느끼는가. 이에 관하여 고대철학과 문학, 정치철학, 정신분석학 등등의 논의를 가져와 전개하는데 흥미로움과 더불어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된다. 나약함을 숨기려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가는 인간의 감정속엔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나르시시즘이 숨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인의 권리와 필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완전함에 대한 열망,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이란 부제가 결국 인간의 신적인 존재가 되고픈 갈망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늘 당하는 존재는 인간들 중에서도 더 약하고 약한 이들이 된다.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같이 하는 것보다 내 것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갈급한 일이 된다. 이렇게 세상은 늘 사회적 약자를 만들어 내고 또한 그들로 인해 힘을 얻는 존재들이 있다. 


혐오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어떤 존재, 즉 동물성을 갖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소망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혐오에 담긴] 오염에 대한 사고는 우리 자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야망을 드러내며, 이러한 야망은(어느 곳이나 존재한다 할지라도) 자기기만과 헛된 열망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으며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약함을 숨기려 외부에 대한 공격성을 강화한다는, 타인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자신의 우월감을 강화하려는 이 감정들을 “정한론”으로 이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제 나라가 흔들릴 때마다, 서구에게 뺨맞을 때마다 그 실패와 좌절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선침공을 주장한 일본인의 주장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부적인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동감입니다라고 표방하지는 못하겠다. 성범죄자에 대한 신상공개와 같은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저자는 반대하지만 저자의 논리에 따라 당연하죠!라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사고의 정리가 더 필요하다. 이래서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은 다른가 싶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념과, 호혜성과 상호 존중으로 대변되는 사회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질서에 대한 사고다. 이때 상호 존중이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선에 대한 다양한 관념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감정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서로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사고방식에 내재된 이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혐오와 수치심이 법의 토대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될 때 직면할 수 있는 위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감정이 법적 규제의 근거로 사용되면, 서로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상호 존중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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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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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방위를 고민하며


혐오사회-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2017-07-18.


  생각해보니까 2017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났다. 극도의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던 한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되니 길었다보다는 역시 짧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갈 해에 대한 아쉬움이려니 싶다. 더구나 한해동안 맑고 밝은 긍정적인 단어보다 칙칙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단어 속에서 살아왔으니 해결치 못한 찝찝함이 가득하다.

  올 한해도 여전히 혐오의 프레임 속에서 살았다. 삶이 힘겨워서인지 가치가 실종되어서인지 타자에 대한 혐오는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혐오의 프레임은 대중에게서 퍼져나가기도 했겠지만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조장하고 이용했다는 점이다. 혐오와 증오의 감정이 확대되고 구조화되어 타인에 대한 멸시와 폭력을 당연시하고 나의 편을 가르는 이 과정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정치권은 이 혐오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이 점을 이야기한다. 혐오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 얘기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렇기에 이것을 자발적이고 개인적이라 간주하는 한 이 감정을 양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감하기 때문인지 이 책은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저자의 글을 현실과 대입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오랜 시간 동안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저널리스트이고 성소수자라고 한다. 저자의 경험이 구조화된 혐오와 증오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바탕이 되었기에 그 시선을 포착해내는 것이 달랐으리라 본다. 그렇기에 좀더 생생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명민한 생각들이 기술될 수 있었다고 본다.

  혐오에 대한 현상은 비슷비슷하고 분석도 비슷하다. 결국 같은 것을 겪으면서 이유를 알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해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해결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습관이란 늘 생각도 변화도 하기 싫은 법이니까. 올 한해도 반복된 혐오의 뉴스는 지역과 대상만을 달리해서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더구나 당장 크나큰 선거가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이 치열하고 저열한 혐오의 언어들을 맞닥뜨리게 될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떠한 혐오의 언어에는 휩쓸려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생겨난다.


증오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 또한 단순히 거기 있는 게 아니다. 준비되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이 어느 방향으로 분출되는지,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또 그러기 위해 먼저 어떤 장벽과 장해물을 제거하려 하는지, 이 모든 것은 우연하거나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한 혐오는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 역시 다문화가정과 새터민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진행해왔다.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 되었을 뿐. 세계적인 인종차별과 혐오에서만큼은 한국은 비켜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만큼 순수혈통, 단일민족에 대해 자부심을 치켜세우는 민족이 또 있을까. 가시적으로 보게 될 혐오의 언어를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는 것도 참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혐오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렇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순수성’ ‘표준’에서 벗어난 것은 예외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 개입되어서다. 한번 잘못된 이 인식을 돌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폭력이 지나간 후에도 이뤄질까 말까하다. 지난 대선 토론에서도 성소수자 논쟁이 곧 무시할 수 없는 혐오확산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봤다.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확산한다는 그 인식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싫어하니까 맹목적으로 혐오에 동조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참으라고 한다. 그 폭력에 맞대응하면 쌍방폭력이 된다. 정당방위가 아니라 쌍방폭력이 되고 마는 현실 때문에 혐오와 증오에 관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것이 한순간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욕설에 욕설로서라도 맞대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일방적이 되고 만다. 특별한 일이 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일상적인 일로 치부되고 만다. 맞대응해야 보는 사람도 흥미롭게 관전한다. 세상이 그렇다.


증오와 순수의 광신주의에 맞서려면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배제와 포함의 기술들에, 어떤 사람은 보이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식의 틀에, 개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시선의 체제들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사소하고 저열한 형태의 멸시와 굴욕에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해야 할 뿐 아니라, 배제된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법률과 실천도 필요하다. 그밖에 다른 관점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다른 서사들도 필요하다. 증오의 틀을 무너뜨려야만, “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만 보였던 곳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때에만 공감이 생겨날 수 있다.


  「혐오사회」에 대한 이 맞대응 방식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이 혐오와 증오의 구조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얘기할 땐 항상 이렇게 끝이 난다. 인식과 구조의 변화. 그래서 어떻게라고 그 세세한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 큰 고민의 장으로 넘겨버린다. 책을 읽을 땐 그 현상에 대한 분석자체에 힘이 실리며 만족스러움을 느끼다가도 현실로 넘어오면 뭔가 아득하다. 실천과 변화를 너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도 된다. 어쨌든 문제인식을 명확히 하고 난 후에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혐오의 상황은 너무 깊고 넓으니까. 그럼에도 혐오와 증오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일련의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혐오사회」를 읽는 내내 카타르시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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