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안식처일 수 있을까

 

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RHK, 2013.

 

 

   37편의 문학과 연극, 영화에서 뽑은 사랑, 연애, 이별, 인연에 대한 이야기. 이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 작품으로부터 사랑이야기를 한다.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 그 속엔 연애와 이별과 인연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정여울의 이 에세이는 주제가 사랑에 관한 것이라서인지 상당히 말랑말랑하다. 문학비평이나 다른 비평에세이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결에서 차이가 있다.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가 보다 감성적이다. 사회학과 비평 용어로의 설명 대신에 문학으로 연극으로 영화로 접근하는 평범한 생각들을 전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여울은 현대인의 마지막 안식처로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사랑이 안식처일 수만 있을까. 사랑이 지닌 의미 때문에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사랑이란 수만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사용된 사람에 의해 각각의 의미를 만들곤 한다. 그 다른 사랑의 모습은 타인에게 갈망을 공감을 느끼게도 거부를 느끼게도 한다. 누군가는 사랑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에도 옳고 그름의 문제는 있다. 흔하게 얘기되는 불륜과 폭력이 동반된 그런 류를 ‘사랑’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한다.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랑으로 생긴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덧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상처 입은 사람은 새로운 사랑에 빠지기가 어렵다. 아직 옛사랑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더더욱.

 

   이성복 시인의 시 편지의 끝 문장에서 따온 에세이의 제목은 “잘 있지 말아요”다. ‘잘 있지 말아요’란 말은 애타는 감정의 조용한 떨림, 울음 같은 표현이 아닐까. 요즘의 참혹한 뉴스판 연애와 사랑에 관한 기사에서 이 의미를 지닌 말을 따온다면 “죽여 버린다” “가만 안 둔다”가 아닐까. 글로 써놓고 보니 더욱 더 섬뜩하다. ‘잘 있지 말아요’라는 문장이 주는 이별에 대한, 사랑에 대한, 서릿발같은 감정은 오히려 사랑의 충만함을 더욱 부각시켜 주는 듯하다. 이쯤되면 사랑의 완성은 이별할 때 말하는 이별어로 성립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세상 안쪽을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상의 사각지대도 있다. 월플라워처럼 벽에 기대 혼자 파티를 견디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만 간신히 보이는 세상의 비밀도 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모든 풍경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랑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듣고 들어도 막상 경험이라는 위치에 올라서면 미처 몰랐던 사각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사각지대에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사랑을 정의하는 나만의 방식이 될 것이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여기 저자가 추려낸 37편의 작품은 그 자체로도 읽어볼 얘기들이다. 거기에서 사랑을 읽어내든 다른 것을 읽어내든 말이다.

 

당신의 마음에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내게 없을지라도, 당신을 만나고 홀로 사랑하게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 이런 마음은 보답 없는 사랑에 몸을 던져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존엄이다.

 

  하지만 사랑을 영혼의 존엄이라 얘기하는 저자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곁들여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냥 한방향으로만 흐를 내 ‘사랑의 정의’가 위험한지 아닌지, 그 사랑에는 타인에 대한 존엄이 있는지, 정말로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지를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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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마음산책, 2004-04-25 .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폭우 속에 침수된 차량 바퀴 위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 사진이 인터넷에 실렸다. 주욱 뻗은 한 팔이 물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위태롭게 물길로 미끄러지는 모습 같기도 했다.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새벽녘 날카롭게 그르렁거리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깬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네들은 멀리로 재빨리 지나가기보다 오히려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분명 들고양이들인데 휴지통을 배회하며 주차된 차량 아래로 들어가 숨어 있기만 할 뿐이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재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고양이들의 생존전략도 변한 것인가. 또다시 태풍과 비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저 수많은 고양이들이 차량들이 차량의 주인들이, 마을의 주인들이, 그것을 쳐다보는 모든 이들이 걱정된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한 문장은 이렇듯 청춘에 관한 문장이었다. 여전히 이 문장에 눈이 머문다. 이 책은 2004년 초판 출간되어 10년 뒤에 같은 제목의 2편이 출간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책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문장들. 아니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음에 남게 된 문장들. 어떤 책이든 글이든, 마음에 와닿는 계기나 때가 따로이 있다. 삶의 위로가 되는 문장들이 때마다 다른 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경험과 상처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마다에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되어 주는 책이, 글이, 문장이 있다.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8할이 글이 되는 건가.

  시간은 정말 재빨리 지나갔다. 예전에 좋아하던 문장들을 다시 보면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 문장을 좋아하던 시절의 나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시간은 재빨리 지나간 것 같지만 대부분 하루는 재빨리 지나가기보다 별볼일없이 지나갔다. 별볼일없이 살아왔다는 것만큼 편안하고 다행인 인생이 어디 있으랴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크게 남은 것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미련’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 시절 켜켜이 내가 좋아한 책들을, 이야기를, 문장을 읽고 싶어졌다. 또한 미련일지도. 내가 살아온 생애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한, 희망을 주기도 절망케도 한 문장들이 그리워진다는 것. 사춘기, 청소년기라는 시절의 감수성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절의 책들에 문장들에 마음이 쏠리는 것 역시도 ‘지나간 시절’이라는 데서 오는 감정이리라.

  김연수의 청춘의 시절 감성 역시도 남달라 보인다. 작가는 이백과 두보의 시에 특히 애착을 느끼고 있고 다시는 산문을 쓰는 일은 없을 꺼라 말하고 있지만 2004년 이후 출간된 작가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 산문집을 나는 읽었다. 물론 지금도 작가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그의 글은 첫 문단 데뷔작과는 너무도 다른 깊고 섬세한 감성이 있다. 첫작품만 생각하며 김연수를 기억했다가는 동명이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작가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라고 하지만 글쎄 세월과 변화의 관계의 주종을 따지는 일이 뭐 중요한가. 세월은 흘렀고, 어쨌든 변했다는 사실이 현재의 사실인데. 변했다는 사실에 깊은 회한만이 없다면야 변한 것이 또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닌 것이고.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던 세월의 속도다.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면 간절히 손꼽아 수학여행을 기다릴 수 있다면. “어텐션 플리이즈, 바우”의 세계를 소망할 수 있다면.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표현의 섬세함이나 깊이, 감성. 그리고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청춘에 대해, 지나간 시절에 대해 가지는 사람들의 마음은 같아 보인다. 이제 3~40대-작가는 35세이 이 산문집을 썼다-에 느끼는 감정은 노년과는 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노년에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는 마음씀은 중년에 바라보는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니 노년에서 바라보는 중년의 시절 역시도 청춘이다. 그러니 아직, 내 생에 청춘은 지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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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


랄랄라 하우스 -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 김영하, 마음산책, 2012-05-15, 초판출간 2005년.


  

   초판을 읽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 그새 책은 재출간되었고 작가는 매주 텔레비전에 나왔다. EBS 세계기행 첫편에 김영하 작가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EBS 세계테마기행을 볼 때마다 세계 곳곳을, 특히 오지를 기행하고 싶은 갈망에 휩쓸렸는데 세계를 기행하는 일은 늘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서 하고 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기행할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기쁨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위안삼는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는 동안 책을 읽는 일만은 버리지 않고 살았구나 하면서. 그러고 보면 내게도 책읽기가 삶에서 ‘랄랄라’를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랄랄라 하우스’는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다. 소설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이하게 쓴. 일상의 이런 정도쯤이야.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깔끔하다면 좋겠다 싶을 정도다.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는 담백하면서 깔끔한 느낌이 있다. 그속에선 어떤 신경질이 느껴지지 않아서일 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면 맞닥뜨릴 그런 순간들을 점잖은 생각으로 전환하는 일상이 부럽다. 생각해보니 방송에서 본 작가의 스타일이 이렇구나 싶다.

  소소하게 일상을 훑어보고 더불어 생각하는 랄랄라 하우스는 2005년 첫출간되었을 때 유행하는 sns의 대표적 프로그램인 싸이월드의 형식을 차용했다. 방문자들의 댓글반응까지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안 된 사이에 지금은 사라졌으니 인터넷 프로그램의 생명력이 얼마나 급속하게 변하는지 새삼 실감한다. 그토록 열렬한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그램의 소멸이 과학기술발달의 위력을 느끼게 한다. 급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레미제라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적 장발장으로 먼저 이 소설을 읽었을 듯하다. 장발장이 아닌 레미제라블은 엄청난 길이의 소설이었다. 레미제라블을 읽고 나서 빅토르 위고의 이 소설에 대해 박수를 쳤다. 아, 이아호! 소년소녀용 소설이나 청소년용, 만화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이 레미제라블의 제목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랄랄라 하우스에 초기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번역될 때의 제목을 소개했다. ‘너 참 불쌍타“. 정말로 배꼽 빠지게 웃음이 났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었기 망정이지 소리내어 깔깔거렸다면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기이한 웃음에 한번씩 작업을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어도 변한다. 언어가 가진 뜻이 변하고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기도 소멸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생각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역시도 필요를 기반으로 한 생각의 전환이 가져오는 것이니까. 너 참 불쌍다! 마구 웃었는데 갑자기 짠해진다. 휘몰아치는 변화의 한복판에서 노회한 사고로 일관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과학기술과 언어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변화, 변화, 변화. 이 말이 고통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내적인 요구에 의한 것인지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환경변화에 적응하려는 모든 인간들의 노력이 안쓰럽게 느껴지긴 한다. 그냥 너 참 불쌍타 싶다.

  랄랄라 하우스의 부제는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이다. 헬조선 사회에서 묘하고 유쾌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일은 버겁지만 때론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묘하고 유쾌한 생각을 갖는 것이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된다. 청량제같은. 어쩌다가 아니라, 매일을 묘하고 유쾌한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이 책에 있는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고. 작가는 작가라는 자신의 환경 속에서 경험을 쌓고 또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 자신의 환경 내에 그것을 바탕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생각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환경’에 대한 부러움일지 모른다는, 그 경험에 대한 부러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사고를 지배하니까. 하지만 사고를 통해 환경을 지배하는 힘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 방법의 차원에서 이 책 역시 나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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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뮤즈란 없다

 

잘 쓰려고 하지 마라- 퓰리처상 수상 작가의 유혹적인 글쓰기

메러디스 매런 (엮은이), 생각의길, 2013-12-13.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 20인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20인 작가들의 이력을 보면 퓰리처상, 오헨리문학상, 오렌지문학상, 펜포크너상, 맨부커상 등을 수상하거나 매번 다양한 언론에 올해의 책으로 소개된 책의 ‘저자’들이다. 이들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책을 엮은 매러디스 매런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을 수 있었던 비결을 “재능기부”라는 기획 덕분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모두 유명하고 잘 팔리는 작가들이지만 그들이 지금의 결과를 이루기까지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작가들은  이 경험들을 글을 쓰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

   작가들 각자의 글쓰기 방법이나 ‘작가’에 대한 생각은 유사점도 있고 차이도 있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해 물어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대답을 이들 역시도 하고 있었다.

   “일단 써라.”

    다양하고 흥미로운 제목으로 ‘글쓰기’ 노하우를 전하고 있는 책들의 최고의 방법은 항상 그랬다. 일단 많이 읽고 쓸 것! 허무의 끝을 달리는 말이긴 하지만 어느덧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방법임을 수긍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떻게 세상의 글쓰기 방법을 말하는 책들은 똑같은 결론을 제시하는데 그토록 무수하게, 계속 나올 수 있는 거지?

 

쓰고 싶은 기분이 안 내킬 때도 글을 써라. 세상에 뮤즈란 없다. 글쓰기는 고된 노동이다. 나쁜 원고는 언제라도 교정할 수 있지만, 빈 원고지를 들고 교정할 수는 없다. - 조디 피코

 

   조디 피코의 ‘빈 원고지를 교정할 수 없다’는 말이 와 닿는다. ‘뮤즈’란 없다는 말 또한 격하게 공감한다. 왜, 특히 남성들에게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조각을 하든 ‘뮤즈’가 필요했을까. 그런 인상들이 각인되어 ‘뮤즈’나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이 있다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대다수의 창작자들에게 뮤즈란 여성이었고 여성은 창작의 주체자이기보다는 창작자를 보조하는 수단이었다. 여성의 창작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기도 했고 그래서 폄하되거나 남성에게 빼앗기거나.

   20인의 작가들을 보니 여성 작가가 훨씬 많다. 이들은 특별한 ‘뮤즈’에 대해서 언급하진 않았는데 그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내면으로 돌리고 있다. 글을 씀으로 해서 느끼게 되는 자신만의 ‘행복감’이 그들이 글을 쓰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 나는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린 채 완전히 몰입해버린다. 나는 이렇게 또 다른 세계에 깊이 빠져서, 현실의 삶이 약간 모호해진 느낌이 너무 좋다. - 제니퍼 이건

 

나는 꿈꾸기 위해 글을 쓴다. 다른 인간과 접속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기록하기 위해,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죽은 이들을 방문하기 위해 글을 쓴다.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일종의 원초적 욕구 때문에, 그리고 돈 때문에 쓴다. - 메리 카

 

글쓰기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냥 내 자신이다. - 수전 올리언

 

   이런 시간을 더욱 많이 누리고 행복감을 느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이들에게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는 일처럼 보인다. 직장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자유롭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의 고통, 글에 대한 반응이 없을 때, 어느 에이전시에서도 글에 대한 연락이 오지 않을 때의 참담함,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은데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쓰지 못하는 답답함이 작가들이 가지는 문제이다. 아이와 가정을 돌보는 시간외에 어떡하든 시간을 만들어 내어 글을 쓰기 위해 분투하는 작가들의 글쓰기 습관은 이들이 유명한 작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 준다. 짬이 나는 모든 시간을 글쓰기에, 글쓰는 습관에 들이기 위한 처절한 노력들이 결국 글쓰기의 비결이라고 작가들은 말한다.

   어떤 영감이 찾아오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뮤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늘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일이 그들이 하는 일이다. 매일쓰기, 습관의 글쓰기가 그들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글쓰기에 매혹되어 있는 자신을 만들어 내는 일이 그들이 글을 매일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작가들은 ‘특별’하기에 그런 작품들을 썼고 상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은 이들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 들으면 전혀 특별하지 않게도 보인다.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읽었고 글쓰기 강좌를 들었고 그리고, 열심히 썼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또한 이 단순한 일을 잘 해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래서 특별해 보인다.

   뮤즈를 기다리지 않는 것. 뮤즈가 찾아올 때 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 스스로가 뮤즈라는 것을 믿는 것. 이들이 얘기하는 유혹적인 글쓰기의 비결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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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프로이트 때문인가?!


정신분석과 문학비평, 김열규 외, 고려원(고려원미디어), 1996.


  이 책의 문제점은 그 모든 정신분석과 문학비평과의 관계와 흥미로운 관점을 맨 마지막, 논문 하나로 잊어먹게 했다는 점이다. 일단 나에겐 그렇다. 여전히 진지하게 읽으며 정신분석과 무의식과 신화비평에 관해 나름 수긍과 비판을 했건만, 이 책의 마지막 글을 읽고선 정신없이 깔깔거린 기억이 있다. 그러고 책을 덮어 잊고 있었는데 언론에 자주 특정 비서관의 이름이 거론되며 여성비하의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업무를 사임해야 한다는 지속된 주장을 보면서 이 책을 떠올렸다. 뭔 연상작용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책은 문학비평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에 대한 주제로 10명의 학자·교수가 쓴 논문형태의 글을 모은 것이다. 문학비평과 정신분석은 무엇인가에 관한 개관을 시작으로 정신분석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와 융의 관점이 문학비평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나라 문학에서의 정신분석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실제 작품이나 작가를 대상으로 한 비평을 수록하고 있다. 어쩌면 실제 작품을 가지고 하는 비평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흥미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프로이트 이론 아래 놓인 글인데 「한국 현대시의 정신 분석학적 해석」이라는 표제 아래 8편의 현대시를 해석한 마광수 교수의 분석에 계속 물음표를 달고 있다. 1989년 발표한 논문인데 이 글에 대한 수용이 가능한 이유는 정신분석학적 비평으로 충분히 타당한 견해라는 것일까. 이 글을 읽고 난 생각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끌어들여 욕망의 분출을 정당화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이의 이론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어 이 이론에 ‘의하면, 따르면, 적용하면’으로 방패를 두르고 성적인 욕망의 표현과 생각을 현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정신분석 이론은 성욕과 그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언어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한다.


  시인 윤동주, 한용운 시에 대한 저항과 일제에 대한 독립 투사의 해석을 주입식으로 받았기에 정신분석 이론으로 해석하는 방법의 괴리가 너무 커서 놀라는 것이 아니다. 시험문제식, 교과서식 해석에 대해서도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마광수 교수의 해석 역시도 신선하다거나 놀랍다는 느낌보다는 마냥 우습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예술은 「욕구의 대상」으로 설명된다. 한 예술가가 현실에서 좌절된 욕구를 환상 속에서 대신 충족시킨 것이 곧 예술이라고 풀이되는 셈이다. 결국, 문학이나 예술은 「욕구 대상 충족의 메커니즘」의 하나로 범주화되는 것이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에, 예술가는 현실의 실패를 환상 속에서 대신 성취하는 사람, 이를테면 「현실의 실패자 그러나 환상의 성취자」로서 그 개성이 설명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시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프로이트 이론은 그 영향만큼이나 지나치게 ‘성’에 대한 해석만을 고수하고 있음으로 비판받았다. 마광수 교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성욕’에 근원을 두는 것을 수용하여 “음양의 이론으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려고 했던 동양인들의 의식구조에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가 오히려 더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술가적 기질(또는 시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 있어, 예술 창작의 근원적 동기는 ‘성욕의 대리배설’에 있다”고, “예술가 특히 시인들이 작품을 쓰는 근원적인 심리적 동기는 ‘유아기로의 퇴행 욕구’에 있다“고 전제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의 성욕이 직접 배설될 수 있는 사회란 문명 이전의 사회,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사회라고 보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욕의 억압 없이도, 예술적 대리배설 없이도, 모든 인간의 직접배설이 가능한 문명사회는 가능하다. 성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모든 이데올로기를 없애 버리고 문명 발전의 지표를 오직 “인간의 쾌락”에 둘 때, 미래의 유토피아는 원시 상태로의 복귀가 아닌 진정한 문명 상태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이 글에서 마광수 교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매저키스트로서의 여성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왜냐, 꽃이 개나리꽃이 아니라 “진달래꽃”이기 때문이고 “여성 화자가 님과 헤어지더라도 ‘밟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님과의 격렬하고 비정상적인 교합을 꿈꾸는 것이며” “꽃이 되어 님에게 마음껏 밟히고 싶은 심정이나 님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는다는 것이나, 모두 다 매저키스트로서의 피학적 변태심리를 충족시켜 그녀를 황홀경에 이르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윤동주의 「십자가」에선 배설욕구를 읽는다. 피를 흘리고 싶다는 표현이 시인의 잠재의식속에 숨겨진 배설의 욕구라는 것이다.


사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만 괴로웠던 것은 아니다. 어두운 현실 상황이라고 해서 본능이 그 작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이 시를 쓸 당시의 윤동주가 한층 정력이 솟구치는 젊은이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을 “성욕의 매저키즘적 대리배설”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유치환의 시 <바위>는 페티시즘의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의 <자화상>은 관음증적 나르시시즘으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선 매저키즘적 취향을,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에서는 페티시즘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성욕의 대리배설 욕구를 읽는다. 이상의 <오감도>를 남녀간 성교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정자들의 무한질주라고 해석하고, 김수영의 <폭포>를 “은폐적 대리배설”의 시로 해석한다. “민중적 사디즘, 집단으로서의  군중이 갖고 있는 폭발적 분노의 심층심리적 근원은 성욕이 충족되지 못한 짜증이 뭉쳐져 증오심과 분노로 변하여 화풀이의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김수영의 <폭포>는 분명 풍자적 알레고리의 시로서 성공한 작품이지만, 이 시가 갖고 있는 심층심리적 상징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김수영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잠재의식 안에는 성적 불만족이 뭉쳐져 있어, 그것이 그 시대의 암울한 상황과 결부되어 이러한 공격적 작품을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들도 미처 알지 못한 무의식을 친절히 알려주는 마광수식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보면서 해석의 다양성과 특정 이론의 집착적 적용이 가져오는 지나친 오독과 폐해에 대해 생각했다.

  상담을 받는데 의사든 상담사든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용하여 나의 모든 표현과 행동 하나하나에 저렇게 해석을 내린다면 난 그 병원을 당장 뛰쳐나올 것이다. 몰랐던 나의 무의식에 대해 놀랄만한 견해를 알려주어 절대적으로 감사하오 따위의 감정이 들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오히려 상담하는 이의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것이다.

  즐거운 사라. 그래서였을까. 당시에도 나같은 이들이 있어서? 이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다. 읽어보고픈 생각도 없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서 마광수 교수가 법적제제를 받았고 책은 출판금지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옛날인줄 알았는데 1992년이다. 불과 25년 전 우리나라의 의식이 소설책 하나를 수용하지 못했다는 데 놀랐다. 그 당시에도 온갖 외설서적은 난립하고 있던 것으로 아는데 마광수 교수의 작품이 문제시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법무부장관 후보자였던 이는 당시 마광수 작품에 대해 ‘법적폐기물’이란 표현을 썼다. 와설, 음란의 기준이라는 것이 수많은 페이지 속의 몇 개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시각은 얼마만큼일까. 사람들이,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인가,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을 건드리는 또다른 시각이 특정한 ‘이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수용되느냐, 더 널리 인정되느냐가 발생한다. 그저 특정인이나 미디어의 힘으로 평가가, 인지도가 상승하는 것을 떠나서 문학이 정치적인 이유로 ‘구속’되어야 할 일인가. 문학적 표현과 수사를 글쓴이로 동일시하는 일이 얼만큼 적정한가. 이런 의문이 계속 맴돈다.

  문학적 표현이든 그냥 일상의 말이든 특정한 표현에 휘둘리는 일은 있다. “세상에, 그런 말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앞으로는 그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드는 일들이. 이럴 때 시간이 지나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움을 발휘한 적절한 생각의 정도는, 방향은 어떤 형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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