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의 결말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이미지프레임, 2004.


  시각은 변한다. 재밌게 둘리를 보던 시절을 지나, 둘리 때문에 웃고 울던 때를 지나 고길동에게 연민을 느낀 시절이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말썽많은 객식구를 갑작스럽게 돌봐야 했던 고길동의 밉살스러움이 이해가 되기도 하던 시절을 지나왔다면, 아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내가 나이가 든 만큼 강산은 여러 번 변했고 강산이 변한 만큼 세상은 외적 변화와 더불어 내적인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에 대해 가치에 대해, 아닌 것처럼 하면서 변해서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순정만화가 더 좋았던 시절이라면 이런 그림체의 만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같지만 세월은 취향에도 변화를 주기 마련이어서 공룡둘리의 나이듦을 보고 싶었다. 아기공룡은 다행히, 누구의 관점에서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멸종하지 않았고 나이들었다. 익살스럽던 그 아기공룡의 현재는 고개를 돌리면 무수히 보이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룡 둘리. 그런 이야기를 닮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주민등록증만 주어진다면 어김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을 그대로 밟고 있는 둘리. 주민등록증이 없다면 영락없는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인 공룡 둘리다. 여전히 둘리가 만화의 세계라면, 둘리의 이야기가 환상이려면 둘리의 손가락에서 발휘될 초능력의 존재다. 그렇게 둘리의 손가락을 제거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완전한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그 손가락마저도 다른 이유가 아닌 프레스기에 잘리게 함으로써 둘리는 엄연한 이 땅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 만화가 나온 시기는 신자유주의, IMF를 지나 구제금융이 촉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던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 당시의 피폐한 분위기가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가려져서 그렇지 여전히 이 억압적 노동환경은 진행되고 있으며 둘리의 친구들의 삶 역시도 둘리와 다르지 않다. 몸을 파는 또치의 삶, 공갈젖꼭지는 벗어버리고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희동이, 친구들을 해부용으로 팔아넘기는 철수. 어릴 때 보던 그 아이들은 모두 변했다. 낯선 것에 호기심과 연민을 가지고 돌보던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던져준 환경에서 그 환경의 길들임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도우너의 사기로 인해 빚에 쪼달리다 사망한 길동이나, 그래서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철수 또한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친구들, 가족들의 존재가 놓인 환경을 헤쳐나갈 수 없게 하는데서 더욱 변화하게 한다. 더 구렁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좀처럼 명랑만화의 분위기를 생각할 수 없는 황량한 둘리의 시대.

  말안장에 앉으면 돈이 마구 쏟아지는 정유라가 송환되어 5월의 마지막날 한국으로 입국한다. 대한체육회도 한국마사회도 어떻게 흘러온 구조인지 권력에 아첨하고 돈놓고 돈먹는데에 전력을 쏟는 사이 마필관리사가 사망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확정되기도 하는 분위기이고 무엇보다 닫힌 환경이 아니라 문제가 있으면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수립할 수 있는 정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데 39살 마필관리사는 자살을 선택했다.

  역시 구조적 환경이 만든 인간적이지 못한 처우 때문이다. 태생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 인간이 있기도 하고 한계단이라도 위에 서 있으면 ‘갑’의 본능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있다. 구조가 인간의 합리적인 인식마저도 도태되게 만드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만화는 둘리에 관한 이야기 외에 여러 편의 만화가 수록되어 있다. 하나같이 현실과 그 현실을 이용하고 현실에 이용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아픈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든 사회에선 역시 쉽사리 병들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그럼에도 아무도 모르는, 그저 비품취급받는 의자처럼 우리의 존재가 구조속에 갇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게 되는 것.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적인 사람의 마음이 삶의 위안이고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에도 사회의 변화는 처절하고 아프게 흘러간다.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룡의 시대가 다가오지 않기를. 공룡시대의 끝은 종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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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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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열망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2015.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런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풍경화같은 표지가 고요하고 여유로운 느낌과 약간의 쓸쓸함도 깃든 듯한데, 제목으로서는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지만 또한 대체로 산문집이란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해 보고 느낀 것들을 다루기에, 소설적 상상력이 아닌 일상의 줌파 라히리의 생각을 맛볼 수 있는 책이려니 한다.

  한마디로 하면, 이 책은 작가가 새로운 언어,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과정의 이야기다. 그 과정은 집안에 들어 앉아서 마냥 책을 달달달 외우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고 기간 또한 길었다. 아마도 이 산문집의 묘미는 작가가 이탈리아어로 이 산문을 썼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산문이라서인지 소설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문장의 맛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탈리아어로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탈리아어를 안다면 잘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번역본으로 마주해야 하는, 이 언어의 벽. 그래서 작가처럼 이렇게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강하게 든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을 읽고 싶을 때, 번역된 책이 매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면 늘 원서를 직접 읽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다음날이면 실천할 의지를 잊어버린다. 그저 세상엔 너무나 많은 나라가 있고, 그만큼 다양한 언어가 있기에라며 효율성을 생각하며 늘 번역인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작가는 왜 이탈리아어를 배울 생각을 했을까. 외국어를 배울 생각을 한다는 것이 기이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영어권 국가에서 몇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반사이니까. 작가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 직접 로마로 향한다. 이탈리아 친구도 없다는 작가의 이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그것은 2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잠시의 방문으로 스치듯 강렬하게 자리잡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던 작가는 마침내 가족과 함께 로마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를 공부한다.

  그것은 이탈리아어에 대한 갈망 이전에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주요한 이유가 된다. 줌파 라히리는 “창작에서의 안정감이 위험하”기에 이탈리아어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미 익숙하고 자유로운 영어가 아닌 변화와 새로운 표현을 위해 선택한 이탈리아. 작가는 영어로 된 책을 읽지 않고 이탈리아어로 된 책을 읽으며 생활한다. 작가로서의 열망이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모험은, 줌파 라히리에게 이탈리아어를 익히는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에의 의지도 심어주는 것이다.

  줌파 라히리가 이 산문을 쓴 후 이탈리아에서는 문화와 민족과 인종 간 이해와 평화를 도모했다고 상을 건넸다. 그런데 네루다나 권터 그라스도 받았다 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외국어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자체를 습득하는 것이다. 그 언어의 사고체계를 습득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문화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가 이 유명한 작가에게 이러한 상을 수여하는 것은 감사함일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구명대 없이 기슭을 떠나는 일’인 만큼 매우 절절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니까.

  여전히 작가가 로마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에서 생활하는 이 여정은 마치 여행기처럼 느껴진다. 20년 전의 잠시의 방문처럼 가볍게 로마에 얹어져 있는 느낌이 드니까. 어떤 느낌일까. 주로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작가 자신이 이주민으로 생활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말에만 속했다. 난 나라도, 확실한 문화도 없다. 난 글을 쓰지 않으면, 말로 일하지 않으면, 이 땅에 존재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고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75~76


  작가의 글쓰기.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는 피난처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보아오던 이민자의 정체성이 완전히 작가 자신의 감정을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규정지어 얘기하는 것을 작가는 탐탁치않게 여기겠지만 인도인으로 미국에 살고 있다는 그 상황이 어릴 때부터 줌파 라히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알듯한 느낌이었다.


 내 불완전을 잊기 위해, 삶의 배경으로 숨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써왔다. 어떤 의미에서 글쓰기는 불완전에 바치는 경의다. 사람처럼 책은 창작 기간에는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p94


  이 산문집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차분하고 고요하다. 언어를 배우는 일이 그저 ‘말’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에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작가로서의 감정과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산문집이다. 그래서 심심하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그것은 소설과 비교한 문장에서 느끼는 것이고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줌파 라히리의 생각은 여전히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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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공무원이라서 행복합니다 

- 고군분투 사회복지 공무원 성장기 

함창환, 바이북스, 2017-01-15.


  5월이라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여러 가지로 분위기가 들떠있다. 착 가라앉은 것보다 나쁘지 않다 생각하지만, 이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가 훗날의 이 상태에 대해 또다른 얘깃거리를 안겨 줄 것이다. 그래도 일단, 희망과 기대를 긍정적인 선상에서 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이 긍정인지 부정이 될 지는 일의 과정과 결과가 알려주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지 너무나 오래인지라 갑작스럽게 터져 나올 일자리에 대한 전망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정부로서야 일단 공공일자리 부분의 증가를 먼저 제시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공무원이 많은 사회가 좋다, 나쁘다라는 주장이 예로부터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부가 민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따르니까. Working poor가 되려도 Working할 곳이 없어 Working poor에도 속하지 못하는 poor한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일단 양적인 Working할 곳의 증가 소식은 반길만하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공공일자리 창출과 연이은 공무원 증원 채용계획,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소식이 며칠 간격으로 연이어 이어지는 현상을 보면서 기분좋음과 씁쓸함이 교차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않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의 차이가 역시 농간이었음을, 가치의 의지의 문제였음을 실감하는 것은 기쁘지 않은 일이다.

  2016년 5월 28일이 1년 만에 되돌아왔다. 젊은 청년이 떠난 자리에는 꽃이 놓였고 사람들의 울분이 가득했다. 늘 반복되어 온 열악한 노동환경이 빚어낸 19세 비정규직 수리공의 사망은 요즈음 연이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소식과 맞물려 더욱 비애감을 준다.

  일을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은 오긴 오는 걸까. 직장인이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의 희망사항이라 치고 직장인의 애환 역시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직장인이라는 말을 떼고 오로지 업무만을 가지고 행복을 나누기도 애매하긴 하다. 결국 행복하게 일을 하는 것은 개인 차이인가. 하지만 적어도 업무의 특성과 취향을 떠나 고정적이고 안정된 수입이나 처우 등에 대한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개인의 업무를 통한 성장과 발전, 그리고 만족감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일요일 저녁에 설문조사를 하면 당연 모두다 직장인이고 싶지 않을 것이고 월급날 설문조사를 하면 또한 대다수가 적정의 만족을 표할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과 만족감을 가진 이들이 갈수록 덜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업무환경은, 만족감을 가지기에 총체적으로 부실함이 곳곳에 드러나는 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헤쳐나가는 것이 개인의 마음가짐의 몫으로 되는 것 또한 얼마나 문제인가.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제목이다. <사회복지 공무원이라서 행복합니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부러운 일이고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저 말이 정말이지 책의 제목으로서의 표현일까, 실제 마음속에 오래도록 자리잡은 마음의 표현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사회복지사는 대한민국에서 여러 가지로 열악한 직업의 대표격이다. 공무원이라는 점이 다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하지만 ‘사회복지’ 분야가 이 사회에서 대접받았다는 이야긴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업종에 관한 열정페이와 같은 노동업무가 가치와 의무, 도덕으로 가려져 있다. 적절한 노동환경과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하는 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회복지사든 사회복지공무원이든 과도한 업무강도로 인한 과로사나 자살 사건도 발생한다. 물론 사회복지시설 수급자나 대상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사를 행하는 이들도 있다.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살아온 저자의 삶은 1991년부터 시작되기에 어쩌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의 역사적 전개도 함께 볼 수 있다. 전남 신안군, 섬에서 시작한 저자의 사회복지 업무는 저자가 도청으로 옮기는 것만큼이나 확대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업무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당시만 해도 일반행정직에서 사회복지업무를 진행했고 직할시 정도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선발했다. 전담 사회복지공무원 선발은 2000년에야 이루어졌으니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인식정도를 알 수 있다. 저자도 말하듯이 단지 나이가 어리고 면지역이라는 것을 떠나서 잡다한 업무를 맡았다고 하고 있다.

  저자가 사회복지공무원으로 맡은 업무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변사자 업무다. 당시 섬지역에서는 변사자가 발생하면 시신 수습 업무를 사회복지담당자가 맡았다는 것이다. 시신 수습 업무란 시신 매장까지를 포함한다. 담당자가 직접 땅을 파고 매장하였다는 데서, 그 이전 담당자는 태풍으로 인해 하루 20~30구의 변사자를 처리한 적도 있다는 경험을 얘기하는 데서,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해경에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한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해수욕장에 쌓인 수십톤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대목에선 별거 아니라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아무리 마구 버린 부탄가스가 폭발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도 말이다.

  저자는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업무들을 다 배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훗날에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하고 있지만, 엄연히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저자 자신의 열정적인 업무 스타일과는 별개로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업무 분장이나 상사의 일 떠안기기는 일종의 업무 방해 아닌가. 맡은 일을 잘 해나가는데 장애를 주는. 그러니 상사로 인해 저자가 팔이 마비되는 상황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저자는 놀라우리만큼 사회복지공무원으로서 담당 업무를 잘 이해하고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으로 업무를 수행했던 터라 그것이 무너질까 걱정되기도 했는데 저자는 의지로 극복하며, 아직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업무를 잘 수행해나가고 있다 한다. 업무를 하는 동안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며, 또한 사회복지만이 아니라 가정복지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하며.

  많은 고난과 경험을 겪고 지난 시절을 풀어놓은 저자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겠다. 저자처럼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월요일은 여전히 출근하기 싫다고 느낀다 해도 하는 일에 만족감과 자긍심을 느끼며 일할 수 있기를, 그러한 터전이 잘 정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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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6=2016.5.17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9-30.


  몇 년 전 찰나 언니가 여성사에 대한 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른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필요하다고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했다. 2014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은 있는데라는 생각만 했다. 이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고 나서야 그때, 찰나 언니가 말한 맥락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불청객 취급을 받으며 외롭고 공허하게 외치다가 어느 결엔가 묻혀버렸을 내 조상의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나와 닮은 얼굴을 한 그들이 원했을, 여전히 한탄스럽지만 제법 나아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후세에게 금세 부정당할 이는 결국 누구인가? p145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여성운동사의 계보를 이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일반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그러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차별받는 여성의 삶의 변화와 전환점을 가져오도록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다. 결과만 기억하고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거나, 알려 하지 않거나, 무심했던 사건에 새로운 기억을 새기는 작업이고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여성들의 이름이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호주제 폐지운동을 시작한 인물, 이태영 변호사. 함께 일한 스승인 유명한 임신 전문 한의사를 찾는 사람들이 전부 아들 낳는 처방만 바라는 것을 보고 남아 선호와 여아 낙태를 비판하며 호주제 폐지제를 위해 애쓴 고은광순 한의사. 강간과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에 씌어진 모멸적이고 부당한 법률을 개정하도록 노력했던 이들과 피해자들. 이들의 지난한 희생과 노력으로 변화를 위한 법률이 제·개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되지 않는 법률도 있고 그렇기에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또한 있다.

 계보를 살펴보면 느끼듯이 단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나긴 기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한 무수한 피해자가 있었다. 그 피해의 터 위에서, 더 이상 피해를 당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순간과 세월들이었다.

  

이번 살인 사건에서 여성이 사망한 것은 우연한 일이지 여성을 일부러 범죄의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니다. 또한 살인범도 사회구조의 희생자였고 정신병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일을 정치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 p140 


  위 단락은 작년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논평이다. 그런가? 그렇게 보인다. 당연히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똑같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나왔던 말과 너무나 똑같다. 이 말은 1989년에 벌어진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당시에 나왔다.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사건은 1989년 12월 6일 캐나다 공과대학에서 여학생들만을 강의실로 몰아넣고 “페미니스트들을 증오 한다” 27명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다. 14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여전히 캐나다 시민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날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도 이 사건 이후의 파장은 거셌다. 총기규제 검토뿐만 아니라 여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대한 이슈가 확산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 규정하기 꺼리던 이들이 내세운 주장”이 바로 위 단락과 같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남역 사건이 발생한 후 일단, “절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기에 급급했다. 무엇이 그토록 강남역 사건이 “절대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묻지마 범죄”이고 그저 “정신병자의 실수”라는 주장이 단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공식적인 형태로 규정되어 쾅쾅쾅 도장받듯이, 그러니 끝났다는 듯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개인 단위가 아니라 특정 단체, 정부, 언론 등을 통해 사건의 본질 규정과 이로 인해 벌어진 분위기에 대한 타당하고 명확한 추론과 분석은 차치하고 그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결론”냈으니 더 이상 그 말은 말라는 듯한 분위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로 인해 여성혐오 분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그토록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한다는 성마른 논평과 주장들 때문에.

  이처럼 이 책은 비단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에만 주목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주목한다. 그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여성문제에 관한 한 같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성차별에 관해 개혁적이고 차별이 덜하다는 나라들, 그냥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조차도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개별 사안에 대해 먼저 관련 법개정을 이루거나 먼저 그 상황에 대한 변화를 이루었다 뿐이다.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진보적이다 싶다가도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구시대의 관습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사건’이 벌어진 후에라야 그 일을 다르게, 바르게 볼 시선과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공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한 반응은 어찌 이토록 시공간을 초월해 같을까.

  그러한 ‘사건’ 속에 있던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사건’을 통해 잘못된 점에 대해 온갖 모멸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로 잡으려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계보가 아직 더 있으리라 본다. 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 책과 전작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의 아쉬운 점이라면 이야기를 담는 형식에 대한 것이다. 편집이 매끄럽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돋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생각할 때 교정과 편집에도 신경을 쓴다면 좀더 내용을 충실하게,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쭉날쭉한 글자크기, 의미없이 느껴지는 문장정렬 등이 사실 지나치게 급하게 인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특히 이런 주제의 책에 대해 일단 반감부터 가지고 보는 독자들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올 다음의 책들은 조금 더 짜임새 있는 편집형태로 책이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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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웁게 훌쩍

 

여행자의 인문학-21명의 예술가와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

문갑식, 이서현 (사진), 다산3.0 | 2016-01-25.

 

    이런 여행이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잠깐, 이런 여행? 아니 이런 장소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행을 생각했지만 준비부족이랄까, 딱히 인문학적인 여행은 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기인 연휴에 끼어 부랴부랴 여행을 다녀왔는데 첫 강렬한 인상은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황금연휴기간답게 공항 인파는 많았고 비행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행기 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서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좌석을 찾아 들어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당연 소란스러웠고 선반에 짐을 싣는 소리들이 굉장했다. 가만, 이제 여행의 출발인데 짐을 싣는 소리라니. 부스럭 부스럭. 비행기를 꽉 채운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 모두의 손엔 면세점 쇼핑백이 한가득 했다. 선반 위로 올라가는 짐은 이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손에 들린 면세품이었다. 나는 이 광경에 놀랐는데, 마치 면세품을 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행이 휴식이라면 여행지에서 만큼은 편안함을 즐겨야 하는데 인문학을 붙들고 있느냐 하겠지만 저자의 여행만큼 편안해 보이는 휴식은 없어 보인다. 장소가 주는 마음의 편안함일 것이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가 아니라 고즈넉함과 여백이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긴장이 누그러지는 그런 느낌들 말이다. 문학속에서 또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보며 상상의 나래와 비교하는 맛 또한 추가되니 일석이조다. 저자는 그런 여행의 기록을 담아 <여행자의 인문학>을 썼다.

   예술가들과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의 흔적이 있는 유럽의 스무 곳. 저자는 가는 곳에서 그들을 떠올리고, 아니 그들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간다. 이미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그렇게 조성해 놓은 곳도 있고 유달리 한국인의 방문이 잦다는 곳도 있다. 어쨌든 낯선 곳임에도 낯설지 않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곳, 작가들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는 기분은 좀 더 들뜨게 되는 모양이다.

 

고원에는 히스꽃과 잡초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입니다. 죽어서야 함께 할 수 있었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유령이 못다 한 사랑을 속삭이며 지금도 벌판을 떠돌아다닐 것만 같습니다. p15~18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요크셔의 황량한 들판마저도 인상적이니만큼 어쩌면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베아트릭스 포터의 유언처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땅에 대한 욕구일지도.

   “자연 그대로 이 땅을 잘 보존해달라.”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예술가들의 생가나 문학관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럽의 그것에 비해 부족하고 미흡해 보인다. 각 지자체의 관광 사업 수단쯤 여기는 행태도 보이고 그저 보여주기식으로만 건립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경외나 배려가 찾아보기 힘든 성장에 급급한 나라에서 살아온 터라고 이해하려 해도 씁쓸하다. 하긴 예술가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나 만드는 나라이니만큼 뭘 기대하겠는가.

 

우리가 근대화한다며 모든 걸 싹 밀어버릴 때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가 걷던 워더링 하이츠 가는 길 돌담에 이끼가 낄 때까지 기다렸으며, 우리가 눈 돌리면 잊는 사이버 잡담에 한눈팔 때 종이신문을 들췄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셜록 홈스와 스크루지와 햄릿과 피터 래빗과 해리 포터다. p58

 

  책 한 권에 스무 곳의 여행지를 돌아보고 관련 지역의 예술가의 생애나 작품들 에피소드, 감상들을 엮으니만큼 각 지역과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소개 정도로 짧다. 조금 가볍게 예술가들에 대해 맛볼 수 있는 정도랄까. 그 감상에 더해 작가나 지역에 대한 매력과 궁금함이 일면 더 깊이 그곳에 대해, 예술가들에 대해 알이 위해 다른 책을 들척여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예술기행으로서 가벼운 산책정도의 느낌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긴 연휴가 끝났는데도 사방 벽들을 보며 벌써부터 너른 들판이 그리워진다. 역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한 휴식이 필요한 나날인 모양이다. 그래도 쉬는 것 같지 않은 휴식을 맞이하지도 불편한 일상에 허덕이지 않아도 될 나날들이 될 거라는 기대감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근원적인 분노와 답답함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가벼웁게 살짝. 그동안 눌렸던 답답함을 조금은 버려도 좋으려나. 


나의 날들을 줄곧 따라다니는 저 샘물 소리. 샘들은 햇빛 밝은 맑은 들판을 거쳐 와 내 주위에서 흐른다. 이윽고 내게 더 가까운 곳으로 와서 흐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소리를 내 안에 갖게 되리라. 마음속의 그 샘, 그 샘물소리는 나의 모든 생각들과 함께 흐르리라. 그것은 망각이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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