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새잎, 2011-06-07.

 

체르노빌 사고와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원자력 발전이 굉장히 안전하고 경제적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즘 인기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정재승 박사는 탈원전에 관해 이야기했다. 에너지의 안전성 문제 등 장기적으로는 탈원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은 방송 후 같은 학교 교수의 항의로 이어졌다 말한다. 위의 말은 KAIST 원자력및양자공학과 윤종일 교수의 방송 후 한 항의성 발언의 한 부분이다. 원자력 관련 학자들과 관계자들의 입장에서야 당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한 차이와 논리를 떠나서 저 발언에 대해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원전을 없애면 당장 전력수급을 어떻게 할 것이냐, 원전 인근에서 부동산 및 다른 관련 업종을 준비하는 이들의 반대, 원자력 관련 학계 및 단체들의 반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은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무한 긍정성 때문이다.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여기에 정재승 박사 또한 인용하는 수치들이 서로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듯이 그 근거자료는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체르노빌 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다룬 이야기,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사건을 축소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체르노빌 사건 일지는 없다고 보면 되오. 촬영을 못 하게 했고, 다 비밀에 부쳤소. 누군가 뭐라도 찍기만 하면 관련 기관에서 곧장 그 자료를 압수하고 못쓰게 된 필름만 돌려줬소. 주민을 어떻게 대피시켰는지, 어떻게 짐승을 데리고 나왔는지에 대한 기록물이 없소 비극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됐고, 영웅만 촬영하도록 허락해줬소. p241.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 메아리처럼 맴도는 이 말 때문에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좀더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감정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탈원전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사고의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절규는 이성적 사고로 일관되었던 생각에 감정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러시아 환경단체가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건 후 150만명이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수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체적인 인용 통계 수치가 있다고 치자. 수치로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적다’라는 말로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인가. 몇세대에 걸쳐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고 살 수밖에 없음을 원자력전문가로서 명백히 인식하지 못할까.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는데요, 우리 아빠가 체르노빌에서 일해서 내가 아픈 거래요. 나는 아빠가 갔다 온 다음에 태어났는데도요. p386

 

   원전해체 작업을 하느라, 원전 가까이에 살았기에, 원전에 머물렀던 사람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방사능에 노출되어 생명을 잃었다. 이후 출산한 아이들도 사망, 질병에 고통받았다. 수많은 여성이 아이를 원하지만 낳을 수 없었고 출산한 경우 수많은 기형아도 탄생되었다.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라니. 지속되는 후유증은 인간뿐 아니라 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 거기서 또다시 피해를 얻고 있다. “인명 피해는 매우 적으며”라니. 인용하는 수치를 각각의 기관의 이익을 대표하는 수치를 가져와 사용한다고 해서 그 속에 “인명피해”가 없는가? 당장 폭발 후 투입되어 사망되었던 그 몇십, 몇백명의 목숨은 ‘인명피해’로 거론할 수준이 아닌가?

   안전하다. 경제적이다. 그런 사고는 원전 건설 이후 몇 건 발생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이 무한긍정성. 한번의 사고가 낳는 치명성에 대해서 완전한 방어가 있는가.

   얼마 전 창원에서 발생한 엘리베이터 사고에 대해 관계자들의 말 또한 경악스럽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 추락한 사고에서 절대로 열릴 수 없는 기계이니, 사람이 강제로 문을 연 사고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도대체 기계가 ‘절대로 열릴 수 없다’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기계적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 완벽하다는 주장. 우리는 어떤 기계도 결함을 발생할 수 있음을 알고 있고 노후화될수록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안다. 저 기계의 안전성, 절대적 믿음은 절대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적 발언으로밖에 안 보인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도 원자력발전소, 원전 전문가들은 주장했을 것이다. 이이상의 사고는 없고 안전하고 완벽하다고. 하지만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안전하다, 완벽하다 하지만 다가올 어느 해, 원전이 있는 나라 중 어느 곳에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

   원자력의 역사는 군사비밀, 기밀, 저주 그 이상의 것(p307)이라는데 어떤 기밀이 있어 전문가들은 ‘원전’을 찬성하는가. 아니 전문가의 차이인가. ‘어떤’ 전문가들은 탈원전에 찬성하니까. 그렇다면 그토록 탈원전에 반대하는 집단은 누구이고 무엇때문인가. 설마, 원전을 지음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이득을 원해서일까. 원전이 존재해야 당장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 ‘재앙’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가, 특정한 기득층의 일상적인 사고수준일까. 떠도는 ‘핵피아’. 믿지 않고 싶지만 그동안 이 나라가 굴러온 형태가 있으니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는 슬픈 현실.

   9시 등교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통학버스 운전자들과 맞벌이 부모는 반대했다. 출근시간 동안 아이를 맡길 데가 없다는 이유, 그리고 통학버스 운전자들은 생계보장을 이유로 들었다.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생의 등교·등원 시간의 차이로 수입을 얻는데 일괄적으로 등교시간이 정해지면 수입의 구조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너무나 오래 굳어진 교육정책 속 등교시간. 일반적인 성인의 출근시간보다 빠른 아이들의 등교시간이다. 그러한 교육정책 때문에 등교 서비스를 행하는 ‘직업’이 발생했을 것이다. 대학생 연합기숙사를 짓는데 동네 주민이 반대하는 이유의 내실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임대업’을 통해 수익을 얻기 위함이다. 다른 반대의 목소리 또한 허무하게 메아리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가치에 대한, 바람직한 것에 대한 것은 차치해버리고 당장의 ‘내 이익’ ‘나만 돈벌면 장땡이야’란 사고가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너무나 떳떳하게 그 이유를 내세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있다지만. 결코 무너져서는 안되고 보호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탈원전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원전정책의 문제점에 대해 잘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굳건하게 한다. 단지 당장의 전력 공급을 이유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허우적거릴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들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오로지 “인명 피해는 적으며”와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는 무한낙관과 긍정주의로 당장 한 세대가 살아갈만큼의 앞날만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토록 적은 수치만큼의 배포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생명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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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7-1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양산되고 있는 핵폐기물은 완전한 안전 처리가 사실상 없다고 하죠. 아무리 강력한 밀폐 용기에 담아, 아무리 깊은 몇 백 미터 지하에, 아무리 두꺼운 콘크리트 저장고에 밀봉·저장한다고 해도 누출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고 하죠. 원자력 발전, 핵발전은 현세대가 전기 에너지를 얻는 대가로 미래세대한테 핵재앙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봅니다. 에너지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죠. 한정된 지구 에너지 총량에서 방사능 물질을 태워 에너지를 얻었다면 그렇게 얻은 에너지만큼 미래의 어느 시공간에 싱크홀(sinkhole)처럼 거대한 에너지의 공동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지구적 체계는 자체적 평형 기제를 발동시키겠죠. 그때 거대한 에너지의 공동에 인류가 버린 대량의 핵폐기물들이 유입될 것은 필연적 결과일 것으로 보입니다. 방사능 대재앙은 그렇게 시작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시나리오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핵재앙은 터질 것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모시빛 2017-07-11 19:21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마냥 무지와 유언비어로 치부해버리는 정부나 전문가들의 행태가 불신을 더욱 조장하는 느낌이죠. 아무래도 정보에 한계일 수밖에 없는 국민들을 상대로 정쟁이나 이념문제로 치부하며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죠. 막연한 두려움을 정확한 근거로 설명과 설득하는 일이 늘 생략되었으니....사람들의 선함을 믿고 싶지만 또 기대할 수 없는 게 사람인지라......에고 참재앙은 인간인건가요....
 


동화책을 덮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2016.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를 읽으며 보통의 소설이 생각났다. 한때는 보통의 책을 즐겨 읽었는데 이 책은 보통이었다. 흥미를 몰고 온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같은 형식이지만 그래서 형식미는 더 이상 새롭지 않았고 줄거리와 작가의 철학적 견해에도 독창적이고 깊이있는 통찰이 없었다. 보통의 글이 재미가 없어졌나 했는데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제목을 다시 보며 알았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후의 동화는 보고싶지 않고 재밌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후의 일상에 대해서는 넌더리 날 만큼이나 잘 안다는 생각과 맞물려 소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것이다.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그 어떤 아는 체, 철학적인 말보다 그냥 상황을 보여주며 스스로 느끼는 것이 더 강렬하게 와 닿는다고 생각했다. 결혼 이후의 생활과 부부의 생각들에 관한 것으로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그래서 보통의 이 소설보다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가 더 강렬했고 같은 내용에 대해서라도 더 생각하게 했고 느끼는 것이 컸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고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말해 라비와 커스틴이라는 평범한 이들의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에 관한 이야기다.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라 말하는 작가의 사랑의 의미가 결혼 생활과 맞물려 어떻게 전개될지 보는 것은 익숙한 길로 달리는가, 돌아가는가, 전혀 다른 길로 가는가에 대한 궁금증과 같다. 보통 결혼이 사랑의 결말이라 생각한다고 보면 보통은 이와 다르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고 또 여러 편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접한 후에야 라비는 몇몇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ㅡ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ㅡ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작가도 지적했듯이 결혼은 낭만과 환상의 감정에서 결정하고 결혼생활은 낭만을 현실적으로 얼마나 잘 조리하는가의 문제로 넘어간다. 어찌보면 한마디로 ‘꿈깨라’ 아닌가. 결혼도 결국 보다 친밀한 사람에 대한 관계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진짜 러브스토리가 이런 것이라고? 결혼하고 난관을 겪고 돈문제로 걱정하고 자식을 낳고, 그리고 외도라… 이것이 서양스타일인지 결혼생활이라는 보편에 필연적으로 포함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외도의 문제는 특별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고’ 정도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토록 당연한 수순의 이야기로 배치되면, 그렇다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 이견이 시작되면서 점점 쌓이고 커져가는 서로에 대한 감정과 결혼에 대한 의미. 상대방에게 느꼈던 애정과 충만함이 사그라지고 점점 토라짐과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증가하고 또한 무심해지며 마침내 섹스 또한 시들해지는 중에 외도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이 외부적이면서도 내부적인 ‘사건’을 맞닥뜨리며 외도 당사자는 스스로의 내면에 귀기울인다. 오로지 그 행동에 대한 ‘제발저림’으로 논리를 통해 이 난관을 극복하려는 외도 당사자의 노력이 참, 눈물겹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새롭게’ 바라보고 이에 대한 기존의 관념적이고 통속적인 개념을 숙지하는 과정. 이 일련의 과정에서 결론을 어떻게 내리느냐가 결혼의 종지부로 가는 건가. ‘외도’라는 큰 사건이 없다면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끔 하는 계기는 무엇이 될까. 한국의 경우라면 외도보다 ‘시댁과의 관계’ 고부관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거기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을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이 모든 것을 거쳐, 지속발전한 관계를 이루기 위한 결론은 낭만은 좀 묻어두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소설에서 드라마에서 본 이야기들에 몰입되어 현실을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좀더 우호적이 될 것과 더불어 완전히 이해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결혼이 준비되었다고 느끼는 때라고 말한다. 파트너는 완벽하게 서로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취향의 차이를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옳거니 하다는 것이 매우 현실적인 조언임을 실감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참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마침내 행복한 미래를 위해, 특별함을 특별화하지 않아야 하는 삶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 모든 난관 뒤에 그 어떤 깨달음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기도 하면서, 애처로운 일인듯이 여겨진다. 왜,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수많은 간접경험으로 학습함에도 불구하고 적용에 이르러서는 실패하고 마는가.


그들은 함께 이뤄온 것에 황홀한 충성심을 느낀다. 다투게 되고 화나고 웃음 나고 어리석고 아름다운 그들의 결혼 생활은 틀림없이 그들만의 것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기까지 온 것,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노력하고 그때마다 새로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결혼 생활을 지켜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여기까지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많기도 많았을 텐데, 이별이 자연스럽고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결혼 생활에 머무른 것은 기이하고도 신기한 업적이며 두 사람은 그들만의 전투로 단련된 상흔 입은 사랑에 충성심을 느낀다.


  라비와 커스틴의 이 이야기들, 그리고 다다른 결론. 전투로 단련된 상흔에 느끼는 사랑이여. 이 전투의 승리는 승리인가. 영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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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살은 자살일까 살인일까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4-05-15.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뉴스든, 기사든 항상 피해자 혹은 가해자의 평판에 대해 말한다.  

 “평소 A씨는 친구로부터, 이웃으로부터, 가족에게 ……한 사람이었다.”

  자신과의 관계의 일부를 전부라 생각하거나 나에게 행하는 행동이 내 이익을 기준으로 형성되기도 하는 상대에 대한 감정과 판단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특히 가해자의 경우, 가족은 그렇다치고 어떤 경우엔 ‘그럴 리가 없다’ ‘나한테 인사도 잘하고’ ‘나한테 먹을 것도 잘 사주고’라며 착한 사람이라는 이웃의 ‘증언(?)’이 덧붙으면 기막힌 현장에서 도대체 저런 인터뷰는 왜 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한사람의 일부만을 보고 전체로 생각하는 그런 것을 심리학에서 무슨 오류로 부르던가.

  내게 질문을 하면 난 뭐라고 대답을 할까, 생각해본다.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쓰시마 슈지에 대해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에 대해서…. 어쩌면 연민을 느낄 법도 한데….

  자전적 소설이라서인지 작가와 요조가 너무 동일시되었다. 어느 순간 소설의 주인공으로 아니라 요조를 실제 작가인양 여기며 바라보게 되었다. 다시, 생각할수록 연민을 느낄 법도 한데 다자이 요사무를 위한 연민은 허락되지 않았다. 시대적인 고뇌를 느낄법한 시기였음에도 시대적 고민과 인간존엄, 가치 등등에 대한 고뇌를 읽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자이 오사무에게 요조에게 냉정해졌다. 자살한, 특히 젊은 나이에 자살한 작가에게 느껴지는 연민조차도 흐릿했다. 이 소설이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그토록 열렬한 환영(?)을 받은 이유도 작가의 영향을 받았다 하는 이유도, 감정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해를 배제하려는 노력이 가미된 것처럼 나의 감정과 사고는 이 책에 다가가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렸다.

  우선, 일가족 동반자살이란 타이틀에 대한 거부감도 한몫한다. 명백히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을 왜, 동반자살이라 명명하는가. 이러한 프레임이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을 극대화하고 삶의 피폐함을 보여주고 안타까움을 극대화할지 모르지만, 분노의 게이지도 높인다. 이러한 명명은 은연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경우 가장의 가족 살해를 정당시하는 인상을 갖게 한다. 가장(아버지든 어머니든)이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이 생계파탄의 경우에도 개개인의 생명까지도 책임질, 살인할 권리까지 부여받은 것은 아님에도 이런 비극은 더없이 증가하고 있다. “안타까움”만을 부각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지 못하는 한 반복될 것이고 언론은 계속 동반자살이라 기사를 쓸 것이다.

  여기, 작가와 요조 역시 동반자살을 거듭 시도한다. 그리고 우연과 운명이라 하기엔 너무 자주 작가만 요조만 살아남는다. 자살의 순간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한’ 다자이 오사무의 행태는 매우 이기적이고 나약한 모습으로 각인된다. 다섯 번의 자살 시도. 그의 궁극적인 자살의 동기가 종교적·이념적인 요인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기보다 지극히 자본적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부르주아 청년의 방탕과 허세, 삶에 대한 진지함의 결여가 느껴졌다.

  물론 작가에 대해 글 몇편 읽고 다 안다고 느끼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지만 역자의 해설에 의지해 내가 느낀 느낌이 더욱 공고하게만 나아갔다. 다른 느낌이나 생각을 가져보려 했지만 거듭 실패했다. 첫 느낌과 사고가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자살 시도는 집안으로부터 비난을 사는 상황에 있거나 재정적 지원이 어려울 때 이루어졌다. 역자는 다자이 오사무의 첫 번째 자살 시도를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수재, 천재로 이름을 떨치고 집안에서 별 볼일 없는 여섯째 아들이라 홀대받고 자랐다는 그의 자전적 고백과는 달리, 장난꾸러기이면서도 공부를 잘해 귀염을 받던 다자이가 시험 공부를 전혀 못한 상태에서 시험을 치렀다가 집안 식구들의 신임을 상실할까봐 겁먹어 벌인 소동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따라서 첫 번째 자살 소동은 집안 식구들과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된 데 대한 회피책으로서의 자살극으로 간주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죽으려는 사람의 심정을 지나치게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 그렇게 보인다. 죽고자 갈망한 것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그의 짧은 생애 또한 그가 한 일이 나약함과 방종함의 표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량이라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또한 아내가 있으면서도, 그것도 두 번이나. 왜 그는 매번 다른 죽을 때면 다른 여자들을 곁에 두고 그들에게도 죽음을 건의, 권유, 강요했을까. 또한 그들은 모두 여급들인.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소설로 넘어가서, 요조의 생애 행동들 하나 하나가 광적인 행동들을 일삼아 마치 정신병자와 같이 보였는데 그는 ‘정신병동’이란 공간 자체에 갇힌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사실, 지금도 정신병원이 가지는 이미지는 격렬한 저항을 가지게 한다. 그러니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의 극심한 공포는 이해된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라고, 단한순간도 미치지 않았다고 외치는 요조를 보며 동정한다. 정신병원에 갇혀서야 갇히지 않은 자는 정상, 갇힌 자는 비정상. 인간실격을 실감하는 요조에게 인간실격의 의미를 되묻고 싶다. 단순히 정신병원에 갇히고 안 갇히고의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느냐. 

  작가는 1909년생이고 1948년 사망했다. 한참 제국주의가 극에 이를 때이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때. 지식인이라는 이름하에 부르주아지 특유의 나태와 방종을 일삼으며 말로써 인간고뇌의 모든 번민을 짊어진 듯 포장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듯이 그러나 세상이 자신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 외치며 타인을 착취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갈구하면서 여성, 특히 창녀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런 의식들이 불쾌하게 다가왔던가. 개인의 내면의 우울을 이해하지 않으려 한 순간, 요조는 내게 이렇게 평가되고 말았고 이 소설도 많은 사람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으며 의미를 파악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엔 상당히 강렬한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느낌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감정의 강도에 내가 놀랍다.

  어쩌면 후기에 덧붙인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라는 문장만 없었어도 요조를 연민했을 지 모른다 생각했다. 때론 누군가에게 연민하고 싶지 않을 때, 참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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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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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힘이 강하다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문학동네, 2017.


  남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운명과 여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분노로 나뉘어진 이야기는 분노의 힘이 강했다. 쉽고 빨리 읽히긴 했지만 운명을 읽기까지는 단조롭고 조금 지루한 기분이 있었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야 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케케묵은 방식이 지긋지긋했다. 닳고닳은 길을 따라가는 내러티브, 익숙한 플롯의 덤불, 비대한 사회소설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고 더 날카로운 것, 폭탄이 터지는 뭔가였다.


  그랬다. 마틸드가 느끼는 것처럼 운명엔 ‘날카로운 것, 폭탄이 터지는 뭔가’가 없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른다. 남녀가 만나 첫눈에 반해 사랑하고 결혼하고 남자에게 여자는 이상적인 아내이자 환상의 뮤즈인 이야기. 운명을 읽을 때만 해도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지루했다. 타인의 사랑이야기, 결혼이야기는 사실 폭탄이 터져야 읽을 맛이 난다. 타인의 불행에서 즐거움을 찾다니, 너무 꼬였나.

  결혼한 이들의 운명과 사랑에 관한, 부부의 진실함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운명과 분노를 표현하는데 너무 모자라다. 물론 알랭 드 보통의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언뜻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부분에 마음이 갔다. 모두 분노의 힘이다.

  운명이 한남자의 일생을 보여주며 오로지 이상에 기대어 환상과 낭만화된 이야기라면 분노는 한여자의 일생을 보여주며 철저한 계획과 의지로 생을 살아가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가진 그 부유함에 휩싸여 세상에 대한 어떤 걱정도 없이 살아간다. 미국의 특성이라고 하기에도 그런, 온갖 종류의 범죄들을 일삼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랜슬럿, 로토라 불리는 남자는 현실감각은 무시한 채 마냥 어린 아이의 행동으로 낭만과 환상에 더 집중한다. 그리하여 첫눈에 반해 처음 본 여자에게 청혼하거나 수입이 없는 중에도 친구들을 불러 파티하는 일에 대해서도 괘념치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준 아내 마틸드의 격려에 힘입어 천재적인 극작가의 능력을 발휘하며 늘 낙천적으로 생을 살고, 늘 아내 마틸드의 모든 것을 이상화한 남자 로토. 그러나 그는 결혼 전 아내의 남자관계에 대해 치를 떨며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거짓말이라 몰아가며 그동안의 모든 결혼생활과 이상화한 아내의 모든 것을 일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행동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행동마저 연극적인 배우이자 작가, 로토의 생은 그 외형을 보았을 때 내면을 보았을 때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다만 그 자신이 마지막에 알게 된 마틸드의 남자 얘기에 모든 것이 거짓의 연극으로 그 자신이 만들어 버릴 뿐.

  다 이해해, 그러니 결혼 전 남자관계를 얘기해봐 해놓고 찌질하게 몰아붙이는 남편들처럼 제가 한 모든 난봉의 행적들은 생각지 않는, 처녀성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기성의 극을 보여주었다.

  마틸드에게 연민하게 되는 것은 그 삶이 익숙한 플롯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진 자의 난봉질은 미화되고 삶을 위해 단한번 ‘비즈니스’적 관계를 맺은 마틸드의 삶은 ‘창녀’라는 비난을 받는다. 운명에서 남편 로토가 묘사했던 이상적인 여인, 마틸드의 모습은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마틸드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매춘부인 할머니에게서 자라고 또다시 범죄자인 삼촌의 손에 길러지며 스스로 생존을 배워야 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기억이, 감정이 삶을 지배하며 살기 위해 삶을 철저히 계획하는 마틸드의 모습은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엔 이해와 연민을 향해 나아간다. 강에서 수영하다 허벅지에 붙은 거머리 한 마리를 친구인양 여기다 자신의 발에 박혀 죽은 거머리 때문에 우는 한 아이에게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관점의 차이.”

  “비극, 희극. 그것은 오로지 관점의 문제다.”

  작가가 운명과 분노를 관통해 거듭하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관점의 차이다.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가 운명을, 분노를 결정지었다.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도 독자의 관점에 달렸다.

  이 소설은 특히 운명에서 더 그렇지만 낭만적이다. 고전적이다. 그리스로마신화와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거듭 인용되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보이는 코러스가 사용된다. 파우스트의 느낌처럼 웅장한 느낌도 든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서사의 힘이 이끈다. 각각의 생애 대한 로토와 마틸드의 생각과 행동들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는 운명과 분노는 결혼생활에 관한 운명을 이야기하기도 하겠지만,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도 내면아이가 존재한다. 한 아이의 성장에 미치는 부모님과의 관계, 그리고 가정배경들.

  돈많은 아들이 가진 것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어머니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리고 그 도전에 응한 마틸드의 대응도 놀랍다. 인상적인 것은, 마틸드에 대한 로토의 이모 샐리와 로토의 동생 레이첼의 태도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주욱 마틸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심의 행동이었고 그것은 마틸드에 대한 뒷조사를 통해 마틸드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유지되었다. 이들의 연대가 새롭게 느껴졌다. 

   

그녀의 삶이 크게 베여나간 자리들은 남편에게 흰 공간으로 남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말한 것과 산뜻한 균형을 이루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실이 아닌 말과 진실이 아닌 침묵이 있었고, 마틸드는 절대 말하지 않음으로써 로토에게 거짓말을 한 것뿐이었다.


  진실과 거짓말의 차이가 무엇일까. 결혼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굳이 말하지 않을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모두 관점의 차이. 그리고 이것은 각자 관계맺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같은 논리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영원히 관점의 차이. 내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 생애에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관점을 두고 있는 걸까.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무엇일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다른 이들의 삶은 파편들처럼 한데 모아진다. 하나의 분리된 이야기를 비추던 조명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던 또하나의 이야기를 밝힐 수 있다. 뇌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피조물이다. 파편들은 제 힘으로 한데 모여 전체를 만든다.


  마틸드는 운명처럼 휩쓸린 기억 이후에는 모두 자신의 의지의 실행이었다. 삶의 매순간이 분노였으며 로토가 죽은 뒤 더욱 극에 달했던 마틸드는 “늘 주먼 쥔 손이었지만 로토에게만 편 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틸드의 인생은 곳곳에 너무 반전들이 많아서 그 순간순간마다 안타까왔다.  

  최근 우리 문학계는 중경량의 소설 출간이 더 많고 판매율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긴 호흡의 장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아니, 그쪽 출판계를 잘 모르니 정확하진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 출판계에 번역되는 책들만 보면 미국 서점계를 휩쓰는 소설들은 모두 매우 긴 소설들이다. 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런 것은 독자의 요구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출판계의 마케팅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때론 이런 호흡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다른 나라의 출판시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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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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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포의 삶


우리에겐 새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문학동네, 2016-02-01.


  소설 속 이야기는 1960~70년대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전히 아프리카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장기독재로 인해 꿈꾸기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나라가 있다. 짐바브웨가 그렇다. 1980년에야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짐바브웨는 앞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나라들이 겪었던 실상을 고스란히 따른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장기집권하고 있는 독재자로 인해 짐바브웨는 피폐해져 가고 전세계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짐바브웨 사람들의 희망은, 꿈은 무엇일까. 짐바브웨 출신 미국 이민자인 작가 노바이올렛 불라와요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녹여 짐바브웨의 현실과 꿈, 희망들을 써내려갔다. 식민지배 전후의 상황이 담긴 소설들은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읽어본 책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반적으로 그렇다. 아프리카든 인도이든 그것은 식민 전후의 상황 자체의 유사함에서 기인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가 같은 식민지배 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차별적일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달링의 짐바브웨에서 보낸 유년기 삶을 후반부는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기 삶을 펼쳐보인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짐바브웨의 절망적인 상황과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아이다운 솔직함으로 서술된다. 어쩌면 의뭉스러울 정도로 날카롭게 상황을 전달하며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뜨끔뜨끔하다. 불편함도 지속된다. 아이가 느끼는 만큼의 슬픔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치포. 치포. 달링.

  패러다이스에는 달링이 산다. 치포가 산다. 배스터드, 갓노우즈, 스브호, 스티나도 산다. 뜻도 모르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된 여섯 아이들은 맨발로 달린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구아바를 훔치고 신발이 없어 맨발로 흙길을 달리고 엉덩이가 보이는 헤진 옷을 입으며 아이들은 달린다. 배가 불러 자꾸만 뒤처지는 치포 때문에 멈춰지지만 그래도 쉬어 가며 열한 살 치포와 함께 달린다. 치포의 뱃속에 아기를 넣은 것이 누구인지, 어떻게 넣었는지, 언제 나오는지 궁금해 하며 아이들은 달리고, 나무에 목을 맨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라지만 이내 돌아와 여자의 구두를 팔아 빵을 사 먹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 웃고 웃으며 달린다.

  학교도 없고 선생님도 없고 경찰들이 불도저로 집을 밀어 양철집에서 사는 아이들이 즐겨 하는 나라놀이에서 선호하는 나라가 미국, 영국, 캐나다인 것처럼 달링은 미국에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곳에 가면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게 풍요로울 테니까. 어른들도 희망한다. 변화를 꿈꾸며 투표를 한다. 독립한 나라 짐바브웨에서 잘 살기를 꿈꾸지만 여전히 변화없는 독재 정권의 집권. 희망은 절망이 되고 가난은 가난만을 끌어 들였다. 빈부 격차에 폭동이 일어나고 일을 찾아 떠난 이들은 병만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달링의 희망은 이루어졌다. 친구들과 헤어져 미국으로 간 달링은 배부르게 먹고, 학교도 다니고, 쇼핑도 즐기는 생활을 한다. 언어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문득문득 짐바브웨가 친구들이 그립다. 그러나 방문비자로 미국으로 들어온 달링은 기간이 만료되어 불법체류자, 짐바브웨로 가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 밤낮없이 일하는 포스털리나 이모에게 짐바브웨 식구들은 늘 돈을 부치라는 요구만 한다. 달링도 이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짐바브웨에 돈을 보내야 하지만, 어릴 적 꿈꾸었던 동경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뉴스 속 짐바브웨 상황을 보면 안타깝지만 자신은 짐바브웨의 전통도 잊어가고 말도 잊어가고 그러나 미국에선 완전한 미국인도 아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달링은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묘사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장면이 있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몇 번을 보아도 가장 마음이 아린 장면은 아이들이 ‘치포의 배를 없애주려’는 장면일 것이다. 아이를 낳다 죽기도 한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옷걸이를 이용해 어떡하든 치포의 배를 없애기 위해 이리저리 방법을 써 보지만 실패하고 어른 마더러브에게 들킨다. 마더러브에게 혼날까 걱정하는 아이들을 끌어안는 아이들과 당황하는 아이들, 그리고 치포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나비의 모습은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전 단지―우린 치포의 배를 없애주려 한 것뿐이에요. 포기브너스가 은트사로를 내려다보며 말하고는 울음을 터트린다. 치포는 아예 대놓고 엉엉 운다.

마더러브는 고개를 젓다가, 포대자루처럼 털썩 주저앉는다. 화가 난 게 아니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우릴 때리지도, 귀를 잡아당기지도 않는다. 너희들 이제 죽었다고, 엄마들한테 이를 거라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마더러브의 얼굴을 본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섬뜩한 얼굴이다. 그 낯선 얼굴엔 고통의 표정, 누군가 죽었을 때 어른들이 짓는 표정이 서려 있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그녀는 마치 안에서 불길이라도 일어난 듯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더니 마더러브가 팔을 뻗어 치포를 안는다. 우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가만히 지켜본다. 어른이 울 땐 왜 우느냐고 물을 수도 없고, 뚝 그치라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 울 땐 할말이 없다. 치포가 울음을 그치고 마더러브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치포의 두 팔로 허리가 다 둘러지지도 않는데. 행운의 보랏빛 나비가 치포의 머리에 내려앉는다. 나비가 날아가자 포기브너스가 뒤쫓아간다. 스브호와 내가 포기브너스를 따라 달려가고,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나비를 쫓으며 행운을 잡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절망의 나라에서 치포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떠나간 친구 달링을 그리워하며 아이에게 달링이란 이름을 붙인다. 치포의 옆엔, 또다른 달링이 있는 것이다. 열한 살의 치포. 그때 임신했으니 열두 살 즈음 달링의 엄마가 되었을 지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다른 나라로 떠나고 짐바브웨에는 치포만이 남았다. 달링은 혼자 남은 치포가 안됐고 짐바브웨의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우리’ 나라의 상황에 대해 가슴아파하지만 치포는 차갑게 말한다.


그 고통을 네가 겪는 건 아니잖아. BBC를 보면서 상황을 이해한다고 생각해? 아니, 친구야. 넌 몰라. 고통의 질감을 아는 건 상처뿐이야. 여기 남아서 그 고통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은 우리야. 그 고통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뿐이야.


  치포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짐바브웨에서 끝까지 남아 있던 건, 치포의 의지였을까. 그곳에서 고통을 겪으며 상처를 쌓으며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치포. 달링이, 제 아이 달링이 치포를 짐바브웨로부터 떠나는 데 ‘방해’가 되었을까. 머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까.

  피폐한 나라에서 살다가 풍요의 땅 미국에서 이민자의 정체성을 겪는 달링의 안타까움도 절절했지만, 어느덧 이 절규의 끝에 치포의 삶이 궁금해졌다. 치포의 삶은 고스란히 짐바브웨 아이들이 겪는 삶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곳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벗어나지 않은 채  “조국이면 떠나지 말고 끝까지 남아 사랑했어야 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잡으면서 살았어야 한다”고 외치는 치포. 그렇다면 치포는 제 스스로 짐바브웨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의 상처를 짊어진 채, 끝까지 짐바브웨의 절망을, 고통을 바로잡으며 살아가려 노력하는 치포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치포의 머리 위에 행운의 보랏빛 나비들이 얼른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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