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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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쓸쓸한 미래의, 시간


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문학동네.


  깡패단. 몇 장을 읽은 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으며 떼지어 모여 다니던 베니의 학창시절 친구 무리를 지칭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리하여 록을 사랑하는 음악적 동지들이 겪는 세월의 이야기가 전개되리란 예상했고, 이들의 삶이 생각보다 깡패처럼 흘러가진 않았군 하고 생각하며, 장편인가 단편모음인가를 헷갈려하며 어쨌든 책장을 넘겨가던 때.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뒤늦은 깨달음처럼 떠올려지는 문장들은 그건 미래의 목소리였다. 13장의 이야기는 몇몇 인물들의 삶을 시간의 순서없이 보여주었다. 시작점을 기준으로 삼자면 현재 음악 회사에서 일하는 베니와 사샤의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다. 그들의 인생에서 만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동료들의 삶 또한 독립적으로 펼쳐져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생애에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는 인연과 인생이 된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은 모르게, 그들 삶을 이미 엿본 ‘누군가’가 그들의 뒷전에서 미래 삶의 모습을 전한다. 지금 이 순간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며 생각에 잠긴, 미래를 생각하며 무엇을 도모할까 준비중인 그들 앞에 불쑥 불쑥 그 목소리가 나타날 때마다 애잔해진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과거의 온갖 기억들은 갑자기 떠올려져도 그것들이 깡패처럼 갑자기 등장하고 방문해도 잠시 움찔하거나 깊은 회한에 잠기게 될 뿐인데, 그런데 그들 주위로 배회하는 “너는 나중에 이렇게 될 것이다” “할 것이다” 라는 그 목소리는 너무도 슬프게 들린다. 미래를 알고 싶어 예지몽을 꾸려 하고 점성술을 의지하는 인생치고는 “미래의 예언“과도 같은 목소리에 대한 달갑지 않은 반응이 되어 버리는 걸까. 꿈꾸는 미래가 아니어서, 그렇게 되어버린 삶의 과정이 너무도 궁금해서, 미리 알아버린 삶에 대해 허망해서……. 그렇게 누군가의 삶에 대해 덤덤히 말하는 그 목소리에 감사하지 못함은 어쩔 수 없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만큼이나 갑자기 알게 되는 미래는, 그것이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 때문에 나타날 것임에도 막연함으로 아프게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과거만큼이나 미래도 ‘유실물’이다. 습관적으로 사샤가 훔치는, 그래서 타인에게는 결국 유실물이 되어 버리는 물건처럼. 소유했을 지도 모를, 그렇게 되어버릴 지도 모를 미래가 과거와 현재와 또 가까운 미래의 ‘행동’, ‘무엇’ 때문에 변할지 모르니까. 운명이란 그렇게 작은 한순간의 일로도 쉽게 우리의 생을 다르게 흐르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음에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듯 훅훅 몰아치는 결정된 미래의 목소리가 그래서 그렇게 심상치 않게 다가왔던가.


그녀와 코즈는 힘을 합쳐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써나가는 관계였다. 그녀는 괜찮아질 것이다. 더는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녀를 이끌어주었던 음악과, 처음 뉴욕에 왔을 때 만난 친구들로 이루어진 인맥과, 커다란 신문지에 휘갈겨 써서 당시 살던 아파트 벽에 붙여놓았던 일련의 목표들을 다시금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우연히 마주치고 필연적으로 관계맺는 인간들의 세상살이가 결국은 정해진 이야기를 향해 흘러간다는 건, 슬프고 재미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해진’ 운명이나 사주팔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데, 은근히 가까이 가서 귀기울이게 된다. 미쳐버릴 만큼의 궁금함을 안고서.어떤 경우엔 만족하고 어떤 때는 주눅들어 그렇게 되어 버릴 인생이라면 지금은 마음대로 살겠다는 듯이 방황하며, 어떤 때 “그딴 거에 신경 안 써” 외면하기도 하며. 그래도 인생의 어느쯤 정도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야, 내 인생은 끝났어.”  그러다가 또 문득 그 목소리에, 그 결정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외칠지도 모른다. “아니야, 끝나지 않았어!” 아직 남은 시간에 대고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고 있어요 난 바뀌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구원, 변모―맙소사, 그녀가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인가?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이토록 시간으로 인해 갖는 인생에 대한 만족감과 패배감은 항상 당겨진 고무줄과 같아 보인다. 회한하고 기대하는 인생으로서의 시간. 늘 극과 극의 서사를 달리게 만드는 그것. 이 깡패같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의 흥미로운 이야기 방식에 힘입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록음악과 매치된 시간의 이야기는 더욱 리듬감있게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시간이 비트를 달고 달려오는 느낌이다가도 한없이 느릿느릿 물러나는 느낌이다. 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의 인생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흥미롭게 전개되고 마치 아주 먼 시간 뒤에 문득 친구들의 인생의 날들에 관해 들은 것처럼 즐거움, 기쁨, 슬픔, 안타까움, 회한 등이 몰려드는 느낌을 받는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아도 늘 되돌리고픈 시간을 두고서, 늘 끝이야, 끝이야 하면서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시간을 두고서 펼쳐지는 인생.


쉼표가 나오면 노래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게 돼. 그랬다가 사실은 노래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마음이 놓이지. 그렇다 한들 노래는 곧 진짜로 끝나버려. 모든 노래엔 절대적인 끝이 있어. 바로 그거야. 시간. 끝.이.라.는.게.정.말.존.재.한.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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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오리배, 세월


세월 The Hours, 마이클 커닝햄, 생각의나무.


  빗속에선 퀴어 축제가 열린다. 무지개빛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 찾아온 어떤 이들의 기발에선 죄악과 타락과 구원의 글씨가 빗물에 흐려진다. 멀리 떨어진 어느 곳, 열아홉의 소년은 물에 뛰어든다. 그의 목숨이 강물 가운데 잡힌 채 회오리칠 때 가장 격렬한 발놀림의 오리배가 소년을 붙들어 맨다. 오리배속 두 명의 경찰관은 탈진해 쓰러진다.


  이 그림에, 왜 느닷없이 세월을 떠올렸을까. 이유없이 눈물나고 이유는 알지만 설명할 수 없는 세월.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지 모를 세월. 버지니아 울프의 그리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



몇몇 사람은 창에서 뛰어내리거나 스스로 물에 빠지거나 알약을 삼킨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대부분의 절대 다수는 서서히 어떤 질병에 삼켜지거나, 아니면 아주 행운아라면 세월 그 자체에 의해 삼켜진다. 위로 삼을 것이라곤 아주 간혹 우리의 삶이 전혀 뜻밖에도 활짝 피어나면서 우리가 상상해 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어린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그리고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이런 시간 뒤에는 불가피하게 그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더 어려운 다른 시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간을 보다 맛은 잊어버리고 뜨거움만 남은 것처럼, 뜨거움에 혀에 상처가 난 것처럼, 뒤늦게 진정한 혀가 기꺼이 짜다는 맛을 찾아낼 때처럼, 알맞게 농도를 조절한 국냄비가 미끄러져버린 것처럼… 삶의 뜨거움에 진정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너무 뜨거워서 그렇다고 문을 열고 나가면 난 로라가 되는 건가. 나를 진정시켜주는 건 문장, 속도감있는 짧은 문장이 아니라 문장의 길이가 위로의 시간인듯 어깨를 감아오는 문장 속에 푸욱 빠지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로라가 된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로라가 읽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 된다.

  1923년 런던 교외 버지니아의, 1949년 로스앤젤레스 로라의, 1999년 뉴욕 클라리사의 하루가, 맑고 투명한 6월의 하루로 평범하게 시작된다. 먼 훗날에 그 시간을 떠올리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날이 버지니아의 생애와 버지니아의 소설 속 인물들의 생으로 살아난다. 버지니아의 영향이 모든 이들의 삶에 깊게 드리워진다. 그들 하루의 행적만큼이나 더 격렬하게 흘러가는 생각의 날개들은 너무도 섬세하고 유려해서 운명이 누군가의 생각 하나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한다. 로라도 클라리사의 운명도 오로지 버지니아의, 작가의 창작의 방향 안에서 결정될 텐데, 그것을 또 엮은 작가 마이클 커밍햄의 버니지아식 창조 방법에, 무력한 일상에 담긴 의미들이 다채롭고 새롭게 보인다. 아니, 죽음이라는 그것도 자살이라는 그림자가 아른거리기 때문에 느껴지는 기분인 걸까. 

  “추상적이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관념이지, 특별히 병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죽음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일까, 지극히 현실적인 것일까. 흔히 말하는 삶을 버텨내기 힘든 고통. 거기에 더해진 수치심, 모멸감, 벗어날 수 없는 슬픔, 그런 감정에 휩싸여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에는 질병, 가난의 이름을 붙인다.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인정인 듯이 여기게 된다. 하지만 죽음은 관념일까. 또 많은 이들이 ‘도대체 그런 이유로’라는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내뱉게 하는 그런 자살도 있다. 죽은 이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남은 이들이 오고갈 대화가 그려지는 말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그녀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정상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녀의 슬픔이 흔히들 경험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 우리는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우리가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그 죽음에 의문을 품을 이유는 없다. 남아 있는 이들이 타인의 죽음에 심판자처럼 그것은 타당하니 아니니 말할 거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마이클 커닝햄의 자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삶이 가져오는 죽음에 향한 욕망이다. 문화적인 차이인지 그들은 동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도, 절망이나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보인다. 이미 그들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정착되어 있어서일까. 등장인물마다 동성에 느끼는 특별한 감정의 순간이 드러난다. 그것 자체는 고민의 영역이 아닐 수 있는 배경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안정감인 걸까. 시대가, 사회가 받아들이는 동성애에 대한 비난과 수용의 정도를 알기에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절망의 충동이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니까, 그러한 동성에 대한 사랑 또한 이겨낸 삶에서 느끼는 일상에 대한 절망이니까. 아니, 샐리와 18년이란 세월을 보낸 클라리사보다 이성과의 결혼생활 속 버지니아와 로라의 자살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하다는 점이, 달리 시사하는 바가 있는 건가. 삶속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재능에 대한 갈망, 일상처럼 찾아오는 두통과 염증들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에 세 여인이 경험하는 입맞춤은 어쩌면 생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에 달라질 것 없는 삶이라도 동성과의 순간의 입맞춤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일상의 삶에 대한 감정을 더 예리하게 파고드는데 한몫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를, 순결하고 착란적이며 일상의 삶과 예술의 불가능한 요구 사이에서 좌절감을 느낀 울프를 상상해본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머니에 돌을 넣고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음걸이를 상상해본다.


맞아, 하루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야, 하고 클라리사는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파티를 연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홀로 조용히 살기 위해 가족들도 내팽개친다. 각자의 재능과 무제한으로 주어진 노력과 가장 호사스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책들을 쓰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 일로 이런 일들만큼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평범과 일상이라는 말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상실과 답답함, 소외 또한 있다. 세 여인의 일은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결정체이고 행복과 절망이 반복된 순간들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간’, 나만의 ‘온도’가 있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짠맛, 견딜 수 없는 뜨거움. 적절한 온도를 찾지 못해 그냥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순간이, 특정한 목표를 위해 열정적으로 헤엄질을 하고 나서 느끼게 되는 허무의 순간이, 탈진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서로 다른 성격의 세 여인이 있다. 그들 삶을 가만 들여다보면 세 여인은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며 책임감 또한 잊지 않지만 또다른 역할에 대한 동경과 삶에 대한 의구심이 한가득이다. 지금 또 한 여인의 삶을 보탠다 한들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이라는 게 다르지 않은 듯 시간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듯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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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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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신은 돌연변이 아닌가


세컨드핸드 타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야기가있는집, 2016.


  무언가의 최후는 항상 비장하다. 사라진다는 것은 늘 그렇듯 안타까움을 준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라는 소제목의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가 생각났고 몇 개의 감정이 교차되되었다. 이해의 차원과 이해하지 못함이 뒤엉켰다.

  벨라루스 출신 작가가 고국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고국’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알았다. 또한 이 책을 기획한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현재를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호모 소비에티쿠스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라진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 최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살아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저서들은 한결같이 말줄임표의 문학이라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만큼은 말줄임표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더하지 못하는 것처럼 쏟아내는 말들의 향연이 인상깊었다. 감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 속에 뿌리박힌 신념과 오래도록 길들여진 삶의 양식이 인간의 의식을, 행동을 어떻게 감싸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탄핵무효를 주장하는 사람들, 여전히 박정희는 반인반신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동들을 비슷한 관점으로 쳐다보게도 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해해서는 안되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을 또 하면서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떠돌았다.  

  변화의 시대를 산다는 건, 참으로 흥분된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혼란스럽고 힘든 일이다. 오래동안 시멘트처럼 굳어졌던 소비에트 시대가 종결된 시대, 미국과 양강구도를 형성하던 소련의 몰락이라는 상황에 처한 소련인들의 절규와 기대, 설렘, 혼란들이 이 책속에 살아있다.

  생각해보면 공산주의가 사회주의가 뚜렷히 잘못된 체제라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각각은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자유와 민주’라는 부분이 어떻게 정의되고 실현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또한 그 어느 체제나 권력자의 욕망이 민중들과 얼마나 유리된 것인지 그들이 민중이란 조국이란 이름을 통해 얼마나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왔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를 구현하는 지도자, 권력가들의 가치와 신념, 그들의 욕망이 문제의 핵심이다.

  “스탈린과 닮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운전수도 있었어.”

  대한민국에도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한 연예인이 있다. 그러니 이것은 체제의 문제라고만 볼 순 없는 아주 단순한 사례다.

  지금도 빈부격차를 발생시키며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게 돈이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살아감에도 여전히 자본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이가 많은 까닭에 욕망과는 별개로 자본은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느끼는 자본의 홍수는 극악할 세계로 느껴질 거란 생각이 든다. 수많은 소비에트들이 넘쳐나는 물질에 황홀해 하기보다 혼란과 공포를 겪는다. 그들의 공포가, 절절하게 이해가 된다.


대체 우리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유연한 사회주의,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얻게 되었죠? 길거리에는 잔인한 자본주의만이 팽배합니다. 총싸움, 말다툼……. 누가 가게 주인이고 누가 공장 주인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뿐입니다. 저 위쪽 지도층에는 강도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암거래상들과 환전상들이 정권을 잡았지요. 사방에 적과 맹수들뿐입니다. 자칼들이요!


  그래서 그들은 1990년대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빠진다. 공산주의를 좋아해서, 자본주의에 길들여지지 못해서. 1990년대, 공산주의 붕괴를 원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더 나은 사회로의 희망을 꿈꾸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 그러나 그 결과는 원하던 모습이 아니어서 그들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짓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우린 정체 모를 아름다운 삶을 믿었어. 유토피아, 그건 유토피아였어.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당신들도 유토피아를 믿잖아.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시장 천국을…….


 스탈린, 레닌, 고르바초프, 옐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상반된 의견을 내놓는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그들은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갖는다. 소련, 스탈린을 찬양하며 공산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삶에 대해 적응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가치가 저하된 시대에 물질의 노예로 보이기까지 한다. 수많은 종류의 물질들이 없어도 극도로 가난하지는 않게 모두가 살았던 시대를 그리워한다.


더 이상 동화같지도 않았고, 더 이상 즐겁지도 않았어요. 자유시장을 원하십니까? 자, 원했던 대로 받으십시오! 저와 남편은 엔지니어였어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반 이상이 엔지니어였잖아요. 우리를 대우해주는 곳은 없었어요. “가서 설거지를 하세요!”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가 이뤄낸 거였어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공산주의를 묻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어요. 어린 딸이 배가 고프다는데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시대가 다같이 물질을 나누어 살아가던 시대로서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전쟁과 공포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강제노동과 수용소의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특별한’ 이유없이 밀고하면 몇 년을 수용소에 살았던 기억들을 갖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혼란이 과거의 기억을 미화하는 지도 모른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과 현재 사이의 괴리는 그들에게 불안을 조장하기에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그들의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는 안타깝게 느껴진다.


문제는 옐친이나 푸틴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노예라는 게 문제예요. 노예근성! 노예의 피! ‘신 러시아인’들을 한번 보세요. 벤틀리에서 내릴 때 주머니에서는 돈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노예에요. 위에 앉아 있는 두목이 “모두 마구간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모두 쪼르르 들어갈 거예요. 


  자유라는 것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도 가끔은 헷갈린다. 자유가 무한정 있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내게 주어지지 않는 자유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겠지 생각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만도 같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 좋아요!”라고 적극적으로 외치지 못해서 안타깝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강력한 차르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박정희 향수를 꿈꾸는 어른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향수가 진정한 향수인지를. 그들이 그 오랜 시간 길들여진 세뇌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폭언과 폭력으로 나타날 때마다 이해할 수 없음에 답답했는데, 체제붕괴라는 상황에 처한 소비에트인들의 세대간 갈등을 보면서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욕망’을 감정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이는 행태들은 인정할 순 없다.

  국민을 시민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권력을 잡아놓고 개인의 혼란과 향수와 욕망을 이유로 왕과 신을 만들고 거기에 세금까지 뿌리려는 시대착오적인 이 시대의 권력가 자본가들. 지금이 소비에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변혁기의 시대도 아니지 않은가. 이미 오래전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임에도 1990년대의 소련이 겪는 혼란을 넘지 못한 이들이 나라를 이끌어갈 주체로서의 역량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있을까. 특정한 시대의 이념과 가치를 강요하는 속에 숨겨진 욕망의 내용은 무엇인지 성숙하게 변혁기를 이겨낸 이들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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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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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와 말줄임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문학동네, 201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독특한 성격의 저서를 두고서 목소리-소설, 코러스 소설,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다성악 같은 글쓰기’라 칭했다. 논픽션 형식의,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면서도 소설처럼 읽히는 책이다. 작가하면 떠오르는 이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 목소리 소설을 처음 읽을 땐 사람들의 인터뷰를 그냥 모아 놓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 생각했다. 그러니까 작가의 글쓰는 역할이 얼마없지 않느냐, 단지 들은 것을 녹취하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내용을 떠나서 구성에 있어서도 제목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작가의 탁월한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형식이 익숙해지고서는 처음의 강렬한 느낌은 다소 약화되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내가 읽은 작가의 첫작품이었기에 그 강렬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점 외에 다른 작품보다 이 소설이 작가의 대표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고서, 또한 다른 책들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말줄임표였다. 이 책에는 수많은 말줄임표가 있다. 목소리 소설이라고 말하는데,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쏟아냈는데도 목소리를 글로 옮기고 나니 말보다도 말줄임표가……목소리를 지배했다. 말이 쏟아지는 가운데 무수한 그 휴지의 표시는 그들의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이었고 또다시 감정을 토로하는 표현이었다. 말한 만큼 그들은 감정에 휩싸이고 말한 만큼 충격과 공포에 머물렀다. 그것이 말줄임표 속에서 전이되었다. “이 책을 읽을 사람도 읽지 않을 사람도 그냥 모두 다 불쌍하다”고 말한 목소리처럼 나는 매우 불쌍해졌다. 이 수많은 말줄임표만큼, 말줄임표 속에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아서 그 수많은 전쟁의 모습은 다 안다고 생각했다. 문학과 과학과 영화와 다큐 등 다양한 매체가 구현한 전쟁을 보고 이제 충분히 전쟁을 안다고, 전쟁의 모습을 정형화시켰었나 보다. 전쟁은 수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랐다. 지금까지 알던 전쟁의 이야기는 누구의, 무엇의 이야기였던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속 비극과 희극, 아이러니, 생경함 그리고 처참함, 지독한 붉은색 지독한 검은색, 웃음과 눈물, 사랑… 이러한 이야기가 전쟁속에 전쟁터에 삶이 있었음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건, 그것이 여자들의 시선이었기 때문일까. 처음 사람을 쏘았을 때 느낀 공포, 수많은 부상병들과 시체들을 볼 때의 처절함, 그 속에서도 느끼는 사랑… 여성의 이야기는 달랐다. 전쟁터의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읽거나 들어서 익숙한 내용, 그러니까 어떤 이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뒀는지, 아니면 어떻게 패배했는지, 어떤 기술들이 사용됐고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의 내용은 아예 없거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전쟁에서 늘 여자는 ‘피해자’로 각인되고 규정된다. 전쟁터를 경험하지 못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돌보며 또한 가축을 돌보며 마냥 전쟁터에서 직접 총을 쏘고 있는 남편을, 동생을, 오빠를,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이 전쟁 속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렇지 않고 전쟁터에 있다면 간호병이거나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나라의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끌려간 소녀들이었다.

  이 책 속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다.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가기를 원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저격수였고 탱크를 몰기도 했지만 전쟁 후 이들은 영웅이 되지 못했다. 전쟁후 종전을 기념하며 참전한 군인들이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될 때 여성들은 국가의 영웅도 동네의 영웅도 집안의 영웅도 되지 못했다. 쫓겨나고 놀림받고 배격당했다. 이유는 “단지 그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여성의 몸으로 전쟁터에 군인으로 있는 일은 신체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반복되는 생리. 그러나 전쟁에 여성들을 위한 물자는 지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쟁터에서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도 않다. 전쟁에선 수많은 여성들의 손길이 필요했다. 단지 부상병을 돌보는 일에서만이 아니라, 간호병으로서의 역할만이 아니라.


    - 전쟁터에 가져갈 물건으로 뭘 챙기셨어요?

    - 사탕.

    - 네?


  전쟁터에 가져갈 물건으로 사탕을 챙기는 여성. 하긴 전쟁터에 달리 무엇을 들고 갈까. 사탕을 손에 쥐고 누군가에게 건넬 사탕처럼, 전쟁터라고 사탕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전해져 한순간이라도 사탕의 달콤함이 전해졌다면, 사탕이 녹듯 전쟁의 힘겨움이 일순간이라도 녹을 수 있었다면 그것 또한 그대로 좋았으리라. 그렇게 여성들은 전쟁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들의 기억 속엔 그처럼 사탕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소녀는 여성이 되어간다. 하필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시기임에도 소녀들은 전쟁터에서 아름다웠고 또 그런 모습이고 싶어 했다. 삶이 모두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았다.


조국이 우리를 어떻게 맞아줬을 것 같아? 통곡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4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뺨이 화끈거려.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여자들은 우리에게 소리소리 질렀어. ‘너희들이 거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 젊은 몸뚱이로 살살 꼬리나 치고……우리 남편들한테 말이지. 이 더러운 전선의…… 군대의 암캐들아……’ 우리는 정말 온갖 말로 모욕을 당했어…… 


  전쟁이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아니, 필사적으로 전쟁후 ‘영웅’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한 보상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또다시 전쟁 때 그들을 동원할 수 있기에, 그랬다. 하지만 또다시 전쟁이 오면 여성들을 동원하진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쟁후 모두가 여성을 나몰라라 했다. 이 분위기가 참전 여성들 스스로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그토록 공포의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30년이 지나서야……모임에 초대도 하고……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이해할 수가 없었어……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이 책에서 전쟁 후의 삶에 대해 더욱 눈길이 갔다. 어떤 누구에게라도 전쟁의 경험은 고통스럽게 회상될 수밖에 없고 매일을 트라우마로 힘들어할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이들은, 특히 남성들은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전쟁을 증언처럼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매년 전쟁기념식에 참여할 수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전쟁의 상처를 많은 사람들이 위로해 주고 그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함께 전쟁의 고통을 나눠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어떤가. 함께 전쟁터에 있던 남성들에게조차 외면받았다. 전쟁터에서는 그들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요, 사랑인 듯이 대하던 남자들도 전쟁후에 그들 남성들과 여성을 분리했다. 동지애도 없었다. 여성은 그들의 전우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목소리는 묻혔다. 여성들은 전쟁에 참여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영웅, 그까짓 거 필요없고 고통을 상처를 말하며 치유하고 치유받고 싶어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그러니 여기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단지 전쟁에 대한 기억을 또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을 떠나서 여성들 자신의 고통을 소리내어 치유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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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격자들 - 어린이 목소리를 위한 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연진희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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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명의 아이들


마지막 목격자들-어린이 목소리를 위한 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글항아리, 2016-11-25.

 

   전쟁의 승자라는 말만큼 서글픈 환희가 있을 수 있을까. 살아남았음에도 비애로 얼룩진 전쟁의 기억. 상처를 이겨낸다는 말이 글 한줄로 담아질 수 있을까.


언젠가 도스토옙스키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평화와 행복, 심지어 영원한 화합을 위한 변명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죄없는 어린아이가 그것을 위해, 혹은 그 견고한 토대를 위해 한 방울이라도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그 자신은 이렇게 답했다. “어떤 전보도, 어떤 혁명도, 어떤 전쟁도 그 눈물에 대한 명분은 될 수 없다. 언제나 눈물이 더 중요하다. 오직 그 작은 눈물 한 방울이……”

 

   작가는 서두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마지막 목격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어린이 목소리를 위한 솔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벨라루스 아이들의 경험을 전하고 있다. 벨라루스는 소련의 국경과 접하고 있어 여러 모로 극심한 피해를 입는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도 오로지 인접했던 이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땐 나치의 점령지로서 피해가 컸고 종전 후엔 그 이유로 소련으로부터 배신자라 낙인찍혔다. 지금은 성인이 된 이 ‘아이’들은 그때의 느낌과 기억을 되살리며 전쟁에 대한 ‘아이들만의 시선’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꾸준하게 전쟁의 참상을 경험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전쟁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성인들의 눈으로 들려준 다른 이야기와 달리 전쟁 당시 아이였던, 현재 성인들이 말하는 그 기억의 시간은 또다른 느낌을 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고아들 101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은 당시 14세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분명 현재 말하는 이는 성인이지만, 그때의 상황이 전쟁이었음을 ‘지금은’ 알지만 마치 최면에 걸린 상태처럼 성인인 그들은 ‘아이’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쉽게 떨쳐 낼 수 없는 기억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냥 고통스럽게 상황을 묘사하던 성인의 시각과는 달리 사용하는 언어나 묘사가 오히려 전쟁이 무엇인지,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안타깝고 또다른 느낌이 들게 한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그 상황에서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것”은 대부분 그들 부모의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을 보아도 부모의 죽음을 보아도 그것이 “죽음”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왜 사람들이 길에서 잠을 자는지 의아해 하고, 왜 아빠가 움직이지 않고 누워만 있는지 의아해 한다. 부모가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는 부모를 직접 묻기도 했고, 왜 예쁜 엄마의 얼굴에 사람들이 총을 쏘는지 의아해 한다. 왜 레일 위에 사람들을 눕게 하고는 기차가 달리는지, 독일군 의사들이 다섯 살도 안된 아이들의 피를 마구 뽑아대는지, 사람들에게 마구 총을 쏴대면서 울지 못하게 하는지, 사람들을 총살하며 왜 마구 웃는지, 왜 갓난 아이에게 총을 쏘고 엄마를 쏘는지, 왜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어내 불이며 우물에 던지는지 ‘눈’으로 보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줬던 부모는 존재하지 않고 춥고 배고픈 나날들이 이어졌다.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가 봉쇄되어 낡은 벽지로 아침 식사를 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고양이와 개를 잡아먹고 마침내 비둘기와 제비를, 또다른 동물들을 먹거나 기아로 죽어갔다.

 

난 침울하고 의심 많은 어른이 되었죠. 내 성격은 어두웠습니다. 누군가가 울면, 난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편안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난 울 줄 몰랐으니까요. 두 번 결혼했는데, 두 번 다 아내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오랫동안 날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죠. 압니다, 나도 안다고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그날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양한 영역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지만 그들의 내면의 이야기는 다르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어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공포와 충격이 끝없이 그들의 마음을 폐쇄해 놓았고 현재에서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일도 사랑받는 일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하늘도, 자연도 그들에겐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교수형을 당한 동향인들을 처음 본 순간, 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 우리 마을 사람들이 하늘에 매달려 있어요.’ 처음으로 난 하늘이 무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하늘에 대한 내 태도가 변했지요. 난 경계심을 품은 채 하늘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1944년 말, 독일군 포로가 대규모로 이동할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빵을 주었다. 아이는 왜 독일군에게 빵을 주는지 궁금하고 쓰러져 죽은 독일 병사의 모습을 보면서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지 불쌍히 여기는지 알 수 없어”한다. 11살 아이 에두아르트는 전쟁으로 엄마와 헤어졌지만 잃었지만 폭력을 당하면서도 독일군의 구두를 닦아주거나 썰매끄는 일을 했다. 유대인 친구가 끌려가지 않도록 챙겼고, 발각되어 게토로 끌려갔을 때는 주변을 돌며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적을 피해 도망가라는 아군의 말에도 달아나지 않겠다, 군인답게 죽겠다 말한다. 병원에서 피묻은 시트와 붕대를 빨고, 부패한 병사들의 시신에서 신분증명서를 챙기고, 굶주림으로 쓰러진 선생님을 위해 제 몫의 빵을 남긴다.

   전쟁속에서 공포 속에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느끼는 아이들의 모습이 웃으며 사람들을 죽이는 군인들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된다. 아이였기에 이해하지 못했고 아이였기에 더 무섭고 두려웠던 공포들. 그 시절을 살아남아 그들이 울음을 참아가며 들려주는 전쟁의 참상은, 아니 전쟁이란 큰 이름에 갇힌 ‘인간’의 참상을 보여준다. 전쟁은 총을 든 군인의 인간성도 그것을 목격하는 이의 영혼도 모두 ‘말살’해 버렸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목소리를 토해내게 하는 작가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기억들을 쉽게 털어놓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라는 존재를 통해서 하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수천명의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생각이, 실천이 찾지 못한 생생한 역사의 기록을 더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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