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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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를 모셨지

 

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문학동네, 2009.

 

   기차를 탔다. 배가 고파 잠시 정차한 역에서 급하게 핫도그를 샀다. 가진 건 만원 지폐라 어린 장사꾼이 돈을 거슬러 줄 때까지 기다린다. 기차가 떠날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급해지는데 어린 소년 장사꾼의 행동은 굼뜨기만 한다. 기차가 출발하려 한다. 기차냐 잔돈이냐. 한발은 기차를 향해 한발은 소년을 향해 가는 몸은 결국 기차속으로 빨려가 소년과 작별하고 만다. 가면서 생각하겠지. 저 맹랑한 녀석, 두고보자! 저 맹랑한 녀석, 그래 잘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저 맹랑한 녀석, 저 녀석!

   그 맹랑한 녀석 디테는 호텔 수습 웨이터이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모든 걸 봐야 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호텔이란 그런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그들을 보면서도 보지 않은 척해야 한다. 디테는 집시들이 피를 튀기는 난동이 벌어져도 아무런 동요없는 호텔에서 그가 교육받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간다. 호텔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다. 온갖 기행들을 일삼는 이들이 있고 그 행동의 바탕이 돈이라는 것을. 돈의 힘! 핫도그를 팔아 등친 돈으로 드나들고 라이스키 창녀촌에 드나들며 거금을 뿌리며 돈의 위력을 알아간다. 물론 디테의 꿈도 자연스레 백만장자가 된다. 돈의 힘!

   디테는 호텔 파리에서 영국 왕을 모셨다는 스크르지바네크 지배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지배인은 겉모습만으로도 손님이 원하는 것과 손님에 대해 척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 이유를 물으면 지배인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영국왕을 모셨지.”

   디테에게도 이런 날이 왔다. 아비시니아 황제에게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된다. 황제를 영접하는 호텔의 풍경은 상당히 재밌게 펼쳐진다. 신난 디테의 모습이 상황을 묘사하는 속에 가득하다. 이 맹랑한 소년 디테도 이제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셨지”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훈장까지 받았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다 마침내 지배인처럼 호텔리어로 성장하게 되는 걸까. 다음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디테가 이끄는 대로.

   작가는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등장인물들을 화자로 내세워 유머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블랙코미디를 펼친다. 이야기의 표면은 아, 참 재밌네 싶지만 곧 닥치는 슬픔의 감정은 끝이 없다. 그의 별명이 바로 ‘체코 소설의 슬픈 왕’아니던가. 그럼에도 표면적으로 밝게 이끄는 그의 이야기의 힘은 이 소설에서도 초반까지는 유지된다. 체코의 그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체코를 떠난 적 없는 작가의 이 작품은 1971년도지만 출판 금지로 비밀리에 유통되다 1989년에서야 체코에서 공식 출판되었다 한다. 18년을 떠돌다 정식출판된 이 책은 출판을 저지하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맹랑한 디테, 과연 성장하면서 어떤 일들을 겪기에!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디테는 들어간다. 아니 제 발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저 있었을 뿐인데 그런 상황을 맞았을 뿐이다. 디테는 자신의 생에서 불행과 행운이 함께 했다고 말한다. 디테가 독일인 리자를 만난 것은 사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것은 불행과 행운을 몰고 왔다. 어쩌면 그때부터 디테의 삶은 역사 속으로 깊이 관여된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닌 만큼 어릴 적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될지 모르겠지만 디테는 여전히 그가 호텔 속에서 배우고 익힌 방식 그대로, 그저 그 틀에서 성장해 갔다. 독일인 리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데 따르는 일은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단원과는 배치되는 일들이 요구되지만 디테는 그런 것엔 깊은, 명민한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디테의 행동은 독일을 위한 삶이 된다. 나치가 벌인 혈통주의 체코인들에겐 외면당하고 호텔에서는 쫓겨나지만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면서 디테는 다시 행운의 삶이 되었다가 폭격에 리자를 잃는, 머리가 잘린 아내의 시신을 보는 일을 겪지만 디테는 살아남는다. 리자가 남긴 희소 우표로 백만장자가 되고 호텔을 인수해 유명해진다. 이런 행운과 불운의 반복된 삶 속에 마침내 그가 원하던 백만장자가 되지만, 다른 이들이 디테를 백만장자의 부류에 넣기를 꺼린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며 백만장자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소환장을 발부한다. 디테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디테는 백만장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기꺼이 수용소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수용소에서는 디테를 아는 척하는 백만장자도 호텔 사장들도, 아무도 없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을 잃고 수용소에서 나온 노년의 디테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자연과 동물들과 함께 하며 지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과 대화한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칭찬을 받는 일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건 내게서 사라졌다. 거의 한 달 내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원래의 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종종 나는 도로를 정비하는 일을 내 인생의 길을 정비하는 것과 비교해보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한 편의 소설이며 내 인생이란 책의 열쇠는 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록 내 인생이라는 길의 처음과 끝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을지라도 곡괭이와 삽 대신 기억의 도움을 빌려 아주 먼 과거까지 돌아갈 수 있게 정비해놓고, 기억하고 싶은 곳으로 돌아가 회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왕을 모셨던 최고급 호텔 파리의 지배인에게 배워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자그마한 체구의 디테가 회상하는 자신의 삶은 어디에 방점이 있을까. 백만장자의 꿈을 쫓아 전진하던 소년 디테, 독일인 아내를 만나 사랑하며 나치의 점령속에 살았던 청년의 디테, 공산정권에 의해 수용소에서 살아야 했던 중년의 디테. 체코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에 휩쓸려 살았던 디테의 삶에서 “영국왕을 모셨지”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던 때는 역시, 운명을 수용하는 노년의 삶에서 가장 잘 어울린다. 늘 작았던 자신을 더 커 보이게 애쓰지도 않으며 호텔을 갖고 싶어하던 욕망도 디테에게선 사라졌다. 그의 삶에서의 불행에 기뻐하며 운명을 수용하는 태도는, 그가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배인의 “영국왕을 모셨지”가 약간 뻐김의 느낌이 가득하다면 노년의 디테의 “영국왕을 모셨지”는 자조가 가득하게 느껴진다. 자본주의와 나치즘과 공산주의 사회에서 디테가 느낀 삶의 태도와 방향은 전면 수정되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마주할 자신과의 이야기에서 디테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갈까.

   시대에 휩쓸렸다는 말은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해질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503, 박근혜 변호인단이 모두 사퇴한 날, “영국왕을 모셨지”를 말하는 지배인의 표정과 얼굴을 생각했다. 이들은 되돌아볼 어느 날 자신의 삶에 “공주를 모셨지”라며 어깨를 치켜올리며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을까.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시대가 합의한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합법적 절차에 의해 탄핵된 것에 대해 막무가내 땡깡으로 비호하며 제 욕망을 위해 상식과 정의를 무시하며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까. 어떤 행운을 기대하기에, 그와 같은 몰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도 역사에 무책임해도 살아감에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의 “공주를 모셨지”가 너무나 오래도록 그들 권력과 욕망을 채워주었기에 여전히 “공주를 모셨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여전히 “공주를 모셨지”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들로 인해, 생의 마지막 날에도 그러고 있을 것 같다. 영원히 자신을 공주의 노예,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디테의 회고가 참 다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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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과 어금니 아빠


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2014-09-15.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통통튀는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작가는 다작하는 작가였고 책을 내는 시기 또한 빨랐다. 그렇게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제법 읽고 난 후 어느날, 신작에도 무신경해졌다. 대체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나타내는 문체와 이야기 구조, 소재 등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어떤 작가는 모든 이야기의 차별성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읽고 싶어지는 작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게 된다. 온전히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아멜리 노통브는 내  향의 틈바구니에 있는 걸까.

  푸른 수염의 이야기는 여러 버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샤를 페로가 처음 이 작품을 쓴 이후로 수많은 변주가 있었다. 아니, 푸른 수염 자체가 변주다. 이야기의 근원이 전설과 실존 인물에 기초하여 지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샤를 페로가 이야기를 발간한 것이 1697년이니 그 이전에 푸른 수염과 같은 인물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15세기 프랑스의 질 드레 남작이 유력한 용의자다. 질 드레 남작이 푸른 수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연쇄살인범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군인으로 전쟁 후 온갖 엽기적인 행위를 서슴은 푸른 수염의 남자 이야기는 그가 실존인물이라는 데서, 그러니 그가 한 행위가 실제 발생한 것이라는 데서 경악하게 된다.

  푸른 수염으로 창작된 이야기의 변주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마 금기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  절대로 “저 방은 열어봐서는 안돼”라고 푸른 수염은, 남편은 말하고 아내들은 어떤 이유로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문을 열어보고는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성경의 이브처럼 유혹에 못이기는 여성들이 그것 때문인 양 작은 방안에 시체로 걸려 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아내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어야만 했는지, 그때의 빈방은 무슨 이유로 금기가 되었는지가 궁금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첫 번째 아내의 행동에 주목한 작품도 있었던 듯하다. 대체로 푸른 수염이 변주가 된다 해도 그 기본틀이 바뀌지 않는데 많은 이들이 푸른 수염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요소는 뭘까. 그리고 푸른 수염이 아니라 아내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은 한 여자가 월세 광고를 보고 세입자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주인은 20년째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계란과 황금에 집착하는 남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방에 살던 여자 8명이 행방불명되었지만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한 여자들의 줄은 길다. <욕실 딸린 40㎡ 크기의 방. 주방 기구 완비된 넓은 주방 자유롭게 사용 가> . 매우 싼 가격이라는 장점 외에 이 방의 주인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방에서 살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그리고, 이 소설속 모집 공고는 어금니 아빠의 가출 소녀를 모집하는 공고와 오버랩되었다. 한참 뉴스를 장식하는 어금니 아빠를 보다가 푸른 수염이 떠오른 것은 저 공고 때문이었다. “함께할 동생 구함. 나이 14세부터 20세 아래까지. 개인룸 샤워실 제공. 타투 공부하고 꿈을 찾아라. 개인문제, 가정문제, 학교 문제 상담환영. 기본급 3~개월 기본 60~80. 이후 작업 시 수당 지급.” 이 공고를 보면서 어떤 ‘문제’를 염려하지 않았을까. 사트뤼닌처럼 ‘가출’한 소녀들에게는 그런 문제쯤은 전혀 신경쓸 이유가 되지 않았던 걸까. 푸른 수염의 아내들이 연달아 사라진 것을 알면서도 그 집으로 들어가는 아내들처럼 왜, 푸른 수염의 집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며 그 방문을 열고 마는 것인지. 이 공고를 보고 찾아간 이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소설은 짧고 발랄한 20대와 칙칙한 40대의 질의응답이 주를 이룬다. 어쩌면 살인자일지 모르는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성의 제 궁금증을 알아내기 위한 행동과 물음은 필사적으로 보인다. 절대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를 보장하기 위해 용감무쌍함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에 비해 어쩌면 살인자인, 결국 살인자인 남자는 단지 한마디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한마디 말만 던져놓은 채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은 채 귀족임을 내세워 상당히 자상하고 젠틀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금니 아빠가 그러지 않았던가. 온 세상에 대해 자신이 희귀병을 가진 아이를 매우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로 자신을 포장하는.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취미’ ‘취향’을 위한 포장된 행동일 뿐이었다.

  색채 스펙트럼에 집착이라 말하고 변태행위를 취미로 삼는 돈 엘레미리오처럼 어금니 아빠의 10대 소녀에 대한 집착은 그들 스스로 내세우는 ‘금기’보다 더 ‘금기’되어야 할 사항이다. 어금니 아빠에 대해 사이코 패스라고 프로파일러들이 분석하고 있다. 푸른 수염도 사이코 패스다. 그들이 막무가내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취향’의 영역에서 마치 정당하다는 듯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들이 오래 시간 동안 푸른 수염으로 대비되어 매력적인 캐릭터로 이미지화되는 것, 현실의 푸른 수렴들이 끊임없이 속출되고 있기에 더욱 끔찍하다. 현재로선 어금니 아빠의 아내와 어린 소녀 이외 다른 아내들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사트뤼닌처럼 동화되어 버린 어금니 아빠의 딸이 ‘금’으로 변하기 전에 얼른 푸른 수염 어금니 아빠가 행한 현실적인 공포가 딸에게 명확히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그 자신이 한 일까지도 말이다.

  푸른 수염의 결말이 소설적으로 입혀진 것은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푸른 수염』은 어금니 아빠라는 이미지로 대체되어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게, 월세 공고를 통해 욕망의 대상물을 구하는 푸른 수염의 행동이 똑같았던지.....사트뤼닌처럼 그 자신 명백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기를 바랐건만 사트뤼닌은 잠시 통통튀는 목소리만으로만 남았다. 결국 제 욕망을 따르는 일에 집착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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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금니 아빠‘ 기사를 보면 인간에 대한 환멸이 느껴집니다. 님의 말씀대로 ‘푸른 수염~‘ 버전은 다양한 것 같아요. 그 만큼 소설가 들에게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고.. 저는 하성란의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라는 소설집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모시빛 2017-10-17 19:35   좋아요 0 | URL
푸른 수염을 쓰면서 저도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가 제일 먼저 떠올랐는데요...근데 당최 내용이 기억나지 않더군요.^^::: 제목만 각인되어 있고 세월이 지났다고 까마득하게..이래서 책을 읽은 후 리뷰를 쓰는 일이 필요한가 봅니다. 새삼 열심히 써야지란 생각이 언뜻 들기도 하고 sprenown님이 인상깊다고 하니 ‘첫번째 아내‘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sprenown 2017-10-17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읽지 않으셔도,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푸른수염과 결혼한 여자. 오동나무 장.푸른 수염이 호모였다는 ..이런 지저분한 얘기죠.
 
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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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소유물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황금가지,.


  “너는 내 소유물”

  여기 소유물인 여자들의 세상이 있다. 남자의 소유물로 이름마저도 삭제당한 ‘of‘의 세계. 1985년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런 여성들이 살고 있는 길리아드 공화국 속 이들 여성을 일컬어 ’시녀‘라고 했다. 소설은 시녀 중 하나인 오브프레드가 전하는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그녀의 바람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되지 않은 채 2017년에도 어김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소유물.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칠십 넘은 그룹 회장의 말이다. 회장은 ‘튄’ 것인지 외국에 있다 한다. 피해 여성이 합의금으로 100억을 요구했다는 얘기에 여성을 꽃뱀이라는 댓글들도 있다.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 문장이 눈에 띄어 “시녀이야기”속 남자들의 소유물이 된 무수한 시녀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미국 드라마 부문 에미상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했다는 기사까지 있다. 얼마 전엔 마거릿 애트우드가 올해도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이쯤되면 오늘은 자동적으로 ‘시녀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잘 설계된 날인 듯하다.

  소유물이라. 어쩌면 저런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이 이 소설이 쓰여지고 지금에도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닐까.

  길리아드 공화국을 잘 살펴보자.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 굳이 미래사회라거나 가상사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이야기는 오히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 배경이 아주 먼 옛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병과 생화학무기, 원자로 사고, 각종 환경오염으로 인한 불임의 시대, 인구가 급감하자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여 길리아드 공화국을 건설했다. 성경과 가부장제에 따른 통치를 중시하는 이 시대의 목표는 인구증가로 출산을 국가에서 통제한다. 그런 출산의 역할을 ‘시녀’들이 맡는다. 먼 나라라니, 불과 얼마 전에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출산지도를 작성했다. 지역별 가임여성수를 작성하여 게시하며 저출산의 원인이 여성들인 양, 그것이 저출산 극복의 해결책인 양 한 것이 1년이 되지 않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집권한 이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전력도 있느니만큼 왜인지 이 이야기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어제, 오늘 페미니즘과 젠더폭력도 실시간에 얼마나 오르내렸는가.

  출산의 도구로 전락한 여성의 존재는 그 기능이 작동되지 않으면 ‘콜로니’라 불리는 독극물,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폐기된다. 빨간 옷을 입고 하얀 두건을 쓰고 자궁이라는 도구를 쓰기 위해 사령관이라 불리는 고위층 부부에게 할당된다. 이들 시녀들을 감시하는 것은 같은 여성집단이고 그들 역시 ‘자궁’의 활용 여부에 따라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시녀’를 동경하는 ‘하녀’들이나 ‘폐기대상’들도 존재한다. 오브프레드가 추구하는 ‘사랑’은 간과되는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배사상인 성경과 가부장제. 과연 통치방법을 고안하고 실행한 그들 또한 이 세계에 만족하는가. 우습게도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통제와 감시속에서 규칙을 어기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성경과 가부장제의 이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길리아드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다. 시녀 재닌이 열 네 살 때 집단 강간당하고 낙태를 해야 했던 경험을 간증하는 현장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의 잘못이었지요? 헬레나 ‘아주머니’가 통통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며 말한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제창한다.

그들을 부추긴 게 누구지요? 헬레나 ‘아주머니’는 우리가 대견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하느님께서 허락하는 걸까요?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끔찍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한 어떤 이들의 논리가 저렇지 않던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이다.

  오브프레드와 이전의 오브프레드와 또 그 이전의 오브프레드가 있다. 있었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오브프레드가 오브글렌이 오브워렌이 존재하는 길리아드 공화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너는 내 소유물”이라 말하는 수많은 프레드와 글렌과 워렌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이들은 그들의 통치방식을 과거에서 배워 사용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누군가는 이전의 통치방식들을 모방할 것이다. 독재, 전체주의란 늘 그런 것들에 심취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 뭔가 그런 것에만 강하게 반응하는 화학물질을 투여한 것만 같다.

  이 소설 속 세계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이의 반응이란 말인가. 어느 지역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믿을 이야기다. 시녀로 살아가는 오브프레드에가 겪은 일들은 무수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이 ‘극적’인 느낌이 덜한 건 이미 이 세계 자체가 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브프레드가 과거 회상으로 덤덤하게 그 이야기들을 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에 당연 혁명 세력이 없을 리가. 오브프레드는 열성적인 혁명세력이라기보다 오히려 이 체제에 순응해가는 인물이 되어 간다.

  가상과 과학과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어슐러 K.르귄과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이들 소설들 모두 가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는데도 어쩜 이토록 현실적일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답은 정해져 있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자인 오브프레드의 수동성과 여성연대이다. 문제에 대한 ‘자각’과 함께 변혁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상이 아니라 체제 순응적인 여성. 그 시대를 기록했다는 것으로 오브프레드의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생각해보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외치는 ‘사랑’이 상당히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그렇게 볼 때 여성연대, 그들간의 결속력이 약한 것도 여성들 스스로를 감시하게끔, 서로를 질투하게끔 한 체제에 순응한 오브프레드와 같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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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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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임스들

길리아드, 메릴린 로빈슨, 마로니에북스, 2013.


  길리아드를 길+일리아드의 합성어로 생각하며 길에서의 이야기로 느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이 느낌과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그 생각을 이어가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길르앗(Gilead)은 요르단 북서부를 가리키고 선지자 엘리야의 고향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31장에 ‘길르앗의 향유’와 함께 나온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리라   짐작하게 된다. 이 책에선 화자가 살고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책의 화자는 제임스 목사이며 그는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를 쓴다. 일흔 일곱의 제임스 목사가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오랜 시간 동안을 아버지가 없이 살아갈 일곱 살 아들에게 남기는 이 편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차로 인해 서글픈 감정이 들게 만든다. 아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이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 편지는 아주 길고 오래 이어진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아들이 살아갈 나날들을 위한 이야기이기에 진중하다. 작가의 문체 역시 담백하고 마치 시골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집을 떠나 길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어린 존 에임스 목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생을 덤덤하게 얘기한다.

  존 에임스들의 이야기라고도 붙일 수 있을 만큼 길리아드에는 존 에임스가 많이 등장한다. 먼저 존 에임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존 에임스이며 목사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친구인 보턴 목사는 친구 이름을 붙여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존 에임스들의 생과 갈등이 등장한다. 존 에임스 목사는 아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가계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그 시대의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출산 중에, 딸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존 에임스 목사는 오랫동안 홀로 살아오다 노년에 나이 차이가 많은 아내와 결혼하고 아들을 둔다. 삶이 좀더 건강하게 이어진다면 좋으련만 존 에임스 목사는 점점 기력이 약해져 갈 수 없다.

  존 에임스 목사가 다소 정적으로 느껴진다면 목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좀더 동적이다. 두 사람의 갈등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대로 목사인 집안에 신자와 무신론자와의 갈등, 종교 노선의 갈등이 있다. 존 에임스의 할아버지는 쇠사슬에 묶인 예수의 환상을 보고 노예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조부는 남북전쟁 참여를 권하는 설교를 하고 북군 소속 군목으로 참전하며 전쟁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다. 이런 조부와는 달리 아버지는 평화주의자라서 갈등이 반복되고 존 에임스의 형은 독일 유학을 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어 돌아와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길리아드는 존 에임스들의 터전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동료이자 친구인 보턴은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존 에임스 목사에게는 이것이 달갑지 않은데 존 에임스 보턴이 마을에서는 알아주는 문제아로 낙인된 때문이다. 보턴 집안 역시 목사인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지속된다. 존 에임스 목사가 이 보턴 부자의 갈등에 개입해 중재하지만 망나니같은 보턴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적인 갈등과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존 에임스 목사의 이 마음을 무색하게 보턴은 가족에 대한 책임과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과 용기를 얻고자 하는 진지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이 ‘노예해방’에 대한 관점과 이어진다면 존 에임스 보턴이 표면적으로 드러낸 갈등 역시 인종차별, 흑인에 대한 차별을 드러낸다.


목사로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지. 사람들은 목사가 다가가는 걸 보면 얼른 화제를 바꾼단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서재에 찾아와서는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삶의 겉모습 속에는 많은 것이 있어. 모두 그걸 알지. 많은 악과 두려움, 죄책감이 있고, 도저히 외로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큰 외로움이 있기도 하단다.


  존 에임스가 목사인 만큼 사람들은 그에게 종교적인 믿음과 영혼의 평안을 얻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가 목사가 묵직하게 앉아 갈등들을 지켜보고 있거나 자신을 찾아와 내면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것이 활동적인 모습과 대비되면서 잘 어울린다. 그 나지막한 영향력이 좀더 단단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가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존 에임스 목사님의 설교도 함께 한다. 곳곳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아들의 삶에 길잡이가 되고픈 목사의 마음도 갈등을 지켜보며 갖는 생각도 일찍 생을 마감한 아내와 아이에 대한 그리움도 남겨질 아내와 아들에 대한 마음도 편지에는 담겨 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오면서 쓸쓸해서 책을 읽은 시기와 나쁜 친구라도 친구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시기가 묘하게 번갈아 나타난 데 감사하지. 살면서 늘 두 감정이 번갈아 나타나지. 인간적인 것들에 굶주리게 되면 책이 들려주는 불운함이나 화려함, 뻔뻔스러움에 끌릴 수도 있단다. 네게 그런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만.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언27:7).” 생각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쾌감이 발견되기도 하지. 그것은 아비로서의 지혜다만, 신의 진실이자 내 오랜 경험에서 알게 된 것이기도 하단다.

  

  이 편지는, 아니 소설은 썩 잘 썼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문체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은 없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 느낌보다는 할아버지에게 듣는 인생사로 더 다가왔다. 이리저리 생각나는 대로 쓴 편지는 격정적인 토로보다는 조용히 뒤따르는 느낌이 들고 잠깐 딴 생각이 들게끔 해서 글을 놓치는 지루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1880년에서 1950년대의 조용한 시골마을의 정경이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때의 사회 역시도 마냥 조용하게 흘러가지 않았겠지만 종교, 신과 믿음에 의지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려 했던 목사의 삶의 노력들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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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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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흘러간다.


스톤 다이어리, 캐롤 쉴즈, 2015.


  사람이 태어나서 겪는 대표적인 생활사건이 결혼과 죽음이다. 흔히들 사회적인 어떤 ‘사건’들이 인생을 좌우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기본적인 생활사건에서 인생은 충분하고도 길게, 영향을 받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생활사건 중에서 결혼과 죽음이 차지하는 스트레스 지수도 매우 높다. 『스톤 다이어리』는 이와 같은 인생의 생활사건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펼친다. 한 여성의 일대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는데 우리의 삶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탄생과 결혼과 출산 그리고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1900년대를 살아낸 데이지 굿윌의 인생이야기는 그 시대의 분위기와 느낌과 어우러져 기인 여운과 울림을 더한다. 기나긴 삶의 이야기는 글의 전개방식과 문체의 유려함에 힘입어 쏜살같이 흘러간다. 

  데이지의 탄생은 비극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한다. 1905년 캐나다 매니토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죽음과 맞닥뜨린 데이지는 그래서 아버지와도 헤어져 어린 시절을 보낸다. 너무나 뚱뚱해서 임신한 것을 몰랐던 어머니, 남편도 이웃들도 임신한 여자의 모습들을 그저 어머니의 평소 풍채로 알았기에 아이의 탄생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 된다. 데이지의 어머니 머시 스톤의 죽음도 함께 겪기에 그날의 그 모습은 사람들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삶의 변화 요인이 된다. 적어도 이웃 여인 클래런틴 플랫 부인은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며 머시의 딸 데이지를 맡아 기르는 선택을 한다. 플랫 부인이 머시에게 한 말처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이 아닌 데이지와 함께 한다. 비록 데이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했을 만큼의 시간이었지만, 더 많은 세월이 지나 클래런틴은 데이지의 시어머니가 된다. 더더 많은 세월이 지나 결과적으로는 데이지를 선택하며 떠난 남편을, 며느리인 데이지가 찾아 나서는 운명이기도 하다.


여자의 삶이란 가슴 아래에서 약동하는 생명을 느끼지 못한다면 양배추 한 접시만도 못한 거라우. 보살필 아이가 있다는 것,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기까지 지켜본다는 것, 그게 사랑이지. 우린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신 앞에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을 영원토록 사랑할 거라고 서약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낳은 피붙이라우.


  또다시 생활환경이 바뀌게 된 데이지의 생이다. 태어나서 아버지라 부를 만큼 결코 가까워보지 못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그리고 결혼하고, 결혼식과 함께 남편의 죽음을 맞게 되는 미망인의 삶. 1927년 스물 두 살의 데이지는 이로써 사람들로부터 확고하게 불행의 이미지로 덧씌워진 채 정의된다. 그러니, 데이지가 자신의 인생에서 제 존재에 대한 의구심으로 뿌리를 찾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는 것일 게다.


단 하나의 극적인 사건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에 무성했던 엉겅퀴 덤불이 깨끗이 사라질 수 있다니, 실로 부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보다 갑작스러운 반전이라든가 스릴, 사건을 단순하게 정리하려는 절박함에 가능성을 두고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데이지 굿윌 호드의 신혼여행에서 생긴 비극은, 그 반전이 너무나도 괴이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한창 뻗어 나가는 인생의 평범한 겉모습을 흐리게 만들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원래 그녀의 인생은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조용하고 온화한 것이었다.


  ‘어머닌 살아오는 동안 행복하셨어요?’

  데이지의 딸은 이런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니, 데이지의 생에선 사랑이 있고 결혼이 있고 출산이 있다. 그렇게 삶은 행복했던 순간도 그렇지 않은 순간도 함께 뒤범벅이며 데이지의 인생을 끌어 왔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데이지의 친구들과 데이지의 자녀와 손주들 역시도 태어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갑작스레 이혼하고 또다른 사랑을 찾고 결혼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생은 누군가와의 만남이 자리하는 부분이 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로 인한 상실감이 인생을 지배하는 또다른 감정이기도 하고. 여기 데이지의 아버지 카일러 굿윌이 자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은 아내로 인해 석탑 쌓는 일에 몰두하는 것, 돈을 잘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에게서 버림받은 매그너스 플랫이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며 오랫동안 백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내며 가지는 감정, 남편을 잃은 데이지가 칼럼을 쓰면서 일에 몰두하며 상실을 달래는 시간들.

  먼훗날의 내가 과거를 돌아보듯 삶을 생각해보면 평범한 어느 날의 기억보다 어떤 사건 중심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기 마련’이고 그 페이지 속에 평범한 웃음과 평온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생을 살고 한 여자가 죽음의 순간에 있다. 그래서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언제든 삶의 여정이란 현재가 아닌 순간이면 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여전히 미망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어서일까.

 

그녀는 역사적 우연 때문에, 경솔함 때문에, 무지 때문에, 기회와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오랜 생에 단 한 번도 다음과 같은 스릴 넘치는 모험을 경험할 수 없었다. 유화, 스키, 항해, 알몸 수영, 에메랄드 보석, 담배, 오랄 섹스, 피어스, 물침대, SF, 포르노 영화, 종교의 무아경, 트러플, 키르슈, 할라피뇨, 베이징 오리, 비엔나, 모스크바, 마드리드, 그룹 세러피, 전신 마사지, 굶주림, 훈장, 견책 등등.


  생각해 보면 여전히 이런저런 이유로 해보고 싶다하면서도 해보지 못한 일들이, 전혀 해보려고 도전해보지 않은 일들이 있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스릴 넘치는 모험’에 대한 경험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면. 그래서 사람들은 그토록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밑줄을 그어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면 생은 좀더 행복에 가까워지는 걸까. 글쎄 행복이라는 것도 너무나 추상적이고 막연해 보이기도 하면서 온전히 어떤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인생이란, 뭐든 뒤범벅이라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과 죽음의 순간 돌아보는 행복이란 다를 것이라고, 내 인생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쨌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황홀한 순간들, 살아볼 만한 인생으로 기억될지 어떨지 모르게 내 인생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정말 황홀한 순간들이 있었나요? 살아볼 만한 인생이었나요? 이를테면 어떤 그림이나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거나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을 읽으면서 세상이 갑자기 팽창하는 느낌, 그러면서 동시에 완벽하리만큼 순수한 어떤 핵으로 응축되는 그런 느낌을 맛보신 적이 있었나요? 제 말뜻을 아시겠어요? 모든 것이 갑자기 딱 들어맞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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