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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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필요없을 때가 있다


빛 혹은 그림자-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에드워드 호퍼는 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다. 뉴욕에서 태어난 호퍼는 어릴적부터 자신이 생활하고 눈에 익은 도시의 풍경을 주로 그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가장 ‘미국적인 정서’를 잘 표현하는 작가라 불리고 있다. 도시와 교외의 풍경, 그의 그림에서 미국적인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사람들이, 평론가들이 얘기한다는 것은 역시 미국이란 나라는 도시와 고독과 한뜻 각진 삶이 가장 미국답다는 얘기인가.

  에드워드 호퍼는 1882년 태어나 1967년 사망했다. 그의 생애로 보건대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시가는 대공황과 전쟁이 휩쓸던 시기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상처의 시기였던 그때 호퍼는 그림속에 자신이 살고 있는 주위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사실주의 작가라고 하지만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실적인 느낌보다 몽환적인 느낌이 더 든다. 호퍼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대표적인 스릴러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이라고 한다. ‘기찻길 옆집’ 이나 ‘이른 일요일 아침’ 등의 작품 풍경이 영화 사이코에 나오는 배경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호퍼는 화가인데도 그림보다 이름만 들었다. 아마도 여러 책들 속에서 언급된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 게다. 현대 사실주의 화가이지만 교과서로 미술책에서 배운 적 없는 작품은 기억에 남았을 리 없다. 생각해보니 호퍼의 그림은 오히려 이 책을 읽음으로서 보게 되었다. 실로 이름만 알고 있는 화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셈이다. 유명한 미국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 순간은 소설과 함께, 이야기와 함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소설들을 여러 권 읽었지만 스토리가 이야기가 남는 작품이 있는데 이 책, 「빛 혹은 그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이 남았다. 호퍼의 그림을 본 적이 없어서일 지도 모르겠고 호퍼의 그림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를 써내려간 이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를 보면서 어떤 한 장면을 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치 어떤 그림에서는 그것이 그냥 풍경일지라도 하나의 모습일 뿐인데도 마치 어떤 사건의 현장인 것처럼 소설가가 그린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기도 했다. 나라면 이 그림에서 이런 것이 떠올려지고 느껴졌을 거라며. 그렇기에 소설보다 호퍼의 그림이 남는다고 말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소설들의 탄생의 중심이 호퍼의 그림이었기에 호퍼의 그림에 나 역시도 집중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너무 그림과의 연결고리를 선택하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나 역시도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림을 묘사한 장면을 찾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글들이 호퍼의 그림에, 이미지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패턴을 가진 호퍼의 그림에서 여러 생각의 얼개를 풀어나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화가이든 소설가이든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리라 본다. 호퍼는 지극히도 말이 적은 내향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만큼 소설가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았을 지도.

  히치콕도 그렇고 이 소설집을 기획한 로런스 블록도 범죄 스릴러의 거장이라 한다. 참여한 작가들이 범죄와 미스터리 스릴러를 즐겨 쓰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호퍼의 작품에서 이렇듯 범죄와 미스터리와 스릴러 작가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호퍼의 작품에서 기인한 것일까. 가장 미국적이라는 호퍼의 작품, 기획자의 영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여한 작가들의 특성과 그림에서 파생된 이야기의 전개를 볼 때 호퍼의 작품에서 ‘어둠’의 기운들을 많이 보는 모양이다. 아니러니하게도 호퍼는 그의 작품 속에 빛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도시에 생각보다 빛이 참 많이 감싸고 있구나 느끼게 된 호퍼의 그림. 도시인의 고독을 화폭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들의 고독을 빛이든 조명이 언제든 감싸고 있는 호퍼의 그림들이었다.

  때론 어떤 것을 보며 나홀로 상상하는 맛이 더 즐거울 때가 있다. 막상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호기심과 걱정을 안고 있다가 막상 그 이면을 알아보고 난 후에 밀려드는 허무함이 조금 자리잡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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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폴 서루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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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 서도 버리지 못하는


세상의 끝, 폴 서루, 2017-07-11.


  끝. 더구나 세상의.

  세상의 끝이란 말에는 쓸쓸함과 적막함 그리고 희망과 불안, 절망이 버무려져 있는 느낌이다. 세상의 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한 곳을 배경으로 펼쳐진 『세상의 끝』. 제목 자체에서 책을 집어 들고픈 이 밑도 끝도 없는 끝에 대한 이끌림이 여행 작가 폴 서루의 소설집 『세상의 끝』.  50년간 세계를 여행하고 많은 여행서를 낸 폴 서루의 여행이 곁들여진 소설집에서도 이 느낌은 묻어난다. 여행기가 아니라 소설로 묶어낸 이야기는 완전한 가공은 아닐 것이고 사는 동안 여행을 하는 동안 보고 느낀 것들이 담겨졌을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 코르시카 섬,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런던, 파리, 독일 등 많은 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지역적 특성을 잘 묘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그곳에 대해 생생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행을 일상을 벗어남이라고 얘기하지만 일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충격이기도 하다. 소설속 인물들은 그러한 충격속에서 살아간다. 원치 않는 낯선 땅에서 살게 되거나 삶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듯이 살아간다. 어쩌면 ‘지역’이 ‘낯섦’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라는 삶에 대한 태도가, 인식이 충격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터전에서 길들여진 삶을 향한 인식, 문화의 차이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무시못할 것이니까.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새로운 곳에서는 어떤 일탈이든 모험이든 감행하려 하는 것도 극과 극이지만 모두 같은 원인에서 발현된 것일 것이다. 끝, 세상의 끝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그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혼란들.


“프레디 이모, 제가 문화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그건 저 반대쪽에서 받는 것 아니야? 가령, 나이지리아에서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든가 마멀레이드 잼에 개미가 들어 있다든가 아니면 초가집에 물이 새거나 할 때?”

“우리 초가집은 절대 물이 새지 않아요.”

“물론 그렇겠지.”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오직 팔렁이들이 하는 얘기겠지만, 분명 네가 네 가족들 사이에서 더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플로이드.”

   

  「야드 세일」의 이모와 조카의 대화를 들으며 나 역시도 이렇게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봤다. 문화충격이란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에서 느끼는 것이지 문화적 우월감을 전제에 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생각했다. 어쩌면 특정한 문화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할 때 ‘그토록 문명과는 동떨어진 미개한 문화인 줄은’이라는 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흔히 쓰는 문화충격이 어떠한 경우에 자주 쓰이는지를 떠올리면서 낯선 곳에서 느끼는 문화의 차이를 항상 서구의 시각과 삐딱한 시선을 두고서 평가하고 있다라는 생각들이 들었다. 폴 서루의 소설집에서도 혼란을 느끼는 이들의 마음 속에도 이러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기에 혼란과 외로움, 적응하거나 동화되려 하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끝’을 그토록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는 그 도시에 모든 것을 제공할 의향이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여행자란 모름지기 나이 들면서 매력을 잃은 미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국의 땅이 추파를 던지다가 차버려서 여행자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고국에서는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 위험이 적다. 그곳의 규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우아하게 처신하고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집으로 갖고 돌아갈 로맨스와 추억거리를 만들어줄 예측된 모험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낯선 곳에서의 일요일은 가장 지독한 지옥이었다.


  열린 마음을 가졌다 말하지만 사실은 놓치 않으려 잔뜩 쥐고 있다면 들어올 틈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보다 보면 이 소설집에서의 끝이 주는 쓸쓸함과 황량함, 그 고독은 서정적인 기분이 가득한 듯 보이다가도 결국엔 잔뜩 고립된 사고가 주는 황량함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의뭉스럽게 보이지만 마냥 헛웃음이 날 정도로 위선적인 생활속에서 살아오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삶이기에 어쩌면 어느 곳에 있더라도 황량한 끝에 서 있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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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너가의 남매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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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예술, 그리고 불행


타너가의 남매들, 로베르트 발저, 2017-06-28.


  산책과 눈밭 하면 어느새 로베르트 발저가 떠오른다. 자신의 작품에서처럼 크리스마스 아침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된 로베르트 발저는 그의 작품마다에서 걷고 걷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추위가 지배했던 겨울, 밤새 소복하게 쌓인 눈밭에 처음 남기는 발자국에서 근엄한 고독의 느낌이 드는 것은 발저가 남긴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발저의 첫 장편소설 『타너가의 남매들』에서도 걷는 일은 이어지고 있다. 눈쌓인 어느날, 길에서 쓰러진 한 예술가의 마지막 또한 나타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하는 이 소설엔 타너가 다섯 남매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만 마치 혼자만의 생각처럼, 독백처럼 내뱉어지는 이야기가 소설에 가득하다. 그 말하기의 중심엔 타너가의 막내 지몬이 있다.

  지몬은 서적상, 간병인, 변호사 사무원, 대규모 무역상사 직원 등등 수시로 직업을 바꿔가며 거처를 옮기며 살아간다. 늘 의무에 충실한 지몬의 형, 장남 클라우스 박사의 눈엔 이 모든 행동이 마뜩치 않다. 의무에 충실하지도 못한 나는 처음엔 클라우스 박사의 눈이 되어 지몬의 행동의 이유엔 어떤 괴팍스런 연유가 있는 것인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몬은 일을 구함과 그만둠에 있어서 언제나 당당했고 단순히 ‘하기 싫어서’가 행동의 이유가 아니었다. 지몬이 말하는 ‘지금 이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직장인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당하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일과 대우를 받을 때, 그리고 그 자신이 그 일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 지몬은 그 이유를 밝히고 일을 그만두었다.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며 누구라도 고용되어 일하기를 원하는 당신네 사무실들에서 젊은 남자의 발전은 기대하지 못하지요. 확고한 월급을 받는 것과 같은 혜택 따위 안 누려도 그만입니다. 그런 거 있으면 저는 영락하고, 어리석어지고, 쓸개 빠지고, 꽉 막힌 사람이 되거든요.


  젊은 청년 지몬은 일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형제들의 경제적 도움을 거절하면서 방랑하며 살아간다. 그 여정에서 형제들을 만나기도 하고, 누군가와 마주하고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가족과 인생과 삶에 대해 지몬은 이야기한다. 그렇게 지몬의 삶에는 지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족일 때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인물들, 특히 여인들이다. 그들에게 지몬은 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제 삶에, 제 가족과 형제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지몬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지몬을 연민하고 응원한다. 지몬의 이야기에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온갖 삶의 비의들이, 고독과 절망들이 연민들이 묻어난다. 어쩌면 끝없는 방랑이기도 한 그의 걸음에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간절함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모두 다섯이다. 특히 지몬이 사랑하며 따르는 형 카스파는 풍경화가다. 이 소설 속에서 크게 두 삶이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남 클라우스 박사로 나타나는 성실하고 의무에 찬 도시적이고 기계적인 삶과 카스파로 대표되는 방랑과 고독이 가득한 예술가의 삶으로 말이다. 카스파를 비롯하여 눈밭에서 스러져간 시인 제바스티안, 카스파의 동료화가 에르빈 등, 이야기속에서 유독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예술가의 표상처럼 생애 자체가 흔히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재능이 많았지만 정신병원에 있는 지몬의 셋째형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리하여 예술과 더불어 불행에 관해서도 열띤 견해가 펼쳐진다.


불행한 예술가는 불행한 왕과 같은 거예요. 자기가 재능이 없음을 아는 게 얼마나 영혼 깊숙이 고통스럽겠어요.


그는 제가 더 진지하게 예술에 임하기를 바랐지만, 저는 대꾸했지요. 예술을 행할 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 흥에 겨운 열성 그리고 자연 관찰이 필요할 뿐이라고요.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한 과도하고도 신성시하는 진지함이 그 일에 가할 수 있는 해악, 또 가할 수밖에 없는 해악에 대해서도 그에게 주의시켰습니다. 그는 제 말을 정말로 믿었지만 그가 움켜쥐고 있던 요지부동의 진지함을 내던지기엔 너무 나약했어요. 그후 제가 떠나왔지요.


  불행한 예술가들의 일상의 삶과 그리고 마지막을 보며, 과연 예술적 재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불행이란 말이 예술가들에게는 필연인 것처럼 예술적 영감을 위한 밑천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얼마나 많고 강하던가! 불행이 아름다움을 위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하지만 불행이 반복된다면 불행이 발판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불행한 삶일 뿐인 것을. 그렇기에 “미래를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갖고자 한다, 미래라는 건 현재를 갖지 못했을 때나 있는 거”라는 말이 와 닿는다. 미래는 늘 희망에 대한 의지의, 기대의 관점이었던 것 같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결국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족, 불안과 불행이라는 현실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판도라 상자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판도라 상자가 재앙만을 쏟아내었던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가장 큰 절망이자 불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불행, 재능, 인생, 형제, 고독, 예술 등등에 관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토해내는 지몬을 따라 여러모로 생각을 덧붙이며 깊이 잠기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들이 조금 가라앉게 하지만 가만히 앉은 채로 지몬을 따라 생각의 방랑을 이어가는 것은 즐겁다.    


말 난 김에 덧붙이자면 잃어버린 것, 지나간 것이 그토록 값어치 있는 것도 전혀 아냐. 왜냐면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보거든, 너무 추하고 악의적이라며 자주 폄하된 우리의 현재에서 나를 매혹시키는 이미지들을 엄청 많이 본다고. 그리고 두 눈에 넘치도록 널린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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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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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황금방울새, 도나 타트, 허진 (옮긴이), 은행나무, 2015.6.


  도나 다트를 알게 된 것은 『황금방울새』가 퓰리처상 수상작이었기 때문이다. 수상작이라는 홍보 덕분에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이후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 연이어 번역·재출간된 것을 보건대 역시 공신력있는 상의 위엄이 작품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도나 다트는 과작 작가로 10년 간격으로 세 작품을 출간했다. 작년 번역출간된 『작은친구들』을 도나 나트의 최신작인 줄 알고 읽었건만 도나 다트의 최신작은 『황금방울새』다. 이 책을 읽고서 도나 다트를 알게 되었지만 도나 다트에 대한 인상은 강하게 자리잡았다. 읽을 작품도 얼마 없는 작가인데도 도나 다트의 신간을 기다린 것은 두 작품에 대한 인상 이외에도 작가 자체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을 거다. 어쩌면 이것도 출판사의 홍보 전략 덕분일지도 모르겠다만.

  도나 다트에 대한 수사는 ‘천재 작가’로 시작한다. 고전의 작가들에게서 이 수식어를 종종 보기는 했지만 현대 작가들에게 이런 수식어가 있었던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거침없이 ‘천재 작가’로 불리는 도나 다트에 대한 궁금증이 그리고 작가의 기이한 성격의 묘사가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언뜻 작가의 소설 『비밀의 계절』 속 등장인물의 성격들을 모두 조합한 캐릭터로 느껴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면서 날카롭고, 냉정하고 이지적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비밀의 계절』의 느낌이 강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작가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다.

  이런 강렬한 작가의 소설 『황금방울새』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연을 쫓는 아이』가 생각나게 했다. 작가의 전작 광기가 많이 빠진 느낌으로 삶에서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소년이 등장하기 때문이었을까. 이 소설은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실제 그림 <황금방울새>를 소재로 하고 있다. 횃대에 발이 묶인 갈색의 새 한 마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명화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이나 그림의 장면과 같은 모습이 묘사되는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그림을 소지한 상황에서 시작되고 그림의 내용보다는 소유한 상황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술관 폭탄 테러로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열세살 소년 시어도어 데커는 우연히 손에 쥐게 된 그림과 함께 미술관을 빠져나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엄마를 잃은 소년 시오는 친구 집에 맡겨지면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된다. 소년 시오의 성장의 이야기는 사고의 기억과 상실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방황하고 방랑하는 시오의 이야기는 그날 폭발한 미술관엘 가게 된 것이 전시된 황금방울새 그림을 엄마가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안다. 비가 오기 때문에 미술관엘 들렀기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그가, 학교에서 흡연으로 정학을 당했고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는 것이 먼저임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모두가 찾고 있는 명화의 절도범이라는 죄책감과 불안, 두려움까지. 그리고 불행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시오를 사랑이 아닌, 돈을 이유로 함께 하려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등장까지. 소년 시오는 미국인들의 반항하고 방황하는 전형적인 십대들의 모습 그대로 술, 마약, 도둑질에 빠진채 살아간다. 악의가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그저 한없이 흐느적거리는 그런 상태로 말이다.


반항. 공허하고 헛되고 견딜 수 없는 삶. 내가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나도 없다. 운명을 먼저 한 방 먹이면 어떨까? 책을 불 속에 내던지고 끝장내면 어떨까? 현재의 공포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내 안에서 비롯된 공포만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경험적인 공포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은 충분히 있으므로 약을 두껍게 늘어놓고 흡입한 다음 행복하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고결한 어둠, 별들의 폭발.


  미술관 폭발 현장에 있던 어떤 노인이 죽기 직전 잘 지켜달라며 부탁한 그림을 마치 엄마의 분신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시오의 그림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명화 황금방울새를 찾기 위한 미술관과 언론, 경찰의 움직임도 지속적이다.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사이의 대립이 예술품 암시장과 얽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린 소년 시오의 상실감과 좌절이 시오의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흥미롭다. 왜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작가가 <황금방울새>를 선택했는지, 그림의 내용과 이야기의 상관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바꾸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다시금 그림을 보면 홰에 갇힌 방울새의 모습에서 소년 시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황금방울새가(다른 그 어떤 새도 아니고 오직 이 새가) 잡히거나 잡힌 채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파브리티우스가 볼 수 있는 어느 집에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새는 왜 자신이 그토록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상상하기로는) 소음에 깜짝 놀라고, 연기와 멍멍 짖는 개들, 음식을 만드는 냄새에 괴로워하면서, 술주정뱅이와 어린애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 더없이 짧은 사슬에 묶여 날지도 못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라도 이 새의 존엄성을, 아주 자그마한 용감함을, 솜털과 연약한 뼈를 볼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조차 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새. 세상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새.


  ‘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시오가 미술관 폭발 현장에서 맞이한 운명의 순간에 그림을 안겨준 노인이 한 말이다. 미술관 폭발로 인해 삶의 변화를 겪게 된 시오에게 초록색 초인종을 누르는 일 역시도 삶의 변화를 바꾸는 숙명이 된다. 황금방울새의 운명처럼 시오가 살아가고 있다면 누군가는 그런 시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다. 불행 가운데에서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인연 중에서도 초록색 초인종이 울린 후 만나는 이들이 시오의 또다른 인생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들일 지도 모른다. 물론 초인종을 울려야 알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은.

  묶인 발을 풀고자 한다면 그들의 손을 붙잡는다면 시오의 생이 또한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들은 단한번으로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지속적인 애정이 필요한 일이다. 비극의 상황 속에 빠지는 것은 충격적 사건을 경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타개하도록 이끄는 존재가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장기의 청소년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약물에 탐닉하고 나락으로 빠지는 전형적인 일탈과 방황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들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은 늘 애정어린 구원자라는 전형적인 등장이 필요하다. 삶에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마음을 돌려줄 것은 언제나, 지속적인 애정으로 이끌어 줄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자신의 불행에만 몰두하던 마비 상태를 벌써 몇 년 전에 벗어나 있었다. 아노미와 의식의 소멸, 관성과 마비 사이를 오가며 나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몰랐을 뿐 그 사이사이에 작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다정함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다정함이라는 말 자제가 무의식적으로부터 떠오르는 것과 같았다. 병원에서 수많은 디지털 기계들 사이로 목소리를, 사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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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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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행복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저, 문학동네, 2011.


  잭 키보키언은 ‘죽음의 의사’로 불린다. 실존인물로 1999년 2급 살인혐의로 8년 2개월간 복역 중 2007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존엄사를 더 이상 방조하지 않겠다”가 가석방 조건이었다. 박사는 1987년 디트로이트 지역 신문에 ‘죽음 상담가’ 광고를 내고 1990∼1998년 약 130명의 존엄사를 도우며 환자와의 상담 장면을 촬영했다. 커트 보니컷은 이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책으로 엮었다. 기자가 된 커트 보니컷이 잭 키보키언 박사의 도움으로 사후세계 경험을 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내용의 이야기다.

  인도주의자로서 작가는 인도주의를 “훌륭한 시민정신과 보편적 품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인도주의 실천의 한 방법으로 글을 쓰며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사후에 어떻게 되든 우리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기자 커트 보니것이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러한 결론으로 가는가. 커트 보니것은 셰익스피어, 아돌프 히틀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 아이작 뉴턴, 공상과학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인들과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애견을 지키려다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건설 노동자 살바토레 비아지니를 만나서는 개를 위해 죽은 기분을 묻는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베트남전쟁에서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오늘 천국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역대 최고의 예지력과 영향력을 갖춘 공상과학 소설 [프랑켄슈타인,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썼습니다. 그때가 1818년이었으니, 1차 대전이 그로부터 딱 일 세기 후에 일어났군요. 그건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화염방사기와 지뢰, 가시철조망처럼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온갖 발명품이 사용된 전쟁이었습니다.

 나는 메리 셸리가 우리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민간인과 어린이에게 투하한―그리고 또다시 그러겠다고 약속한―원자폭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부모인 윌리엄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남편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그와 그녀의 친구인 존 키츠와 바이런 경에 대해서만 열광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질문만을 할 커트 보니것이 아니다. 비비언 핼리넌이라는 “화려한 태평양 연안 가문의 여주인”이라 불리는 죽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가는 화려하다는 뜻을 알아낸다.


이젠 암호가 풀렸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화려하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외모가 아름답고 품위있고 부유하지만, 사회주의자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들은 얼마나 “화려”했을까요? 비비언의 변호사 남편인 고 빈센트 핼리넌은 부동산 투자에서 번 돈을 짊어지고 1952년에 진보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사람이란, 심지어 캘리포니아에서도 얼마나 익살맞고 귀여워해질 수 있는지요?

이렇게까지 익살맞고 귀여워질 수 있습니다. 빈센트는 노동운동 지도자 해리 브리지스를 목청 높여 변호했다는 이유로 육 개월 형을 살았습니다. 해리 브리지스는 매카시즘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된 사람이었지요. 비비언은 1964년 인권을 옹호하는 시위에서 숙녀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삼십 일 동안 감방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작품을 직접 쓴 게 맞느냐는 질문을 하는 등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그저, 궁금한 것을 묻고 그들이 살아 새전에 한 일들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시켜 묻는다. 단지 그들이 지금 현재 살아 있지 않다 뿐이지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면 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죽어서 내세에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이러니와 유머가 가득한 짧은 인터뷰를 보면 작가가 선택한 인터뷰이가 성인이나 영웅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히틀러나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죽인 제임스 얼 레이,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을 곡괭이로 죽인 칼라 페이 터커도 있다. 이렇게 스무명이 넘는 인터뷰이들과 인터뷰하면서 위트와 유머들을 동원해 작가는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알렉스 삼촌이 특히 인간 일반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 점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하다는 걸 도통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삼촌 자신은 즐거울 때 즐겁다는 걸 인정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무더운 여름철에 우리는 사과나무 그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곤 했다. 알렉스 삼촌은 하던 말을 멈추고 불쑥 이렇게 말했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지?”

나 역시 느긋하고 자연스러운 기쁨이 밀려올 때면 큰 소리로 외친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지?”


  그러나 역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행복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순간순간의 작은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터뷰 과정에서의 위트와 유머들이 유쾌하게 다가온다. 때론 책을 읽는 순간,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바탕 웃고 또 한바탕 사회모순에 대해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사후세계로 간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안타깝게도 사후세계로 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준 닥터 잭 키보키언도 훌륭한 인터뷰어 커트 보니컷도 현재에 없다. 사후세계에 있다. 이들을 만나서는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말들을 듣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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