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비밀의 계절 The Secret History, 도나 타트, 이윤기 (옮긴이), 문학동네.

  [2015 출간 비밀의 계절]

  온라인을 휩쓴 실시간 검색어를 따라가다 본 사진들 때문에 여전히 멍하다. 수많은 사람이 나와 같을 테니 온라인이 들끓고 있는 것일 테다. 얼마 전 인천초등생여아사건도 있었으니 더욱 더, 극악무도한 ‘청소년’에게 분노하면서 ‘소년법’ 폐지를 청원하는 목소리가 폭발하고 있다.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것이 표출되는 시점이 지금인 모양이다. 이제, 변화가 있을까?

  이 집단의 ‘어린’ 학생들이 추구하는 것은 뭘까. 두려움이 있었던지 처벌을 받을 것인지를 아는 선배에게 물어보는 행동에서는 지독한 생각없음과 극악성에 또한번 놀란다. 시뻘건 피가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함께 한 다섯이 본 것은 과연 무얼까. 처음 벌인 일도 아니라고 하는 이 행동에서 그들이 추구한 것은 뭘까. 모자이크된 상황에서도 가해자로 추정되는 아이의 시뻘건 입술색깔이 눈에 띄었다. 그것과 피해학생에게서 흘러내리는 시뻘건 피는 너무도 대비되어 보였다. 그들 머리속에 차지한 생각들은, 지배한 생각들은 과연 뭔가 생각해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폭행에 대한 놀라운 기사들이 뜨고 있어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인천초등생살인 범인들과 이번 중학생들의 폭행을 보면서 ‘광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렇게 『비밀의 계절』이 떠올랐는데 사실, 재밌게 읽은 책이라 이 사건과 이 책을 비교하면 책에게 한없이 미안해진다. 작가 도나 타트의 데뷔작인데 작가가 2014년 퓰리처상을 받아서인지 2015년에 또 재출간되었다.

  그리스 고전을 연구하는, 그리스 시대 살았을 듯한 특별한 캐릭터의 향연 속에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추리와 심리 묘사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것엔 항상 호기심으로 인한 매력이 상승되는 법이니까. 작가는 이런 비밀클럽의 엘리트를 동경의 눈으로 보는 리처드 페이펀을 화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이끈다. 미국 서부에서 의대를 다니던 리처드는 의대를 그만두고 동부의 햄든 대학교로 옮겨와 고전어학과에 입학한다. 특히 지도교수 한명에 다섯 명의 학생들로 이뤄진 이 그룹에서 리처드는 동경과 열등감을 느끼며 주변인인듯 주위를 맴돌게 된다. 어쨌든 문학과 철학을 논하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디오뉘소스 제祭, 칼레파 타 칼라(아름다움은 공포다)와 같은 탐미적 책들에 대해 배우고 논하는 것에 리처드는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만족감을 가진다.


그날의 주제는 인간의 자아상실, 플라톤의 네 가지 신성한 광기 및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인 광기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 바로 이러한 광기다. 우리는 종교적 접신 현상이 원시사회에나 잇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버릇이 들어 있으나 이러한 현상은 문명화한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은 우리같이 이성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참으로 착실한 학생들이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언제나 진지하게 토론하고 배움을 실천하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가장 신비스러운 광기, 종교적 접신 현상을 경험하고픈 이들은 실제로 디오뉘소스 제를 실행한다. 광기와 자아상실, 이것에 대한 매혹을 성공한 것에 그들은 만족감을 느꼈을까? 어쩌면…. 우발적인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다면이 아니라 그들의 제의에 다섯명이 완벽하게 참여하여 함께 그 일이 치러졌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신비롭고 초현실적이며 접신 상태에 대한 만족감이 벌어진 사건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자에 의해 소거되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렸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제의로부터 또다른 죽음이 이어진다.

  비밀의 계절은 그리스 시대를 재연하는 듯한 생생한 캐릭터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신비스럽게 만드는데 이것은 리처드가 이들을 우러러 보는 듯한 시선 덕분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다섯 명의 행태들, 그들이 열성적으로 공부하는 내용들은 상당히 매혹적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하는 이성과 광기, 쾌락과 열정, 그리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비교…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생각, 그들만의 것. 그들이 욕망하는 세계는 진정 광기였던가. 광기 앞에서도 이성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까.

  줄곧 ‘아름다움은 곧 공포’라 했던 그들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든 그것 앞에서 전율한다’고 한 이들은 공포와 전율의 세계를 만끽한다. 사건이 주는 결과는 예측가능하고 타당하게도 이들 모두가 죄책감에 푸욱 빠지는 것이다. 다만 죄책감에 빠진다는 것이 잘못을 반성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벌인 일들을 회피하고픈 마음, 그들에게 돈독했던 우정과 사랑은 어디로 가버렸으며 그들이 추구했던 세계는 파괴되었다. 원시적 순수성이라는 게 무엇인가. 원시가 곧 순수의 세계이고 문명이 악의 세계라는 단순한 구조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가. 그들 비밀의 세계가 끝이 나는 순간, 거대하고 신비스럽고 천재적으로 보였던 그들 하나하나의 모습은 순식간에 비이성적인 철부지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작가는 나름 이들의 체면을 유지하긴 하지만, 신비가 사라진 그들을 바라보는 리처드처럼 그들은 땅 위로 내려앉는다. 하지만, 리처드의 선택이 그들과 함께 하는 순간 또한 이야기는 달라진다.


흥미 있는 질문 하나 해볼까? 버니에게는 최후의 순간이었을 터인 바로 그 순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버니("야, 장난이 지나치잖아!")를 보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겠느냐는 것이다. 버니에게 당하고 살던 내 친구들을 돕는다는 생각? 아니다. 공포? 아니다. 죄의식도 아니었다. 사소한 것들이었다. 모욕, 야유, 피해망상, 몇 달 동안 내 머리를 떠나지 않던 것은, 버니로부터 받은 수백 가지의 사소한 능멸, 갚아주지 못한 능멸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그것에서 더도 덜도 아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연민이나 회한의 느낌 없이, 벼랑으로 미끄러지는 버니, 그러다가는 뒤로 넘어지면서 숨을 거두는 버니를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의 틀에 빠진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긴 하지만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생각없음 역시도 마찬가지. 그들이 벌인 수많은 토론들이 공허하게 울리고 있다. 한때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길게 회한과 후회로 살아가는 이들. 역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그랬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렇듯이, 균형과 통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무서운 것은 없다.” 아름답다는 건 잘 모르겠고, 확실히 무서운 것은 틀림없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제도의 균형과 통제가 합당하지 못한 정의로 발현될 때면 그에 대해 반발하며 해방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인간 위주로 인간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성의 균형과 통제를 상실하는 것만은 욕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7 출간 비밀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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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야기


바보들의 결탁, 존 케네디 툴, 2010.


  소설을 읽기 전부터 소설 출간 배경에 대한 놀라운 사연을 소개한다. 그것은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이끄는 데, 소설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작가의 생애와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면 모르겠지만 고스란히 작가와 작가의 어머니가 투영된 소설 『바보들의 결탁』은 화해하지 못한,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모자관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장르를 알지 못하도록 널뛰는 이야기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젊은 아들의 자살 후 아들이 남긴 소설을 들고서 몇 년 동안을 출판사를 찾아 헤매었을 어머니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작가의 어머니, 셀마 툴의 그 행동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아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아들과의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보였다.

  소설 속 이그네이셔스J.라일리가 실제 작가의 묘사라면 나 역시 소설이든 실제에서든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 불협화음으로 살지 않았을까. 확실히 1960년대에도 지금에도 주인공 라일리는 매력은커녕 호감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초록색 사냥 모자를 쓰고 다니는 거구의 몸에 유문 괄약근의 문제로 트림과 가스를 분출하는 외형적 특성뿐 아니라 그의 세계관과 언행 모든 것에서 말이다. 괴짜라고 하기에도 천재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어머니의 눈에는 ‘쓸데없이 많이 배운 백수‘인 아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생계에 전혀 도움되지 않고, 무엇보다 ’하려 하지 않으며‘, 무슨 일에건 독설을 내뱉고 사회의 행태에 대해 증오가 충만한 라일리는 동네에서도 골칫거리 존재로 낙인찍혀 있다.

  이런 라일리를 세상속으로 끌어내어 현재의 사회에 맞는 행위들을 하도록 종용하는 어머니와 라일리의 한판 승부는 ‘코미디 쇼’와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연출한다. 모든 일의 발단은 라일리가 중세시대에 대한 경외감은 충만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현대문명을 상당히 타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세 체제의 붕괴와 함께 혼돈과 광기와 악취미의 신들이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과 배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이라도 할 수 없는’ 라일리의 신념이 사회속에 섞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제발! 지금은 그 우울한 얘길 도저히 못 들어드리겠는데요. ‘용의단정, 근면성실, 책임감있고, 과묵한 분.’ 이런, 맙소사! 뭐 이따위 괴물을 원한담? 미안하지만 이따위 세계관을 지닌 회사에선 절대 일할 마음 없습니다.


   그는 하루종일 방안에 처박혀 그의 세계관과 신념에 따른 글들, 이를테면 “우리의 세기를 비판하는 장문의 고발장”을 쓰는 일에 몰두한다. 이런 아들의 신념과 노력은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다. 더구나 거구의 아들이 먹기는 또 얼마나 먹는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취업한 라일리가 직장에서 벌이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인 건가, 게으르고 모든 것이 불평불만인 자의 괴짜놀음인 건가.


직장에서의 첫날 근무가 끝난 지금, 나는 정말이지 초주검이 된 상태다. 하지만 낙담해 있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패배감에 젖은 기분으로 비춰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 체제와 정면 대결한 것이다. 이 체제의 맥락 속에서 소위 위장한 관찰자이자 비평가로 활동해보겠다는 각오를 철저히 다지면서 말이다. 리바이 팬츠 같은 회사가 더 많이 존재한다면, 분명 미합중국의 노동력은 각자의 직무에 훨씬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노동자는 절대 곤란을 겪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니까.


  웃음과 짜증이 수없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흐름. 그러면서도 씁쓸하고 또 한없이 씁쓸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가 라일리의 행동들이 욕한바가지로 치부하고 잊어버려도 될, 정신나간 돌아이로만 바라봐지지 않는다. 때론 라일리의 어머니에게 더 감정이입하며 극도로 라일리의 행동에 분개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라일리에 대한 동정과 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이 들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라일리 개인의 성향이 어떻든지 간에 그가 몸담고 있던 60년대 뉴올리언스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한창이었고, 거리엔 부랑자가 넘쳐났고 이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경찰들은 매우 재밌는 방법을 총동원한다.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인종차별로 세계는 테러가 끊이지 않고 더불어 난민도 끊이지 않는다. 성차별도 여전하고 노숙자도 증가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더욱 증가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만의 대표적인 ‘문제’가 부각되면서 늘 이어오던 문제는 그대로인 상태.

  이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신념과 세계관에 부합하지 않아도 맞추려고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그 모습은 사실 대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독히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살아가는 것, 살아가려 애쓴다는 것. 그런데 이 모습과는 달리 지독히도 맞지 않는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 살아가려 애쓰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노력해도 절대로 화해되지 않는 타협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작가 존 케네디 툴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책을 읽기 전과 다르게 더욱 연민을 일으키게 된다. 라일리에서 작가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라일리의 어머니에게서 작가의 어머니를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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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섹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절망할 때조차 상냥한


미들섹스Middlesex, 제프리 유제니디스,,민음사, 2004.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작가의 삶이 소설에 투영되지 않을 리 없는데도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게 되는, 비슷한 느낌을 받는 때가 있다. 배경 미들섹스는 작가가 살았던 곳이고 작가의 부모님들 역시 그리스계, 아일랜드계 이민 세대다. 그리고 궁금증은 이것일 것이다. 칼처럼 성정체성의 혼란을 작가가 경험했는가.


나는 두 번 태어났다. 처음엔 여자아이로, 유난히도 맑았던 1960년 1월의 어느 날 디트로이트에서, 그리고 사춘기로 접어든 1974년 8월, 미시간 주 피터스키 근교의 한 응급실에서 남자아이로 다시 한 번 태어났다. 전문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1975년 <소아과 분비학 저널>에 실린 피터 루스 박사의 '5알파환원효소를 지닌 유사 양성인간의 성 정체성'이란 논문에서 나에 대해 읽어 봤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 애석하게도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발생학과 유전학> 16장에서 내 사진을 봤을 수도 있다. 578쪽 키 성장표 옆에서 검은 막대로 눈을 가리고 서 있는 벌거숭이가 바로 나다.


  소설의 흥미는 첫 번째 문장에서부터 시작한다. <발생학과 유전학> 책자에 검은 막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처음엔 여자로 다음엔 남자로, 두 번 태어난 아이. 작가는 칼의 운명에 대해 놀라게 해놓고 잊어버린 듯 1920년대로 거슬러 그리스 산골마을 스미르나에 살던 조부모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의 그리스는 터키(오스만 제국)와 전쟁 중이었다. 화재와 폭동과 대학살에 남매는 결국 바다를 건넌다. 누에고치를 키우며 실을 잣던 할머니, 데스데모나 스테파니디스의 미국 정착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촌 지나가 먼저 정착한 미국에서도 데스데모나는 역사적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경제공황, 금주법과 밀수 시대, 1967년 디트로이트의 흑인폭동… 이런 굴곡진 사건 속에서 데스데모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한 세대를 살아낸다.

  그 가족이 살아낸 곳, 바로 미들섹스(Middlesex)다. 그곳의 한가운데 “역사로 흠뻑 젖은” “비애를 발산하면서도 상냥한” 할머니가 있었다. 칼은 절망할 때조차 상냥한 것이 할머니 세대 그리스 여자들의 특징이라 말한다. 그리고 미들섹스는 ‘괴상한, 과학소설에 나올 것 같은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는 집’이라고 표현한다.

  칼의 표현대로 “물려받은 것은 정말이지 희귀하기 짝이 없는 가보로서 다섯 번째 염색체의 열성 유전자다.” '5알파환원효소결핍증'이라 불리는 이 증상은 염색체가 XY인 아이가 태어났을때는 여성생식기로 보이지만 사춘기에는 남성의 2차 성징이 나타난다.

  하지만 칼은 이것 말고 자신도 모르게 할머니 세대의 특징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절망할 때조차 상냥한’, ‘끙끙대며 신음하면서도 사탕을 건네주는’ 그런 특징 말이다. 그것이 14년 동안을 여자로 자라온 칼, 칼리오페가 이차성징이 나타날 시기에 알게 된 자신의 신체 이상을 겪어 내는 방식으로 보였다. 물론 ‘미들섹스’를 괴상한 집이라고 표현했던 것만큼 자신의 성적 특징과 젠더 상태, 또다른 ‘미들섹스’ 상태의 자신을 괴상하게 여겼을지라도 말이다. 칼리오페로 자라면서 칼은 동성에 대한 애정을 경험하며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실제 진단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 또다른 충격과 혼란에 싸인다. 칼을 진단한 루스 박사는 후천적인 성정체성을 더욱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라온대로 교육받아온 대로의 성을 칼 자신의 성정체성이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칼리오페의 신체적 상태에 대한 수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칼리오페는….


조부모는 전쟁 때문에 고향에서 도망쳤다. 52년이 흐른 지금,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나도 조부모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구하고 있는 거다. 주머니엔 넉넉지 않은 돈을 챙기고 남자라는 새로운 성으로 위장을 한 채 도망을 친다. 배로 바다를 건너는 대신, 여러 대의 차로 대륙을 건넜다. 나는 레프티와 테스데모나가 그랬듯이 새로운 사람이 되는 중이었으며, 내가 막 들어온 이 신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조부모 얘기가 시작된 것은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었다고 할까. 가정과 학교가 아닌 사회에서 경험하는 세상은 또한 달랐다. 그리고 ‘게이들의 중심지, 동성애자들의 중심지’라 불리는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 익명성과 자신과 같은 사람들 속에 숨어 그 세계의 문법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에 대해 신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특성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 젠더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고 할까.

  이 소설은 호기심만 잔뜩 부풀려놓거나 지극히 자극적으로 흐를 수 있는 주제를 작가는 조부모의 인생사, 한 세대의 역사와 접목하여 상당히 재미있고 신비스럽게 보여준다. 마냥 무겁지도 않고 유쾌하고 아이러니가 가득하며 또한 그만큼 덤덤한 문체가 부각된다. 어쩌면 칼리오페와 칼이라는 성정체성 만큼이나 자아만큼이나 혼란스러울 법한데도 칼 자신에 대해서, 상황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여지없이 ‘절망할 때조차 상냥하고’, ‘끙끙대며 신음하면서도 사탕을 건네주는’ 느낌 가득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의 성정체성을 수용하고  다섯 번째 염색체의 열성 유전자의 발원을 찾아가는 이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은 칼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성정체성을 잘 찾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을까.

  성소수자와 젠더에 대한 인식이 갈등과 대립의 분위기가 지속되는 속에서 단체,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칼 혹은 칼리오페와 같은 ‘개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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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만의 평화


오두막 The Shack, 윌리엄 폴 영, 세계사, 2009-03-16.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Top 100’

  전 세계 1800만 부 돌파, 전 세계 46개국 출간


  오두막이 이룬 문구를 적고 보니 뜬금 1,800만에 눈이 간다. 엄청난 베스트셀러라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화 ‘명량’이 1,700만 관객을 기록했다는 생각이 난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녕 영화시장과 도서시장은 격차가 클 수밖에 없는 건가. 갈수록 독서인구가 줄고 출판시장이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에 영화보다 책을 더 즐기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 가득하다. 그래도 내가 죽을 때까진 종이책이 사라지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여전히 쏟아져 나오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더불어 늘어나고 있다. 어쨌든 『오두막』이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은 책이라고 하니 난 좀 덜 사랑하기로 했다.

 『오두막』이 어떤 분위기로 흐를지 예상을 했지만 초점은 두가지였다. 실화인가. 맥이 겪은 사건뿐만 아니라 오두막에서의 경험까지 말이다.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게 만든 힘은 그것이었을 게다. 실화인가, 아닌가.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난 후 사람들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한다. 혹은 의지하고 믿었던 것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로 인해 상처받고 이전과는 다르게 변하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 맥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막내딸의 실종·사망이라는 ‘거대한 슬픔’을 겪고 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변화의 방향은 다르다. 그가 이 거대한 슬픔에서 회복·치유되는 과정이 오두막에서 아니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이라는 신앙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맥과 하나님과의 사이도 벌어졌지만 그는 점점 더 벌어지는 간격을 무시했다. 그는 냉랭하고 무감동한 신앙을 받아들이려 했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 위안과 평안을 얻었다.


 결국 맥은 이 냉랭한 거리감을 없애고 하나님의 안에서 진정 위안과 평안을 얻게 된다. 이 과정이 오두막에서 하나님, 예수, 성령을 만나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깨닫는 형태로 소설은 전개된다. 딸은 잃은 아버지의 절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살인자까지 용서하는 종교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하나님이라면 쉽게 하겠지만 당신은 그렇게 못한다는 뜻인가요? 당신의 다섯 아이 중 어느 셋을 지옥으로 보내겠어요?

당신은 했어요. 당시의 전부를 희생한다고 해도 당신의 아이들을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심판했어요.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었죠.

이제 당신은 파파의 마음도 알게 됐어요. 자기 아이들을 완벽하게 사랑하는 그 마음을.


  종교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지 않아서인지 치유를 위해 나아가는 이들 대화에서 모순을 느꼈다. 왜 이토록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은 꼭, 사랑하는 이의 충격적인 죽음 뒤에 알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슬픔과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종교든 다른 무엇에든 ‘의지’하고픈 인간의 마음이겠지만 나는 이런 사건을 겪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저런 질문을 하고 못하겠다는 답을 듣고서야 “잘했어, 바로 그거야”라는 말을 하는 신이라니…. 내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한들. 이 책 속에서의 용서와 사랑이 맹목적 강요로 느껴졌다.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했던 건 정말 슬픈 일이었어요.

   그런 줄 알고 있었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우리가 전혀 슬프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해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죠.


  이것부터 수용하지 않는 한 나에게 이 테마는 영원한 물음표일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말. 인간이 따지는 가치는 평가절하하면서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맥의 막내딸 미시의 죽음에 대해서도 저 말이 나올 때면 어쨌든 내겐 영원한 미지의 세계구나 느낀다. 신.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일까, 최악일까. 아주 심오하고 깊은 뜻은 취하겠지만 어쩌면 규율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가 인간을 자유롭게, 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아름다운 그 세계속에 머물지 않고 밖에서 들여다보기 때문일까. 내가 아는 종교는 밖에서 보는, 뉴스기사로 접하는 사건일 뿐이니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할 수는 있겠다. 내가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둘러싸고 있는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신을 찾고 싶을 때도 있고 그 안에서 평화롭고 싶을 때도 있지만 실천이 어려운 이유는 이 말의 뜻을 진정 가슴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겐 나만의 오두막이 무언가 생각해본다. 종교가 답이 아니라면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나는 어떠한 방법을 쓰고 있는가.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하고 영혼의 치유를 얻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런 마음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 마음은 왜 이다지도 영혼의 치유를 거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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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체감하다


이브 - 신은 혼자서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윌리엄 폴 영, 세계사,2017-03-02.



 이 책은 나의 한계를 분명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책 표지는 동화같고 따스한 느낌이었다. 빨간 사과 표지도 눈에 띄었다. 이브. 어쩌면 가늠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윌리엄 폴 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작가의 책 『오두막』이 100쇄를 넘어갔다는 광고 문구, 수많은 나라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읽은 책의 작가의 신작으로 역시나 수없이 읽히고 있다는 문구에 그렇다면 너도 그 이유에 푹 빠져도 괜찮지 않겠니라는 생각에 보이는 걸 집어 들었는데….

  책을 덮을까 고민하는 순간 나의 편견은 확정이 되어 버렸다. 『오두막』의 내용까지도 가늠이 될, 수천만의 독자가 왜 생겼는지를 단박에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서류상으로 따지고 보면 무신론자지만 딱히 무신론자라고 하기에는 그때그때 필요한 신을 불러들이는 만큼 열정적인 신앙인이 아니다라고나 할까. 종교 서적을 못 읽어내진 않는데 성경도 자알 읽었고. 이 ‘소설’을 유독 경직된 감정으로만 느끼고 있는 것은 역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인 걸까. 『오두막』까지도 초반 이후엔 팔짱을 끼고 읽었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글이 내 사고와 감정을 분명 흥미있게 자극하고 있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판타지 같은 느낌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지만 소설은 익숙한 창세기의 내용을 작가가 재해석하여 들려주는 성경말씀 같았다. 뒤늦게 종교적인 생각을 빼고 보려 했지만 이미 물든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신은 혼자서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부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작가는 성경을 통해 고착화된 ‘이브’에 대한 새로운 전복,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다고 하는데 딱히, 전복적인 새 이미지인지는 모르겠다. 또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고 망가진, 또한 그만큼 정신 또한 망가진 소녀가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가는,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이라고 짤막하게 줄거리가 요약될 수 있겠다. 이 소녀가 온 몸이 부스러진 상태에서 치유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선택받았다’는 이유다. 왜 그녀만이 선택받아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인류 태초의 증인이라는 역을 부여받았기에 그렇다는데,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사실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텐데도, 나의 무지와 편견이 ‘태초의 증인’이라는 이 역할에 대한 계속된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러니까 사실 단순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메시지를 정확히 아는 책에 대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아가 그 메시지도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렇게 이 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대전제를 쉽게 수용하고 글을 읽으면 편하게 읽히고 감동의 감정을 가질지 모르겠다. 이미 실패한 나는 망신창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 릴리의 모습일 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태초의 증인으로 보호하고 보살피고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보여주면’ 내 심연에서부터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될까.   


   “이 빛을 완전히 직면하면서 동시에 어둠을 볼 수 있어?”

   “전혀요. 어둠이 전혀 없어요.”

   “정확해. 그럼 다른 질문. 어둠이나 그림자는 어떻게 생겨날까?”

   “뭔가에 가로막혀서?”

   “맞아. 가로막을 사람이나 물건이 전혀 없다면?”

   “바로 그거야.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어. 전혀! 빛이신 하나님은 창조된 전 우주를 포용하시지. 아담은 하나님에게 얼굴을 돌리면서 그림자를,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남겼어. 그리고 아담은 자신만의 지배영역을 만들었고 뱀과 피조물들을 자신의 그림자로 끌어당겼어.”

  

 하나님은 빛은 만들었지만 어둠은 만들지 않았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했다는 설명을 하는 대목이 있다. 이 책 전체에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왔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하나님의 창조 얘기를 들은 적은 없다. 묘하게 설득되다가 여전히 논리적인 반박을 고민하는 나를 보면서 종교적 아니 정확히 기독교적일 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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