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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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스토너, 존 윌리엄스, 2015-01-02.


  “평온 속에 숨을 거뒀다.”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생각에 빠졌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평온’하다고 말하는 건 ‘보기에’ 평온함을 말하는 건가, 당사자의 언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저 말은 안락사 기관 창립자의 말이었다. 말한 이의 직업을 연계해서 생각하니 수술 후 의사들이 항상 먼저 하는 말, “수술은 잘 됐습니다”가 떠올랐다.

  한 과학자가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기사를 스치듯 보고 인터넷에 구달 박사가 오르내릴 때  침팬지 박사 제인 구달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사진이 나온 기사를 보면서도 제인 구달 박사의 안락사를 도와준 사람인가 생각할 정도로 오로지 제인 구달만 떠올라서 『희망의 이유』에서 밀림생활 속 영성을 얘기하던 구달 박사의 선택에 생이란 그런 것인가, 노령이란 그런 것인가, 의아함과 쓸쓸함이 고조되었다. 기사를 제대로 읽고 나서야 제인 구달이 아닌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선택’을 알게 되었고 역시 아는 대로만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반성했다. 하지만 제인 구달에서 데이비드 구달로 바뀌었다고 한들 기사를 보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파고속으로 출렁이며 20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며 삶을 끝낼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는 안락사를 실행한 생태학자의 말,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때까지 앉아 있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약간 먹고 다시 앉아 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 을 뚫어져라 보며 소설 속 인물 스토너와 현실 속 인물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조용하게 뒤따르는 시선은 담담해서, 그의 생은 너무 우직해서 보는 이의 마음의 무거움을 길게 가져간다. 스토너의 생을 평범하다고 실패한 생이라고들 말하기에 ‘평범한 스토너의 삶’이란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평범과 실패를 가늠하는 시선이 무얼까 싶었다. 농업을 배우던 그가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알게 되고 문학을 사랑하는 학자로 삶의 길이 바뀌게 되는 일이 소설이라 ‘평범’치 않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은 우리 삶에서 사실 비일비재함에도 판타지처럼 여겨졌다. 무언가에 대해서 강렬함을 느끼고 그것을 선택하고 매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판타지이고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비현실적인 요소가 가득한 게 아닌가. 그의 생이 평범한 것이라면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사람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친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스토너를 향해 “몽상가이자 광인”이라고.

  항상 스토너는 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를 둘러싼 상황들만 휘이휘이 돌아간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지만 1년도 안돼 아내는 떠나가고 교수가 되고 학문에만 열중하지만 학교에서는 늘 밀려나는 신세가 된다. 그것도 친구에 의해서. 그가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혼란을 보냈고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세상에서 고립되며 병에 걸리며 또다른 사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삶에서 스토너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위해서, 분노를 쏟아낸 적이 있던가. 아닌 듯해도 스토너는 표면적으로는 늘 일정한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세상에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는 스토너였으니 미치게 흘러가는 세상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분노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의 심리를 알아가는 독자는 더 연민하고 더 아파하게 된다. 끝이 없이 조용히 죄어오는 이 감정이 판타지가 끝났음을 알리는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공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생의 모든 순간 살아 있었던 스토너의 인생이 이쯤되면 부러워진다. 그리고 스토너는 마지막 순간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한에 대해서도 초연한 스토너는 죽음의 순간 홀로였다. 그의 생의 대부분이 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은 이기적이며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한다라고 생각했으니 끝끝내 이기적이었던 그의 마지막 순간을 굳이 위로하지는 않으련다. 위로는 오히려 내게 필요하다. 그럼에도 슬픔과 쓸쓸함을 느끼는 내게. 돌아볼 내 인생의 나날들에 스토너처럼 생각되지 않을 내 생애들에.

  104세. 마지막까지 말짱했던 구달 박사의 정신과 ‘안락사’라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가진다. 어쩌면 이것은 구달 박사와 같은 신체 상태를 지닌 채이지만 한순간 놓아버린 정신 상태를 지닌 할머니의 모습으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일지 모른다. 어느날이던가,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가 이 나라 근 100년의 역사가 결코 순탄치 않았을진대 그 속에서 살아야 했을 삶이 어찌 평범할 수 있으랴 싶었다. 할머니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의 열정은 어떤 형태였을까. 좋은 것을 느끼고 ‘선택’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속에서 살아내야 했을 삶이라 여겨져 마음아린 삶. 비록 신체는 노쇠하더라도 생을 마감하는 단 며칠전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기를 바라건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은 삶.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회한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남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거나 선택할 상황도 맞지 못한 채로 있다. 가슴에 쌓인 한도 제대로 풀어볼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치매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를 향하 위로일까. 어버이날을 맞아 먼 곳에서 온 자식들은 치매노인의 마른 몸을 보며 눈물바다지만 이틀에 한번 보는 입장에선 어제보다 괜찮은데요라는 말만, 눈물 흘리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분명 스토너를 처음 읽었을 때 오래도록 마음 아렸고 그 여운이 길게 남아있는데 지금은 스토너의 삶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그 여운이 환상이었다 여겨진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한 인간 스토너의 생을 본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어떻게 판타지일 수 있는지를 본 듯하여 현실로 넘어오고 싶지가 않다. 스토너의 인생을 쓸쓸히 여기면서 부러워하고 그의 태도를 동경하면서도 연민한다. 스토너와 내 생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니, 훗날 나는 내 생을 돌아볼 때 스토너처럼 생각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라서 거기에서 오는 슬픔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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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 - 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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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서울, 평양냉면

빛나-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서울셀렉션, 2017.


  왜 서울일까가 가장 궁금했다. 르 클레지오가 친한(?) 작가라는 이야기는 접했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을 때는 그렇게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때 알던 이의 이름인 ‘빛나’라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 소설이 ‘서울’이어야 하는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소설에서 르 클레지오가 저자라는 사실을 지운다면 외국 작가가 썼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묘사는 익숙하다. 다르게 얘기한다면 굳이 ‘서울’이어야 하는 이유나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배경을 뉴욕으로 바꾸고 소녀를 ‘제인’이라 불러도 이 이야기가 가진 차별성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노벨상 수상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썼다는 이 소설에서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익숙해서 그 배경에 대한 묘사에 무뎠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어쩌면 한국이란 나라, 서울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다면 비둘기를 키우는 ‘조한수 아저씨’가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전쟁때 할아버지가 키우던 비둘기 한쌍을 데리고 38선을 넘어왔다. 어머니는 언젠가 그 새들이 고향으로 날아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키우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조씨는 비둘기가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수위로 일하는 아파트 건물 Good Luck! 옥상에서 북에서 온 비둘기 자손을 키운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진 한국. 당연 외국인들에겐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사연들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현재의 한국이 가진 서사이니까. 클레지오는 한국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 분단국가의 상황을,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의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고향의 가족을 향해 날리는 메신저 비둘기들의 여행은 환상적이면서도 마음졸이게 된다. 마침내 그 이야기들이 희망을 전하는 이야기로 대체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인데 생각하게 된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날이라서가 아니라 평화의 상징은 이제 비둘기가 아니라 ‘평양냉면’이라는 글들이 뭔가 벅차오름을 느끼게 하는 날. 이러한 일들이 이어지면 이제 한국에 대해서 서울에 대해서 또다른 이야기가 만들어 질 것이다. 향수에 젖은 그리움 가득한 분위기만을 담지 않은. 비둘기가 날아가며 느껴지는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하며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의 그런 빛깔로.

  조씨의 이야기는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다. 빛나는 전라도 어촌에서 살다 교육은 서울에서 받으라는 부모님으로 인해 서울 고모댁에서 자란다. 고모와 사촌에게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산다. 우연히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을 앓는 살로메, 김세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빛나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으며 살로메는 바깥세상을 보고, 상상의 여행을 한다. 소설은 빛나가 들려주는 다섯 개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명확해 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살로메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수당을 받는 이야기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하는  듯했지만, 이 가상의 이야기들은 빛나가 말하듯 연결되어 있다. Good Luck!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연결이 되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과 함께 윤회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대도시 서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만큼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처하고 있는 상황도 그들 면면도 다르지만 도시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익숙한 이야기가 현실과 환상의 교차로 진행된다. 빛나는, 이 소설은, 빛나기보다 쓸쓸하고 슬프다.


그녀는 내가 가진 욕망과 이야기에 좌우되면서 구불구불한 상상의 세계를 따라 맹목적으로 나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녀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면서 죽음의 시간을 늦추게 하는 에너지가 계속 흐르게 할 수도, 그 흐름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삶과 죽음과 고통과 희망들이 교차하는 살이. 애정이 교차하고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지는 살이. 살로메의 죽음 후에 더 이상 빛나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됐지만 빛나는 “해방될 것 같다”라고 말한다. “현재만 중요하고 산 사람만 중요한 이 큰 도시에서,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빛나에게 이야기는 살로메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빛나 자신의 세상살이를 견뎌내는 힘이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빛나가 찾아낸 이야기들은 죽음을 앞둔 살로메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얘기이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기 힘들었던 스스로를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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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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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외로울 때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문학동네, 2018-03-08.


  출간된 책은 너무도 많고 그중에서는 읽었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다. ‘괴물‘ 소설에 영향을 미친  <프랑켄슈타인> 도 그중 하나다. 어릴적 문고판으로 읽었다거나 다른 책들을 통해 수없이 언급되어 굳이 읽지 않아도 그 줄거리와 내용을 잘 안다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인데, 새롭게 특별판이 나왔다한들 내용이 다를 리 없을 터인데 왜 이번에는 <프랑켄슈타인>에 끌렸을까. 하얀바탕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청록색 커다란 바위덩어리 같은 표지가 눈길이 갔다.

  결론적으로 안다고 생각했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 그러니 괴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는 것도 유혈이 낭자하며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며 날뛰는 괴물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았으니,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몰랐던 것을 보상하는 것마냥 여러 갈래의 생각이 들었고 1818년에 씌어진만큼 고전적인 느낌이 가득했지만 그 고즈넉함이 오래남았다. 이 소설은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백하는 듯이 펼쳐낸다.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이라 이름 붙여졌을지 모르는 이 존재와 작가에 대한 연민이 먹먹함을 자아내는 이유일지 몰랐다. 책이 등장한 순간부터 오랜 세월, 최고의 괴물로 상징된 이 존재에 대한 변명도 해주고 싶었다. 커트 보니컷은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에서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화염방사기와 지뢰, 가시철조망’같은 발명품이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어째서 <프랑켄슈타인> 은 끔찍한 괴물, 악마의 대명사가 되었나. 그것은 이름도 부여하지 않은 창조가가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화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리라 고무되었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열정에 힘입어 피조물을 만든다. 그가 죽음과 시체에서 뽑아내어 창조한 피조물은 바로보기 끔찍할 정도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곧,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을 외면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이 탄생한 순간부터 참혹하고 끔찍스럽게 여겼다. 그가 생각한만큼의 “아름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을 동원하여 끔찍스럽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상상해보려 한다. 존재의 본질은 외형이 되는 것일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회의하며 끔찍스러운 괴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 피조물을 버리고 살지만 그가 창조한 피조물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외형을 창조했지만 이 이름없는 피조물은 추위와 허기를 견디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과 언어를 습득한다. 또한 인간의 정, 따스함, 온기, 애정이라는 감정을 알아가고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받기를 갈구한다. 인간적인 교감에 대한 욕구는 극지방을 탐험하는 로버트 월턴 선장이 보낸 편지를 볼수록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느꼈을 외로움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채워지질 않는군요. 지금 이 순간 그 부재는 무엇보다 혹독한 불행으로 느껴지네요. 저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거릿 누님. 성공에 대한 열의로 뜨겁게 달아오를 때 환희에 동참해줄 이도 없고, 실망감에 시달릴 때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제 생각들을 종이에 적을 수야 없지요. 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소통하는 데는 썩 훌륭한 매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공감해줄 사람이 동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라보면 눈빛으로 화답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에게 괴물로 지칭된 이 괴물은, 어떤 악의도 가지지 않은 채 스스로 학습한 지식을 통해 인간 삶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아간다. 적어도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은 존재였다. 스스로 악한 존재일 수 없다. 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아니 외형적인 이유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된다. 피조물이 눈먼 노인으로부터 어떤 배척도 당하지 않고 지식과 진실한 감정으로 공감과 소통을 얻는 모습은 외형을 보자마자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슬픔과 괴로움 가득한 이 생명체의 절규를 프랑켄슈타인은 끝끝내 외면했다. 오직 외모가 끔찍스럽다는 이유로 악마로 규정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두고서 ‘악마’의 당연한 행태라 수긍한다. 끔찍한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죄의식에 가득 차 방황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자기연민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룰 없는 과학기술을 활용해 생명체를 창조하였지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파괴하려 하지도 보살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많은 나날 죄책감과 자기연민만을 끌어 안은채 외면하고 도망다니는 것이 프랑켄슈티인이 하는 일이다. ‘외롭다’는 말을 끝끝내 외면한다.

  그 생명체는 먹을 것을 달라 하지 않았다. 옷을 만들어 달라 하지 않았다. 집을 달라 하지 않았다.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영혼에 온기를,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좀더 따스함을 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서만이라도 외면받지 않았다면 의지를 가지고 살인을 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피조물은 악마 그 자체였기에 그 존재가 하려는 모든 일들은 악의 행동이 된다. 존재 자체가 악이기에 절대로 믿을 수 없다. 피조물은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고 끔찍해 하는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오로지 자신과 같은 생명체와 함께 하는 것만을 바란다. 이들의 교환조건,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은 끊임없이 인류애,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의를 강조한다. 인류를 위해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다. 피조물이 계속적으로 피조물을 낳을 것을 생각할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인류애, 그가 생각하는 책임감이란 피아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었다.

  악의 본질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하면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이었는데, 어째서 피조물은 삶의 규율과 인간적인 감정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결국 악한 행동이란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혐오는 피조물에게 외로움과 고독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을 더불어 주었다. 애정을 갈구하고 주려 했던 것만큼의 애정을 피조물이 받을 수 있었다면 그가 홀로이 깨달은 지식과 선한 감정의 기운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메리 셜리는 열여덟에 이 책을 썼고, 자신의 아이를 잃었고, 그해에는 인도네시아 자바 군도의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화산재로 인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때에 구상하고 생각했던 이 괴물 이야기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메리 셜리의 삶과 오버랩된다. 괴물과 광기는 이상하게도 이 화산 폭발과 같은 열기를 준다. 뭔가 덥고 습하고 끈쩍끈적함을. 그러나 이 소설은 극지방에서 시작되어 극지방에서 끝이 난다. 해빙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은 얼음의 촉감과도 같은 차분함속에 있다. 광기와 흥분과는 다른 느낌을 계속 갖게 되는 것이 그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음과 시리게 차가운 북극의 이미지가 이 비극적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끔찍스럽게도 외로워하는 이름없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언어를 익히지 않았다면 덜 연민했을까. 그런 지식과 감정들이 살아감에 쓸모없었음이, 효용되지 않았음이 안타까운 것일까. 아예 처음부터 야성의 동물적인 형태로만 존재했다면 쉬이 괴물이라고 악마라고 생각하기가 쉬웠을까. 문득 내 안의 편견과 얕은 지식으로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를, 많은 타인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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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지음, 문동식.엄성은 옮김 / 시그니처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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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중독


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시그니처, 2017-08-09.


  미국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터너 가족의 이야기는 새삼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 돈을 벌기 위해 작은 시골마을 아칸소로부터 대도시 디트로이트로 건너온 프란시스 터너와 비올라 터너 부부에게는 열 세명의 자녀가 있다.

  열세명의 아이가 있는 가정의 이야기는 한권의 책에 그들의 이야기가 다 못 실렸을 정도이다. 그들이 자라온 이야기,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 한 명 한명의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를 제대로 쓰려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터너 하우스엔 이제 누구도 살지 않고 텅 비어있다. 이 텅 빈 집마저도 처분해야 할 상황에 놓인 열세명의 형제들은 집을 처분하는 방법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한다. 집은 시세가 고작 4천 달러지만 걸린 빚은 4만 달러이니 의견은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이 그 집에서 성장하면서 추억하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기에…. 

  심리학자 아들러는 출생순서별 특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그런 아들러가 살아 있다면 이 열 세명 아이의 성격을 분석해달라 하고 싶지만 아들러의 논문에도 열세명까지는 분석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첫째에 관해서는 책임감을 이야기하는데 터너가의 장남 프란시스 터너, 찰스 또는 차차로 불리는 첫째 역시도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한다. 이런 책임 중독을 가지고 있지만 차차가 보기에 터너가의 사람들은 빠짐없이 ‘중독’증상을 가지고 있다. 둘째 프란시스는 음식과 영양과 건강, 부엌 도구에 중독되어 있고, 로니는 오십이 넘어서도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다. 트로이는 성공, 쌍둥이 말린과 비올라는 일, 막내 레일라는 도박 중독이다. 차차의 아내 티나는 어떤가. 그녀는 종교 중독이다.

  이렇듯 다양한 상황에 있는 열세명의 장남은 여전히, 환갑이 된 나이에도 책임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차차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유령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어린 시절 창문으로 들어온 유령에게 펀치를 날리던 차차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나타난 유령 때문에 의사 앨리스에게 치료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차차가 과도한 장남의 무게에 짓눌려 있음을 알게 된다.


프란시스 같은 소년이 유령을 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죄로 너무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땅에 묻었고 어머니는 떠나 계셨다. 두 분 다 잃고 얼마 되지 않아 유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에 바지를 끌어올려 입고 맨발인 유령이. 프란시스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고 사진도 없었기 때문에, 이 유령이 아버지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한없이 깊었던 그였기에 어떻게 다시 찾아왔냐고 물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만일 유령을 간청해서 저세상에서 불러올 수 있다면, 어린 프란시스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차차가 가족 모두가 중독되어 있다고 보는 것처럼 터너가의 자녀들은 모두 삶의 어려움 속에서 가치를 상실한 채 위안을 받고자 하고 있었다. 레일라가 이혼하며 홀로이 사는데 대한 외로움과 힘겨움 속에서 도박을 하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위안을 받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각자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할때 차차는 유령에 매여 있었다. 어린 시절 딱 한번 본 그 유령에게 말이다. 유령을 보고 싸우기까지 한 차차는 가족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또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렇기에 그 자신의 개성이나 특별함을 누리지 못한 상실감이 뒤늦게 생긴다. 다시 유령을 봤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러한 상실감 속에서도 유령을 보았다는 경험이 자신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이었음도 안다.

  프란시스 터너 가족이 전쟁을 넘어 시골마을에서 공업도시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우리나라의 전쟁 전후, 일자리를 위해 도시로 이주하는 과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몰락이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터너가의 가족들 모두 살아가기 위해 움켜 쥔 것과 버린 것들이 있다. 스스로 버리게 된 것들과 타인에 의해 상황에 의해 뺏긴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꿈이다.


흑인들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손해를 볼까 봐 그냥 포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서 백인들이 알아서 뭔가를 하겠거니 믿는 거죠.


  ‘적당히’를 모르는 터너집안 사람들 속에서 차차는 ‘중독이 자신을 망가뜨리게 두진 않겠다’ 다짐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않겠노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자신은 “유령의 존재를 빌어 삶의 목적을 정의할 만큼 불쌍한 인간이 아니다.”

  삶에서 목적의식을 잃고 방황하는 터너집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같은 상실감을 내내 겪는 듯했다. 현재의 상황을 만들어낸 과거의 이야기에서부터 쓸쓸한 느낌이 줄곧 따라오는데 그것은 그렇게 처음부터 부여되어 있던 잃어버린, 놓쳐버릴 수밖에 없던 나 자신을 위한 꿈과 희망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마냥 가족을 위한 ‘희생’을 추켜세울 수는 없음을. 세월이 변해가면서 당연하게 맞닥뜨리는 세대 차이와 삶에 대한 관점이 가져다주는 가치의 차이.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순간에라도 자아를 잃게 되는 일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터너 하우스에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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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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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상식 때문에…


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비채, 2017.


  이 소설이 주는 매력이 크기에 몇 번이나 영화화되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난 매혹당하지 않았다. 소설 도입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긴장감이 존 맥버니의 등장에서 시작되었기에 이미 그를 ‘문제적’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소설은 전개될 내용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할 때에야 갈팡질팡하게 되는데 그때만 해도 ‘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은 ‘존’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전하는 대신 다른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목소리로 존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존에 대해 잘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안됐다라는 생각은 갖기로 했다. 스무살 청년인데다 시작은 전쟁에서의 부상이니까.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악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 안에서 악이 어떻게 쌓여가는지 우리 중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떻게 작은 사악한 생각이 다른 사악한 생각 위에 쌓이고, 마침내 우리 안에 얼마나 엄청난 양의 악이 쌓여가는지……. 그러다가 한순간 뱉은 단 한 마디의 고약한 말이 어떻게 우리 마음속의 방아쇠를 당기는지를.


  소설은 1864년 남북전쟁 시기의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판스워스 여자 신학교를 보여준다. 교장과 교사인 두 명의 자매, 나이가 각각 다른 다섯명의 학생들, 한명의 흑인 노예가 지내고 있는 이곳으로 부상당한 북부 연방군 소속 존 맥버니 상병이 기거하게 된다. 노예해방을 둘러싸고 찬반 입장으로 나뉜 전쟁에서 적지에 낙오된 존은 판스워스 신학교의 구성원들에게 ‘기꺼이’ 도움 받을 자격을 얻는다. 부상당한 다리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구성원들 모두가 존의 회복을 도우며 존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은 신학교 구성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회복해가는 존의 상태를 들려준다.  


“선생님은 아주 행복했던 적이 있나요?”

“있었지. 아주 오래전에…….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단다.”

“무엇 때문에 끝났어요?” 어밀리아가 궁금해했다.

“이성과 상식 때문에.”


  행복이 끝난 것이 “이성과 상식을 차렸을 때”일까, “이성과 상식을 버렸을 때”일까. 신학교의 모두가, 한때 존 상병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행복했다면 그들의 이성과 상식은 ‘어떠한 상태’였던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등장인물 모두에게 이성과 상식이 있는가를 묻게 된다.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피폐한 상황 속으로 인간의 사고를 물고 가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성과 상식은 욕망에 맞추어 존을 해석하고 대한다.

  소설을 덮은 후에 이 책의 제목은 ‘매혹하는’ 사람들이 어울린다 생각했다. “돈과 정조와 목숨까지 그에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두는 단 한사람도 수동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존에게 무엇이든 바칠 준비를 ‘철회’할 수도 있었다. 매혹은 당할지언정 사랑은 하지 않았던 판스워스 학교의 여자들은 각각의 결핍과 상처에 대한 위로를 함께 살고 있는 서로에게서 얻지 못한다. 얻으려 하지 않는다. 내면에 가득한 그 결핍은 공공연한 비밀인 채로 그들 각자를 위치지우고 경계지우는 요인이 된다. 그들은 전쟁 중의 판스워스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존’에게만, ‘존’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 각자의 필요와 욕망이 존에게 전해지는 순간 적지에서 부상당한 존에게 그것은 권력과도 같은 힘이었을까. 벗어날 수 없는 덫이었을까.  


침입자가 지는 경우도 많아. 한 번은 애벌레가 붉은 개미의 보금자리를 공격했는데 애벌레가 개미한테 매혹당한 건지 아니면 잠깐 방심했던 건지, 개미들이 산산조각나고 말았어. 조그만 개미들이 촉수로 그를 어루만지는 듯했는데 얼마 안 있어 애벌레 꼬리 쪽에서 액체 같은 게 몇 방울 나왔고, 개미들이 그 액체를 아주 맛있게 나누어 먹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렇게 애벌레 진액을 다 빨아먹고 나서 개미들이 힘을 합쳐 애벌레를 바닥에 파묻어버렸어. 내 눈에는 나중에 먹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어.


  폭풍이 치고 난 후의 고요가 뭔 일이 있었던가 싶게 일상을 들이미는 고요가 떠오른다. 소설이 끝난 후에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어제와 별스럽지 않은 일상이 되어갈 하루하루가 다시금 비밀과 경계가득한 일상이 흘러갈 것이다. 한때나마 행복한 순간은 있었던가? 이 소설에서 다른 무엇보다 행복에 관한 물음이,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관한 질문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불행을 알게 된 순간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그것은 ”오직 순수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해리엇의 말을 떠올리며 결코 판스워스 학교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는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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