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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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띄우는 말의 무게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12.


  갑자기 마구 점을 보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생년월일만 알려주면 과거의 내 삶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내 삶이 어떠할지를 ‘알려주는’ 영험함을 경험하며 내 미래의 불안을 날려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 그날에 태어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모두 같은 운명일 리가 생각하면서도 신년운세를 클릭하며 난해하고 다의적인 점의 언어를 타로의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선택에 처한 고민을 이리저리 대입하는 재미. 운명은 정해져 있기를 바라는 것인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담은 마음은 분명할 거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속 나미야 잡화점은 그렇게 일종의 ‘점’집 같은 공간이다. 혼자 힘들어하고 있던 이야기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지는 결정의 순간들. 불안과 우울과 걱정에 시달릴 때 누군가로부터 듣는 한마디 위로. 그러기에 보내는 편지, 그렇기에 말하는 내 사연들. 사람들 누구나 고민을 안고 있기에 타인에게 고민을 토로하며 위안을 얻으려 하고 내가 고민을 안고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그 고민에 대한 의견을 전하기도 한다. 해결이 되었을지 내 말로 위로가 되었을지 아닌지 모를 말들. 그래서 또 궁금한 내 말에 대한 결과들. 미래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타인에게 한 조언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것은 그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알고 싶은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판타지와 추리가 가득한 이 이야기의 힘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만 있지 않다. 어째서 나미야 잡화점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도 나미야 잡화점을 그대로 두었는지 왜 먼훗날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창구를 부활시켰는지 타인의 고민을 듣는 이들로 청년 백수들이 등장했는지가 눈여겨봐진다. 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지를. 내가 한 말에 대한 파장을 알고픈, 그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닐까.

  많은 사연들이 이 책 속에 있지만 내가 타인에게 건넨 위로의 말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같은 시간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이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농담처럼 건넨 말에 누군가 상처받지 않았기를. 내가 조금 더 타인에게 그의 삶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심드렁함이 아니라 장난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좀더 조심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9월 13일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을까요. 기탄없는 의견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처럼 가게의 셔터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오랜 동안 비어 있던 가게. 사람들의 고민편지에 상담을 해주던 잡화점에 또다시 옛날처럼 고민이 담긴 편지들이 오기 시작한다. 세명의 청년이 그 가게로 숨어든 그날 밤에. 나미야 잡화점은 시간의 흐름이 바깥과 다르게 흘러가 그 편지들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기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되는 일 없이 꼬이기만 하고 배운 것도 없고 어릴 적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온 세 명은 나미야 잡화점에서 다른 이들의 고민편지에 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인생 또한 돌아보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민을 상담해준 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야.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라도, 어쩌다 결과가 잘 나온 것이라도 우리한테 상담하기를 잘했다고 하니까 정말 기분 좋다.

 

  추리 소설 작가답게 퍼즐조각처럼 얽힌 인연의 고리들과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 내용에 더욱 몰입하게끔 한다. 소설속에 쓰여진 것처럼 많은 이들이 답을 알면서 이미 결정을 지어놓고서도 상담을 한다. 누군가의 충고가 내게 와 닿기까지는 여러 번의 반박을 맞닥뜨리고 의견을 조율하면서 의지를, 결심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 모양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잡화점의 할아버지는 편지를 보낸 이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오래 상담편지를 받고 고민하며 답을 해준 결과 이제는 백지 한 장에 담긴 고민의 글씨까지도 꿰뚫어 본다. 백지 한 장. 인생이란 가끔 이렇게 백지 한 장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사람을 믿어도 좋을, 얘기 나눠도 좋을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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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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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 증후군

남편의 아름다움, 앤 카슨, , 한겨레출판, 2016.


  존 키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남편의 아름다움』의 서사를 채운 앤 카슨의 글은 강렬한 이미지 위에 수려한 시어가 펼쳐진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배신당하고 이혼하는 ‘아내’의 내면의 감정들이 격렬하게 휘몰아친다. 더할나위없는 격렬한 감정은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라는 부제로 인해 탱고 리듬이 얹어져 더욱 강해진다. 운문 형태의 산문 호흡은 각을 세우면서도 유연한 파트너와 함께 한 탱고처럼 숨막히는 떨림을 준다. 이 떨림과 강렬함으로 몰고 간 것은 그저 남편의 ‘아름다움’.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허우적이는 아내의 토로는 미치도록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그에 대한 아내의 언어만큼은 치명적이도록 아름답다.

  열다섯에 만난 아름다운 그 남자. 어머니의 반대에도 결혼하게 된 남자.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그 남자.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 한 남자. 꼭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도 거짓말을 하는 남자. 거짓말을 하는 게 편리하지 않을 때조차도 거짓말을 하는 남자.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안다는 걸 알 때도 거짓말을 하는 남자. 결혼한지 1년 남짓했을 무렵 수줍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정부가 있다며 아내에게 사진을 내밀던 남자. 많은 정부들을 두고 수시로 어딘지 모르게 증발해 버린 남자. 그 중에서도 꼬박꼬박 아내를 찾아 온 남자. 우편으로 이혼 판결을 전한 남자. 그 편지를 받은 중년의 나이까지 그 남자, 남편을 사랑한 여자. 남편을 사랑하게 한 그 ‘아름다움’. 그 모든 부정과 사기와 위선에 고통과 슬픔과 분노를 격렬하게 품고서도 끝까지 아내가 하는 말, “아름다움을 붙잡아라”.

  탐미주의 시인으로 유명한 존 키츠, 그의 시,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 의 마지막 구절은 “아름다움은 진리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이는 그대가 지상에서 아는 모든 것이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이 말을 절절하게 외치는 아내에게 ‘아름다움’이라는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끔 한다. 왜 ‘아름다움’이 진리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나는 많은 아내들처럼 남편을 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

힘이란 어떤 것인가?

친구들이나 가족의 반대는 그걸 더 강하게 할 뿐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지배력을 갖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내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그 어떤 행동에도 아내는 아름다움을 지닌 남편의 지배력을, 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아내는 진다. 기껏해야 그들의 행복(했을지 아닐지 전혀 아닐 듯한)한 결혼 생활은 1년 남짓. 아내의 감정은 그 시간 동안 이미 맹목적으로 세뇌되어 있었던가. 그 어떤 글귀에도 남편의 아름다움을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아름다움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사람 자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여자, 아내에 대한 환멸이 느껴진다. 참을 수 없도록. 미(美)에 대한 기준은 다른 것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개별적이니 아내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설사 나와는 다를지라 해도 내가 뭐, 어쩌겠는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는 중년의 나이에도 그 추억을 안고서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여전히 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아내에게 남편의 아름다움이란 그와 함께 보낸 그 모든 시절일까,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일까. 처연한 스물 아홉 번의 탱고를 듣는 동안 붙잡고 싶은 아름다움이 이토록 답답함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내게는 결단코 아름다움일 수 없게 해야지 생각했다. 남편의 아름다움에 맹렬히 지배당한 여자의 이야기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연상되었다. 아니, 이 부정한 남편에게서 실비아 플라스의 남편 테드 휴스가 생각났다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아, 부정한 남편에게 분노해야 할지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분노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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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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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의 이유

결혼이라는 소설, 제프리 유제니디스, 민음사, 2017.


  “결혼해줘”

  “싫은데?”

  밤새 결혼하기 싫다고 외쳐대다 깨어났을 때 뭐 이런 어이없는 꿈에 시달리나 했다. 머리맡에 놓인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결혼이라는 소설』속 청혼하던 장면이 꿈으로 들어왔다는 걸. 꼼 속의 내 외침은 매들린에게 가 닿지 않아 매들린은 끝끝내 결혼하고야 말았다.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미들섹스』와 『처녀들, 자살하다』를 재밌게 읽었기에 집어든 책은 두 권만큼의 흥미는 덜했음에도 꿈에까지 찾아들 만큼의 인상을 남기긴 한 건가.

  1980년대 대학생 매들린, 레너드, 미첼의 ‘결혼’에 관한 관점과 그들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주된 줄거리다. 각자의 전공에 맞추어 공부를 하고 졸업을 앞두고선 진로를 고민하며 사회에 발을 내딛는 이들 세 청춘의 인생은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 그 많은 생각거리, 고민 중 주요하게 차지하는 것엔 사랑과 결혼이다. 특히 매들린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책속에서 결혼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고 현실에 대입한다. 하지만 매들린이 진중하게 읽은 책들에서 과연 그녀가 삶의 방향을 잘 찾아나갔는지는 모르겠다. 애당초 ‘영문학은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전공하는 학과’라고 생각한 매들린이 취업대신 선택한 대학원 진학 실패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선 매들린이 영문과를 선택함으로써 읽게 된 결혼과 사랑에 관한 책과 문장들이 각인된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을 꿈꾸는 매들린의 애정 대상은 레너드와 미첼이다. 능력 많은 레너드는 또한 많은 매력을 가진 남자로 보이지만 비관적이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미첼은 다소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부각된다. 그런 그이기에 현실에서 부닥친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생각들을 다져나가게 되는 것이 그의 성장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그가 겪은 일들은 당황스러운 것도 많지만 스스로 선택한 여행에서의 깨달음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미첼에게 현실적인 용기를 주는데 주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확고한 매력을 가진 레너드의 저 끊임없는 우울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자신의 길을 잘 알고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듯해 보인 레너드의 정신적인 방황은 그래서 안타까이 여겨진다. 미첼과 매들린의 약간의 생각없음은 현실과 맞부딪치면서 강단있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상처, 그 우울의 깊이가 메꿔지는 것은 현실적인 맞부딪침으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마냥 ‘사랑의 힘’으로 극복된다는 것 또한 환상일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매들린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사랑과 결혼으로 이른다. ‘모든 문장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사랑에 빠지는 것에 관한 책’을 몹시도 사랑했던 매들린의 사랑은, 결혼은 마냥 문장이었을지 모른다.

  결혼이라는 플롯은 어떻게 현성되었는지에 관한 생각을 하게끔 하는 데서 이 결혼이라는 소설에서 내가 눈길이 간 것은 내 자신의 결혼에 관한 ‘부모’의 영향력이다. 매들린도 레너드도 미첼도 그들 인생에서 결혼관을 형성하는데 부모의 개입에서 놓여난다는 게 쉽지 않다. 결혼이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가족의 결합이라는 우리나라의 결혼문화처럼 1980년대의 미국에도 적용되는 부모의 중요성 아니 영향력에 대해 실감했다. 세 명의 인물들마다 그들의 부모는 각각의 방식으로 자녀들의 삶을 살아가는데 개입하고 있다.

  부유한 매들린의 부모는 재력으로 매들린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었고 그녀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끊임없이 충고한다. 레너드가 아닌 미첼을 선택하라고 하거나 사회생활을 원한다면 결혼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매들린의 선택에 한번도 기꺼이 여기지 않은 부모에게 반항처럼 생각의 방향을 달리하며 움직이는 것 또한 부모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너드는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지속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의 우울과 관계있다. 이민자 출신 가정이라는 생각을 달고 있는 미첼까지, 대학생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들 세 사람의 불안과 방황 속에는 이처럼 가정, 부모의 영향 또한 잠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하는 집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안이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불행을 자녀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는, 정서적으로 발육이 정지된 부모 밑에서 자란다면 그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차차 나이를 먹어 갈수록 아버지와 같은 성별을 지녔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자신을 몹시 싫어하는 것 같다면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불안과 방황에 있는 이들이 ‘안정’을 위해 선택한 것이 결혼이다. 결혼이란 두 사람의 결합이니 필연적으로 한명은 남게 되고 결혼을 통한 ‘안정’에서 탈락된 그는 전공인 종교에 힘입어 탈락의 아픔을 달랜다. 그러나 그또한 결혼을 통해 구원받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결혼 플롯과 함께 그 절정에 도달했으며, 결혼 플롯이 사라지면서 다시는 원래의 위치를 되찾지 못했다는 것이 손더스의 견해였다. 인생의 성공이 결혼에 달려 있고 결혼은 돈에 달려 있던 시대에 소설가들은 글을 쓸 만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던 셈이다. 장대한 서사시는 전쟁을, 소설은 결혼을 찬미했다. 남녀평등은 여성에게는 이롭지만 소설 장르에는 해로웠다. 게다가 이혼은 소설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인생의 성공이 결혼에 달려 있는 시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이 쓰던 빅토리아 시대에도 매들린과 두 남자가 캠퍼스를 누비던 1980년대에도 지금 2018년에도 여전히 ‘결혼’이란 인생에서 성공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다만 소설의 주제가 달라졌다. 더 이상 소설은 결혼을 찬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들이 읽는 소설은 현실보다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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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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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는.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달콤한책, 2018.


  이 세계는 1980년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1980년의 테헤란에서도 1980년의 광주에서도.

  소설은 임신 칠개월의 여자가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피해 삼 층으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 뱃속에 있던 아기, 마리암이다.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란혁명을 겪은 마리암은 소용돌이의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여섯 살에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마리암이 두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이 수필처럼 현실을 머금고 소설처럼 환상의 이야기를 머금고 펼쳐진다. 망명한 이들의 겪는 이민자의 설움, 정체성의 혼란을 줌파 라히리는 소설에 담았다. 나라가 달라서인지 같으면서도 다른 결을 보이는 이 소설은 이란이라는 나라를 페르시아로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느낌처럼 조금은 환상문학에 가깝게 느껴진다.

  알라딘과 천일야화를 연결지으며 양탄자가 하늘을 나르고 램프의 요정이 등장하는 이미지속에 늘 신비로운, 동화같은 이라고 생각해버리게 하는 단어, 페르시아. 하지만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다른 나라들이, 특히 서양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페르시아는 이란이고 이란 정부는 1935년부터 국호를 이란이라 부르도록 요청하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신비와 환상은 사라지고 당장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란을 미사일을 떠올리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밤마다 식은땀 흘리며 깨어난 마리암의 아버지가 떠올리는 것처럼, 망자들을 떠올리는 마리암처럼. 마리암의 가족이 떠나온 조국은 그때에도 죽음과 공포가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곳이었기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에 프랑스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지 않기에 마리암은 머릿속에서 페르시아어를 지웠다. 마리암의 성장기를 채운 것은 상상의 이야기를 짓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었다. 허나, 내면과 소통하는 길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이국적인 이야기에 굶주린 청중들 앞에서 이야기꾼이 되어 일화에 살을 붙이고 내 목소리에 가락을 싣는다. 집중하는 작은 눈들이 보인다. 침묵이 홀을 덮는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이겼다.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나만의 작은 세계에 취해 살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자부심의 정체는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낭만저긴 망명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페르시아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에 맞게 가면을 쓴 마리암은 이란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채로 살아온 시절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삶을 힘겨워한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이란의 이미지는 혁명의 순간마저도 환상의 이미지이듯 소비된다. 자신의 조국을 거부하는 마리암에 의해서 잘 다져진 영화처럼 상영된다.  


“마리암, 네가 가진 두 문화를 이제 받아들이렴. 마음을 편히 가져.”

“그게 싫다는 게 아니에요. 남의 상처를 보고 환상을 품는 위선자들에게 화가 난 거예요.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정중하게 내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요.”


  마리암 역시 스스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부추겼고 스스로도 그렇게 하고 있었음을 알까. 할머니는 마리암에게 내면을, 고통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마리이 ‘진짜 프랑스인’이 되어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자 할 때 그때 마리암은 다시 이란을 찾고 페르시아어를 찾는다. 망명자, 이민자의 2세들이 겪는 혼란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대체로 이들을 다룬 소설들은 혼란의 최고 해결은 부모님의 조국과의 화해이며 그곳으로 발디딤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와는 다른 지점이 있다. 마리암의 할머니가 마리암에게 하는 말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할머니’들의 말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명징하게 현실인식을 하게 된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호메이니는 살인자다’ ‘샤 다음에 호메이니라니! 우리의 혁명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는 삐라를 서랍들 속에 넣었다. 아버지는 반정부 활동을 했다.


  아마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까. 소설의 원제는 마르크스와 인형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이란 제목으로는 이미지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예상했기에 작가의 원제목을 곱씹게 된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여전히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금기적인 시각이 있어서는 아니겠지 가장 알맞은 상품성을 위한 선택이겠지 생각하면서 제목으로 인해 책에 대한 무게가 확연히 달라짐을 느낀다.


넌 오랜 세월 끝에 이곳에 돌아와서 근원이라는 바다에 푹 빠져버렸어.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네 인생을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구나. 네 부모는 네가 거기에서 자랄 수 있도록 큰 대가를 치렀어.


  페르시아어를 찾으러 가는 마음의 길은 혼란스러웠지만 마리암은 자유롭다. 그녀는 그녀 세대에서 치뤄야 할 고통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아니 이란 전체의 흔적을 담고 있다. 정치지도자들로 인해 망가진 이란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을 낳기 위해 그들의 부모들은 더 큰 고통을 치뤘다. 이것을 인식하는 한 마리암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마리암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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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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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다

시월의 저택, 레이 브래드버리, 2018-01-22.


  환상적이고 서정적이다.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된 소설의 풍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싶은 기이한 매혹이 있다. 오랜 시간 씌여진 연작소설이라지만 『시월의 저택』이란 제목 아래 일렬로 모이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워낙 기이한 인물들이 드나들기에 이야기의 전개가 느슨하거나 건너뛰더라도 상상력으로 메꾸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상상의 나래가 작가가 제시하는 것에 비해 모자랄 뿐.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시월의 저택으로 모이는 것은 가족들의 파티를 위한 것이지만 그들이 ‘기록’되기 위함이다. 무수한 시간을 사는 이들, 그들은 그러니까 유령이고 오랜 시간 살아 있어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려면 하나의 마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유령들이 머문 공간, 시월의 저택이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을 그려낼 존재로 유한한 인간인 티모시가 등장하는 것이 그래서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넌 찾아온 게 아니란다. 우리가 너를 찾아냈지. 셰익스피어로 발을 싸고, 포의 어셔 가를 베개 삼아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단다. 네 윗도리에는 ‘역사가’라는 쪽지가 핀으로 꽂혀 있었지. 너는 우리에 대해 적으라고, 목록을 만들라고, 태양에서 날아 내려오는 모습과 달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록하라고 보낸 거란다. 하지만 어쩌면 너도 저택이 불렀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너는 글을 쓰고 싶어 조바심치며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성한 빛과 생명의 언약에 대해 말하던 성인 티모시의 이름을 부여받은 필멸의 존재인 티모시가 시월의 저택의 가족들에게 스며들어 어떻게 시월의 저택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가족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록한다. 마음으로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들처럼 되고 싶은 티모시는 유한한 존재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내내 불멸과 필멸, 삶과 죽음이라는 고뇌를 생각하게 이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에 티모시에 동화되어 자유롭게 날거나 타인의 생각속을 넘나들거나 벽을 뚫고 들어오거나 나무 위에 살거나 땅속에 살다가 17년 만에 비가 내리면 물을 타고 흘러나오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뛰어나오기도 하는, 먼 옛날 이미 죽었거나 어떻게 해도 죽을 수 없는 이 유령가족들을 신비롭게 바라보며 동경한다. 결국엔 죽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령 가족들은 말한다. ‘삶을 서두르라‘고. 죽음은 신비로운 것이라고.

 

“삶은 방문일 뿐이며, 잠으로 완결되나니. 나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찾아왔으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거야. 생명이라는 잠 속에서 쉬기 위해 바삐 달려가는 거지. 내년 봄이 오면 나는 누군지 모를 아가씨나 부인의 벌집 속에 깃들인 씨앗이 되어, 생명을 받아 영글기를 기다리게 될 거야.”  


  그들은 분명 떠나갈 것이니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위로처럼 삶에 대해 말한다. 현실과 환상 속을 넘나드는 이야기에서 유령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을 아는 것이 환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유한한 삶을 즐기라고 말하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지도 모른다.


“천국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 도착한 죽은 이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그대는 열정을 알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작은 목소리라고 적어라. 만약 답이 ‘그렇다’라면 그는 천상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지옥에서 불타오르게 될 것이니.”


   그 삶이 행복한가. 영원한 그 삶, 그에 대한 대답은 ‘기억’이란 측면에서 대답된다. 그들은 시간은 무거운 짐이라고 말한다.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수한 전화의 현장을 분노와 파괴와 공포의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또한 이미 죽어 있는 세계일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비하거나 기괴한 능력을 가지고 사는 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의 세상을 넘나들은 그들은 끊임없이 티모시에게 살아 있기를, 죽더라도 살아 있는 삶을 주문한다. 워낙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처럼 펼쳐져 유령가족들, 일족들의 삶에 혹하지만 신비롭다는 것 속에 왜인지 모를 슬픔이라 느낌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주 먼 뒷날 방문한 오래 묵은 집을 바라보는 것처럼 진한 향수와 서글픔이 공존하는 시월의 저택에서 시간이 주는 쓸쓸함을 곱씹게 된다. 이상하게도 책을 덮고 나면 한번의 삶이 훅, 지나가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 사진첩을 들춰보고 있었던 듯이. 아직 남은 삶을 향해 행복의 시선을 돌리고 싶지만 아직 남은 사진첩이 남아 나를 끌어당기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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